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3일 밤 10시, 김수현, 백남은, 고문기술자 김영두 등이 왈칵 몰려 들어왔습니다.
차가운 분노를 내뱉으면서 김수현은 본인을 고문대에 올려 묶으라고 지시했습니다.
11, 12, 13일 오후까지는 순풍의 돛단배처럼 평화를 향하여 순조롭게 나아갔습니다.
협박과 공갈은 끊임없이 들었지만 몸서리쳐지는 고문이 사라져 가고 잇는 나날들이었습니다.
13일 저녁 식사가 15호실 방문턱을 넘어 본인 앞의 책상 위에 놓여졌습니다.
숟가락을 들고 두번인가 먹었습니다.
그 때 복도에 있는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자 정현규가 받고 오더니 '미안 하지만 안 되겠다'면서 밥그릇을 들고 나가버렸습니다.
이 암담함이라니, 이것은 고문을 가하겠다는 선전 포고입니다.
그야말로 혼비백산하여 혼란에 빠졌습니다.
오그라든 채로 몇 시간이 지났습니다.
저녁식사 시간이 5시 반경이었으리라고 가늠되는데, 밤 9시가 넘도록 고문할 기척은 없었습니다.
'아, 이것은 저들의 심리전술인 모양이다. 그들의 말대로 내가 해이하게 되지 않도록 경고하는 것일 뿐이구나.'
그런데 10시에 고문은 또 다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김수현은 본인을 고문대 위에 묶어 놓고는 말했습니다.
"오늘은 금요일이고 13일이다. 무슨 날인지 알겠느냐?"
"악마의 날이다."
"서양에서는 오늘을 최후의 만찬이라고 한다. 너에게도 최후의 만찬 날이다. 각오하라."
고문 기술자는 8일 이후 본인의 사건에 이렇게 깊이 개입해 오지는 않았었는데 13일, 이 날은 팔을 걷고 나섰습니다.
그야말로 '최후의 만찬'이었습니다.
새벽 2시 반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계속하여 가했습니다.
마음은 물론 몸도 도무지 견뎌낼 수가 없게 됐습니다.
고문기술자는 기승을 부리며 고문을 하고, 김수현은 퍼렇게 핏대를 세우며 끊임없이 모욕했습니다.
고문기술자가 피로하여 주춤하니 김수현이 직접 나서서 장치를 들고 전기고문을 꽤 오랫동안 했습니다.
이렇게 김수현이 전기고문을 하는 동안 고문을 하는 고문대 옆 욕조에서, 고문대 위에서, 샤워를 하고 몸을 닦는 기척이 들렸습니다.
그러면서 키득거리고, 왜 그런지 이것이 그렇게 마음에 슬픔과 상처를 안겨주더군요.
나는 아주 초라한 존재로서 미물처럼 짓밟히고 있는데, 그자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백남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머리가 컴퓨터일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중지에 못 당한다. 여러 사람이 의논해서 대처하는 데는 못 이겨.
당신이 왜 이렇게 고초를 당하고 미움을 받는 지 알아? 묻는 말에만 대답하기 때문이야. 그것도 아주 부분적으로....
그러니 고문당할 수 밖에 없어."
그러자 김수현은 "당신은 무슨 당신이야? 개새끼지, 나쁜 개새끼야!? 하고 잔인한 고문을 쉴 새 없이 가했습니다.
본인의 기력이 워낙 탈진해서인지 한번에 오래 고문을 가하지 않고 자주 쉬면서 했습니다.
워낙 꽁꽁 묶어서 고문을 안하고 고문대에 눕혀만 두어도 그 자체가 고통이었으며, 팔, 다리가 금방 저리고 시큰거렸습니다.
본인이 "손, 발에 피가 통하지 않아 저려서 못 견디겠다. 풀어 달라" 는 뜻의 말을 하자,
고문기술자는 "그래, 걱정 말아!" 하면서 전기고문을 왕창 세게 하기도 했습니다.
남영동 고문에서 본인은 한 번도 의식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13일, 이 날은 이미 기력이 다해선지 전기고문, 물고문을 가해도 발버둥질을 치지 못했습니다.
그때마다 고문은 중지되고 찬물을 머리에 붓고, 가슴을 손바닥으로 쳐댔습니다.
점차 아슴프레 해지는 의식 속에서 '아, 이제 내가 정신을 잃겠구나' 하는 순간이 되면 고문은 중지되었습니다.
고문기술자들은 아는 일이었습니다.
13일 고문 이후, 남영동에서는 물론 구치소에서 생활해 나가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몸이 참으로 나빠졌습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밥을 먹고 소화해 낼 수 없었으며, 보행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두통이 걷잡을 수 없는 최악의 상태에 다다른 것은 물론이구요.
어떤 한계점, 분수령이었습니다.
일단 13일 고문은 14일 새벽 2시 반에 끝났습니다.
그러나 김수현은 남아서 박명선과 또 한사람을 데리고 14일 새벽 3시경 부터 3시반경까지 또 고문을 해댔습니다.
이 새벽녘 고문에서 김수현은 또 다시 문용식의 N.D.R.과 학생운동의 배후로서 민추위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자백을 요구했습니다.
사실 고문을 받지 않을 때는 이 부분에 대해서 완강하게 저항을 하고 고문대 위에서 인정했던 것을 엎어버리곤 했습니다.
점차로 슬그머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민추위라는 단체에 대해서는 9월 8일 문용식의 N.D.R.강제 인정 요구시,
민추협은 알지만 민추위는 모르는 것으로 이미 고문자들도 인정해 주고 넘어갔던 것인데 새삼스럽게 다시 등장한 것입니다.
이 의도가 무엇인지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학생운동의 배후로서 구체적인 관계 설정을 얻어내도록 상부로부터 지시받았을 것입니다.
김수현도 약간은 면구스러웠던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한테는 하나도 손해가 아니고, 그냥 그런 단체가 있었다는 것을 듣고 알고 있었다"는 것 뿐이라고.
이것은 본인이 문용식에게 N.D.R.을 설명했다는 강제자백을 요구한 그날 그 자리에 대한 합리적 근거를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며,
학생운동의 명백한 배후로 더욱 확대시키고 키워 가려는 의도임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서도 고문대 위에서는 언제나 항복과 인정, 그것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9월 13일에 가장 중요하게 강제해 온 주제는 민청련의 재정이었습니다.
남은 시간에 다시 배후의 문제가 등장하였고, 마무리 즈음에서는 9월 4일 이래의 총복습이 이루어졌고요.
밤 10시에 김수현과 백남은은 재정 문제에 대해 크게 화를 내면서 소리쳤습니다.
"우리 꼴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이제 김근태에 관해서는 모두 다 밝혀졌고 얘기도 잘 하고 있다. 재정문제도 그렇다고 보고했고,
회의석상에서도 그렇게 말했는데 이제 도대체 무슨 꼴이냐. 상부로부터 호통을 당하고 개망신을 당했다. 각오하라"는 공갈이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미국 워싱턴 소재 동포 신문사 기자인 심기섭씨로부터 송금되어 온 45만원,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를 통해서 민청련에 전달되었습니다.
얘기 못할 것은 하나도 없지만 이미 확정된 결론을 갖고 있고, 그것을 위해서 짜 맞춰 나가는 이들에게 무언가를 얘기한다는 것은
피해의 확산을 광범위하게 만들 뿐임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이 돈에 대해서 다른 정보수사기관인 안전기획부에서 치안본부와 남영동에 물어왔다는 것입니다.
본인에 대한 조사에서 이 점이 밝혀져 있지 않은 것을 본 안기부쪽은 남영동조사에 대한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을 것이고,
그것이 치안본부쪽과 남영동을 당황시켰을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에 대한 격노와 재차의 고문을 가하도록 남영동 상부가 지시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나는 고문 앞에 도리가 없었습니다.
인권위원회 사무국장 권호경 목사를 통해서 돈을 받았다고 인정했습니다.
선의와 민주화에 대한 염원에서 민청련을 지휘하고 그 전달통로가 되신 분들을 지켜낼 수가 없었습니다.
고문 앞에 무언의 약속을 저버린 배신자가 되어 갔습니다.
이 점 때문에 권호경 목사는 본인의 배후로서 위치가 좀 더 탄탄해졌습니다.
재정문제에 관해서 위에 말한 것 이외에도 대라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이 고문자들은 자기들 상부에 보고해야 할 처지였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미 고문자들이나 본인에게 무엇이 사실인가가 꼭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몰리고 있는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하는 점이 더욱 중요했습니다.
서 있는 현재의 처지가 본인과 이 고문자들은 극도로 대립적임에도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니 몰리고 있는 이 고문자들, 그 상부에 본인이 무엇인가를 주어아하는 시혜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고문대 위에서는 이것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한편 자포자기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치명적인 부담이 몇 사람에게만 몰리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이들이 상부 또는 타 기관에 보고하는데 필요한 하나의 각본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몰론 고문자들이 묻고 수정하고 하는 협력 속에서 각본은 점차 완성된 모습을 형성해 나갔습니다.
회원들의 월회비 160만~180만원과 지도위원 40여명의 월 2만원 이상씩 60~80만원이 민청련 재정의 골격이며,
이는 이미 얘기한 것이라 이외의 것이 필요했습니다.
종교계, 재야, 언론계, 법조계 인사등 모두를 포함시켰습니다.
범위를 아주 넓혀 버리면서도 돈의 액수는 되도록 작게 했습니다.
그러나 죄송하지만 몇 분에게는 부담을 지웠습니다.
고문자들은 좋아하면서 "여기서는 아무것도 감출 수 없어. 진작 얘기했으면 고문도 받지 않았을텐데..."라고 하더군요.
그렇습니다.
인간에 대한 고문을 주저하지 않고 사용하면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필요한 무엇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무슨 중대한 것을 발굴해 낸 것처럼, 진리를 깨달은 것처럼 화색이 도는 낯빛을 했습니다.
며칠 후 고문자들은 네 개 은행의 구좌를 갖고 와서 또다시 재정에 대해 물었습니다.
이 때는 고문을 당하지 않았으며 심한 추궁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 네개의 통장들은 민성돈이라는 가명으로 똑같이 만든 것입니다.
회비를 내는 직장 생활인들에게 부담과 피해가 돌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 개의 통장을 만들었고 가명을 사용했던 것이었습니다.
13일, 이날은 김수현의 말대로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었습니다.
그 고문의 강도는 8일의 경우보다 못하지 않았나 싶지만, 이 13일 이후 본인은 결정적으로 균형상태를 잃어버렸습니다.
이튿날인 14일부터 남영동을 떠나는 26일 점심때까지 본인은 밥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국물과 두어 숟가락 정도의 밥을 그것도 오래오래 씹어서 겨우 먹을 수 있었습니다.
요기는 주고 햄버거빵을 우유에 녹여서 채웠고, 즉석라면에 물을 부어서 그 국물과 약간의 라면발로 허기를 메웠습니다.
김수현은 이러한 본인을 보고 "단식투쟁을 하는 것이냐"고 묻더군요.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런 의사가 약간이라도 통할 수 있는 사람들로 내가 자신들을 생각하리라고 믿었던 것일까요.
목은 붓고 쉬어서 말을 제대로 못하고, 머리는 깨어져 나갈 것 같고, 온 몸이 산산이 부서져 나가기 직전 같았습니다.
말하면 쓰고, 베끼고, 손도장 찍고, 또 찍고 하면서 26일까지 갔습니다.
14일부터 19일까지는 평균 4시간 정도 재워 주었습니다.
그 이후는 거의 잠을 못잤습니다.
4일부터 9일까지처럼 앉아서 약간씩 졸았던 것이 전부였습니다.
식사를 주지 않아 고문이 박두했음을 경고하는 심리적 고문, 조건반사에 기초한 압박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 당시 밥의 제공은 고문이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여부의 알림역할이었습니다.
당시 밥은 요기수단이 아니었으니까요.
평균 이틀에 한번 정도씩, 이른바 고문자들이 말하는 본인의 해이함을 방지하기 위해 이처럼 심리적 고문을 해왔습니다.
저녁식사 시간인 5시반부터 대략 10시까지 초죽음이 된 상태로 지내게 되고,
밤 10시가 지나면 이 고문자들은 본인을 위로하면서 라면을 끓여주었습니다.
고문 없이 하루가 지난 것을 고마워하면서, 주는 라면에 콧등이 시큰해지면서 본인은 남영동에서 살았습니다.
미묘한 감정의 혼란상태로 들어가게 됐던 것입니다.
당시 김수현은 정말 표독하게 굴었습니다.
고문도 잔인하게 할 뿐 아니라 직접 자신이 도구를 들고 고문을 했고, 끊임없는 모욕과 학대를 가했습니다.
가톨릭신자이며 최기식 신부를 조사했다는 이 사람은 초기에는 소극적이었으며 무척 난감해 했습니다.
그러다가 8일 이후, 특히 13일 이후부터 본인을 악마같이 학대했습니다.
이 사람은 이러한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안보와 관련된 사건을 주로 맡아오고 있어서 고문은 불가피한 것이다.
이런 사건들에서는 고문을 통해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는 일이 필수적이다.
고문을 가한 것 때문에 자신에게 상처로 남은 것은 없다.
오히려 진실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해 찜찜한 것으로 남은 사건들이 자꾸 떠오른다.
고문을 가하는 것은 상대에게 일찌감치 체념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자백의 결단을 도와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나름대로 합리적이고자 하며 절제하려고 한 사람입니다.
무슨 악마의 화신이나 그 아들인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잠깐씩 하는 생활 얘기속에서, 그 모습에서 검소하고자 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자신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탐욕과 그로 인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국가변란과 폭력적 행위를 한 것은 정치군부지만 생활을 위해서 자신들은 결국 그 힘에 굴복한 것이다.
그러나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서도 그렇게 한 것이다.
광주사태를 민중항쟁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자신은 잘 모르겠다.
그것이 아닌 근거도, 또 그렇다고 할 논리도 제대로 갖고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반드시 절벽은 아니고, 어느 면에서 치안본부 대공과장 신 모씨의 말처럼 약간 대화의 논쟁 비슷한 것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9월 4일부터 8일까지 백남은이 지독하게 고문을 가하도록 지시를 내렸는데 그 역할이 김수현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이른바 구성요건 해당성을 충분히 확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점차 분명해짐에 따라 상부의 요구와 질책이 심하게 가해져 왔을 것이고,
그에 따라 김수현은 자신의 역할을 악독하게 전환시켜 나갔을 것입니다.
나중에는 김수현이 무서울 뿐만 아니라 징그러운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비위가 역해지는 그런 사람으로 느껴져 갔습니다.
고문을 자주 가하면서 본인을 고문대 위에 올려 묶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고문받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이런 저주받을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고문 받는 것, 그것이 어떻게 습관이 되고 어떻게 면역이 될 수 있겠습니까.
초기의 김수현이 상대적인 합리성을 갖고자 했던 것, 그것은 상부의 지시와 요구, 즉 정치적 필요성에 입각한 명령에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김수현의 역할이 바로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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