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암 환자의 심리 변화

 


 김용일 박사
 한동안 뜸을 드린다.

 

 그제서야 말귀를 알아 듯나 싶었던지
 벙벙하던 표정이 조금씩 풀어 지는 듯 했다.

 

 그러면서도 아직 제정신 못 차리고
 뒤죽박죽인 내 심리 상태를
 찬찬히 들여다 보는 듯했다.


 " 암 환자의 심리와 심경의 변화 상태에 대해서도
 연구한 결과가 보고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맨 처음... 자신이 암에 걸리고
 죽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대부분의 암 환자는 의심하고 믿지 않는 것으로 반응합니다.


 첫 번째 단계로 자신의 병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심리 상태입니다.
 내 몸은 내가 잘 안다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이 병원 이 의사가 알지도 못하고 그런다고...
 나는 암에 걸릴 몸이 아니라고...
 어디서 이따위 병원 이따위 의사가 있느냐고...
 다른 병원에 가 보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시간을 놓치고...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다가

그야말로 손을 댈 수 없게 돼서야
 다시 찾아 오는 경우도 있고요...
 설혹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더라도
 그런 심리로 반응한다는 거지요...
 
 두 번째 단계로는 증오하고 저주하게 됩니다.
 몸이 점점 쇄약해 지고 통증이 심해지면서
 암이라는 사실을... 죽음이라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르게 되면...
 환자는 세상을 증오하고 저주하는 심리 상태를 겪게 됩니다.


 건강한 사람을 증오하게 되고 아름다운 생물을 저주합니다.

 내가 왜... 왜 나만 이 세상만물 생명체를 두고 죽어 없어져야 하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미웁고 싫어 지게 되지요...... 


 세 번째 단계는 그러다가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증오하고 저주하다가 지치고 지쳐서
 세상을 포기하고 자기자신을 포기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절망에서 헤어나 죽음과 협상하게 됩니다.


 네 번째 단계로 환자가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기도 합니다.
 정신적으로 아주 피폐해 지기도 하구요.....
 시기적으로는 환자마다 제각기 다른데...
 이 상태는 거의 마지막 순간에 오기도 합니다.
 죽기 하루 이틀 전... 몇 시간 전까지 밀려 가서야 오기두 하고요......


 마지악 5 단계는 자포자기한 후에 자기 삶을 정리하고 안정하는 단곕니다.
 종교적으로 깊이 위로받고 안정하기도 하고...
 살아 남아 있어야 할 가족을 위해서 삶을 정리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운명적으로 받아 들이게 됩니다.


 대개의 환자들은 이 마지막 단계까지 이르기가 쉽지 않아요......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암이라는 사실을... 죽는다고 하는 사실을...
 보호자가 끝끝내 환자에게 밝혀 주지 않는 경향이 심해서
 대부분 2 단계나 3 단계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보호자의 심리 상태도 애증의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이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보호자는 4 단계를 다 거칩니다.


 아무래도 환자 자신보다야 생명에 대한 여유...
 생명에 대한 여유가 있을 테니까요......"



 

21. 15 퍼센트에 매달리고...

 

 아~~~!
 혜숙의 삶이


 내 사랑 혜숙의 생명이
 나와 혜숙의 운명이 이 지경이 되다니......

 

 그런데... 그러면...
 앞으로 닥쳐 오는 절망과 공포...
 나와 혜숙의 운명은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나...

 

 그렇지!!!
 생존율이 있지...


 15 퍼센트가 있지...

 혜숙이 꼭 죽는 건 아니지!!!

 가망이 있는 거야!......

 

 혜숙은 이 날 이 때껏
 남들에게 그리 뒤떨어지지 않아 왔어...

 

 15 퍼센트가 뭐야???
 어디에 내 놔도... 뭐를 해도...
 5 퍼센트 안에도 들겠다...

 

 달리기도 잘 한다고 그랬지 참...
 나는 중간 정도밖에 못 했던 그누무 달리기를
 혜숙은 수송초등학교에서도 선수로 뽑혔다고 그랬어...

 공부로라면야 더 말 할 것 없고... 

 

 혜숙은 뭐를 해도
 맘 먹고 하겠다면 100 명 중 15 등 안에는 들꺼야...

 아니아니 5 등 3 등 안에도 들 수 있을꺼야...

 

 그러려면 혜숙이 스스로가
 용기를 가져야 될 꺼야...

 

 맘 먹고 싸울 준비하고 
 극복해 내려는 의지를 가져야 될 꺼야...

 

 그런데......
 혜숙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약사니까
 어차피 자기 병을 서서히 알아 가게 될 꺼고


 그럴 때마다 부정하고 거부해야 하는 고통과
 증오하고 저주해야 하는 공포를...

 그러다가 자포자기하는 절망을 겪게 될 텐데......

 

 그러기보다는 차라리
 혜숙이 지금 처해 있는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고 대처해 나가는 게
 보다 효과적일 지도 몰라...

 

 혜숙이 맘 먹고 용기를 가지게 되면...
 희망을 가지고 이겨내려는 의지를 가지게 되면...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을 꺼야...
  .
  .
  .

15 퍼센트 안에는 들고도

남 을 꺼 야 ! ! ! . . . . . .




 

22. 보호자에게 맡겨진 생명



 나는 어느새 생존 가능성 15 퍼센트에
 집요하게 매달리고 있었다.

 

 그 정도면 우리 혜숙이 넉넉하게 극복해 낼 꺼라고
 거듭거듭 자위하고 있었다.

 

 " ... 아무래도 제 집사람에게 지금의 상태를
 사실대로 알렸으면 싶은데요... 어떨런지요?......"

 

 그렇겠지요?
 그래야 되겠지요???

 

 그러면 내 사랑 혜숙은  비록 잠시...
 충격과 고통... 절망과 공포를 겪게 되겠지만
 아마도 다시금 용기와 의지를 다지게 될 껍니다.

 

 혜숙은 최선을 다 해서 극복해 갈 껍니다.
 나와 우리 가족 모두도
 다 함께 최선을 다해 나갈 꺼구요.....


 "...그 방법은 나라마다 일정치 않습니다.
 조상과 가족과 개개인에 대한 가치와 풍습이
 나라마다 혹은 민족과 지역마다 서로 다른 것과 같습니다.
 역사와 문화...전통적 환경 등등에서 볼 수 있는
 차별성하고도 관계가 있다는 보고도 있고요...


 미국에서는 의사가 환자 자신을 상대로
 모든 상태를 직접 다 이야기합니다.
 피치 못 할 사정이 없는 한...
 아주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보호자나 다른 가족에게는 절대 말 안 해요.


 보호자든 가족이든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은
 환자의 권리입니다.
 인간의 생명, 생명의 존엄성. 존엄성의 프라이버시는
 자기 자신, 즉 환자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겠죠......


 치료를 할 지, 말 지... 어떻게 할 지...
 이 모든 판단과 선택을 환자가 의사의 조언을 직접 듣고
 스스로 결정합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그것이 반반입니다.
 병원에 따라서, 의사에 따라서 환자에게만 알리는 경우가 있고
 보호자에게만 알리는 경우가 있고 그렇습니다.
 전체적인 통계로 보면 50 대 50 으로 반반으로 보고되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환자에게 직접 이야기 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제로 퍼센트예요...
 보호자를 불러서 보호자에게만 알리고
 환자에게 알릴지 말지 하는 선택은 보호자에게 맡깁니다. "


 김용일 박사는 내 의도와는 달리
 교과서적으로만 말씀하신다.

 

 수많은 임상 경험과
 그에 따라 의학적으로 정리된 결과만 가지고


 인간미 없이... 인정사정 없이
 객관적인 이야기만 했다.


 나는 다시금 인간적으로 매달리고 싶었다.

 개개인 환자마다 구체적인 형편과 사정이 제각기 다를텐데...


 그렇게 인정사정 없이
 과학적이고 통계적인 방법으로 구분해서
 획일적으로 정리된 결과로만 말씀하신다면.....

 

 그것 역시 환자에 대한 예단...
 생명에 대한 예단 아니겠느냐고
 매달려 호 소 하 고 싶 었 다 . . . . .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혜숙의 생명에 대한 희망...
 15 퍼센트의 가망성을 위해서

 나와 혜숙이 그리고 우리 가족 모두가 최선의 노력을 다 하기로
 엄숙히 다짐하면서 맹세코자 하오니......

 

 김용일 박사님 께서도 인간적인 애정과 관심을
 최대한으로 가져 달라고 매달리고 싶었다.

 

 나는 그토록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초조하고 애절한 심경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금 간곡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김용일 박사를 바라 보았다.


 " 그럼... 혹시...
 제가 보호자로서 부탁을 드리면...
 환자에게 상태를 직접 말씀해 주실 수는 있으시지요?... "


 김용일 박사는 어이없고 난감한 표정으로
 한참 뜸을 드렸다.


 " ... 글쎄요... "


 엉뚱하게도 나는
 다짐하고 맹세하고 매달리고 싶은 말 대신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그 잔인한 판결문을
 주치의인 김용일 박사에게 낭독해 달라고
 은근히 미루려 드는 것이었다.

 

 뒤죽박죽 되어 버린 머리 속과
 입에서 새어 나오는 말마디가 따로따로인 채로
 서로 전혀 연결이 안 된다.



 

23. 들통난 감옥살이

 


 " 주치의 선생님 만나 봤어?...
 어디에 가 있다 이제사 나타나느냐고 혼나지 않았어??? "

 

 혜숙은 밝게 웃으면서 나를 반긴다.
 자기 자신의 몸 상태야 별로 궁금할 것도 없고
 염려할 것도 없다는 표정이다.

 

 주치의 선생님은 내가 감옥에 있다 나온 줄 모르고 계실텐데
 도대체 뭐라고 해명했느냐는 것이 오로지 궁금한 거다.


 혜숙을 어떤 낯으로 바라보고
 혜숙에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 지...
 갈피 잡을 수 없던 나로서는
 분위기를 받아 넘기기가 차라리 편했다.

 

 "... 으~~~응. 들통나 버렸어....."

 

 "... 에~~~엥??? "

 

 거두절미하고 장난끼 어린 표정으로 대답하면서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문병 겸 출소 마중 겸 와 있던 사람들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는 듯한 내 모습에서
 느닷없는 말이 튀어나오자
 분위기를 바꾸는데 한몫 거들어 주려는 듯
 모두들 소리내어 함께 웃었다.

 

 혜숙이만 혼자서
 무슨 농담을 그리 하느냐는 듯
 어이없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이 때 혜숙의 친구 천영초가 나섰다.

 

 " 아 글쎄 요 녀니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완조니 초칠해 버렸어야 ~ ...
 내 친구 혜숙이 신랑... 우리 선배가 어떤 분인데
 아직도 모르고 계신 거냐고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얼릉 나서서 말 해 버렸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민주화 운동 하다가 감옥에서 고생하다가 나오는 길이라고...
 뭐 어떠니? !!!... "


 주치의 선생도 당연히 알고 계시리라 여겼던 탓에
 그만 본의아닌 실수를 저지르고 만 천영초는
 계속 당당하다.

 

 " 에구~~~ 잘했다 자~알 했어...
 아무리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그렇지.....
 신랑이란 작자가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길래 여태 안 나타나나...
 혜숙이 남편한테 버림받은 여자 아닌가...
 제대로 말도 안 해 줘서 궁금해 주~욱 껐었을텐데.....
 어물어물 했다가는 신랑 몰골하며
 우리 혜숙이 체면만 더 깎일 뻔했자나? "

 

 나와 같은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살인적인 고문을 당하고
 계속 감옥 안에서 고생하고 있던
 김근태 선배의 부인이자 혜숙의 친구인 인재근이

 달덩이같은 얼굴에 함지박만한 웃음끼로
 입심좋게 너스레를 떨어 댔다.

 

 그제서야 혜숙은
 이리 된 바에야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듯
 나를 보고 눈을 사~알짝 흘기더니
 웃음을 머금는다.


 주위에 많은 분들이
 혜숙의 생명을 염려하고 걱정하면서
 진심으로 위로해 주었다.

 

 때로는 죽음의 사신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지 못하도록


 혜숙을 유일한 관객으로 삼아서

 주위에 많은 이들이
 배역과 역할을 나누어 맡아
 세련되게 종합 연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여겨지기도 했다.

 

 이미 연기하고 연출하는 이들은
 줄거리를... 혜숙의 운명을 다 알고 있는데

 정작 스토리의 주인공이자
 유일한 관객인 혜숙이만
 그 내용을 모르는 듯 했다.

 

 세상 사람들은
 이미 다 아는데
 정작
 아내와 우리 가족만
 전혀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24. 오랜만에 느끼는 숨결과 체온



 땅거미가 지고 어둠이 깔리면서
 방문객의 발길도 멈추어 갔다.


 한양대학교 병원 20 층 병동 로비에서
 머얼리 한강과 금호동, 신당동 산 언덕을 바라본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주택이 보이고
 그 사이에
 사과를 한 입 깨물어 베어 먹은 듯
 허옇게 드러난 산허리 중턱 공터에서는
 재개발 아파트를 세우느라
 한 밤에도 여념없다. 

 

 남산 꼭대기에
 불쑥 솟아 오른 타워는
 밤이 깊을수록
 휘황한 불빛아래
 모습이 더욱 선명하다.


 아~~~!
 시시각각 바뀌는 대자연의 변화
 인간의 놀라운 과학과 기술의 변화
 이런 모든 것을 놔 두고
 내 사랑하는 혜숙이
 죽어 땅 속에 묻혀
 한 줌 흙으로
 썩어 가야 한단 말인가?......


 인기척이 있어
 번뜩 제정신을 찾으니
 어느새 혜숙이
 옆으로 다가와
 내게 팔짱을 껴 온다.

 

 오랜 만에
 꼬~~~옥
 껴안 듯
 힘 주어
 온다.

 

 그러고 보니
 1 년 6 개월 여 만에
 자유의 몸이 되었으면서도
 우리는
 아직
 한번 뜨겁게

 뜨겁게 뜨겁게
 안아 보지도
 못 했 다.

 

 나도
 온 힘을
 팔뚝에 모아

 혜숙의
 팔을
 꼬~~~욱
 눌렀다.

 

 혜숙은
 왼손으로

 내 오른손 손바닥에
 자기 왼손바닥을
 밀착시켜 부비고는

 다시 힘 주어서
 손깍지를 낀다.

 

 그리고.....
 오른손을 돌려서
 내 오른쪽 겨드랑이
 안 쪽에 넣고
 쪼물럭 쪼물럭 한다.....

 

 머리를 기울여
 살며시
 내 어깨에
 올려 놓는다.....

 
 이만큼이나마
 혜숙의 숨결과
 체온을 느껴 보기도
 얼마만인가?.....
  
 그런 모습으로
 몸을 약간씩 좌우로 움직이면서

 

 서로의 숨결과 체온을
 맘껏 포근하게

 뜨겁게 뜨겁게
 느끼면서

 

 우리는 말없이

 하~~~안참
 서 있었다.

 

 혜숙은 정말로
 자기 병을 모르고 있는 걸까?.....
 눈치는 채고 있는 게 아닐까?.....

 

 혜숙에게 말을 해야 하나
 어쩌나.....

 

 어차피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까 
 치료받는 과정에서 알 게
 될 텐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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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생일 선물



 밤이 깊어 지면서
 세상은 점점 고요해 지고
 병실의 불빛도 하나 둘 꺼져 간다.

 

 " 오늘이 중수 생일인거 알지?
 내가 중수한테 귀가 닳토록 얘기했어.
 우리 맏아들이 초등학교 입학해서 첫 번째 생일 맞는 날
 아빠가 외국에서 맛있는 거 많이 사 가지고 돌아오실 꺼라고.....
 중수하고 고운이가 아빠 많이 기다릴 꺼야.
 이제 빨리 집에 가 봐.
 학용품이랑 초콜릿이랑 준비해 놓았으니까
 외국에서 사 왔다구 선물로 주고..... "

 

 그랬던가.....
 내가 출소하는 날이 공교롭게도
 초등학교 입학한 둘째애 생일과 한 날이라는 것은
 징역형이 확정될 때부터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오늘 하루종일
 그 일을 생각조차 못 한 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첫째 딸 고운이와 둘째 아들 중수는 연년생이지만
 생월이 2 월과 4 월이어서
 3 월을 입학 기준으로 삼는 교육 연령으로는 2 년 차이다.

 그 당시 고운이는 3 학년, 중수는 1 학년이었다.

 

 혜숙은 내가 구속될 때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아빠가 어디에 있는지 밝히기를 꺼려 했다.

 

 아빠의 행동과 처신이
 부끄럽거나 명예롭지 못해서가 아니다.
 
 가까운 친척이나 동네 사람들을 비롯한
 어른들 세계에서도
 각자가 처한 삶의 방식과 가치관에 따라서는
 민주화 운동을 하고
 감옥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복잡미묘하고 다양할 터인데

 

 한창 철없이 뛰어 놀고
 자유롭게 활개치며 자라날 아이들에게
 시국이라든가 역사적 상황
 구속과 재판 등등 유별난 어른들 세계를
 굳이 드러내서 밝히는 것이
 그리 바람직하지 않겠다고 여겼던 탓이다.

 

 갓난 아기 적에는
 혜숙이 내게 자랑삼아
 아이를 가끔 품에 안고 면회 오기도 했지만
 그것도 조심스러워 했다.

 

 나는 혜숙이 아이들을 위해
 정성스레 마련한 선물을 받아 안고
 그만 눈시울이 시큼해 왔다.

 

 아직 철모를 아이들이 바라는
 아빠에 대한 기대가
 혹시라도 흠 잡히거나
 상처받지 않을까 염려하는
 아내의 마음이 가슴 속 깊이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혹시라도
 이처럼 정성스런 엄마의 선물을 받아 보는 것도
 이번으로 마지막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절망어린 생각이
 내 가슴을 더욱 미어 왔다.

 

 차라리 엄마가 수술을 받고
 엄마의 생명이 어찌 될 지 알 수 없는 지경에서도
 너희들을 위하고 사랑해서
 마련해 준 선물이었다고
 아이들에게 말 해야 옳지 않겠는가?......

 

 어찌 내가 이 지경에서
 아이들에 대한 엄마의 애틋한 사랑을...
 남편에 대한 아내의 배려를...


 혼자서 몽땅 가로채야 한단

 말 인 가 ! ! ! . . . . . .



 

26. 잠 못 이룬 첫날 밤


 병실 복도의 불빛도 비상등만 남긴 채
 모두 꺼져 있다.

 

 병실마다 환자들이 꽈~악 차 있지만
 아무런 인적없이 사방이 고요하다.

 

 어느새 준비했는지 혜숙은
 그러지 않아도 식은땀 흘리고 잠을 설쳐댈
 나를 염려해서 챙겨 둔 신경안정제를 건네 준다.

 

 그리고는 배웅하겠다며
 병원 1 층 로비를 지나 택시 정류장으로
 나를 안내한다.

 

 늦은 밤이어선지
 한참을 기다려도 택시가 안 온다.

 

 나는 찬바람 쏘이지 말라면서
 혜숙을 다시 병실로 데려 간다.

 

 혜숙은 운동을 해야
 잠도 편하게 들 수 있다면서
 다시 택시 정류장으로
 나를 배웅한다.

 

 그러기를 한 번 더.....


 혜숙을 뒤로 하고
 나는 교문 밖 큰 도로를 향해
 언덕길을 터벅터벅 내려간다.

 

 다시 오랜만에 보는 서울의 야경.....
 을지로와 시청앞을 지나
 서소문 이대 입구에 닿기까지
 나는 필름이 끊긴 것처럼
 그저 까맣기만 할 뿐
 아무런 생각도 없다.


 기억도 전혀 없다.

 그저 온몸으로 식은땀만 끈적끈적
 흘러 내릴 뿐이었다.

 

 어머니께선 근심어린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시고...
 아이들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다.

 

 아이들 머리맏에 선물을 챙겨 놓고
 집에서 첫 밤을 지낸다.

 

 아~~~!!!
 지금처럼...
 지금 혜숙이 내 곁에 없는 것처럼...
 혜숙이 내 곁에 영원히 없게 될지도 모른다니......

 

 밤새도록
 지옥같은 현실...
 악몽같은 현실에
 몸서리치고
 식은땀을 흘리면서
 
 나는
 잠을 한숨도 
 이루지 못했다.



 

27. 회 진

다음 날
잣죽과 밑반찬거리를 싸들고 병원으로 달려 갔다.

병실 전체가 아침부터 각종 진료와 검사... 투약과 주사...
간호사 회진... 담당 의사 회진... 등등으로
어수선하고 분주하다.

어제 만나 뵈었던 주치의 김용일 박사가
휘하에 수련의 7 ~ 8 명 이끌고 우르르 들어 선다.

마치 군대에서 감옥에서 순시하고 점호할 때마냥
혜숙은 사물함과 침대를 깔끔하게 정리 정돈하고
침대 위에 차렷 자세로 앉아 있다.

나도 덩달아 벌떡 일어 나긴 했지만
차렷 자세는 좀 어색하고
뒷짐짓고 삐딱하니 서 있기도 그렇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자세로
엉거주춤 서 있는다.

혜숙은 주치의에 대하여.....
정중하게 인사...
한다.

소변은 보았느냐.....
몇 번 보았냐...
대변은...

밥은 먹었냐.....
얼만큼 먹었냐...

이 절체절명 중차대한 순간에
아무 의미도 없을
일상적인 말

밥 먹었냐... ( 많이 묵어라... )
오줌 똥 눴냐... ( 마니마니 싸라... )

주치의 김용일 박사는 혜숙에게 몇 마디 묻더니
수련의들 향해 전문 용어로 소곤소곤거리고는
다시 우르르 몰려 나간다.

" 잠깐만요 ! ! ! "

차렷 자세로 앉아 있던 혜숙이
오른손 번쩍들어 치흔들면서 의사들을 불러 세운다.

" 저..... 김용일 박사님은 어제 뵈었지요?.....
여기 이 사람이 제 신랑이예요.....
여보 인사드려.....
어디 좀 머얼리 가 있다가 어제 나왔어요....."

혜숙은 기왕에 들통난 것
별로 거리낄 것도 없다는 듯
당당하고 밝은 표정으로 익살을 섞어 가며
의사들에게 나를 소개한다.

" 선생님... 나 우리 신랑이랑
1 년 반두 넘게 떨어져 있다가 만난 건데.....
퇴원 좀 빨리 시켜 줄 수 없어요?....."

진심인지 농담인지...
부탁하는 건지 사정하는 건지 떼를 쓰는 건지...
갈피잡을 수 없는 묘한 뉘앙스로
혜숙은 의사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인다.

" 어..... 같이 노력해 봅시다.....
상태가 좋아지면 굳이 오래 입원해 있을 필요가 없을테고...
좀 지켜 보지요....."

김용일 박사 역시
딱히 이럴 건지 저럴 건지
알듯말듯한 말로 맞장구를 쳐 준다.

상태가 좋아지면이라니...
그럼... 금방 좋아질 수 있다는 말인가?
금방 나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무려 5 년을 지켜 보아야 한다고 했으면서.....

좀 지켜 보고 노력해서 상태가 좋아지면
정말로 굳이 입원해 있을 필요도
걱정할 필요도 없다는 건가?.....


나는 그 순간

또다시 김용일 박사의 말꼬리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 진다.

 



 28. 저 환자 암이야

 


 의사들의 회진이 끝나자
 병실은 소란하고 어수선한 분위가
 단숨에 멈춰 버린 듯 조용하다.

 

 혜숙은 나에게 가까이 좀 와 보라더니    
 귓속말로 속삭인다.


 " 있잖아~~~ 저 맞은편에 있는 환자 있지???
 저 환자 암이야 암......
 내가 보니까 항암제를 맞고 있는데 너무 안 됐어...
 머리카락두 다 빠지구...
 근데... 본인은 자기가 암인 줄 전혀 모르구 있어...
 아마 며칠 있으면 병원에서두 포기하구 퇴원할 거 같애......" 
  

 아~~~!
 혜숙은 정말로
 자기 자신이 암이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구나......

 

 그렇게 큰 수술을 받고도
 자기 가슴에 크게 난
 수술 자국을 보고도
 낌새조차 전혀
 못 느끼고 있구나......

 

 그렇다면 내가
 주치의를 처음 만났을 때
 김용일 박사에게는
 징역 살다 나온 사람과
 평생에 처음으로 마주했던 것처럼

 

 나 또한
 평생에 처음으로
 암 환자라는 사람을
 마주 보고 있는 것이다.

 

 나와 혜숙이
 민주화 운동 하다가 감옥에 들락거리는 이들을
 주변에서 수없이 만나고 함께 생활해 왔듯이

 

 김용일 박사는 암 환자들과 수없이 만나고
 그들과 함께 생활해 온 것 아닌가.....

 
 나는 암이란 병이 인간에게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운 것인지 들어서 알고 있다.

 

 친척이랄지 친지랄지 알 만한 사람들 중에
 암으로 고생하다 운명했다는 말을 전해 듣기도 했다.

 

 하지만 혜숙이 말대로라면
 죽음을 앞두고 있는 암 환자를
 직접 마주 보기는 처음이다.


 아마도 내 사랑 혜숙이 역시
 마찬가지겠지.....

 

 그러니까
 경이로운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
 내게 가까이 좀 와 보라면서
 귓속말로
 귓속말로 속삭이는 게 아닌가?.....

 

 " 어저께도 암 환자가 한 명 퇴원했어.
 아마 못 살꺼 같으니까 집으로 데려 간 모양이야."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 앉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자기 자신도
 바로 그 병을 앓고 있는데......

 

 혜숙이 주변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다 알고 있는데......

 

 혜숙의 말대로
 저 맞은편에 있는 환자 본인은

 자기 자신이 암인 줄 전혀 모르겠지만


 건너편에 있는 혜숙이 암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 환자는 혜숙을 보면서

 젊은 나이에 갓 난 것부터 애들두 셋이나 있다는데

 

 너무 불쌍하고 안 됐다고

 너무 안타깝고 비참하다고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찌해야 하나......
  
 혜숙은 자신이 암이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는다.

 

 절대로 암일리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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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예쁜 내 삼겹살
  


 그즈음 병원에서는
 의사들 사이에
 간호사들과 직원들 사이에

 혜숙이 수술받고 난 직후의 일화가
 한토막 에피소드로 소문 나 퍼져 있었다.

 
 혜숙은 무려 8 시간 동안

대수술을 받았다.

 

 배꼽 바로 위쪽에서 직선 2 cm
 아랫쪽으로 살을 베어 내려 가다가
 오른쪽으로 15 cm, 왼쪽으로 15 cm
 시옷(ㅅ)자 모양으로
 아랫배 전체를 다 열어 볼 수 있도록
 갈라 놓았다.

 

 위를 몽땅 잘라 내고
 비장과 췌장도 일부 잘라 내고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암세포를 모두 찾아 제거하고

 갈라진 배를 다시 봉합했다.
 
 배와 가슴
 온 몸통을 붕대로 칭칭 싸감고
 회복실에 들렀다가 일반병실로 올라 왔단다.


 며칠 후
 주치의와 담당 수련의들이
 온 몸통 칭칭 싸감은 붕대 풀고 환부 소독하려는데

 

 그 때 혜숙이 자기 아랫배에 생긴 상처 보더니
 고개들고 눈을 똥그랗게 치세우면서
 
 " 오머나... 이게 뭐야!
 예쁘게 생긴 내 삼겹살 누가 이래 놨어!
 누가 이렇게 엉망진창으루 썰어 놨어!
 선생님이 그랬지? "

 

 담당 수련의에게
 익살맞은 뽄새로
 항의하더라는 것이다.


 대개의 환자들은 일반적으로
 암인 줄 전혀 모른 채 수술받고 나서
 환부 소독할 때 흉칙스런 상처보고
 그만 놀래버린단다.

 

 그러고부터 혹시 위중한 병 아닐까
 의심하고 불안해 한단다.

 

 여성일 경우에는 그 정도가 더 심하단다.

 때로는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단다.

 

 혜숙이 역시
 그랬을 것 아니겠는가?

 

 그런 경황에서 익살맞은 뽄새로
 담당 의사에게 농을 걸다니.....


 그 당시 두 개층 아래 병동에
 백기완 선생이 입원해 계셨다.

 

 백 선생과 나와 혜숙은
 1974 년 민청학련 사건 때부터
 잘 알고 지내 온 사이다.

 

 1979 년 계엄포고령으로 나와 함께 공범이 되어 구속된 백 선생은
 그때 당한 모진 고문으로 정신착란증과 협심증에 시달리다가
 그 후유증으로 입원한 것이다.

 

 선생은 혜숙의 걱정을
 문병 오는 이에게마다 쏟아 놓으셨단다.

 

 " 신랑은 아직 감옥에 있는데...
 우리 혜숙이가 암 수술 받고 요 위층에 입원해 있어~~~
 참 큰 일이야....."

 

 나는 석방 인사겸 문병겸 백 선생을 찾아 뵈었다.

 오랜 만에 해후하고 안부를 나눈 다음 백 선생이 내게 말한다.

 

 " 그 참... 대단하다 대단해...
 덩치는 자그마한 여인네가 그리 큰 수술을 받고 나서...
 아~니 담당 의사한테 예쁜 내 삼겹살
 누가 이리 엉망으로 썰어 놓았냐고 농을 걸었다니...
 그랬다는 말 나도 내 주치의 김광일 박사한테 직접 들었어...
 병원 의사들 사이에 소문이 쫘~~~악 났다고.....
 김광일이 알지?
 우리 민족 전통문화와 한국인의 정신분석학이란 주제로
 대단한 책 쓴 누마.
 그누마 고등학생 적부터 가까운 친구로 지내왔는데
 어렸을 적부터 배짱좋고 인물 좋고 머리 좋고 했던 넘이었지...
 아~니 그런 상황에서 그런 농이 나올 수 있는가 말이야 글쎄...
 여걸이야 여걸... 박혜숙이 같으면 극복해 내고 말꺼야...
 그런 성격에 그까짓 암이 무섭겠어???
 고금동서 고사에서도 여인네로는 찾아 보기 드문 뱃짱일꺼야...
 대단한 여자야....."



 

30. 남들은 다 하는 도리


 
 내가 출소한 뒤 나흘 후에는
 어머니 칠순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평소
 무슨 날 무슨무슨 날이라 하여
 특별한 음식을 차리고 행사하고 기념하는 것을
 그리 달가와 하지 않으셨다.

 

 세상 일에 쫓겨 살아 가기도 바쁜 터에
 절기다 뭐다 일일이 따지고 챙기고 하는 것을
 허례허식이라 여기셨고 부질없어 하셨다.

 

 우리 가족의 생일도 마찬가지였다.
 기껏해야 생일을 함께 기억하는 정도로
 상징적인 의미로   
 아침 상에 미역국을 올려 놓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머니의 회갑 때도 역시 그랬다.
 어머니는 늘 눈코뜰새없이 분주하셨고
 나는 긴급조치 9 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나는 아직 결혼하기 전이었고
 나의 누이는 오랜 세월 독일에 거주하면서
 돌아 오기 어려운 아니 돌아 올 수 없는 형편이었다.

 

 어머니는 막무가내로 회갑연을 마다하셨다.

 딱히 경제적 형편과 사정이 어려워서도 아니었을 텐데.....

 

 그때 나는 더 이상 어머니의 뜻을 꺾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나와 혜숙은 인근 가까이 있는 용인 에버랜드 공원으로
 어머니 아버님을 모시고 나들이하는 것으로

 회갑연을 대신해야 했다.

 

 그 후 아버님은 박 대통령 시해 사건으로 비상 계엄령이 선포되고
 내가 세 번째 구속되어 계엄사령부에서 고문당하고 취조받는 와중에
 칠순을 맞으시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집안 사정도 그러려니와
 주변 분위기도 아버님 칠순을 기리고 축하할만큼 여유로울 수가 없었다.

 

 결국 남들은 거의 모두가 다 하는 부모님에 대한 도리를
 나는 그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못 하고 지나쳤다.

 

 더우기 아버님은 73 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남들 누구나가 다 하는 자식된 도리를
 다시는 아버님께 해 드릴 기회조차 영영 놓쳐버리는
 불효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이제 아버님을 저 세상으로 떠나 보내시고
 6 년 여 동안 홀로 지내시던 어머니께서 칠순을 맞이하실 차례다.

 

 나는 여러 달 전부터 교도소 접견실에서 아내와 의논해 왔다.

 이번에 어머니 고희연마저 못 하고 지나쳐 버리면
 나와 혜숙이 가슴에 두고두고 씻지 못할 한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남들이 다 하는 자식된 도리를 시늉이라도 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이런 뜻과 주장은 감옥 안에 있는 나보다
 밖에 있는 혜숙이 더 강경했다.

 

 천만다행이게도 어머니 칠순이
 내가 만기 출소하는 날 나흘 후다.

 

 혜숙은 식구들이 입을 한복을 맞추고
 내 몸둘레 사이즈를 재어 갔다.

 

 장소를 예약하고 음식상을 맞췄다.
 초청장을 만들어 주위 분들에게 띄웠다.

 

 민청련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민가협) 등 단체에서도
 나의 석방 환영을 겸해서 축하하기 위해
 어머니의 칠순 행사 준비를 조직적으로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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