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 / 20. 아버지와 아들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3 ·1절 기념 미사와 기도회에서
윤보선·김대중·함석헌 등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사들이 3ㆍ1 민주구국선언(三一民主救國宣言)발표했다.


▲ 명동성당


이를 빌미로 하여 박정권은 재야의 지도급 인사들을 정부전복을 선동하였다는 혐의로 대량 구속하게 된다.
그래서 이 사건을 3ㆍ1 민주구국선언 사건(三一民主救國宣言事件), 또는 명동사건(明洞事件)이라고 한다.


사건 직후 검찰은 "구정치인들과 일부 재야인사들이 반정부분자들을 규합,
종교단체 또는 사회단체를 만들어 각종 기도회·수련회·집회 등의 종교행사를 빙자하여
수시로 회합, 모의하면서 긴급조치철폐·정권퇴진 등을 요구하는 불법적인 구호를 내세워 정부전복을 선동하였다"
고 발표하였다.



이 사건으로 윤보선 전대통령·김대중·함석헌 선생을 비롯하여
정일형 박사·윤반웅·문익환 목사·함세웅·신현봉·김승훈 신부·이문영·서남동 교수 등 18명이 기소되었고,
재판부에 대한 기피신청과 변호인단 총사퇴 등으로 파란을 일으키며 관련자 전원에게 실형이 선고되었다.


이 사건은 피고들이 사회의 지도급 인사라는 점에서 국내외에 미친 파장이 컸다.
재판과정에서 정치적·법률적 체제공방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등
유신체제에 대한 거부와 항의를 나타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재야와 정치인, 신교와 구교,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의 연대을 강화하게 되었다.


한편 원하는 대로 길들여지지 않아 관리하는 데 애를 먹일 뿐만 아니라

미인계 사건을 불러일으켜서 수원경찰서장이 시말서를 쓰고

정보기관 직원들이 징계를 받는 등 피해를 입게 된 지방 정보기관들은

우리 집안을 가만히 놓아 두지 않았다.


오랜 세월 보건소 공무원을 하시던 어머니께서 사표를 내게 되었다.

박 정권은 이렇듯 집요하게 집안 전체를 풍비박산 내려 했다.


1976년 4월 25일 정체불명의 장정 4명이 느닷없이 우리 집으로 들이닥치더니

다짜고짜 본인을 에워싸고 온몸을 잡아 끌고 나가 군용 지프차 뒷 자석으로 밀어 넣고는

차창 밖을 볼 수 없도록 머리에 보자기를 뒤집어씌우고 바닥을 향해 짓누른 채

어디론가 강제로 불법 연행해 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수원경찰서와 가까이 있는

보안사 수원분실, 이름하여 송악사라는 곳이다.


공포와 억압 분위기에서 강제로 진술서를 작성하던 중 수사관은 내게
“왜 조용한 지역 사회에서 어려운 형편 속에 공무 집행하는 사람들이
너 때문에 징계를 받고 시말서를 쓰고 직위 해제를 당해야 하느냐”는 말을 듣고


나는 연행되어 온 까닭이 혹시 강제 연행 미인계 사건으로
수원경찰서 서장과 정보과장, 정보계장, 담당 형사 등이
징계를 받게 된 데 따른 보복이 아닌가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저들 중에는 오산 지역 7년 쯤 선배(박명삼)되는 이도 있었다.

저들은 내가 모 다방에서 다방 주인 마담에게 박 대통령이 물러나고 외국으로 망명하려 한다고 말하여
유언비어를 날조했다는 내용으로 진술서를  작성하라고 강요했다.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너무 황당한 생각에 시인할 수가 없었다.

그 다방 주인 마담은 나이도 나보다 훨씬 많을 뿐만 아니라 서로 말을 섞을 사이도 아니었다.


또한 내가 알기로 그 다방은 오산에서 보안부대 출신 등이 자주 드나들면서

민심과 정보 등을 탐문하고 파악하는 곳이기도 했다.


저들이 다방 주인 마담이라는 분과 말을 맞추고 내게 죄를 뒤집어 씌운다면

꼼짝 없이 당할 수밖에 없겠다고 여겨졌다.


저들 중 선임인 듯 한 수사관이 5파운드 곡괭이 자루로 내 등짝을 내리쳤다.

그러자마자 2~3명이 달려들어 곡괭이로 내리치고 내 얼굴과 복부와 정강이 등을

구둣발로 마구 짖밟아 나는 바닥에 널부러져 버렸다.


몸서리치는 공포 분위기 속에 꼬박 이틀 정도 잠을 한숨도 못 자고
비몽사몽한 상태로 협박과 고문을 당하면서 강압적인 조사를 받다가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진술서를 쓰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또다시 군용 지프차 안 뒷좌석에 실려

머리에 보자기를 뒤집어씌운 채 어디론가 연행되어 갔다.


도착한 곳은 보안사 수원분실의 차상급 기관으로

인천 자유공원 아래 위치한 보안사 인천분실 소위 인천송악사였다.


그 곳에서는 취조도 안 하고 오른손에 수갑을 채워서

긴 나무 의자에 연결해 놓은 상태로 오른손이 저리고 비틀려서

떨어져 나가 버릴 것 같은 고통 속에 하룻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인 1976년 4월 29일,

나는 또다시 군용 지프차에 실려 서빙고 소재 보안사 대공분실로 연행되었다.


이곳은 민청학련 사건과 서울대 의대 간첩단 사건 때 이미 수십 차례 들락거렸던 곳이다.

서빙고 대공분실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지하실 감방으로 끌려 내려갔고

거기에서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고 군 작업복으로 갈아 입어야 했다.







군 사병들은 나를 둘러싸고 

“이 빨갱이 새끼야! 너네들이 정권을 잡기 전에 여기서 살아 나가나 함 두고 보자”
하면서 5파운드 곡괭이 자루와 구둣발로 본인의 전신을 마구 때리고 짓밟았다.


나는 그만 혼절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렴풋이 정신이 깨어나면서 밀려드는 공포와 두려움에 치를 떨고 있을 때,


군인 3명이 몰려들어 내 무릎에 오파운드 곡괭이자루 몽둥이를 끼우고

꿇어 앉힌 다음 발로 마구 밟아 짓이겨 댔다.

그때마다 너무 고통스러워 차라리 기절하거나 죽기를 바라기도 했다.


이처럼 몸서리치는 공포 분위기 속에 꼬박 나흘 정도 잠을 한 숨도 못 이룬 채
비몽사몽한 상태로 협박과 고문을 당해가며 기절하고 깨어나기를 반복하면서

강압적인 조사를 받았다.


조사의 내용인즉슨 일단 내가 모 다방에서 다방 주인에게

박정희가 대통령에서 물러나고 외국으로 망명하기 위해서

망명할 장소를 물색하고 있다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그러자 내가 다방 주인에게 한 말을 누구한테 들었느냐고 다그치는 것이었다.

나는 고문에 견디다 못해 평소 유신 정권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박정희가 물러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꾸며낸 말이라고 진술하였지만
고문자들은 그건 우리가 바라는 진술이 아니고,
정히 그렇다면 네 부모님한테라도 들었다고 진술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강요했다.


나는 견디다 못해 아버님께 들었다고 진술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저들은 1976년 5월 3일 나의 아버님(1909년생, 당시 68세)을 서빙고 대공분실로 연행했다.


▲ 1940년 여가시간에 테니스를 즐기시는 아버지


나는 간첩단 사건으로 아버지와 아들, 삼촌 등 일가족이 함께 고문을 당하고 수사를 받는다는 말은
신문 보도나 월간지 등을 통해서 알고 있었지만 고문과 강제로 조작된 내용을 가지고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조사를 받는다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나로 인해 결국은 아버님과 어머님께 엄청난 수모와 불효를 저지르게 되어서
그야말로 몸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아버님 역시 협박과 공갈, 잠 안재우기 고문 등을 받으면서 아들인 본인에게
“박 대통령이 물러나고 망명하려 하였고, 망명처를 물색했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한 사실을 인정하고 진술할 것을 강요받았다.


아버님께서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을 하자 수사관들은 공포 분위기 속에 본인의 진술서를 아버님께 보여주면서
아들이 아버님께 들었다고 이미 진술을 한 것이니 그대로 진술해야 된다고 강요하여
결국 아버님으로부터 허 위진술을 받아 냈다.


그러면 아버님은 누구로부터 그런 내용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캐묻자

아버님은 전직이 공무원이셨던터라 나보다는 요령 있게 대답하셨던 것 같다.

목요기도회에서 윤반웅 목사님이 설교할 때 들었다고 진술하셨다.


당시 윤반웅 목사님은 김대중 선생, 문익환 목사님, 함세웅 신부님 등과 함께

명동성당에서 발표한 3.1 민주구국사건으로 구속 수감 중이셨다.


한편 수사관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위와 같은 내용을 전파한 사실을 더 털어 놓으라고

협박하고 고문하면서 내게 강요했다.


내가 더 이상은 진술할 것이 없다고 하자
연세대학교 석방 학생들끼리 간혹 비밀리에 만나고 다니는 것으로 우리가 다 알고 있는데
그 자리에서 본인이 다른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넌지시 암시하면서 진술할 것을 강요하고

또다시 5파운드 곡괭이 자루로 뭇매를 가하면서 잠 안재우기 고문을 가해 왔다.


 나는 견디다 못해 연세대 석방학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유언비어를 유포한 것으로 진술하게 되고

이에 따라 서창석, 김학민, 김영준 등도 영문도 모른채 보안사 서빙고 대공분실에 강제 연행되어

위와 같은 내용을 본인에게 들었다고 강제 진술하게 되었다.


1976년 5월 18일, 나는 아버님과 함께 보안사 서빙고 대공분실에서 수원경찰서로 이첩되어
다음 날인 5월 19일, 아버님은 석방되고 나만 대통령긴급조치9호 위반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수원교도소에 구속 수감되었다.


저들은 아버지와 아들을 함께 구속시킬만한 사안이 못 되었던지

아니면 처음부터 우리 집안을 쑥대밭 만들고
나만 구속시킬 각본과 계획에 따른 것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나에게는 아버님이 석방되어 천만다행이었다.


이때 아마도 우리 집안 대대로 뿐만 아니라
사돈의 팔촌까지 사상이 의심스럽다든가 불순한 꼬투리가 있었다면
그야말로 큰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을 게다.

 

오히려 아버지께서 일제 때 공무원이셨고
백부와 백모님께서 한국전쟁 중 공산당원에게 참살 당한 내력이 있어
이른바 고정 간첩이나 빨갱이로 내몰리지 않고 우리 가족을 방어할 수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1909년 경기도 평택시 가재동 선산 선영이 있는 마을에서
500여 년 동안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 온 장손 집안의 세째 아들로 태어나
서당 학습을 마치고 서정리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어서 16세 때 경성으로 상경하여
낮에는 직장 생활을 하고 밤에는 독학하는 등 주경야독으로
일제 치하에서 수백 대 1의 경쟁을 뚫고 보통고시에 합격했다.

 

다시 수십 대 1의 관문을 거쳐

외무성 소속으로 만주국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셨다.

 

머나먼 이역만리에서 같은 민족인 이주민과 독립 운동을 하던 분들과도
직간접적인 교류가 없을 수 없었던 아버님은
한창 욱일승천하던 일제가 결국은 패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판단하고
이미 1942년 사표를 제출한 뒤 사업을 하면서 정국을 관망하다가
1943년에 가족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 오셨다.

 

춘원 이광수나 정춘수 등등 다른 지도층 인사들은 일본의 권세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 믿고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성전을 위하여 학도병으로 지원해 나가라 부르짖고

꽃다운 여성들이 정신대로 보내질 때
아버님은 오히려 일제의 패망을 내다보고 일제의 권세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그로부터 3년 여 뒤 일본이 패망하고 우리 민족이 해방되자
세상은 일제 부역자를 처단하고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자는 소리가 높았다.

 

한편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일제에 부역을 했더라도
전문적이고 경험있는 관리들을 적극 참여시켜서 안정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면서

이승만 정부에서는 아버님께 새로 구성되는 정부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아버님은 어쨌거나 자신은 일제 치하에서 공무원 생활을 한 사람이니
새로 태어나는 독립 정부에 겸손할 수밖에 없다고 반성을 하시며 일절 공직을 맡지 않으셨다.
그리고는 평생을 조용히 살아 오셨다.


나의 어머니(1918년생)는 함흥에서 초대교회 저명한 목사님의 딸로 태어나 

교회 재단인 함흥 영생여고보와 함남도립 함흥의료원 간호부과를 졸업하고

원산도립병원 간호부과에서 근무하던 중 공무원이신 아버님과 결혼하셨다.


해방 후 경기도에서 시행한 조산원 자격 시험에 합격하고 오산 읍내에서 조산원을 개업하셨다.

보건소가 생기면서 화성군보건소 가족계획지도원과 모자보건원 등으로

18년 여 동안 공직에 근무하시고 당시 화성군 일대 교회와 사회에서 엘리트 여성으로 활동하셨다.


나의 형님(1934년생)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2년 재학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징집되고 유엔군 통역병으로 군 복무를 마친 후,

오산 미공군기지(Osan Air Base, K-55)에서 통역원과 오산면사무소 서기로 근무하셨다.


그리고 누이(1943년생)는 대한민국 육군 간호장교로 복무하면서

장래 간호감을 목표로 삼고 월남전에 2차례씩 참전하는 등으로 경력을 관리해 오고 있었다.


나를 포함해서 우리 다섯 식구는 지역에서 유지 집안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집안으로 단란하게 살아 왔다.

 

이념이나 사상적으로 집안에 의심스럽거나 불순한 꼬투리가 없는지 빌미를 잡으려고
이것저것 파헤치던 수사관은 그럴만한 단서를 잡지 못하자
아버지의 협조로 아들이 원만하게 관리되고 길들여지기를 바랬다.

 

하지만 나는 유신 헌법이 진정한 민주주의 헌법으로 바뀌는 날까지
나의 양심과 신념을 바꿀 수 없다고 했다.

 

아버지께서도 아들의 양심과 신념을 믿고
의로운 일로 받아들인다고 하셨다.

 

그동안 공무원이셨던 어머니는
마음 졸이시며 혼자서 가정을 지키셨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이 어디로 끌려갔는지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사단이 벌어지는 건지
전혀 알 길이 없으셨다. 

 

가뜩이나 불경스럽게 느껴지는 주변 분위기 때문에
알아볼 엄두조차 못 내시고 혼자서 구곡간장을 태우셨다.

 

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 같은 절망 가운데 계셨던 어머니께는
혜숙이야말로 하늘이 보내신 사자요

오로지 위로 받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대상이었다.

 

혜숙은 아예 오산 우리 집에서 서울까지
매일 통학을 해 가며 어머니 곁에 붙어 있었다. 

 

인권 단체와 종교 단체, 시민 사회 운동 단체에
사정을 알리고 협조를 구했다. 

 

변호사를 선임하고 알만한 분들을 찾아다니며
나와 아버지의 안위를 수소문했다. 

 

내가 재판을 받고 감옥을 사는 동안에도
혜숙은 내내 매일같이 나를 면회하면서 옥바라지를 했다. 

 

감옥에서도 요시찰로 분리되어 직계 가족만이 면회가 되던 시절에
혜숙은 담당 검사와 재판부를 찾아다니며
약혼녀라는 등록 절차를 만들어서 면회를 다녔다.

 

이즈음 혜숙의 헌신적이고 열성적인 옥바라지가
나와 우리 가족에 더할 나위 없는 격려와 위로가 되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장안의 대학과 재야 단체 사회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결국 나로 말미암아 어머니는 공무원에서 사표를 내게 되고

누나 역시 군 간호장교에서 전역하게 되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