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본인에게 직접 고문을 가한 사람들의 이름이나, 용모, 언동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적절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까닭이기도 하지만, 그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아직도 이 고문자들에게 갖고 있는 두려움, 그것이 하나의 원인이 되겠지요.
그리고 고문에 가담했던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이 보낸 준 약간의 따스함.
본인에게 너무가 가혹한 고문을 하면서 흘렸던 그 눈물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적 구원의 가냘픈 빛이기조차 했습니다.
이것도 여러가지를 밝히는 것을 주저하게 만드는 일인 것 같습니다.
본인이 이 고문자들을 이제는 미워하지 않거나 용서를 했거나 해서는 물론 아닙니다.
아니 용서를 거론하는 것은 명백히 거짓되며, 또 그럴 수도 없는 것입니다.
나는 항의하고 규탄하고 고발합니다.
이 참혹한 고문행위를 결정하고 지시한 그 사람들, 사실 초점이 여기에 모아지도록하기 위해,
그러고도 철면피하게 감행하는 은폐행위를 조장하는 자들을 규탄하기 위해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시점에 다다른 거 같습니다.
85년 9월 4일 오전 9시경 본인은 남영동 5층 15호실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고문을 지휘하고 감행한 자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과 과장(일명 사장) 총경 윤재호
1과 전무 경정 김수현
1과 전무 경정 백남은
1과 ? 경감(?) 고문담당전문가
1과 상무 경위 김영두
1과 부장 경장 정현규
1과 부장 경장 최상남
1과 부장 경장 박병선
1과 부장 경장 ?
고문의 직접적 지휘는 전무 김수현과 전무 백남은이 담당했으며 앞 사람이 주 신문관이며 뒤 사람이 부 신문관이었습니다.
김수현에게는 구성요건, 특히 국가보안법 구성요건의 그물망 내로 몰아넣고
구속의 근거와 공소제기 및 유지의 증거를 획득해 내는 임무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백남은에게는 민주화운동, 특히 재야운동권에 대한 정보를 고문을 통해서 한꺼번에 손쉽게 뽑아내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값싸게 말입니다.
앞에서 장의사집 둘째 주인이라고 언급한 자가 바로 고문기술자로서 건장하고 불량배 냄새가 나는데,
대부분 이 사람이 고문을 직접 감행했습니다.
김영두는 대표적으로 고문보조를 했으며 진술조서 작성, 집시법 관계조사 등을 담당했습니다.
나머지는 하수인들로서 고문 보조역할을 담당했고 자술서에 쓸 문장을 본인에게 불러 주는 일, 그리고 방을 지켰던 것입니다.
머리를 쳐박히고서 끌려가다
비가 내리는 새벽 5시 반, 그 날은 유난히 껌껌했습니다.
본인은 잠이 덜 깬 채로 혼란에 빠져 끌려갔습니다.
대략 남영동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헤아리긴 했지만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닌데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할까.
아무리 꼽아봐도 가슴 속만 저려올 뿐이었습니다.
머리는 혼란스러워지기만 하고.
서부경찰서 유치장에서 어떤 의경이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이렇게 이른 새벽에 내보내주는구나.....,
고마움조차 느끼며 옷을 주섬주섬 꿰어입고 유치장을 나섰습니다.
지긋지긋했던 일곱차례의 유치장신세 또 체포, 연금, 이 모든 것으로부터 얼마간은 남남이 될 수 있겠구나.
지금 2년 동안 민청련 의장으로서, 민주화운동 대열의 책임을 짊어진 사람으로서 가져야만 했던 외로움과 중압감에서
해방될 수 있는 오늘이다.
무엇보아 잠은 실컷 잘 수 있겠지.
하늘을 올려다보고 바람소리에 마음을 실어서 흘려보낼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유치장 문을 나섰습니다.
몇 번 유치장 문을 뒤돌아보기도 하구요,
서부경찰서 유치장은 이번이 두 번째였습니다.
수사과 사무실을 지나 복도로 나서는 순간 스산한 어둠이 확 덮쳐 왔습니다.
7~8명의 정사복이 앞을 가로막고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아찔하더군요. 다리도 후들후들거리고, 여러 번 체포당했었지만 이번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때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완전히 허를 찔린 것입니다.
마음도 몸도 모두 쭈글쭈글해지더군요.
이미 꿈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김근태 씨죠? 같이 가봐야겠소."
경상도 사투리의 거한이 내 앞을 막고 나섰습니다.
순간. '이건 구속이구나' 그쯤은 판단했습니다.
이 동행 요구에 강력하게 저항할까도 생각했지만 거기서의 저항은 결코 앙탈에 지나지 않게 되고
오히려 초라해지거나 추하게될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좋소, 어딘지 가봅시다."
보호실 쪽으로 뚫린 좁은 복도를 지나 마당으로 나서니 거기 포니 자동차가 시동을 건 채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유행가 곡조가 입속을 맴 돌다 사라지더군요.
사방은 껌껌한데 경찰 10명이 둘러싸고 하늘은 낮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목을 곧추세우고 그래도 하늘 한 번 쳐다보았지요.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만 오기를 세워야 했습니다.
잠과 휴식, 그 어떤 것에 대한 그리움은 모두 꿈이 되어 버렸습니다.
뿌옇게 탈색된 꿈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뒷자서 가운데 올라탔습니다.
왼쪽에서 최상남이, 오른쪽에는 김영두가 앉았습니다.
최상남이 점퍼를 벗어 내 머리를 감싸고 눈이 보이지 않도록 한 채 머리를 짓누르더군요.
김영두는 키 188cm, 몸무게 95kg쯤 나가는 거한한데 그 체격이 나를 짓눌러 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 이렇게 왜소해지고 허망해지던지, 나는 저항을 할까도 행각해 봤지만 허둥지둥 해질뿐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경우에는 반드시 저항을 했고 싸움이 붙었습니다.
늘 그랬거든요. 한번도 맥없이 강제로 끌려간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안되더군요.
분위기가 얼마간 다른 것도 있었지만 일단 구류를 살고 나가는 날이어서 그저 멍하니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간 기가 꺾였습니다.
반쯤 거리를 둔 채 마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유가 뭘까에 대해서 바쁘게 머리를 굴리기도 했구요.
도착하기 전까지 마음을 세우고 대응 태세를 갖추겠다고 행각하면서 저항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몹시 씁쓰름했습니다.
이것은 패퇴의 보호, 허약함으로 충분히 해석할 수 있을텐데...하고 말입니다.
이리저리 굴려도 오리무중이었습니다.
'그래 부딪치는 거다. 정치군부가 늘 벌여 오던 것이니까 온몸으로 부딪치자. 절대로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다짐을 하고 또다시 다짐했습니다.
30~40여분쯤으로 느껴지더군요.
차에서 내려 점퍼를 덮어쓴 채 건물 입구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비좁게 느껴지더군요.
그리고 누군가 사방에서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환히 들여다보이는 엘리베이터일 것으로도 생각되었습니다.
박살나 버리는 진술거부권-칠성대 위에 올라가기까지
5층 15호실. 건물 왼쪽 맨 끝방으로 끌려갔습니다.
겉으로는 주저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습니다.
방안에 들어서니까 덮어씌운 점퍼를 치우더군요.
사방을 둘러보니 짐작할 만했습니다.
이렇게 낯설고 어색할 수가 없었습니다.
뿌연 사방이 점차 빛바랜 황갈색으로 변해가더군요.
생기도 없고 시들어버리는 듯하면서도 이 모두가 비현실적으로, 그냥 일정한 거리 밖에 널려져 있는 듯했습니다.
협박자들, 아직은 고문자가 아니었던 이 사람들은 그냥 어떤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듯하더군요.
무슨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모습도 아니고 눈빛에도 오직 회색빛의 냉담함, 그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더군요.
백남은은 김영두, 정현규, 최상남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내 옷을 벗기라고요.
처음에는 약간 저항을 했으나, 몰려서이기도 했지만 아직 살아남은 오기가 발동하여 스스로 옷을 벗었습니다.
팬티만 남기고 모두 벗었습니다.
초라함, 빈약함이 덮쳐오더군요. 추워지기도 하구요.
아직 한창 더운 여름이고 더구나 골방에 갇혀있어 절대로 추울 수가 없느데도,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가는데도 가슴의 한기가 온몸에 퍼져버렸습니다.
발가벗었을 때 오는 당황함과 이 한기가 뒤섞여 몸을 오그라들게 하더군요.
이 사람들 분주하게 들락날락했습니다.
6시 반쯤, 정리된 것처럼 조용해지면서 위험이 닥쳐오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김수현이 들어와서 "진술거부를 잘한다지, 여기서도 할거야? 경찰과는 달라."
이어 본인에게 "당신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어디가 아픈가?"라고 물었습니다.
"피로의 누적이다. 또 방금 구류살고 나오는 길이어서 더욱 그렇다. 민청련 대표직을 그만두어서 어디 휴양지로 가서
몇 달 쉬려고 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몸으로 견딜 수 있겠는가. 당신 많이 깨져야겠구먼" 했습니다.
"내 의지가 살아 있는 한 진술을 거부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늘 경험하는 것이지만 이 사람들이 씹어뱉는 반말 짓거리, 그것이 역시 속을 뒤집어 놨습니다.
지난 2년간 못 들어보다 경멸조 인사에 부아가 솟았습니다.
늘 이 반말 짓거리로부터 왜소해지게 되고 졸아들게 되는 것입니다.
김수현이 무릎을 꿇고 앉으라고 명령하더군요. 거절했습니다.
주춤주춤 밀려서 얼결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비통한 심정이 되더군요.
뒤이어 백남은이 날카롭게 소리쳤습니다.
"정말 버틸 거야" 여기서도 진술거부가 통할 줄 알고? 어림도 없어."
이에 대해 "끝까지 버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목소리가 갈라져 나더군요.
그것은 나 자신에게 다짐하는 것이면서도 한편 더욱 공허해지기도 했구요.
하지만 '설마 너희들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안돼지'라는 무너져가는 듯한 자신감을 불러 일으켜 세우려는 안간힘이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백남은은 "좋다, 해보자. 우리는 너를 까부술 것이다"라고 소리쳤습니다.
논리적으로 앞뒤 아귀가 맞춰져서 사고가 전개되는 것이 아니고 한꺼번에 여러 생각이, 장면이 떠오르고 또 중복된 채 다가왔습니다.
필름 한 커트에 여러 장면이 겹쳐서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짧은 순간에 정말 수많은 영상이 닥쳐오고 사라지고, 또 다가오고 쉴 새 없이 돌아갔습니다.
늦가을 초겨울 문턱에서 바싹 마른 낙엽들이 바람에 휘날려 올라가다가
아스팔트 위에 떨어져 발자국에 밟혀서 바스러지는 것이 자주 어른거리기도 했고요,
피카소의 청색지대, 비쩍 마른 악사 그림이 가물거리기도 하더군요.
헐벗고 굶주린 어느 병자일 것 같은 물골로 어정쩡하게 서서 말입니다.
사실 나는 평상시 미사에서 자주 읊조리는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구절에
은밀한 거부감을 가지고 무시해 버렸었는데 이 순간에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정말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때 이 협박자들은 넓은 밴드 - 신축성 있는 -로 눈을 가려 버렸습니다.
짙은 회색빛으로 앞이 차단당했습니다.
외부의 지시와 명령에 굴종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아득함.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부산 미문화원 사건'으로 고문을 받았다고 널리 알려진 그 학생들의 절망감과 외로음이 찌르르 핏줄을 울리더군요.
아우슈비츠 나치수용소에 갇혀 있던 그 유태인의 얼굴이 내 형제처럼, 아주 잘 아는 얼굴처럼 클로스 업 되었습니다.
사진에서 볼 때, 영화의 어떤 장면에서 느꼈던 그런 연민이나 동정심이 아니라,
심장을 쿡 찌르는 동통과 더불어 그 유태인들의 눈물이, 아우성이 펼쳐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여,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쳤던 그 소경이 바로 나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 협박자들의 손에 이끌려 방 한 가운데를 어기적어기적 거리고 나아갔습니다.
방바닥이 쑥 꺼졌다가 다시 올라오고, 또 꺼지고 올라오고 했지요.
쓰러지지 않으려고 버티면서도 '아주 작은 물방울이 되어 쓰러져 어릴 수는 없을까,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하는 심정이 되었구요.
그러나 아직 나는 답답했습니다.
이렇게 거꾸러질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고문을 정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너희들의 협박일 뿐이다.
그런 빈 협박에 내가 굴복할 줄 아느냐,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속셈을 다시 확인하면서
고문대, 칠성대에 마침내 다다랐습니다.
'▷ 김근태 추모마당 > 남영동 1985'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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