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 / 8. 1974년 4월 구속이 맺어 준 인연


당시의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민주화를 이루어 내기 위한 열망은 식을 줄 모르고 오히려 열기를 더해 갔다.

2월에는 구속된 분들의 입장을 지지하고
석방을 요구하는 호소문을 전국 교회에 발송한 혐의로
권호경 김동완 목사와 이대 의과대학 본과에 재학 중이던 김매자
이대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이미경(현 국회의원) 차옥숭(교수)
그리고 김용상(목사) 박주환(목사) 박상희(목사) 등 8 명이 구속되고
같은 절차로 각각 징역 15년에서 3년까지 선고받았다.


이어 2월 25일 서울지검 공안부는 문인 간첩단 사건을 발표하고

이호철, 임헌영, 김우종, 장을병, 장병희 등을 간첩 혐의로 구속했다.



구속 당시에는 이호철과 임헌영에게 형법상 간첩죄가 적용되었으나,
1974년 2월 25일 구속·기소 당시에는 이 부분이 제외되었다.


같은 해 6월 28일에 있었던 1심공판에서 이호철과 임헌영에게 실형이 선고되었고,
10월 31일에 있었던 항소심 공판에서 이들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새학년 새학기가 시작되는 3월에 들어서자 대학은
대통령 긴급조치 1 호의 발동에도 아랑곳없어 했다.

한신대와 경북대 서강대 등에서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는 학생 사건이 터져 나왔다.

정보 기관에서는 4월 3일을 기해
서울 시내에서 일제히 가두 시위를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3월 말 경부터 요시찰 학생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해 연행하기 시작했다.


1974년 4월 3일 박 정권은 학생 시위 주동자와 그 배후 세력들이
대한민국을 폭력 혁명으로 전복시키고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일제히 궐기하려 했다면서
대통령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다.



[대통령긴급조치 4호]


1. 전국민주청소년학생총연맹(민청한련)과 이에 관련되는 단체를 조직 하거나
또는 이에 가입하거나, 그 구성원과 회합, 또는 통신 기타 방법으로 연락하거나,
그 구성원의 잠복, 회합·연락 그밖의 활동을 위하여 장소·물건·금품 기타의 편의를 제공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2. 단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에 관한 문서, 도화·음반 기타 표현물을
출판·제작·소지·배포·전시 또는 판매 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3. 제1항, 제2항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또는 선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4. 제1항, 제2항에서 금한 행위를 한 자는 1974년 4월 8일까지 그 행위내용 전부를

수사 정보기관에 출석하여 숨김없이 고지하여야 한다.


5. 학생의 정당한 이유없는 출석 수업 또는 시험의 거부...

학교 내외의 집회, 시위, 성토 농성 기타 일체의 개별적 집단적 행위를 금한다.


6. 이 조치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또는 선전하거나
방송·보도·출판 기타 방법으로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7. 문교부장관은 대통령긴급조치에 위반한 학생에 대한 퇴학 또는 정학의 처분이나
학생의 조직, 결사 기타 학생단체의 해산 또는 이 조치 위반자가 소속된 학교의 폐교처분을 할 수 있다.
학교의 폐교에 따르는 제반 조치는 따로 문교부장관이 정한다.


8. 제1항 내지 제6항에 위반한 자, 제7항에 의한 문교부장관의 처분에 위반한 자 및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이하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유기징역에 처하는 경우에는 15년이하의 자격 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제1항 내지 제3항, 제5항, 제6항 위반의 경우에는 미수에 그치거나 예비, 음모한 자도 처벌한다.


9. 이 조치에 위반한 자는 법관의 영장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이 조치에 따르면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머리 속에 두고 있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그런 움직임 그런 모임 그런 사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계 당국에 신고하지 않은 사람까지
모두 5 년 이상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

온 국민을 상대로 선전포고하는 것에 다름아닐 뿐더러
참으로 천인공노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조치로 말미암아 수 천 명이
쥐도새도 알게모르게 연행되어 고문당했다.

조직적인 기반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던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에서는 26 명이 구속되어 중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간디사상연구모임 회원 역시
대부분이 구속되거나 전국에 지명 수배되었다.

특히 함께 공부했던 서울대 김은희 김인성 정진성 등 여학생들도
봉원산거 모임집에서 등사기를 몰래 가져다가

민청학련 선언문을 필경하고 등사해서 운반 배포한 혐의로 구속되고

봉원산거 또한 샅샅히 수색당하는 난리가 벌어졌다.

윤보선 전 대통령과 장준하 선생 등 재야 정치 지도자와
박형규 목사와 가톨릭의 지학순 주교 등 성직자,
연세대 김찬국, 김동길 교수와 김지하 시인 등을 포함해서
종교인과 지식인, 청년 학생들이
그야말로 마구잡이로 연행되어 구속 기소되었다.

구속된 이들은 모두 남산 중앙정보부 6국과 서빙고 보안사 대공분실에서
무려 2 ~ 3 개월 동안 상상할 수 없는 고문과 조작 수사로 치를 떨어야 했다.

그리고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 이라는 죄목으로 한두름에 엮어 졌다.


▲ 남산 예장자락에 있는 옛 중앙정보부. 앞에 보이는 낮은 건물이 중앙정보부 6국(학원수사담당) 건물이다.



나는 3 월 28 일 경기도 오산에서
서대문 경찰서 정보과 형사대에 검거되어
곧바로 중앙정보부 수사국으로 이첩되었다.

그당시 이화여대에서 학생 서클을 이끌고 있던
박혜숙이 나보다 먼저 검거되었다.

중앙정보부 6국으로 끌려간 박혜숙은 모진 협박과 공포 분위기에 빠져
누구로부터 지시를 받았느냐는 추궁에 견디다 못한 나머지
"최민화로부터였다"고 내 이름을 진술했단다.

나는 연세대. 이화여대. 서강대. 숙명여대. 홍익대 등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서울지구와 인천지역 대학의 기독학생 지도부를

총괄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단 박혜숙이 아니라도

누군가가 내 이름을 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가 나보다 먼저 검거되고 나로부터 지시 받았다는 진술을 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나는 지시한 사실이 절대로 없노라고 계속 부인했다.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협박과 고문을 당하던 나는

계속 마음 속으로 다짐하고 기도하기를
스승이나 여학생은 절대로 끌어들이지 않기로 작정했다.

나는 수사관에게 내가 군대까지 갔다 온 마당에
이처럼 엄혹하고 신변이 위험천만한 상황임을 모르는 바도 아닌데
어떻게 한창 발랄하고 나이 어린 여학생을 끌여 들여
사지로 몰아 넣는 짓꺼리를 할 수 있겠느냐면서
다만 여학생들은 우리가 구속되면
차후에 구속 인사들에 대한 석방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이번 사건에서는 빠지기로 한만큼
이번 일을 의논하거나 도모한 사실이 없다고 극구 부인했다.

구속이 맺어 준 인연인가?...
비단 박혜숙이 아니었더라도 어쨋든 나는 이 땅에 사나이로 태어 나서
내가 고등학교 3 학년 때 쯤 중학교 2 학년밖에 안 되었을 천진한 여학생을

내 입으로 실토해서 물고 들어 갈 수는 결코 없는 일이라고 다짐했다.

그런 일로 말미암아 내가 핍박을 당하고 온갖 수모를 당해도
그것은 오히려 내 자신이 비굴하지 않고 한 여학생을 위해서나마 내가 떳떳하게
나의 명예를 지켜 내는 일일 꺼라는 의협심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1 부 / 9. 남산 지하실



중앙정보부에서 당시 가장 악명을 떨치던 6 국장 이용택이

순시 중 내 취조실에 들어와 철제 책상을 내리치면서

이 놈이 사실대로 자백할 때까지 혼좀 내 주라면서 고문을 지시하고 나갔다.


나는 곧바로 수사관 3명에 이끌려 문 밖으로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 건물 쪽문을 열더니 건물 뒷편 지하 계단으로 내려갔다.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습기가 가득 차 있고 천장에는 형광등 불빛이 희미하게 비추고 있다.

하얀색으로 칠해진시멘트벽은 군데군데 누렇게 변색되어 우중충한 분위기다.


▲ 서울 중구 예장동 4-1번지 옛 중앙정보부 6국(학원수사 담당)의 지하 취조실


넓은 공간에 가구도 없고 캐비넷도 없이 그저 썰렁하다.

다만 철제 책상이 가운데 하나 덩그러니 있고 양쪽으로 의자가 놓여 있을 뿐이다.

안쪽으로 경찰서 유치장같은 철망 안에 역시 철제 책상과 앞뒤로 의자가 놓여 있다.


의자에 앉자 앞에 앉은 수사관이 조용히 묻는다.


"너 여기가 어딘 줄 알아?"

"... ..."


저들은 철제 책상을 꽈~앙 내리치더니

"야 임마~!! 너 여기가 어딘 줄 알아?" 하고 소리를 친다.

"... ... 지하실 같은데요~"


저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허~어 하면서 서로 쓴웃음을 짓는다.


"여기까지 내려와서 조사받는 놈 치고 싸질러 놓고 다닌 죄 불지 않는 놈 없엄마~!!"

"조사하는 분들 힘들게 하지 말고... 서로 힘쓰게 하지 말고... 알았찌?"

"네~!!"


"우선 힘 안들이는 걸로 간단하게 주사나 한방 맞고 시작하자~"

하고는 앞에 앉은 수사관이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그러자 다른 수사관이 앞에 앉는다.

"주사를 맞는다고 별다른 부작용이 있는건 아닌데... 남성 역할에 쪼옴 지장이..."

하면서 걱정어린듯 표정을 짓는다.


영화에서나 볼듯한 으스스하고 살기도는 분위기에

난생처음으로 끌려와 고문을 당하는게 이런거로구나 생각하니

온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다.


"너 정상복(목사, 당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간사)이 알지?"

"네~!! 압니다 !!!"

나도 모르게 기합이 잔뜩 들어있다.


"정상복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얌마~!! 정상복이 어디에 있는지 네가 알고 있는 줄 우리가 뻔히 알고 있엄마~!!"

"솔직히 털어 놤마~!!"


"알고 있으면 솔직히 이실직고하겠는데... 정말 모릅니다." 


"야~ 임마! 정상복 지금 평양에 있엄마!!"

"평양에서 서울로 왔다갔다 하다가 지금 김일성 품에 있엄마~!!"

"너도 정상복하고 평양에 갔다 왔자넘마~!!


그제서야 나는 정신이 번뜩했다.

수사관은 안 되겠다 싶었던지 박혜숙과 대질 신문을 한다고 했다.

박혜숙은 이미 다 불었는데 아무 것도 아닌 것 가지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아니라고만 하니 자기만 윗사람에게 혼이 난다는 거였다.
박혜숙을 당장 데리고 오겠다고 했다.

그쯤 되어서야 나는
'아! 정말로 박혜숙이 먼저 잡혀 들어와서 진술을 했나 보구나'
하고 깨닫고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그러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도
평양 가서 김일성 만나는 걸 봤다고 진술한 것도 아니고
여기까지 온 마당에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으니
사실이던 아니던 여부를 떠나서 내가 지시했다고 진술하겠습니다..."

나는 다섯 살이나 어린 후배인 박혜숙과 대면하게 되면
혜숙은 여학생의 몸으로 이런 공포 분위기를 감당하기도 힘들텐데
거기에다가 혹시라도 내 앞에서 배신자가 된 기분으로
더욱 비참한 분위기에 빠져 들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오히려 혜숙이 안쓰러웠다.

이 사실에 대해 비밀을 유지하면서 절대로 없었던 일로 하자고 서로 다짐을 했지만
기왕에 상대방이 진술을 한 것이고 어차피 사실인바에야 대질 신문까지 해 가며
그녀 마음에 상처를 안겨 주기가 싫었다.


남산 지하실과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던건지...

연행되어 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수사할 장소가 모자랐던지

그 이튿날부터 나는 하루 24시간을 매일 지하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1975년 4월 3일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되던 날 저녁

나는 연행된지 6일만에 전격 구속되어 서대문구치소로 송치되었다.


연행되는 학생들이 차고 넘쳐서인지

다음날부터 나는 서빙고 보안사 대공분실로 거의 매일 출정 조사를 받았다.


나를 담당한 수사관은 알고 보니

함께 구속된 박형규 목사님의 사촌 동생이었다.

덕분이었는지 나는 비교적 여유있는 분위기에서

한달 여 동안 조사를 받을 수 있었다.


한국기독학생회 총연맹 소속으로 구속된 학생들과

연세대학교 소속으로 구속된 학생들은 대부분

보안사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훗날 박혜숙과 결혼하여 살면서도

나는 한동안 그 일을 이처럼 자세하게 말하거나 고백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나에 대한 부담이 있을텐데...


기껏해야 출소한 이후 만났을 때

긴급조치 4호 발동 이전에 연행되고 구속되어 내 죄명은 긴급조치 1호 뿐이었는데  
내가 혜숙에게 지시했다는 사실을 자백하지 않고 자수기간인 4월 8일까지 숨긴 죄로
긴급조치 4호와 국가내란예비음모 죄까지 뒤집어쓰게 됐다고
우스갯소리 삼아 언급하고 넘어간 정도다.

하지만 그녀는 이 일로 나에게 미안하다거나 죄송하다는 생각보다는
인간적인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당시 박혜숙은 이화여대 학생으로는 유일하게 구속되었고
김옥길 총장의 헌신적인 노력과 지원으로 4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1 부 / 10. 징역 5년 이상 사형 언도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검거된 대학생의 수는
1024명이라는 사상 초유의 인원이었다.


유신 독재권력은 연행된 대학생들을 고문하고 조작 수사하여

간첩과 빨갱이로 둔갑시켰다.


연행된 이들 중 무려 253명을 긴급조치 4호를 위반한 죄목으로

구속하고 군법회의에 회부하였다.



구속된 이들은 재판을 받을 때까지 가족들에게
접견은커녕 어디에 가 있는지 알려 주지도 않았다.

3월에 잡혀간 내가 7월 말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오산에 계신 부모님으로서는
내가 도대체 어디에 가 있는 건지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궁금하실게 당연했다.

구속된 학생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
서울구치소에서는 수용 능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4개월 여 동안
서울 시내 각 경찰서 유치장에 분산 수감되기도 했다.

서울구치소에서는 두 방에 1명 씩을 분산해서 수용했는데
나는 지금도 서대문 공원에 유물로 보존되어 있는
12사동 상층 절도범 방에 수감되었다.

한 방에 있는 절도범들은 모두
하루에 한 차례씩 가족이나 친지들을 접견할 수 있는데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인 나만 접견이 불허되었다.

나는 가족이 매일 접견하러 오는 한 절도범과 상의한 끝에
그의 아내를 내 누이가 간호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오산기독병원으로 찾아 가게 해서
내가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는 기별을 전해 주고
읽을 책과 영치금을 우편으로 보내 주도록 부탁하기로 했다.

그 후 나는 누이에게 내 소식이 전해 지고
또 누이로부터 기별이 오기를
이제나 저제나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소식이 닿으면 바로 연락이 오련만
아무리 기다려도 도무지 기별이 없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떤 여인네가 누이를 찾아가서
내가 보냈다고 하면서 소식을 전하고 돈을 받아 갔는데
그 돈을 중간에서 가로채 버린 것이다.

군법회의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학생들을 공산주의자로 몰기 위해
각종 고문과 조작 수사가 자행되었다는 사실이
부분적으로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다.



서울상대에 재학 중이던 김병곤은 사형이 구형되자

최후진술에서 재판부를 향해 일갈했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저에게까지
이렇게 사형이라는 영광스러운 구형을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유신 치하에서 생명을 잃고 삶의 길을 빼앗긴 이 민생들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어 걱정하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 목숨을 기꺼이 바칠 기회를 주시니,
고마운 마음 이를 데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학생들을 변론하던 강신옥 변호사는 법 절차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강행하는 군법회의 재판을 비판하면서

박 정권을 나치 정권에 비유하고,
피고인들의 투쟁을 정당한 국민 저항운동이라고 변호하던 끝에
"지금 나의 심정은 피고인석에 있는 저들과 함께 앉아 있고 싶다"라고 했다.


이것이 대통령 긴급조치 4 호를
비방하고 위반했다 해서 법정 구속이 되기도 했다.


강신옥 변호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호사로서 법정에서 변론하던 발언을 문제삼아

바로 구속된 전무후무한 선례를 남기게 되었다.


▲ 구속 수감 후 1975년 2월 17일 석방되는 강신옥 변호사


나는 최후 변론대신 숨이 막힐 듯 얼어붙은 법대를 향해

"무릎을 꿇고서 사느니 보다는 서서 죽기를 원한단다"

노래를 힘차게 불러제켰다.


참으로 박 정권의 탄압은 무지막지했다.
7월 13일 1 심 판결을 받은 53명에게
사형 14명, 무기징역 15명, 징역 20년 18명,
징역 15년 6명이라는 어마어마한 형량이 선고되었다.


급조된 군법회의 법정에서
구속된 이들 가운데 204 명이 징역 5년 이상 사형을 선고받았다.


나는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 받았다.

여기에는 민청학련 조직에 자금을 지원했다는

윤보선 전대통령과 박형규 목사님도 포함되어 있다.


한편 김지하를 통해서 자금을 지원한 지학순 주교가
1974년 7월 6일 귀국길에 공항에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구속되고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15년 형을 언도받았다.


이 사건으로 가톨릭은 반독재 저항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 1974년 지학순 주교의 재판소식을 알리고 있는 <가톨릭시보>와 구속 중이던 김지하 시인.


▲  1974년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이에 전국의 가톨릭 사제와 신도들이 원주 원동성당에 모여 정부규탄과 지 주교 석방을 촉구하는 가두행진을 진행했다.
"주여, 이땅에 정의를!", "부정부패 뿌리뽑아 사회정의 이룩하자" 구호가 적힌 현수막이 보인다.


재판 결과는 국내외적으로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가을 학기에 들어서자마자
반정부 학생 시위가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한편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를
비교적 상세하게 보도해서 발단이 된
동아일보 광고 탄압 사건과 함께
전국민적인 반정부 저항 운동으로 번져나가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유신 체제 권력의 무지막지한 횡포와
탄압의 잔악성이 전세계로 번져
국제 사회에서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어떤 이유로도 침해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이
국가 권력에 의해 비인도적이거나 비열한 처우 또는
잔인한 처벌로 침해당할 때
인류 세계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지켜내야 했다.

반인권적 국가 권력에 대한
국제적 경제 제재 조치가 검토되고
진상 조사와 항의 방문 등이 잇따랐다.
급기야는 전세계적인 정치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다.

이 와중에 8 월 15 일에는
육영수 여사가 저격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전대미문의 법으로 권력을 휘둘러서
민주화 운동을 막으려던 박 정권은
국내외의 비난과 저항에 부닥치게 되자
채 1년도 견디지 못하고 물러서야 했다.

사면초가에 몰린 박 정권은 2심 형량을 낮췄고
민청학련 사건이 일어난 지 10개월 여 만인 1975년 2월 15일
구속자 대부분인 148명을 석방시켰다.

그러나 학생 신분이 아닌 민청학련 관계자 4명과
배후 세력으로 몰린 여정남 도예종 등
인혁당 관계자 21명은 제외되었다.

인혁당 관계자 가운데 사형을 언도받은 8명에게는
1975년 4월 9일 새벽 전격적으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박 정권이 8명에게 교수형을 집행하던 1975년 4월 9일
우리나라를 제외한 전세계 모든 언론들은
그야말로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이 사실을 대서특필했고
국제 사회는 이 날을 역사상 최악의
"사법 살인의 날"로 선포했다.

 

 

제 1 부 / 11. 석방 그리고 계속되는 수난


연세대에서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학생 17 명과 김찬국 김동길 교수 두 분이 구속되었다가 모두 석방되었다.

 

연세대 석방학생 : 고영하 황규천 이상철 문병수 김석경 김 향 서준규

김영준 김학민 최민화 서창석 송무호 이재웅 송재덕 홍성엽 이상우 조형식

 

 

▲ 안양교도소에서 석방되는 김동길 교수를 누이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이 맞이하고 있다.

 

 

▲ 김찬국 교수


학교 당국과 총학생회 등 여러 모임에서는 학교의 명예와 자부심을 한껏 드높이듯
우리들의 석방을 환영하는 행사를 잇따라 갖고 위로와 격려의 뜻을 모아주었다.

종교 사회 단체들에서도 석방 인사 환영대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했다.
그야말로 온 장안이 술렁거릴 정도였다.

반면에 유신 정보 통치 권력은
심기가 극도로 불편해지면서 뜻밖의 분위기에 당황해 했다.

 

특히 소위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극악한 고문과 허위 자백 강요에 따른 

조작 수사 정황이 폭로되자 석방된 이들을 향해 반성하고 있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잠자코 자중하지 않으면 석방된 학생들을 학교로 돌려보낼 수 없다고 했다.

이 때 연세대 박대선 총장은 유신 권력의 기선을 피해 기정 사실로 굳히려는 듯
서둘러서 우리들의 복학을 허락했다.

 

 

▲ 연세대학교 박대선 총장


다른 대학에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살기등등한 유신 권력이 가만 있을 리 없었다.

문교부가 나서서 계고장을 보내고 연세대에서는 연일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정국은 더욱 술렁거렸다.

하지만 결국은 연세대 100년 역사상 처음으로 총장과 보직 교수들이 강제 사퇴하고
교수 직분까지 박탈당하는 참담한 굴욕으로 끝나버렸다.
우리는 온전히 복학으로 처리된 상태에서......

연세대 교정은 온통 울분에 차서 비통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교수님들도 모두 그랬고 재학생과 석방된 우리도 그랬다.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대학원장으로 계시던 성내운 교수님은 우리를 보고 눈물을 글썽이시며

"나도 자네들과 함께 감옥도 가고
같이 쫓겨났어야 하는 건데..."

라며 계속 학교에 나와 공부하라 당부하셨다.

 

 

▲ 성내운 교수

 

연세대학교 학생처장이었을 적에 성내운 교수는

학생운동에 앞장선 학생을 제적시키라는 당국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여러 정보기관에서 협박전화를 받았지만

끝내 학생처장으로서 학생을 제적시키는데 반대했다.

 

우리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자 동료 교수와 함께

구속학생들의 석방을 기원하는 '교수기도회'를 이끌었다.


양심적인 교육학자로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교수님은 1976년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해직교수협의회 회장을 맡은 성내운 교수님은 해직기자와 석방학생, 재야인사들과 어울렸다.


1977년 내가 씨알의 소리에 근무할 때 실은 늦봄 문익환 목사의 시 '꿈을 비는 마음'을 암송하고
모임이 있을 적마다 낭송하면서 시낭송가라는 전문영역을 개척했다.

 

급기야 1978년 6월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을 발표하고 6개월 여 수배생활을 하다가

1979년 1월 체포 구속되어 광주교도소에 수감 중 8월 15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60여 편에 이르는 성내운 교수님의 시낭송 강연은 단연 돋보였다.
미국에서도 60여 차례 시낭송 초청 강연을 했을 정도다.


우리는 복학 처리된 학생 신분으로 등교를 시도했다.
정보 기관원들은 새벽부터 교문과 강의실 앞에 지켜서서 우리의 수업을 방해했다.

온종일 지켜서서 우리가 나타나면 강제로 연행해 갔다.
경찰서 보호실에 가두기도 하고 이리저리 끌고다니다가 수업이 끝나는 시간 쯤에 풀어주기도 했다.

이런 곤경을 당하는 우리는 물론이거니와 곁에서 지켜보는 동료 학생들과 교수님들, 교직원 모두가
누구랄것도 없이 참으로 비참한 심정이었다.

아니 상부로부터 지시를 받아
그대로 수행할 수 밖에 없는 담당 기관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악법이라도 좋으니까 법을 만들어서 근거를 삼고 기준을 정해서
절차를 밟아 연행하든 가두든 해야 할 게 아니냐면서 집요하게 등교를 시도했다.

하지만 끝내는 우리 모두가 장기 결석으로 학점도 못 받고
또다시 제적당해야 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는 납득할 수 없고 수긍할 수도 없었다.
일단 끝난 일로 가만히 받아들이고 넘어갈 수 없었다.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양심으로 저항하고 행동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우선 함께 석방된 김동길 교수를 모시고 관계 기관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은밀한 장소를 마련해서 일주일에 이틀씩 교과 과정을 공부했다.

우리는 이 강좌 모임을 민립(民立)대학이라 불렀다.

 

나는 독일 유학을 준비하고 있던 매형과

서대문에 위치한 저택, 방 2개와 주방이 있는 독립된 옥탑에

자취방을 마련하고 정보기관의 감시를 피해 생활했다.

 

 

 

1 부 / 12. 연행 여행과 미인계 사건


때로 외국 국가 원수나
국제적인 인권 단체에서 방한하게 되면
우리는 아예 수도권을 벗어나서
지방 먼 곳으로 강제 연행되어 잠적해 있어야 했다.

대통령이 외국 순방길에 오를 때도 그랬고
대통령이 국가 경축 행사에 참석할 때도 그랬다.

1975년 3월 29일 나는 강의실에서 수업받고 있던 중
경찰서 정보과 직원에 의해 강제로 연행되었다.

 

 ▲ 동아일보 1975.04.02



그 당시 한국의 민주화에 많은 관심을 보여온
미국 의회의 프레이저 의원이 이끄는
아시아태평양지역 소위원회가
민청학련 사건의 고문과 조작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한국으로 조사단을 파견했다.

또 영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에서도
같은 목적으로 대표단을 보내왔다.

그들이 만날 만한 30 ~ 40명의 명단이
중앙정보부에 입수되자 공안 기관에서는
명단에 든 인사들이 조사단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전원을 강제 연행해서 지방으로 보내게 했다.

이른바 "강제 연행 여행"이라고 부르는 이 수법은
박정희가 사망하는 1979년까지 계속 이어졌다.

나는 당시 화성군 오산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수원 지역 정보 기관에서 나를 담당해서
강제 연행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틈을 타서 잠시 함석헌 선생님이 계시는 봉원산거를 찾았다.
여남은 이들과 인도 경전 바가받기타를 공부하고 있던 함 선생님은

"그런 데를 끌려 가게 되면 여자를 조심해야 될 거야"

하고 염려를 주셨다.
함 선생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이튿날 수원에서 온양으로, 수덕사를 거쳐, 장항으로,
다시 군산을 거쳐, 전주로 정신없이 끌려 다녔다.

자정을 넘어서야 전주 복판쯤으로 여겨지는 곳에 위치한
여관장에 들어서 자리에 누울 수 있었다.

피곤도 겹치고 해서 선잠에 빠져들 즈음
잠결에 등어리 바짝으로 뭉클하고 뜨뜻한 체온이 느껴져 왔다.

이상한 감촉에 잠을 설치고 깨어 돌아 보니

동행한 기관원은 간 데 없고
스물 두어 살 쯤으로 보이는 웬 여자가
완전히 벌거벗은 채 나와 한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순간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이 뇌리를 스치면서
벌떡 일어나 불을 켜려고 벽을 더듬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왜 이러시느냐고
조용히 한번 놀자고 하면서 내 팬티를 잡고 늘어졌다.

나는 털썩 주저 앉아 벗겨진 팬티를 다시 가려 입고
주인장을 부르며 마구 소리를 질러 댔다.

그러기를 두 세 번 계속하자 그녀는 조용히 하면 불을 켜 주겠다고 하면서
일어나 불을 켜고는 이불 속으로 다시 들어 와 내 목을 잡고 끌어 당겼다.
20 여 분 동안 실랑이를 벌이다가 틈을 타서 밖으로 뛰쳐 나왔다.

내친 김에 서울로 올라와
명동에 위치한 전진상 교육관 위층의 수녀원으로 가서
수녀들의 보호를 받으며 숨어 있었다.

그러자 지학순 주교님과 신부님들이 찾아 오시고
박형규 목사님과 이 철 어머니, 김지하 어머니, 김 윤 어머니가 오셨다.

마침 한국의 인권 문제를 취재하러 왔던

영국의 BBC 방송 텔레비전 제작팀들이 찾아와

여러시간 인터뷰를 했다.

윤보선 함석헌 김대중 세 분이 공동의장으로 이끌던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는 대변인 함세웅 신부 명의로
진상을 알리고 항의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한편 광고 탄압 사건으로 박 정권과
한창 심각하게 마찰을 빚고 있던 동아일보에서는
"...프레이저 미 하원의원과 엠네스티 국제위원회가
한국 인권문제를 조사하려 할 때
당국은 그들이 만나려는 민주인사들을 관광여행을 시켰으며
특히 연세대 최민화 군의 경우 기관원이 어린 학생에게
미인계(美人計)를 쓰는 등 불미한 사례에 접해
분노와 서글픔을 억제치 못한다고 밝혔다" 고
함 신부의 기자회견문을 보도하기도 했다.

 

▲ 동아일보 1975.04.05

 

당시 시국과 관련해서 일어난 집회와 시위 등 소식은 방송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고

신문에서 1단 짧은 기사로 보도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재야에서 발표한 성명서를 5단 기사로 보도한다는 건

그야말로 보기드문 톱기사에 다름 아니었다.

영국 BBC 방송에서는 순수한 학생을 강제로 연행해서
인간적으로 타락시키고 파멸시키려는 반인륜적 행위로 미인계 사건을 소개하면서
유럽과 캐나다 호주 등에 텔레비전으로 생생하게 방송했다.

그 주간에 있었던 구속자 가족 목요기도회에서 함석헌 선생님은

"인면수심도 유분수지...
어떻게 맑고 순진한 학생들을 강제로 연행해다가
창기를 집어 넣어 타락시키려는 일을 저지를 수가 있단 말이오!
정부에서 하는 짓거리가 이 지경인데도
우리가 비폭력만 하고 있어야 되겠소?
갑시다! 도끼들고 나갑시다.
치안본부로 가서 다 때려 부수어야지..."

하시며 울분을 이기지 못해 하셨다.

마하트마 간디도 아들이
누군가가 아버지를 폭력으로 살해하려 한다면
그런 상황을 목격하면서도
그 괴한에게 비폭력으로 대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괴한의 폭력으로 아비가 죽게 되는 상황에서는
폭력으로 맞대응해서라도 괴한의 행동을 저지시키는 것이
자식된 도리'라고 대답했다는 말씀을 소개하면서
함 선생님은 나가야 된다고, 도끼라도 들고 여관으로
치안본부로 몰려 나가야 된다고 말씀하셨다.

비폭력주의자인 함석헌 선생이 평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폭력적 저항을 언급하신 대목이다.

 

한편 연세대 교정은 문교부의 계고장과 박대선 총장의 정면대립으로
대규모 학생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었다.

 

1975년 4월 3일 소식을 전해 들으신 나의 아버님은
김지하 모친, 이 철 모친, 김 윤 모친 등 구속자 가족 분들에 이끌려
함께 연세대로 향했다.

 

이날은 마침 전교생 7천 명 중 6천 여 명이 참여하고

음대 악단이 공대 옥상에서 진군나팔소리로

시위대를 고무하는 가운데 벌어진
개교 이래 최대의 학생시위가 있던 날이었다.

 

신문 보도를 통해 나의 강제연행과 미인계 사건을 전해 들은 학생들은
구속자 가족분들 방문 소식에 대강당으로 모이고
아버님은 대강단 연단에 올라 2천 여 명의 학생들 앞에서
내가 연행된 경위와 천인공노할 미인계 사건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하셨다고 한다.

 

이 광경을 지켜본 당시 교목실장 이계준 교수는 훗날 나를 만나자
"그날 대강당에서 아버님이 명연설을 하셔서 열기를 한껏 돋구었다" 고
분위기를 전해 주셨다.

 

1975년 4월 6일 나는 새문안 교회 주일 예배와 대학생부 모임에 참석했다가
잠복 중이던 정보기관 형사에게 검거되었다.

그리고는 부산으로 포항으로 경주로 또다시 연행 여행을 떠났다.

 

▲ 연행 여행 중 경주에서 정보과 형사와 함께. 박박머리로 감옥에서 출소하여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

 

포항에 머물고 있던 4월 8일에는
고려대학교만을 대상으로 한 긴급조치 7호가 발동되었다.

 

4월 9일 경주에 머물고 있을 때

인혁당 사건 관계자 8 명에 대한 사형이 전격적으로 집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 인혁당사건으로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피고인들

 

▲ 1975년 4월 9일 대법 확정판결 후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된 8분 - 왼쪽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용원(당시 39·경기여고 교사) 도예종(51·삼화토건 회장) 서도원(52·전 대구매일신문 기자) 송상진(46·양봉업)

하재완(43·양조장 경영) 이수병(37·삼락일어학원 강사) 우홍선(45·한국골든스탬프사 상무) 여정남(31·전 경북대 학생회장)

그 날 경주는 새벽부터 먹구름이 끼고
부슬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참으로 을씨년스런 날씨였다.

빈 속에 아침 식사를 하면서 나는 평소 좋아하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던 막걸리 한사발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이내 위 속에 있는 모든 찌꺼기들을 한꺼번에 토해 버렸다.

 

이틀 후 4월 11일 서울대 농대 시국성토대회에서 세번째 연사로 등장한 김상진은

정열적인 어조로 학내문제를 설명하고 죽음을 택하게 된 양심선언문을 읽은 후 할복 자결한다.

 

그날 연행 여행을 마치고 저녁 늦게 수원경찰서에 들어서자

서울농대에서 학생 시위가 벌어지고 김상진 열사가 자결한 일로 경찰서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중앙정보부에서는 전주에 있는 여관장과

벌거벗고 내 침대에 누어 있던 여인을 직접 취조하고

정황과 사실을 샅샅이 파악했다.

나에 대한 미인계 사건과 이런저런 일이 겹치고 겹쳐서 

수원경찰서장 이하 정보 과장 계장 담당자 등 모두가 징계를 받게 되었다.

경찰서장과 간부들이 모두 오산 집으로 찾아와

부모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그들은 어머니께 같은 공무원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던 일로 너그럽게 이해하고 부디 용서해 달라고 간청했다.
어머님은 내 처분만 바라보고 계셨다.

 

중앙정보부 학원담당 과장과 간부 두 분이 집으로 찾아와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면서

아랫사람들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자발적으로 저지른 짓이라면서

엄하게 질책하겠다고 했다.

결국 과장 이하 담당 직원들은 징계를 받고  
수원경찰서장은 시말서를 썼는데 그 후 다른 사건과 겹쳐 몇달 후 직위 해제되었다.

 

강제 연행여행은 그 후로도 1979년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매 해 31일 삼일절,  4.19혁명기념일인 419, 815일 광복절과

외국의 주요 사절이 방한할 때, 민주적인 집회가 예정되어 있을 때 등에는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강제 소개되어 연행여행을 다녀야 했다.

 

훗날 인혁당 관련자는 재심을 통해서

2007년 1월, 32년 여 만에사형 집행을 당한 분들을 포함하여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나는 이 사건의 재심을 통해서

2009년 09월 11일, 35년 여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제 1 부 / 13. 전지전능한 '말씀'



유신 정권은 우리들의 석방 조치를 통해
국내외로 비화된 비난을 모면하면서
한편으로 민주화의 요구를 막아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별다른 효과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민주화에 대한 열기가 대학 사회뿐만 아니라
종교계 언론계 등으로 확산되면서 여의치 않게 되자
또다시 강경책을 구사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기에 급급했다.

 

이때 미국이 월남에서 패망한 소식은
유신 정권에게 오히려 돌파구를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관변 단체뿐 아니라 욱박지르고 회유할 수 있는 단체는 모두 다 총동원해서
연일 신문과 방송에 성명서와 광고를 내게 했다.

안보 궐기 대회를 대대적으로 가지면서 법석거리고 야단이었다.

 

이렇게 분위기를 잡아가더니 얼추 올랐다 싶었던지 1975년 5월 13일
'국가 안전과 공공 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 9호' 를 선포했다.



이른바 '긴조 9호'로 불리는 이 조치는 유신 헌법을
신성불가침한 성역으로 감싸고도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유신 헌법에서조차도 보장할 수밖에 없는 국민의 기본권들을
사실상 제한하고 박탈하여 그야말로 헌법 위에 군임하는
'신(神)의 말씀'으로 되어 있었다.

 

모든 국민들은 권력자의 비위에 거슬리기만 하면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영장 없이 체포 구금될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누가 그러한 부당한 처우를 받게 되었는지를
전해 듣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더우기 이 조치를 위반하였다고 판단하여 내려진 형벌에 대해서는
법의 심판 대상에서조차 제외되어 이의를 달 길도 없었다.

 

그야말로 '말씀'은 전지전능한 절대 권력이었던것이다.

정국은 또다시 꽁꽁 얼어붙는 분위기로 돌변했다.


긴급조치 9호는 이제까지 모든 긴급조치의 종합판으로
대학교를 완전히 병영화하고 철저한 감시체제 하에 두는 것이었다.

유언비어 유포,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행위를 금지했다.


위반자에게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과 10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부과하고
위반자가 소속된 학교나 단체의 장에게 해당자의 해임이나 제적을 명령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휴업, 휴교, 정간, 폐간이나 승인, 등록, 취소도

주무 장관의 재량하에 심사할 수 있었다.


관제 반공궐기대회가 연일 기승을 부리는 분위기와 함께
정국은 꽁꽁 얼어붙어 버렸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를 아랑곳하지 않고
1975년 5월 22일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대규모 학생시위가 일어났다.


서울대 복학생 그룹과 탈춤패, 문학패, 야학패 등이 주도하여
김상진 열사 추도식으로 거행된 기습적인 거사로
1천 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였다.


5월 22일에 발생하였다고 해서<오둘둘>로 불리는 이 사건은

전지전능한 말씀과 절대 권력의 권위에 일대 타격을 안겨주는 시발이 되었다.


경찰과 학교 당국의 시위 대응은 강경 일변도로 급변하였다.
시위 중 80여 명의 학생이 연행되었는데 그 중 60명이 즉시 구속되었고

학교 당국은 이중 53명을 무더기로 제명했다.


또한 이 시위 사태에 책임을 지고 서울대 총장이 사임하고
사전에 진압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치안본부장과 남부경찰서장,
정보과장, 정보계장 등 정보라인이 무더기로 경질되었다.


이후 경찰과 중앙정보부 기관원들이 대학교 내에 상주하면서
학생담당 교직원과 협력하여 학생 시위를 원천봉쇄하는 것이
대학가의 일반적인 풍경이 되었다.


1975년 7월 16일 긴급조치 9호 선포 2개월 여 후

이번에는 사회안전법 (社會安全法)이 법률로 제정되었다.


이는 특정범죄를 다시 범할 위험성을 예방하는 한편,
사회복귀를 위한 교육개선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해 보안처분을 함으로써

국가안정과 사회안녕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제정된 법률이었다.


보안처분 대상자는
①형법상의 내란죄·외환죄
②군형법상의 반란죄·이적죄
③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구성죄, 목적수행죄,
자진지원·금품수수죄, 잠입·탈출죄, 찬양·고무죄,
회합·통신죄, 편의제공죄를 지어 금고 이상의 형을 받고
그 집행을 받은 사실이 있는 자들로 규정되어 있다.


보안처분은 검사의 청구에 의해
법무부장관이 보안처분심의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결정하며,
기간은 2년이지만 경신할 수 있다.


이 법은 정권에 의해 사상범 또는 공안사범으로 규정된 사람들이
형기를 마치고도 사회에 복귀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악법으로
위헌시비의 대상이 되었다.


이 법에 따르면 나는 주소지인 오산에서 군계나 도계를 벗어나 출타를 할 때

사전에 정보기관에 신고하여 허락을 얻어야 하고 다녀와서도 신고를 하게 되어 있다.


월남인으로 반공 의식이 몸에 배어 있는 지학순 주교님은

빨갱이로 구속되어 처단된 전적이 있는 박정희부터 솔선수범해서 실천하라.

나는 박정희에 비해 관찰 대상이 될 수 없으니만큼 전면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나와 함께 석방된 이들 모두 사회안전법을 전면 거부하겠다고 선언하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긴급조치 9호와 사회안전법으로 나는 중앙정보부 남산 수사국과
서빙고에 위치한 보안사 대공분실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신세가 되었다.

 

어디에 있었느냐, 어디를 갔느냐에서부터 누구를 만났느냐, 무엇을 했느냐 등
개인적인 일상 생활을 시시콜콜 뒤져내더니 만나는 사람들을 참견하려 들고
다니는 곳을 제한하려 들었다.

 

학교는 물론이고 기독교 기관 단체나 교회에도 나가지 말라는 거다.

 재야 인사는 물론이고 친구나 선후배 심지어 교회 목사를 만나서도 안 된다는 거다.
도서관에 나가서 혼자 책을 보아서도 안 된다는 거다.

 

상식적 기준으로나 헌법, 기본법적 근거로나
무슨 절차로나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서
유신 정권은 이 뿐만 아니라 나에게
그들이 원하는 대로 길들여질 것을 강요했다.

 

이목구비를 틀어 막고
잠자코 있으라고 강요했다.

 

정신적으로 수긍할 수 없었다.
옳지 않다고 말해야 했다.
아니라고 거부해야 했다.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저항해야 했다.

 

나는 그러면 그럴수록 틈만 나면 친구와 후배들을 만났다.
틈을 내어 목사님 신부님을 찾아 뵈었다.

 

봉원산거를 찾아 함 선생님과의 모임도 계속했다.
김동길 교수와의 민립대학 강좌 수업도 계속해 나갔다.



 

1 부 / 14. 장준하 선생


장준하 선생은 일제 말 학병으로 강제 징집되었다가
만주에서 극적으로 탈출하여 광복군에 참여한 애국 지사다.


▲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중국 산동성 유현의 어느 사진관에서 (왼쪽부터) 노능서와 김준엽, 장준하가 찍은 사진.


그러나 선생의 명성은 독립군의 이력보다도
독립된 이 나라에서 펼친
반독재 민주운동과 통일운동의 거목으로
우리 뇌리에 남아 있다.

선생은 이승만 정권 하에서
일제로부터 독립한 나라의 지도층이
온통 일제의 압잡이들로 구성된 것에 대해
민족 정기를 저버리는 일이라고 울분을 금치 못하셨다.

더욱이 군사 쿠데타로 권좌에 오른 박정희 대통령이
일제의 압잡이인 관동군 중위 출신이라는 데에 이르러서는
적이 비분강개하셨다.

장준하와 박정희...
이 두 사람은 이렇게 출신 성분에서부터 확연히 달랐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모든 면에서
장준하 선생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시대에 비슷한 연배로 만주라는 같은 공간에서
한 사람은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갔지만
결국은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여
독립운동의 상징인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우리 민족이 해방되는 날까지 일제에 저항한 반면

또한 젊은이는 멀쩡한 교사직을 버리고
오로지 입신양명을 위해 자발적으로 지원해서
일제에 가장 충직스런 군 장교로
독립운동가들을 섬멸해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결국 일본이 패망하고 해방된 조국에서
일제의 장교인 박정희 중위는
패잔병이자 전범자로 처벌을 받고
독립 운동을 이끈 장준하는 민족 지도자로
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역할을 맡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오히려 정반대 상황으로 진행되어 왔다.

이처럼 대조적이고 모순적인 현상은
한국 사회를 지배해 온 권력과
그에 저항하는 민주화 통일 운동 세력의 성격을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대통령 박정희로서는 장준하라는 존재가
감추고 싶은 자신의 과거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것이어서
그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런 관계는 훗날 장준하 선생이
박 정권 하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운명을
비극적으로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앞에서도 서술한 바 있거니와
1973년 12월 장준하 선생이 재야 인사를 대표해서
유신헌법에 대한 '개헌 청원 서명운동본부'를 제안 발의하자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선풍을 일으키면서 전개되어 갔다.

이 운동을 막기 위한 조치로 박정희는
대통령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굴하지 않는 장 선생을 처음으로 구속하였다.

그 직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우리 학생들과 함께
감옥 생활을 하던 장준하 선생은
74년 12월 건강 악화로
수감 생활을 더이상 지속할 수 없다고 판정되어
'중통'으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75년 2월 15일 석방된 나는 4 월 말 경
나병식(민주화기념사업회 상임이사) 황인성(사회운동)등과 같이
장준하 선생을 찾아뵈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석방된 학생들이 찾아온 것이 처음이어서인지
장 선생은 우리를 무척 반가이 맞이해 주셨다.

선생님이 등산을 좋아하는 분이어서
우리가 모시고 함께 산행을 했으면 한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장준하 선생은 기다렸다는 듯이 흔쾌히 승낙하셨다.

"내가 지금 몸이 좀 좋지 않지만 귀한 분들 요청인데......
함께 갈 수 있도록 찾아 줘서 고맙소."

장 선생님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시며
당신이 잘 아는 코스 중에
우리에게 꼭 안내해 주고 싶은 곳이 있다고 하셨다.

5월 초 우리는 선생을 모시고 치악산을 향해 떠났다.
상원사에서 하루를 묵고 치악산 능선을 따라
비로봉을 거쳐 구룡사로 하산하는 코스였다.

내게는 치악산 등반이 초행길이라 무척 힘이 들었다.
만만치않게 어려운 코스였다는 기억이다.

그러나 선생은 중통으로 석방된 분 같지 않게
젊은 우리보다도 산행을 훨씬 잘 하셨다.

심근경색증을 앓고 계시던 선생은
빨간 약봉투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며
당신이 갑자기 쓰러져서 혼수상태에 빠지면
약 두 알을 즉시 입에 넣어달라고 하셨다.

그러면서도 산을 어찌나 노련하게 오르시는지
장 선생을 따라 오르는 길이 나에게는 적이나 힘에 벅찼다.

우리가 장준하 선생과 오랜 시간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이처럼 가까이서 체취를 느껴보기는 처음이었다.

정갈한 선비 같다고나 할까...
조용조용하고 말씀도 극히 절약하는 분인데
가까이서 봐도 뒤에서 봐도 옆에서 봐도
참으로 흠잡을데 없이 잘 생겼다는 생각이 들만큼
귀공자 풍의 미남이었다.


▲ 장준하 선생


살결은 퍼런 빛이 도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희디희고 곱디곱다.

둘째 날 비로봉 정상을 거쳐 구룡사에 도착했다.
구룡사 주지 스님은 반색을 하며
장 선생과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장 선생은 매우 대견하고 자랑스러우신 표정으로
주지 스님께 우리를 소개했다.


▲ 치악산 구룡사


주지 스님은 1950 ~ 60년대
우리나라 지식인 사회의 대표적 종합 월간지이자
장 선생이 펴내신 <사상계>의 애독자이셨단다.

그때부터 장 선생의 뜻을 존경해 왔다면서
불교신도 회장 등 여러분을 우리에게 소개했다.


그 분들 역시 존경하는 분들을 직접 뵈었다고 반가워 했다.
우리 일행은 주지 스님이 주시는 차를 마시며
늦도록 세상 이야기 등을 나누기도 하고
그윽한 산사의 풍경 속에 등산의 피로를 풀면서
옥고의 여독을 씻어 내기도 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 사찰과는 별로 인연이 없던 나로서는
그 날 난생처음 절에서 정식 공양을 하게 되었는데
그 정갈하고 깨끗한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튿날 아침 공양을 하면서 주지 스님은

"... 1년에 뚜껑을 한 두 번밖에 안 여는 귀한 곡차가 있는데
한잔 대접하겠습니다"

하면서 찻잔에 차를 따라주시는데
색깔이 맑고 고운 핑크빛이었다.

한 입 대어 마셔보니 은은하게 취해 오는 느낌이 든다.
알고 보니 산사에서 복분차라고 부르는 산딸기 발효주였다.

맛이 너무 좋았던지 황인성이 불쑥
"저... 한 잔만 더 주십시오" 했고
나병식도 뒤따라 웃으면서 "저도..." 하며
한 잔을 더 받는다.

나 역시 한 잔을 더 부탁했다.
두 잔을 마시고도 우리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니까
스님이 한 잔씩을 더 주신다.

석 잔 째 마시니 취기가 약간 도는 것 같다.
알딸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장 선생은 한 잔밖에 안 드셨다.

"장준하 선생이 우리 절을 찾아준 것만도 큰 영광인데
이렇게 귀한 분들까지 함께 찾아주셨으니
방명록에 이름을 좀 남겨 주시지요..."

주지 스님의 요청으로 방명록에 서명하려고 보니
바로 앞장에 이후락 김성곤 김종필 등의 이름이 씌어 있었다.

상호 대치점에 서 있는 사람들의 이름이
종이 한 장 차이로 이어져 있어 묘한 감정이 머리를 스친다.

우리 다음으로 방명록에 서명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들까 궁금하기도 했다.
주지 스님은

"이왕 오셨으니 가 볼만한 곳 한군데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저기 계곡 쪽으로 가면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르는 샘이 있는데
물이 아주 좋고 시원한 곳이니 산수도 즐기시고
그 샘물로 점심을 해 자시고 내려가십시오"

하시며 안내하는 분을 붙여 주셨다.
우리는 그 샘터에서 점심을 해 먹고는
냇가 계곡물에서 등물을 했다.

번갈아 서로 등을 밀어 주는데
장 선생의 등을 내가 밀어 드리게 되었다.

장 선생의 살색은 눈으로 바라보던 것보다도
훨씬 하얗다 못해 퍼런 기가 돌며 매우 고왔다.

여자의 살결이라도 이보다 더 보드랍고
윤기가 돌 것 같지 않을 정도다.

오후에 우리는 원주 시내 가톨릭 원주 교구청에 들러
지학순 주교님을 만나뵈었다.


▲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

장 선생님은 매우 대견하고 자랑스러우신 표정으로
우리를 지학순 주교님께 소개했다.

지 주교님도 우리를 아주 반가이 맞이해 주셨다.
신부님 수녀님 등과 만찬을 함께 했는데
헤어질 때 우리에게 격려금이랄까 

금일봉을 주신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1 부 / 15. 의문의 죽음

산행을 마치고 장 선생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번 산행으로 내 몸의 컨디션을 시험해 보는 기회가 됐고
더군다나 든든한 분들과 함께 하게 돼서 참 고마웠소...
혹시 불편하지 않다면 다음엔 광주 무등산으로 해서
홍남순 변호사도 뵙고 여기저기 들러
지역에 계신 분들과 인사도 나누면서
진주로 해서 3박 4일 쯤으로 함께 여행을 갔다 왔으면 하는데...
함께 가 줄 수 있겠소?"

"그럼요. 저희들이 모시고 가겠습니다."

우리는 장 선생과 이렇게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 이후 국회에서는 당시 야당의 적극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회안전법이 통과되었다.

사회안전법에 따르면
국가보안법이나 국가내란예비음모 등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실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석방된 사람들은
관할 경찰서 구역을 떠나거나 돌아올 때
반드시 사전 또는 사후에 즉시 신고하도록 되어 있다.

이를 어기거나 어길 우려가 있는 자에게는
재판에 의하지 않고도 보호 관찰과 감호 조치 등에 따라
무한정 격리 수감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를테면 정치범 양심범으로 석방된 이들에게
거주 이전의 자유와 통행 활동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박탈하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법을 반대하는 집회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당시에는 우리도 사회안전법 신고 대상자였지만
우리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신고를 거부했다.

이 법에 따르면 여순반란사건 당시 구속 수감되었다가
동료들을 배반한 댓가로 석방된 박정희 대통령도
사회안전법의 신고 대상이었다.
지학순 주교님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정희부터 먼저 신고하라고 하시오!...
박정희가 먼저 신고하면 나도 할 용의가 있지만
박정희가 신고 안 하면 나도 못하겠소..."

하고 주장하셨다.
당시 재야에서는 전체적인 의견이 모아지지 않아
이 법을 거부하자는 합의는 이루어 내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우리는
'장 선생님께서 우리를 만나 피해를 받으시면 어쩌나’
하면서 고민을 하게 되었고 장준하 선생 역시
'이 와중에 함께 여행을 다니다가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면 어쩌나'
하시며 서로가 염려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장 선생과 약속한 여행 일정을
자연스레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이 전화를 걸기도 조심스럽고
장 선생님을 직접 찾아 뵙기는 더더욱 조심스런 일이어서
전화 연락도 없이 장 선생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장 선생님은 우리를 꽤 기다리셨던 듯하다.
약속한 6월이 지나고 7월이 되어도 연락이 없으니
당신 혼자 광주로 여행을 다녀오셨다.

그 후 8월에 접어들면서 어떤 젊은 사람이 찾아와
평소에 장 선생님을 존경하고 따르는 젊은 사람들이
선생님을 모시고 산행을 하려 하는데
함께 동행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부탁을 하자
장 선생은 우리들과 산행했을 때
뜻 깊고 자랑스런 일들을 생각 하셨던지 선뜻 따라 나섰고
이 일로 8월 17일 포천 이동면에 있는 약사봉으로 등산을 가셨다가
그만 의문의 죽음을 당하셨다.

이 사실은 동아일보 의정부 주재 기자가 즉각
의문사로 보도해서 구속되는 등
정치 사회적으로 큰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함석헌 선생님도

"이건 장 선생님의 당시 행동 계획과 정황으로 보아
타살임에 틀림없다"

고 주장하셨다.
장 선생님은 당시 비장한 결심을 하고 계셨단다.

박 정권 하에서 이렇게 살아 뭐 하겠나...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일을 한 번 크게 일으키고
감옥에 들어가 옥사하고 말겠다 하시며
큰 일을 준비하는 중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결행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등산을 갔다가
그만 뜻을 실행하지 못하고 의문의 죽음 당하신 것이다.

나와 나병식과 황인성은
장 선생님 댁에 마련된 빈소로 달려가
밤을 지새며 울분을 억눌렀다.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장 선생님은 아주 차분하고 조심스러운 분이어서
그렇게 위험한 곳에서 미끄러지실 분이 아닌데...
우리가 모시고 갔더라면
결코 이런 변을 당하지 않으셨을 텐데...


빈소에서 나는 서울의대 본과에 재학 중인 서광태와

만나서 서로 인사하게 되고 이 인연으로 두 달 후 큰 사건을 겪게 된다.


▲ 1975년 8월 22일 명동 천주교 대성당 장준하 선생의 장례식

요즘도 그때를 되돌아 보면
도무지 의문이 풀리지 않고 있지만
비상약을 가지고 다니시며
'내가 혼절하게 되면 이 약을 꺼내어 입에 넣어 달라'
고 하신 말씀이 떠올라 혹시라도 동행한 사람들이
잘못 보좌해서 벌어진 일은 아닌지 하는 생각에
우리들의 불찰인 것 같아 죄송스운 마음 금할 길 없다.


▲ 홍남순 변호사


훗날 내가 월간 <씨알의 소리> 편집장을 할 때
광주의 홍남순 변호사를 만난 자리에서
나는 홍 변호사님께 나와 나병식, 황인성이
장준하 선생님과 광주를 가기로 약속했는데
사회안전법 등등으로 상황이 여의치 못해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말씀을 드렸다.
홍 변호사님은

"장 선생은 그때 광주에 내려와서 나를 만나고 가셨어"

하시며 당시 광주에서 장 선생님과 함께 찍은 사진을
내게 보여주셨다.

"장 선생이 자네들과 등산한 얘기를
꽤나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더군.
그래서 김용환이라는 젊은이가 등산을 가자고 하니까
그런 기분을 기대하고 쫓아간 거겠지..."


▲ 장준하 선생 묘소에서 추도가를 합창하는 청년


우리는 그 이후 장 선생님 주기마다 묘소에 찾아갔다.
장 선생님은 돌아가신 후에도 우리에게 갈 길을 지도해 주셨다.

1983년 장 선생님 추도식이 거행된 포천군 약사봉에서
우리는 민주화운동년연합을 결성하기로 다짐하기도 한다.


▲ 장준하 선생이 의문사한 약사봉 계곡을 답사하고 있는 참가자들


▲ [동영상] 장준하 선생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SBS 장준하 선생 죽음의 미스터리




2 부 / 16. 의심 나는 자여 다 내게로 오라



한편 1974년 7월 구속 100일만에 먼저 석방된 혜숙은
함께 행동했던 동료들이 대부분 감옥에 남아 있는 사정이어서
무척이나 외로웠던 모양이다. 

 

73년 가을, 내가 군에서 제대하고 연세대에 복학한 후
기독학생회총연맹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알고 지냈던 혜숙은
나를 형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내게 자주 '형, 형'하면서 말을 붙여 왔다.
운동과 인생에 대해서 토론도 하고 그녀의 짝사랑 얘기도 들어주는 등
우리는 자주 만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산에서 서울로 유학하고 있었지만 어머니와 누이의 헌신적 지원으로
용돈이 그리 궁하지 않게 생활했던 나는 후배들의 상담자역을 맡기도 했다.  

 

나는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결혼을 하지 말아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혜숙은 조금 특이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를 남자로 생각하는 듯했다.

 

후배로서가 아니라 여자로서 따라다니는 눈치가 보이니까
나는 점점 혜숙이 부담스러워졌다. 

 

나는 결혼을 하거나 가정을 가지게 되면
저 어마어마한 독재 권력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함께 석방되자마자 월정사로 입산한 여익구처럼
스님이 되는 길로 가면 어떨까 생각했고
신부가 되거나 결혼할 수 없는 조건으로 몰고 가야만
나를 버텨 낼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고민했다.

 

나는 교회에서 자랐지만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으면 자식에 대한 애착과 의무 때문에
내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혼을 하게 되면 가정을 꾸려야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고
또 아이들의 성장과 교육을 책임져야 하는데
그러려면 아무래도 운동을 포기해야 되는 게 아닌가 여겨진 것이다.

 

'나는 사유에 대한 애착을 갖지 않아야 한다. 
결혼을 하지 말아야 된다. 
자식을 갖지 말아야 한다. 
거기에 매몰되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마음 속으로 다짐하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스님이나 신부의 길로 들어서면 어떨까?


그래야만 가정과 직업에 얽매이지 않고 이 땅에 민주화를 이룰 때까지
평생토록 운동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하지만 혜숙은 집안 사정도 어렵고 사춘기 짝사랑의 실패로
정신적 지주가 없어서 방황하던 시절이라
오히려 종교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독신을 강조하는 내게 정신적인 기대를 한 것 같다.

 

나는 후배의 인생 상담을 받아주는 마음으로만
그녀를 만나려 했고 그 만남도 일체 비밀에 부치도록 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출감하였으나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아무런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없었던 나는
장래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하느님, 이 험난한 세상 속에 휩쓸리거나 타락하지 않고
의로운 뜻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저를 지켜주옵소서.
저 자신을 위해서 살기보다는
이 땅의 민주화와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살도록 지켜주옵소서.
필요하다면 결혼과 가정을 갖지 않도록 저를 인도해 주옵소서. 
그러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신부나 혹은
나 자신을 지키고 변하지 않을 수 있는 길로 저를 인도해 주옵소서... 
만약 저에게 결혼과 가정을 가지고도 감당할 수 있는 바른 길이 있다면
그 길로 인도해 주셔도 좋습니다..."

 

요즘은 이렇게 절절한 기도를 하기 힘들지만
그때는 매우 구체적이고 섬세한 제목으로 기도를 했다. 

 

그리고 나의 이런 다짐은 조금씩 구체화되고 있었다. 
나는 되도록 결혼을 안 하기로 했다.

 

스님보다는 신학을 전공하고 종교에 애착을 가진만큼
신부가 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 갔다. 

 

평생을 박 정권 타도를 위해 바치려면 결혼은 타협이라고 생각해서
그녀에게도 자신있게 내가 가기로 다짐한 방향을 이야기 했다.

 

혜숙은 이런 생각을 가진 나를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자기의 마음을 받아들여 주지 않자 약이 올라했다.

 

나중에 고백하기를 내가 다른 사람과는 달리
자기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다 털어놓고 싶을 정도로
포근하게 기대면서 의지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늘 선을 긋고
혜숙이 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때때로 나는 내가 그어놓은 선을
마음 속에서부터 허물어버리고 싶은 갈등에 빠지기도 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나를 방어하기 위해 스스로 다짐을 하곤 했다.

 

"혜숙이는 후배다!"

 

나를 형이라고 부르는 후배가 여자로 보이는 순간부터
내 자신이 증오스러워졌다.

 

손목을 잡아 보고 싶고 껴 앉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참으로 내 자신이 혐오스러워져 견딜 수 없었다.

 

여자에 대한 욕망으로 득실거리는 마음이 속속들이 추악한 모습으로
내 얼굴에 나타나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견디다 못 해 이런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계속 "혜숙이는 후배다!" 하고 다짐하면서 당당하게 지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곤 혜숙에게 '난 결혼 안하겠다'고 강조하고 공언했다.

 혜숙을 만나지 않으려고 한동안 피해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당당함이라기보다는 엄밀히 말해서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콤플렉스에 의한 것이었고
성적 본능을 자제하려는 사춘기적 고민에서 나오는 행동이었다.

 

나의 본능은 너무나도 혜숙에게 끌리고 있었고
한편으로 그녀에 대한 콤플렉스가 일정하게 그녀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혜숙은 속상해 하고 약이 올라 하면서도
아랑곳없이 계속 끈질기게 내 주위를 맴돌았다.


강제 연행 미인계 사건은 서울 지역 대학가에 조용히 퍼져 나갔다.
혜숙의 소개로 이화여대 학생회 임원들과 모임을 갖게 되었는데
한 여학생 간부가 실실 웃으면서 내게 야릇한 질문을 던졌다.

그런 일이 정말 벌어졌었느냐고 묻는다.
그런데도 정말로 아무 일이 없었느냐는 거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면서
요즈음 이화여대 캠퍼스에 무슨 소문이 나도는지 아느냐고 한다.
그 다음 시리즈가 있는데 한번 알아 맞춰 보란다.


나는 딱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저 허허 웃으며 무안한 분위기를 때우려 했다.
하지만 여학생들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태세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내가 잘 모르겠다고 궁여지책으로 대답하자
한 여학생이 나서서 이대에 소문이 파다한데 무슨 소문이냐 하면...

신문에 난 것이 사실이라면...
'아무개는 고자다!' 라는 거다.

그러자 모인 사람들 모두가
함께 떠나갈 듯 소리지르며 웃음바다를 이루었다.

나는 무안하고 멋적은 표정으로 따라 웃기는 했지만
느닷없는 분위기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안절부절하다가
얼굴이 빨개져서 홍당무처럼 되어버렸다.

요즈음 같으면 여학생들이 남학생 하나를 놓고서
오히려 집단적으로 성희롱을 가하는 꼴이었다.

나는 이 난처한 위기를 어떻게 넘기나 하고 궁리했다.
그런데 갑자기 성경 구절 한 대목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웃음소리가 조용하게 잦아들면서
나는 표정을 조금 엄숙하게 가다듬고는 대답했다.

"그 다음 시리즈를 내가 대답으로 내 놓아야겠는데...
그렇다면... 의심 나는 자여 다 내게로 오라!"

일행은 순식간에 박장대소하고 배꼽을 쥐어가며
한동안 소란이 그치지 않았다.

 


 

2 부 / 17. 허물없이 편안하게  



1965년 경 경기도 오산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은

매년 120 여 졸업생 중 서너 명에 지나지 않았다.

여학생은 이삼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 정도다.

학교 수업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았고 과외 수업을 지도하는 곳도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나는 오산에서 서울로 올라 와
순화동에 있는 이모님 댁에 머물며 종로 사설 학원에 다닌 적이 있다.


순화동에서 학원이 있는 종로까지 걸어가다 보면 길목에 이화여고와 경기여고를 지난다.
학원에서도 경기여고 학생들이 나와 같은 반에서 여러 명 수강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경기여고생들은 아무리 추워도 오버를 입지 않는다고 할만큼
교복과 배지와 가방을 그처럼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여기는 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시골 고등학생이 보무도 당당한 경기여고생을 은근히 부러워하면서
사춘기적 주눅들었던 경험이 오히려 혜숙이에 대한 부담으로 다가왔다.

더우기 혜숙의 언니와 오빠가 모두 경기여고와 경기고 출신인데다가
그녀가 이대 약대에 진학하게 된 것도 언니가 의과대학을 다니고 있어서
집안에 경제적 부담이 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었다니
시골 출신인 내 입장에선 이런 여자가 분에 넘치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이처럼 분에 넘치는 여자가 쫓아다니니 나로서는 부담이 되어 떨쳐버리고 싶었고
혜숙은 이 대목을 전혀 이해하지도 눈치채지도 못했다.


나는 본래 마음 속으로 부담되는 일을 무리하게 하는 성격이 아니다.
나는 혜숙에게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하면서 혜숙이 스스로 물러나기를 바랐다.


나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약간은 손해보는 선택을 하면서 살아 왔다.
무리한 상황이 닥쳐오기 전에 나 자신을 스스로 조절해 온 이 훈련은
학생운동과 재야운동 과정에서도 드러나 나는 주로 조정하고 화합하고 통일하는 역할을 맡아 해 왔다.

혜숙은 나와 약속한 시간에 늦어본 적이 별로 없다.
늦으면 만나는 시간이 줄어드는게 아까워서 그런지 항상 10 ~ 20분 전에 미리 나온다.


나는 약속 시간에 곧잘 늦곤 했다.
그녀가 30분, 1시간 씩 나를 기다리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한번은 연세대 앞에 있는 대야성 다방에서 아침 10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잊어버렸다.

오후 4시에 다른 약속이 있어서 그 다방에 갔더니 혜숙이 그때까지 앉아 있다가
입구에 들어서는 나를 보더니 반갑게 손을 흔든다.

"바빳어 형? 왜 인제서 나와?"

그제서야 아차! 싶었다.
무려 6시간 이상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가 싫어서라기보다는 그녀와 결혼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전술적으로 다른 여자를 사귀어서
그녀가 스스로 포기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참으로 비인간적인 일이었지만 결혼할 의사도 없으면서
성균관대에 다니는 한 여학생에게 접근했다.
공주 출신인 숙희는 인형처럼 예쁜 여자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되던 해
여름방학에 있었던 일이다.

연세대 입학 동기생들 가운데 사회문제연구회 동아리 친구들이
지금까지도 유우회라는 이름으로 모이고 있는데
그 중 한 친구가 당진 앞바다에 있는 난지도라는 섬 주인집 아들이다.

그 섬에 관광명소로 해수욕장이 있어 우리는 거기에 놀러 가기로 하고
내가 함께 동행할 여대생 팀을 교섭하기로 했다.

나는 숙희에게 친구들을 모아서
내 친구들과 함께 놀러 가자고 제안했다.

그녀도 좋다고 쾌히 승낙을 했다.
떠나기 전에 상견례를 겸해서 양측이 함께 만나기로 했다.

모임을 주선하게 된 나는
혜숙에게 진행되는 계획과 내용들을 이야기했다.

혹시 마음에 상처를 받을 지도 모르겠지만 자존심이 상하면
나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떠나겠지 하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자리를 준비하느라고 약속 시간 20분 전에
모임 장소인 시청옆 아가페 다방으로 나갔다.
그런데 혜숙이 한쪽에 앉아 있었다.

"어? 여기는 어떻게 왔어?..."

혜숙은 얼굴이 굳어지면서 대꾸했다.

"신경쓰지마!"
"왜 그래?"

"나는 그냥... 혼자서 형... 자기 얼굴 보고 싶어서 왔으니까..."
"어?..."

"난 형 얼굴만 보면 돼... 형은 나한테 신경쓸 필요 없어...
참견할 필요도 없구..."

그리고는 팩하고 삐쳐서
무릎 위에 얹어 놓은 두꺼운 책을 보고 있다.

"어? 그게 무슨 얘기야?..."

"난 자기 얼굴 보러 왔다구! 이제 얼굴 봤으니까 됐어...
나한테 신경쓰지 말고 모임 있다며? 거기 가봐..."

혜숙이 굳은 표정을 하며 언성이 점점 높아지길래
나는 주위 분위기가 부담스러워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자리를 찾다가 일행이 많이 올 것이라 예상하고
넓은 공간에 자리잡고 앉았다.

시간이 되자 내 친구들은 모두 왔는데
숙희는 친구 한 명과 둘이서 나타났다.

"어, 정말 미안해요... 친구들 연락이 잘 안 되네요...
이 친구는 연락이 돼서 나오긴 했는데...
집에서 여행 허락은 못 받았다고 하고...
저도 시골에서 아버지가 빨리 내려오라 하셔서
함께 가기가 힘들겠어요..."

학창 생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른 대학 여학생들과 팀을 이루어
함께 떠나려던 여행 계획은 이렇게 무산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마음 한켠에서 그때 나는 이 여자를 선택하면
인생이 이리로 갈 것 같고
한 시간 전에 나와서 삐쳐 있는 저 여자를 선택하면
내 인생이 저리로 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결혼까지는 아니더라도
양자간에 뭔가 선택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숙희는 자기도 못 가고
친구들도 갈 형편이 안 된다고 친구와 함께 바로 일어섰다.

주선한 입장에서 난처해진 나는 친구들에게
'나와 같이 운동하면서 가까이 지내는 이대 후배가 와 있는데
같이 동석해서 이야기를 해 보자'고 했다.

나는 혜숙이에게로 가서 사정을 말하고
내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의논을 하자고 제안했다.

혜숙은 굳었던 얼굴이 금방 풀어지면서
내 친구들과 자리를 같이 했다.

혜숙은 나와 함께 갈 수 있다는 희망에선지
같이 여행 갈만한 친구 몇몇에게 연락을 해 보겠노라고 했다.

약속한 날 모여 보니 내 친구들은 다 왔는데 여자는 혜숙 혼자 뿐이었다.
마침 얼마 전 약혼한 친구가 약혼녀와 동행으로 나와 다행스러웠다.

3박 4일 간의 바캉스에서 혜숙은 내 친구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고
나 역시 그렇게라도 함께 해 준 혜숙이 더없이 고마웠다.

그 후부터 우리는 보다 허물없이
편안하게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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