김근태 평전/[14장] 정계의 차세대 지도자로 성장하다

2012/10/09 08:00 김삼웅

 

김근태는 몇 해 뒤 경기도 여주교도소에 복역 중인 이근안을 면회하였다.
2005년 음력 설 직전이다. 이 모 전의원의 면회를 갔다가 같은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이근안을 면회한 것이다. 이근안은 전국 수배령에도 그동안 용케 피신하다가 김근태 고문 공소시효가 지난 시점에 비로소 자수하여, 재판을 받고 수감되었다.

여주교도소까지 갔다가 그냥 들어오면 옹졸한 사람, 국민대통합을 주장하면서도 막상 솔선수범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내키지 않았습니다.

내키지 않았고, 무엇보다 고통스러웠습니다. 끔찍한 고문을 받던 그 때가 떠오를 것이 분명해 망설였습니다. 면회를 가야하는 날 오전까지 망설였습니다. 그러다가 교도소 당국을 통해 이근안 씨의 의견을 물어달라고 했습니다. 본인이 동의하면 면회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주석 10)

고뇌하는 김근태의 모습이 역력하다. 감정과 이성, 이상과 현실, 명분과 실제, 국민대통합의 슬로건과 끔찍했던 고문의 실상…. 심한 갈등 끝에 마침내 여주교도소로 그를 찾아갔다.

면회실로 들어서는 이근안 씨를 보면서 당혹스러웠습니다. 여전히 건장했지만 키가 나와 엇비슷했습니다. 고문당하고 욕먹고 그리고 소리 지르던 그때 그곳에서와는 엄청나게 달리….

이게 분명히 현실인데, 안심해도 되는지 약간 불안해지기도 했고…. 악수를 했습니다. 두 손을 잡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왔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내 눈과 마음은 다른 것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눈감을 때까지 사죄한다고 하고, 한참 있다가 무릎 꿇고 사죄한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고맙다고 말했지만 마음 속까지 흔쾌해지지는 않았습니다.

지난날 받은 고문의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개운해하지 않았던 것은 제 머리와 가슴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어떤 질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 사죄가 사실일까? 남영동의 책임자였던 박처원 씨의 치사한 배신에 분노하고, 권력에 의해 토사구팽 당했다고 말하고 있는 저 말속에 짐승처럼 능욕하고 고문했던 과거에 대한 진실한 참회가 과연 있는 것일까? 중형을 받을까봐 충분히 계산해서 나에 대한 고문범죄의 공소시효가 지난 시점에서야 비로소 자수했던 저 사람의 저 말에 대해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주석 11)

김근태는 이근안의 면회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해석되거나, 자칫 정치인의 쇼맨십으로 오해되는 것이 거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며칠 뒤 이 전의원을 면회했던 다른 의원에 의해 이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게 되고, 한바탕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김근태는 이를 대단히 곤혹스럽게 여겼다. “무엇보다 마음이 잘 정리되지 않고 혼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김근태는 이같은 심경과 면회 사실을 <용서와 화해는 신의 영역…>이라는 짧은 글에 진솔하게 담았다.

끊임없이 의구심이 떠올랐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얘기하는지, 또 어느 정도 흘리고 있는지, 저는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 그러나 그것은 신의 영역이구나. 감옥살이를 하고 있고, 기대에는 못미치더라도 사죄를 하고 있는 저것이 분명 현실이다. 저런 저 사람에게 더욱 진실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내 권리를 넘어서는 게 아닌가?”

어제 어느 목사님을 만나 말씀을 들으면서 그렇게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솔직히 조금 아쉽습니다. 그러나 이제 지나가고자 합니다. 정말로 넘어가고자 마음을 추스르고 있습니다.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진정으로 하늘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석 12)

‘용서’와 관련 국제적인 명저를 쓴 엘리스 칩톤은 <용서>의 서문 <용서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김근태의 심경을 헤아리면서 소개한다.

용서는 용서를 구하고 용서받은 사람과 용서를 베푼 사람 모두를 치유한다.
옛말처럼, 받고자(get) 한다면 당신은 먼저 손을 내밀어 상대방에게 주어야(give) 한다.
이 경우 잊어버리고자(forget)한다면 당신은 먼저 용서해야(forgive)한다.
(주석 13)


주석
10> 김근태, <용서와 화해는 신의 영역…>, <일요일에 쓰는 편지>, 70쪽, 샛별D&P, 2007.
11> 앞의 책, 70~71쪽.
12> 앞의 책, 71쪽.
13> 엘리스 칩톤, 강미정 역 <용서>, 3쪽, 무한,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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