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0일 밤 7시경부터 10시경까지 고문을 당했는데, 그것은 처음 당하는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전기봉 고문인데 양쪽 발등에 무슨 장치를 하고 진동을 일으켜 고문을 가하는 것입니다.
이 고문을 직접 지휘한 것은 김영두이고, 그 뒤에서 김수현이 조정했습니다.
박병선, 최상남, 정현규, 경상북도 출신의 또 한 사람의 경찰관이 고문을 했습니다.
9월 8일을 고비로 백남은은 고문 지휘에서 부차적인 역할을 맡아 김수현이 더욱 분명하게 주동적 임무를 맡아갔습니다.
9월 8일 밤 고문에서, 나중에 가서는 김수현이 직접 고문장치를 들고 전기고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9월 10일, 이날의 고문은 여러가지 계산 하에 뒤에서 지시하고도 자신은 잘 몰랐던 것으로
예상치 못했던 바라고 얘기하며 마치 위로자인 것처럼 행세하기도 했습니다.
전기봉고문은 이렇습니다.
대단히 빠른 진동때문에 발등에는 심한 통증이 옵니다.
상처가 생기고 깊이 파이는 것 같은 느낌조차 옵니다.
피가 흐르는 기분도 듭니다.
그래도 이 전기봉고문은 받을 만하다고 할까, 상쾌하다고나 할까, 아니 양념 고문이었다고 할까요.
원체 심한 고문을 당해서 그런지 이 날 같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조차 했습니다.
더구나 물고문도 이날은 하지 않았으니까요.
또 발뒤꿈치의 상처가 깊어지지 않도록 반창고를 붙여 주고 발 밑에 수건을 접어 넣어 주기도 했습니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한편 고마움조차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벼락 맞아 속이 다 타버린 고목처럼 깊이깊이 내상을 입히는 그런 전기고문이 아니고,
시커멓게 몰려오는 저 무서운 공포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발등 정도 좀 찢어지고 으깨진들 그것은 별 대수로운 것은 아니니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뭐라고 할까요, 인간적인 그런 고문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고문을 시작하기 전에 심리적인 압박을 받기는 했지만 '괜찮게 고문을 받았다'고 말하고 싶기조차 합니다.
고문 도구, 즉 눈가리개, 물주전자 등을 책상에 나열하면서 겁을 주더군요.
마음에 부담을 주려고 그렇게 했겠지요.
이것을 박병선이 했는데 의도를 알겠더군요.
쫄아 들게 하려는 것이지만 이것은 실제로 고문하지 않을 조짐일 수도 있고,
하더라도 심하게 가하지 않을 것임을 나타내는 징조임이 읽혀졌습니다.
대충 그런 성격의 고문이기도 했구요.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은 결코 하닙니다.
이 고문도 역시 괴로운 것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10일 전에는 잘 몰랐었고 또 당초 식사할 수 있는 마음도 아니었기 때문에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고문자들은 9일부터 식사를 제대로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 전에는 밥을 언제 주었는지, 준 적이 있었는지조차 잘 기억하지 못하겠구요, 10일, 저녁 식사를 주지 않았습니다.
9일 아침부터 쭉 주던 것을 안 주니 이상할 수 밖에요.
고문을 가할 경우에는 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이날 알게 되었습니다.
가혹한 고문을 가하기 때문에 - 속이 뒤집히게 하는 것은 전기고문이 아니라 물고문인데 -
그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문시 거의 틀림없이 속이 뒤집혀 토할 것이고, 토하는 경우 고문자들을 난처하게 만들 것이며
고문의 진행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에 밥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혹시 토할 때 기도가 막힌다든지, 그로 인한 불상사를 생각해서 안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밥을 안주면 고문이 임박한 것임은 아주 분명해졌습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반복된 고문의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고문자들은 9월 13일 이후 심리적인 압박을 가하는데, 밥을 안 주는 것과 고문을 가하는 것을 연관시켜 매우 잘 사용했습니다.
즉 고문자들이 뭔가 불만이 있으면 밥을 안 주고, 그러면 본인은 고문이 박두했음을,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고 파랗게 질리곤 했습니다.
이때 고문자들은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나는 덜덜 떨면서 시키는 대로 하구요.
고문, 그것은 마음내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과학적이고 많은 경험을 통해서 정리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문의 시점, 방법 등에 대해서는 정말 사장급 이상의 회의에서
여러 가지로 검토하고 결정하는 것이 틀림없을 분위기로 전달되었습니다.
이날의 주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지금까지 강제해 온 것의 암기 확인, 복습, 다음에 본인이 60년대 중, 후반 대학시절 학생운동에 어느 정도로 관여해 왔는지에 대한 확인,
그리고 군대 제대 후부터 복학하였을 때의 동료 친구관계를 집중해서 캐물었고, 끝으로 73년도인가 74년도에 크리스찬 아카데미
-강원용목사가 원장인-에서 시행한 중간 집단교육-노동조합 간부들을 중심으로 하고 몇 명의 봉급생활자들이 교육생으로 참여-에
참여했던 것과 그 교육과정에 대해 물었습니다.
복습암기에서는 욕을 먹고 나중에는 칭찬도 받았습니다.
학생운동에 대한 것은 워낙 먼 옛날인 20여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까다롭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70년 9월 복학해서 72년 2월에 졸업할 때까지 교우관계에 대해서 처음에는 지나가는 것처럼 묻더니
나중에는 매우 심각하게 따지고 압박을 가했습니다.
이것은 13일의 고문으로 연장되기도 한 주제였습니다.
본인이 복학했을 때 상과대학 대학원에 제일교포 유학생으로 온 사람이 있었다면서 이 사람과 연결시키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본인의 출신교인 경기고등학교 동기동창으로 한 해 늦게 상대 경영학과에 입학했으며
지금은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가 되어 있는 누구인지를 통해서 이 제일교포 유학생 간첩과 연관 지으려는 공작이었습니다.
빛바랜 사진을 고문대 위에 묶어져 있는 본인의 얼굴에 들이대면서 인정하라고 아우성 쳤습니다.
물론 이 사진이 누구인지는 모르고 서울대 교수로 있다는 그 동창이 누구인지, 또 진짜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인지조차 의심이 되기도 합니다.
만일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로 있다는 본인의 고교동기가 실제로 있고, 그 친구와 교분이 있거나 깊어서 고문자들이 평범하게 물을 때
그 이름을 얘기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오싹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13일의 고문에서도 이것은 꽤 오랫동안 집요하게 추궁받았고, 이 10일은 고문자들이 깊이 꾀를 내어 살살 접근해 왔던 것입니다.
남영동고문자들은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중간 집단 교육의 한 부분에 대해서는 매우 분개하였고,
이는 본인을 급진적인 분자로 단정하는 하나의 자극이 되었습니다.
73~74년 당시 크리스찬 아카데미는 노동조합총연맹에 교육생을 보내줄 것을 공식으로 요청하고,
이에 노총은 각 산별에 의뢰하여 노조 간부들을 중간 집단 교육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약간명의 중간 계층인 봉급생활자등도 참여했으며, 본인은 그런 자격으로 참여했습니다.
이 교육의 강사는 강원용 목사, 이문영 교수, 박재봉 교수 등 여러 분이 있었습니다.
강의도 있고 토론, 사례발표, 노래 연극 등 여러가지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앞으로 연도별 자기 일생 계획과 죽음을 맞이하게 될 시점,
그리고 무덤에 묻혔을 때 희망하는 묘비명에 대해서 써 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의 진행과 안내는 박재봉 교수가 맡았던 것으로 기억되고,
일단 작성이 완료된 후 노조간부들은 그것을 발표했던 것이 아니었는가 싶습니다.
당시 교육학생들은 일생계획수립에 대해 막연했으며, 더욱이 죽음과 죽을 때를 희망하는 시기와 묘비명에 대해서는
일정한 당혹과 동요, 부담감조차 없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에 대해서 박재봉 교수는 '여러분을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고 다른 나라 교육프로그램에서 따와 시도해 보는 것'
이라며 나름대로 의미있음을 설득했습니다.
본인도 이에 따라 시기(연도)별 일생계획표와 세상을 떠날 연도, 묘비명 등을 포함한 여러가지를 작성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대부분의 것은 보지 않고, 또 전체의 흐름과 당시 교육에 참여했던 것이 노동조합 간부 중심이었던 점 등은 고려하지 않고,
자기들 비위에 거슬리는 부분만 문제 삼아 화를 냈습니다.
물론 이 고문자들, 그리고 그들에게 지시하고 보고를 받고 자기들의 정치적 이익, 반사적 이익을 위해서는
무슨 짓도 감행하는 정치군부에게는 이것도 본인을 불온한 불순분자로 몰아버리는 하나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희망하는 결혼 연도 등을 - 당시 본인은 아직 미혼이기에 당연히 결혼에 관하여 관심이 있었지요 - 빼 버리고 오직 세가지를 문제 삼았습니다.
첫째는 몇 년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노동자, 농민의 정당 설립, 두 번째는 1988년에 남북민족통일,
세 번째는 2016년인가에 본인이 세상을 떠나고 희망하는 묘비명으로 '여기에 사람 사랑하던 사람이 잠들다' 라는 것을 작성한 것입니다.
첫 번째는 기층 민중의 정당이고, 계급정당의 구상으로 당연히 불순한 것이 아닌가라고 단정했습니다.
그렇게 보기로 결심한 사람들 눈에는 아주 훌륭한 몇 개의 문자로 된 증거겠지요.
당시 교육은 대부분 노동조합운동과 그를 통한 사회발전 문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조합 간부들이 거의 전부이고, 이들이 교육 분위기를 잡아 나갔습니다.
조합원과 노동자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개선 뿐만 아니라,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에도 노동자들에게도 반드시 정치활동이 필요하다는 토의도 있었고, 조합 간부등의 토의, 종합결론도 있었습니다.
또 여러 교수님들 강의에서 노동조합의 정치참여는, 정치활동은 필요하고 바람직한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되었습니다.
미국의 경우처럼 대통령 선거시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천명하는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는 방법,
영국의 경우처럼 집권하는 방법 등 여러가지 소개가 있었습니다.
당시 유신 치하에서 유정회에 직능대표로 노동조합 간부를 보내는 방법에 대해서는 모두가 비판적이었으며,
노동조합의 정치참여 금지규정, 법률에 대해서는 특히 격한 이의 제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특히 조합 간부들이 노동자들의 정당 설립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구동성으로 같은 생각을 표시했습니다.
특히 영국의 경우가 보다 바람직한 것으로 되었습니다.
본인은 대학 출신, 그 중에서도 좋은 학벌 등으로 그 교육에서는 뭔가 미안한, 부채의식도 없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동일화가 되지 못하는 것, 즉 소외감도 있었구요.
그런 분위기에서 노동자, 농민의 정당 설립이라는 아이디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조합간부 대다수 사람들의 일생계획표에도 등장했고 발표낭독도 되었다고 기억합니다.
이것을 앞뒤 다 자르고 이 몇 개의 문자를 들어 늘 그렇듯이 문제를 삼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남북통일이 왜 하필 88년도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참!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내가 신통력이 있어 시점을 맞춘 것처럼 분개하고 괘씸해하며 따지는 것이었습니다.
73, 74년 당시 88년이 정권 임기와 관련 있을 것이라든지
하계 올림픽 연도가 될 것임을 이미 예측하고 고약한 장애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이것도 불순한 의도를 엿보게 할 수 있는 자의 음모라는 말인지 말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88년도는 우리 모두에게 매우 익숙한 용어이며 민족통일은 모든 민족의 염원으로 어울려 짝짓기 참 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1988년의 민족통일, 그것을 70년대 초에 기대하고 희망한 것이 문제가 됐습니다.
고문자들도 추궁했지만 본인의 면전에서는 논리적으로는 심하게 굴지는 않았습니다.
너무나 뻔한 일이어서 그랬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세상을 떠나는 시기와 묘비명 이름마저 유서에 써놓고 민주화 투쟁을 하는 악질 분자로 보는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희망한 것은 70살이 되어서 삶을 마치는 것이었다고 기억됩니다.
이는 장수고 어느 면에서는 천수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가장 중요한 양식인 인간에 대한 사랑, 그것을 실천하다가 죽기를 바라는 것이 무슨 비장한 결의인 것처럼,
음산하고도 어두운 음모인 것처럼 매도 당했습니다.
고문자들은 이를 무슨 대단한 일처럼 상부에 보고했습니다.
소위 남영동은 본인에 대한 불순한 배경의 중요한 기둥 중 하나로 의견서를 택한 것입니다.
최민화씨의 법정 증언에 의하면 본인은 이미 유서까지 써놓고 운동을 하는 것으로 고문자들은 말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포복졸도할 희극이 그렇게 무거운 부담으로 왔습니다.
이것이 범죄적 고문을 감행한 남영동 그곳에서 본인이 처했던 멍에였습니다.
이미 기정사실이 된 불순한 올가미에 온갖 것을 들어다 꿰어 맞추는, 남영동 제조공장이었지요.
6월 10일 고문은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았고, 끝난 뒤에는 김수현으로부터 위로도 받았습니다.
고통이 심하고 고생이 되는 줄 잘 안다면서 고문대에서 내려오도록 부하 고문자들을 채근했습니다.
눈물이 핑 돌고 콧등이 시큰해졌습니다.
조금만 더 역성을 들어 주었으면 그 김수현 가슴에 기대어 엉엉 울고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버렸을 것입니다.
나치 수용소에 감금되어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종전과 더불어 풀려나온 어느 유태인 정신과 의사의 피맺힌 기록이 생각납니다.
원수, 악마였던 S.S고문 친위대가 나중에는 병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경매의 존엄한 자로 군림하게 되는 절망적인 인간의 고백을 읽고 몸서리를 쳤었습니다.
인격의 와해, 인간의 허약함을 송두리째 폭로하는 것으로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분노하고 저주해야할 그 고문자들을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첫 날 혹은 둘째 날부터는 분노할 수 있는 능력이 박탈되었던 것입니다.
삶과 죽음의 열쇠를 갖고 있는 그 고문자들에게 모든 힘을 다하여 아양을 떨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 고문자들의 현장 지휘자인 김수현에게 10일날 위로를 받은 것, 그것은 당시 본인에게는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따뜻한 라면을 대접 받고, 밤 12시가 되어 잠도 재워 주고, 이제 평화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분명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