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기적

기적을 타고 내려왔다. 그것은.....,

남영동 야수들의 고문흔적은 전혀 반박의 여지없이 내 아내 아니 인재근,

다음에는 최정순, 김상철 변호인의 눈에 가슴에 사진 찍혀 버렸다.

9월 26일 오후 3시경 검찰청 건물에서.....

남영동 짐승들은 무거운 짐을 벗고 얼마간은 승리 비슷한 기분에 싸여 슬슬 휘파람이라도 불면서 돌아갔고.

이른바 검찰 공안부라는데서는 약간 들뜬 긴장 아니면 늦여름 나른한 식곤증에 졸리운 채 기다리고 있었을 게다.

 

그런데 그 사이를 칼날 끝으로 뚫어버린 것이다.

그 후 별별 짓을 다했지만 한번 들통난 것이 지워질 리 있겠는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 아! 거기에 내가 잘 아는 인재근이 서 있었다.

못 본지 한 달밖에 안 되었는데 우리 사이의 거리는 까마득했다.

 

죽음 저편에서 짓밟혀 버렸던 나는 인재근의 삶 옆으로 도저히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었다.

적응하고 이해하는 그런 시간은 필요했지만 그것은 순간이었다.

 

인재근의 눈에 물기가 핑 도는 그런 시간으로 충분했다.

이해와 사랑을 실은 눈빛이 나를

짓밟혀 극도로 왜소해진 나를 원상태로 되돌려 보내기 시작했다.

 

그 시선은 나에게 부피를, 무게를 되돌려 주는 전기 스파크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짓밟혀 짜부러져 평면이 되어버렸고 먼지처럼 왜소해진 나는 부피도, 무게도, 인간적 자존심까지 모두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것이 이 시선에 의해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되돌아가 결정적으로 다시 소생하기 시작해 버린 것이다.

포니 뒷자석 가운데 끼여서 서부역 앞을 지났다.

푸른 하늘이 보이고 구름이 흐르고 햇빛이 따사롭고 눈부셨다.

 

다시 다가온 이 햇빛, 푸른 하늘이 눈물이 나고 시간이 멈춰지는 것 같았다.

죽음의 세계로만 흐르던 시간이 멈춰서고, 분명히 멈추고 서서히 필름이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잃어버렸던 내 생명이 꿈틀거리면서 강요된 죽음의 영화필름, 헷갈린 내용이 흐릿해지는 것이었다.

인재근의 그 눈빛이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았다.

정치군부. 남영동 야수들이 심어놓은 내 가슴의 죽음은, 사탄은 소리를 지르면서 내 몸에서, 마음에서 쫓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너무 쫄아서 그런지, 시선의 전류가 아직 약해서인지 혹시 내가 대담해서인지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내가 당한 고문 얘기를 듣고 얼마나 처참해 할까도 헤아려 봤고,

동시에 얘기를 듣는다 해도 절망적인 죽음의 정면 얼굴을 상상할 수가 있을까 등등이 떠올랐다.

 

그러나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이건 나 개인에 관한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 모두에 관계된 것이므로 말하기로 결정했다.

 

손목시계의 초침소리가 째깍쩨깍 귀청을 때리는 듯 했다.

서둘러야 했다.

가능한 한 정확하게 구체적인 사실을 전해야 한다 하니까 오히려 말을 더듬게 되고, 앞뒤가 바뀌어 표현되었다.

 

헛바퀴가 돌아가고 구멍이 뚫어져 김이 새어 나가는 듯 싶기도 하고,

내가 말하고 있는 고문 사실의 그 무게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지, 내 처 얼굴에는 묘한 곤혹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너무 엄청나서인지 감정 이입이 즉각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엿보였고,

주고받는 우리의 말과 표정이 서로 따로 노는 것이었다.

결국 내가 전한 것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각 5시간씩 열 번 당했다.

4일, 8일, 13일은 각각 두 번씩, 그리고 5일, 6일, 10일, 20일은 각각 한 번씩 당했다"고 말한 것이 고작이었고,

그것도 숨넘어가듯이 빠르게 해댔다.

이 말을 두어 번 반복한 다음 신고 있던 양말을 벗어서 내 처에게 주었다.

여름이면 무좀이 생겨 성하게 되므로 몇 년 째 샌들을 신어 왔으며 85년 8월 24일 체포될 당시도 그러했다.

간신히 양말을 쭈그려 앉아서 벗었다.

그리고 발뒤꿈치 양쪽과 발등(새끼 발가락과 둘째 발가락 윗부분), 양 팔꿈치를 보여 주었다.

"온몸 다섯군데를 꼼짝 못하도록 묶이고, 전기고문, 물고문 받다가 못 견뎌 비두발광하다가 닳아서 찢어진 것이다.

그리고 양쪽 발뒤꿈치, 팔뒤꿈치가 똑같은 모양으로 상처가 났고,

발등 양쪽에 까맣게 탄 점들이 한 무더기씩 있는 것은 전기고문시 전류가 타서 생긴 것이다."

최대한으로 잘, 그리고 정확하게 전하려고 했지만,

쉴 새 없이 떠들었지만 무언가가 가로막혀서 내 의사가 전달되는 것인지 어떤지 명확히 알 수가 없었다.

가위눌린 꿈속에서 진땀 흘리는 것과 유사했다.

 

말을 하려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고 소리를 치려해도 소용이 없고,

두꺼운 유리가 가로막혀져서 입이 벙긋벙긋 하는 것을 보면서도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 속 태우는 그대로였다.

남영동 5층 구석방에서의 23일, 이것은 지옥이었다.

독가스 대신 전기고문과 물고문이 설치는 나치 수용소였다.

시간이 종국적으로 멈춰 버린 영원한 저주의 세계였다.

나는 이 전부를, 이 부서져 쓰러졌던 죽음을 불과 몇 분 동안에 전달하려고 했던 것이다.

고문받았던 얘기를 단순하게 묘사함으로써 깊고 깊게 패인 상처 그 전부를 알아듣기 바랐던 것이었다.

 

그러니 톱니바퀴가 서로 헛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내 처를 기적처럼 만나서 내 처에게 요령있게 설명해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듯한 이 분위기에서

나는 또 다시 깊은 소외감, 버림받은 서러움으로 생채기를 입었다.

그러나 서서히 톱니바퀴가 맞아들어 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팔꿈치는 피딱지가 져 있었지만, 발뒤꿈치는 그날 아침까지 피고름이 흘렀었다.

 

이것을 모두 내 처는 똑똑히 보았다.

검찰청 4층에 있는 대기실로 들어가 앉아 있었다.

나는 거듭 발뒤꿈치, 발등, 팔꿈치를 보여 주었고, 내 처도 재삼재사 확인했다.

내 처는 그늘진 복도에 서 있어 미묘한 표정을 보기가 어려웠지만, 나는 그러나 느낄 수 있었다.

멍하고 기가 막힌다는 표정에서 맹렬하게 분노하는 표정으로 변하는 것을,

눈에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러더니 통곡하는 표정이 되고, 대기실 경찰이 저지해도 아랑곳 하지 않고 내개로 걸어들어 오는 것이었다.

그 쪽문을 닫아 버리니까 또 다른 문으로 돌아오고, 내 처는 그 참혹함을 통째로 이해한 것 같았다.

 

내 처의 치 떨리는 분노로 흐들거리는 것이 나에게 전해 오는 것이었다.

나를 위한 그 분노, 그 눈물이 내 눈에도 눈물이 고이도록 만들었다.

 

완전히 메말라 버려 눈물 따위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던 내 눈에도 물기가 어렸다.

내 편을 들어주는 친구도 있었구나, 아직 이 세상에 신음, 비명이야 수없이 질러대고

고통과 공포 속에서 울부짖음으로 제 정신이 아니었지만, 남영동에서 진짜 눈물은 꼭 한 번 흘렸다.

그 이후 나에게서 눈물 같은 것은 사라져 버렸다.

9월 20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반국가단체로 민청련을 몰고 그렇게 피의신문 조서를 작성하고, 그것을 베끼고 종착역에 도착한 것이다.

 

그 혼란 중에서도 나는 이것의 현실적인 의미를 명백히 알 수 있었다.

합법을 가장한 살해를 성취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저들은 한 단계 한 단계 밟아온 것이었다.

 

나는 여기 남영동에서 정치군부의 하수인들에 의해 살해되는 과정의 예비단계를 지나 그것의 확고한 단계로 떠밀려 간 것이었다.

죽음은 이렇게 오는 것이구나,

고문으로 이미 쓰러져 죽어 있던 나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합법을 가장하여 살해되는구나,

그렇게 하여 죽음을 완성시키는구나, 저들은.

나는 이때 슬퍼서 눈물울 흘렸다.

줄줄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이미 회피할 수 없는 것으로서 덧씌워져 온 것이다.

 

그리고 나서 눈물은 완전히 말라 버렸는데.....

그랬었는데 내 처의 떨리는 가슴이, 그 눈물이, 아니 창 밖으로 흐르는 푸른 하늘이 내 눈물을 되돌아오게 한 것이었다.

대기실 경찰들은 내 처를 저지하느라고 앞뒷문을 모두 닫아 버리더니 더운지 다시 문을 열어 제꼈다.

내 처는 뭐라고 말하고 사라지더니 잠시 후 아기를 업은 이을호 씨의 처 최정순씨와 같이 나타났다.

대기실 입구에 서서 내 상처를 눈여겨보고 헤드라이트 같은 커다란 두 눈이 되는 최정순씨였다.

얼마 후 대기실을 나와 처의 부축을 받으면서 5층 김원치 검사 방 입구까지 같이 갔다.

김원치 검사 방에 들어가 얼마쯤 있으려니까 김상철 변호사가 들어왔다.

내 변호인임을 밝히면서 바로 옆 자리에 앉아 악수를 청했다.

 

우리는 손을 마주 잡고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자세히 설명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발뒤꿈치, 발등, 팔꿈치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정확히 기억을 해내서 말했다.

 

맞은편 자리에서 김원치 검사도 들었다.

김상철 변호인이 들어오기 전에도 고문받은 사실을 말하고, 상처를 김원치 검사에게 보여 주었음은 물론이다.

 

눈물샘이 터졌는지 김상철 변호사와 얘기하면서 나는 자꾸 콧등이 매캐해졌다.

목소리도 자꾸 떨려오고 연달아 아는 세 사람의 우리편, 좋은 나라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잃어버린 내 영토를 수복해 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검사 방을 나와 구치소로 가는 차를 타기 위해서 엘리베이터로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처는 나를 부축해 주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그것을 통해서 나는 용기를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부축하는 처에게 반복해서 고문 얘기를 했고 확실히 기억하도록 당부했다.

구치소로 가는 포니 자동차를 타기 직전 나는 웃어 보였다.

처에게 힘껏 웃어주고 나는 떠났다.

 

1. 눈부셔 눈이 부셔



눈부셔 눈이 부셔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눈 가느다랗게 떠야만
달려드는 강렬한 샛노랑에
견뎌낼 수 있을 정도이다.

맨 마지막으로 흘러내린
인왕산 끝자락에는
무학대사 손자국이 깊이 패어 있는 바위 하나
크게 서 있다.

그 아래
우리네 고향 앞산처럼
골짜기와 산마루가 펼쳐져 있다


오밀조밀하게
노랗게 조금씩 조금씩 물들어 가더니
어느 날 대낮
드디어 개나리는 샛노랗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너무 샛노라
관능적인 냄새가 나는 것 같고,
속이 약간 느끼해지기도 한다

해가 서쪽으로
비켜서는 오후가 되면
인왕산 개나리가 타오른다
샛노란 불길로 타오른다
노오란 노여움으로 타오른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노여움으로 불타오른다


쏟아지는 햇빛 담뿍 받은 개나리는
샛노란 노여움으로
불타오르는 것이다

얕은 골짜기 여기저기
띄엄띄엄 응달진 곳에
붉은 얼룩이 보인다


노랑 천지 속에
얼핏 보이는 저것은
불그스레한 그 번짐은 무엇일까?

이제는 까맣게 멀어져 간
4월의 함성이
이 봄에
슬그머니 되살아나고 있는가


부릅뜬 눈으로
아직은 절대 잠들 수 없는
피맺힌 5월이
아스팔트에 낭자하게 쏟아졌던
피, 그 피가
은연 중 배어나고 있는가


아니면 작년 9월
아! 그 남영동에서
내가 토해냈던
울부짖음의 파편이 튀어서
저리 붉게 피어나는가


물고문에
불고문에 바스라졌던 내 넋의 한 조각이
다시 새롭게 물 올라
한 무더기 진달래로 피었는가

노랑 바탕에 붉게 얼룩진 건너편 인왕산이
여전히 발시린 내 감방을 화안히 비춘다


이 밝음 맞아들이기 위해서
좁다란 창문 밖 쇠창살 앞에
개나리 서너 가지 꺾어 꽂아 놓았다


요구르트 병 두 개 말끔히 부셔내고
거기에 물 가득 담아
어렴풋이 꽃망울 맺힌
개나리 가지를
확실하게 꽂았다

4월 4일이었던가
나의 개나리
망울 별안간 터뜨리고
활짝 피기 시작했다.

그늘진 창문으로
때때로 몰려오는 아직도 써늘한 바람 밀어 내고서


아! 이것은 4월 3일
나를 찾아온
뜨거운 설레임.


들뜨는 자유 한 모금 몰아쉬고
망을 연 것이 아닐까


연성수, 권형택. 김종복 친구들
모질고 외진 이곳
나서는 가벼운 발걸음 따라 일어난
그 바람 먹고
개나리 피었을까

그러나 나는 본다
눈부심 속에서도
놓치지 않고 똑바로 본다

노란 개나리
붉은 진달래 무더기들의 눈부심.


그 아래
또 옆에 널려있는
겨울의 잿빛을
나는 눈 감지 못한다

어두운 회색에
아직도 젖어 있는 저 겨울은
속으로 속으로 울었던
내 울음을 되살려 내고
깊어져만 갔던 상처를
자꾸 건드려 대는 것 같다

유난히 추웠던
지난 겨울
몸과 마음에
깊이 패인 상처를 가졌던 나는
오들오들 떨면서 한 세월을 보냈다


컴컴한 밤이 올 때마다
인왕산 허리 곳곳에
숨어 엎드려
새파랗게 빛 내뿜던 수은등들 때문에
나는 더 추었다


그 수은등
나는 정말로 미워했다.

 

 

13. 남영동을 떠나던 날

 


남영동에서 본인이 당하는 고문을 보면서, 그 고문을 거들었던 한 두사람이 보였던 그 눈물, 나는 그것을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다"고 하면서 "어떻게든 여기를 떠나라. 정말로 큰일 나겠다"며 그 사람들은 울먹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용기였을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존경과 연민일 수도 있겠지요.

그것은 나에게 구원이었습니다. 빛이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살아남을 수 있는 동력은 이런 사람들이 여기저기 최악의 곳에서조차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성의 절망적인 측면, 자신들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서는 다른 인간동료에게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그런 악마적 측면을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26일 오후 3시경 남영동 5층 15호실을 떠나기에 앞서 나는 김수현과 백남은을 찾았습니다.

잠시 책상을 사이에 두고 김수현과 마주 앉아 얘기했습니다.

별 의미있는 얘기는 없었으나 나는 말하고 싶은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내가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속으로 울었습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더군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처참한 고문을 당하고 간다.

일방적으로 당하고 간다.

이러고도 속수무책인 것이 원통하다.

더구나 너무 끔찍하게 당해서 분노하기조차 두려운 것이 한스럽다.

떠나는 지금도 내놓고 욕 한 마디 할 수 없고, 그런 용기조차 생기지 않는 것이 말이다.

당신들, 이 저주받을 인간들, 악마같은 자들은 내 생사여탈권을 가진 것처럼 군림했으며

그에 아양조차 떨어야 했던 내게 이 끔찍한 지옥의 올마이티(Almighty)처럼 덮쳐 왔었다'

나는 그 자리를 일어나서 김수현을 똑바로 쳐다보았습니다. 복잡한 감정을 갖고서.

그랬더니 김수현의 키가 점점 작아져 가는 것이었습니다.

 

고문실에서 결정권을 갖고 있었던 이 사람은 분명 나에게는 거인이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나는 늘 의자에 앉아서 오들오들 떨거나 고문대에 묶여 눕혀져 있었고

김수현은 선채로 내려다보고 있었기에 더욱 육박해 오는 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남영동을 떠나기 위해 일어서는 이 자리에서 구두를 신은 김수현은 나만한 키이거나 오히려 작게 보였습니다.

이처럼 '쪼그라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가슴을 때렸습니다.

 

나는 늠름함에서 김수현에 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김영두 등과도 악수를 했습니다.

 

그 고문기술자도 찾았으나 '없다'고만 하더군요.

포니차를 타기 직전에 백남은이 계단으로 나왔습니다.

 

나는 이 사람도 절대 잊어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똑바로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떠나는 이 마당에서만은 당당하고자 했습니다.

9월 4일부터 25일까지 나는 이런 눈초리로 이들을 한 번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기묘하게 열리는 남영동 대문, '열려라 참깨' 같이도 느껴지는 대문을 나서서

구치감으로 향하는 자동차 속에서 따스한 오후의 햇살을 온몸에 받았습니다.

'아, 이 낯익은 거리에 내가 다시 돌아온 것이구나, 이 햇빛 속으로.'

이것은 축복이었습니다.

회생일지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죽음 속에서의 돌아옴이었습니다.

검찰청 5층 계단에서 정말 뜻밖에도 본인의 처인 인재근 씨를 만났습니다.

울음이 복받쳐 올랐으나 나는 용케 참아냈습니다.

 

경찰 한 사람과 본인의 처가 계단을 부축해 내려가는 동안 나는 망설이고 망설였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말했습니다. 불과 1분여 동안이었습니다.

 

그 고문은 나 개인에게 국한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얘기했습니다.

고문얘기를 듣고 처가 괴로워할 것을 생각하면서 그만둘까도 했지만,

그럴 문제가 아니었고 도무지 원통해서 견딜 수가 없었기에 나는 말했습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침착하게 말하면서 신고 있던 양말을 벗었습니다.

발뒤꿈치의 상처들과 발등의 시꺼멓게 탄 부분을 보여주었고, 팔꿈치의 상처도 보여주었습니다.

이 만남은 정말로 기적같은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관례와는 다르게 늦은 오후에야 도착한 본인을 만날 수 있덨던 것은, 그리하여 정치군부의 고문과 그 은폐행위가

폭로되고 국내외적으로 맹렬한 비판을 불러일으키게된 이 만남은 본인에게는 영원한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사건의 개요

이 사건은 정치적 보복이며, 그 대상으로 본인이 찍힌 것입니다.

85년 5월, 학생들의 미문화원 사건으로 크게 충격을 받은 정치군부는 학생운동에 그리고 민주화운동에 복수를 하고자 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소위 '학원안정법' 제정기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권력 내부의 복잡한 전개도 문제였지만,

모든 국민의 한결같은 반대와 미국을 비롯한 여러나라의 회의적 반응 때문에 물러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타협과 양보를 생각하며 정치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정치군부는 오히려 수치나 치욕으로 강퍅하게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의한 표적으로, 희생양으로 본인이 선택되었습니다.

한편 '미문화원 농성사건' 이후 정치적 탄압에 몰린 학생들은 민청련 등 여러 재야 단체로 찾아와서

호소도 하고 압력을 가하면서 지원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본인은 이러한 학생들의 요구에 대해 '그 심정은 이해하지만, 특히 민청련이 개입해서 지원한다면 그 효과보다는

오히려 무거운 부담을 감당해내기 어렵게 될 것이다' 는 점을 민청련 간부들에게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상황으로 봐서는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5월 29일쯤 청년학생운동단체가 공동으로 종로 2가에서 '광주사태 항의 국민대회'를 시도했습니다.

이로 인해 본인이 구류를 사는 6월 하순에 '민중민주화운동 탄압저지대회'가 서울대에서 열렸는데,

거기에 또 학생들의 강력한 참석 요구에 따라 민청련 상임위원장 김병곤씨가 참석했던 것이 하나의 분수령이었습니다.

 

맨 앞에서 얘기한 대로 5월 29일의 '국민대회'를 학생운동단체와 공동으로 개최한 것을 이유로

정치권력은 본인에 대한 구속을 결심했으리라 추측합니다.

다만 광주사태 문제로 구속하는 것이, 그로인해 발생할 정치적 쟁점이 싫었으리라고 믿어집니다.

이른바 '만민탄 대회' 등 계속되는 학생집회에 민청련 간부이자 학생운동의 선배들이 모여있는

민청련이 지원하는 모습을 절대로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권력은 칼을 뽑았고 김병곤씨는 이렇게 구속되었습니다.

 

그런데 김병곤씨를 조사한 남영동은 상부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았습니다.

당시 신문에도 발표됐듯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덮어 씌우려고 조사했지만 실패했습니다.

 

학생운동의 배후로 만드는 일도 별 신통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본인과의 어떤 직접적 연결도 이루어내지 못했습니다.

 

곤경에 몰린 남영동은 무엇인가 보여주어야할 입장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권력의 정치적 필요성을 충족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했던 시기였습니다.

85년 8월 '학원안정법' 제정기도 취소 이후 전개될지도 모르는 정치적 곤경을 타개할 수 있는 핑계거리로

본인이 선택되었으며,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무조건 극도로 잔인하게 고문을 가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던 것이겠지요.

 

여하튼 결과적으로 괜찮은 것을 획득하고 만들어만 낸다면

과정에 무리가 있다하더라도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고 판단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자신했겠지요.

정치적으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으리라 낙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계산이 여러 가지로 틀려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우선 남영동에서 만든 그 각본이 너무 조잡하고 근거가 박약했던 점일 것입니다.

누구도 예기치 못한 만남을 통해 본인이 당한 고문이 공공연하게 알려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내게 된 것이 권력의 계산과는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검찰에서 본인의 완강한 진술거부 또한 저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이에 권력은 '공소유지조차 힘들게 되는 것이 아닌가' 라며 허둥지둥댔을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본인을 구속하고도 한달 정도나 그냥 있다가 본인의 묵비권 고수가 결정적인 것으로 보고

10월 2일에야 별안간 민청련 간부를 대대적으로 체포, 구속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별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조사해 봐야 별 것 없었고 문제가 되었던 것에 대한 증거수집도 신통치 않았던 점이 명백합니다.

 

본인에 대한 혹심한 고문 얘기를 듣고 잡혀간 간부들은 최민화씨 말대로 얼어 있었는데,

고문은 커녕 폭행조차 당하지 않아서 고마움조차 느끼는 묘한 심리에 빠지게 만들어,

어떤 의미에서는 본인을 함정에 몰아넣도록 유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인의 경우, 기적같은 만남을 방지하려고 송치되는 날 구치감을 거치지 않고 바로 검사실로 연행했으며,

또한 그날 당장 보통 관례와는 다르게 피의자 신문조서를 여러 간부들,

최민화, 김희상, 김종복 씨로부터 받아내어 본인에 대한 직.간접의 증거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은 위법된 사실은 아니지만, 그 의도가 무엇인지는 명백합니다.

남영동의 강박 상태로부터 회복하여 바르게 대처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계획되고 의도된 것입니다.

 

본인에 대한 경험, 어떤 의미에서는 실패를 두 번 다시 하지 않기 위함이었겠지요.

따라서 세 사람에 대한 검찰의 피의자 신문조서는 임의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인에 대한 여러가지 탄압이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계속 강행되어 나갔던 것입니다.

공소가 제기되었던 사실과도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들이 KBS-TV와 연합통신을 통하여

서울신문, 경향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습니다.

 

실패한 탄압과 고문, 그것의 계속되는 은폐행위,

나아가서는 재판에 영향을 미치고자 또다시 무모한 시도가 전개됐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소용없는 것들이 되었습니다.

 한낱 웃음거리로 또 하나의 80년대 희극물로 본 사건이 나타났을 뿐임은 이 시대가, 모든 국민이 알게 된 일이니까요.

12. 마지막 고문 - 열 번째 고문

9월 20일 저녁 8시경에서 10시 반경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습니다.

김수현, 김영두, 정현규, 박병선, 최상남과 또 한사람이 고문에 가담했습니다.

 

직접 전기고문도구를 든 것은 김수현이었습니다.

그동안 강제해온 것들, 특히 문용식의 N.D.R.과 C.D.R., P.D.R.에 대해서 고문으로 확인해 나갔습니다.

이을호의 C.D.R., N.D.R., P.D.R. 역시 마찬가지의 과정을 통해서 확인하고요.

 

박문식과 관계가 있었음을 자백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고문대 위에서 수없이 인정하고 암기하였음에도 또다시 반복됐습니다.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이 아마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고, 이것을 검찰이나 법정에서 부인할 경우의 심각한 두려움,

즉 강제당할 때의 그 고문을 기억시켜 당혹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고도의 심리적, 정신분석적 접근에 기초한 고문행위였다고 믿어집니다.

사실 지금도 고문 당시의 상세한 상황, 김수현이나 백남은의 말과 거동을 거스르는 경우에는 상당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필경 나중에 또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싶은 두려움에 어떤 부분은 그냥 넘어간 부분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전과는 달리 20일에야 비로소 이른바 반국가단체결성을 인정하라는 요구를 해왔습니다.

아니, 고문대 위에 있는 본인에게 지시, 명령을 해왔습니다.

 

지금까지의 요구선에서 한 단계 더 비약해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미 완성된 것을 갖고 한번 더 왕창 고문하여 그것을 암기시키고,

손도장 찍게 하는 것이 능률적이고 충분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이런 단계를 거치는 것은 고문자들 나름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각 부분에 그럴 듯한 근거를 마련하고 관련된 사람들의 범위를 그어 나가며,

무엇보다 중요한 정치적 필요성, 활동성에 대응하는 신축성 여지를 유지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단체결성 인정명령은 절대 그렇지 않다.

이 점은 김수현 당신이 스스로 얘기했다.

 

이른바 1월말의 최민화, 박우섭, 김희택, 천영초, 본인이 있었다고 만들어진 - 본인이 여러가지 필요성에서 만든 것인데 -

민청련 사무실의 모임을 얘기하면서

"이것은 당신이 배척받은 것이 분명한데 왜 자꾸 본인이 N.D.R.을 얘기했느냐고 했지 않은가.

그래놓고 이제와서 그것을 민청련의 공식지도이념으로 결정했었다고 자백하라니 아무래도 이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당신 스스로 얘기했던 것을 정면으로 뒤엎는 것이 아닌가" 라며 항변했지만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애당초 합리화, 논리화라는 것은 필요하지 않았으니까요.

고문대 위에서 버티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어서 결국에는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이 단체결성명령의 항복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았습니다.

그것은 합리적인 절차를 통해 본인을 처형하겠다는 노골적인 정치군부의 선언입니다.

공포와 고통을 못 견뎌 울부짖는 거야 고문대 위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정말 슬퍼서 운 것은 이때가 처음입니다.

'아, 내가 죽게 되는구나, 이렇게 해서 죽는 것이구나.

그동안 고문대 위에서의 죽음은 죽은 것이 아니었구나.

내 나이 마흔으로 이 세상을 떠나는구나.'

고문대에서 내려와 자리에 앉으니 그냥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멍하니 내버려 두었습니다.

 

바깥사회와 완전히 차단되었던 나는 정치적 사정이, 정치군부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본인의 생명말살을 절대로 요청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심각한 사태가 전개되고 있다고 단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끔찍한 고문, 말도 안되는 각본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것이라고 믿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결심했습니다.

'그래, 죽을 수도 있다. 40년을 살아왔다.

유관순도, 윤동주도, 그리고 김주열도, 80년 광주의 숱한 선랑한 시민들도 그렇게 살해당하지 않았는가.

추하게 정치군부, 너희들에게 굽신거리지는 않겠다.

절대로 휘청거리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니 본인도 '이것은 지나친 생각이었구나' 하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사실 그때 정치군부의 방향은 이쪽으로 몰고 나가려는 유혹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탄압, 가혹한 탄압에 합리적 근거를 제공하려 했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합니다.

1월말 민청련 사무실에서 열린 회의내용이 바뀌어지게 됩니다.

김희택씨가 얘기했다고 한 부분에서 처음에는 "일단 문제제기를 한 것으로 하라"는 것으로 본인이 기술하였는데,

여기를 "일단 민청련의 지도이념으로 하되 총선이 끝날 때까지 덮어두는 것으로 하자"고 바꿀 것에 본인은 항복했으며,

3월말 이른바 '작은 자리'의 교육내용 중에서 처음에는 본인이 N.D.R.을 단순히 설명한 것으로만 돼 있었는데,

이것이 민청련 지도이념으로서 확정되는 것으로 수정하도록 강요했고, 속절없이 그렇게 했으며,

8월 10일 5차 총회에서 그 N.D.R.에 기초한 선언문을 작성하여 채택했다고 자백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들의 요구대로 되었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이른바 1월말 민청련 사무실에서 열린 회의에 대해 약간 덧붙이면 이렇습니다.

이을호씨의 자백에는 2월 중순경 민청련 사무실에 15,6명 정도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여기서 본인이 N.D.R.을 설명했다고 되어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수정하고자 했습니다.

평회원의 참석도 문제고 너무 여러사람과 관계되어 다치는 범위가 넓어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월말 민청련 사무실에서 했다는 5명의 회의를 즉석에서 만들어 냈습니다.

또한 신뢰를 얻기 위해서 본인이 N.D.R.에 대한 설명을 마친 다음, 여덟 사람의 발언까지 제법 그럴 듯하게 기술했습니다.

고문자 특히 김수현은 이를 좋아하고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이을호씨에게 강제하여 얻어 냈던 2월 민청련사무실에서 N.D.R. 설명이라는 것은 전혀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1월 민청련 사무실, 2월 민청련 사무실, 3월 작은 자리, 그리고 또 고문자들이 요구하여 기독교회관 내 기독학생총연맹사무실과

카톨릭 정의평화위원회 사무실까지 총 다섯 번의 설명 내지 발표기회가 있었던 것으로 남영동에서는 작성되었습니다.

검찰에서 2월과 기독교회관, 카톨릭 정의평화위원회 사무실에서의 자리가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본인이 1월 말을 만들어 낸 것은 위에서 얘기한 것, 그리고 공판에서 얘기한 이유 외에도 다음과 같은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최민화, 김회택, 박우섭, 천영초 씨는 이런 조작된 사실을 충분히 반증해 낼 수 있을 것이며,

본인이 당했던 고문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이해해줄 것이다'는

내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김수현은 처음에는 별 주의를 하지 않다가 왜 N.D.R.이라는 주장을 1월말 하게 되었는지,

그 계기와 이유를 말하라고 윽박질러 댔습니다.

합리적으로 설명하라고요.

 

며칠을 쩔쩔매다가 "공판정에서 진술한 바 있는 김영삼 총재의 국회의원 공천추천 의향과 그에 대한 고사에 대하여,

그리고 이것을 사람들에게 눈치 채인 것에 대해 해명할 필요에서 그렇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개인적 처세의 교만함 때문이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나는 민주화운동 대열에서 그렇게 자신없는 태도로 활동해 오지는 않았습니다.

혹시 출세주의자로 비치지 않을까 조바심낼 이유가 없었습니다.

국회의원으로 발돋움하는 것으로 민청련 의장 자리를 이용할 의사가 없었고, 또 그렇게 비칠 아무런 이유도 없었던 것입니다.

 

김영삼 총재와 만난 것, 고사한 것에 대해 신의를 갖고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기로 약속했고,

또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이를 해명할 필요는 물론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어느 의미에서는 민청련 활동에 대한 인정으로, 대중적 인식이 넓어져 가는 것으로

본인을 비롯한 민청련 회원이 자부심조차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N.D.R.발상의 배경과 계기가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남영동은 20일에 N.D.R.을 민청련 지도이념으로, 반국가단체 결성으로 완결지었던 것입니다.

 

20일 이후는 이에 대한 서류정리, 진술서, 진술조서 작성 때문에 고문 받은 20일은 물론 거의 25일까지 내내 한잠도 못 잤습니다.

26일 새벽 3시 20분 용산경찰서 유치장에 이르러 눈을 붙일 때까지.

25일 새벽 5시 30분, 본인이 자그만 반란을 일으켜 김수현으로부터 10여 차례 한 20분간 집중폭행을 당했습니다.

참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끔찍스런 고문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되었습니다.

 

팔꿈치로 가슴을 가격 당했는데, 다른 경우 같았으면 크게 항의했을 그런 일이지만,

백 번을 그렇게 해도 난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는 문용식과의 관계, N.D.R.에 대해 다시 내가 부정하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당시 나는 문용식씨가 무서웠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그 심정은 이해되지만

마치 물귀신처럼 아무나 무엇이거나 잡고 같이 익사하자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본인 말고는 반증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 본인은 필사적이었습니다.

김수현은 "이 새끼, 벌써부터 법정투쟁을 준비하는 거야? 이런 새끼는 가만 둘 수 없어" 하면서

당시 본인이 입고 있던 겨울 모직점퍼를 벗긴 다음에 에어컨에 기대어 세운 채 가슴을 가격했습니다.

 

결국에는 이들에게 무릎을 꿇기는 했지만 나는 자포자기하여 혼란에 빠져들지는 않았습니다.

가능한 경우 나는 다시 저항했던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자존심의 불씨, 굴욕을 거부하는 불꽃이 완전히 꺼져 버렸던 것은 아닙니다.

 

9월 13일 밤 10시, 김수현, 백남은, 고문기술자 김영두 등이 왈칵 몰려 들어왔습니다.

차가운 분노를 내뱉으면서 김수현은 본인을 고문대에 올려 묶으라고 지시했습니다.

 

11, 12, 13일 오후까지는 순풍의 돛단배처럼 평화를 향하여 순조롭게 나아갔습니다.

협박과 공갈은 끊임없이 들었지만 몸서리쳐지는 고문이 사라져 가고 잇는 나날들이었습니다.

 

13일 저녁 식사가 15호실 방문턱을 넘어 본인 앞의 책상 위에 놓여졌습니다.

숟가락을 들고 두번인가 먹었습니다.

그 때 복도에 있는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자 정현규가 받고 오더니 '미안 하지만 안 되겠다'면서 밥그릇을 들고 나가버렸습니다.

이 암담함이라니, 이것은 고문을 가하겠다는 선전 포고입니다.

그야말로 혼비백산하여 혼란에 빠졌습니다.

오그라든 채로 몇 시간이 지났습니다.

저녁식사 시간이 5시 반경이었으리라고 가늠되는데, 밤 9시가 넘도록 고문할 기척은 없었습니다.

'아, 이것은 저들의 심리전술인 모양이다. 그들의 말대로 내가 해이하게 되지 않도록 경고하는 것일 뿐이구나.'

그런데 10시에 고문은 또 다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김수현은 본인을 고문대 위에 묶어 놓고는 말했습니다.

"오늘은 금요일이고 13일이다. 무슨 날인지 알겠느냐?"
"악마의 날이다."
"서양에서는 오늘을 최후의 만찬이라고 한다. 너에게도 최후의 만찬 날이다. 각오하라."

고문 기술자는 8일 이후 본인의 사건에 이렇게 깊이 개입해 오지는 않았었는데 13일, 이 날은 팔을 걷고 나섰습니다.

그야말로 '최후의 만찬'이었습니다.

 

새벽 2시 반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계속하여 가했습니다.

마음은 물론 몸도 도무지 견뎌낼 수가 없게 됐습니다.

고문기술자는 기승을 부리며 고문을 하고, 김수현은 퍼렇게 핏대를 세우며 끊임없이 모욕했습니다.

고문기술자가 피로하여 주춤하니 김수현이 직접 나서서 장치를 들고 전기고문을 꽤 오랫동안 했습니다.

이렇게 김수현이 전기고문을 하는 동안 고문을 하는 고문대 옆 욕조에서, 고문대 위에서, 샤워를 하고 몸을 닦는 기척이 들렸습니다.

그러면서 키득거리고, 왜 그런지 이것이 그렇게 마음에 슬픔과 상처를 안겨주더군요.

나는 아주 초라한 존재로서 미물처럼 짓밟히고 있는데, 그자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백남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머리가 컴퓨터일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중지에 못 당한다. 여러 사람이 의논해서 대처하는 데는 못 이겨.

당신이 왜 이렇게 고초를 당하고 미움을 받는 지 알아? 묻는 말에만 대답하기 때문이야. 그것도 아주 부분적으로....

그러니 고문당할 수 밖에 없어."

그러자 김수현은 "당신은 무슨 당신이야? 개새끼지, 나쁜 개새끼야!? 하고 잔인한 고문을 쉴 새 없이 가했습니다.

본인의 기력이 워낙 탈진해서인지 한번에 오래 고문을 가하지 않고 자주 쉬면서 했습니다.

워낙 꽁꽁 묶어서 고문을 안하고 고문대에 눕혀만 두어도 그 자체가 고통이었으며, 팔, 다리가 금방 저리고 시큰거렸습니다.

본인이 "손, 발에 피가 통하지 않아 저려서 못 견디겠다. 풀어 달라" 는 뜻의 말을 하자,

고문기술자는 "그래, 걱정 말아!" 하면서 전기고문을 왕창 세게 하기도 했습니다.

남영동 고문에서 본인은 한 번도 의식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13일, 이 날은 이미 기력이 다해선지 전기고문, 물고문을 가해도 발버둥질을 치지 못했습니다.

그때마다 고문은 중지되고 찬물을 머리에 붓고, 가슴을 손바닥으로 쳐댔습니다.

점차 아슴프레 해지는 의식 속에서 '아, 이제 내가 정신을 잃겠구나' 하는 순간이 되면 고문은 중지되었습니다.

고문기술자들은 아는 일이었습니다.

13일 고문 이후, 남영동에서는 물론 구치소에서 생활해 나가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몸이 참으로 나빠졌습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밥을 먹고 소화해 낼 수 없었으며, 보행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두통이 걷잡을 수 없는 최악의 상태에 다다른 것은 물론이구요.

어떤 한계점, 분수령이었습니다.

일단 13일 고문은 14일 새벽 2시 반에 끝났습니다.

그러나 김수현은 남아서 박명선과 또 한사람을 데리고 14일 새벽 3시경 부터 3시반경까지 또 고문을 해댔습니다.

이 새벽녘 고문에서 김수현은 또 다시 문용식의 N.D.R.과 학생운동의 배후로서 민추위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자백을 요구했습니다.

사실 고문을 받지 않을 때는 이 부분에 대해서 완강하게 저항을 하고 고문대 위에서 인정했던 것을 엎어버리곤 했습니다.

점차로 슬그머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민추위라는 단체에 대해서는 9월 8일 문용식의 N.D.R.강제 인정 요구시,

민추협은 알지만 민추위는 모르는 것으로 이미 고문자들도 인정해 주고 넘어갔던 것인데 새삼스럽게 다시 등장한 것입니다.

이 의도가 무엇인지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학생운동의 배후로서 구체적인 관계 설정을 얻어내도록 상부로부터 지시받았을 것입니다.

김수현도 약간은 면구스러웠던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한테는 하나도 손해가 아니고, 그냥 그런 단체가 있었다는 것을 듣고 알고 있었다"는 것 뿐이라고.

이것은 본인이 문용식에게 N.D.R.을 설명했다는 강제자백을 요구한 그날 그 자리에 대한 합리적 근거를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며,

학생운동의 명백한 배후로 더욱 확대시키고 키워 가려는 의도임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서도 고문대 위에서는 언제나 항복과 인정, 그것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9월 13일에 가장 중요하게 강제해 온 주제는 민청련의 재정이었습니다.

남은 시간에 다시 배후의 문제가 등장하였고, 마무리 즈음에서는 9월 4일 이래의 총복습이 이루어졌고요.

밤 10시에 김수현과 백남은은 재정 문제에 대해 크게 화를 내면서 소리쳤습니다.

"우리 꼴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이제 김근태에 관해서는 모두 다 밝혀졌고 얘기도 잘 하고 있다. 재정문제도 그렇다고 보고했고,

회의석상에서도 그렇게 말했는데 이제 도대체 무슨 꼴이냐. 상부로부터 호통을 당하고 개망신을 당했다. 각오하라"는 공갈이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미국 워싱턴 소재 동포 신문사 기자인 심기섭씨로부터 송금되어 온 45만원,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를 통해서 민청련에 전달되었습니다.

얘기 못할 것은 하나도 없지만 이미 확정된 결론을 갖고 있고, 그것을 위해서 짜 맞춰 나가는 이들에게 무언가를 얘기한다는 것은

피해의 확산을 광범위하게 만들 뿐임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이 돈에 대해서 다른 정보수사기관인 안전기획부에서 치안본부와 남영동에 물어왔다는 것입니다.

본인에 대한 조사에서 이 점이 밝혀져 있지 않은 것을 본 안기부쪽은 남영동조사에 대한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을 것이고,

그것이 치안본부쪽과 남영동을 당황시켰을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에 대한 격노와 재차의 고문을 가하도록 남영동 상부가 지시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나는 고문 앞에 도리가 없었습니다.

인권위원회 사무국장 권호경 목사를 통해서 돈을 받았다고 인정했습니다.

선의와 민주화에 대한 염원에서 민청련을 지휘하고 그 전달통로가 되신 분들을 지켜낼 수가 없었습니다.

고문 앞에 무언의 약속을 저버린 배신자가 되어 갔습니다.

이 점 때문에 권호경 목사는 본인의 배후로서 위치가 좀 더 탄탄해졌습니다.

재정문제에 관해서 위에 말한 것 이외에도 대라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이 고문자들은 자기들 상부에 보고해야 할 처지였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미 고문자들이나 본인에게 무엇이 사실인가가 꼭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몰리고 있는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하는 점이 더욱 중요했습니다.

 

서 있는 현재의 처지가 본인과 이 고문자들은 극도로 대립적임에도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니 몰리고 있는 이 고문자들, 그 상부에 본인이 무엇인가를 주어아하는 시혜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고문대 위에서는 이것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한편 자포자기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치명적인 부담이 몇 사람에게만 몰리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이들이 상부 또는 타 기관에 보고하는데 필요한 하나의 각본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몰론 고문자들이 묻고 수정하고 하는 협력 속에서 각본은 점차 완성된 모습을 형성해 나갔습니다.

회원들의 월회비 160만~180만원과 지도위원 40여명의 월 2만원 이상씩 60~80만원이 민청련 재정의 골격이며,

이는 이미 얘기한 것이라 이외의 것이 필요했습니다.

종교계, 재야, 언론계, 법조계 인사등 모두를 포함시켰습니다.

범위를 아주 넓혀 버리면서도 돈의 액수는 되도록 작게 했습니다.

그러나 죄송하지만 몇 분에게는 부담을 지웠습니다.

고문자들은 좋아하면서 "여기서는 아무것도 감출 수 없어. 진작 얘기했으면 고문도 받지 않았을텐데..."라고 하더군요.

그렇습니다.

인간에 대한 고문을 주저하지 않고 사용하면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필요한 무엇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무슨 중대한 것을 발굴해 낸 것처럼, 진리를 깨달은 것처럼 화색이 도는 낯빛을 했습니다.

며칠 후 고문자들은 네 개 은행의 구좌를 갖고 와서 또다시 재정에 대해 물었습니다.

이 때는 고문을 당하지 않았으며 심한 추궁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 네개의 통장들은 민성돈이라는 가명으로 똑같이 만든 것입니다.

회비를 내는 직장 생활인들에게 부담과 피해가 돌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 개의 통장을 만들었고 가명을 사용했던 것이었습니다.

13일, 이날은 김수현의 말대로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었습니다.

그 고문의 강도는 8일의 경우보다 못하지 않았나 싶지만, 이 13일 이후 본인은 결정적으로 균형상태를 잃어버렸습니다.

 

이튿날인 14일부터 남영동을 떠나는 26일 점심때까지 본인은 밥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국물과 두어 숟가락 정도의 밥을 그것도 오래오래 씹어서 겨우 먹을 수 있었습니다.

요기는 주고 햄버거빵을 우유에 녹여서 채웠고, 즉석라면에 물을 부어서 그 국물과 약간의 라면발로 허기를 메웠습니다.

 

김수현은 이러한 본인을 보고 "단식투쟁을 하는 것이냐"고 묻더군요.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런 의사가 약간이라도 통할 수 있는 사람들로 내가 자신들을 생각하리라고 믿었던 것일까요.

목은 붓고 쉬어서 말을 제대로 못하고, 머리는 깨어져 나갈 것 같고, 온 몸이 산산이 부서져 나가기 직전 같았습니다.

말하면 쓰고, 베끼고, 손도장 찍고, 또 찍고 하면서 26일까지 갔습니다.

14일부터 19일까지는 평균 4시간 정도 재워 주었습니다.

그 이후는 거의 잠을 못잤습니다.

4일부터 9일까지처럼 앉아서 약간씩 졸았던 것이 전부였습니다.

 

식사를 주지 않아 고문이 박두했음을 경고하는 심리적 고문, 조건반사에 기초한 압박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 당시 밥의 제공은 고문이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여부의 알림역할이었습니다.

당시 밥은 요기수단이 아니었으니까요.

 

평균 이틀에 한번 정도씩, 이른바 고문자들이 말하는 본인의 해이함을 방지하기 위해 이처럼 심리적 고문을 해왔습니다.

저녁식사 시간인 5시반부터 대략 10시까지 초죽음이 된 상태로 지내게 되고,

밤 10시가 지나면 이 고문자들은 본인을 위로하면서 라면을 끓여주었습니다.

고문 없이 하루가 지난 것을 고마워하면서, 주는 라면에 콧등이 시큰해지면서 본인은 남영동에서 살았습니다.

미묘한 감정의 혼란상태로 들어가게 됐던 것입니다.

당시 김수현은 정말 표독하게 굴었습니다.

고문도 잔인하게 할 뿐 아니라 직접 자신이 도구를 들고 고문을 했고, 끊임없는 모욕과 학대를 가했습니다.

가톨릭신자이며 최기식 신부를 조사했다는 이 사람은 초기에는 소극적이었으며 무척 난감해 했습니다.

그러다가 8일 이후, 특히 13일 이후부터 본인을 악마같이 학대했습니다.

이 사람은 이러한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안보와 관련된 사건을 주로 맡아오고 있어서 고문은 불가피한 것이다.

이런 사건들에서는 고문을 통해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는 일이 필수적이다.

고문을 가한 것 때문에 자신에게 상처로 남은 것은 없다.

오히려 진실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해 찜찜한 것으로 남은 사건들이 자꾸 떠오른다.

고문을 가하는 것은 상대에게 일찌감치 체념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자백의 결단을 도와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나름대로 합리적이고자 하며 절제하려고 한 사람입니다.

무슨 악마의 화신이나 그 아들인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잠깐씩 하는 생활 얘기속에서, 그 모습에서 검소하고자 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자신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탐욕과 그로 인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국가변란과 폭력적 행위를 한 것은 정치군부지만 생활을 위해서 자신들은 결국 그 힘에 굴복한 것이다.

그러나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서도 그렇게 한 것이다.

광주사태를 민중항쟁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자신은 잘 모르겠다.

그것이 아닌 근거도, 또 그렇다고 할 논리도 제대로 갖고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반드시 절벽은 아니고, 어느 면에서 치안본부 대공과장 신 모씨의 말처럼 약간 대화의 논쟁 비슷한 것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9월 4일부터 8일까지 백남은이 지독하게 고문을 가하도록 지시를 내렸는데 그 역할이 김수현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이른바 구성요건 해당성을 충분히 확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점차 분명해짐에 따라 상부의 요구와 질책이 심하게 가해져 왔을 것이고,

그에 따라 김수현은 자신의 역할을 악독하게 전환시켜 나갔을 것입니다.

나중에는 김수현이 무서울 뿐만 아니라 징그러운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비위가 역해지는 그런 사람으로 느껴져 갔습니다.

고문을 자주 가하면서 본인을 고문대 위에 올려 묶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고문받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이런 저주받을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고문 받는 것, 그것이 어떻게 습관이 되고 어떻게 면역이 될 수 있겠습니까.

초기의 김수현이 상대적인 합리성을 갖고자 했던 것, 그것은 상부의 지시와 요구, 즉 정치적 필요성에 입각한 명령에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김수현의 역할이 바로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9월 10일 밤 7시경부터 10시경까지 고문을 당했는데, 그것은 처음 당하는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전기봉 고문인데 양쪽 발등에 무슨 장치를 하고 진동을 일으켜 고문을 가하는 것입니다.

이 고문을 직접 지휘한 것은 김영두이고, 그 뒤에서 김수현이 조정했습니다.

박병선, 최상남, 정현규, 경상북도 출신의 또 한 사람의 경찰관이 고문을 했습니다.

 

9월 8일을 고비로 백남은은 고문 지휘에서 부차적인 역할을 맡아 김수현이 더욱 분명하게 주동적 임무를 맡아갔습니다.

9월 8일 밤 고문에서, 나중에 가서는 김수현이 직접 고문장치를 들고 전기고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9월 10일, 이날의 고문은 여러가지 계산 하에 뒤에서 지시하고도 자신은 잘 몰랐던 것으로

예상치 못했던 바라고 얘기하며 마치 위로자인 것처럼 행세하기도 했습니다.

전기봉고문은 이렇습니다.

대단히 빠른 진동때문에 발등에는 심한 통증이 옵니다.

상처가 생기고 깊이 파이는 것 같은 느낌조차 옵니다.

피가 흐르는 기분도 듭니다.

그래도 이 전기봉고문은 받을 만하다고 할까, 상쾌하다고나 할까, 아니 양념 고문이었다고 할까요.

원체 심한 고문을 당해서 그런지 이 날 같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조차 했습니다.

더구나 물고문도 이날은 하지 않았으니까요.

또 발뒤꿈치의 상처가 깊어지지 않도록 반창고를 붙여 주고 발 밑에 수건을 접어 넣어 주기도 했습니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한편 고마움조차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벼락 맞아 속이 다 타버린 고목처럼 깊이깊이 내상을 입히는 그런 전기고문이 아니고,

시커멓게 몰려오는 저 무서운 공포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발등 정도 좀 찢어지고 으깨진들 그것은 별 대수로운 것은 아니니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뭐라고 할까요, 인간적인 그런 고문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고문을 시작하기 전에 심리적인 압박을 받기는 했지만 '괜찮게 고문을 받았다'고 말하고 싶기조차 합니다.

고문 도구, 즉 눈가리개, 물주전자 등을 책상에 나열하면서 겁을 주더군요.

마음에 부담을 주려고 그렇게 했겠지요.

 

이것을 박병선이 했는데 의도를 알겠더군요.

쫄아 들게 하려는 것이지만 이것은 실제로 고문하지 않을 조짐일 수도 있고,

하더라도 심하게 가하지 않을 것임을 나타내는 징조임이 읽혀졌습니다.

대충 그런 성격의 고문이기도 했구요.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은 결코 하닙니다.

이 고문도 역시 괴로운 것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10일 전에는 잘 몰랐었고 또 당초 식사할 수 있는 마음도 아니었기 때문에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고문자들은 9일부터 식사를 제대로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 전에는 밥을 언제 주었는지, 준 적이 있었는지조차 잘 기억하지 못하겠구요, 10일, 저녁 식사를 주지 않았습니다.

 

9일 아침부터 쭉 주던 것을 안 주니 이상할 수 밖에요.

고문을 가할 경우에는 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이날 알게 되었습니다.

가혹한 고문을 가하기 때문에 - 속이 뒤집히게 하는 것은 전기고문이 아니라 물고문인데 -

그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문시 거의 틀림없이 속이 뒤집혀 토할 것이고, 토하는 경우 고문자들을 난처하게 만들 것이며

고문의 진행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에 밥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혹시 토할 때 기도가 막힌다든지, 그로 인한 불상사를 생각해서 안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밥을 안주면 고문이 임박한 것임은 아주 분명해졌습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반복된 고문의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고문자들은 9월 13일 이후 심리적인 압박을 가하는데, 밥을 안 주는 것과 고문을 가하는 것을 연관시켜 매우 잘 사용했습니다.

즉 고문자들이 뭔가 불만이 있으면 밥을 안 주고, 그러면 본인은 고문이 박두했음을,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고 파랗게 질리곤 했습니다.

이때 고문자들은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나는 덜덜 떨면서 시키는 대로 하구요.

고문, 그것은 마음내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과학적이고 많은 경험을 통해서 정리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문의 시점, 방법 등에 대해서는 정말 사장급 이상의 회의에서

여러 가지로 검토하고 결정하는 것이 틀림없을 분위기로 전달되었습니다.

이날의 주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지금까지 강제해 온 것의 암기 확인, 복습, 다음에 본인이 60년대 중, 후반 대학시절 학생운동에 어느 정도로 관여해 왔는지에 대한 확인,

그리고 군대 제대 후부터 복학하였을 때의 동료 친구관계를 집중해서 캐물었고, 끝으로 73년도인가 74년도에 크리스찬 아카데미

-강원용목사가 원장인-에서 시행한 중간 집단교육-노동조합 간부들을 중심으로 하고 몇 명의 봉급생활자들이 교육생으로 참여-에

참여했던 것과 그 교육과정에 대해 물었습니다.

복습암기에서는 욕을 먹고 나중에는 칭찬도 받았습니다.

학생운동에 대한 것은 워낙 먼 옛날인 20여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까다롭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70년 9월 복학해서 72년 2월에 졸업할 때까지 교우관계에 대해서 처음에는 지나가는 것처럼 묻더니

나중에는 매우 심각하게 따지고 압박을 가했습니다.

이것은 13일의 고문으로 연장되기도 한 주제였습니다.

본인이 복학했을 때 상과대학 대학원에 제일교포 유학생으로 온 사람이 있었다면서 이 사람과 연결시키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본인의 출신교인 경기고등학교 동기동창으로 한 해 늦게 상대 경영학과에 입학했으며

지금은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가 되어 있는 누구인지를 통해서 이 제일교포 유학생 간첩과 연관 지으려는 공작이었습니다.

빛바랜 사진을 고문대 위에 묶어져 있는 본인의 얼굴에 들이대면서 인정하라고 아우성 쳤습니다.

물론 이 사진이 누구인지는 모르고 서울대 교수로 있다는 그 동창이 누구인지, 또 진짜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인지조차 의심이 되기도 합니다.

만일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로 있다는 본인의 고교동기가 실제로 있고, 그 친구와 교분이 있거나 깊어서 고문자들이 평범하게 물을 때

그 이름을 얘기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오싹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13일의 고문에서도 이것은 꽤 오랫동안 집요하게 추궁받았고, 이 10일은 고문자들이 깊이 꾀를 내어 살살 접근해 왔던 것입니다.

남영동고문자들은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중간 집단 교육의 한 부분에 대해서는 매우 분개하였고,

이는 본인을 급진적인 분자로 단정하는 하나의 자극이 되었습니다.

73~74년 당시 크리스찬 아카데미는 노동조합총연맹에 교육생을 보내줄 것을 공식으로 요청하고,

이에 노총은 각 산별에 의뢰하여 노조 간부들을 중간 집단 교육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약간명의 중간 계층인 봉급생활자등도 참여했으며, 본인은 그런 자격으로 참여했습니다.

이 교육의 강사는 강원용 목사, 이문영 교수, 박재봉 교수 등 여러 분이 있었습니다.

강의도 있고 토론, 사례발표, 노래 연극 등 여러가지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앞으로 연도별 자기 일생 계획과 죽음을 맞이하게 될 시점,

그리고 무덤에 묻혔을 때 희망하는 묘비명에 대해서 써 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의 진행과 안내는 박재봉 교수가 맡았던 것으로 기억되고,

일단 작성이 완료된 후 노조간부들은 그것을 발표했던 것이 아니었는가 싶습니다.

 

당시 교육학생들은 일생계획수립에 대해 막연했으며, 더욱이 죽음과 죽을 때를 희망하는 시기와 묘비명에 대해서는

일정한 당혹과 동요, 부담감조차 없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에 대해서 박재봉 교수는 '여러분을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고 다른 나라 교육프로그램에서 따와 시도해 보는 것'

이라며 나름대로 의미있음을 설득했습니다.

본인도 이에 따라 시기(연도)별 일생계획표와 세상을 떠날 연도, 묘비명 등을 포함한 여러가지를 작성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대부분의 것은 보지 않고, 또 전체의 흐름과 당시 교육에 참여했던 것이 노동조합 간부 중심이었던 점 등은 고려하지 않고,

자기들 비위에 거슬리는 부분만 문제 삼아 화를 냈습니다.

물론 이 고문자들, 그리고 그들에게 지시하고 보고를 받고 자기들의 정치적 이익, 반사적 이익을 위해서는

무슨 짓도 감행하는 정치군부에게는 이것도 본인을 불온한 불순분자로 몰아버리는 하나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희망하는 결혼 연도 등을 - 당시 본인은 아직 미혼이기에 당연히 결혼에 관하여 관심이 있었지요 - 빼 버리고 오직 세가지를 문제 삼았습니다.

첫째는 몇 년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노동자, 농민의 정당 설립, 두 번째는 1988년에 남북민족통일,

세 번째는 2016년인가에 본인이 세상을 떠나고 희망하는 묘비명으로 '여기에 사람 사랑하던 사람이 잠들다' 라는 것을 작성한 것입니다.


첫 번째는 기층 민중의 정당이고, 계급정당의 구상으로 당연히 불순한 것이 아닌가라고 단정했습니다.

그렇게 보기로 결심한 사람들 눈에는 아주 훌륭한 몇 개의 문자로 된 증거겠지요.

당시 교육은 대부분 노동조합운동과 그를 통한 사회발전 문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조합 간부들이 거의 전부이고, 이들이 교육 분위기를 잡아 나갔습니다.

 

조합원과 노동자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개선 뿐만 아니라,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에도 노동자들에게도 반드시 정치활동이 필요하다는 토의도 있었고, 조합 간부등의 토의, 종합결론도 있었습니다.

또 여러 교수님들 강의에서 노동조합의 정치참여는, 정치활동은 필요하고 바람직한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되었습니다.

미국의 경우처럼 대통령 선거시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천명하는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는 방법,

영국의 경우처럼 집권하는 방법 등 여러가지 소개가 있었습니다.

당시 유신 치하에서 유정회에 직능대표로 노동조합 간부를 보내는 방법에 대해서는 모두가 비판적이었으며,

노동조합의 정치참여 금지규정, 법률에 대해서는 특히 격한 이의 제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특히 조합 간부들이 노동자들의 정당 설립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구동성으로 같은 생각을 표시했습니다.

특히 영국의 경우가 보다 바람직한 것으로 되었습니다.

본인은 대학 출신, 그 중에서도 좋은 학벌 등으로 그 교육에서는 뭔가 미안한, 부채의식도 없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동일화가 되지 못하는 것, 즉 소외감도 있었구요.

그런 분위기에서 노동자, 농민의 정당 설립이라는 아이디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조합간부 대다수 사람들의 일생계획표에도 등장했고 발표낭독도 되었다고 기억합니다.

이것을 앞뒤 다 자르고 이 몇 개의 문자를 들어 늘 그렇듯이 문제를 삼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남북통일이 왜 하필 88년도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참!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내가 신통력이 있어 시점을 맞춘 것처럼 분개하고 괘씸해하며 따지는 것이었습니다.

 

73, 74년 당시 88년이 정권 임기와 관련 있을 것이라든지

하계 올림픽 연도가 될 것임을 이미 예측하고 고약한 장애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이것도 불순한 의도를 엿보게 할 수 있는 자의 음모라는 말인지 말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88년도는 우리 모두에게 매우 익숙한 용어이며 민족통일은 모든 민족의 염원으로 어울려 짝짓기 참 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1988년의 민족통일, 그것을 70년대 초에 기대하고 희망한 것이 문제가 됐습니다.

고문자들도 추궁했지만 본인의 면전에서는 논리적으로는 심하게 굴지는 않았습니다.

너무나 뻔한 일이어서 그랬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세상을 떠나는 시기와 묘비명 이름마저 유서에 써놓고 민주화 투쟁을 하는 악질 분자로 보는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희망한 것은 70살이 되어서 삶을 마치는 것이었다고 기억됩니다.

이는 장수고 어느 면에서는 천수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가장 중요한 양식인 인간에 대한 사랑, 그것을 실천하다가 죽기를 바라는 것이 무슨 비장한 결의인 것처럼,

음산하고도 어두운 음모인 것처럼 매도 당했습니다.

 

고문자들은 이를 무슨 대단한 일처럼 상부에 보고했습니다.

소위 남영동은 본인에 대한 불순한 배경의 중요한 기둥 중 하나로 의견서를 택한 것입니다.

최민화씨의 법정 증언에 의하면 본인은 이미 유서까지 써놓고 운동을 하는 것으로 고문자들은 말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포복졸도할 희극이 그렇게 무거운 부담으로 왔습니다.

이것이 범죄적 고문을 감행한 남영동 그곳에서 본인이 처했던 멍에였습니다.

이미 기정사실이 된 불순한 올가미에 온갖 것을 들어다 꿰어 맞추는, 남영동 제조공장이었지요.

6월 10일 고문은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았고, 끝난 뒤에는 김수현으로부터 위로도 받았습니다.

고통이 심하고 고생이 되는 줄 잘 안다면서 고문대에서 내려오도록 부하 고문자들을 채근했습니다.

눈물이 핑 돌고 콧등이 시큰해졌습니다.

조금만 더 역성을 들어 주었으면 그 김수현 가슴에 기대어 엉엉 울고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버렸을 것입니다.

 

나치 수용소에 감금되어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종전과 더불어 풀려나온 어느 유태인 정신과 의사의 피맺힌 기록이 생각납니다.

원수, 악마였던 S.S고문 친위대가 나중에는 병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경매의 존엄한 자로 군림하게 되는 절망적인 인간의 고백을 읽고 몸서리를 쳤었습니다.

 

인격의 와해, 인간의 허약함을 송두리째 폭로하는 것으로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분노하고 저주해야할 그 고문자들을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첫 날 혹은 둘째 날부터는 분노할 수 있는 능력이 박탈되었던 것입니다.

삶과 죽음의 열쇠를 갖고 있는 그 고문자들에게 모든 힘을 다하여 아양을 떨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 고문자들의 현장 지휘자인 김수현에게 10일날 위로를 받은 것, 그것은 당시 본인에게는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따뜻한 라면을 대접 받고, 밤 12시가 되어 잠도 재워 주고, 이제 평화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분명했던 것입니다.

9월 8일 일요일 오전 10시경. 지옥에서 온 나찰 같은 얼굴을 한 윤재호가 방에 들어섰습니다.

잠시 후 김수현, 빅남은, 김영두, 고문기술자, 정현규, 박병선, 최상남 그리고 또 한 사람 허만조 등이 방을 꽉 메웠습니다.

윤재호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본인 맞은 편에서 앉자마자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너 이 새끼, 배후를 안대?

콧구멍에 고추가루를 처넣어서 폐기종을 만들어 죽여 버리겠다.

안 댈 거지?

그거(고문대) 들여와,

이 새끼 내가 직접 고문할게."

다른 사람들은 조금 당황한 듯 하면서 모두 서 있었고

김수현, 백남은, 고문기술자들이 굽신거리며 "저희들이 하겠으니 나가시라"고 애원 겸 정중하게 말하더군요.

그 사이 정현규와 최상남이 고문대를 들고 들어왔습니다.

이 때 그 고문대 구조를 명확히 볼 수 있었습니다.

윤재호는 분기탱천해서 나가고, 김수현과 백남은은 '상급자가 저러니 자기들로서는 도리가 없다' 히고,

고문기술자는 여러가지 협박을 해왔습니다.

이렇게 고문은 또 시작되었습니다.

주제는, 아니 메뉴라고 할까요.

배후, 정치적으로 아주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불순한 모종의 배후,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나이 사십인데 누가 배후가 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당신들이 말하듯이 민주화운동에서 책임있는 사람들 중 하나이고 오늘의 이 결과를 가져오게 한 역할을 해 냈는데,

내가 누구에게 조정을 당하겠느냐."

고문자들에게는 논리가 통하는 것도 아니고 또 귀를 기울이려 하지도 않았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나는 얘기했습니다.

이들은 상부의 상부인 정치군부가 정해 준 방향대로 결과를 얻어내도록 움직일 수도,

변경할 수도 없는 명령을 받고 그 임무를 완수해 내야했던 것입니다.

고문대 위에 묶어 놓고 그늘진 곳에 숨어 있는 배후, 공개운동 선상에 나와 있지 않은 사람의 이름을 요구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이미 당신들은 잘 알고 있다. 오랫동안 사무실, 집 전화를 도청했고 나를 미행해 오지 않았느나,

그러고도 이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며 항의했습니다.

 

고문기술자는 "이 새끼 항복했다더니 아직 입이 살아서 움직이는구먼. 진짜 맛을 보여 주겠다.

남민전, 이재문이 어떻게 죽은 지 알아? 전노련 이태복 얘기 너도 들었을 거다.

이재문이는 여기서 당해서 이미 속이 부서져 감옥에서 병사한 거야, 너도 각오해" 하고 협박을 하였습니다.

이 날은 남영동에서 받았던 고문 중 최악의 고통스런 날이었습니다.

가장 혹독하고 긴 고문을 받았습니다.

진부하고 희극적인 추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본인의 월북여부에 대한 추궁, 행적에 대한 추궁이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짓거리입니다.

하지만 고문자들에게는 반드시 빼놓지 않는 과정이며 고문을 가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꺼리'가 됩니다.

정상 상태에서는 그 누가 이렇게 협박을 한다 해도 그것에 대해 인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허나 고문대 위에서 이는 참으로 심각한 위험으로 다가옵니다.

결국 나는 인정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고문자들은 좋아서 히히덕거리기조차 했습니다.

고문기술자는 공포분위기를 조성했으며 백남은이 추궁했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월북했는가'에 대해서 말입니다.

 

나는 삼천포에서 배를 타고 갔다고 했습니다.

백남은, 김수현 등은 폭소를 터뜨리면서 "그것은 여기서 취급했어, 우리가 잘 알아서 하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추궁이 멈칫해졌습니다.

삼천포는 80년 광주사태 이후 몇 년도인가,

박계동씨가 정치군부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일본으로 밀항하려고 했던 항구였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서 얘기했던 것입니다.

그것 이외에는 그럴 듯하게 말할 것조차도 없었지만,

다음은 본인의 형들 셋이 월북을 했고, 간첩으로 남파된 형들을 만났다는 것을 자백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결국 인정하는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간첩과 접선 인정은 본인에게 죽음을 가져온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덮쳐 누르는 전기고문과 물고문의 고통을 우선 모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비합리적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만일 고문을 당해보면

왜 죽음을 가져올 지 알면서도 인정하고 손도장을 찍을 수 밖에 없는가를 적절하게 알게될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를 요구하면서 증거를 강요하더군요.

돈을 받았느냐고 해서 1백만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74년도 쌍문동 집 근처에서 한번 만났고, 84년도에 역곡에서 한 번 만났다고 했습니다.

이 고문자들 참 좋아하더군요.

좋아서 미쳐 날뛰기 일보직전인 것 같았습니다.

김수현은 합리적 근거를 대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들의 분위기는 달밤에 먹이를 앞에 놓고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털 빠진 승냥이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말을 만들어서 얘기를 하니까 고문자들이 거들어 주고 수정을 해 주었습니다.

고문대 위에 놓여진 본인과 고문자 사이에 협력과 토의 수정이 진행되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이렇게 하며 각본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백남은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평양이 부산이지?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하고."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습니다.

반복해서 백남은이 얘기할 때 비로소 알아들었습니다.

백남은은 이어서 "그런 일 없지?" 라고 확인을 했고 "그런 일 없는 것은 우리가 알아"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이 날 지경으로 고마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틈에 용기를 내어서 "정말 그런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고마움과 안도에 떨리는 목소리로 서둘러서 반복하여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확인했습니다.

고문기술자가 나서더군요. "그러면 왜 만났다고 했는가, 고문에 못 이겨서 그랬다고 했는가" 라고 추궁하며

다시 강하게 전기고문을 시작하면서, "아냐, 간첩을 만났지?" 라고 요구해 댔습니다.

 

부정했지만 결국은 또 인정하게 되고요.

도대체 몇 번을 이렇게 왔다 갔다 하도록 고문하고 강요했는지 모릅니다.

거기다 또 '말이 왔다 갔다 한다' 고 고문을 해대고 말입니다.

아, 이처럼 눈물나는 희극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구나. 희극의 시대구나. 이 저주받을 희극의 시대'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하여튼 월북과 간첩과 접선 얘기는 대충 이렇게 끝났습니다.

이후 필요할 때는 위협수단으로 사용했지만, 이 문제에 관한 한 어떤 진지함을 고문자들은 갖고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사실 고문자들에게 처음부터 느낀 것은 본인의 사건에 어떤 열성이나 뚜렷한 확신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무리를 하고 있다는 표정이나 몸짓이 전해져 왔습니다.

자기들끼리 수군대는 과정에서 '시기가 너무 빨랐다',

'아직 사건으로 만들 때가 아니었는데' 하면서 고문자의 누구누구는 '흥미가 없다'고 얘기하는 것도 직접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그들이, 그들의 지휘자인 정치군부가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물러설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보듯이 무리와 무모함을 더욱 강제하고, 그를 은폐하기 위해서 별별짓을 다하게 되는 것이지요.

8일 오후 1시 반경, 일단 오전 고문은 끝났습니다.

저녁 7시경에 또 전기고문이 시작되었으며 밤 12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고통을 못 이겨 악을 써 대고 고문기술자는 맞고함을 치고 김수현 등은 킥킥거리듯이

몸부림치는 나를 묶인 채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내려다보면서 고문은 계속되었습니다.

역시 배후의 문제였습니다.

그늘에 가려진 사람은 있을 수도 없는 것이어서 무척 곤경에 빠져 버렸습니다.

둘러댈 이름도 없는 것이니까요.

배후란 것은 없다고 해 봐야 아무 소용없는 헛일이었고요.

 

결국 재야 운동권과 종교 운동권의 인사가 모두 배후라고 불면서 인정해 달라고 애걸복걸하였지만 고문자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그것은 물고 들어가는 일일 뿐이라고 하면서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들은 재야인사로 초점을 옮기더군요.

그 중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 이름을 계속 대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줄줄이 대고 거절당하고, 또 대고.... 이렇게 반복하기를 십여차례 하다가 함세웅 신부와 권호경 목사, 두 사람으로 좁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본인과 고문자들의 협력과 타협, 그리고 조작 위에 세워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지요.

함 신부는 완전한 배후로서 결정됩니다.

함 신부는 해방신학의 대가이며 본인이 83년 9월 민청년 창립 이후 매달 한 번씩 한강 성당, 구의동 성당으로 찾아가

민주화운동을 의논했다는, 고문자들 말에 의한 한 권의 소설에 본인의 철저한 배후로 등장하게 됩니다.

권호경 목사는 반쯤 배후가 되어 두 달에 한 번 정도 기독교회관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여러가지 얘기를 나눈 것으로 되고,

이것과 관련해서는 반 권 분량의 소설이 만들어집니다.

 

이 두분에 대해서는 참으로 미안하고, 부담이 되는 줄 알면서도 그것 이외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이을호 씨와 문용식 씨의 배후로 찍혀서 지금 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본인은 이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고문에 못 이겨서 강제자백을 한 것이겠지만, 그래서 이해를 충분히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 이을호씨와 문용식씨를 미워했었고 참으로 서운해 했었습니다.

그러나 본인도 거기에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아직 현실적 위험으로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일단 본인의 배후로 찍혀서 작성된 그 소설이 써먹힐 가능성은 있는 것이고,

아마 지금도 함 신부와 권 목사 두 분에게 부담과 위험이 되고 있을 것입니다.

이날 고문이 마무리될 즈음해서 이범영씨가 다시 거론되고 "민한당사, 미문화원 사건 조종을 했지?" 라고 강박하여

" 각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이범영씨로부터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코미디이며, 나는 이 코미디에 등장하는 꼭두각시였던 것입니다.

이 날부터 복습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4, 5, 6일 있었던 이을호, 문용식의 N.D.R.과 C.D.R., P.D.R.에 대해 완전학습, 총정리가 고문대에 눕혀진 채 요구되었습니다.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잘 해내서 칭찬을 받고 고문대에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8일에 있었던 물고문, 그것은 4,5,6일에 자행한 것보다 지독했습니다.

그것은 세수 수건 대신 코와 입 위에 가제를 덮고 물을 쏟아 부었습니다.

세수수건을 덮고 고문할 때에도 호흡은 완전 차단이었습니다.

공기가 끼어들 여지를 배제해 버리지요.

그래서 그런지 이 날 물고문의 중간, 한 번 입을 벌려서 고춧가루를 처넣었습니다.

곧 뱉어 버리긴 했지만, 입 속이 얼얼하고,

고문대 위 담요에 고여 있는 땀과 물 속에 떨어진 고춧가루 때문에 등 전체가 따갑기도 했습니다.

무슨 화학 약품이라고 겁주면서 가제 위에 한 웅큼을 집어다 놓고 물로 녹여서 입, 귀, 콧속으로 녹아들도록 했습니다.

이것을 세 번 했는데,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약간 집찔한 것으로 보아서 소금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이는 심리적 압박으로 고문을 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전기고문의 전류가 더 잘 통하도록

핏속의 전리도를 높이려는 이중적 계산이 내포된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이날의 고문은 잔인무도의 정점이었습니다.

목이 완전히 붓고 말을 제대로 할 수 없고 목이 쉬고....

연거푸 비명을 질러댔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지요.

팔꿈치와 발뒤꿈치는 이미 헤어져 상처가 어느 정도 깊어지기도 하고요.

 

이날 이후 고문자들은 팔과 발뒤꿈치 상처에 많은 신경을 쓰며 약을 사다가 먹이고, 바르고, 열심히 치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발뒤꿈치 상처가 특히 오래간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외용 살포제로 니라민산이라는 하얀 가루약, 수많은 항생제 복용, 옥시풀과 머큐로크롬 등으로 치료했습니다.

한편 목 아픈 데에도 무슨 약인가를 주어서 먹고 가라앉혔으나 쉰 목은 잘 낫지 않았습니다.

이 8일의 고문 이후에 나는 '저80년 5월의 광주사태가, 광주시민 대학살 같은 것이 85년 9월에 또다시 일어나고 있거나

반드시 정치군부에 의해서 감행될 예정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저히 이럴 수는 없는 것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예정된 정치적 사변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며

불순한 내란 소동의 주범 또는 배후로서 낙인 찍혀 공공연하게 선전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멍멍해지고 공중에 붕 뜬 것 같은 기분이 되기도 하고 나사가 풀려버려 드디어는 착란 상태,

광기를 보이게 될 운명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 당시, 그래도 현실성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은 머리가 빠개질 것 같은 두통이었습니다.

이것은 전기고문을 받을 때마다 더욱 심해졌고 그 견딜 수 없는 두통만이 현실적이었습니다.

그 어디에도 구원이라는 것은 없었고 구원의 빛깔 비슷한 것 조차도 없었지요.

모든 것이 이미 고문 지옥으로부터, 나로부터, 멀리 저 멀리 사라져 가버렸습니다.

4일 오전 남영동에 강제로 끌려 온 이래 단 한숨의 잠도, 한 끼니의 식사도 하지 못했습니다.

별로 자고 싶지도 먹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9월 6일, 점심식사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다 먹지는 못했지만 하여간 고마운 첫 식사였습니다.

나는 이것으로써 저 지옥 같은 고문의 폭풍우가 혹시 지나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물론 자기들 마음대로 국보위인가 하는 곳에서 만들고 뜯어고치고 한 그 법률이라는 이름의 것조차도 지키지 않고,

인간에게 있을 수 없는 고문을 은폐된 곳에서 감행하는 자들이지만

겉으로는 법이라는 것을 지키는 체하려고 하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연행한 지 만 48시간 이내에 구속조치 결정여부를 판단하려 한다고 느꼈으며,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고문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점심을 주고 난 이후 바삐 서두르던 분위기와 서류 준비가 미뤄졌습니다.

자기들끼리 수군대고, 밖으로 서로 불러내서 뭐라고 속삭이고, 분위기도 누그러질 듯하고요.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를 지경이었습니다.

 

'바깥에서 무슨 양의 움직임이 있는 것이 명백하고 이에 밀려서 주춤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구속방침이 확정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디 추이를 보자'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더니 미국 워싱턴에서 신문 기자로 활동하는 심기섭 씨에 대해서 묻기 시작했습니다.

사진도 가지고 와서 확인하고요.

하지만 이것은 그 무슨 신문 같은 것은 아니고, 혹은 상담 같기도 했습니다.

처음 이 심기섭씨를 물을 때는 사실 매우 긴장했습니다.

 

'심 선생을 간첩으로 몰고 이 간첩이 민청련 사무실을 방문했고 그 때 본인과 접선했다.

그리고 이 심 선생은 85년 2월 초 김대중 선생이 귀국할 때 미국에서부터 동행한 자다'는 내용 등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속으로 참 캄캄해지더군요.

결국 고문을 통해서 강요하면 또 굴복하게 될 것이고, 묘한 것은 험상궂게 추궁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선일 수도 있을 것이다'고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본인의 연행이 미국에도 알려져 동포사회에서 물의가 발생하고 항의가 제기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도 생겨났습니다.

저녁 7시쯤 되었을 것입니다.

김수현과 백남은은 얼굴에 웃음기를 띠면서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본인 앞의 고정된 철제 책상을 사이에 두고 정면에 김수현이, 왼쪽 옆에 백남은이 앉았습니다.

이것은 무슨 대화나 논쟁자리 같기조차 했습니다.

주로 백남은이 문제를 제기하면 김수현은 듣다가 중간중간에 끼어들어 공박을 했습니다.

논쟁, 특히 민주화의 문제, 정치문제에 관한 논쟁에서 본인이 이 사람들에게 밀릴 리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고문을 당한 후라도 얘기할 수만 있게 되면 내 얘기가 보다 타당성이 있을 것임은 명확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사회의 국민적 열망이고 시대적 대의인 민주화에 관해서 이들이 갖고 있는 견해는 극도의 편견과 편협함에 기초되어 있을 뿐입니다.

어쩌면 극도로 조잡하다고 얘기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견해와 주장을 강력하게 밀고 나아가 국민을 경멸하고 민주화운동을 탄압할 때 오는 반사적 이익,

정치군부의 권력이익을 조잡하게 반영할 뿐입니다.

 

백남은이 주장하고 요구하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80년 이후 민주화운동이 과격해지고 급진적이 되었다. 특히 학생운동이 그렇다.

이른바 레벌루션(Revolution)의 R을 지시하고 조정하는 사람이 명백히 있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얘기를 해 달라.

아직 자신들이 파악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곧 알게 될 것이다.

자신들의 요구에 응한다면 정부는 어떤 고위층이든지 내가 지정하는 사람을 오게 해서 명백히 약속을 하고 지키도록 주선을 하겠다.

당신을 내보내줄 수도 있다. 만약 내보내준다면 우리들에게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라고 기억됩니다.

논쟁적 성격과 윽박지름이 혼합된 채 1시간여 이상 걸렸습니다.

안 들어봐도 뻔한 얘기이고 신문지상에서, 텔레비전에서, 정치군부가 국민에게 행한 협박에서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상투적인 논리지요.

사실 속은 뒤틀렸습니다. 그러나 좀 힘을 회복해서 나름대로 진지하게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심각한 갈등이 있고 대결 의식조차 없지 않다. 이것은 불행한 일이다.

이것은 정치군부에 의해서 초래된 것이고 정권교체가 국민 의사에 따라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중요한 고비에 다다랐다.

이 고비를 올바른 방향으로 극복해서 국민 내부에 광범위한 합의를 이루고, 이것을 토대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경제 문제, 민생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80년대 민주화를 좌절시키고 광주사태를 감행한 정치군부의 폭력성이 오늘 이 불행의 직접적 계기다.

민주화가 실현되면 지금 대부분의 문제는 완전히 해소될 것이다.

그리고 R이니 뭐니 하는 것은 본래 없었던 것인데 그런 것을 지시하는 개인들이나 그룹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오늘의 상황, 이것이 민주화운동을 촉발시키는 것이다.

나는 지금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 민청련 의장을 그만두고 몇 개월 충분히 휴식을 하려고 했다.

만일 나를 내보내준다면 민주화운동 대열에서 후퇴하겠다'고 얘기했습니다.

이에 대해 백남은은 "보답이 겨우 그 뿐인가"하며 소리를 높였고

김수현은 "지금 우리와 논쟁을 하려는 것이냐, 설득하려고 하는 것이냐. 필요 없어. 이 새끼,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는거야" 하면서

버럭 화를 내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습니다.

9월 7일 본인의 처, 인재근 씨가 치안본부 대공과장 신모 씨를 만나서 항의했을 때 이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에 김근태의 사상을 뜯어고쳐 놓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면서,

가혹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항의에는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 지금 평화적으로 비교 논쟁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논쟁 비슷한 것이 9월 6일, 김수현과 백남은 함께 한 이 자리였습니다.

대공과장 신 모씨의 얘기가 이것을 지칭한 것이라면 혹시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직후 돌아온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전기고문 그것이었습니다.

전기고문 기술자가 들어오고 고문대가 들여지고 이날은 앞에서 기술한 윤재호를 제외한 모든 고문자들이 총 출동되었습니다.

노기등등한 이들은 푸른 빛마저 감도는 듯 했습니다.

논쟁 비슷한 것을 한 것에 대해 화내는 것 같기도 했고, 말에 밀린 것에 역정을 내는 듯도 싶었습니다.

아니면 약간 방심했다가 급습고문을 하여 고문 효과를 극대화시키려는 교묘한 기술적 대치이기도 했습니다.

5일에도 그랬고 6일에도 그런 리듬을 타는 것 같았습니다.

이날의 고문은 포악하고 격렬했습니다.

이 고문담당 기술자는 망나니였습니다.

숨통을 막아 버리고 목줄을 끊어 버리는 인간 백정의 진면복을 그대로 드러내었습니다.

 

파르스름한 요기 어린 달빛이 감도는 황야에서 작두칼을 휘둘러 대는 미쳐 버린 인간 백정이었습니다.

김수현과 백남은, 김영두 등은 이러한 망나니를 찬양하고 거들어 주고 축하하는 귀신들린 자들이었습니다.

 

격렬한 전기고문을 길게, 아주 길게 가하여 온몸이 고문대 위에서 오그라들어 버리는 것 같았고,

핏줄은 물론 모든 살이 마침내 다 타 버려 누리끼리한 살가죽과 뼈만 남아 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쉬지 않고, 조금도 쉬지 않고 이튿날 새벽 1시경까지 계속했습니다.

고통을 못 이겨 소리소리 질러 목 안에서는 피 냄새가 역하게 올라오고, 콧속에서는 댠내가 계속 피어올랐습니다.

물고문으로 인해 속이 빈 위는 계속 헛구역질을 해대고.....

처음에 나는 저항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결과는 예정되어 있던 것입니다.

고문자들의 요구에 굴복하는 것, 그것 뿐입니다.

 

이들에게 살해당할 것을 각오하고 저항을 하지만,

고통과 공포에 짓눌리게 되면 곧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라는 내면의 외침에

-이것은 고문자들의 또 다른 협박이며 유혹이 내면화된 것이지만- 부딪치게 됩니다.

'아,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원통해서 이렇게 개죽음 당할 수는 없다.

내가 저항을 하면 이들은 정말 죽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저 70년대 서울대 법과대학 최종길교수의 경우가 그렇지 않은가.

이 고문자들이 시종 뇌까리는, 심장마비라는 의사의 진단서를 붙이면 자신들은 완전히 발뺌할 수 있다.'

'어디 외상이 남아 있는가'라는 협박이 그렇게 위협적으로 다가올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그때의 얘기를 회상해 보더라도 두려움으로 심장을 두근거리게 합니다.

이런 경우를 닥쳐 보지 않은 사람은, 또 나도 고문을 당하기 전에는 그냥 지나쳐 버리거나 무시해 버렸던 것인데,

그 불행한 일이 이번에 나에게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하는 허약함이 머리를 들기도 했고요.

 

그러나 사실은 어떠한 두려움보다 전기고문과 물고문, 그것으로 인한 고통

그 자체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사실에 가깝습니다.

 

이 고문자들의 강제 요구를 인정하는 일이 나 자신을 죽음으로 한 발짝 나아가게 하는 길이더라도

지금의 이 고통을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만 된다면 무엇이라도 받아들이겠다,

이런 잔인한 고문만 아니라면 정말 죽음에 처넣어지는 것, 고문없이 살해되는 것조차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하게 됐고요.

 

아마 누구라도 그 길 이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을 것입니다.

무협지를 보면 싸움에서 패배하거나 중상을 입은 사람들이 곱게 죽여 달라고,

고통을 주지 말고 빨리 죽여 달라고 말하는 대목이 정말 이해되는 것입니다.

 

고통, 고문, 이런 고자 돌림은 죽음의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고 죽음의 핵심, 정수인 것입니다.

저 칠흑처럼 어두웠던 일제 치하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고등계 형사들에 의해 불구가 되고, 목숨을 잃고,

윤동주 시인이나 이육사처럼 옥사했던 그 이유가 바로 이런 참혹한 고문이었습니다.

 

저 지독히도 암울했던 70년대 긴급조치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갇히고, 줄을 이어서 갇히고, 가슴엔 한이 맺히고 슬픔이 쌓이고,

눈물의 강이 되고 분노의 파도가 되었던 그것이 이러한 끔직한 고문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이날도 또 굴복하였습니다.

주제는 문용식씨의 N.D.R.(National Democratic Revolution:민족민주혁명론)과 C.D.R.(Civil Democratic Revolution:시민민주혁명론),

P.D.R.(People's Democratic Revolution:민중민주혁명론)의 인정이었습니다.

 

초저녁에는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도 더욱 위험하다고 느꼈던, 학생운동과 연결시켜 몰아 때려 버리고자 할 것이 뻔히 예상되는데다가

정말 내가 부담해야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이 짐을 질 수는 없는 일입니다.

거기다가 이것은 도대체 반증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고요.

 

분명히 고문에 못 이겨 문용식씨가 이렇게 강제 인정한 것이더라도,

물에 빠진 사람이 무엇이라도 붙잡아 같이 물귀신이 되고자 하는 몸부림 그 이상은 전혀 아닌 것임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정말 저항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항할수록 고문은 더욱 흉폭해지는 것이지요.

 

답은 예스, 그것 하나입니다. 떠듬거리면서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암기하고 또 암기하기를 요구하더군요.

 

고문대 위에서는 정말 1초에 수많은 말을 외울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 고문대 위에서 문용식씨가 말했다고 하는 N.D.R. 이른바 민족민주혁명론을 공부한 것입니다.

참으로 기막힌 공부였습니다. 잘 외웠다고 칭찬도 받았습니다.

바로 이 날 고문담당 기술자가 고문 도중에 지쳐서 잠시 쉴 때가 있었는데, 그때 본인의 생식기를 가리키면서

"야 이렇게 작은 것도 X라고 달고 다니냐, 너희 민주화운동하는 놈들은 다 그러냐"라는 성적인 모욕도 하더군요.

그 당시 약간 열등감이 자극되기도 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난 그 때 '그게 무슨 문제냐, X이 없더라도 상관없는 일이다.

이 고통과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너한테 그 이상의 모욕과 폭언을 들은들 아무 일 없다' 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이 자가 사내다움을 뽐내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가학적 분위기에서 눈에 띄는 대로 상처를 주는 일련의 행위 중 하나였습니다.

고문이 끝난 것은 이튿날 밤 1시였습니다.

고문자들이 지쳐서 물러난 것이었지요.


 


9월 4일 오후 1시경 이후, 첫 번째 고문이 끝난 뒤 나는 대답하고 쓰고, 대답하고 쓰고 하였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무엇인가 얘기했지만 도무지 기억해 낼 수도 없고 앞뒤가 서로 뒤바뀌어 버렸지만,

고문자들은 끝없이 묻고 또 묻고 하였습니다.

 

그러더니 저녁 8시경 백남은이 다시 옷을 벗기고 눈을 가리개로 씌우라고 명령했습니다.

김영두, 정현규. 최상남은 민첩하게 움직였고, 나는 또다시 고문대 위에 칭칭 묶여져 버렸습니다.

고문, 이것은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무서워지고 더욱 낯설어지는 것입니다.

고문자들은 점점 크게 보이고 그럴 듯해 보입니다.

당당하고 의젓하게 보이기도 하구요.

물론 무조건 고문하는 것이지요.

요구사항은 없었고 묻지도않았습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몰랐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얼마가 지났는지 어떻게 되는 건지 합리적 사고나 대응 같은 것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어느만큼 학대와 능욕을 가하고 나면 고문자들은 반드시 뭔가를 제기하는 것이 있더군요.

이번에는
1) 폭력혁명주의자임을 자백하고
2)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 있음을 자백하고
3) 각 민주화운동 부문에서 움직이는 핵심적 인물을 대라.

김근태와 민청련이 제일 과격하고 제일 먼저 움직여서 오늘 같은 사태를 가져왔다.

우선 학생운동과 노동현장에서 움직이는 하수인을 대라.

당시 나는 이것이 얼마나 넌센스 같은 요구인지, 왜 이런 것을 요구하는지,

다음에는 무엇으로 연결시키려 하는지에 대해 따지고 생각해 볼 겨를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이것이 추상적인 협박이고 요구였지만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가는 느껴지더군요.

여기서는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고문대 위에서 결심을 했습니다.

'이건 시인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얼마 동안은 사실 끈덕지게 버티었습니다.

허나 안 되더군요.

'이렇게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 그리고 구체적인 것의 시인은 아니지 않은가'라는 고통에 못 이긴 굴복의 유혹이

머리를 쳐들더군요.

나는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학생운동의 배후가 이범영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사실 나로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지만 누군가를 꼬집어서 얘기하지 않으면 안되었지요.

당시 이범영씨는 이미 경찰의 수배를 받아서 피신 중이었기 때문에 거짓으로 얘기해도 별 피해가 없으리라 생각하고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이 두 번째 물고문도 대략 5시간 걸렸습니다.

끝난 것이 5일 새벽 1시경이었으니까요.

9월 4일, 두번에 걸친 물고문. 그것만으로도 본인의 인간적 주체성은 크게 동요되고 일관성 있는 인격은 와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외부에서 폭력적으로 강제되는 것에 무릎을 끓을 수 밖에 없음을 처절하게 느끼게 된 것이지요.

이 만화같은 현실에 머리를 숙여야 했지만 그러나 아직은 자신의 주체성, 그것을 다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두꺼운 모직겨울점퍼, 검정색과 붉은색의 체크무늬점퍼를 남영동 그곳을 나올 때까지 줄곧 입고 있었습니다.

발뒤꿈치와 팔꿈치의 상처는 이미 하루의 고문만으로도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후 이 상처는 더욱 깊어갔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당시 이러한 상처는 전혀 문제가 될 수도 없는 것이었지요.

사실은 별로 아프다고 느끼지 못했었으니까요.

그런 정도까지의 아픔은 수없이 많았어도 별 신경 쓸 만한 일이 못되었던 것입니다.

밤을 새우면서 무언가를 많이 대답했습니다.

전기고문과 그 보조로서의 물고문 - 세번째 고문

델시 상표의 사무용 가방을 들고 건장한 사내가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운동화를 꺼내 신고서 뭔가 삐딱하니 꼬나보더군요.

거리 어느 구석에 있을 깡패, 젼형적인 어깨타입의 풍모였습니다.

눈은 불안정하고 뻐기면서 걷는 인간 백정 같았습니다.

몸무게는 거의 90kg에 육박할 것 같고 키는 그렇게 큰 편은 아니었습니다.

'잃어버린 전설'에 나오는, 뒤뜰에서 식칼을 가는 그 누구일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그래도 빛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눈동자에 어리는 장난기같은 그림자, 그것뿐입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금방 알겠더군요.

그런 곳에는 반드시 있을 인간이지요.

말할 것도 없이 고문담당 기술자, 전담자인 것이지요.

"우리 형님은 훨씬 더 무서운데 지금 안 계셔서 다행인 줄 알아라.

그동안 장의사가 한가 했었는데 일감이 풍족하게 생겨서 살맛난다"고도 하고

"작업을 차근차근 해 나갈 터이니까 단단히 각오하라"고 협박을 했습니다.

전기고문, 그것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저녁 8시 반부터 9월 6일 새벽 1시경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내가 '전기고문'이라고 하니까 고문담당자는 이것은 전기고문이 아니라 '배터리고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뭐라해도 전기고문임이 틀림없지요.

5일 저녁 8시반경, 고문하기 전에 뭔가 자기들끼리 수군수군대더니 조용해졌습니다.

최상남은 본인에게 "잠을 전혀 못 자서 피곤할 것이다. 이 방의 불을 끌 수는 없고 대신 눈에 반창고를 붙여 줄 테니까

의자에 앉아서 잠을 자두라"고 하면서 양쪽 눈에 엑스(X)자로 모두 반창고를 붙였습니다.

 

이런 고마울 데가... 나는 콧등이 시큰해지기까지 했습니다.

정말 잠을 청해 볼 양으로 막 의자에 기대는 순간 고문자들이 떼거리로 몰려 들어오면서 소리를 버럭 질러댔습니다.

기습과 의표를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작전인 것처럼 인간 파괴의 수치심없는 작전인 것입니다.

전기고문 장치를 보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이기도 했구요.

 

완전히 발가벗겨졌습니다.

팬티도 남김없이 날아가 버리고요.

이곳에서 무슨 수치심 그런 것을 여밀 계제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팬티조차 벗겨지고 보니까 더욱 당황케 되면서 이제 모두 빼앗겨 버리고 말았구나,

그래도 아직 남은 것이 있고 소극적 저항의 표시물인 것처럼 느껴졌던 팬티마저 빼앗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칠성대 위에 또다시 꽁꽁 묶여진 다음에 고문자들은 발바닥과 발등에 붕대 같은 것을 여러 겹 감았습니다.

새끼발가락과 그 다음 발가락 사이에 전기 접촉면을 끼우고, 그것이 움직이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 같았고,

이 붕대도 전기담요처럼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다음 발에, 사타구니에, 배에, 가슴에, 목에, 그리고 주전자로 머리에 물을 들어부었습니다.

 

그 때 물의 선뜩함은 귀기가 살갗에 달라붙는 바로 그것이었지요.

고문 기술자는 뭔가 쉴 새 없이 떠들고 겁주고 협박을 했습니다.

이제 전기가 통하면 회음부가 터져 피가 흐를 것이라고 하면서 그래서 팬티를 벗겼다고 했습니다.

우선 물고문부터 시작했습니다.

다만 그 강도는 물고문만 할 때보다 못했지만 공포나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은 더욱 깊어만 갔습니다.

소스라쳐 놀라게 되고 머리를 힘껏 움직이게 되지요.

 

어느 정도 물고문이 진행되어 몸에 땀이 나게 되면 그때부터 전기고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짧고 약하게, 그러다가 점점 길고 강하게, 강력하게 전류의 세기를 높였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다시 약해지고, 가끔씩은 발등에 전기를 순간적으로 대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희미한 자국으로 남아 있지만, 그래서 발등의 살가죽이 꺼멓게 타 버리게 되었습니다.

김수현과 백남은은 지켜보고 고문기술자가 직접 전기고문을 하고 물고문의 집행을 김영두에게 지시했습니다.

전기고문, 그것은 한마디로 불고문이었습니다.

외상을 남기지 않으면서 치명적으로 내상을 입히고 극도의 고통과 공포를 수반하는 고문입니다.

물고문과 불고문의 조화라고나 할까요.

그 상승효과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물고문이 밑바닥에 닿지 않는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질식해가는 것이라면

전기고문, 즉 불고문은 단근질해서 뜨거운 불 인두로 지져서 바싹 말라 바스러뜨리고 돌돌 말려서 불에 튀기는 그런 것입니다.

전기고문, 그것은 핏줄을 뒤틀어 놓고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마침내 마디마디 끊어 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머리가 빠개질 듯한 통증이 오고 그 몰려오는 공포라니, 죽음의 그림자가 독수리처럼 날아와 파고드는 것처럼 아른거렸습니다.

온 몸이 저리고 칙칙해져서 끈적끈적한 외마디를 계속 질러대게 되더군요.

전기가 발을 통해서 머리끝까지 쑤셔댈 때마다 어두운 비명을 토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몸의 각 부분은 해체되어 나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오직 연결시키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비명뿐이었습니다.

 

몸 전체에 시퍼렇게 핏줄이 솟고, '헉헉' '꺼이꺼이' 목은 쉬어 가는데

이것은 멱이 따진 돼지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것이었습니다.

소리를 지른다고 강하게 전류를 통하고 소리가, 신음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혀를 이빨로 꽉 물었다고

혀를 빼라고 강하고도 긴 전류를 흘려보내고, 끙끙대면서 참는다고 또 그러고.....

이들의 목표는 총체적인 혼란, 착란 상태로 돌입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미친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온통 휘감고 그 희번덕거리는 눈동자가 내 눈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환상이

공포와 광란의 소용돌이로 닥쳐왔습니다.

이것은 슬픔이라든지 외로움이라든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잔인한 파괴, 그 자체였습니다.

담요는 땀에 흥건하게 젖는데 물을 쏟아 부었던 몸의 각 부분은 금방 말라버리고,

특히 머리털은 곧 말라서 물고문을 또 수시로 해야 됐습니다.

이 고문기술자가 내 가슴에 올라타고 쿵쿵 굴리는데도 전혀 무게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운동화 발바닥으로 얼굴을 슥슥 문대면서 경멸적으로 걷어차도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도 않고

심리적 거부감이 일어날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완전히 지쳐 늘어지기 시작할 때, 이날의 주제가 제기되고 추궁됐습니다.

이을호씨의 시민민주혁명, 민족민주혁명, 민중민주혁명의 인정, 그것이었습니다.

고문대 위에서 거부란 거의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요.

나는 처음에는 저항을 했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고문을 가져올 뿐이었습니다.

이제 정말로 위험해지는 것 같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는 전기고문의 전류에 흔들리더니 여지없이 무너져 갔습니다.

또한 이을호씨의 병력이 떠오르고, 본인이 계속 부인할 때 증거확보를 하기 위해

체포 범위를 비이성적으로 확대하는 이 사람들의 모습도 떠오르더군요.

 

하지만 무엇보다 이을호씨의 자백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반증될 수 있을 것이라는,

당시에는 은밀히 자신만만한 확신이 있어 결국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기본적으로는 고문에 밀려서 씌여진 것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는 것이구요.

인간으로서 저항할 수 없는 잔인한 강제에 굴복해 가는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 합리화시켜야 했던 것입니다.

아니 합리화라기보다 생명을 방어하기 위해 남은 단 하나의 길이었습니다.

 

고문대 위에 묶여 고문을 받을 때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고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고문자들의 요구 명령은 귀에 왕스피커를 들이대고 틀어대는 것처럼 아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머릿속에 아주 깊이 새겨집니다.

영원히 낫지 않는 상처를 입히면서 새겨지는 것입니다.

소름끼치는 공포와 고통을 수반하면서 각인되는 이 고문자들의 요구에는 엄청난 심리적 에너지가 충전된 채 기억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언제 어디서고 이들의 요구 지시를 거부하고자 할 때는 그 충전된 에너지의 저항과 동요에 부딪치게 되며,

고문시의 공포와 그 고통이 생생하게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무리하고 무모한 요구, 황당무계한 강제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 등 모든 수단을 강행케 되는 것입니다.

아! 그 라디오, 박살내 버릴 그 라디오를 펼쳐 내고, 그리고 무슨 노래도 있었습니다.

고문기술자가 라디오를 가져오라고 지시했으며 직접 다이얼을 맞추고 조정했습니다.

이들의 고문은 그냥 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상당히 치밀하게 고안된 것이었습니다.

아마 끊임없이 경험을 통해서 배울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고문기술을 외국에서 도입했을 것입니다.

이날 본인이 고문대에서 미워하게 된 그 라디오, 그것도 일종의 심리적 고문이었습니다.

팬티, 그래도 그것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약간 위안이 되더군요.

다 빼았기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 남은 것이 있지 않은가 하는 심정이 되더군요.

완전히 벗겨져 버렸을 유태인들에 비하면 기가 꺾인 바가 없지 않지만, 나 비겁자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칠성대 위에 걸터앉자 바로 눕혀 버리더군요.

여기서 저항은 앙탈로 전락하거나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될 뿐임을 나는 이미 눈치 챘습니다.

이때는 칠성대를 볼 수 없었지만 나중에 직접 이 두 눈으로 사진 찍었습니다.

평생 잊지 않도록 깊숙이. 짙은 윤곽선으로 새겨 두었습니다.

그 칠성대, 이렇게 생겼습니다.

세면대보다 약간 높고 남자 팔뚝 굵기의 각목 4개가(어쩌면 5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 키보다 약간 크게 길이로 펼쳐지고요,

앞부분은 경사져서 세면대에 착 밀착시킬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위에 담요가 깔려 있구요.

사람이 눕혀지면 담요료 싼 다음에 그 바깥을 줄로 꽁꽁 묶어 버리는 것입니다.

담요로 몸을 감싸는 것은 몸에 상처가 날까봐 그러는 것입니다.

상처가 남겨진다면 그것은 곤란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으니까요.

 

고문당하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님은 두말 할 나위 없습니다.

담요 바깥을 묶는 줄은 군대 허리띠 같은 것으로, 그것도 상처 자국이 남지 않도록 선택된 것이 분명합니다.

 

발목. 무릎 위. 허벅지. 배. 가슴 등 5군데를 묶습니다.

완전히 묶여서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머리는 움직일 수 있습니다.

머리를 웁직이지 못하면 곧 상처가 날 터이니까요.

고문의 증거로 남을 터 이구요.

 

하지만 머리의 반만 내지 2/3정도는 받쳐지지 않도록 해서 뒤로 젖혀지도록 고안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물고문할 때 효과적으로 고통을 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를 쓰고 움직이면 발목 아래 부분과 팔꿈치를 약간씩 비틀 수는 있었습니다. 물론 눈은 가린 채 이구요.

칠성대 위에 올려 눕혀진 나는 순식간에 완전히 결박되었습니다.

머리가 핑 하면서도 '자, 그래 견뎌보자, 견디는 것이다. 결국 언젠가는 닥쳐올 것이라고 각오했던 바가 아니냐.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이 그랬고, 저 70년대 긴급조치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당했던 그것이 오고 있는 것이다'

라고 속으로 되뇌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별 설득력이 없더군요. 목이 쉰 것만 같구요.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렇게 해. 결국 큰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고 말 것. 이건 너희들도 알고 있을 거야.

클라이막스에서 중지하게 될 거야. 틀림없이. 잎에 침이 마르도록 대화니, 화해니 말해온 것을 싹 지울 수는 없지.

오리발을 내밀어도 유분수지'하고 떠올리며,  여기에 매달리고,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썩은 동아줄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줄은 여지없이 뚝 끊어졌습니다. 협박자들은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물고문으로 들어갔습니다.

백남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따라 얼굴에, 눈이 가려져 있는 내 얼굴에 수건이,

노란 세수수건이 덮어 씌어지고 세상은 희뿌옇게, 누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머리 양쪽으로 정현규와 최상남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힘을 주어 고정시키고

그 위에 수도꼭지를 틀어 샤워기 아가리에 물이 쏟아지도록 했습니다.

육척 거구인 김영두가 그 샤워 꼭지를 잡고 사정없이 얼굴에 물을 들이댔습니다.

그러는 한편 주전자에도 물을 담아 동시에 붓고 또 쏟아부었습니다.

처음에는 칼을 갈면서 견디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은 견딜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숨을 어떻게 몰아쉬고 또 안 쉬고 또 몰아쉬고요.

 

하지만 애당초 그것은 가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숨이 탁탁 막히고 꺼져가는 생명의 마지막 안간힘일지도 모르는 그 순간이 덮쳐오는 것이었습니다.

신 냄새나는 짙은 껌껌함으로 뒤바뀌고 속은 메스꺼워지다가 완전히 뒤집히고 콧속에서는 노린내가 치솟고

물이 쏟아지는 그 속에서 불길이 솟고 콧속으로 불길이 솟고요.

온몸을 버둥거리고 혼신의 힘으로 뒤척거리니 칠성대도 기우뚱하였지요.

몸은 완전히 땀으로 젖어버리고 담요도 땀으로 물컹해졌습니다.

샤워기와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물의 감촉, 물소리 그것은 공포가 되어 온 몸에 덮쳐오고 천근만근 무게로 짓눌러 왔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견디었는지, 아니 단 1분이라도 견디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게 죽음인가. 죽음의 형제인가. 아, 나는 결국 여기서 굴복하고 마는 것인가.

이렇게 해서 죽음의 길로 내몰리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아. 그럴 수는 없어. 견디는 거야'

몇 번 다짐할 만한 순간은 있었지만 그것은 오직 수초동안만 지속될 뿐이었습니다.

'그래 무슨 길이 있을거야. 진술 거부는 포기하자. 그리고 부딪쳐 보는 거야.'

생각이 바뀌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 그런데 이 고문자들은 아주 낮게 뭐라고 소곤거리면서 음산하게 웃음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고통과 공포 속에서도 그 웃음이 들려오고, 나는 그 웃음을 정말 죽이고 싶었습니다.

나는 진술거부 포기의사를 밝히고자 했지만 이것을 표현할 수도, 전달할 수도 없었습니다.

온몸은 뒤채어도 별 표시가 나지 않고, 발가락과 발목을 비틀어도 뒤꿈치에 상처가 날 뿐이었습니다.

마침내 발견한 것이 고개를 약간 아래 위로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표현이 가능한 유일의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차디찬 거절이었습니다.

카랑카랑한 금속성의 거절뿐이었습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반응만은 아주 또렷하게 피부로 오싹하게 전달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더 갔는지, 아니 시간 따위과는 관계없이 이제 발버둥질조차 기진하여 할 수 없게 되는구나 싶어지면서

모두 비현실적으로 느꼈습니다.

오직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소리 '쏴' 하고 내리꽂히는 것만이 살아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샤워기와 주전자를 치우고, 얼굴에 덮어 씌웠던 수건을 치우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밑이 없는 천길 낭떠러지에서 계속 떨어져 내리다가 '아, 이것이 맨 밑바닥이었구나' 하는 안도의 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아니 이것은 구원이었습니다.

말을 하겠다고 진술거부하지 않겠다고 정말 서둘러서 외쳤습니다.

이에 대해 백남은은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물었으며, 본인은 "묻는 말에 뭐든지 대답하겠습니다"라고 기를 써서 대답했습니다.

"뭐, 묻는 말에 대답하겠다고? 필요없어, 아직 멀었구만.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항복이야, 다시 시작해."

대충 이런 내용의 지시를 백남은이 내렸습니다.

그 순간 바로 말을 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미 수건은 덮어 씌어지고 샤워기는 다시 맹렬하게 물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숨 막히는 답답함. 질식해 버릴 것 같은 공포, 그리고 아득하고 아득한 절망감... 그것 뿐이었습니다.

턱을 약간씩 아래 위로 움직이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하게 되고 낭떠러지로 다시 곤두박질치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은 정지하고 사라져 버리고, 허공에 날리는 재가 되어 날아가 버리고, 오직 고문자들의 조소,

샤워기의 물소리, 온몸을 칭칭 묶인 상태에서 도무지 헛일인 비두발광, 그 셋뿐이었습니다.

물리적 시간, 감각적 시간, 그것을 넘어서는 영원한 고통의 철저한 관철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렴풋이 "항복하지, 그래도 진술 거부할 거야? 안 하지?" 하며 뭔가 촉구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물론 나는 머리를 끄떡였습니다. 수건을 치우더군요. 아직은 살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속은 뒤집혀지고 수없이 올각질을 하게 되구요. 온몸은, 담요는 땀으로 물바다를 이루었습니다.

칠성대 위에서 다시 항복과 진술거부포기를 확인한 다음에 고문자들은 묶은 줄을 풀어주었습니다.

휘청거리며 의자에 앉았습니다.

멍청해져서 시키는 대로 옷을 주어 입었습니다.

그런데 참 기묘하게 느껴지는 것은 벌써 시간은 오후가 된 것이었습니다.

대락 7시 반경부터 이 물고문이 시작되었는데 12시 반이 이미 지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기계적 시간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마는 짧은 순간 같기도 하고,

그런 모든 것을 넘어섰던 고통의 영원같기도 했던 이 첫 번째 물고문은 여하튼 5시간이 걸렸던 것입니다.

 

당시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이 시간을 그래도 나는 기억에 남겨두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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