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오전 남영동에 강제로 끌려 온 이래 단 한숨의 잠도, 한 끼니의 식사도 하지 못했습니다.
별로 자고 싶지도 먹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9월 6일, 점심식사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다 먹지는 못했지만 하여간 고마운 첫 식사였습니다.
나는 이것으로써 저 지옥 같은 고문의 폭풍우가 혹시 지나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물론 자기들 마음대로 국보위인가 하는 곳에서 만들고 뜯어고치고 한 그 법률이라는 이름의 것조차도 지키지 않고,
인간에게 있을 수 없는 고문을 은폐된 곳에서 감행하는 자들이지만
겉으로는 법이라는 것을 지키는 체하려고 하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연행한 지 만 48시간 이내에 구속조치 결정여부를 판단하려 한다고 느꼈으며,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고문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점심을 주고 난 이후 바삐 서두르던 분위기와 서류 준비가 미뤄졌습니다.
자기들끼리 수군대고, 밖으로 서로 불러내서 뭐라고 속삭이고, 분위기도 누그러질 듯하고요.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를 지경이었습니다.
'바깥에서 무슨 양의 움직임이 있는 것이 명백하고 이에 밀려서 주춤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구속방침이 확정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디 추이를 보자'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더니 미국 워싱턴에서 신문 기자로 활동하는 심기섭 씨에 대해서 묻기 시작했습니다.
사진도 가지고 와서 확인하고요.
하지만 이것은 그 무슨 신문 같은 것은 아니고, 혹은 상담 같기도 했습니다.
처음 이 심기섭씨를 물을 때는 사실 매우 긴장했습니다.
'심 선생을 간첩으로 몰고 이 간첩이 민청련 사무실을 방문했고 그 때 본인과 접선했다.
그리고 이 심 선생은 85년 2월 초 김대중 선생이 귀국할 때 미국에서부터 동행한 자다'는 내용 등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속으로 참 캄캄해지더군요.
결국 고문을 통해서 강요하면 또 굴복하게 될 것이고, 묘한 것은 험상궂게 추궁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선일 수도 있을 것이다'고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본인의 연행이 미국에도 알려져 동포사회에서 물의가 발생하고 항의가 제기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도 생겨났습니다.
저녁 7시쯤 되었을 것입니다.
김수현과 백남은은 얼굴에 웃음기를 띠면서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본인 앞의 고정된 철제 책상을 사이에 두고 정면에 김수현이, 왼쪽 옆에 백남은이 앉았습니다.
이것은 무슨 대화나 논쟁자리 같기조차 했습니다.
주로 백남은이 문제를 제기하면 김수현은 듣다가 중간중간에 끼어들어 공박을 했습니다.
논쟁, 특히 민주화의 문제, 정치문제에 관한 논쟁에서 본인이 이 사람들에게 밀릴 리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고문을 당한 후라도 얘기할 수만 있게 되면 내 얘기가 보다 타당성이 있을 것임은 명확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사회의 국민적 열망이고 시대적 대의인 민주화에 관해서 이들이 갖고 있는 견해는 극도의 편견과 편협함에 기초되어 있을 뿐입니다.
어쩌면 극도로 조잡하다고 얘기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견해와 주장을 강력하게 밀고 나아가 국민을 경멸하고 민주화운동을 탄압할 때 오는 반사적 이익,
정치군부의 권력이익을 조잡하게 반영할 뿐입니다.
백남은이 주장하고 요구하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80년 이후 민주화운동이 과격해지고 급진적이 되었다. 특히 학생운동이 그렇다.
이른바 레벌루션(Revolution)의 R을 지시하고 조정하는 사람이 명백히 있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얘기를 해 달라.
아직 자신들이 파악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곧 알게 될 것이다.
자신들의 요구에 응한다면 정부는 어떤 고위층이든지 내가 지정하는 사람을 오게 해서 명백히 약속을 하고 지키도록 주선을 하겠다.
당신을 내보내줄 수도 있다. 만약 내보내준다면 우리들에게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라고 기억됩니다.
논쟁적 성격과 윽박지름이 혼합된 채 1시간여 이상 걸렸습니다.
안 들어봐도 뻔한 얘기이고 신문지상에서, 텔레비전에서, 정치군부가 국민에게 행한 협박에서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상투적인 논리지요.
사실 속은 뒤틀렸습니다. 그러나 좀 힘을 회복해서 나름대로 진지하게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심각한 갈등이 있고 대결 의식조차 없지 않다. 이것은 불행한 일이다.
이것은 정치군부에 의해서 초래된 것이고 정권교체가 국민 의사에 따라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중요한 고비에 다다랐다.
이 고비를 올바른 방향으로 극복해서 국민 내부에 광범위한 합의를 이루고, 이것을 토대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경제 문제, 민생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80년대 민주화를 좌절시키고 광주사태를 감행한 정치군부의 폭력성이 오늘 이 불행의 직접적 계기다.
민주화가 실현되면 지금 대부분의 문제는 완전히 해소될 것이다.
그리고 R이니 뭐니 하는 것은 본래 없었던 것인데 그런 것을 지시하는 개인들이나 그룹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오늘의 상황, 이것이 민주화운동을 촉발시키는 것이다.
나는 지금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 민청련 의장을 그만두고 몇 개월 충분히 휴식을 하려고 했다.
만일 나를 내보내준다면 민주화운동 대열에서 후퇴하겠다'고 얘기했습니다.
이에 대해 백남은은 "보답이 겨우 그 뿐인가"하며 소리를 높였고
김수현은 "지금 우리와 논쟁을 하려는 것이냐, 설득하려고 하는 것이냐. 필요 없어. 이 새끼,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는거야" 하면서
버럭 화를 내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습니다.
9월 7일 본인의 처, 인재근 씨가 치안본부 대공과장 신모 씨를 만나서 항의했을 때 이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에 김근태의 사상을 뜯어고쳐 놓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면서,
가혹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항의에는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 지금 평화적으로 비교 논쟁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논쟁 비슷한 것이 9월 6일, 김수현과 백남은 함께 한 이 자리였습니다.
대공과장 신 모씨의 얘기가 이것을 지칭한 것이라면 혹시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직후 돌아온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전기고문 그것이었습니다.
전기고문 기술자가 들어오고 고문대가 들여지고 이날은 앞에서 기술한 윤재호를 제외한 모든 고문자들이 총 출동되었습니다.
노기등등한 이들은 푸른 빛마저 감도는 듯 했습니다.
논쟁 비슷한 것을 한 것에 대해 화내는 것 같기도 했고, 말에 밀린 것에 역정을 내는 듯도 싶었습니다.
아니면 약간 방심했다가 급습고문을 하여 고문 효과를 극대화시키려는 교묘한 기술적 대치이기도 했습니다.
5일에도 그랬고 6일에도 그런 리듬을 타는 것 같았습니다.
이날의 고문은 포악하고 격렬했습니다.
이 고문담당 기술자는 망나니였습니다.
숨통을 막아 버리고 목줄을 끊어 버리는 인간 백정의 진면복을 그대로 드러내었습니다.
파르스름한 요기 어린 달빛이 감도는 황야에서 작두칼을 휘둘러 대는 미쳐 버린 인간 백정이었습니다.
김수현과 백남은, 김영두 등은 이러한 망나니를 찬양하고 거들어 주고 축하하는 귀신들린 자들이었습니다.
격렬한 전기고문을 길게, 아주 길게 가하여 온몸이 고문대 위에서 오그라들어 버리는 것 같았고,
핏줄은 물론 모든 살이 마침내 다 타 버려 누리끼리한 살가죽과 뼈만 남아 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쉬지 않고, 조금도 쉬지 않고 이튿날 새벽 1시경까지 계속했습니다.
고통을 못 이겨 소리소리 질러 목 안에서는 피 냄새가 역하게 올라오고, 콧속에서는 댠내가 계속 피어올랐습니다.
물고문으로 인해 속이 빈 위는 계속 헛구역질을 해대고.....
처음에 나는 저항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결과는 예정되어 있던 것입니다.
고문자들의 요구에 굴복하는 것, 그것 뿐입니다.
이들에게 살해당할 것을 각오하고 저항을 하지만,
고통과 공포에 짓눌리게 되면 곧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라는 내면의 외침에
-이것은 고문자들의 또 다른 협박이며 유혹이 내면화된 것이지만- 부딪치게 됩니다.
'아,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원통해서 이렇게 개죽음 당할 수는 없다.
내가 저항을 하면 이들은 정말 죽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저 70년대 서울대 법과대학 최종길교수의 경우가 그렇지 않은가.
이 고문자들이 시종 뇌까리는, 심장마비라는 의사의 진단서를 붙이면 자신들은 완전히 발뺌할 수 있다.'
'어디 외상이 남아 있는가'라는 협박이 그렇게 위협적으로 다가올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그때의 얘기를 회상해 보더라도 두려움으로 심장을 두근거리게 합니다.
이런 경우를 닥쳐 보지 않은 사람은, 또 나도 고문을 당하기 전에는 그냥 지나쳐 버리거나 무시해 버렸던 것인데,
그 불행한 일이 이번에 나에게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하는 허약함이 머리를 들기도 했고요.
그러나 사실은 어떠한 두려움보다 전기고문과 물고문, 그것으로 인한 고통
그 자체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사실에 가깝습니다.
이 고문자들의 강제 요구를 인정하는 일이 나 자신을 죽음으로 한 발짝 나아가게 하는 길이더라도
지금의 이 고통을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만 된다면 무엇이라도 받아들이겠다,
이런 잔인한 고문만 아니라면 정말 죽음에 처넣어지는 것, 고문없이 살해되는 것조차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하게 됐고요.
아마 누구라도 그 길 이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을 것입니다.
무협지를 보면 싸움에서 패배하거나 중상을 입은 사람들이 곱게 죽여 달라고,
고통을 주지 말고 빨리 죽여 달라고 말하는 대목이 정말 이해되는 것입니다.
고통, 고문, 이런 고자 돌림은 죽음의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고 죽음의 핵심, 정수인 것입니다.
저 칠흑처럼 어두웠던 일제 치하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고등계 형사들에 의해 불구가 되고, 목숨을 잃고,
윤동주 시인이나 이육사처럼 옥사했던 그 이유가 바로 이런 참혹한 고문이었습니다.
저 지독히도 암울했던 70년대 긴급조치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갇히고, 줄을 이어서 갇히고, 가슴엔 한이 맺히고 슬픔이 쌓이고,
눈물의 강이 되고 분노의 파도가 되었던 그것이 이러한 끔직한 고문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이날도 또 굴복하였습니다.
주제는 문용식씨의 N.D.R.(National Democratic Revolution:민족민주혁명론)과 C.D.R.(Civil Democratic Revolution:시민민주혁명론),
P.D.R.(People's Democratic Revolution:민중민주혁명론)의 인정이었습니다.
초저녁에는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도 더욱 위험하다고 느꼈던, 학생운동과 연결시켜 몰아 때려 버리고자 할 것이 뻔히 예상되는데다가
정말 내가 부담해야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이 짐을 질 수는 없는 일입니다.
거기다가 이것은 도대체 반증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고요.
분명히 고문에 못 이겨 문용식씨가 이렇게 강제 인정한 것이더라도,
물에 빠진 사람이 무엇이라도 붙잡아 같이 물귀신이 되고자 하는 몸부림 그 이상은 전혀 아닌 것임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정말 저항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항할수록 고문은 더욱 흉폭해지는 것이지요.
답은 예스, 그것 하나입니다. 떠듬거리면서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암기하고 또 암기하기를 요구하더군요.
고문대 위에서는 정말 1초에 수많은 말을 외울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 고문대 위에서 문용식씨가 말했다고 하는 N.D.R. 이른바 민족민주혁명론을 공부한 것입니다.
참으로 기막힌 공부였습니다. 잘 외웠다고 칭찬도 받았습니다.
바로 이 날 고문담당 기술자가 고문 도중에 지쳐서 잠시 쉴 때가 있었는데, 그때 본인의 생식기를 가리키면서
"야 이렇게 작은 것도 X라고 달고 다니냐, 너희 민주화운동하는 놈들은 다 그러냐"라는 성적인 모욕도 하더군요.
그 당시 약간 열등감이 자극되기도 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난 그 때 '그게 무슨 문제냐, X이 없더라도 상관없는 일이다.
이 고통과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너한테 그 이상의 모욕과 폭언을 들은들 아무 일 없다' 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이 자가 사내다움을 뽐내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가학적 분위기에서 눈에 띄는 대로 상처를 주는 일련의 행위 중 하나였습니다.
고문이 끝난 것은 이튿날 밤 1시였습니다.
고문자들이 지쳐서 물러난 것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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