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 / 21. 김지하의 양심선언

 


시인 김지하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75년 2월 15일
우리와 함께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그리고는 동아일보에 옥중수기 '고행 1974'라는 글을 연재했다.

김지하는 ‘고행-1974’에서 이렇게 썼다.


“잿빛 하늘 나직히 비 뿌리는 어느날,
누군가 가래끓는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더군요.
1사상 15방에 있던 나와 1사하 17방에 있던 하재완씨 사이에 통방이 시작되었죠.
… ‘말 마이소! 창자가 다 빠져나와 버리고 부서져 버리고 엉망진창입니다.
… 저그들도 나보고 정치문제니께로 쬐끔만 참아달라고 합디다’


… 출정하다가 인혁당 이수병씨를 만났습니다.
‘정말 창피하군요. 이거 나라 위해 아무 일도 해보지도 못한 채 끌려들어와서
슬기로운 학생운동 똥칠하는 데에 어거지 부역이나 하고 있으니….’


법정에서 경북대생 이강철이 분명하게
‘나는 인혁당의 인자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그것을 잘 안다고 시인하지 않는다면서
검사 입회하에 전기고문을 수차례나 받았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소위 인혁당이란 것이 조작극이며 고문으로 이루어지는
저들의 전가비도의 결과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죠.”



이렇듯 인혁당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여
김지하는 석방된 지 27일만에 다시 투옥되었다.

 

당시 중앙정보부에서는 김지하를 재구속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재판에 회부시켜
극형에 처할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중앙정보부 내의 험악한 분위기가
외부에까지 알려지면서
김지하가 결국은 살아 남지 못할 거라는 위기감으로
재야 민주진영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무언가 사생결단의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긴장감이
팽팽하게 흐르고 있었다.

 

당장에 긴급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재판을 지연시키면서 시간을 벌어보는 정도였다.

 

75년 5월 1차 공판에서 재판부에 대한 기피 신청을 낸 직후
'정의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글을 보낸다'라고
시작되는 김지하의 양심선언이 은밀히 나돌기 시작했다.


양심선언은 김지하의 문학적 상상력과
조영래의 탁월한 시대인식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유신시대의 기념비적 문건이다.


 ‘장일담’이라는 장엄한 민중신학적 작품구상처럼
김지하가 아니면 그려낼 수 없는 상상력이 펼쳐져 있는가 하면,
조영래가 아니면 쓸 수 없는 논리적 설득력이 읽는 이를 압도한다.


“총을 든 신부의 모습은 성스럽다.
… 떨리는 걸음으로 골고다로 가는 길을 찾아 헤매는 인간을 사랑하기 위하여
자신의 죄악까지도 각오하는, 그리하여 지옥 끝까지도 가려 하는
그 처절한 사랑의 모습이 눈물겹도록 성스럽게 느껴진다.

비겁한 비폭력이 잔인한 폭력과 통하듯, ‘
사랑의 폭력’은 ‘용기있는 비폭력’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 내가 지지하는 혁명은 이와 같은 철저한 비타협, 불복종의 비폭력주의와
고뇌스런 사랑의 폭력을 결합, 통일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다.”


75년 8월4일 김지하의 양심선언은 일본의 가톨릭정의평화협의회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어와 영어, 그리고 한글로 온 세계에 공표되었다.


선언문은 윤형중 신부를 방문한 외국인 선교사를 통해
미국의 시노트 신부에게 전달되고 그것이 다시 일본에 전달된 것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양심선언은 경북 왜관의 분도수도원 원장이었던
오도 하스 아빠스에 의해 일찍이 일본의 정의평화협의회에 안전하게 전해져 있었다.


그 운반에는 명동 가톨릭여학생관의 콜레트 누아르 수녀가 중요한 몫을 했고,
일본에서 양심선언의 번역과 발표를 주도한 것은 송영순(바오로·1930~2004) 선생이었다.


양심선언이 일본에서 발표된 바로 그날 저녁,
중정은 김지하는 물론 사방을 담당했던 교도관 등 상당수를 연행했다.


그들은 양심선언의 작성과 반출 경위를 집요하게 추궁했지만,
이미 맞추어 놓은 진술 이상을 얻어내지는 못했다.


그 소년수도 조사를 받았지만, 그는 다만 심부름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중정에서 돌아온 김지하는 얼마 전까지 문세광이 있던 독방에 갇혔다.


방의 좌우 몇 개는 비워졌고, 24시간 티브이 카메라로 감시받는 등
더 모진 시련을 겪어야 했다. 보복이었다.


양심선언이 발표되자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김지하를 구출하기 위한 구명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김지하의 사상과 신앙을 보증하기 위한 성명서에는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 요한 메츠와 위르겐 몰트만을 비롯해서
북미 유럽과 제3세계의 15개 나라 200여명의 신학자가 서명했으며
빌리 브란트를 비롯한 프랑스의 사르트르 등

세계적인 정치인·지식인들이 지지와 지원을 표명했다.


이처럼 김지하의 양심선언이  국제적인 운동으로 번져 나가자
중앙정보부는 김지하의 처형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중앙정보부에서는 기왕에 처형을 못시킬 바에야
국제 사회의 관심이 쏠려 있는 재판 절차를 거치는 것조차 거추장스러웠던지
민청학련 사건으로 선고받아 형집행정지 처분된 무기징역형을
재판도 없이 취소해 버렸다.

 

이로써 김지하는 기한도 없는 세월을
감옥에서 갇혀 있게 되었다.

 

그 당시 김지하의 양심선언은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정치 보복의 수단으로 악용하는 당국에 대항해서
자기자신에 대한 항변은 물론이거니와 앞으로 민주화 운동에 덧씌워질
'관제공산주의'의 굴레에 대한 예언과 함께
'반공'이라는 우상을 타파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 수감 중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가
다시 긴급조치 9호 등으로 재구속되는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불어 났다.

 

그 첫 번째 경우가 시인 김지하 시인이고
두 번째 경우가 장영달과 나병식과 나
그리고 민청학련 사건에서 여학생으로는 유일하게
실형이 확정된 서강대 출신 김 윤 등이다.

 

내가 긴급조치 9 호 위반으로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되었을 때
3.1 구국선언문 사건으로 구속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시인 김지하는 일반 수감자는 물론 교도관들까지도
일체 접근할 수 없도록 특별 감시를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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