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모리스 돕의 '자본주의의 과거와 현재'

 

원심법원이 모리스 돕의 "자본주의의 과거와 현재"라는 책 소유를 유죄로 인정한 것은

현 개명한 20세기 후반의 건전한 사회상식에 위배되는 것이며, 또한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나는 사실 이처럼 점잖게 말하고 싶지 않다.

상스럽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나를 이해해 달라.

이렇게까지 되고 보면 발길로 걷어차 버리고, 서로 침을 퉤퉤 뱉고 돌아서는 편이 피차간에 차라리 솔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슬프고 기가 막히고 놀라서 어질어질 하기도 하지만, 정치군부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우리 사회를 정말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정치군부의 부릅뜬 눈아래 오금을 펴지 못하는 겁쟁이,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린 판사, 검사의 모습이 정치군부보다도 더

인류사회와 민족사회의 발전속도에 저만치 뒤떨어져 있는 집단이 어디에 있는가를 웅변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겠지.


김영학 씨의 증언과 감정서를 유죄의 증거로 한 원심법원의 판결은 수치스런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들으면서, 들여다보면서 절간에 간 색시처럼 얌전하게 공판에 임해 왔던 나 자신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이처럼 오늘날, 도대체 정치적 사건이란 게 그런 재판이란 것이 본질적으로 농담이고 장난임을 이 이상 더 잘 드러내 주는 것은 없으리라.

도대체 '내외 문제연구소'라는데가 아리송할 뿐만 아니라 미안한 얘기지만, 경제학에 대한 소양이 나보다 없음은 물론,

돕의 주저인 "정치경제학과 자본주의", "자본주의 발전연구"의 책 이름조차 잘 모르고, 그 책이 어떻게 다른지는 물론 모르고,

도무지 헷갈리는 이런 사람의 증언과 감정서를 증거로 하여 유죄로 인정하는 이 철면피의 뻔뻔스러움은

역사에 길이길이 남겨져 기억되야할 것이다.


이것은 김영학 씨 개인에게도 괴로운 일이었을 게며 모독이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여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과 3~4일 전에 검찰로부터 감정 부탁을 받은 후

책을 받고 책을 읽고 감정서를 썼다는 이런 주장을 믿어주어야 하는가.

뭐 이것 뿐만은 아니지만, 거짓말과 사기는 쉬지 않고 줄을 지어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단언한다. 이것은 한낱 사기일 뿐이라고.

검찰청에 뻔질나게 불려 다닐 때 나는 담당검사에게 공소제기된 사실에 대해 모두 말했다고 밝혔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공판장에서 한 말 이상으로 자세히 설명했다.

 

돕의 주저에 대해서, 그런 책들이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에 대해서, 또한 문제된 이 소책자가

'자본주의 발전연구'의 한 장을 조금 손대어서 정리하여 강연한 것이라는 것을 검사에게 말했다.

김영학씨는 아마도 그것을 검사한테서 듣고 앵무새처럼 외우려했던 것 같은데, 아주 서툴렀던 것이다.

반대심문의 기회가 왔을 때 분노가 아닌 슬픔이 밀려와 나는 김영학씨에 대한 심문을 포기했다.

그것이 최소한의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과거와 현재'는 물론 '정치경제학과 자본주의'라는 돕의 주저가 근대 경제학의 추세라는 이름으로

합법적으로 출간된 사실을 인정하면서, 유죄를 인정한 것은 법리를 오해하고 위법적으로 판결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것은 나의 법적 이익을 깡그리 박탈하는 것으로 자빠진 놈 한 번 더 밟아주자는 것인가.

이것은 법 앞의 평등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으로 국민으로서의 기본적 권리를 형해화시켜 버리는 것이다.

또한 지성인의 한사람으로서, 경제학도로서 학문의 자유 그리하여 연구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다.

참으려 해도 속이 느글느글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다.


그래서 한마디 하겠다.

하려면 이정도로 화끈하게 오로지임을 보여주는게 마땅할 것이다.

출세를 하라. 출세를 하라. 그리하여 출세를 하라.

 

 

그래도 못다한 말 한가지

 

행방불명된 나의 탄원서에 대하여.


다 아는 바와 같이 1심 공판정에서 탄원서 집필허가 문제에 대해 나는 네번 문제를 제기하였고, 마침내 재판거부 선언에까지 이르렀었다.

집필신청을 한 지 만 40일 후인 2월 5일 오후 3시 반 경에 허가통지를 받았다.


탄원서 집필문제를 가지고 이처럼 격렬하게 싸운 이유는 너무나 분명한 것이다.

나는 '탄원서'라는 이름으로 저 남영동에서 받았던 고문을 낱낱이 밝히고자 했던 것이며,

정치군부는 그것을 체면불구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막아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공판 사이사이에 나는 혼신의 힘을 다 기울여 탄원서를 썼다.

보통 구치소에서 두 부 작성하는 다른 사람의 경우와 달리, 오직 한 부만을 작성하도록 미리 페이지가 매겨진 조사용지를 공급받아 썼다.

나는 그 때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소심해지지 않기로 결심했다.

결국 이것이 행방불명된 것이다.


이제 탄원서 내용을 간략히 얘기하자.
고문준비, 계획은 어떻게 되었으며, 누가, 왜 했고, 어떻게 했으며, 그 때 고문자가 요구한 것은 무엇이었으며,

그에 대해 나는 어떻게 견디고 또 굴복했는지, 그 고문대 위에서 또 아래에서 내 심정은 어떠했는지를 기록했다.

여기서 우선 고문자들의 이름을 밝혀 두겠다.

이 탄원서는 피가 흥건히 고여 있는 기록이다.


총경 윤재호(남부경찰서장),

경정 김수현(전무),

경정 백남은(전무),

경감 장의사 둘째주인(고문 전문기술자),

경위 김영두,

경장 정현규,

경장 박병선,

경장(경북사람) 등


검찰은 피로 적셔 있는 남영동 기록을 증거서류로 제출했다.

공판정에서 고문사실과 그에 의해 강제된 것임을 여러 차례에 걸쳐 고발하였는데도 검찰은 이를 재판부에 제출한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을 개진했었는데 서성 판사는 그것이 피고인에게 불리할 수도 있고 유리할 수도 있다고 했다.

결국 이에 보기좋게 속아넘어갔지만, 나는 이 탄원서에서 남영동 증거서류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서

고문은 물론 그 때 고문자들이 요구한 것을 자세히 기록하며 반박했다.

그런데 이를 절취하여 숨겨버린 것이다.


영화 '25시'에 이런 장면이 있다.

강제수용소 철조망 안에 갇혀 있는 한 지식인이

자신의 신념을 적은 글(아마도 성명서-적절한 이름은 아니지만)을 손에 들고 보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긴장이 고조되다가 보초가 들고 있는 총에서 아무런 머뭇거림도 없이 총알이 튀어 나왔고 그 지식인은 거기서 퍽 꺾여졌다.

종이는 이리저리 바람에 날리면서 땅에 떨어지고 쓰러진 몸뚱아리에서 흘러나온 피로 적셔지고....

그 종이는 어쩐지 그 사람의 입에 물려졌던 것 같은 착각이 자꾸 들었다.

지식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인가.


그렇다. 나는 오른쪽 가슴을 관통당한 채 쓰러져 피 흘리며, 속으로 울고 웃으면서 쓴 것이다.

그런 탄원서가 행방불명된 것이다.

검찰이나 법원 둘 중에서 어디선가 꽉 틀어쥐고 내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재판이 끝난 직후 서성 판사에게 열람등사를 요청하였더니 "이미 발송했다"고 하며 역시 훌륭하게 따돌렸다.

검찰에 가서 확인하니 "서성 판사가 틀림없이 갖고 있다"고 하고....,

시작부터 끝까지 코미디이고, 거짓말이고......


지금 이 탄원서는 어디쯤에서 강철상자 쯤에 들어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나, 아 그러나 이것은 언제 끝날 것인가.


맨 끝으로 고문을 당하며 속으로 통곡하고 지내온 지난 겨울,

이 가막소에서 나는 애정이 넘쳐 나는 수많은 학생, 그리고 버림받은 재소자들의 격려 속에서 다시 되살아났다.

그때 두 겹의 비닐창문을 때리는 북풍에 견디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되뇌고 되뇌었다.

 

내 귀여운 아이들아
느이들 하고 놀아주지도 못하고
애비가 어디 가서 오래 못 와도
슬퍼하거나 마음이 약해져선 안된다
외로울 때는 엄마랑 들에도 나가보고
봄이 오는 소리를 들어봐야지
바람이 차거들랑 옷깃 잘 여며
감기들지 않도록 조심도 하고...

 

 

11. 슈퍼맨이 되지 못한 죄

 

 

나 중심으로 얘기하면 이렇다.

혼란과 당혹 속에 검찰에 넘겨진 세 사람은 각자 자신들의 절박함의 우선 순위에 따라 움직여 나를 검찰에 내주고,

그리하여 법관의 손에 넘겨주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여기엔 아무런 다른 선택이 없던 것이다.

오직 마련된 길을 따라 등 떠다밀려갈 수밖에 없었으며, 누구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검찰에 갇힌 사람들이 부닥치는 문제점에 대해서 얘기하겠다.

우선 고문기관인 남영동 상급기관으로서 갖는 위엄과 그로 말미암은 위협감, 답답함이 가슴을 조이게 만들고

이런 사건이 모두 '괘씸죄'이기 때문에 이것저것 잘 대처하고 따지게 되면 오히려 손해가 되지 않을까 염려 되어

잘 보이려고 아양을 떨고 싶어 몸이 비비꼬일 지경이다.

나보고 '또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고, 또 그 얘기를 수긍할 수 있지만,

'또라이' 같은 얘기, 그러나 그때 내 심정이 그토록 어지러웠던 것을 말해 보겠다


나를 이대로 밀고 나가 결국은 죽이려고 하는가.

합법을 가장한 이러저러한 절차를 밟아서, 그리고는 분업화된 과정으로

아무도 큰 심리적 부담 내지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교살하려고 하는가.

 

저 고문 남영동은 확실히 그런 방향이었고, 이 검찰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도대체 난데없이 KBS 방영이니 연합통신의 기승은 뭐란 말인가.

 

헷갈리고 또 헷갈리고, 돈다.

세상이 돌고, 내가 돌고.

 

나는 검찰의 손에 무릎꿇어 구애하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고 어지러웠다.

제법 딴에는 점잖은 체면이어서 호모 비슷한 분위기를 조성해서는 안된다고 굳게굳게 결심했기 때문에 거기까지 나가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이렇게 차단된 상태에서 검찰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병적인 애정구걸 같은 심리를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죽었다 깨어나도 검찰에서 '피고인은 당시 그렇게 인정하지 않았느냐' 고 준엄한 얼굴로, 노기띤 음성으로 법정에서 꾸짖는다.

담당검사는 이렇게 하여 비열한 거짓말쟁이로 피고인을 입증해 내고, 그렇게 해서 증거가 발딱 일어나고,

판사는 유죄의 심증을 거기서 형성하고, 우습고 웃기고 웃겨서 웃기는 장난이 된다.

이게 모두 두려움에 얼어버린 채 남영동에서 검찰로 왔을 때, 끊임없이 교양있는 검사를 짝사랑하고, 또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혹시 버티다가 재차 남영동으로 끌려가지 않을까 싶어 가슴이 두근반 세근반하며 저려온다.

한편 그래도 끔찍한 고문을 안해서 고맙고 감사하고, 때로는 슬쩍 가족 얼굴을 보게 해주고

따스한 입김이 볼에 닿게 해줄 때 우리들의 검사님은 너그러움의 표상이 되는 것이다.

 

어찌 이 하늘같은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는가.

그것은 오직 배덕자, 패륜아의 짓이고, 인간이면 검사님의 묻는 말에 또박또박 대답하고, 요구와 기대에 알아서 부응해야하는 것이다.


"오호 통재로다. 이것이 올가미구나."


깨닫게 되는 것은 세월이 한참 흐른 다음인 것이다.

때는 이미 지나가 버린 뒤고. 우리들의 눈이 크게 열려 올바로 보게될 때는.

그러나 언젠가 온다.

 

검찰은 남영동 서류를 굳게 믿는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공격적 충동을 기르고 길러 내서 피묻은 남영동 서류조차 별 양심의 가책없이 믿도록 감시는 인도된다.

조종된다.

 

공소유지 의무와 더불어 정치적 사건에서의 기여도에 따라서 정치군부는 평가하여 훈장을 주고 처벌을 한다.

인사정책을 통해서, 검사는 이렇게 해서 검사가 되는 것이다.

 

나도 검찰에서 얘기할 것 다 얘기했다.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더 버틸 마음이,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다만 글로, 조서로 남기지 않았을 뿐이다.


내겐 기적같은 만남이었다.

은혜처럼, 성령처럼, 비둘기같은 성령으로 날아들었던 것이다.

검찰청 청사 그 계단에서 내 처 인재근을 만난 것은.

 

그리하여 김상철 변호인을 만난 것은 나에겐 축복이었다. 구원이었다.

그 만남이 없었다면 나도 틀림없이 남영동에서 두드려서 훌륭하게 만들어 낸 모든 것을 검찰 신문조서에,

자술서에 올리고 손도장을 꽝꽝 찍어댔을 것이다.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던 만남이 발생하여 거기에 기대어 나는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검사의 도발적 언사 한마디가 계기가 되어 화를 낼수있는 기력이 되돌아와준 것이다.


법정에서는 명백히 나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고, 그렇게 이용될 가능성이 충분히 높다고 예견하면서도 진술한 것이 많이 있다.

검찰에서 이미 모두 말했던 것들이다.

그것을 잘라서 얘기하거나 수정 변경하지 않았다.

나는 더이상 째째해지지 않기로 결심했고, 검찰한테서 비웃음을 받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건 자존심이었을게다.

그러나 나는 그래도 법관을, 법원을 믿으려 했고 검찰의 기본적 양심을 믿으려고 했던 시기였다.

어떤 신뢰를 저버리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사실이 너무나 명백하므로 재판에, 그 결과에 아주 자신하였던 것이다.


아, 그러나 재판이 무엇인지 나는 몰랐던 것이다.

아니 재판은 한낱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는, 특히 정치적 사건에서는 그렇다는 소문을,

나의 사전 인식은 아마도 지나친 단순화이고 편견이라고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검사 또는 판사 그 개인들과 은근히 통하고 있다고 믿고 싶은 모종의 분위기, 어떤 관계에 나는 취해 있었다.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분위기, 그리고 거기서 느껴지는 개인적 관계를 확대해서 재판을 보려고 했다.


나는 반쯤 눈이 멀었던 것이다.

참담한 결과가 올 수밖에 없었다.

 

논리학 교과서 첫 부분 어딘가에 나오는 확대적용의 오류를 그래도 뒤집어써 버린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개인적인 관계에서 그 모순은 작고 미미하지만, 좋은 나라인 민주화운동세력과 나쁜 나라인 정치군부 사이 속에서

그것은 아주 심각하고 격렬한 불신과 갈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라는 것을 말끔히 잊어버렸었다.

 

아니다. 그 간극을 사실의 증명격과 지식인으로서 판, 검사들의 양식이 메꾸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인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집단)'라는 책의 어떤 페이지들이 떠오른다.


판사, 검사 중에 개인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정치군부 체제 아래에서 이러저러한 재판을 하는 판사들, 검사들은

주관적 선의와 상관없이 군사독재의 옹호자이며 방위자로서 역할을 틀림없이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대중에게는 마땅히 존경을 바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본래 알고 있었던 그대로가 맞는 것이었다.

사물과 사건 속에 휘말려 어지러웠고 직접성에 노출되어 피곤하였으며, 심약해진 마음때문에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눈을 잃었던 것이다.

단어가 너무 격렬하고 선동적이어서 쓰고 싶지 않지만, 군사독재 지속에 단단히 한 역할하면서도 태연스러운 위선자들은 틀림없이 있다.

이 사건 재판에 관계했던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은 없었는지 자꾸만 따져보게 된다.

그건 그렇고 어쨌거나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본다.

남영동에서 고문에 끝까지 버텨 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5층 15호실, 그 방안에는 죽음의 공포와 그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었고 그렇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굴복하고 말았지만, 다시 그런 경우에 부딪쳐도 역시 무릎꿇겠지만, 누구도 나처럼 당하면 결국 꺾일 것이라고 단정하지만,

만일 내가 끝까지 버텼더라면 나는 거기서 살해되었을까, 아니면 그것으로써 사건은 끝나 버렸을까.


"남영동에서 누가 당신더러 굴복하고 인정하라고 했는가.

더구나 그럴듯하게 꿰어 맞추도록 협조도 하고, 증거가 될 것이라고는 말뿐임을 피차 진작 눈치챈 것이니,

그것을 손바닥 뒤집듯 홰까닥 엎지 못하도록 요리조리 꿰어 맞추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또한 예측 가능한데도 그것에 코 꿰어 끌려간 당신 자신이 잘못한 것이다.

이제와서 고문을 당해서 그랬느니, 어쨌느니 해봐야 다 소용없는 일이다.

딱 잘라서 말하면 그건 당신 사정이고, 그러니 찧고 까불며 나를 원망하지 마라.

그렇게 되면 피차 지저분해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이리하여 나는 깨달음에 이르른 것이다.

그렇다. 모두 내 탓이로소이다.

 

능히 슈퍼맨이 되지 못한 나한테 죄가 있는 것이지, 강제로 정치군부가 가두고 때리고 짓밟고 한 그것은 배경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슈퍼맨이 되지 못한 내 죄가 톡 튀어나와 누구 눈에도 아주 잘 보이도록, 극적 대비가 되도록 하기위해서 고문이 필요했었던 것이다.


어쩐지 시력이 나쁜 판, 검사들이 잘 볼 수 있도록,

그리하여 흔들리는 팔로 꽝꽝 유죄를 내리 찍을 수 있도록 고문을 활용한 것뿐이니까.

내가 오해를 했었던 것이다. 오해, 오해, 해오, 해오....


그렇다면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렇다면 결국 힘에 진 것이니까.


모든 깨달음은 위대할진저!

 

 

10. 문용식, 이을호, 김근태

 

원심법원은 정치군부의 압력과 협박에 굴복하여 민청련을 이른바 이적단체 결성으로 인정하는 등 수치스런 과오를 저질렀다.

원심법원은 사전에 강제적으로 조성된 편견에서 해방되지 못했으며, 사실을 오인하고 채증법칙을 위반하고 심리미진의 잘못을 범했으며,

또한 법령을 위반하여 판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원심법원은 이적단체 결성이라고 하는 부분뿐만 아니라 나머지 모든 국가 보안법 위반이라는 사실을 인정함에 있어서

기본적으로는 저 더러운 남영동 수사기록에 의존했다.

그것을 실체적 진실로 전제하고 인정하는 것이 공판과정에서 은연 중 드러났고,

때로는 편견과 예단에 사로잡혀 유죄를 암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이유는 이렇다.

 

이을호, 문용식, 그리고 최민화씨의 원심법정 중에서 증언과 검찰수사단계에서 작성된 피의자 신문조서,

자술서 등에 서로 모순되는 점이 있다.

이것을 '진실을 은폐하려고 하는 기도'라고 단정했다.

 

그리고 '이렇게 감추려고 하는 사건 해결의 열쇠는 남영동 기록에 준비되어 있다.

더구나 그 기록 내용이 체계적이며 비교적 합리적으로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면 실체적 진실이 이미 훌륭하고 규명된 것이고,

사실상 더 다툴 여지가 없는 것이다'라고 추정한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이처럼 재판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재판은 끝나 있었던 셈이다.

다만 형식적으로 검찰에서 있었던 피의자 신문조서, 진술서에 손도장을 찍은 적이 있었던가를 공판정에서 확인하고는

그것으로 유죄판결을 내려버린 것이다.

이것은 서성 판사가 말한 다음과 같은데서도 엿볼 수 있다.

"이 법정에서 이을호, 문용식, 최민화 등 각 증인에 의해 진정이 성립된 조서, 자술서를 검찰이 갖고 있지 않았다면

기소 제기조차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이다.

"누가 손도장을 찍으라고 했느냐? 원망하지 마라. 그것은 당신들 탓이다"라는 뉘앙스를 가진 것이었다.

혼란과 공포속에서 찍은 손도장, 그것이 이 사건의 증거이자 유일한 유죄의 증거가 돼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문용식씨가 이을호를 물고, 이을호씨가 나를 물어서 확대된 사건이다.

다른사람으로 확대되는 그 사이사이마다 매개 수단이 되었던 것은 바로 잔인한 고문이다.

9월 초 이틀 또는 나흘 정도 차이로 문용식, 이을호, 그리고 내가 차례로 남영동에 끌려갔다.

그곳에서 세 사람은 모두 도마 위에 올려진 생선같은 상태였고, 칼잡이들에 의해 무참하게 회쳐져 버린 것이다.

혹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완전무결하게 짓밟혀져 버렸다.

 

세 사람을 한 곳에 잡아 놓고 고문을 가하고, 고문을 통해 튀어나온 사소한 사실을 확대시키고,

혹시 서로 모순되는 것은 조정, 일치시켰는데, 이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강제되어 획득한 것을 남영동 수사관들은 거듭된 회의를 통해 체계를 잡고,

미진한 부분 또는 비합리적 부분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은 또다시 고문을 통해 보완, 수정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축을 이루었던 것은 상부인 정치군부에서 거듭 요구하고 지시하는 정치적 활동에 적합하도록 하는 것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고문이 단 두차례로 끝나지 않고 열번이나 계속된 이유가 이때문이다.

남영동 사람들의 거듭된 회의와 그에 뒤따르는 지겨운 고문은 수사기록을 점점 더 피로 물들이는 한편,

소위 그 내용을 체계화시키고 풍부하게 만들었으며, 그럴듯하게,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데에 성공했다.

 

남영동에서 나에 대한 부신문관이었으며, 초기에 가장 악질적으로 고문을 지휘했던 백남은은

"당신들이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우리들의 중지에는 못 당한다"라고 말하고 뽐내었다.

남영동 사람들은 조무래기 경찰들이 아니었다.

어찌보면 개인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정치군부의 통치에 반드시 필요한 집단임을 이렇게 증명했다고도 할 수 있다.

 

고문이 가해지고, 계속해서 가해진 데에는 위에서 말한 것 이외에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완전히 그리고 철저하게 세뇌시키고 그럼으로써 부정할 수 있는 심리적 힘이 말살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혹시 검찰이나 법정에서 강제된 것을 번복하거나 부정하려고 할 때는 큰 심리적 동요, 불안, 혼란이 발생토록 한 것이며,

구절구절마다 서려 있는 고문의 기억, 그 고통과 공포가 생생하게 되살아나도록 한 것이다.

 

나는 고문대 위에서 이미 강제하여 배운 것을 암기하고 복습하고, 또 되풀이해서 공부했다.

그럼으로써 성적이 좋다고 칭찬도 받았고, 머리가 뛰어나다는 찬사도 여러번 들었다.

고문대 위에서 고문을 받으면 극도의 고통과 공포, 혼란이 일어나고 모든 현실이 무의미해지는데,

한가지 펄펄 살아나는 것은 고문자들의 음성, 그 요구이며 그에 응답하는 나의 암기능력, 명령에 순순히 따르고 모방하는 능력이었다.

고문대 위에 묶여 있을 때 들려왔던 고문자들의 목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이었고,

그에 회답하는 나의 떨리는 음성, 순명하는 마음가짐은 저 하나님 명령을 귀기울여 듣는 아브라함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나만의 일은 아니었고, 이을호씨, 문용식씨 모두 마찬가지였다.

고문은 내가 훨씬 더 가혹하게 여러번 받았지만, 개인의 인격동요와 붕괴에 미친 영향은 두 사람 모두 극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이을호씨 경우에는 정신분열적 혼란이 격발되었으며, 문용식씨는 아직 어린 나이어서 그 충격에 도저히 견녀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공황상태라고 할 수 있을까.

 

인격의 결정적 동요와 붕괴상태에서 검찰로 넘어온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실이 올바르게 밝혀지고, 자신을 제대로 방어한다는 것은 애초에 글러버린 것이다.

고문과 협박, 세뇌로 야기된 정신적 위기상황이 구치소로 넘어오고 검찰에 송치되었다고 해서 며칠 새에 진정될 수는 없다.

고뇌와 공포로 물들어 있는 사항에 대해서 검찰이 신문할 때 이성적으로 대답하고 대처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더구나 이을호씨와 문용식씨 그리고 나는 각각 서 있는 위치에 차이가 있어서 자신에게 위험하고 절박한 것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으며,

또한 이러한 위기와 위험에 대처하는 능력에도 차이가 났다.

때문에 남영동에서 기막힌 솜씨로 조합되고 조립된 것으로부터 일정하게 이탈하며 들쭉날쭉한 결과가 있게 된 것이다.

남영동은 본래 일정하게 삭감될 것을 예측하고 미리 크게 부풀리고 공갈쳐 버렸던 것이다.

 

송치된 이후에서 이을호씨에게는 완화된 형태이긴 하지만 여전히 위험한 외적 현실이 덧씌워져 압박해 왔을 것이며,

남영동 고문에서 이미 격화되기 시작했던 내적 현실의 위기, 정신적 갈등과 분열은 오히려 시간과 더불어 심각해져 갔을 것이다.

이처럼 내외적 현실의 위기적 상황이 서로 상승적으로 작용하여 상태를 악화시켜 나갔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이런 자기 주체성, 동일성의 위기로부터의 탈출,

그리하여 인격의 붕괴를 회피하고 중지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그 무엇이 있었겠는가.

나머지 모든 것은 마땅히 주변적이고 부차적이었으며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아마도 문용식씨는 반국가단체로 몰려고 하는 공격으로부터 민추위를 방어해 내고,

이것과 관련된 여러 사실을 분명히 해내는데 혼신의 힘을 쏟았을 것이다.

반국가단체로 몰릴 경우, 그것은 문용식씨 자신은 물론

민추위 회원들의 안전에 거의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를 가하게 될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것만 사실대로 검찰이 받다준다면, 아마 나머지는 얼마든지 양보하고 그냥 인정해버릴 수 있었을 것이리라.

 

검찰수사 단계에서 이처럼 나에 관한 사항은 이들 두사람에게 당시 한낱 주변적인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부차적인 것은 주어 버리고, 절박하게 중요한 것은 시급하게 획득해야 했을 것이다.

당시 이을호씨에게 중요했던 것은 가중되고 있는 강제수사와 공격적 질문과

더불어 닥쳐오는 그 위험으로부터의 해방, 아니 적어도 차단이었을 게다.

정상적인 사람도 한달 이상 완전히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강제수사를 받는 경우에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이상심리에 빠지게 마련인데,

지독한 고문을 받고 정신분열적 갈등과 혼란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을 이을호씨의 경우,

끊임없이 밀어받치는 검찰 강제수사의 중압을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처음 얼마동안은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던 것 같은데, 시시각각 심해져가고 있는 자신의 내적 현실에 모든 주의를 빼앗기기 시작하면서

외적현실로부터 철수해 갔던 흔적이 검찰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보인다.

마침내 검찰의 요구와 기대대로, 이른바 이적단체 결성을 내주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의 의미와 무게를 거의 느끼지 못했을 것이겠고.

 

문용식씨는 민추위를 반국가단체 결성으로 인정하라는 강요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견디면서, 다른 것들은 얼마든지 주었을 것이다.

나와 관련되었다고 하는 것은 - 판시 사실2중 나항 - 당시 문용식 씨에게 나머지 중의 나머지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문용식 씨 공소장에서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는 사실로 봐서도 그렇다.

검찰 수사가 뭐 시장의 장사처럼 주고받는 것은 아니고, 그래서도 안되겠지만 경험한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정치적 사건에서 특히 근래에 생긴 이사건, 또 비슷한 사건에서처럼 증거란 게 모두 말과 고문으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

주고받고 하는 흥정과 거래가 검찰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정치군부는, 그 하수인들은 이를 마치 예상하고 준비해 놓고 있었던 것 같다.

남영동은 잔뜩 부풀려 버렸고, 나 자신을 포함해서 이 사건에 엮어진 모든 사람들이 이 무게에 짓눌려 주눅들어 버렸던 것이다.

남영동에서 내 생활이 끝나갈 무렵, 느닷없이 '민청련은 반국가단체'라고 하면서 신문조서를 꾸미고 인정하라고 협박해 왔다.

 

처음에도 또 중간에도, 최악의 고문 속에서도 일찍이 입밖에 한마디조차 꺼내지 않던, 이 때아닌 홍두깨는 무엇인가,

무슨 이유일까, 그 의미는 무엇인가, 지옥의 그 고통 속에서도 너무 어이가 없어 '꺽꺽'하는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최초에는 아주 소극적이었다가 중,후반부터 최고 악질고문자로 발전해갔던 전무 김수현조차 맹숭맹숭하고 조금은 열적은 모양이었다.

 

"마음대로 시키세요. 뭐든지 하겠어요"

 

이들이야말로 위험천만한 것이다.

상전인 정치군부의 요구와 지시에 회의할 줄 모르는 이들의 요구는 분명 현실이었다.

살을 꼬집으면 아팠을,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었으니....

 

아, 드디어 나를 죽이려고 하는가.

완전히 정치적 희생물로 만들려 하는가, 이 정치군부는.

이 죽음을, 이 어두운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되는구나.

주르르 흘러내리는 눈물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나는 사실 지금까지 울지 않았다.

고문대 위에서도 고문대를 내려와서도 악을, 악을 써대고, 수없이 울부짖기는 했어도 말 그대로 울음을 울지는 않았다.

오직 이때 한 번이었다.

 

이제 되돌아 생각해보니 양수겹장이었던 것 같다.

가혹한 보복을 놓치지 않고 준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검찰과 법정에서 삭감될 부분을

이 반국가단체 운운으로 상쇄시켜 버리고자 한 것이리라.

정치군부는 멀치감치 뒤에 물러서서 팔짱 낀 채 앉아 있었고 남영동은 흥정거리가 필요하다면 에누리해 줄수 있는 부풀린 상품,

여분의 상품속에 이을호, 문용식, 그리고 나를 파묻어 검찰에 넘겨버린 것이다.

 

 

고문, 그의 은폐, 학대행위 등, 이 사건의 본질을 구성하는 정치군부의 범죄행위에 대해

원심법원은 제대로 판단하지 않음으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에서 마치 실체적 진실은 저멀리 따로 있고,

정치군부의 범죄행위는 단순히 소송법적 사실로서 자유로운 증명의 대상일 뿐이라고 여겨 판단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이른바 실체적 진실은 고문과 그 은폐 속에, 그 위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본래부터 '국가형벌권의 실현'이라는 것과는 관계가 없는 일인데다가, 피로 물든 더러운 손에 의해 강행된 정치적 소동이다.

이 사건은 중세시대의 저 악명높은 마녀재판 소동과 유사한 것이다.

내가 여자가 아니어서 꼭 같은 것은 아니겠고.....


1심 재판부는 이렇게 함으로써 고문자들을 적극적으로 두둔한 것이었고, 고문이 계속될 수 있도록 보장한 것이었다.

지난 4월초순경 이념서적 사건으로 구속된 청년들 중 김상복이라는 사람이 또다시 전기고문까지 당했다고 한다.

소아마비로 불구자인 이 청년에게 전기고문을 가한 사람은 바로 나를 고문했던 백남은이라고 한다.


1심 재판부는, 판사들은 이런 사실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것이라고 발뺌하고 말아버릴 것인가.

이 사건은 피고인으로서, 인간으로서 최소한도의 권리보장조차 박살내 버린 것으로서

헌법적 요구인 적정절차에 대한 전면적 거부인 것이다.

 

따라서 '나는 처벌될 수 없으며, 처벌되어서는 안 된다.'


원심법원은 '공소제기 절차가 법령을 위반했으므로 공소기각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나와 변호인의 주장을 이유도 밝히지 않고 배척했다.


현 헌법은 상세하고도 명확한 형사절차상의 인권규정을 갖고 있다.

즉 적정절차를 확고히 보장한 것이다.

 

헌법은 전체 모든 것의 출발점이기 때문에

'형사소송의 모든 문제는 헌법으로부터 출발한다'는 하강 과정적 방법에 의하여 해결을 기도해야 한다.

즉 헌법과 형사소송법규에 따라서 이 사건이 수많은 정치군부의 불법범죄행위에 의해 공판에까지 이르는 것이 명백한데도

유죄를 선고한 것은 원심법원이 법리를 오해한 것이다.

 

나아가서 위법, 불법범죄행위를 통해서 또한 그것에 의해 공소제기된 이 사건은

마땅히 공소기각 판결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이유를 붙이지 않고 배척함으로써 영향을 미친 잘못을 범했다.


나는 85년 6월 24일 불법적으로 체포된 이후, 특히 9월 4일 남영동으로 강제연행당한 이후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유린당했고,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완전히 짓밟혔으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빼앗겼다.

특히 신체의 자유는 박탈당한 정도가 아니라 마구 짓밟혀 묵사발이 되어버렸다.

짐승처럼 매 맞았고 동물처럼 능욕을 당했다.


8월26일부터 9월4일까지 구류를 살고, 그 후 즉시 또 구속된 것은 별건 구속으로서 영장주의에 위반되며,

9월 25일 밤 9시반까지는 영장을 제시받지 않았으므로 이 또한 불법적 구금상태에 있었던 것이며,

인치장소로 영장에 명시된 용산경찰서 유치장에는 송치당일 오전 3시20분부터 오전 9시까지만 있었을 뿐이다.


85년 9월 당시, 남영동 공작1과 과장이었던 총경 윤재호의 직접지휘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참혹한 전기, 물고문을 10차례 당했다.

대엿새 정도의 끼니는 제공되지 않았고, 그 나머지는 고문 때문에 밥을 먹을 수 없어서 우유에 빵을 녹여서 겨우 허기를 메워 나갔다.

 

밤을 꼴깍 새운 날도 부지기수였고, 고문 받은 날은 잠을 좀 재웠는데 4시간 내지 4시간 반 정도였다.

참혹한 고문에 의해 강제된 것을 그대로 베껴 쓰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수집된 증거와 고뇌, 비명과 절망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그에 더 잡아 이리저리 꿰매어 모은 2차 수집증거에 의해 공소제기에 이르렀다.


남영동에서는 물론 검찰청에 뻔질나게 들락거릴 때도, 그리고 공소제기되고 나서 제1회 공판기일에 불과 10일 전까지

변호인과의 접견, 교통이 악마적으로 봉쇄되었다.

또한 85년 12월 13일,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법원에 고문증거로 제출하려던 상처딱지를 구치소에서 폭력적으로 탈취당했다.


이처럼 갖가지 위법한 절차에 의해 헌법적 형사소송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도전하는 절차에 의해 취득된 증거

또는 그에 뿌리박은 2차 증거를 원심법원이 증거로 허용함으로써 법원 스스로 위법한 절차를 옹호하고 승인한 결과가 되었다.

이는 사법의 염결성에 반하는 것이며, 또한 적정절차 보장을 통한 재판의 공정성 유지라는 대원칙을 붕괴시켜 버린 것이다.


사실과 법리가 이러한데도 원심법원이 아무런 이유의 제시없이 공소기각 판결을 배척한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원심법원은 사실을 인정함에 있어서 증거의 요지를 명시하지 않음으로써 법령을 위반했다.

판결에서는 어떤 증거에 의해 어떤 사실을 인정했는지가 명백해야 하는데도 원심은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판결에 이유를 붙이고 증거의 요지를 명시토록 한 것은 법관의 자의를 배제함으로써 재판의 공정을 담보하고,

재판의 근거를 밝힘으로써 피고인을 납득시키고자한 것인데, 원심판결은 이에 실패함으로써 법령을 위반한 잘못을 범했다.

특히 정치적 보복인 이 사건에서 증거의 요지를 밝히지 않은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미국 홈즈 대법원 판사의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는 공판정에서 사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절대로 사용될 수 없다"는

저명한 판결을 환기시킴으로써 이 부분을 마치고자 한다.

 

나는 아프지 않아야 한다고 단단히 결심을 했다.

몸이 아파서 쓰러지는 것은 정치군부에 대한 두 번째 패배가 될 것이다.

남영동 고문에 불복한 것에 뒤이은 또 다른 패배가 될 것이다.

나는 두 발로 버텼다. 나는 자생력을 믿었다.

 

봄과 함께 내 몸과 마음의 건강은 눈에 띄게 회복되었다.

앞으로 더욱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다.

이제 남은 것은 심하게 옭죄는 두통이다.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은 제대로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것. 감기 기운이 떨어지지 않는 것뿐이다.

 

지난 4월초 구치소 의무과는 스크린 테스트(개략검사)로 가슴과 머리 사진, 피검사, 소변검사를 했다.

의무과장은 이상이 없다고 말해 주었다.

우선 다행스런 일이다.

 

그렇다면 이 견딜 수 없는 두통은 무엇 때문인가?

내가 엄살을 부리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만약 그렇게 하고자 했다면 타이밍을 놓쳐 버린 것일 게다.

 

보다 엄밀한 진료와 검사가 필요한 단계라고 나는 생각한다.

죄어 오는 아픈 머리와 푸석하게 부은 두 눈으로 이 글을 써내려간다.

그러면서 나는 은근히 걱정한다.

이 두통과 부조화들이 정신적 외상으로 인한 신체적 반응 증상은 아닌가 하고.

 

전기와 물고문의 그 고통, 공포와 혼란으로 입은 정신구조의 깊은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고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혹시 이을호씨가 앓고 있는 그것을 나도 부분적으로 가슴 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 나의 가슴앓이를 지그시 누르면서 또한 박영진 형제의 가난한 죽음 앞에, 경원전문대의 한 학생의 분신,

그리고 서울대의 두 학생의 활활 타오르는 분노와 항의에 부끄러운 옷깃을 여미면서, 울컥 치솟는 뜨거운 것을 꾹꾹 누르면서,

내 얘기를 내 사건이라는 것을 이것저것 따져 보고 짚어 나가겠다.

 

정치군부는 재판에 끊임없이 간섭하고 장애를 조성했다.

그렇게 하여 재판부 판사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였고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85년 12월 19일 첫 공판 기일 이래 매 공판 때마다 법원구내와 주변에 많은 정, 사복 경찰병력을 배치시켜

삼엄한 분위기를 고의적으로 만들었고, 문익환 선생을 비롯한 민주인사들을 불법적으로 자택에 감금시켜 방청하지 못하도록 했다.

 

미국에서 급거 날아온 두 명의 변호사 역시 기만과 강박으로 인해 방청을 봉쇄당했다.

한 사람인 에이미 영 미법률가협회 총무는 공판기일에 법원 구내까지 들어왔다가 방해받아 방청하지 못했다.

구치감 앞에 머문 지프차에서 내리는 나를 먼 발치서 바라보고 난 후 곧 강압적으로 어디론가 안내되었다.

자칭 미대사관 직원이라고 하는 건장한 사내들에 의해 사실상 끌려간 곳은 공안연구소장 김경한 검사 앞이었다.

김 검사는 말했다고 한다.

 

"남영동에 있을 때 변호인 접견이나 조력을 요청하지 않았다. 고문 받지 않았다.

만일 고문 받은 사실이 판사에 의해 인정되면 석방될 것이다.

필요하다고 요청하면 물론 자기의 외래의사 진료와 치료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아프지 않다."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이 뻔뻔한 거짓말 중에 그래도 꼭 하나 사실과 맞는 얘기가 있다.

그렇다. 나는 변호인의 조력과 접견을 요청하지 않았다. 못했다.

 

그러나 어떠했을까?

만일 그렇게 했더라면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 한심한 작자라고 구박받으면서 한 차례 더 전기고문, 물고문이나 당하지 않았을까?

 

재미동포들과 우리의 미국 친구들을 대신해 대표로서 이들이 찾아왔다.

비열한 고문행위에 항의하고 재판을 방청하려 했던 인권 변호사들의 목적은 효과적으로 막혀졌다.

이 고문, 이 사건에 대한 국제적인 주시, 비판을 정치군부는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아주 능률적으로 차단해 버린 것이다.

 

정치군부는 협조라는 이름으로 신문사 사주, 편집국장을 협박하여 남영동 짐승들의 고문에 관한 것은 전혀 기사화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공판정에서는 많은 기자들이 열심히 메모를 하는 데도 고문에 관한 것이나 중요한 쟁점은 보도되지 않았다.

 

이는 언론자유를 침해한 것일 뿐 아니라 재판의 공개주의를 훼손시켜 버린 것이다.

개개인의 방청자유는 물론 현재 대중사회에서는 재판에 대한 보도자유가 보장됨으로써만

국민은 재판이 성실하게 행해지는지의 여부를 감시하고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사건에서 공개주의 원칙은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어용보도기관인 KBS와 연합통신을 동원하여 사실을 왜곡, 날조함으로써 사전에 관제여론재판을 강행하려 시도했으며,

그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고문 사실의 일부가 노출된 이후 KBS등은 더욱 기승을 부렸는데,

이것은 맞붙어 자름으로써 고문은폐 효과를 거두고 의도된 정치보복을 최종적으로 완수코자 한 것이었다.

 

서성 판사는 공판정에서 이 사건이 신문, 방송에서 보도된 것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그것에서 만들어진 편견에서 해방되느라고 무척 힘들었다는 의미의 발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말뿐이고 사실은 정치군부와 관제언론에 의해 만들어지고 강요된 편견 속을 헤매었으며,

남영동에서 각색된 피 묻은 서류에 파묻혀 영원히 가라앉아 버린 것이다.

서성 판사를 비롯하여 재판부 전원이 아주 깊숙이 침몰돼버린 것이다.

 

1심 재판에는 예단과 편견배제의 원칙을 저버리고 공정성을 잃어버림으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연합통신 제공으로 반 강요된 기사가 각 일간신문에 획일적으로 크게 보도되었고,

KBS 뉴스시간에 여러 번, 거기다가 2회에 걸쳐 40여분짜리 나 개인에 관한 특집 기획물까지 만들어 방영했다.

 

이것은 정치군부 보복의지가 얼마나 강렬한가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이른바 이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군부 보복의지 강도의 문제이다.

이 우렁차게 선포된 강고한 의지 앞에 재판부는 뼛속까지 얼어 버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성 판사는 공소제기일로부터 제1회 공판기일까지 근 두달여 동안 단독결정으로 가족면회를 금지시켰다.

검찰에서 묵비고수 때문이라는 것이다.

묵비권 행사가 죄증을 인멸할 염려가 있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아닌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정치군부가 고문증거를 인멸할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 그 진정한 이유다.

공소제기 전, 경찰, 검찰수사 단계에서도 역시 두 달 가까이 가족은 물론 변호인까지

서로의 만남이 완전 봉쇄되었던 것을 잘 알면서도 내린 이 결정은 잔인한 것으로서 그 자체가 무효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로서 친밀한 인간적 만남 속에서 비로소 존엄성와 가치를 누릴 수 있으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서성 판사의 이러한 결정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차단당하고 만 것으로 바로 헌법 제9조 위반이다.

그러나 뭐 위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처음부터 논리나 양식 그런 문제는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성 판사는 제1회 공판기일부터 공연히 방청권을 발행하여 가족과 민주인사들의 재판 방청을 사실상 방해했고,

그럼으로써 고문을 규탄하고 항의하는 분위기를 삭히는데 누구보다 노력했다.

 

아무런 이유없이 방청인 수를 대폭 제한하였으며, 그나마 절반정도는 기관원 또는 그렇게 동원된 사람들에 의해 점거되게 했다.

이렇게 하여 오히려 일정한 긴장을 유발시켜 놓고도 방청에 제한당한 사람들이 소란을 피운다는 명목으로

법정 경찰권을 동원해서 잔인하게 제지를 가하는 결과를 빚어지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나의 처 인재근은 경찰의 폭행으로 졸도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제1회 공판조서의 기재내용이 지나치게 부실하여 이에 대해 변호인도 나도 이의제기를 하고 시정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그 이유는 이랬다.

 

"다른 사건에서는 피고인이 이익되는 진술을 30여 분 해도 고작 한 두줄 정도로 기재하는 것이 현행 관례다.

개선되어야 할 관례지만 이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충실한 편이었다"고.

 

나는 첫 공판기일에 남영동에서 당한 고문을 아주 짧게 줄여서 말했다.

그런데 그것을 극도로 줄였을 뿐 아니라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기재하여 고문사실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정도였다.

거절을 수긍할 수는 없었지만 갈 길이 멀고 멀어서, 또 고문을 참혹하게 하고서는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정치군부를 의식한 판사들이 안되어 보여서, 그 정도로 하고 지나치기로 했다.

 

증인 심문 단계 중간쯤부터 서성판사는 공정성을 저버리고, 유죄를 예단케 하는 도발적인 질문을 증인에게 두서없이 던졌으며

나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집시법 부분에서 거론한 최민화 씨 증언시에 서성 판사는 다음 같이 증인에게 물었다.

 

"왜, '민주화의 길'의 논설을 의장만 쓰는가? 그렇게 하면 영향력이 의장에게 집중되지 않느냐."

 

당시 서성판사의 뉘앙스까지 합쳐보면 민청련 운동은 거의 나 혼자 해온 것처럼 인상을 지우면서

동시에 사건을 은폐하려는 저의가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예단이니 편견배제니 그런 것을 넘어선 도전적이고 적대적인 것이었다.

 

나는 울컥 분노가 솟아오르는 것을 누르면서 '참자, 또 참자' 고 자신을 억누르면서

'논설은 의장단이 써아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글을 쓰지 않아서 결국 나에게 부담으로 돌아온 것" 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학생들처럼 엎어버리지는 말아야지, 말아야지...' 하면서 '참고 넘어가 주자' 고 하며 그냥 지나간 것이 지금에서는 몹시 억울하다.

점잔을 뺀 것이 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미안하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시쳇말로 쪽은 쪽대로 팔려 버렸으니......

 

서성 판사는 내가 제출한 탄원서에 대한 변호인의 열람을 거짓말로 따돌렸다.

활용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까지 힘을 다해 남영동 고문을 생생하게 기록했었다.

탄원서라는 이름의 서류에.

3월 4일. 선고 날 이틀 전에 아마 재판부에 도착했을 것이다.

 

선고가 있은 후 닷새째 날인 3월 11일, 변호인은 이 탄원서의 열람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서성 판사는 "이미 소송기록을 보냈다"고 하면서 따돌렸던 것이다.

앞뒤 사정을 봐도 그렇고 검찰의 말을 들어 봐도 그렇고, 이미 소송기록을 갖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거짓말로 열람요청을 방해한 것이다.

 

이것은 작전이었다.

그 작전을 모른 채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패대기쳐진 것이다.

완전히 해낸 것이었다. 치밀하게. 그리하여 훌륭하게 여러가지 현실적인 고려를 하고 대처하여 서성 판사는 승리했다.

 

 

본래 이 사건에 대한 의혹과 고문에 대한 광범한 분노를 잘 읽고,

형식 또는 절차는 주고(그것도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고문사실은 안되고), 내용은 완전히 꼴깍 먹어치운 것이다.

 

그럼으로써 '짱' 박아두었던 '충성'이 매우 빛을 발하게 되었으며 정치군부의 승리를 남영동. 검찰에 이어 또 한번 튼튼하게 확인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 공로에 대한 보답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7. 선택하라! 선택하라!

 

말하기 거북스런 것이 또 하나 있다.

아마 이것은 나의 심약함의 반영이었을 게다.

 

재판부, 변호인, 검사, 나, 방청객, 신문기자 모두가 반 정치군부적 분위기 속에서 암묵적으로 의사가 통하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게다가 법정 구성의 당사자들은 거의 서울대 출신들이었으며,

재판장인 서성 판사는 경기고등학교 4년인가 선배라는 말에 뭔가 기대를 건 적이 있었던 것이다.

 

웃기는 얘기겠지만 난 사실 그랬다.

육사 몇 기로 뭉쳐서 설쳐대는 저 정치군부들의 흉내를 내고 싶어 했던 것일까.

정치군부가 자기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서 어떻게 작용을 가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할 수 없는 내가,

조금만 양식이 있으면 누구의 눈에도 보이는 이것을 나는 얼마동안 눈감아, 애써 눈감아 외면했던 것이다.

그 대신 아주 사소한 끈에 매달리려고 한 꼴이 되고 말았으니, 이건 시궁창에 빠져 버린 쥐새끼처럼 참담해지고 만 것이 아니겠는가.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에 마음을 돌려 앉혀놓고보니 오히려 잘된 점도 있는 것 같다.

나에 대한 판결은 기본권 보장이니, 실체적 진실 발견이니 또는 사법적 정의실현이니 하는 주절거림으로부터

'깨어나라, 꿈을 깨라'는 통렬한 타격이었다.

 

사실, 하려면 이렇게 빨가벗고 나서서 "재판부는, 판사는 정치군부 편이다"고 선언해 주는 것이 속 편하다.

처음에는 분기탱천하는 바가 없지 않았지만, "아! 결국 당신들은 역시 그렇구나"라고 인정하면서 깨끗하게 끝낼 수 있었다.

더 이상 공연히 알쏭달쏭하게 만들고 헷갈리지 않게 될 것이니까 말이다.

 

지난 4월 13일 전후 이곳 구치소 전 사동은 낮에도 밤에도 열기와 함성으로 들썩들썩했다.

병사 한 구석에 처박혀 있는 나는 늘 형광등 신세를 벗어나지 못해 어리벙벙했지만 사태가 심상치 않음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화려한 송별식이었다.

터져 나오는 통곡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예 처음부터 재판과는 담을 쌓았던 '민정당 연수원 사건' 관련 학생들의 형이 확정되던 날 시작된 것이었다.

전국 각지의 가막소로 실려 나가는 날 아침까지 학생들의 아우성은 솟구쳐 올라왔었다.

 

이들의 목소리에 방 창문을 열고 귀 기울이면서 나는 미안한 마음이 되었다.

과격하고 무모하다는 비난을 흠뻑 뒤집어쓰면서 학생들이 싸우고 있을 때 재판 속을 헤매고 있던 나 자신을 되돌아봤다.

학생들에 대한 정치군부의 야멸찬 매도, 핏대올린 선전이 귀가 따갑게 울리는 동안

학생들은 외침으로, 떨리는 가슴으로 대치해왔던 것이다.

이런 학생들을 나무라는 점잖은 사람들이 있는 줄 안다.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나에게 있다.

가막소 벽에, 구치감 벽 여기저기에 쓰여있는 글을 보면서 학생들의 가슴에 새겨 있는 한숨과 외로움을 나는 보았다.

 

'군사독재는 물러가라', '민주주의 만세', '민주화운동은 승리한다', '서민생계 보장하라' 등이 시멘트 벽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서울대 학우여 투쟁하라', '고대, 연대, 성대, 이대, 서강대, 숙대 학우여 나서라!' 등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당신들이 이미 다 알고 있는 바인가? 그렇지 않다.

당신들은 그 글자는 알지만 거기에 쓰여있는 눈물과 설레임은 모르는 것이다.

당신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졸전을 벌였다고 공박을 받은 무하마드 알리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당신들이 링사이드에서 찬 맥주를 마시면서 낄낄거리고 있을 때, 나는 배에, 턱에 강력한 주먹을 얻어맞고

숨도 제대로 못 쉬고 헉헉거렸다. 당신들은 이 고통, 이 외로움을 알 수 없는 얼간이들이다"라고.

 

이 말을 점잖은 당신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일단 정치군부에 찍히면 그것으로 결정난 것이다.

그 이후는 하나의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나같이 뒤통수 얻어맞고 꿈을 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들 학생처럼

분식행위, 가식적절차를 처음부터 거절해 버리는 사람도 있다.

서성 판사의 승진소식을 들으면서 선뜻 축하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넉넉한 마음가짐이 없기 때문도 있지만 따져봐야할 것이 있어서다.

 

아마 능력이 있고 충분한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고,

정치군부의 요구와 기대대로 재판 결과가 마무리된 때문은 아닐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보다 공정한 재판 결과가 나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건 잘 모르는 일이다.

서성 씨에 대해서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그 개인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사회에서 법원의 독립, 법관의 독립이 사실상 형해화 되어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상황 아래에서, 다시 말하면 정치군부에 유리하게 했는가 아니면 불리하게 판단을 내렸는가가

법관 인사조치에 영향을 미치고 또 그렇게 추측되는 상황에서 자유심증주의는 매우 위험한 도구로 전락돼버리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엿장수 마음대로, '오야' 마음대로, 결국은 정치군부 마음대로

민주화 실현을 저지하고 국민을 탄압하는 방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니 벌써 그렇게 돼버린 것이 아니겠는가.

 

법관의 인적, 물적 독립이 훼손되어 있는 상황 아래에서 법관 개인에게, 개인의 양심에게 판단을 맡기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정치군부가 맹렬하게 제기하는 사건에서 법관은, 법관의 양심은 피고인이 된 민주인사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라도 법관 자신의 안전에 대한 고려가 작용하여 유죄로 예단하고 추정하게 될 것이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자유심증주의란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되었다.

앙상레짐을 타파하고 자유, 평등, 박애의 인류라는 이상을 드높인 불란서 대혁명 정신인 합리주의의 다른 표현이다.

전체적, 자의적 왕권지배, 규문주의적 재판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서 획득된 원칙이다.

 

그런데 이 자유심증주의가 정치군부 독재 아래에서는 인권을 탄압하는 그럴 듯한 원칙으로 타락되어버린 것이다.

이번 나의 재판도 그 경우의 하나일텐데, 구체적으로 지적하면 이렇다.

 

최민화씨가 증인으로 증언하고 있을 때,

서성 판사는 '민주화의 길'에 실려있는 '80년 서울의 봄에 대한 반성과 평가'에 대해 나에게 질문했다.

"그 글을 누가 썼는지 말할 수 없습니까? 대표라면 그 글을 쓴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게 여겨 할려고 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공판정에서 어떤 심문에도 진술을 거부한 적이 없었는데도 이처럼 느닷없이 도발적인 질문을 한 것은

법관이 '심리 도중에 피고인으로 하여금 유죄를 예단하는 취지의 말을 한 경우'(대판 74. 10. 16. 74모68)가 되어

당연히 기피신청의 사유가 되고, 예단과 편견배제원칙을 위배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단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자유심증주의라는 이름으로 정치군부는 사실상 자신들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번 법관의 인사는 그것을 더 한층 확고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현직판사로서 국가보위입법회의에 나갔던 사람들, 청와대 비서관을 했던 사람이

법원의 여러 요직에 발탁되어 임명되고 있는 것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정치군부의 또 다른 혹심한 탄압이 무르익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기도 하며, 유죄를 99.5% 강요,

이제 거의 100%까지 올리고야 말겠다는 결의의 표명, 전 세계 최고기록을 달성하고 말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도 해석해야될 것이다.

 

폭력적 경찰, 나아가서 검찰이 야만적 정치군부의 하수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유신시대에서 본 것처럼, 5. 17과 광주사태 이 후 경험한 바와 같이 법관도, 법원도 이미 정치군부의 품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미련을 갖고 잇는 것이다.

 

거듭 소용없는 일임을 시퍼런 두 눈으로 확인해 가면서도.

정치군부의 폭력적 본성을 논리라는 당의정으로 겹겹이 싸 바르는 지식인들이여 ! 법관들이여 !

이제 당신들은 최종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우리시대의 대의인 민주화실현 대오에 설 것인지, 아니면 끝끝내 정치군부 옆에 서서 영원히 민족과 역사의 저주를 받을 것인지 선택하라 !

 

선택하라 !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당신들의 자유이다.

 

 

6. 실패한 재판

 

86년 3월 6일 오전 10시 118호 법정.
"전부 유죄, 징역 7년 자격정지 6년."


서성 씨 입에서 이 말이 나오자 방청객 사이에서 여러가지 외침이 솟구쳐 나왔다.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적군", "창피하게 여기시오", "건강하시오", 또 뭐뭐라고....


키 큰 교도관들과 경교대원들에게 둘러싸여 복도로 밀려 나서자,

공판에 여러 번 참석해 왔던 이들 사이에서도 제각기 한 마디씩 던져졌다.


"재판장이 대가 약하군",

"배짱이 없는 사람이야",

"너무 심하군",

"승진은 이제 따 논 당상이군" 등등이 내 귓전을 때렸다.

 

격려해 주는 말에 고마워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씁쓰레한 심정이 되어갔다.

서성 씨 등에게 희미하게 걸었던 것에 대한 배신감도 그렇거니와

"그래도, 그래도" 해 왔던 나 자신에 대한 자기 혐오감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3월 한 달 내내 속이 메스꺼운 상태에서 지냈다.

다른 사람들에게 눈치채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어영부영 한 달을 보내 버렸다.

자기에게 불리한 판결을 하는 경우 어떤 누구도 사나운 심사가 되어 버릴 것이다.

 

나도 그런 사람중에 하나일 테고, 그래서 조심을 했다.

투덜거리거나 주접을 떨어 지저분하게 되지 않도록 말이다.

하지만 지글지글 끓는 이 부아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한낱 푸념에 지나지 않겠지만 몇 자 적어 속을 가라앉히려고 한다.


공판에 임해서 나는 더러운 손, 피로 물든 고문자의 손을 고발하기에 급급했다.

정치군부의 적나라한 범죄행위인 고문과 그 은폐로 말미암아 내 가슴 속에 쌓인 한을 풀어내기에 바빴으며,

영원히 비밀 속에 묻어 두려고 온갖 파렴치한 수단도 사양 않는 정치군부의 저 검은 속셈을 폭로하는 데에 안간힘을 썼다.

 

그리하여 이제는 우리 모두에게 매우 현저한 사실이 되었고 반박할 여지가 없는 증거로서 내 몸에, 맘에 남겨진 상처를 드러냈으며,

도대체가 잔인한 고문에 의해 각색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밝혀지기만 하면 아무리 개판인 오늘의 정치군부지만

속절없이 손 털고 물러설 수밖에 없으리라고 낙관했었다.

 

석 달 반 동안을 고통 속에서 완전히 차단당했다가 변호인, 가족들과 간헐적인 만남을 통해서 현실감각을 어느 정도 회복하였지만,

그러나 워낙 격심한 충격을 받았던 나는 감정이 기복이 심했고, 그에 따라 상황판단에 통일성이 결어되어 있었다.

즉 바깥 사회에서 계속되고 있는 강도 높은 민주화 요구 열기에 따라 상당히 들떠 있었던 것이다.


"사회적으로 일단 날카로운 정점이 되어 있는 사건의 경우에는 그 공판 절차가 비교적 민주적으로 수행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그러나 결과에서 아직 변함이 없다"는 변호인의 조언에 나는 사태를 아주 낙관했었다.

 

이 사건이 무엇인지는 과정만 합리적이라면 그대로 드러날 것임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투옥된 것이 처음이고 재판받는 것도 처음이어서 부담스럽고 서툴렀다.

그래서 나는 형사소송법은 물론 형법, 헌법교과서, 판례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어느 정도 방어를 해 내기만 하면 그것으로 끝나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변호인이 얘기한 "아직도 결과는 마찬가지다"라는 조언을 나로부터 변경시키겠다는 의욕에 차 있었던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내 꼴이 가관이었던 것 같다.

숲은 못 본 채 나무만 열심히 들여다보고 그 사이를 이리저리 해매고 다닌 셈이었으니 말이다.

은근히 '설마 설마' 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창피하지만서도.....


85년 12월 19일 첫 공판 기일에 정치군부는 물론 재판부, 검찰, 변호인, 나, 가족, 신문기자, 민주화운동 인사 모두 대단히 긴장되어 있었다.

서성 씨는 별 일이 없었는데도 방청권 발행으로 공개주의 원칙에 일정한 제약을 가했지만,

남영동에서 당한 고문을 밝히는 내 이야기에 제동걸지는 않았다.

 

제지 또는 제한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일부러 짧게 축약했었는데 그것이 후회가 될 정도였다.

이를 고맙게 생각한 나는 그 다음부터 설렁설렁 넘어간 점이 상당히 많았다.


사실 나는 공판정에서도 진술거부를 하고 싶었다.

이 사건은 정치보복이며 또는 내가 정치군부의 정치적 이용물로 활용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명백하고도 강경한 대처가 바로 묵비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 좋아하는 사람들의 '국가 형벌권' 이라는 것을 조롱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문 얘기, 그 은폐기도, 이것을 밝히지 않을 수는 없었고, 그 유일한 기회가 공판정이었으니 참 어려운 문제였다.

만일 판사가 내 얘기를 제지하거나 제한하였다면 그것으로 끝이었고,

재판에 대한 미련이나 회환 그리고 자기 혐오감이 이토록 깊지는 않았을 것이다.

 

판사 자신들에게 많은 부담과 심리적 압박감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고문 얘기 개진에 제한을 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데 그 이후에 묵비를 한다는 것이 인간적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되었으며, 뭔가 졸렬한 대처로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정치군부는 이를 사건은폐로 몰아 선전할 것이라고 헤아려 묵비하지 않았다.

결과가 이렇게 되고보니 내가 한껏 조롱당하고 만 꼴이 되어버렸다.


나의 형이 맨 처음 면회왔을 때 건넨 말은 이러했다.

"국제적으로 네가 유명해졌다"고.

 

이에 대해 "이토록 참혹하게 매맞고 유명하게 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변호인들도 이와 비슷한 말씀들을 했다.

 

언젠가 형이 다시 면회왔을 때, "한국에서 매 맞지 않고 유명해진 사람이 누가 있느나"고 사람들이 말하더라고.

그렇게 말하여 "함께 웃어보자"고 말했다.

 

나를 격려하기 위해서 한 말인 줄을 잘 알면서도 면회실을 나서는 내 걸음걸이가 정상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부드럽게 느껴졌었다.

유명해진다는 것에 바람 든 풍선처럼 붕붕 뜰 정도의 철부지는 아니지만 그 말이 싫지는 않았다.

이런 소문에 휘말리지 않도록 내 딴에는 무척 조심하고 경계를 했었는데.....


아! 나는 어느새 교만해지고 방심한 점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나를 못내 부끄럽도록 만들었다.

 

5. 서울 구치소의 겨울



지난 겨울을 지독히도 추웠다.

더구나 서울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버림받은 것 같은 이곳 감옥이 춥지 않을 리는 없는 것이지만,

나는 정말 두 다리 와들와들, 온몸을 떨면서 지내 왔다.

나는 병동 아래층 맨 끝, 북쪽 방에 밀어 넣어졌다.

방의 북쪽 벽에는 얼음이 빙판처럼 깔리고, 저녁 형광등 불이 깜빡거리며 들어오면

얼음은 비수처럼 새파랗게 곤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매트리스 밑은 흥건하게 습기가 차 한겨울에도 곰팡이가 슬고,

두 겹 비닐로 막은 창문은 매서운 칼바람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습기가 차다고 가막소 간부들에게 얘기해 봐야 헛일일 뿐이고, 우이독경이었다.

칼날처럼 매섭게 얼어붙은 벽을 가리켜도 그것은 한낱 엄살일 뿐이고 마이동풍이었다.

그 사람들에게는 처음부터 아무 소리도 없었던 것과 진배없었다.

내 얘기는 처음부터 귀를 꼭 틀어막도록 지시를 받았거나, 의논하여 합의 결정한 것으로조차 보였다.

85년 9월 4일 미명, 서부경찰서 유치장에서 꺼내어져 어디론가 사라졌던 나를 변호인들이 처음 만난 것은 3개월 5일만이었고,

내 처와 형제들은 그러고도 열흘 뒤 첫 공판이 열린 다음 날부터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우리는 뜨거운 눈시울, 매캐해 오는 콧속, 그리고 치받치는 목메임에서 그냥 뜨겁게 쳐다보다가,

그러다가 말문을 열어 고문에 대해 지칠 때까지 얘기를 헀다.

 

이러기를 며칠 한 후, 당시 내 몸이 워낙 안 좋고 보행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데다가

날씨마저 혹독하게 추워 걱정이 된 가족과 변호인들은 내 감방사정을 자꾸 물어보았다.

 

망설이다가 조그만 목소리로 얘기를 했다.

사실대로 말하면서 나는 이를 견디어 내기로 작정하였음을 밝혔고,

내 방안의 추위와 얼음에 대해 문제제기하지는 말라고 웃으면서 얘기했다.

헌데, 이튿날 구치소 직원 두 사람이 내 방에 들어와 북쪽 방벽을 만져 보고,

곰팡이가 아우성치고 있는 매트리스를 들쳐 보곤 조금은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울러 넌지시 방을 옮길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나갔다.

 

그 후 간부 한 사람이 올라와 전방 얘기를 꺼내기에 "인심 한번 쓰려면 후하게 쓰라"고 말했다.

마침 건너편인 7방은 비어 있고, 공간도 비교적 넉넉하여 그걸 요구했다.

내가 있는 8방은 겨울 해와는 완전히 원수지간으로 햇볕 꼬랑지 하나 구경할 수 없었지만,

이 7방은 오후가 되면 햇볕이 비쳐 들어 왔다.

내가 7방에 눈독을 들인 이유는 바로 이 햇볕 때문이었다.

외로움과 추위 속에서 햇볕은 은혜처럼 축복같이 날아드는 것이다.

낙관적인 느낌도 동반해 오고.....

이유는 언제가 그렇듯 잘 모르겠지만, 난색을 표하면서 8방과 거의 똑같은 조건인 9방을 말하였다.

이들이 방을 바꿔줄 생각을 한 것은 아직도 학대행위가 계속되고 있다는 비난이

바깥 사회에서 제기될 근거에 대한 우려 때문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나는 9방으로 옮김에 대해서는 거절했다.

얼마 전까지 징벌을 받던 사람이 살던 방이었고, 정신 질환자를 수감하느라고 부착했다는 조그만 구멍이 뚫린 쇠철판을 붙이고

완전히 밀봉해 놓은 컴컴한 방이었기 때문에, 차라리 추운 북풍 들이치는 8방에 그냥 있는 것이 나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8방도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가 짙게 배어 있고 꽉 막힌 정신질환자 수용독방이었다.

내가 이 가막소에 온 즉시 8방에 들어갔는데, 그렇게 숨통이 조여지는 듯한 어두움 속에서 두 달여를 보냈다.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이 8방에서 고문으로 인한 상처로 끙끙 앓으면서 나는 요구했고, 호소도 했다.

결국은 화를 잔뜩 내고서야 11월말 경에 쇠철판을 제거하고 바람이 통하는 창문을 얻어냈다.

그토록 어렵게 얻어 낸 흐르는 바람을, 창문을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를 눈치 챈 그 사람들은 9방을 뜯어 고쳐 여닫을 수 있는 창문을 닫고 쇠철판을 뜯어냈다.

12월말 경 9방으로 이사했다.

추위야 별 차이가 없었지만 맨살로 부딪치는 북벽을 갖지 않는 것이 기분상 훨씬 좋았고,

무엇보다 습기가 8방보다 덜차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병사 하 9방의 내 매트리스 밑에는 습기가 고이고 곰팡이가 피어나지만,

이곳은 큰 체하는 간부들이 말하는 특별 권력관계가 작용하는 곳이니까, 여기는 사회가 아니니까,

그까짓 습기와 그 정도 곰팡이는 더불어 같이 살기로 결심을 했고 그 심정 탄탄히 지켜내고 있는 중이다.

12월 중순 경쯤일까, 병사 아래 위층 15~16개 방 모두에 조그만 구공탄 난로를 하나씩 피워 주었다.

그런데 나 혼자 그 혜택에서 제외되었다.

병사 하 9방은 지옥이고 나머지 방들은 천당처럼 바라다 보이기도 했다.

다른 방 사람들은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녹이고 가슴의 외로움도 녹였으며,

성령처럼 내려 앉는 햇볕에 다시 행복해지는 모습을 나는 본 것 같았다.

 

거기에다 얼굴이 벌개지는 난롯불을 한 가운데 두고 둘러앉을 수도 있었으니, 끝내주는 일이 아니었던가 그것은.

아픈 분들 방에 난롯불을 놓은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 유독 나만 빼놓은 이 서러움,

그 옆에서 어느 순간 번쩍하는 숨겨진 적대감을 보곤 내 가슴의 추위는 더 매서워져 갔다.

 

사람이 계속 바뀌어서 정신 질환자들이 7방 또는 8방으로 들어왔는데,

그 사람들과 나는 지난 겨울 내내 영원히 저주받은 동토의 나라에서 살았다.

어느 땐가 꼭 두 번, 내게도 난로 좀 놔 달라고 간부들에게 요구를 했다.

 

모 계장은 이렇게 말했다.
"난로는 병약자들에게만 놓아주는 것이다.

당신같이 건강한 사람까지 놓아준다면 전 사동 재소자들에게 다 놓아주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예산이 없다."

순간 나는 몸 속에서 피가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부들부들 노여움으로 몸은 떨려오고 '당신도 인간이냐, 나의 부서진 이런 모습을 보면서,

늘상 누워있는 나를 당신의 두 눈으로 보지 않느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애써 목소리를 누르면서 무겁게 뱉어냈다.

단식과 아우성 등 싸움과 싸움을 통해서 학생들이 따낸 보온 수통도 나는 제외시켰다가 며칠이 지나서야 지급했다고 한다.

85년 12월 13일, 고문당할 때 생겼던 발뒤꿈치 상처딱지를 폭력적으로 강탈해 가던 날,

이미 지급했던 감옥 담요 4장조차 도로 빼앗가 간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비인도적 처사,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철저하게 대결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지만

난 당시 싸울 기력이 없었다.

그저 물러서서 이미 입은 상처가 더 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인간 도살장이었던 남영동에서 이곳 서대문구치소로 온 9월 26일 이후 한 일주일쯤 지나서였을까.

9월 13일에 여덟 번째, 아홉 번째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받은 이후 나는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식욕은 물론 없고 이가 모두 흔들리고 아파서 씹을 수 없었고, 소화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여기 가막소에서는 죽을 나눠 주었다.

 

'이런 고마울 데가 어디 있담.

그래도 여기는 살만한 곳이구나' 하면서 죽을 오랜 시간 걸려서 천천히 먹었다.

그런 나에게 이 모 주임이라는 사람이 병사 하층을 담당한 사람을 시켜,

또 담당은 이른바 소지를 시켜서 '죽은 떨어졌으니 밥을 주라'는 지시를 했다.

별안간 밥이 나와서 소지에게 사정을 물었더니 담당에게 얘기해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거의 애걸하다시피 죽을 달라고 매달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없다'고 차갑게 거절하는 것이었다.

밥을 먹으려 해도 먹을 수가 없어서 국물만 좀 마시고 짬밥으로 고스란히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지시를 받은 담당은 복도 내 방 옆에 몰래 붙어서 밥을 먹나 숨어서 지켜보았고,

식구통으로 나오는 짬밥에 손이 갔는지를 확인하는 숨결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하루 정도 나에게 밥만 주었다.

그러니까 강제로 하루를 굶은 꼴이었다.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이 담당은 투덜거리며 내 방 옆을 떠나갔었다.

 

아! 그때 이 사람이 내뱉은 한 마디, 그것은 내 가슴에 상처를 만들어 버렸다.

듣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을.

이 담당은 나에게 "씨발 새끼"라고 욕을 하면서 멀어져 갔는데, 내가 왜 이런 욕을 먹어야 하는지,

그것을 멀거니 듣고도 해댈 수 없는 나의 상시의 쓰러져 일어나지 못함이 아주 쓰라렸다.

나에 대한 조직적인 학대는 멈춘 것이 아니었다.

근래까지 이 상처를 잊지 못해 그 담당과 주임을 미워했었다.

이제는 용서하기로 작정을 해버려 괜찮게 되었지만.....

이 모 주임이라는 사람은 그 후에도 공연히 나에게 두어 번 시비를 걸고 욕설을 해대곤 했다.

구둣발 채로 내가 누워 있던 방으로 들어서기까지 했다.

간부인 자기가 순시하는데 내가 자리에 누워서 일어나지 않는 것은 무례한 일이라면서 모욕을 가했다.

내 몸과 마음의 상태가 누워있을 수밖에 없다며 양해를 구해도 막무가내였다.

멀쩡한 사람이 꾀병을 부린다고 욕을 하면서 나보고 애비도 없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나도 견딜 수가 없어서 같이 싸웠고, '불과 나보다 댓 살 많은 당신같은 애비도 있느냐!'고 조롱도 해주었다.

이 사람이 본래 냉혹하고 염치를 모르는 철판 깐 사람이기도 했지만,

위로부터 은연 중에 오는 모종의 신호에 맹목적으로 충성하고자 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참 우스운 것은 이젠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어서 이 사람과도 그럭저럭 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치권력은 가막소 간부들을 통해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멀쩡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만들려고 무진 애를 썼다.

의사들은 비교적 성실하게 진찰하려고 했다.

지금은 그만둔 어떤 의사 한 사람은 특히 더 그러했다.

일부터 나를 불러내서 살펴보고 약도 지어 주었으며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응시하기도 했다.

 

나는 그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큰 약이었다.

당시 소생하는, 소생하려고 발버둥치는 나에게는 이 의사의 선의가 무엇보다 효험있는 치료였다.

그러나 이런 선의들이 자꾸만 차단되고 거부와 외면의 몸짓으로 돌아서 가는 것을 느끼지 못할 내가 아니었다.

가막소 의무과에서는 내게 10여병의 링거와 영양제를 놔 주었다.

처음 실려서 업혀 왔을 때 몇 병 맞고, 증거 보전 신청이 제출되었던 시점 이후,

사회적으로 내가 고문받은 사실이 알려진 이후 몇 번을 더 맞았다.

가끔 어지럽고 두통으로 시달릴 때는 그저 하루분 정도의 진통제, 아스피린, 수면제 등을 얻어먹고 견디곤 했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건강하고 멀쩡한 사람으로, 다만 병사에 격리 수용되어 있는 것으로 내외에 발표되고 선전되었다.

의료보호 또는 도움으로부터 사실상 버림을 받았는데 나는 이것을 시정시킬 기력도 없었고,

또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심도 했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85년 9월초 남영동에서 전기고문, 물고문에 못견뎌, 나는 발가벗기고 두 눈이 가려진 채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면서

항복한다고 용서해 달라고 두 손으로 빌었다.

그때 고문자인 김수현, 백남은, 그리고 전기고문 기술자 잎에 번졌던 소리없는 웃음, 그 웃음을 나는 절대로 잊을 수 없다.

아니, 이 하수인 뒤에서 충혈된 두 눈으로 낄낄거렸을 이 폭력적 정치군부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인간 파괴자들을.......

그런데 나는 이들에게 살려달라고, 아니 곱게 죽여달라고 애걸복걸했던 것이다.

나는 다시 이들 박해자들의 소매에 매달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두 번 다시 입지 않겠다고 말이다.

 

일제하에서 옥사했던 윤동주, 이육사를 그리며 나는 시인도 못되고 이 서대문 가막소에서 죽을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죽어 갈지도 모르는 내 모습을 단단히 지켜보리라 결심했던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인간적 긍지를 다시 세우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그리고 올바른 의료 제공,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싸워야만 할텐데, 당시 나는 심신이 거의 무너진 상태였고

기력이 없었으며, 고문당할 때 엄습해왔던 공포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제대로 대항할 수가 없었다.

또 그런 부딪치는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의 상태가 악화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병사 하층 8방의 내 이불 속 깊숙이 들어가 그 속에서 혼자 깊게 앓았던 것이다.

다만 10월초, 중순경부터 내 발뒤꿈치에 났던 상처, 고문으로 인한 유일한 외상에 대해서

관심을 표현하고 의사와 이곳 간부들도 보자고 했다.

정치권력은 의사의 진료행위를 이용하여 고문의 유일한 외적 증거를 수시로 확인하고자한 것이다.

처음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도 않았던 부위에 대해 한두번도 아니고 여러 번 여러 사람이 보자고 하는 데에도 넌덜머리가 났다.

그리고 그 가증스러움이라니!

변호인단이 제출한 고문 증거보전 신청과 내 처 인재근과 민주활동가 여러분의 고문 폭로 규탄 때문에

정치군부의 신경이 날카로워졌고, 어떻게 해서든지 고문을 완벽하게 은폐하기로 결정내렸을 것이다.

만일 정치군부의 열렬한 희망과 기대에 반해 나에게서 어떤 충격적인 음모나 내막이 폭로되었다면

그들은 뭐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냐' 하며 태연스럽게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더우기 고문의 역력한 증거를 내 처인 인재근과 이을호 씨의 처 최정순, 김상철 변호사

그리고 여러 검사들이 두 눈으로 명백히 보았고 이에 따라 민주인사 여러분들의 뜨거운 분노와 항의에 부딪쳤던 것이다.

 

이른바 국가보안법으로 제대로 엮지 못했던 것이다.

궁지에 몰린 정치군부는 단단히 결심했을 것이다.

고문을 완전히 은폐하고 관계 언론을 동원해서 내 주위에 수상쩍은 분위기를 형성하도록 말이다.

이야말로 '방귀 뀌고 성내는' 격이었다.

철저하고 완전하게 은폐하기 위해서 나는 아프지 않아야 했고, 치료를 받지 말아야 했으며, 받을 필요 또는 없는 것이 되어야 했다.

그 동안은 누구와의 만남도 봉쇄되어 고문사실과 그 증거가 확인되지 않아야 했던 것이다.

발 뒤꿈치 상처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가족과 변호인은 물론 이곳 가막소 내의 누구와도,

일반 제소자까지 절대로 말을 주고 받지 못하도록 봉쇄되었다.

내가 있던 8방의 앞 7방과 9방은 비워 두거나 정신이상자들만 수용함으로써 그 차단 목적을 성공적으로 달성했던 것이다.

 

 

 

4. 땅굴과 엘리베이터

법원 검찰청 밑으로 굴이, 침침한 땅굴이 뚫려 있는 줄은 나는 몰랐다.

감옥 출입이 잦았던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얘기들은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그건 얘깃거리가 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할지 모른다.

쇠창살 사이사이에 맺히는 서러움만 얘기해도 끝이 없을 텐데, 이 땅굴까지 포함시키면 필경 지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나는 땅굴 얘기를 좀 해야겠다.

뭐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기록해둘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구치감으로부터 검찰청 빌딩 5층 공안부 검사실까지 걸어가는데 꼭 30분이 걸렸다.

논스톱 엘리베이터를 탔는데도 말이다.

보행을 아주 느리게 할 수밖에 없었고, 계단은 부축해서야 오르내릴 수 있었다.

나는 이 땅굴에 들어서면 늘 환상적인 세계로 들어온 것만 같았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고 갈래 길도 있으며 계단도 있다.

가끔씩 흐릿한 바깥 빛이 조금씩 새어드는 데도 있고.

 

그러나 무엇보다 굴 벽 여기저기 걸려있는 노란 불. 이것이 나를 어질어질하게 했다.

여기 들어서면 속이 느글느글해지고, 굴 전체가 왼쪽으로 기우뚱 오른쪽으로 기우뚱 끊임없이 흔들렸다.

이런 것을 롤링이라고 하는지 핏칭이라고 하는지 헷갈리지만, 멀미가 날 것 같아 멈춰서서 벽에 기댄 채 호흡을 조정해야만 했다.

눈을 감고 자꾸 속을 내리 누르면서.

 

어떻게 보면 자베르 경감에게 쫓겨 도망쳤던 장발장의 암담한 하수도 같이 생각되었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던 악당 무림인들을 쳐부수기 위해 당당하게 쳐들어갔을

무협지 속의 의협심 있는 청년 검술인의 지하통로일지도 모르겠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몸을 피하는 장발장은 분명 아니었고,

불의한 도배를 무찌르기 위해서 짓쳐 들어가는 경천동지할 힘을 가진 청년 검객도 아니었다.

아니 어찌 보면 장발장과 청년 검객이 짬뽕된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까.

그런 수백명 중의 하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 땅굴을 구역질내면서 수없이 왔다 갔다 했다.

9월말부터 11월말까지 두어 달 동안. 남영동에서 송치되던 날 말고는 맨 첫 번째로 가막소에서 검찰취조 호출을 받던 날,

나는 앰블런스인가 지프차인가를 타고 구치감에 도착했다.

거기서부터 땅굴을 걸어서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교도관과 더불어 검찰서기의 에스코트를 구치감에서부터 받았다.

이 정중한 배려에 나는 감사하는 마음조차 가졌다.

내가 고문받아 엉망이 된 것을 알고 이런 배려를 해 주는 것인가.

어쩌면 VIP 대접을 하느라고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냥 그런 중에도 기분 나쁘지 않아서 은근히 희희낙락하며 이 땅굴을 통해 검찰청을 드나들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피의자, 피고인은 모두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는데

유독 나는 엘리베이터를 지하층까지 끌어내려 손님으로는 오직 혼자 타고 5층까지 논스톱 직행했다.

어떻게 실수로 1층이나 3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춰서 문이 열리게 되면

검찰 서기와 교도관이 엄숙하게 입장금지를 선언하는 것이다.

이럴 때 오는 짜릿한 그 기분을 누를 수 없어 높은 사람들은 별 희한한 짓도 다하는 것일 게다.

 

내 손에는 벨기에제 특별 수갑이 채워져 있고, 벌건 포승줄이 칭칭 동여매져 있지만 나는 여유있게 웃어 주었다.

혹시 내가 정치인 경력이 있었다면 손으로 V자를 그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조바심쳤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나도 약간은 머리가 회전되는 편이어서 이런 특별 에스코트에 '홍이야 홍이야' 하며

잠에 취해 꿈에 취해 계속해서 헤맬 리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태는 분명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철저한 고문은폐 수단이었다.

아니 완전무결한 고문은폐의 예기치 못한 실패로 인해 책임추궁을 당한 검찰이 취한 그렇고 그런 것이었다.

 

이 지하 땅굴을 가끔씩 오가며 학생들, 오랏줄로 꽁꽁 묶여서 더욱 기가 사는 학생들의

아는 체하는 인사와 목소리를 만나게 되는데, 그것을 차단하기 위한 권력의 방어조치였다.

고문받은 얘기를 주고받아 그것이 가막소에 퍼지고, 그리하여 바깥으로 흘러나가면 골치가 아프므로....,

 

다른 모든 기회는 완전 차단이 가능한데, 가족, 변호인, 다른 재소자와의 만남은 물론

담당교도관 이외에는 누구도 접근이 봉쇄되는데, 이 땅굴이 성가신 것이다.

 

사실 나는 거기서 많은 학생들과 부딪쳤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정어정 벽을 붙잡고 기어가는 나를 보고 대략 알아봤으며, 큰 소리로 나를 격려해 주었다.

슬슬 고문 얘기도 하고 시간은 불과 3~4초 정도씩 밖에 안되었지만 꽤 재미가 있었던 것 같다.

이처럼 검찰 서기의 에스코트는 대략 한 달 반 이상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조금씩 약화되고 흐지부지되기까지 시간이 제법 흘렀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 편 사람들은 마음 놓고 만나서 서로 눈빛도 교환하고 서러운 가슴을 열어보이기까지는 세 달 여가 걸렸던 것이다.

 

그동안 검찰 서기의 에스코트 차단을 포함해서 정치군부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던 것이다.

단 한 차례의 예기치 못한 실패를 제외하고 정치군부는 완전무결하게 성공했다.

그러나 단 한 차례의 실패, 그것은 대단히 치명적이었고 그들에게는 큰  정치적 부담이 지워졌다.

고문의 증거, 발뒤꿈치 상처 딱지 탈취사건

85넌 12월 31일. 고의적인 변호사 접견 봉쇄가 풀린 지 닷새가 되던 날, 나는 흥분하여 깊숙이 간직해 두었던,

양쪽 발뒤꿈치에서 아물어 떨어진 상처딱지를 이돈병 변호인과 목요상 의원에게 드리면서 재판의 증거로 제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것이 통할 리 있겠는가.

행형법상 교도관 입회라는 것을 이용, 간섭하는 사람들에 의해 제지당하고 결국은 강탈당하고 말았다.

그들로서는 구체적이고도 명백한 고문의 증거가 내 가족이나 민주화운동가 손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해야했고,

그래서 나는 모든 주의를 다했던 것인데 정치군부의 뻔뻔스러움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임이 또다시 증명되었다.

 

그토록 야만적인 고문을 당하고도 또 당했으나, 역시 나는 맹하고 순진한 경지를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여러 사람이 보았다 하더라도 뭐든지 필요하다면 언제나 깔아뭉개버리는 그들인데도....나는 또 설마 했던 것이다.

정치권력의 수작은 이렇게 성취되었다.

절취의 시도. 실패, 노골적 강탈, 말썽이 생길 소지가 있는 사람들의 사전 인사이동 조치, 그리고 거짓말로 진행되었다.

특권적 군부의 본질이 이 작은 사건에서도 축약되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폭력적 대처와 뻔뻔스런 은폐, 그리하여 끊임없이 불신과 증오를 조장하고 갈등과 대결적 분위기를 반복해서 불러 일으켰다.

절취의 시도는 이랬다.

변호사 접견을 끝내고 내 방으로 돌아와 대략 한 시간 쯤 지나자 면도를 하라며 면도사가 왔다.

보통 병사는 목요일에 면도를 하는데 금요일에 온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또 이상한 것은 다른 때와 달리 방 바깥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다른 방에 있는 재소자들에게 내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려고 언제나 방안에 앉아서 면도를 하곤 했기에 묘하게 생각했었다.

 

문밖으로 나가 앉았더니 다시 내 감방 안을 볼 수 없는 거리로 옮기라는 것이었다.

좀 이상하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지만 거절할 필요가 없어서 그대로 따랐다.

면도를 시작하자 곧 검방 담당 교도관이 내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 옆모습을 보니 얼굴이 굳어진 표정이었다.

 

망설일 때가 아니었다.

서둘러서 면도를 중단시키고 내 방으로 들어가니 역시였다.

나는 그동안 모은 상처 딱지를 이들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평범하게 휴지에 싸서

두루마리 화장지 가운데 틈새에 끼워 놓았었는데, 검방교도관은 이미 상차딱지를 싼 휴지를 훔친 다음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변호인 접견시 이들이 똑똑히 보았고. 이에 대해서 즉시 보고를 받은 가막소 간부들과 또 뭐시뭐시들은 절도를 지시받았을 것이고,

그 하수인으로 이 검방 담당관이 선택되었을 것이다.

변호인에게 전달하는 것을 방해받은 뒤 나는 줄곳 불안해 했지만 또 '설마'하고 화장지 틈새에 끼워 놓았으니,

이 교도관이 찾아내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던 것이다.

이 배신감이라니, 이 저주받아 마땅한 가증스러움이라니!

얼굴이 확 달아오른 나는 "생사의 고비를 넘어 온 나에게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소리를 질렀다.

 

교도관은 쩔쩔매고 주저하다가 십 분 정도 지나자 마지못해서 모자를 벗어 자기 이름 써 놓은 곳,

거기에서 휴지를 꺼내어 놓았다.

나는 이번의 절취 시도, 도둑질은 이렇게 막았지만 또 다시 훔치러 올텐데,

특히 내가 없을 때는 어디다 두어야 하나 궁리하면서 막연해 하고 있었다.

이럴 즈음 권력은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염치 따위는 벗어 짓뭉개 버리고,

주저하지 않고 강도의 본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서는 나의 상상력,

아니 우리의 양식범위를 간단하게 넘어버리는 본래의 흉측한 모습이 나타는 것이다.

검방 담담 교도관이 물러간지 십여 분이 되었을까, 최덕이라는 주임이 와서 내 방 창문을 열고

"상처 딱지는 불법소유이니 내 놓으라"고 협박을 했다.

 

"사람은 최소한도의 양심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윗자리에서 시킨다 해도 해야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지 않는가.

천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나는 외쳐댔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 있겠는가.

시비를 걸고 폭력으로 빼앗도록 지시를 받은 이들은 창백하게 질릴 것도 같고, 겁을 잔뜩 집어먹는 눈으로 그냥 돌진해 왔다.

가막소 간부들은 싸우는 소리가 시끄러워지자 다른 방 재소자들은 목욕을 보내서 텅 비게 해놓고 설쳐 대었다.

 

그들은 나에게 욕을 하고 공갈도 쳤지만 이것이 통하지 않자 나를 끌어낸 다음, 방을 샅샅이 뒤지고 엎어 놓았다.

그 상처 딱지는 내 허리춤에 있었으니 이제는 내 몸에 손을 댈 차례가 되었다.

부소장 권태정, 보안과장 송선홍, 보안계장 방을룡, 주임 최덕, 보안과 배치부장,

그리고 교도관 7~8명이 지옥사자 같은 얼굴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다가 왔다.

이들이 내 방을 뒤지는 동안 나는 권태정과 의무관실에서 말싸움을 했으나 이미 사태는 너무나 명백하였다.

당시 화내지 않고 마주 앉은 권태정에게 나는 이렇게 얘기했다.

"이건 당신에 대한 배려이다. 결국 나는 빼앗길 것이고 그것으로 고문의 구체적 근거는 잃게될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당신 개인들에게도 반드시 피해가 갈 것이다. 난 꼭 그렇게 하겠다. 그러니 당신은 서둘러 내려가라."


최덕의 직접 지휘와 권태정, 송선홍, 방을룡이 치료실에서 지켜보는 사이에 병사 복도로 끌려나온 내게

이른바 검신을 한다며 옷을 벗기려 했다.

 

아! 몸을 부딪쳐 싸워야 할텐데 어떻게 하나.

남영동에서 고문받은 후 나는 공포심에 눌려 그야말로 기가 죽어 있었고, 몸도 제대로 움질일 수 없어서 저항할 수가 없었다.

지켜봐 주는 눈 하나 없이 양팔를 꽉 붙잡은 채 허리띠를 풀은 이 강도들은 허리춤에서 상처딱지를 발견하고 강탈해 갔다.

 

내 몸이 아마 지금만 같았어도 격렬하게 저항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분하고 원통했지만 울화병이 깊어지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지 않도록 나 자신을 안정시켜야 했다.

첫 공판 기일 85년 12월 19일.

남영동에서 고문당한 얘기 뒤에 이 파렴치한 강도행위를 짤막하게 얘기했다.

권태정은 빼놓고. 내 충고를 스스로 지켰던 것이다. 그리고 송선홍을 증인 신청 했다.

며칠 후 연말쯤, 갑작스럽게 송선홍과 접견과장이 각각 안양교도소와 대구교도소로 전보 발령나 버렸다.

접견과장은 나와 변호인의 접견을 봉쇄했기 때문에, 송선홍은 딱지사건으로 말썽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구치소에는 의아해 하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나의 '공판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라고 수군대는 것이 내 귀에도 들려왔다.


이 상처딱지에 대한 재판부의 조회에 대해 구치소측은 '빈 휴지를 압수해서 폐기처분했노라'는 회신을 했다.

고문, 은폐, 거짓말, 중첩적 범죄행위를 감행하고도 여전히 늠름하게 웃어대는 저 정치군부의 가면에

우리는 침을 빝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 사건에서 내가 잊을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그 검방 교도관이 도둑질에 실패하고 간부들에게 몰려 나에게 닥치기 전까지 얼마나 닥달을 당하였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이 검방 교도관은 상처딱지를 손에 넣으면서 여전히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만일 이것이 재판부에 제출된다면 자신은 파면됐을 것이고, 나이 50세인데 식구들과 거리에 나앉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나는 당신을 평생 저주했을 것'이라면서 씩씩거렸다.

 

이 교도관 얘기대로 됐을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용케 재판부에 증거로 현출되었다면

이 구치소 직원과 간부들에게 일정한 부담과 피해가 돌아갔음은 거의 틀림없었다.

나는 교도관의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편 슬프고 다른 한편으로 혼란이 일어났다.

피해와 부담은 늘 자신 혹은 나와 비슷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만 짊어져야 하는가.

민주화의 귀결은 우리에게만 돌아오는 것이 아닌데,

전제와 자의적 지배로부터 진정한 법 지배의 실현 채무는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정치군부가 이런 나약함, 비열함의 틈을 뚫고 끊임없이 공포심을 조장, 확산시킴으로써,

자신들이 지배를 계속할 수 있는 도구로 활용하는 이 무서운 쇠사슬을 어떻게 끊어버릴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무슨 힘이 있는가. 왜 우리에게 부담을 안기는가. 당신들의 뜻은 잘 알지만 우리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구속되기 전에도 이런 얘기를 여러 번 들었지만, 구속 이후 그야말로 어디서나 귀가 따갑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도 위에서 시키는 일은 그것이 옳은지, 어떤지를 불문하고 행해지는 모습에서 참으로 깊은 외로움에 빠지곤 했다.

 

나는 이것을 고문 현장인 남영동에서, 이 구치소에서, 검찰에서, 그리고 공판정에서도 반복해서 들었다.

그 표현되는 방법과 분위기는 달랐지만 나는 모두에게서 분명히

"우리가 무슨 힘이 있는가, 자신들을 이해해 달라"는 요청을 여러 번 들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직위가 낮은 사람은 '이 밥줄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솔직히 얘기하는 데에 비해서 직위가 높은 사람은

에둘러서 완곡하게 말하거나 '자리를 유지하려면 별 수가 없다'는 씁쓸한 자조 속에서 그것을 표현했던 차이는 있다.

물론 아주 드물게 적대적인 사람도 있었다.

자신이 뭔가 대단히 큰 존재인것처럼 어깨에 힘주는 사람이나

자리가 제법 높아 그에 걸맞게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눈을 가진 사람들,

그래서 그 윗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들,

그런 지식인들을 왜 내가 모르겠는가. 정치 군부의 졸렬한 하수인들을......


나는 이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오늘도 이 가막소 맨 땅바닥에 침 한번 뱉고 신발바닥으로 문질러 버린다.

 

 

 

3. 묵비권의 대가 - 보복구속과 접견 봉쇄

관례가 대충 그렇다고 듣기도 했지만 (한눈으로 봐도 내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몇 줄의 제1회 신문조서로 끝나고 나는 검사 방을 떠났다.

 

피의자 신문조서라 해봐야 내가 김근태임을 확인하는 것과

뉴욕 타임즈 동경지국장을 만나서 인터뷰한 사실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이에 대해 그렇다고 대답했으며, 질문과 답변을 합해서 댓 줄 정도였을 것이다.

손도장을 찍고 나는 떠났다.

구치소는 천국이었다.

야수들의 소굴인 남영동에 비하면, 나는 내일부터 처를 면회할 수 있는 곳으로 온 것이다.

 

그런데 기다리는 면회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되지 않았다.

끔직한 고문을 받으면서 나는 바깥 사회에서 정치적인 대 변란이 일어나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믿었다.

광주사태 몇 배 가는 대대적 학살이 발생하고 있다고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야 그런 용서할 수 없는 고문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79년 YMCA에서 감행한 유신잔당축출 궐기대회, 80년 5.17과 광주사태 때 잡혀 들어갔던 수많은 민주인사. 학생들이 당했던

참혹한 고문을 여러번 들었던 나로서는, 바로 그 역의 추론을 할 수밖에 없었다.

 

김병걸 선생님이 당한 고문, 백기완 선생님이 반죽음이 되어 버린 고문, 네 번이나 의식을 잃어버렸다는 조성우 씨,

그리고 누구하나 예외없이 엉금엉금 기도록 짓밟혔다는 그 시절이 명백히 다시 시작된 것이다.

 

남영동 방구석에 찌그러든 나에게 그것은 분명했다.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에게 내 처, 최정순, 그리고 변호인이 나타나다니,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불일치, 혼란을 수습하려면 나도 들을 얘기가 많을 것 같았다.

할 얘기도 있고, 아니 수없이 많고, 분명히 내 처는 매일 빠지지 않고 구치소에 와 면회신청을 했을텐데,

그것을 우격다짐으로 막는 것이로구나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다 해도 더 이상 고문을 당하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다.

면회봉쇄는 고문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었다.

그러나 나는 면회봉쇄가 고문의 은폐기도와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를 뚫고 나갈 방도, 대처 방안을 조금씩 궁리해 보곤했다.


9월 30일 검찰청으로 끌려 나갔다.

거기엔 김원치 검사와 김종남 검사, 검찰 서기 그리고 타이피스트 한 사람이 그렇게 있었다.

조그만 메모지에 몇 항목을 적어서 나에게 보이고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느냐. 종이에 쓸 수도 있느냐"고 김원치 검사는 물었다.

 

"둘 다 할 수 있다"고 하니까 김 검사는 그러면 "한번 써보라"고 했다.

지금으로서는 잘 기억해 낼 수 없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고 생각된다.

민족민주주의의 내용과 배경, 공급경로와 전파경위,

시민민주주의 혁명, 민족민주주의 혁명, 민중민주주의 혁명의 차이와 각각에 대한 평가 등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을 자술서를 쓰라는 얘기임이 분명했지만,

당시는 나에게 '참고하기 위한 것이니 한번 써봐라'는 뜻으로 들렸다.

 

나는 김검사에게 물었다.

"쓰기 전에 두가지를 묻겠다. 나는 변호사 접견을 하겠다. 또 가족 면회를 하겠다.

그런데 지금 이것이 봉쇄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것이냐? 설명해달라."


이에 대해 김검사는 "변호인 접견은 해야겠지요" 하면서 그러나 가족 면회는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재차 "가족 면회가 금지되었다는 뜻이냐" 묻자 "그렇다"는 것이었다.

검사가 금지한 것이고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어이없어 하면서 "금지의 근거와 이유를 명확히 제시하라"고 요구하자 "다음에 자세히 답변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면회금지는 증거인멸 우려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고문의 증거를 은폐하기 위해서, 인멸하기 위해서 내려진 조처"라고,

그러자 김 검사는 "나를 열 받게 만든다"고 말하며 정말 열을 받는지 얼굴이 붉어지는 듯하더니 이내 하얘지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몇 번 되뇌었다.

'열받게 한다고, 한다고....' 이건 모욕적이고 도발적인 언사였다.

고문의 공포 속에 빠져 있는 것은 그때도 변함이 없었지만 나는 본래의 나 자신,

고문받기 전의 나로 조금씩 되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내 속을 건드렸다.

그건 아직 자존심은 아니었고 오기였던 것이다.

 

나는 선언했다.

"이런 조건에서는 말하지 않겠다." 진술거부를 분명하게 얘기했다.

두 사람의 김 검사는 조금 당황하는 듯하면서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나왔다.

능히 추측한 것이지만 협박적인 언사와 분위기가 튀어나오고 조성되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지금 진술거부를 하겠다고 한 것에 대해 협박하는 것이냐. 남영동에서도 진술거부하겠다고 했다가 참혹한 고문을 당했는데,

검찰에서도 법으로 보장되어 있는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것에 대해 협박하는 것이냐" 고 확인했다.

 

김 검사의 말은 '협박'이 아니라 '권유'라는 것이었다.

여하튼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옥신각신했지만, 이것으로서 나의 진술거부는 확고해져 버렸다.

심리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진술거부, 묵비권은 관철되었다.

헌법과 형사소송법에 권리로서 보장되어 있는 이 묵비권을 해낸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묵비권을 획득한 대신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아니 또 다른 보복조치를 당했다고 하는 편이 더 적당할지도 모른다.

이 보복조치를 통해서 고문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활동하였다, 정치권력은.


검찰이 공식적으로 말한 것뿐만이 아니다.

공소제기 단계에서 분리 결정하여 - 뉴욕 타임즈 동경지국장과의 인터뷰, '민주화의 길 등- 법적지위를 불안정하게 만들었으며,

논고에서 밝혔던 것처럼 묵비권 행사에 대한 보복적인 중형 구형 등이 있던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고문 상처에 대한 증거보전신청의 기각사유로도 묵비권행사가 핑계로 이용되고,

검찰에 의한 가족면회금지는 물론 서성판사에 의한 면회금지결정에도 마찬가지로 이용되었다.

변호인단에 의한 증거보전신청이 제기된 얼마 후 검찰은 나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면서

"앞으로도 쭈욱 진술거부할 것이지요?" 하고 다짐을 한 적이 있다.

 

그때 고마워하는 마음이 되었었다.

그런 사실을 알려준 것도 그렇지만 묵비권을 공식적으로 기정사실화해준 것도 피차간에 좋은 일이었다.

지금 이를 생각해 보면 나에 대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정치적 대처 필요성에서 그러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당시 정치권력은 묵비권행사 여부는 별 문제가 아니었고,

고문의 은폐에 모든 것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묵비권 여부를 현실적으로 확인하고,

이것을 증거보전신청을 받은 법관에게 제시하여 법관이 편하게 기각 결정할 핑계거리로 사용하도록 했을 것이다.

묵비권을 고문은폐의 유효한 수단으로 써먹는 한편 묵비권 고수로 인한 공소유지의 어려움을 다른 방편으로 정치권력은 해결했다.

10월 초순경, 아마 10월 5,6일경이었을 것이다.

최민화, 김희상, 김종복 씨가 구속되었다고 검찰이 통고했다.

 

나는 납득할 수가 없어서 "그 이유가 무엇이냐, 민주제 개헌운동 때문이냐?"고 다그쳐 물었지만, 명료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민청련 간부들에 대한 전면적 구속과 지명수배, 이것이야말로 나의 묵비권 행사에 대한 가장 철저하고 잔인한 보복이었던 것이다.

당시 나는 이것을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뭐라고 할까, 그런 혼란뿐이었다.

 

왜 이렇게 뒤늦게, 내가 체포, 구속된지 한 달 후에나 새삼스럽게 확대하는가,

특별한 일을 민청련 간부들이 했는가? 그렇지 않다면야....

남영동은 고문을 수단으로 하여 결국 민청련을 반국가단체로 몰아버렸지만

나는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날벼락이 떨어지지 않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이 점에 있어서 남영동 아니 정치권력과 나 사이에는 타협이 이루어졌던 것인데, 즉 나에 대한 보복으로 국한하도록 말이다.

새삼스런 구속의 확대를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새로운 사건 내지 사태발전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묵비권에 대한 비열한 보복조치였던 것이다.

나에 대한 공소증거확보를 위해서 구속을 대폭 확대해 버린 것이다.

검찰이 나에게 묵비권을 고수하면 오히려 불이익이 크게 돌아갈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참 분한 일이었다.

간 주고 쓸개도 주어 버리고 만 꼴이 되어버렸다.

묵비권 행사라는 말은 얻었지만 야비한 보복을 여러가지 형태로 받은데다가 묵비권 행사 그 자체도

사실상으로는 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돼 버렸기 때문이다.

조서가 작성되거나 자술서를 쓰지는 않았지만 고소제기된 사실은 물론 그 주변적 사실을 포함하여

남영동에서 강제된 것까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는 고문의 공포,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이야기했으며, 후에는 진술거부로 인해 관여 검사가 처해 있는 곤경,

상사로부터의 힐난과 질책받음 등이 예상되고 암시되어 그야말로 개인적 차원에서 미안해서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또한 검찰에게 온건하게 보이고 싶은 심약한 마음도 작용했지만

변호인, 가족 등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당함으로써 생겨난 이상심리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나에게 부담이 되고 불이익이 될 수 있는 것을 공판정에서 말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검찰에서 내가 한 말에 분명히 구속되었으며, 동시에 그 말을 지켜야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런 성실성은 아무런 의미도 보답도 없었다.

오직 배신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함 뿐이었다, 돌아온 것은.

만 석달 이상이나, 공소제기되고도 한 달 반 이상 동안 나는 가족은 물론 변호인을 만나지 못했다.

뭐라 할까, 같은 편이라 할까 좋은 나라끼리라고 할까.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경우 사람은 감당하기 어려운 이상심리에 빠지게 된다.

극도의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공식적으로 가족을 만나게 된 것은 12월 20일이었으니 구속된 이후 3개월 반 만이었다.

남영동에 있을 때는 물론 검찰 심지어는 서성 판사에 의해서도 면회가 금지되었는데,

그 이유라는 것이 '죄증을 인멸할 상당한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진술을 거부했기 때문에 상당한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고문은폐를 위한 것임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판, 검사들의 형식적인 이 결정은 논리 그 자체로도 위험한 것이다.

즉, 이 사건이 고문에 의한 강제자백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흔들리게 할 수 있는 요인이라면

무조건 금지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9월 26일 송치된 이후 12월 9일 변호인 접견봉쇄가 사라질 때까지, 거의 일 주일에 두 번 또는 세 번 정도 검찰청에 소환당했다.

구치소 출발시각은 보통 3시 반 전후가 많았고, 이것이 변호인 접견을 방해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당시에도 알았지만,

그러나 사실 전모를 분명하게 파악하지는 못했다.

 

한마디로 비열한 수작을 부렸던 것이다.

더러운 수법을 사용했다.

변호인이 와서 접견을 신청하면 그때야 부랴부랴 출정을 내보냈으니...

이렇게 맞춰서 하는 짓들인 줄은 정말 몰랐었다.

검찰에게 "나도 변호인 접견을 해야겠다"고 여러번 말했다.

그럴 때마다 우물쭈물하고 대답이 명백하지 않았다.

"접견해야겠지요. 검사장에서 하면 어떨까요?" 또는 "변호인이 선임계를 내지 않아서 아직 안 된다"고도 하고.


나는 당시 헌법의, 형사소송법의 변호인 접견권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검찰에게 감쪽같이 속아 버렸다.

여하튼 그때 변호인이 오면 나를 즉시 접견봉쇄하기 위해서 불러냈던 것이다.

검사가 없는 경우 구치감에서 그냥 돌아오기도 하고, 회의가 있다고 금방 검사가 나가 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토록 비열할 줄은 몰랐고, 나도 사태를 분명히 파악하지는 못했었다.

언젠가 이을호 씨의 감정유치문제와 시립정신병원에서 국립정신병원으로 옮겨 달라는 얘기를 하러 왔다는 김상철 변호인을

검찰청 복도에서 우연히 만났었다.

그때 변호인은 구치소로 매일 접견신청을 한다고 말해주었다.

이렇게 알고 있었는데다가 더욱 나를 확신케 만든 것은 당시 구치소 부소장 권태정의 여러 번에 걸친 확인이었다.

4~5번에 걸쳐 내 방 앞에 머물러서는 "매일 검취 나가지요?" 하고 묻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정정해서 말해 줬다. "그렇지 않다. 일주일에 2~3번 간다"고.

그러나 그 다음에 또 와서는 역시 "매일 나가지요, 검취를?" 하고는 다짐했다.

 

이곳 어느 간부 말마따나 내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받고 있으며,

그것을 직접 확인하는 부소장이 이런 혼란을 일으킬리는 없는 것이고,

매일 검취 나가는 것으로 하여 변호인 접견봉쇄 핑계를 미리 확정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렇게 알고 있는 나는 검찰청에 불려 나가면 관여 검사에게 미안한 마음,

나의 진술거부로 받게 될 직장에서의 곤경에 대해 늘 부담스러워 했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마음은 당시 철저히 우롱당하고 있었으니....

변호인 접견봉쇄가 풀린 뒤 구치소 간부 여럿이 이렇게 말했다.
"어떻습니까, 변호인 만나게 되니까, 더 약이 오르지요?"


그러나 그 때는 가슴에 담아 두었던 고문당한 얘기를 하느라고 바빠서 이 뜻을 새겨듣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고의적으로 변호인을 따돌린 것이고,

그것이 검찰은 물론 구치소 간부들 사이에서도 공공연한 사실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래놓고도 재판부엔 두 명은 빼놓고 모두 출정을 나가서 변호인 접견을 못 했었다고 대답해 온

권력의 철판같은 뻔뻔스러움이라니...

법이니 법 위반이니 하는 얘기를 하고 싶은 의욕은 정말 없지만 기록을 위해 몇 가지만 더 짚어 보겠다.

우선 9월 26일 송치 당일, 관련 검사들에게 발뒤꿈치 상처와 발등의 전기고문 흔적을 보이면서 조사하여 처방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또 진술거부를 철회하도록 종용받았을 때 나는 "고문을 조사하여 처벌하다면 검찰요구대로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검찰은 두 개의 사건이기 때문에 고문도 조사해 처벌하겠지만

묵비를 중지하는 것이 나에게도 이익이 될 것이라고 얘기했었다.

여하튼 나는 구술을 통해 고소를 제기했던 것이다.

형사소송법 237조는 '구술에 의한 고소를 받은 검사는 고소조서를 작성하여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는데

검사는 이것을 위반한 것이다.

 

하긴 고소장을 쓰기 위해서 집필하겠다고 요청했고, 그것의 봉쇄에 대해 네 차례나 공판정에서 항의를 해도 꿈쩍하지 않는

이 정치군부의 배짱을 보면 고소조서 따위는 한낱 농담에 지나지 않은 것일 게다.

대한 변협이 고발한 지는 거의 넉달, 본인의 처 등이 고소를 제기한 지 석달이 지나가도

고문에 대한 조사 제스처 그런 것조차도 있을 수 없는 이들인 것이다.

 

그것을 영원히 깔아뭉개버리기로 작당한 결심이 변할 리 있겠는가.

10월 26일 공소제기 이후에도 변호인 접견을 방해하려고 검찰청으로 불러내었는데,

이것도 순수하게 형식논리적으로만 봐도 위법인 것이다.

피고인인 나는 소송주체로서 검사의 주장인 '소인의 이유가 있는지 없는지를 비판하는 활동'이 보장되어 있다.

따라서 피고인을 수사기관이 신문함으로써 증거수집 수단으로 삼는 것은 당사자 지위와 양립하지 않는다.

또한 신문 당함으로써 피고인은 공판활동에서 물리적, 심리적으로 제한을 받게 되었다.

또한 이 기간동안 나는 검사의 소인을 제시받아 제1회 공판기일 전까지 그에 대한 공격,

방어를 준비해야 하는 최초이자 유일한 기회를 유린당한 것이다.

법 얘기, 이는 모두 쓰잘데 없는 노릇이어서 이 정도로 일단 마치기로 한다.

다만 끝으로 한 가지 분명하게 할 것이 있다.

검사를 공익의 대표자로 규정하고 있는 검찰청법 제5조를 개정할 시기가 무르익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더 이상 주저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떨까.


'검사는 정치군부의 옹호자며 방위자이고 동시에 공익의 대표자'라고 하든지,

아니면 너절하고 들척지근한 것 모두 다 빼내 버리고 화끈하게 '오직 정치군부의 옹호와 방위를 그 직무로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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