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 / 16. 의심 나는 자여 다 내게로 오라



한편 1974년 7월 구속 100일만에 먼저 석방된 혜숙은
함께 행동했던 동료들이 대부분 감옥에 남아 있는 사정이어서
무척이나 외로웠던 모양이다. 

 

73년 가을, 내가 군에서 제대하고 연세대에 복학한 후
기독학생회총연맹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알고 지냈던 혜숙은
나를 형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내게 자주 '형, 형'하면서 말을 붙여 왔다.
운동과 인생에 대해서 토론도 하고 그녀의 짝사랑 얘기도 들어주는 등
우리는 자주 만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산에서 서울로 유학하고 있었지만 어머니와 누이의 헌신적 지원으로
용돈이 그리 궁하지 않게 생활했던 나는 후배들의 상담자역을 맡기도 했다.  

 

나는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결혼을 하지 말아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혜숙은 조금 특이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를 남자로 생각하는 듯했다.

 

후배로서가 아니라 여자로서 따라다니는 눈치가 보이니까
나는 점점 혜숙이 부담스러워졌다. 

 

나는 결혼을 하거나 가정을 가지게 되면
저 어마어마한 독재 권력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함께 석방되자마자 월정사로 입산한 여익구처럼
스님이 되는 길로 가면 어떨까 생각했고
신부가 되거나 결혼할 수 없는 조건으로 몰고 가야만
나를 버텨 낼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고민했다.

 

나는 교회에서 자랐지만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으면 자식에 대한 애착과 의무 때문에
내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혼을 하게 되면 가정을 꾸려야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고
또 아이들의 성장과 교육을 책임져야 하는데
그러려면 아무래도 운동을 포기해야 되는 게 아닌가 여겨진 것이다.

 

'나는 사유에 대한 애착을 갖지 않아야 한다. 
결혼을 하지 말아야 된다. 
자식을 갖지 말아야 한다. 
거기에 매몰되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마음 속으로 다짐하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스님이나 신부의 길로 들어서면 어떨까?


그래야만 가정과 직업에 얽매이지 않고 이 땅에 민주화를 이룰 때까지
평생토록 운동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하지만 혜숙은 집안 사정도 어렵고 사춘기 짝사랑의 실패로
정신적 지주가 없어서 방황하던 시절이라
오히려 종교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독신을 강조하는 내게 정신적인 기대를 한 것 같다.

 

나는 후배의 인생 상담을 받아주는 마음으로만
그녀를 만나려 했고 그 만남도 일체 비밀에 부치도록 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출감하였으나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아무런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없었던 나는
장래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하느님, 이 험난한 세상 속에 휩쓸리거나 타락하지 않고
의로운 뜻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저를 지켜주옵소서.
저 자신을 위해서 살기보다는
이 땅의 민주화와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살도록 지켜주옵소서.
필요하다면 결혼과 가정을 갖지 않도록 저를 인도해 주옵소서. 
그러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신부나 혹은
나 자신을 지키고 변하지 않을 수 있는 길로 저를 인도해 주옵소서... 
만약 저에게 결혼과 가정을 가지고도 감당할 수 있는 바른 길이 있다면
그 길로 인도해 주셔도 좋습니다..."

 

요즘은 이렇게 절절한 기도를 하기 힘들지만
그때는 매우 구체적이고 섬세한 제목으로 기도를 했다. 

 

그리고 나의 이런 다짐은 조금씩 구체화되고 있었다. 
나는 되도록 결혼을 안 하기로 했다.

 

스님보다는 신학을 전공하고 종교에 애착을 가진만큼
신부가 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 갔다. 

 

평생을 박 정권 타도를 위해 바치려면 결혼은 타협이라고 생각해서
그녀에게도 자신있게 내가 가기로 다짐한 방향을 이야기 했다.

 

혜숙은 이런 생각을 가진 나를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자기의 마음을 받아들여 주지 않자 약이 올라했다.

 

나중에 고백하기를 내가 다른 사람과는 달리
자기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다 털어놓고 싶을 정도로
포근하게 기대면서 의지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늘 선을 긋고
혜숙이 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때때로 나는 내가 그어놓은 선을
마음 속에서부터 허물어버리고 싶은 갈등에 빠지기도 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나를 방어하기 위해 스스로 다짐을 하곤 했다.

 

"혜숙이는 후배다!"

 

나를 형이라고 부르는 후배가 여자로 보이는 순간부터
내 자신이 증오스러워졌다.

 

손목을 잡아 보고 싶고 껴 앉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참으로 내 자신이 혐오스러워져 견딜 수 없었다.

 

여자에 대한 욕망으로 득실거리는 마음이 속속들이 추악한 모습으로
내 얼굴에 나타나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견디다 못 해 이런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계속 "혜숙이는 후배다!" 하고 다짐하면서 당당하게 지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곤 혜숙에게 '난 결혼 안하겠다'고 강조하고 공언했다.

 혜숙을 만나지 않으려고 한동안 피해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당당함이라기보다는 엄밀히 말해서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콤플렉스에 의한 것이었고
성적 본능을 자제하려는 사춘기적 고민에서 나오는 행동이었다.

 

나의 본능은 너무나도 혜숙에게 끌리고 있었고
한편으로 그녀에 대한 콤플렉스가 일정하게 그녀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혜숙은 속상해 하고 약이 올라 하면서도
아랑곳없이 계속 끈질기게 내 주위를 맴돌았다.


강제 연행 미인계 사건은 서울 지역 대학가에 조용히 퍼져 나갔다.
혜숙의 소개로 이화여대 학생회 임원들과 모임을 갖게 되었는데
한 여학생 간부가 실실 웃으면서 내게 야릇한 질문을 던졌다.

그런 일이 정말 벌어졌었느냐고 묻는다.
그런데도 정말로 아무 일이 없었느냐는 거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면서
요즈음 이화여대 캠퍼스에 무슨 소문이 나도는지 아느냐고 한다.
그 다음 시리즈가 있는데 한번 알아 맞춰 보란다.


나는 딱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저 허허 웃으며 무안한 분위기를 때우려 했다.
하지만 여학생들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태세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내가 잘 모르겠다고 궁여지책으로 대답하자
한 여학생이 나서서 이대에 소문이 파다한데 무슨 소문이냐 하면...

신문에 난 것이 사실이라면...
'아무개는 고자다!' 라는 거다.

그러자 모인 사람들 모두가
함께 떠나갈 듯 소리지르며 웃음바다를 이루었다.

나는 무안하고 멋적은 표정으로 따라 웃기는 했지만
느닷없는 분위기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안절부절하다가
얼굴이 빨개져서 홍당무처럼 되어버렸다.

요즈음 같으면 여학생들이 남학생 하나를 놓고서
오히려 집단적으로 성희롱을 가하는 꼴이었다.

나는 이 난처한 위기를 어떻게 넘기나 하고 궁리했다.
그런데 갑자기 성경 구절 한 대목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웃음소리가 조용하게 잦아들면서
나는 표정을 조금 엄숙하게 가다듬고는 대답했다.

"그 다음 시리즈를 내가 대답으로 내 놓아야겠는데...
그렇다면... 의심 나는 자여 다 내게로 오라!"

일행은 순식간에 박장대소하고 배꼽을 쥐어가며
한동안 소란이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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