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가정을 지키시는 어머니



어머니의 노래는 참으로 맑고 고왔다.

내심으로는 음악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완고한 집안 분위기에 엄두를 못냈다고 하셨다.


나는 어렸을 적에 어머니의 등에 업혀

어머니가 부르시는 브람스의 자장가와 슈베르트의 자장가를 들으면서 잠들고 깨고 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 원산도립병원에 근무할 때 기타 치며 노래하는 어머니 모습.


어머니는 앉으나 서나, 방에서 부엌에서, 시시때때로 노래 부르기를 즐기셨다.

직장에서, 교회에서, 연수교육장에서, 수학여행 등 각종 모임에서는 어머니께 으례 노래 부르시도록 요청했고

어머니 노래는 어디서나, 어느 모임에서나 가장 인기있고 단연 돋보이는 행사였다.


▲ 축음기를 들으시는 어머니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창립하고 이어서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발족을 위해 동분서주할 때 

황석영 김종철 김민기 채희완 등이 두어 차례 우리집에서 모임을 갖고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나는 어머니께 노래를 청했다.

어머니는 흘러간 옛노래부터 최근에 유행하는 노래까지 거의 전천후로 알고 계셨다.


그날은 아마도 모인 분들의 취향에 따라 특별히 독립운동가를 부탁드렸던 것 같다.

어머니는 독립운동을 하는 분들이 고향을 그리며 하염없이 불렀다는

사향가(思鄕歌)를 애달프게 부르셨다.


1. 내 고향을 이별하고 타관에 나와
적적한 밤 홀로 앉아서 생각을 하니
답답한 마음 아 ㅡ 누가 위로해


2. 청천으로 날아가는 저 기럭떼야
너 가는 길 그리 바쁘냐 이내 회포를
우리 부모께 아 ㅡ 전해 주려마


3. 우리 집을 떠나 올 때 내 어머님이
문 앞에 나와 눈물 흘리며 잘 다녀 오라
하시던 말씀 아 ㅡ 귀에 쟁쟁타

 

4. 우리 집서 멀지 않아 좀 더 나가면
시내물이 졸졸 흐르고 내 어린 동생
놀던 그 형상 아 ㅡ 그리웁고나

 

5. 무릇 덥고 괴로웁던 긴 여름 날은
시원하게 다 지나가고 가을 아침에
부는 찬바람 아 ㅡ 적막하구나


참석한 이들은 감동과 충격에 젖어 말을 잊지 못했다.

김민기는 알고 계신 독립운동가를 더 불러달라고 간청했다.

어머니는 알고 있는 독립군가를 계속 부르셨다.


▲ 교회 행사에서 복음성가를 부르시는 어머니


어머니는 아들 둘에 딸 셋인 집안에서

하나밖에 없는 오라버니가 어린이 동요를 작사 작곡하여 퍼트린 죄로 체포되고 구속 수감되었다가

8.15 해방으로 석방되었지만 여독을 풀 겨를도 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이 모임이 있고부터 노래분과 모임을 준비하는 이들이

우리집에 들러 어머니 노래를 채록해 가기도 했다.


1985년 5월 18일 민중문화운동협의회에서는 흥사단 대강당에서 개최하는 5.18광주민중항쟁 추모집회에

어머니를 초청하여 독립운동가 노래를 공연하시도록 했다. 


당시 살벌하고 긴장된 분위기에서 어머니는 일제 치하 독립운동가 4곡을

실수없이 잘 부르셨고 집회도 성황리에 무사히 진행되고 마무리되었다.

(우리는 하나, 3부 42.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참조)


▲ 부모님 결혼식 사진


어머니는 1940년 만주에서 인쇄사업을 크게 하시던 아버님(최내길 崔乃吉)과 결혼 후

1943년 아버님 고향인 경기도 평택으로 이주하고 얼마후 장녀 최다미(崔多美)를 출산했다.


1949년 나를 낳으시고 1950년 한국전쟁 때는

화성군 동탄면 신리 큰댁으로 피난해서 2년 여를 계셨다.


▲ 1954년 경기도 조산원 자격시험 합격증서.


휴전이 되고 1954년 어머니는 경기도에시 실시한 조산원 자격시험에 합격하시고

1955년 경기도 오산에서 조산원 개업하셨다.


1964년 전국에 군 단위로 보건소가 생기고부터 1976년까지  

경기도 화성군보건소에서 가족계획지도원으로 근무하셨다.


재직 중에 경기도 전체를 대표해서 보건사회부 장관 표창장을 비롯

국가 상장, 표창장 등을 다수 수여받으셨다.


▲ 1971년 보건사회부장관 표창장


아이를 낳을 때는 버~얼건 대낮을 놔두고 왜 그리도 해 떨어진 이후부터
다음날 해 뜰 무렵이 대부분이던지......

어머니는 출퇴근과 밤샘 왕진을 거듭하며 그야말로 밤낮으로 눈코뜰새 없이 바쁜 생활이셨다.
어머니는 외아들인 내가 서울로 유학가서 학생 운동을 하고 민주화 운동하는 것을 그리 탐탁치 않게 여기셨다.

내가 구속될 때마다 어머니는 하시는 일에 더 열심히 몰두하셨다.
나를 면회다니고 법정에 쫓아 다니고 모임과 집회에 찾아 다니고 하는 일들을
어머니는 하실 겨를도 없었거니와 아예 당신께서 하실 역할도 아니라고 여기셨다.

오히려 이 사회에서 독립해 살아가기가 얼마나 치열하고 힘들고 어려운 일인데
생존경쟁에서 살아 남기도 바쁜 세상에 학생 운동이니 민주화 운동이니 할 새가 어디 있느냐는 생각이시다.

친정 오라버니가 일제 치하에서 독립 운동을 하시고

아버님도 초대교회 고명하신 목사님으로 지조를 지켜 오신 터라
그저 막무가내로 말리고 반대하진 않으셨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아까울 것 없을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그런 길로 들어서고
그런 과정에서 온갖 험한 꼴을 당하는 것을 내심 못마땅해 하셨다.

내가 굳이 정의로운 신념을 가지고 이런 일을 계속한다면 하느님의 뜻이라 여기시고
어머니라도 더 열심히 더 바쁘게 일을 하셔야 가정을 지키고 나를 지켜 줄 수 있다는 생각이시다.

당신께서 흔들리지 않고 건강하게 버텨 내셔야
결국 나를 이 험한 세상에서 지켜 낼 수 있다는 신념이시다.


하지만 내가 민청학련과 긴급조치9호 위반 등으로 구속되자

어머니는 1976년 강요에 의해 사표를 쓰고 공직에서 퇴직해야만 했다.


당시 어머니는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을만큼 실망이 크셨고 오랜동안 실의에 빠지셨다.

나 또한 어머니에 대한 불효를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야 했다.


어머니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육군 간호장교로 복무하면서

장래 간호감을 목표로 삼고 월남전에 2차례씩 참전하는 등으로 경력을 관리해 오고 있던

나의 누이(최다미 崔多美, 1943년생) 또한 나로인해 사표를 쓰고 전역해야 했다.


1960년대부터 어머니는 오산감리교회 권사, 여선교회 회장, 수원서지방회 여선교회 회장 등으로 봉직하고
2000 ~ 2019년 현재 새문안교회 명예권사로 봉직하고 계시다.


오랜 만에 뵙는 어머니의 모습에 수심이 가득하신 듯하다.
지난 세 차례 출감했을 적에 뵙던 모습이 아닌 듯 느껴졌다.

그전에는 단정하고 밝은 표정으로 반갑고 다정하게 나를 껴안으면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며 내 등을 두드려 주셨다.

그런데 지금 어머니는 오히려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시는 게 아닌가!
이런 적 없었는데.....

"고생 많았지?...... 몸은 괜찮아?......
어디 불편한데 없고?......"

"괜찮아요 어머니...... 우선 절부터 받으세요......"

눈시울이 앞을 가린다.
어머니의 표정이 참으로 이런 적 없으셨다.

"애들은요???....."

낯선 사람을 만나 선문답 하듯 밑도끝도 없는 말을 여쭙고
오랜 만에 보는 집안 분위기를 어색하게 둘러 보았다.

"고운이랑 중수는 학교 갔고......
에미가 입원해 있어서......
막내는 교회 김순자 집사가 데리고 있겠다고 해서
거기 가 있고... 에미 얘기는 들었어???......"

나는 어머니의 눈길을 마주할 수가 없어
고개를 외면하고 떨군 채 대답했다.

"예....."

어머니는 마중 나갔던 동료들이 으레 집으로 몰려 올 줄 아시고
아침 식사를 마련해 놓으셨단다.

하지만 친구들과 선후배 동료들 모두 대전에서 해장을 한 터라서
나와 함께 아내 혜숙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갈 일을 서둘렀다.



 

11. 혜숙을 품에 안고


온 몸이 붕대로 칭칭 감겨 있는 건가...
핏기 바랜 얼굴에 초점 잃은 눈망울로 허공을 두리번거리는 표정인가......
흐트러진 머리칼에 산소마스크를 입에 달고 눈을 감은 모습인가......

오랜 만에 달려 보는 서울의 풍경...
가로수며 빌딩이며 거리의 사람들하며 완연한 봄기운으로 약동하는 모습이었지만
나는 막막하고 절망어린 상념에 잡혀 정신이 혼미해 갔다.
그러다가도 나는 소스라치면서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댔다.

아니지... 아니야!!! 그럴 수 없어!!!......

차는 어느새 이대입구에서 서소문과 시청앞을 지나 청계고가를 달리고 있다.
머~얼리 병원 건물이 보인다.


▲  한양대학교 병원


높게 치솟아 오른 한양대학교 병원 건물 어디에선가
내 아내 혜숙이 창문에서 밝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내가 타고 가는 차를 알아 보고 나를 알아보고 반가움에 겨워 기다릴 것 같았다.
빨리 오라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빨리 갈께... 조금만 기다려... 이제 다 와 가니까......'

나는 어느새 아내 혜숙과 1 년 6 개월 여 만에 아무런 제약과 감시 없이 자유롭게 만나
손도 잡아 보고 꼭 껴앉고 입술도 맞추고 할 생각에

가슴이 들뜨고 설레는 기분으로 바뀌고 있다.

절망과 죽음의 공포에서 재회의 기쁨과 희망의 환희로
나는 극과 극을 천방지축으로 왔다갔다 했다.

한양대학교 병원 입원실......
눈에 띄게 깨끗한 환자복을 입은 혜숙이 나를 기다리며 출입구만 바라보고 있었던 듯

문을 열자마자 "왔구나!!!" 하면서
두 손을 번쩍 치켜 들고 침대 위에서 내려와 밝고 화~안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 나 많이 기다렸지???... 마지막 면회도 못 가고, 오늘도 못 가고...
웬 일인가 걱정되고 마아~니 불안했지???...... 몸은 괜찮아???......"

혜숙은 무엇보다도 나를 감옥에 두고 마지막 면회를 지나친 일과
출감하는 마중도 못 한 것을 오로지 미안해 했다.
내가 먼저 염려하고 안부를 물을 사이도 없이......

나는 혜숙을 침대에 눕히고 꼬~~~옥 껴안았다.
혜숙의 몸은 날개를 달고 공중에 떠 있는 듯 아무런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착한 사람......'

나는 한없이 착잡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혜숙의 등을 두드렸다.
그러면 그렇지... 혜숙은 핏기 바랜 얼굴도 아니고 초점 잃은 눈망울도 아니다!!!......

흐트러진 머리칼도 아니고 꼼짝없이 침대에 누어 있는 모습도 아니다!!!......
혜숙은 시종 반가움에 겨워 입가에 밝은 웃음을 달고 있지 않는가???......
얼굴색도 뽀얀데다가 나처럼 들떠 있고 홍조끼까지 돌고 있지 않는가???......

혜숙은 눈망울도 똘망똘망했다.
여러날 입원해서인지 몸이 약간 야윈 것 같았다.



 

12. 아내를 지킨 사람들


그동안 혜숙의 병 간호는 구속되기 전까지 내가 근무하던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직원들과
동료들, 교인들 그리고 처제가 맡아 왔단다.

처제는 한양대 병원 간호사...
혜숙은 마침 동생이 근무하는 병동에 입원해 있다.

미처 대전까지 마중하지 못한 선후배 동료들이
삼삼오오 입원실로 몰려 온다.

손위 처남은 고등학교 선생님...
학교 수업을 조정해서 양해 구하고 오후 2 시 경 도착했다.

내가 해야만 했을 절차적 법적 보호자 역할은 처남과 처제가 맡아 왔다.
처남과 처제 나를 불러 세우더니 우선 먼저 조용히 할 얘기가 있단다.
처제가 1인용 빈 병실로 오라버니와 나를 안내한다.

나보다 한 살 연하인 손위 처남 매우 심각하고 어두운 표정이다.
순간 내 머리 속은 마치 내가 만든 스위시 영상 작품처럼

스위시 영상 작품에서처럼 자~알 정리 정돈되고 정열된 시 문장이
한줄한줄 비~잉빙 돌고 뒤집어 지고, 글자 하나하나로 쪼개지고 흩어지고
낙엽처럼 눈송이처럼 우수수 떨어지고 휘날리 듯

1 년 6 개월 여 만에 만나고 보듬는 재회의 기쁨과 환희
그렇게 그렇게 비~잉빙 돌고 뒤집어 지고
뇌세포 마디마디 억만의 조각으로 쪼개 지고 떨어져 나가고

또다시 지옥같은 절망과 죽음의 공포가
뇌리에 박히면서 몸서리쳐 온다.

지금 마~악 감옥에서 빠져 나와 경황없고 충격이 클 줄 알겠지만
어차피 매제가 1 차 보호자이니만큼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대처하고 준비해야 할 것 아니냐며 처남은 내게 말문을 튼다.

약국을 하고 있던 아내는 얼굴빛이 꺼~어먹게 변하고
온 몸으로 시시각각 통증이 몰려 왔단다.

그럴 때마다 진통제를 집어 먹고 온 몸에 파스를 덕지덕지 붙이고
약국에 딸린 방에서 떼굴떼굴 구르고 링거 주사를 맞고 했단다.

처남과 처제가 빨리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 보자 했지만
아내 혜숙은 얼마 안 있으면 내가 감옥에서 나올텐데 그때까지 기다리겠노라고
석방되면 같이 가겠노라고 한사코 거절했단다.

본래 위궤양이 있어 그런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단다.

혜숙은 또 시어머니 칠순 잔치를 앞두고 준비해야 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했단다.
그러다가 쓰러져 어느날 혜숙이 일어 나지 못했단다.

처남의 경기중 경기고 절친한 친구 중에
지역 인근 일대에서 제법 소문날 정도로 유명하게 내과병원을 운영하는 이가 있었다.

수유리 전철역 근처 '육동휘 내과'......
처남과 처제는 혜숙을 우선 그 병원으로 데려 갔단다.

두어 해 전에도 혜숙은 비슷한 증세로 집 가까운 병원에서 내시경 검사를 받은 적 있다.
그때 혜숙은 내시경 검사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던지
다시는 이런 검사 안 받겠다고 내게 여러번 얘기했었다.

그 당시 검사 결과로 담당 의사는 약국을 하면서 식사하는 시간과 양이 너무 불규칙하다 보니
위궤양이 좀 심해져서 그렇다고 했다.
식사를 규칙적으로 하고 자극성 있는 음식을 피하면 괜찮아 질 꺼랬다.

혜숙이 내시경 검사를 거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위궤양의 정도를 밝히려고 그토록 고통스런 검사를 받는다면
나부터서라도 그리 쉽게 받아 들일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육동휘 원장은 새로 도입한 기계라서 수면 상태로 검사하기 때문에
그전처럼 통증을 느끼지 못할꺼라고 겨우겨우 달래고 달래 검사를 받게 했단다.
검사를 마치고 내시경을 꺼내는데 검붉은 피가 솟구쳐 올라 왔단다.

육 원장은 증세가 심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소견에
여러 날 걸려야 하는 검사 절차를 신속하게 진행했단다.

검사 결과 암세포가 위 전체적으로 퍼져 있어
수술이 불가능할 수도 있는 상태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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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수술을 거부당하고


처남과 처제 그리고 육동휘 원장은

내가 석방될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다면서

무엇보다 먼저 시급히 수술해야만 한다고 의견을 모았단다.

마침 한양대 병원에 육 원장과 처남의 경기중고등학교 선배로
위암 수술에서는 국내에서 둘째 가라면 섭섭할 전문의가 계시고
처제가 간호사로 있어 바로 입원하고

이틀 만에 수술 일정을 잡을 수 있었단다.

하지만 주치의 김용일 박사는 이미 수술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선 것 같다고
치유란 게 수술만이 능사겠느냐고 완곡하게 거절하시더란다.

남편은 왜 안 보이느냐고 1 차 보호자인 남편과 상의해야겠다고 하시더란다.
처남은 당황하고 다급해 졌단다.


여동생이 같은 병원 간호사인데 그 형부라는 양반이 이 시급하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징역살이 하고 있는 중이라고 차마 말 할 수가 없었단다.

그래서 피치 못할 일로...
말 못 할 임무를 어깨에 얹고 해외에 나가 2 주 후에나 돌아올 수밖에 없는 사정인듯
얼버무려 넘기고는 처남이 전적으로 위임받아 놓았다고 했단다.
무슨 일이 있어도 수술만은 꼭 받게 해 달라고 매달렸단다.

김용일 박사 말씀인즉슨 열었다가 손도 못 대보고 도로 닫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일단 손을 댄다 하더라도 마무리를 못 하고 덮어야 할 수도 있단다.
그런 상태면 차라리 손을 안 대는 게 더 낫단다.

그런 상태에서 손을 댈 경우 환자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되고
생명이 3 ~ 4 개월 못 넘길 수도 있고 급기야는 수술 도중 사망할 수도 있는데
제아무리 막중한 사명인지 뭔지.....
1 차 보호자인 남편의 동의없이 어떻게 손 댈 수 있겠느냐는 거다.

처남과 처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수술만은 꼭 받게 해 달라고 매달렸단다.
환자의 여동생이 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는데 최악의 상황이 닥치더라도
설혹 병원에 누가 되는 일 불미스런 일을 끼치기야 하겠느냐면서
선처해 달라고 매달렸단다.

처남은 워낙 다급했던 나머지 감옥에 있는 나와 상의할 겨를이 없었단다.
설사 그럴 겨를이 있었더라도 출감을 앞두고 그 안에서 내가 받을 충격을 생각하면
차라리 모르고 있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싶었단다.

1 차 보호자...
1 차 보호자인 내 동의를 꼭 받아야겠다고 완강히 거절하면 대전 교도소로 달려 갈려고

했 었 단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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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내가 지켜야


나는 피가 온 몸에서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손가락 끝으로 발가락 끝으로

술술술 새나가는 것 같았다.

머리에 배어 있는 피가
등줄기로 마구 흘러 내리는 것 같았다.

현기증이 왔다.
몸이 비틀리고 휘청거렸다.
털썩 주저 앉았다.
앞이 캄캄했다.

처남은 나를 부축하더니
당신이 잘 버텨 내야 한다고 했다.

내가 무너지면 혜숙은 어떡하고
가정은 어떡하느냐고 했다.

혜숙은 전혀 모른다고 했다.
혜숙은 그저 위궤양이 심해서
간단한 수술을 받은 것으로 안단다.
어머니도 아이들도 전혀 모른다고 했다.

지금부터는 모든 일을
내가 맡아서 판단하고 처리하고
헤쳐 나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처남과 처제에거 물었다.

수술 결과는 어떤가......
아내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

처남은 지금 이 순간부터
혜숙의 보호자 역할을
전적으로 내가 맡아 나가야 한다고 했다.

우선 주치의를 만나서
직접 들어 보라고 했다.

모든 일을 직접 맡아서 알아 보고
처리해 나가야 할 꺼라고 했다.

참으로 지극히 당연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순간적으로 나는 처남이 야속했다.

야속했다기보다는
치떨리는 절망과 공포의 나락에서
밀려드는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외로움을 헤쳐 나갈 지푸라기가 필요했고
기댈 언덕이 필요했던 것이다.

전혀 알지도 못하고
상상도 못한 일이 벌어져 온 채로
지금 마~악 감옥에서 빠져 나왔는데.....

나는 지금 제정신이 아닌 채로
감옥보다 더한 절망과 공포에 시달려
몸서리치고 있는데.....

하지만 처남의 말은 백번 옳다.
내가 버텨야 한다.

내가 맡아야 하고 내가 지켜야 한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처리하고
내가 헤쳐 나가야 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아내가 앞으로 겪어야 할
지옥같은 고통과 절망과 공포는
나보다 훨씬 더 크고 심할 테니까.....

아~~~!
아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니.....
내 사랑 혜숙이 죽는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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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식은 땀만 흐르고



감옥에서 출소할 때마다
나는 며칠 씩 미열이 오르고
식은 땀이 끈적지게 흐르면서
밤잠을 설치곤 했다.

처음에는 까닭을 알 수 없어
그저 몸이 허해지고
골아서 그렇거니 했다.

그런데.....
석방될 때마다
되돌이병처럼 계속 반복해서 앓게 되자
왜 이럴까??? 하고
까닭을 곰곰 생각해 보았다.

감옥에서는 독방에서
웬종일 앉아 있고 누어 있고
잠자는 게 일과인데......

그러면서도 저녁 잠에 떨어지면
아침 기상나팔 소리에
단잠 깨기에 여간 꾀를 부리곤했는데......

방안을 밤새도록 밝혀 놓는
전기불도 없고
잠자리도 더 편안한데
왜 이리 잠이 안 오나......

처음에는 여러날 계속되고 나서야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신경안정제를 꺼내 주셨다.
그 후부터서 출소할 때마다 나는 한 일주일 가량
잠자리에 들기 전 신경안정제를 복용해야 했다.

감옥 안에 있을 때 눈에 들어오는 모습
시야에 잡히는 풍경은 항상 일정하다.
색깔도 단순하다.

담벽은 온통 백색으로 칠해져 있고
건물 내부는 허리춤을 기준으로 해서
아래쪽은 회색이고 위쪽은 백색이다.

옷 색깔은 청색
그리고 하늘과 땅.....

오로지 똑같은 풍경만 있어 사시사철 그런 풍경만 볼 수 있고
그런 색깔 그런 풍경에만 젖어 지낸다.

그러다가 감옥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세상에 널려 있는 온갖 색상이 눈으로 입력되고
갖가지 풍경이 스치면서 머리 속에 잔영으로 남게 된다.

눈으로 코로 귀로 피부로 온몸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스쳐 지나고 느껴지는 세상의 온갖 모습들은
감옥 안에서 담아 낸 용량에 비하면 가히 견줄 수 없을만큼

커다란 육체적 정신적 환경의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대단하고도 엄청난 혼란이다.
그러니 출소할 때마다 복잡다단한 혼란과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한동안 식은땀이 흐르고 잠을 설쳐 댈 수밖에.....

나는 이미 온 몸이 식은땀에 젖을대로 젖어 있었다.
시시큼큼한 땀내가 진동하면서 주위 사람들의 후각을 자극했다.

머리에서 발바닥까지 온통 기름으로 뒤집어 쓴 듯 온몸이 끈적거렸다.
그런 몰골로 망연자실해서 한동안 병실 벽에 몸을 의지하고 기대 있었다.

주치의 김용일 박사 방에서 진료실로 내려 오라는 전갈이 왔다.
처남과 처제 그리고 혜숙의 친구 천영초와 함께 진료실로 향했다.

나는 마치 재판정에 끌려가는 심정이었다.
마지막 판결을 받으러 가는 피고인의 심경이었다.

사형인지 무기 징역형인지.....
혹시라도 무죄 석방되는 기적은 없는지.....

이 가운데 하나를 골라 심판하는
재판장의 처분을 받아야 하는
피고인의 심정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그보다 더더더더더.....

하느님 앞에서
최후의 심판을 받는 심정이었다.

지옥인지.....
연옥인지.....

기적과 희망의 천국은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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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주치의와 대면


드디어 내 아내 혜숙의 온전한 보호자로
주치의 김용일 박사와 마주 앉았다.

재판장 앞인지... 저승사자 앞인지...
뒤엉킨 심사로.....


▲ 주치의 김용일 박사


김용일 박사는 68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후,

78년부터 94년까지 한양대의대 일반외과 교수를 거쳐
94년부터 삼성서울병원 외과에서 일반외과장, 소화기센터장, 성대의대 주임교수 등을 역임한
소화기암 수술분야에 대가이시다.

내 후배 동료이자 혜숙의 친구 천영초가
굳이 따라 들어와 옆자리에 배석했다.

판결문과 형량 그리고 운명을
직접 확인하고 증거하려는 듯.....

법정에서처럼
인정 신문부터 시작한다.

"부군 되신다고요?......

그동안 어떻게......?"

당연했을 김용일 박사의 첫 번째 신문 사항에 대한 답변부터
그러고보니 나는 전혀 준비하지 않고 있었다.

순간 뭐라고 진술해야 할지 당황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지둥 두리번거리는 사이
혜숙의 친구 천영초가 눈치빠르게 수습하려 나섰다.

"오늘 아침에 대전 교도소 감옥에서 마~악 나왔어요...
그동안 1 년 반두 넘게 징역살다가요......"

나는 깜짝 놀라 정신이 번쩍했다.
나보다도 처남과 처제는 더 했다.

김용일 박사는 더욱 더 놀란 표정이다.
이게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하면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천영초 역시

이거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큰 실수를 했구나 싶었던지
뒤따라 놀라면서 어쩔줄 몰라 했다.

한동안 혼란스럽고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천영초는 기왕에 내친김이라 싶었던지 한번 더 까발리면서
진술에 대한 사실 여부를 확인해 준다.

"저.... 우리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서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다가 구속되었어요.
그러다가 오늘 아침에 석방된 거라구요......"

지금 돌이켜서 생각해 봐도 그렇다.
나는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감옥을 네 번씩 살고
그 안에서 절도 사기 횡령 등 파렴치범들과
강도 강간 폭력 등 흉악범들을 셀 수 없이 만나고 보아 왔다.

하지만 그 사람들을 밖에서 만나거나 본 적은 없다.
내가 가까이 알거나 그저 막연하게나마 알만한 사람들 중에도
그런 범죄를 저지르고 징역을 살았다는 말조차 전해 들은 기억도 없다.

사람사는 세상이 이토록 천차만별인데
밑도끝도 없이 징역형을 살다가 새벽에 감옥문을 나섰다는 사람을
오후에 탁자도 없는 좁은 공간에서 마주 앉아 상담하고 있다는 사실은
김용일 박사를 저으기 혼란스럽고 어리둥절하게 만들 법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제서야 해외에서
마~악 돌아왔을 것이라고 여겨졌던 사람이

아무리 사정이 그렇더라도
좀 더 빨리 올 수는 없었느냐고 지적하면서

뭔놈의 사정인지 환자 대신으로
따끔하게 훈계 한 번 하고 넘어 가려던 주치의는
느닷없는 상황 변화에 충격을 받을 만했다.

계속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긴장이 감싸고 도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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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사형만은 면하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디선가 본 듯하고
고운 모습에 편안한 인상을 풍기는
김용일 박사에게 매달리고 싶었다.

사형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떼를 쓰고 싶었다.

기왕에 들통났으니 하는 말인데...
이날 이때껏 생명과 재산을 바쳐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고통당하고 감옥살이 하다가
지금 마~악 출소해서 나왔는데.....

양식있는 분이라면 나를 또다시
지옥으로 밀어 넣을 수는 없지 않느냐고

그러면 벌 받을 꺼라고
항의하고
싶 - 었 - 다.

"이렇게 뒤늦게 찾아 뵙게 돼 죄송합니다...
저는 사정을 전혀 몰랐습니다.
여기로 오는 동안 잠깐 이야기를 듣기는 했는데...
도무지 무슨 얘긴지 못 알아 듣겠는데...
제 처는 어떻습니까?...
지금 어떤 상탠가요???......"

판결을 구했다.
기적과 희망을 갖게 해 달라고
마음 속으로 빌었다.

"우선..... 수술은 자~알 되었습니다.....
이제 환자가 최선을 다 해서 견뎌내고
투병 생활도 잘 해야겠지요.
가족의 도움도 절대적으로 필요하구요....."

그러면 그렇지... 수술이 자~알 되었다잖냐...
혜숙은 최선을 다 할꺼야...
가족들도 절대적으루 도울 꺼고...
희망이다!!!...
기적이다!!!......

김용일 박사는 왼손을 내밀어
주먹을 쥐고 설명했다.

처음 암세포가 발생한 곳이
주먹 바깥등 넓은 부위로

신경세포가 몰려있는
주먹 안쪽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무딘 부위라 했다.

혹시 신경세포가 몰려 있는
안쪽 부위에서 발생했더라면...
좀 더 빨리 통증을 느낄 수가 있고

그런만큼 좀 더 일찍 발견할 수가 있었을 테고...
이렇게까지 심각하지는 않았을 꺼라고 한다......

불행하게도 암세포가 위 전체로 다 퍼진 다음에서라야...
환자가 통증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환자가 통증을 견딜 수 없어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암세포가 위뿐만 아니라...
비장과 췌장 일부에까지 번진...
다 음 이 었 다 고 한 다 . . . . . .

환자가 젊다는 것도...
병이 악화된 요인이라 한다......


사람이 젊고 건강한 만큼...
암세포도 젊고 건강하다는...
것 이 다 . . . . . .

내시경 검사 결과로는...
위암 4 기로 나타나서...
과연 수술이 가능한지...
자신이 없 었 다 고 한 다 . . . . . .

더군다나...
1 차 보호자가 없는 상황이라서...
더더욱 수술하기가...
꺼 려 졌 다 고 한 다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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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수술할 수 있어서 다행



 하지만 경기중고등학교 후배인 육동휘 원장과 처남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처제

 

 그리고 이네들과 연고있는 주위 분들의
 간곡하고 애절한 부탁을...


 때로는 강요를 저버릴 수 없어
 결심하고 수술에 들어 갔단다.

 

 일단 열어 보니까
 도로 닫아 버릴 상황은 아니었단다.

 

 그래서 최선을 다 해
 수술할 수 있었단다.

 

 위는 전체를 다 잘라 냈고...
 위 부근에 있는 비장과 췌장도...
 일부를 잘라 냈단다......
 
 주변과 임파선으로 전이된 암세포도
 확인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 해서 찾아 내어
 제 거 했 단 다.


 결과적으로
 수술할 수 있어 다행이었고
 수술도 매우 자~알 되었다는 말씀이시다.

 

 앞으로가 문제인데...
 창자와 창자를 바로 이어 놓은 상태라서


 위 역할을 창자가 맡아 할 수 있도록
 환자는 항상 조심하고
 참고 견뎌내야 한단다...

 
암세포가 더이상 전이되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고 싸워서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호자와 온 가족의 관심과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것이란다...

 

 나는 김용일 박사의 말씀 가운데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내용이 담긴 대목에서는
 차마 알아 듣기에 치를 떨었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내용에만
 집요하게 매달리려고 발버둥을 쳐 댔다.


 " 그렇다면... 앞으로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그리 자상하고 성의껏
 자세히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말귀를 전혀 알아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멍청한 상태에서 불쑥 튀어 나온 내 말에


 김용일 박사는 황당하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머~엉하니 바라본다.

 

 한참을 그러더니
 환자의 의학적 상태를
 객관적으로 설명한다.




 

 19. 십중팔구는 죽는 병
   
 

 " 암에 대한 생존 가망성을...
 의학에서는 일반적으로 5 년 생존율이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위암으로 진단받게 되면...
 앞으로 5 년을 생존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의학적으로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5 년을 견디고 무사히 넘기면
 암에서 해방된 것으로 보는 거지요.
 나라에 따라서는 7 년 생존율을 기준으로 삼기도 합니다마는.....


 5 년을 생존할 수 있는 가망성의 정도에 따라서
 의학적으로 1 기에서 4 기까지로 구분하고 있어요.....
 위암 4 기라고 하면 보통 말기라고도 하는데...
 5 년을 생존할 수 있는 가망성이 거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박혜숙 환자의 경우에는 내시경과 조직검사 결과로는
 말기암으로 판단했는데...
 수술하고 나서 보다 정밀하게 검사한 바로는
 3 기에서 말기로 진행하는 상태로 밝혀 졌습니다....."


 나는 온 몸이 조여 들면서
 또다시 식은땀을 흘렸다.

 

 또다시 재판장의 심판을 받는
 피고인의 심정이 되고

 하느님 앞에서 최후의 심판을 받는
 죄인의 심정이 되었다.


 " 그럼... 제 처의 5 년 생존율은 어떻게?..."

 " 한 15 퍼센트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 
 

 아~~~!
 이게 무슨 말인가......!


 뒤집어 말하면 사망 가능성이 85 퍼센트란 말 아닌가......!
 내 사랑 혜숙이 십중팔구는 죽는다는 말 아닌가......!

 

 나는 치떨리는 가슴을 쓸어 앉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댔다.

 

 아~~~! 내가 정신차려야지...
 혜숙이 겪어야 할 공포와 절망을
 당장 어떻게 해야 하나......


 " 선생님! 이럴 때 제가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는지요?...
 제 처는 지금 위암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나본데요...
 직업이 약사이다 보니까 치료받는 과정에서
 당장 이상해 할테고 어차피 알게 될 텐데요...
 그럴 때마다 겪게 될 절망과 공포를
 견뎌 내기도 어려울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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