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 / 19. 통닭구이



서대문 자취방은 동료 선후배들이
편안하게 모이는 아지트가 되어 갔다.


나병식의 소개로 서울대 오둘둘 사건을 주도하고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수배 중이던

신동수(사업) 선배와 훗날 나병식의 동서가 되는 장만철(영화감독)이 한동안 도피처로 삼았고
서울법대 최혁배는 장기간 기거하면서 석방된 후배들에게 일본어를 강습하기도 했다.


1975년 8월말 경 장만철에 대한 수배가 점점 좁혀 오면서 불안해지게 되자
나는 장준하 선생 빈소에서 만난 서울의대 서광태를 만나 장만철의 도피를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그 후 두 달 여 뒤 10월 말경
나는 느닷없이 남산 중앙정보부 6국으로 불법 연행되었다.


▲ 서울특별시 균형발전본부가 바로 중정 6국 학원수사 담당 건물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어 어안이 벙벙하게 있는데
수사관들은 내게 서광태를 아느냐 묻고 다짜고짜 고문을 하기 시작했다.


서광태와는 장준하 선생 빈소에서 우연히 만나 인사한 일과
그 후 이대입구 제과점에서 만나 서울대 수배자 장만철을 숨겨 주도록 부탁한 일 뿐이어서
사실대로 진술했다.


장만철과 나병식, 서광태가 있는 곳을 실토하란다.
그러면서 건물 지하실로 끌고 갔다.


▲ 서울 중구 예장동 4-1번지 옛 중앙정보부 6국(학원수사 담당)의 지하 취조실


그곳은 이이 1년 6개월 여 전 민청학련 사건 때

여러 날 들락이며 수사를 받던 곳이어서 큰 두려움 없이 끌려 갔다.


하지만 분위기는 완전 달랐다.
느닷없이 옷을 벗으라고 하더니 완전히 벗긴 상태에서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쪼그려 앉게 했다.


철봉을 무릅과 수갑을 채운 손목사이로 끼우고
철제 책상 두 개를 벌려 놓은 곳으로 내 몸을 들어 올려 놓았다.



나는 수갑을 채운 손목과 무릅 사이 철봉에
마치 통닭구이 모양으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게 되었다.


고문자들은 내 얼굴을 얇은 천으로 뒤덥고
물이 들어있는 주전자를 얼굴 앞으로 들어 올렸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하실 어머니께 '엄마' 하고 매달리고도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식된 도리로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잊지 못할 한을 안겨드리고
먼저 죽어가는 불효를 저지르게 되는 죄송스러움이 떠올라
어머니를 위해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 저로 하여금 협박과 공포
이 모진 고문 앞에서 육체적 고통으로 떨지 않도록 지켜주옵소서.
저들에게 빌거나 애원하지 않도록 지켜주옵소서.
그럴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제 영혼을 편안히 거두어 주옵소서.
나로 인해 고통을 당하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누이의 마음을
주님께서 특별히 위로해 주옵소서......"


마음이 좀 차분해졌다.
물고문을 당하기 위해 수건을 얼굴에 씌우는 순간
나는 형장에 끌려가 용수를 머리에 씌우고
밧줄을 목에 감는 사형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공포를 이기는 방법은 빨리 포기하고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리라.

어짜피 마셔야 될 물이라면 내 의지로 마셔버려야지
하는 생각에 나는 물을 마구 들이키기 시작했다.


숨이 막히고 목이 막혀 헉헉대면서
나는 죽기로 작정한 듯 마구 삼켜댔던 것이다.


"이 새끼, 아주 독종이네. 사실대로 불 거야 안 불거야?
너 같은 놈 뒈진다고 우리가 눈 하나 깜짝할 줄 알아? 임마!"


"어, 이 새끼 보게. 뒈지기로 작정했구먼. 뒈져라, 뒈져...
벗어 놓은 네 옷 갖다가 휴전선 철조망에 걸어 놓구
목메어 보고 싶던 아버지 수령 김일성이 만나러
철조망 넘어가다 들켜서 총아 맞아 뒈진 걸로 하면
끝나버리는 거얌마~~~!”


"너, 솔직하게 다 털어놔...
너 언제 평양 갔다 왔어? 너 평양 가서 누구 만났엄마~~~!...
김일성이 언제 만나고 왔어?...
다 털어놔야 살지, 너 안 그러면 여기서 죽엄마~~~!"


"야, 나병식이 지금 어디 있는 줄 아냐?
그 놈들 지금 평양 김일성이 한테 갔엄마...
얌마! 너 나병식이 한테 무슨 지령 받았어?
너한테 지령한 사람이 나병식 말고 또 누구야! 너 안 불면 여기서 되져 임마!"


"야! 이 빨갱이 새끼야...
평양에 언제 갔다 왔는지 말 안해?
너 상부선이 누구야? 누구냔 말얌마!"


나는 정신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래, 잘 있어라. 늑대와 사자라도 네 놈들보다는 낫겠다.
야수 앞에서 무릎 꿇고 빈다고 빈속에 아량을 바라겠냐.
나 먼저 그냥 간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는지...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멀리서 희미하게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다.


열 살 때 쯤 오산천을 오리 쯤 거슬러 올라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곳
애방웅덩이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여자애들이
노래하는 소리,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려 온다.


신윤복의 풍속화에 나오는 그림에서처럼
살금살금 다가가 몰래 얼굴을 내밀고 보니까
우리 반 여자애들 너댓 명이
벌거벗은 채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되돌아 와서 얼른 옷을 주워 입고는
다시 살금살금 다가가 나무꾼과 선녀에서처럼
여자애들이 벗어 놓은 옷을 몰래 집어 들고 달아나
모래 속에 파묻어 숨겨 놓는다.


장면이 바뀌면서 그 중의 한 애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 여자애가
나만큼 나이 먹은 성숙한 처녀가 되어
큰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순간 나는 큰 도둑질을 하다 들켜버린 사람처럼
가슴이 덜컹하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


갑자기 물벼락이 쏟아지더니
모든 장면이 멈추고 아스라하게 정신이 들어오면서
컴컴한 지하 고문실, 축축한 물바닥, 널려 버려진 물수건,
철봉대 등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 온다.


'아, 내가 왜 여기에 있나...
나쁜 장난치다가 들켜서 가슴이 철렁했어도
그때 거기가 좋았는데......'


나는 순간 몸서리를 쳤다.
그토록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필이면 여자 동창애들의
벌거벗은 모습이 떠오르는 건 도대체 무슨 조화련가?...


정신이 들고 나기를 그렇게 몇 번 더 반복하고 나서
나는 다시 취조실로 끌려갔다.


무슨 영문인지 나병식과 서광태에 대해서 계속 캐물던 수사관들은

나를 당장 구속해야 하는데 지금은 나병식을 찾는게 무엇보다도 급하게 되어

일단 석방할테니 나가서 나병식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서 알아가지고

자기들에게 꼭 알려줘야 한다면서 이틀만에 나를 석방했다.


저들은 느닺없이 고문하고 협박하면서 

소위 끄나풀이나 밀대 역할을 내게 맡긴 셈이다.


나는 기독교회관과 목요기도회 모임 등을 다니면서

나병식이 어디에 있는지 묻고 중정에서 나병식을 다급하게 찾고 있다고 알렸다.

나도 나병식을 찾아서 중정에 알려줘야 한다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


저들이 내게 비밀스럽게 하라거나 은밀하게 하라는

주의를 주지 않아 참으로 다행이라 여기면서...


그러자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

이번에는 보안사 서빙고 대공분실에서 나를 연행해 갔다.


거기에서는 내게 신사적으로 대해 주는 척했다.

나병식과 서광태에 대해서 진술하는데 별로 궁금한게 없다는 분위기다.


중앙정보부에서 내게 무엇을 묻고 나는 어떻게 진술했는가를 묻는다.

그러더니 나병식은 중정으로 가면 고생만 하고 신변도 위험해진다고 한다.

우리가 나병식의 신변을 보호해 줄테니까 꼭 보안사로 자수하라고 전해달라는 거다.


그제서야 나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무언가 큰 사건을 놓고 중앙정보부와 보안사가

서로 박터지게 경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했다.


▲ 옛 중앙정보부 6국(학원수사 담당)의 지하 취조실 벽을 2018. 8월 16일 오후 공사 관계자들이 해체해 크레인으로 들어 옮기고 있다.

서울시는 이 공간을 ‘중앙정보부 6국’을 의미하는 ‘6’과 고문과 용공조작 등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의 어두운 역사를

기억하자는 뜻을 담아 ‘기억6’으로 이름짓고 내년 8월까지 공사를 마칠 계획이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 중정 6국 자리에 선 최민화씨 - 남은주 기자


1975년 11월 29일 박정권은 소위 서울의대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여기에 관련된 학생은 모두 14명이다.


서울의대 : 강종헌 서광태 전성환 황혜원 황승주 진관보 정필현 이인수 송군식 장우환 전영훈 이근우

서울문리대 : 나병식

고려대 : 박종열


박 정권은 이들에게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워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훼손하고
대국민 반공교육용으로 이용하려 했다.


변호사들도 긴급조치 9호 위반죄는 인정하지만, 간첩죄는 무죄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 관계자 14명 중 강종헌 서광태 박종열만 대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같은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서광태는 8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10 26 이후 석방되었고,
이듬해 3월 복교하여 현재 의사로 재직중이다.


당시 이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고문이 자행됐는지는 서광태의 상고이유서에 잘 나타나 있다.

정신병동에 입원하기까지 이르게 된 서광태에 대한 고문의 실상을 살펴본다.


“75년 10월 29일(토) 오전 9시 10분,
10여분 늦게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가방을 들고 강의실로 들어가려는 찰나에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는 수사관님들을 따라 나서서
서울역 부근의 모처 지하실에 도착 즉시,
무수한 폭행에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고,
이를 씻은 핏물을 마시우는 등의 무시무시한 공포분위기와,
아직도 상처가 남아있지만, 무릎을 꿇려 앉히고는
그 아래 박달나무 곤봉같은 나무를 집어넣고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번갈아 가며
워카발로 허벅지 위를 짓밟는 통에 기절하였음은 물론,
정강이 아래는 피투성이가 되고 나무마저 자근동 부러졌습니다.


옆방에서도 찢어질 것 같은 비명소리와 함께
고문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본인도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끼워 누르는 등의
무수한 육체적 고통이 가해졌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참기 어려웠던 것은,
무수히 많은 수사관님들이 차례로 들어와서 감시하는 통에
계속해서 한 주일 이상을 거의 자지 못한 데서 오는 불면의 고통과,
‘면도칼로 살껍데기를 벗기겠다. 빨갱이는 삼족을 멸하니 너하나 쯤이야…’
라는 그 지하실의 전율할만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말들이었습니다.


…(중략)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환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완전히 죽음의 살인극에 휘말린 것입니다.


…이윽고 자고 싶어도 잘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뭐 너도 이북에 갔다 왔어…’ 운운의 미칠 소리를 해대며
며칠을 계속해서 밤이면 고문의 비명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디서 가만 있지, 얼마나 공이 많이 들었는데.
야! 고집부리지 말고 타협하자….’

단식으로 버티던 체력도 한계에 이르고, …기억이 없습니다.
오직 안가겠다고 반항하며 어디론가 개처럼 끌려간 기억뿐입니다.


얼마 후 병원입니다.
정신이 들락말락 하면, 무슨 신문에 북괴라고 쓴 옆에다
별표(인공기 표식 - 기자 주)를 하여
다시 간첩이라는 망상에 빠지게끔 세뇌하였습니다.

백의의 천사님이 오셔서 부릅니다.
조용 조용 말씀하십니다.


‘…(평범한 이야기가 계속됩니다)…(느닷없이) 자수하셔요….’

육감적입니다. 전혀 기억이 희미합니다.
상처도 있고, 아직도 생생한 담뱃불로 지진 자국을
병원에서 얻은 것 같은데,
아픔도, 슬픔도, 고통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간첩이 된 것입니다.


“그렇지 자수하자. 내가 이북에 갔다 왔나 …”

…(중략) “강종헌이 알지 ”
“잘 모릅니다”
“야, 이새끼야 , 왜 몰라!”
“….”

무수한 폭행에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하고 화장실에 가니,
또 다른 나의 벌건 선혈이 뚝뚝 바케스째 기다립니다.
얼핏 거울을 보니, 피에 뜯긴 해골이 짓이겨져 있습니다.
수직으로 거꾸로 세워서 팔굽혀 펴기를 시킵니다.
못먹고 자도 못잔 해골에 피가 몰려 쓰러지면,
기다리는 것은 즐거운 발길질입니다.


…(중략) 그리고 옆방에서 교포학생이 계속 고문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독하던 서투른 한국말의 고문소리도 점점 낮아집니다.


“이 새끼 이북에 갔다 왔지 ”
“아닙니다”
“….”


항거하던 어린 참새도 이젠 날갯죽지가 쭉쭉 찢어지고,
사지에 넣어 비틀던 지렛대가 부러졌나 봅니다.

바로 이곳이 독재의 금과보도로구나.
바로 이곳이 생사람 잡아 산송장 만드는 조작극의 현장이구나.(후략)”


강종헌 간첩조작사건과 재심


1970~80년대 발생한 ‘재일교포유학생사건’ 피해자들은 대체로 재일교포 2세들로,
모국에 유학을 와서 재외국민교육원(연구소)에서 한국어 연수를 받고
대학에 입학하여 재학 중 중앙정보부 또는 보안사에 의해 연행되었다.


피해자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고교 또는 대학 재학 시에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기 위해

동료 또는 선배를 통해 조선문화연구회, 한국학생동맹,

재일조선인유학생동맹 등에서 활동한 바가 있었는데,
이것이 한국의 수사기관에 의해 반국가단체구성원에 의한 지령 및
공작금 수수, 기밀 탐지 등 간첩 혐의로 되어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처벌을 받았다.


강종헌(1951년생, 당시 24세)은 일본 나라겐 야마도 다카다시 하나조노죠 726번지에서 태어나
오사카 부립 덴노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1년 4월 서울대학교 부설 재외국민교육연구소를 수학한 다음
1972년 3월 서울대학교 의예과에 입학했다.


의대 재학 중 ‘사회의학연구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본과 2학년 재학 중 1975년 11월 28일 보안사 수사관에 의해 연행되어
1976년 2월 23일 국가보안법 등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1976년 7월 7일 서울 형사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11월 16일 서울고등법원에서 항소 기각,
1977년 3월 15일 대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었다.


그 후 강종헌은 복역 중이던 1982년 3월 2일
전두환 대통령 취임 1주년에 무기로 감형되었다가
1984년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고,
1988년 2월 26일 잔여 형 반감으로 감형되었다가
1988년 12월 20일 가석방되었다.


가석방된 후에는 일본으로 돌아가 한국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한통련, 범민련 등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활동을
꾸준히 전개했고 와세대 대학 객원교수로 강의했다.


2010년 6월 30일 진실화해위원회가
“재일동포 강종헌 간첩 조작 의혹 사건”에 대해 재심권고 결정을 내렸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수사 기록, 관련 기록, 관련자 진술을 종합해보면,
강종헌이 장기간 보안사에서 불법 구금되어 수사 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보안사 수사관들에게 상당한 강도의 가혹 행위를 당하였음이 인정된다.”고 결론짓고,

“국가는 진실규명 대상자 강종헌에게 불법 구금과 가혹 행위를 가한 사실에 대하여
동인에게 사과하고,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재심을 진행하는 등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강종헌은 즉시 법원에 재심 신청을 하여
2011년 10월 12일 재심 개시 결정되었다.


2013년 1월 24일 서울고등법원 재판부는
"당시 민간인을 상대로 수사권이 없는 육군 보안사령부 소속 수사관들이
경찰 단계의 수사를 담당한 것은 불법 수사에 해당한다."며
"보안사 소속 수사관들이 수집한 증거는 모두 위법 증거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수사 기관이 수집한 증거의 전부 또는 대부분이
고문·가혹 행위 등 위법적으로 수집된 것이어서
증거 능력이 없다"고 판시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은 2015년 8월 21일
강종헌에 대해 재심 무죄를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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