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손가락질 당하는 일


 그러다가 보름 앞두고 혜숙이 쓰러졌다.

 혜숙의 갑작스런 상태는 나의 출소와 어머니 고희연과 더불어
 삽시에 민주화 운동 진영으로 번져 나갔다.

 

 주위 많은 분들에게 알려졌고 염려와 걱정을 넘어
 충격적인 소식으로 전해졌다.

 

 이제 나의 출소랄지 어머니 고희연이랄지보다는
 암으로 쓰러진 혜숙의 생사여부가 주위 모든 분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하지만 혜숙은 입원해 있으면서도 자기 몸 상태는 아랑곳없다는 듯
 오로지 어머니 고희연 준비에 몰두했단다.

 

 친지 동료들에게 일일이 전화하고 당일 행사 진행 순서를 짜고
 차질없도록 역할을 맡기고 풍물패를 수배하고 사진과 비디오 촬영을 부탁하고
 하다못해 입구에서 안내하고 접수 보는 이들까지 일일이 챙기고 있더란다.


 절친한 여고 동창 중 어떤이는 혜숙이가 미쳤는가보다고
 지가 죽을지 살지도 모르고 시어머니 칠순 잔치만 생각하고 있다고 혀를 찼단다.

 이런 와중에 칠순 잔치가 뭐냐고 지부터 살고 봐야 되지 않겠냐고 했단다.


 하지만 혜숙은 막무가내였단다.

 결혼 전이지만 시어머니 회갑도 그 후 시아버지 칠순도 못 해드리고 지나쳤는데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이번만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막무가내 우기더란다.

 

 그래서 결국은 여고 동창들도 죽어 가는 혜숙이 마지막 소원 일지도
 맺힌 한 일지도 모를 일이니 저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들어 줘야 되지 않겠느냐면서 진행을 도왔단다.


 한편 어머니께서는 여러 달 전 고희연 말이 오가기 시작할 때부터
 크게 노여워하시면서 반대하셨다.

 

 어머님은 오랜 세월 공무원 생활하시면서 지역 주민들에게 

 우리 나라에서 만연하는 부질없는 허례허식과 풍습을 삼가하도록
 계몽하고 설득하러 다니셨다.

 

▲ 어머니 공무원 신분증 사진


▲ 화성군보건소에서 상근책임자로 근무하시던 어머니 (가운데)

    

 분에 넘치고 분수에 맞지 않는 예식을 간소화하도록 교육하고 다니셨다.

 그러니만큼 당신이 먼저 솔선수범하는 데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며느리가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 뒤에는
 더욱더 당신의 고희연을 중단하도록 요구하셨다.

 

 출소하고 처음 뵈었을 때도 어머니는 나에게 무엇보다 먼저
 이런 지경에 고희연이 다 뭐냐고 그만두라 하셨다.

 

 아들은 감옥에 있고
 며느리는 입원해 있고
 딸과 사위는 외국에 나가 있는데

 고희연이랍시고 잔치할 마음이 생기겠느냐고 하셨다.

 

 부질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 자신을 크게 욕보이는 일이라고 나무라셨다.

 

 세상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당하는 일이라고
 크게 노여워하셨다.


▲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반송리 출장 중인 어머니


▲ 가정 방문 중인 어머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혜숙은
 어머니 고희연을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중단하기에는 너무 늦기도 했거니와
 주위 많은 분들의 의견도 있었다.


 그 당시 정치 사회적 상황도 고려했다.

 1987 년은 새해 벽두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았다.

 

 전두환 대통령은 임기 만료가 되는 해로 자리를 물러 나야 했고
 재야 민주화 운동 진영과 야당에서는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직선제 개헌 논쟁에 불을 붙였다.

 

 2 월에는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남영동 대공수사단에서 고문으로 숨진 사실이 폭로되고
 국가 공권력의 정당성과 도덕성이 크게 실추되었다.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한 분위기가 기승을 더 해가자
 전두환 대통령은 개헌 절대 불가를 천명하며
 "4.13 호헌 조치"를 내세워 마지막 안간힘으로
 정국을 제압하려는 듯 발버둥치는 형국이었다.


   ▲ 1987. 4월 13일자 경향신문.

 

 1979년 10.26 박정희 시해사건으로 계엄령이 선포되었을 때처럼

 1980년 5월 17일 광주민중항쟁을 앞두고 전국 계엄령으로 확대되었을 때처럼

 정국은 일순간 차디찬 냉기에 휩싸였다.

 

1980 년 3 ~ 4 월 민주화의 봄 적에

 견디다 못한 어둠의 세력이 마각을 드러내고

 5.17 계엄 확대 조치를 무기로 총질하고 칼춤추며 판세를 뒤엎으려 난리치듯

 도도한 광주 시민의 민주화 물결을 난도질하고 박살내듯
 
 무언가 거대하게 휘몰아 쳐올 것같은 태풍 전야처럼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고요했다.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가 선포된 바로 다음 날

4 월 14 일 내가 감옥에서 출소했다.

 

 그리고 나흘 후에
 어머니의 고희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민주화 운동 진영을 대표하던 민청련과 민통련 민가협 등 단체에서는
 갑자기 얼어붙은 정국을 돌파해 내기 위해서라도

 재야 민주화 운동 진영에 있는 분들이 모두 망라해서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는 자리가 가뜩이나 필요한 터이니만큼

 어머니의 고희연을 예정대로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했다.


 나와 혜숙은 주변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가며 어머니를 설득했다.

 고희연은 이미 자연인 어머니 개인이나
 우리 가족의 잔치를 넘어 선 행사라 했다.

 

 우리 가족이 처해 있는 형편과 사정도
 이미 우리 가족만의 걱정과 염려가 아니라고 했다.

 

 그때까지 20 여 년 동안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나와 함께 노력해 온 모든 선후배 동지들의 뜻이라고 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한 행사라고 했다.

 그제서야 어머니께서는 더이상 말씀이 없으셨다.

 

 당신의 뜻을 거두신 건지.....
 말씀하셔봤자 내 고집 꺾을 수 없어 마지못해 포기하신 건지.....

 

 그 후 무겁게 흐르는 침묵을 깨고
 무섭도록 고요한 연못에 파문을 불러일으키는 조짐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그동안 조용하게 살아 오고, 하고 싶은 말 아껴가며 내색없이 침묵해 온

 살만한 이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대학 교수를 필두로 의사 약사 한의사...
 변호사 공인회계사...
 신부 목사 교사...
 

 밀양 안동 마산 기장 동래...
 여수 완산 남원 목포 광주서구...
 유성 옥천 천안 제천 공주...
 강릉 원주 춘천...
 

 중산층으로, 소지역 단위로 모여서 의논하고 입장을 발표하고
 목소리를 내고 함께 행동하고.....

 

 마침내는 도도한 물결이 되고
 거대한 파도가 되고
 6 월 민주 대 항쟁이 되었다.




32. 눈물의 칠순 잔치

 

 

 4 월 18 일 혜숙은 주치의로부터 3 시간 특별 외출을 허락 받았다.

 혜숙은 평소에 얼굴 화장을 전혀 하지 않았다.

 남자인 나도 세면하고 나서 찍어 바르는 스킨 로션조차 혜숙은 바르지 않았다.

 경기여고 시절 학교의 전통있는 행사로 널리 알려진

 세계 민속놀이 대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분장했던 일과 우리 결혼식 때 신부 화장한 것이 고작이었다.

 

 그날 내가 근무하던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여직원이 혜숙에게 옅은 화장을 해 주었다.

 그래선지 환자같지 않고 해말간 얼굴이 참 곱게 보였다.

 

 고희연에 앞서 교회 담임 조승혁 목사님 주재로

 교인들과 일가 친척들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

 

 

함경북도 함흥에서 우리나라 초대 교회 고명하신 목사님 가정에

위로 오빠 언니를 두고 아래로 남동생 여동생 사이에 셋째로 태어나신 어머니

방이 18 개 거실 화장실 합하면 21 개나 되는 함흥중앙교회 사택에서 자라

어렸을 적부터 청소하기가 너무 힘들고 지긋지긋했다던 어머니...

 

영생여고보와 함경남도립병원 간호부 조산부 과정을 졸업하고

결혼 전까지 원산도립병원 기숙사에서만 생활했던 경험으로

남들처럼 작고 아담한 집에서 단란하게 살아 보는 것이 소원이셨다던 어머니

 

그래서 나까지도 팔자에 없을 큰 집을 그리 자주 드나들어 온 건가?

나 역시 어머니와 외가의 영향 아래 모태 신앙으로 자라 왔다.

오랜만에 해후하게 된 친인척 교인들은 우리 가정의 파란만장한 역경과

혜숙에게 드리운 병마를 익히 알고 있어선지 기쁨에 넘치거나 축하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 착잡한 속내를 애써 감추시는 어머니

 

주재하시는 조승혁 목사님과 참석한 이들 모두

특별히 혜숙의 건강과 우리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합심해서 다함께 하나된 마음으로 감동어린 예배를 드렸다.

 

예배가 끝나자 따사로운 봄날 성북동 그윽한 골짜기에 위치한 '녹음정'으로 하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든다.

계훈제 송건호 선생님 등 재야 원로

성내운 김찬국 이영희 정윤형 등 당시 해직 교수협의회 교수님들

현기영 임헌영 정희성 조태일 박용수 안종관 채광석 유시춘 등 민족문학작가회의 문인들

임채정 정동익 등 해직 언론인

이길재 최종진 등 전국농민회총연맹 대표

임진택 장선우 유인택 등 문화예술인

윤순녀 김명식 등 가톨릭 수녀 수사님

성해용 이상윤 임흥기 이근복 등 개신교 목사님

최 열 김승균 신철영 신대균 등 시민사회단체 분들

민통련과 민청련 식구들 구속자가족협의회 민주열사유가족협의회 분들

초 중고등 대학 동기 선후배들.....

전두환 씨가 개헌불가 4 . 13 호헌조치를 강압적으로 발표한 직후여서인지

5 . 16 군사 쿠데타 이후부터 연대해 온 재야 민주인사들 가운데

구속되거나 수배된 이들을 빼고는 거의 망라되어서 참석한 자리가 되었다.

 

 

 

 

우리 결혼식 주례를 서신 김찬국 교수님은 혜숙의 등을 두드리며 손을 꼭 잡고 봉투를 쥐어 주셨다.

"이 돈은 아무한테도 보여 주지 말고 우리 박 선생 혼자서 맛 있는 거 사먹어야 돼요....."

따뜻하신 말씀이시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그 때 돈으로 거금 30 만 원이 담겨 있었다.

당신께서도 무려 13 년 여 동안 해직되어 계실때인데.....

나는 혜숙이 입원해 있는 동안 교회 집사님 집에 가 있던 막내를 처음으로 보고 품에 안아 보았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스트레스를 말로 표현 못 해선지 마악 첫돌이 지난 막내는 머리칼이 곤두서듯 위로 뻗혀 있다.

 

 

 

잔칫상과 사람들 사이를 천진난만하게 휘젓고 다니는 딸과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나 뿐만이 아니었다. 혜숙의 친구들 또한 그 모습을 지켜 보면서 손수건을 눈에서 뗄 줄 몰라 했다.

참석한 이들 모두가 혜숙이 예쁘게 화장한 얼굴로 고운 한복을 입고

갓 돌 지난 막내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을 지켜 보면서 누구랄 것없이 눈시울을 삼켰다.

 

오랜 세월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해 왔던 동지이자 후배 이해찬(전 국무총리)의 사회로 식순이 진행되었다.

나는 인사말을 통해서 우리 가정에 드리운 안위에 대해 염려와 걱정을 끼쳐드리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을

우리 가족과 혜숙이 알아 듣지 못하도록 완곡하게 표현했다.

 

더불어 오늘의 자리가 우리 가족을 위한 행사로 그치지 않고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를 돌파해 내는 데 조그마한 교두보가 되어

허심탄회하게 만나고 서로 의견 나누는 자리로 삼아 달라고 부탁했다.

 

한국문화연구소 연성수 소장이 이끄는 풍물문화패의 공연과 함께

우리 가족을 시작으로 선후배 동료들이 어머니께 예를 올렸다.

참석한 이들 대부분이 혜숙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다.

혜숙이 절하고, 친구들과 같이 "어머니 은혜"를 노래하고 오랜만에 보는 막내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눈시울을 삼키게 했다.

 

▲ 어머니 칠순 행사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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