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트베르스카야 거리(Tverskaya St) 지도


스타니슬라프스키(Stanislavsky) & 네미로비치-단첸코(Nemirovich-Danchenko) 기념비


트베르스카야 거리 모스크바 예술극장으로 통하는 카메르게르스키 골목의 입구에서

두 명의 입상 기념비를 만난다. 

주인공은 바로 사실주의적 연기 이론을 주창한 연출가 겸 배우이자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창립자인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 (Константи́н Станисла́вский)와 그의 선배이자 동료였던 

블라디미르 네미로비치-단첸코 (Владимир Немирович-Данченко).


스타니슬라프스키 & 네미로비치-단첸코 기념비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 


콘스탄틴 세르게예비치 스타니슬라프스키(Константи́н Серге́евич Станисла́вский, 1863년~1938년)는 

러시아의 연출가이며 배우이다. 

러시아의 모스크바 예술극장(Moscow Art Theater)을 창립했다.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주장한 연기 기법은 오늘날의 사실적인 연기 방식의 원조이자 모범이 되었다.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극 사상

그가 만들어 낸 시스템이 종래의 연극 시스템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예술창조의 결과가 아니라, 

그러한 결과를 낳게 하는 원인을 분명히 갖고 있는 점이다. 

그가 제일 흥미를 느낀 것은 희로애락이란 정(情)의 외면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것이 태어나 발전하는 과정과 논리였다.

그는 배우 예술에 있어서 자기가 주장하는 방향을 '마음으로 체험하는 예술'이라 이름짓고, 

이것을 '형태로 나타내는 예술'과 구별하고 있다. 

그는 예술 창조의 순간에 있어서의 심리체험의 성실성을 배우예술의 가장 중요한 특수성이라 생각하고, 

관객에게 사상적 · 정감적(情感的)으로 작용하는 최대의 힘을 갖는 것은 그러한 예술임을 강조하였다.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연기를 개척

스타니슬랍스키는 무대 위에서 배우가 자연스럽게 연기하여,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이 마치 실제 현실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느껴야 한다고 여겼다. 

메소드 연기(Method acting)라고도 하는데 이를 위해 우선 그는 배우의 연기법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전 극에서 등장하는 왕이나 영웅 역할같이 과장되고 격한 연기는 관객에게 사실적인 느낌을 주기 힘들었던 것이다.


너무 크고 과격한 행동이나 과장되고 괴상한 목소리는 사실적인 연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배우는 등장 인물의 특성을 드러낼 습관 같은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을 바보 같다고 여기는 인물을 스스로를 주먹으로 쥐어박는 행동을 습관적으로 할 수 있다.

아무리 맡은 배역이 지닌 객관적인 겉 모양을 똑같이 흉내내더라도, 

등장 인물의 마음 속에서 타오르는 욕망과 감정의 소용돌이를 배우에게서 관객이 느끼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옷과 행동만 흉내낸다면, 관객은 배우를 '가짜 인형'으로 느낄 것이다. 


배우는 등장 인물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연극에서 겉으로는 잘난 체를 하며 남을 무시하고 공격하는 행동을 하는 인물이라도, 

그 또는 그녀가 삶에서 정말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사랑'일 수 있다. 

이때 그 인물의 목표는 '남에게 사랑 받는 것'이다. 

배우는 자신이 맡은 역할의 마음 속 진짜 목표를 알고, 그것을 관객에게 느끼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배우 중에는 극 중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이 대사를 할 때만 열심히 연기하고, 

대사가 없을 때는 누워 있거나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람은 말을 하지 않는다고 바로 죽지 않는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배우에게 마음 속으로 "집중의 원"(circle of attention)을 그리라고 권한다.

말 그대로 이 원을 그릴 때는, 배우가 집중해야 하는 공간을 포함하게 그려야한다. 

처음에는 작게 그려서 구체적인 사물을 담는 정도에 그친다. 

그러다가 다른 연기자도 포함되도록, 점점 그 원을 넓게 그려 나가야 한다. 

이렇게 여러 배우들이 서로를 신경쓰면서 호응하는 연기를, "앙상블 연기(ensemble)"라고 한다.


블라디미르 네미로비치-단첸코


블라디미르 네미로비치-단첸코(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Немирович-Данченко, 1858 ~ 1943)는 

러시아의 연출가다.

그의 예술의 특색은 가열성과 준엄성에 있으며, 그 연출의 필치는 힘의 집중과 간결성에 넘쳐 있었다. 

그의 연출법은 자연주의나 형식주의와도 대립되는 것이었다. 

그는 항상 희곡의 이념에 따라, 극에서 불필요한 것은 가차 없이 제거해 나가면서 

가장 풍부한 표현과 필요 불가결한 세부를 찾아 나갔다. 

그는 거짓말투성이의 '연극성'에 대적하면서도, 자연주의적인 단순성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예술가를 온순한 사진가로서 이해하는 일을 단연 거부하고, 동시에 정신빠진 형식주의 · 유미주의와 싸웠다. 

그의 예술적 입장, 원칙, 미학은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와 동일하며, 

이 두 사람의 연극개혁자가 지향하는 길은 평생 변함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모스크바 예술극장 (Moscow Academic Art Theatre)


모스크바 예술극장 (Moscow Academic Art Theatre)


러시아의 대표적 극단 및 그 극장 모스크바 예술극장 (Moscow Academic Art Theatre)

 정식 명칭은 '고리키기념 국립 모스크바 예술 아카데미'로 그 대문자를 따서 므하트(MXAT)로 약칭한다. 

1890년 모스크바를 순방한 마이닝겐극단의 영향을 받아 1898년 아마추어 배우이자 연출가인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Konstantin Stanislavsky)와 극작가인 블라디미르 네미로비치단첸코

(Vladimirovich-Danchenko)에 의해 설립되었다. 


초창기 극단의 주체는 창립자 두 사람에게 지도를 받은 예술문학협회와 

필하모닉 음악연극학교를 졸업한 아마추어들이었다.

두 창립자는, 새로운 극장은 누구든지 입장할 수 있고 누구나 알 수 있는 민중의 극장이 되어야 하고, 

또 무대 약속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여 연극의 이상에 반대되는 것을 철저하게 배제한다는 의도 아래 극장을 열었다. 

그리고 스타니슬랍스키는 배우들의 사실적인 연기를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무대에 올린 첫 작품은 알렉세이 톨스토이(Aleksey Tolstoy)의 《표도르 요안노비치 황제》였다.


새로운 극장의 존재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상연 작품이 필요했는데, 

이 극장의 큰 수확은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와 

막심 고리키(Maxim Kor'kii) 두 극작가를 얻은 일이다. 

체호프의 《갈매기:The Seagull》 공연이 성공함으로써 극장은 획기적인 발전을 했으며, 

뒤를 이어 《바냐 아저씨》《세 자매》《벚꽃동산》 등이 공연되었다. 

1905년 혁명으로 이어진 당시 사회의 격동은 고리키의 《밑바닥》에 잘 반영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V.I.레닌(Lenin)과 A.V.루나차르스키(Lunacharsky)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서 

1920년대에 유럽과 미국을 순회공연했고, 1941년까지 러시아 고전극과 소비에트 창작극을 공연했다. 

이 극장은 1932년 고리키의 문학생활 40년을 기념하여 '고리키 기념극장'이라고 명명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1950년대 이후는 잠시 정체상태에 빠지기도 했으나,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에 런던 순회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침으로써 다시 예전의 명성을 되찾았다. 

1970년에 I.A.예프레모프를 주임연출가로 맞아들였고, 

1987년에는 구관 및 부속극장, 1975년에 개관한 신관, 소무대까지 갖춘 총인원 400여 명의 대무대로 확장하고, 

신관을 제(諸)민족우호극장으로 개칭하였다.


모스크바 예술극장 (Moscow Academic Art Theatre)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탄생이 세계의 근대극 운동에 끼친 영향은 연극사상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예술극장이라면 우선 <세 자매>나 <밑바닥>의 무대가 생각나는 것처럼, 

모스크바 예술극장은 안톤 체호프와 막심 고리키에 의해 성장한 극단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술극장의 상연 목록은 그러한 제정러시아 시대의 고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러시아 연극사에 한 시기를 이룬 프세볼로트 이바노프의 <장갑열차>, 

니콜라이 포고진의 <크레믈린의 큰 시계>를 비롯하여 수많은 현대극이 상연되고 있다. 

이것은 무대의 진실을 지향하는 리얼리즘을 향한 이 극장의 전통을 말해주고 있다. 

이 극장은 시가의 북쪽, 일반 주택지가 있는 그리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으며 

내부도 요란스런 장식이 전혀 없는 간소한 것으로 객석수는 1,183개, 3층 좌석의 제일 뒤 객석에서도 

무대가 잘 보여서 드라마 극장으로서는 아주 이상적인 규모이다.






모스크바 예술극장 (Moscow Academic Art Theatre) 내부




[영상] 모스크바 예술극장


트베르스카야 거리 (Tverskaya St)



[영상] 트베르스카야 거리 (Tverskaya St)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기념비 (Monument to Sergei Prokofiev)


이 골목이 톨스토이나 차이콥스키 등 모스크바의 예술가들이 많이 활동했던 곳이기도 하고,
혁명기에 살았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Серге́й Проко́фьев)의 집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오늘날 기념 박물관이 된 그의 집 앞에 역시 그의 모습을 한 동상이 서 있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기념비 (Monument to Sergei Prokofiev)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Sergei Prokofiev Sergei Prokofiev, Сергей Сергеевич Прокофьев)는 구 소련
손초프카 (現 우크라이나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에서 태어났고, 어릴 적부터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음악에 심취해 다섯 살 때 첫 작품인 피아노 소품 '인디언 갈롭'을 작곡했다.
이어 아홉 살 때는 첫 오페라인 '거인'을 작곡해 집에서 연주하기도 했고, 체스에 몰두하기도 했다.
참고로 체스는 6살 때부터 두기 시작했고 체스도 음악만큼의 위상은 아니어도
알레힌, 카파블랑카, 라스커 등의 굵직굵직한 체스챔피언들과도 경기한 기보도 남아 있다.


아들이 확실히 음악에 재능이 있음을 간파한 어머니는 1902년에 당시 모스크바 음악원 원장을 맡고 있었던
작곡가 세르게이 타네예프에게 조기 교육을 시켜줄 것을 부탁했는데, 타네예프는 자신의 대위법 제자였던
작곡가 라인홀트 글리에르에게 손초프카로 가서 피아노와 작곡 교습을 해주도록 했다.
프로코피예프는 처음에 글리에르의 수업에 열성적으로 따랐지만,
이내 글리에르의 보수적인 이론 교육에 싫증을 냈다.


프로코피예프의 부모는 손초프카가 아들이 음악 교육을 받기에는 너무 낙후되고 고립되어 있다고 판단했고,
1904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그 곳 음악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던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에게
아들이 쓴 작품의 악보를 보여주면서 입학 시험을 치르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글라주노프는 제안을 받아들여 프로코피예프에게 시험을 보게 해 입학시켰다.


하지만 프로코피예프는 여기서도 그다지 만족하지 못했고, 학생들이나 교수들도
프로코피예프의 도발적인 행동과 무례함에 당혹스러워했다.
여기서 쓴 작품들에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반음계 어법과 불협화음이 자주 사용되었고,
이는 보수적인 성향의 음악원에서 자주 논쟁을 유발했다.


음악원 졸업 후 프로코피예프는 젊고 도발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러시아 음악계에 일찌감치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는데, 특히 처음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들에서
보수파와 혁신파 사이에 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어쨌든 일찍부터 주목받은 프로코피예프는 1911년 러시아의 유력 음악 출판사인
유르겐손과 계약해 자신의 작품들을 출판했고, 1913년부터는 해외 연주 여행도 다니기 시작했다.


이들 여행에서 프로코피예프는 당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를 비롯한 젊은 작곡가들과 손을 잡고
신작 발레들을 공연하던 흥행주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를 만났고,
디아길레프는 이 젊은 작곡가의 똘끼에 감탄했는지 발레를 써보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첫 번째로 나왔던 '알라와 롤리'는 디아길레프가 거부했고,
1차대전으로 인해 유럽의 음악 활동 전반이 위축되자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전쟁 중에는 징집을 피하기 위해 음악원에 재등록해 오르간을 배우기도 했고,
1917년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가지고 오페라 '도박사'를 완성해 초연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초연 계획은 같은 해 발생한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무기한 연기되었고,
그 대신 프로코피예프는 고전주의 양식을 응용한 첫 교향곡과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면서 혼란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혁명 후 수립된 사회주의 정권에서도 프로코피예프는 음악 활동을 하기 힘들 거라는 생각을 했고,
당시 교육인민위원장이었던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의 허가를 받아 1918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프로코피예프는 피아니스트로 꽤 성공을 거두었지만,
여기서도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의 초연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빚만 잔뜩 지고 버로우해야 했다.
미국에서도 실망한 프로코피예프는 다시 프랑스 파리로 옮겨갔고,
여기서 전쟁 전 만난 디아길레프에게 두 번째 발레 작품을 위촉받아 '어릿광대'를 작곡했다.
'어릿광대'는 1921년에 파리에서 초연되어 대박을 쳤고, 스트라빈스키와 모리스 라벨,
장 콕토를 비롯한 진보적 문예 인사들로부터도 호평을 받았다.

같은 해에는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을 시카고에서 초연해 역시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후 뉴욕에서 재연했을 때는 망했어요 상태가 되어 또 한 번 미국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프로코피예프는 1923년에 다시 파리에 이주해 오페라 '불의 천사'의 작곡에 주력하는 한편,
두 번째 교향곡과 발레 '강철 계단'으로 모더니즘 작곡가라는 이미지를 굳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프로코피예프는 자신의 도발적인 작풍에도 점차 싫증을 내기 시작했고,
이후 작곡 스타일을 조금씩 바꾸어갔다.
오랜 시간 공들여 완성한 '불의 천사'도 1927년에 베를린에서 브루노 발터의 지휘로
시립 오페라단이 초연하기로 일정을 잡았지만, 악보 발송에 차질이 빚어지는 바람에 취소되어 또 물을 먹었다.

같은 해에는 1918년 출국한 이래 거의 9년 만에 소련에서 연주 여행을 했는데,
레닌그라드에서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이 소련 초연되어 절찬을 받고
자신도 피아니스트로 호평을 받는 등 예전과는 다른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 때부터 프로코피예프는 다시 소련으로 귀국하는 것에 대해 심사숙고하게 되었지만,
동시에 소련 정권이 보여주던 억압과 통제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했다.


1929년에 디아길레프가 발레 '방탕한 아들'을 공연한 것을 끝으로 사망하자,
프로코피예프는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소련 문화예술계와 작업을 시작해
발레와 영화음악 등을 소련에서 발표했다.
결국 1936년에 프로코피예프는 영구 귀국을 선언했고,
곧 전년도에 쓴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의 초연을 위해 당국과 교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때부터 소련의 문화 정책은 소위 '사회주의 사실주의'노선을 따라가기 시작했고,
비록 초기의 독기와 똘기가 상당히 빠지기는 했지만 프로코피예프의 작품들도
차츰 형식주의에 빠졌다며 비판을 받게 되었다.


결국 프로코피예프도 여타 소련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정권의 노선에 영합하는
소위 '접대용' 작품들에 주력하는 쪽으로 창작 노선을 바꾸었고,
10월 혁명 20주년 기념 칸타타나 소련 시인들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집,
음악 동화 '피터와 늑대'등을 작곡해 선보였다.
하지만 칸타타의 경우 지나치게 거대하고 난잡하다는 당국의 비판을 받아
이후 프로코피예프 생전에 연주되지 못했고, 그 반대로 1937년에 작곡한 노골적인 쇠돌이 아저씨
써킹 작품인 '우리 시대의 노래'는 반대로 너무 단순하고 밋밋하다는 이유로 디스 당했다.
뭐 어쩌라고 부르주아 정신을 인민에게 깃들게 하지 않으려는 정책과 충돌한다고 했다나.
다만 피터와 늑대는 어린이를 위한 우화로서, 그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세계적으로 널리 사랑받는 작품이 되었다.


이 시기 이후로 프로코피예프의 해외 여행은 크게 제한을 받았고,
1938년에 마지막으로 미국 순회 공연을 가진 뒤에는 당국으로부터 여권을 압수당해
이후 평생 동안 소련에 짱박혀 있어야 했다.
게다가 소련 정주 선언 이래 의욕적으로 작곡한 오페라 '세묜 코트코'도 초연에 심하게 애를 먹었는데,
초연 직전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독일과 관계가 개선되면서 독일을 악역으로 설정한 대본을 급히 수정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이 오페라의 초연을 같이 준비하던 연출가 브세볼로드 메이에르홀드가 대숙청에 쓸려나갔고,
프로코피예프는 자신도 마찬가지로 끔살당할 수 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프로코피예프는 1939년에 스탈린 동무의 60번째 생일에 맞추어
 '건배'라는 제목의 한층 더 노골적인 후빨 칸타타를 발표했고,
이 작품은 폐기된 이전의 두 교성곡들과 달리 공식적으로 환영받았다.
그리고 당시 소련에서 가장 주목받던 영화 감독들 중 한 사람이었던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이
프로코피예프에게 자신의 신작 영화 《알렉산드르 넵스키》의 OST를 작곡해 달라고
부탁해온 것도 '명예회복'에 큰 역할을 했다.


예이젠시테인은 프로코피예프에게 가능한 모든 편의를 베풀었고,
심지어 몇몇 전투 장면에서는 프로코피예프의 음악 리듬에 영상을 맞추어 촬영하는 등
매우 긴밀한 협업으로 걸작을 만들어냈다.
프로코피예프는 영화 발표 후 OST의 일부를 연주회용 칸타타로 다듬어 내놓았고,
이 칸타타는 프로코피예프의 후기 작품들 중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외에도 피아노 소나타 6-8번(흔히 전쟁소나타라고 부름) 같은 순수 기악 작품들도 호평을 받았다.


독소전쟁이 터진 뒤에는 다른 주요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동부로 피신했고,
거기서도 이런저런 정권 영합성 작품들 외에 바이올린 소나타나 현악 4중주 등을 계속 작곡했다.
전쟁 후반기인 1944년에 작곡한 교향곡 5번은 이듬해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고,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하차투리안의 교향곡 2번 등과 함께
전쟁 중 작곡된 소련 교향곡들 중 최고의 작품으로 널리 선전되었다.


하지만 그 즈음 낙상 사고로 입은 뇌진탕으로 인해 건강이 점점 악화되기 시작해고,
종전 후 스탈린의 심복이었던 안드레이 즈다노프를 앞세워 다시 문화예술계를 조이기 시작한
소련 당국의 압박에도 다시금 시달리게 되었다.
특히 피아노 소나타 9번과 교향곡 6번이 당국으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1948년에 무라델리의 오페라 '위대한 친선'으로 불붙은 대대적인 음악계 숙청 운동에도 휘말려
공공의 적으로 신나게 까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전쟁 중 버로우해야 했던 '세묜 코트코'를 대신할 새 오페라였던 '전쟁과 평화'도 생전에 초연되지 못했고,
예이젠시테인과 작업한 《이반 뇌제》의 2부도 상영금지크리를 먹는 등 계속 불운이 이어졌다.
이미 건강도 계속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창작 활동도 크게 위축되어 있었고,
1952년에 교향곡 7번의 초연을 마지막으로 예전 작품들을 개작하면서 투병 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3월에 뇌출혈로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하필이면 프로코피예프가 죽은 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강철의 대원수 스탈린의 사망 소식이 발표되면서,
프로코피예프의 사망 소식은 완전히 묻혔다.
심지어 프로코피예프의 집이 붉은 광장에서 가까웠던 탓에, 서기장 동무를 조문하고자 광장으로 몰려들던
수십만 명의 군중들을 피해 다른 거리들을 전전하며 한참을 돌아나가 관을 운구해야 했다.
노보데비치 묘지에서 극히 간소한 장례식이 열린 뒤에도 한 동안 소련 언론은
인간백정 아저씨의 장례식만 줄창 보도하느라 프로코피예프의 부고를 싣지도 않았다.
심지어 조화조차 스탈린을 조문하기 위해 인민들이 몽땅 구입해가서,
프로코피예프의 장례식에는 조화를 쓸 수 없었다.
그나마 평생 앙숙이었으면서도 서로 능력은 인정하는 사이였던 쇼스타코비치가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는게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Anton Pavlovich Chekhov, 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1860년 1월 29일 ~ 1904년 7월 15일)는 러시아의 의사, 단편 소설가, 극작가이다.


체호프는 1860년 흑해 위에 있는 아조프 해 연안의 항구 도시 타간로크(Taganrog)에서
식민지 수입 상품점을 하는 아버지 파벨 예고로비치 (Pavel Egorovič)와
어머니 예브게니야 야코브레브나 모로조바 (Evgenija Jakovlevna Morozova)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난다.
조부는 원래 농노였으며 부친은 조그마한 채소가게를 했었다.
체호프는 어릴 때부터 가게를 도와야만 했다.


1867년 고향에서 고대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예비학교를 다닌 후,
1869년 고전 교육을 목표로 하는 타간로크 인문학교에 입학한다.
1872년 성적 불량으로 3학년 과정을 반복하며, 3년 뒤 고대 그리스어 시험에 낙제하여 다시 5학년 과정을 반복한다.


지방정치와 교회합창에 너무 열중한 부친은 파산, 체호프 가족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며,
학교 때문에 홀로 남은 체호프를 제외하고는 모두 모스크바로 나왔다.
15세의 체호프는 큰 형 알렉산드르와 함께 문학 창작에 열중한다.
두 형 알렉산드르와 니콜라이 그리고 동생 이반이 5년 과정으로 타간로크 학교를 졸업한 반면,
체호프은 1879년 8년 과정으로 학교를 졸업함으로써 대학 진학 자격을 얻는다.
같은 해 타간로크 모교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모스크바로 올라가 그 곳에 이미 자리를 잡은 부모 형제들과 재회하며,
같은해 10월 모스크바 대학의 의학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이 때부터 체호프는 의학공부를 하는 한편 타간로크에서 받는 장학금과
상트페테르부르크나 모스크바의 잡지에 유머 단편을 써서 그 기고료로 부모와 세 동생의 뒷바라지를 한다.


1887년 연극 이바노프의 첫 상연이 있기까지 체호프은 문학잡지 《귀뚜라미(Strekoza)》, 《파편(Oskolski)》,
《자명종(Budilnik)》, 《페테르부르크 신문》 등에 100줄에서 150줄로 한정된 짧은 단편과 수필을 일주일이 멀다하고 기고한다.
특히 1883년에는 《Oskolski》에 매 이주일마다 모스크바의 일상을 스케치하는 컬럼을 맡는다.
체호프의 글은 호평을 받았으며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이미 신진 소설가로서의 명성이 높았다.


이처럼 글을 써 돈벌이를 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883년 10월부터 의학 졸업시험 준비에 열중하여 다음해 9월 졸업을 했다.
그러나 23세 때 걸린 폐결핵이 체호프의 건강을 늘 위협하게 된다.
그 해 11월에 처음 결핵 증세로 요양하게 되었다.
1884년에는 또한 첫 단편집 《멜포네네의 우화》가 출판된다.


톨스토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체호프는 시베리아, 사할린 섬 여행을 계획하고
치밀한 준비를 한 끝에 1890년 4월 모스크바를 출발했다.
사할린 섬에 유배된 수인(囚人)들의 비참한 생활은 체호프의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새겼다.
그는 후에 이때의 기행문을 쓴 바 있다.


7개월 이상이나 걸려 모스크바에 다시 돌아와 1892년, 교외에 저택을 사서 양친 · 누이동생과 함께 살게 된다.
의사로서 이웃 농부들의 건강을 돌보거나 마을에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1899년,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얄타를 마주보는 크림 반도로 옮겼다.
1900년에는 러시아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나 이에 항의하여 스스로 사임하고
1904년에 체호프는 폐결핵으로 말미암아 44년의 생애를 마쳤다.


체호프의 만년은 연극, 특히 모스크바 예술극단과의 유대가 강했고,
1901년에 결혼한 올리가 크니페르는 예술극단의 여배우이기도 했다.
그러나 체호프는 타간록 시대에 이미 연극에 흥미를 가졌으며, 직접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이 시기에 장막물(長幕物) 2편, 1막물 희극 1편을 썼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모스크바에 나와서는 4막물의 것을 써서 상연하려고 꾀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 작품은 19세기 말의 러시아 사회상태를 배경으로 하여 태만한 환경에 반항하면서도
스스로는 아무런 의욕도 갖지 못하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1887년에 쓰여진 <이바노프>는 모스크바 및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기교적으로는 <프라토노프>보다 앞섰으나 아직도 과잉된 극적 효과를 노리는
낡은 수법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다음의 <숲의 정(精)> 실패는 체호프의 극작을 한때 멈추게 했으나
이 무렵에 쓰인 1막물에는 <곰>(1888)이나 <결혼신청>(1889) 등 뛰어난 희극이 있다.


체호프의 극작 후기는 1896년의 <갈매기>에서 시작된다.
이 작품 및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바냐 아저씨>(1899), <세 자매>(1901), <벚꽃동산>(1903) 등은
모두 체호프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근대극 가운데 걸작이며 이러한 작품에서 체호프는
일상생활의 무질서를 그대로 무대에 옮긴 듯한, 이른바 극적 행위를
직접적 줄거리로 삼지 않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회화극(會話劇)을 확립했다.


<갈매기>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초연 때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으나
2년 후에 다시 새로 설립된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다루었을 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희극으로서 쓰여진 이 작품을 오히려 비극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 연출가
스타니슬랍스키가 진정으로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고 있다고 체호프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후 체호프의 작품은 모두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상연하게 됐다.


<바냐 아저씨>는 앞서의 <숲의 정>을 다시 쓴 것으로서 그 톨스토이즘이나
멜로드라마의 성격에서도 완전히 벗어나고 있다.
<세 자매>는 초연 후 전집에 수록되자 다시 고쳐쓴 바 있다.
마지막 작품 <벚꽃동산>은 체호프의 44세 생일에 초연의 막이 올랐다.


체호프의 희곡(주로 후기의 4작품)은 오랫동안 러시아나 외국에서도
작자의 페시미스틱한 인생관을 반영한 러시아 귀족사회에 대한 만가(挽歌)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체호프 자신은 그러한 견해에 거의 놀라움을 금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작품 안에 작자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넘칠 정도로 깃들여 있다는 것이 그 후의 정정(訂正)된 해석이다.
<세 자매>나 <벚꽃동산>에서 서술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到來)에 대한 전망은
체호프가 죽은 지 얼마 후에 실현된 러시아 혁명을 예언한 것이라고도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체호프를 다만 비관적인 작가로부터 낙관적인 작가로 그 정의를 고치는 것만으로는 무의미할 것이다.
얼핏 보면 비극적이며 사진적(寫眞的)인 모방처럼 보이는 이러한 희곡이 사실은 매우 정교하게 계산된
극적 형식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체호프의 작극술(作劇術)을 구명한다는 것이 그를 이해하려는 첫걸음일 것이다.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인증샷


트베르스카야 거리 (Tverskaya St) 레스토랑에서 점심 메뉴


유리 돌고루키 (Юрий Долгорукий)의 기마상

유리 돌고루키 (1099 ~ 1157)는 키예프 대공국의 대공 (재위: 1149년 ~ 1151년)으로
블라디미르 모노마흐(Monomakh) 대공의 작은 아들이다.


1121년에 영지를 로스토프에서 수즈달로 옮김으로서 그의 영지는 로스토프-수즈달 공국으로 불리게 된다.
유리 돌고루키는 발트계 및 핀족 계열의 이민족들과 맞서 싸우며 영토를 넓히고,
트베리, 모스크바 등 수많은 도시와 요새들을 건설하였다.
유리 돌고루키는 이후 랴잔 공국을 굴복시킨 후 1149년 키예프를 점령하였지만
1151년 이자슬라프에 의해 키예프에서 쫓겨났으며,
1155년 키예프를 재점령하고 난 후 1157년에 급사하였다.

유리 돌고루키 (Юрий Долгорукий)의 기마상


레닌(Влади́мир Ле́нин)의 좌상
유리 돌고루키의 동상 뒤, 광장의 동편 끝에는 레닌(Влади́мир Ле́нин)의 좌상이 있다.

혁명광장


부활의 문을 나서면 나오는 큰길 오코트니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500m쯤 가면 혁명 광장이 있고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흉상 뒷 모습과 광장 건너편 북쪽에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볼쇼이 극장이 보인다.

 칼 마르크스 (Karl Marx)의 흉상


볼쇼이 극장 앞으로 대로 건너편 혁명 광장에는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흉상이 있다.
기단에 새겨진 문구는 그가 쓴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장

Пролетарии всех стран, соединяйтесь!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모스크바 볼쇼이극장 (Bolshoi Theater)


볼쇼이극장은 대극장이란 뜻으로 모스크바 역사에서 빛나는 문화 유산이다.
현 볼쇼이극장의 연혁은 1776년 페터 우루쏘브(Peter Urussov) 대공의 저택에서
오페라와 발레를 공연했던 소규모 극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몇 년 후 우루쏘브 대공의 개인 저택에서의 공연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어
페트로브카 (Petrovka) 극장이라는 이름으로 공인을 받아 오페라와 발레를 정식으로 공연하기 시작했다.


1805년 이 극장이 화재로 전소되자 제정러시아는 당대의 안드레이 미하일로프(Andrei Mikahilov)에게
설계를 의뢰하여 새로운 위용의 오페라극장을 짓도록 했다.
미하일로프는 인근에 말리(Maly)극장을 건설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당시 러시아의 모든 극장은 제국황실 소유였다.
당시 모스크바와 생페테르부르크에는 각각 두 곳의 극장이 있었다.
하나는 주로 오페라와 발레를 공연하는 극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비극이나 코미디 연극을 주로 공연하는 극장이었다.
오페라와 발레는 연극보다 좀 더 귀족적이라고 생각한 제정러시아는 오페라와 발레 전용 극장을
볼쇼이 (그랜드: Large) 극장이라고 부르고 연극전용 극장은 말리 (소규모: Little) 극장이라고 불렀다.

모스크바 볼쇼이극장 (Bolshoi Theater)


볼쇼이 극장은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했지만 한 번의 화재로 소실되어 재건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확장 증축하여 현재의 건물이 완성되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격조있는 공연이 열리며
이를 관람하는 사람들 또한 매너있는 태도로 감상한다고 한다.

모스크바 볼쇼이극장 (Bolshoi Theater) 내부






모스크바 볼쇼이극장 (Bolshoi Theater)




바흐탄고프 극장 (E. Vakhtangov State Academical Theatre)


이 건물은 배우이자 연극 감독이었던 예브게니 바흐탄고프

(Yevgeny Bagrationovich Vakhtangov, Евге́ний Багратио́нович Вахта́нгов 1883~1922)의 

이름을 붙인 바흐탄고프 극장 (E. Vakhtangov State Academical Theatre)이다. 

1921년 11월, 바흐탄고프의 연극 스튜디오로 만들어져 1922년에 “투란도트 공주”를 첫 시연했다. 

바흐탄고프가 첫 시연 후 사망하자 그의 명 연출을 추모하기 위해 투란도트 공주 분수대를 만들었다. 

그의 사후에도 재능 있는 제자들은 창립자의 뜻을 훌륭하게 이어갔다.


러시아 말르이(Maly, 1824년) 극장이나 모스크바 예술극장(1898년)처럼 지금도 제1선의 극장이다. 

여전히 이 극장에 대한 애호가와 지지자들이 많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현재의 건물은 독소 전쟁(1941~1945)때 폭격으로 파괴되었다가 재건된 건축물. 

대형 객석은 최대 1055석, 작은 객석은 최대 250명을 수용하며 부대시설로 예술 카페 등이 있다. 

비록 이 극장에서 공연은 보지 못하고 극장 내부에 붙여진 포스터를 보는 것으로 족했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공연을 보고 싶은 곳이다.


바흐탄고프 극장 


예브게니 바흐탄고프는 러시아의 연출가다.

혁명 전부터 모스크바 예술극장 및 그 연구 극장에서 연출가 · 배우로서 일하는 한편, 

젊은 학생들의 연극 서클의 지도자가 되었고 또한 몇 개의 연극학교에서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의 가르침을 넓히는 배우 교육자가 되었다. 


1920년 그가 이끄는 집단은 예술극장 제3 연구 극장의 명칭을 받고, 이듬해 11월 그가 연출한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성 안토니의 기적>으로 새로운 극장이 공식적으로 발족하였으며, 이것이 바흐탄고프 극장의 창립일이 되었다. 

이 밖에 그가 연출한 작품은 예술극장 제1연구 극장에서의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의 <에릭크 14세>, 

유태극장 가비마에서의 S. 안스키의 <가디부크>, 카를로 고치(Carlo Gozzi) 원작의 <투란도트 공주>뿐이다. 

이들 4개의 작품은 혁명 전 그가 연출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1920년대에 있어서의 혁명연극은 무대에서의 내면적 체험을 부정하고, 배우술을 단순한 외면적 기술로 만들고 말았다. 

그들의 연기는 그 기교의 다채로움으로 해서 관객의 눈을 즐겁게 하기는 했으나, 

등장인물의 행동은 내면의 심리적 필연성이 결여(缺如)된 것이었다. 

바흐탄고프의 길은 이와는 달리, 자연주의나 심리주의 연극에서 가치있는 것, 

즉 인간감정의 살아 있는 진실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우로부터 구한 것이다. 

이것은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와 프세볼로트 메이예르홀트의 연극 시스템의 유기적 결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바흐탄고프 극장


아르바트 한가운데에 1921년부터 화려한 연극 극장이 있었다. 

1941년 7월 독일군의 폭격에 의해 파괴되고, 1947년 재건되었다.

극장을 더욱 화려하고 섬세하게 꾸미고 각 공연을 축제의 한 장면처럼 만들어 연극계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킨 

바흐탄고프의 이름을 따 극장을 설립하였다. 


 '투란도트 (Turandot) 공주의 상'


오른편 분수 한가운데에는 1922년 초연된 '투란도트 공주'의 무대에 올랐던 배우들을 기념하여 

황금동상으로 된 투란도트 공주의 상이 세워졌다.

1997년 오페라 투란도트 (Opera Turandot) 초연 75주년에 맞춰 알렉산더 부르가노프라는 조각가가 세웠다.

오페라 공연의 투란도트 줄거리는 중국의 공주 투란도트가 청혼의 조건으로 수수께끼를 내걸자

페르시아의 칼리프 왕자가 도전하여 공주의 사랑을 쟁취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오페라 <투란도트 Turandot>는 전설의 시대 중국이 배경이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우화 작가 카를로 고치(Carlo Gozzi:1720~1806)가 이야기를 썼고, 

후일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1759~1805)가 근대 희곡 스타일로 다시 만든 것을 

오페라의 원작으로 삼았다.


남자를 협오하는 중국의 공주 투란도트는 세계 각국에서 몰려오는 구혼자들을 모두 물리치는데, 그 방법이 독특하다.

공주는 세 가지 수수께끼를 낸다. 모두 맞히면 공주와 결혼할 수 있지만, 하나라도 틀리면 곧바로 참수형이다.

이때 타타르의 왕자 칼라프(Calaf)가 자신의 이름을 숨긴 채 그녀에게 구혼장을 내민다.

왕자는 우여곡절 끝에 난해한 수수께끼를 모두를 풀어내지만 그래도 공주는 계속해서 그의 구애를 거부한다.

왕자는 말한다. "그렇다면 이번엔 내가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내일 아침까지 내 이름을 알아내면 공주 당신의 승리, 그렇지 않으면 내가 사랑으로 당신의 마음을 녹여낼 것입니다."


위대한 사랑의 승리를 노래한 푸치니 (Giacomo Puccini:1858~1924)의 찬연하게 빛나는 최후의 오페라.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푸치니는 교회 음악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음악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이탈리아 서북부의 도시 루카(Lucca)에서 나고 자랐다. 

1876년 '아이다'를 보기 위해 루카에서 피사까지 30km나 되는 거리를 걸어갔을 정도로 

베르디의 작품에 깊은 애정을 가졌으며, 그의 작품에 크게 감명받고 오페라 작곡가의 꿈을 품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베르디의 작품처럼 전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의 이탈리아 오페라 전통의 상징이 됐다.


푸치니 음악의 특별함은 극적인 음악표현에 있다. 

그는 대본과 음악에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완벽주의자였다고 전해진다. 

그의 강렬하고도 섬세한 음악은 마치 귀로 한 편의 극을 보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특히 유작이 된 '투란도트'에 많은 애정을 쏟았는데, 작곡할 당시 푸치니는 

“이 전의 오페라는 잊어도 좋다” 라고 말했을 만큼 작품에 확신을 가지고 

새로운 음악을 창작해 내려 혼신의 힘을 다했다. 

'투란도트'의 어두운 동화 속 분위기와 고대 중국설화의 소재를 극대화하기 위해 

동양적인 언어와 중국 선율을 가져와 풍부한 소리 세계를 만들어 내면서 

그는 이전의 작품들보다 훨씬 더 독창적이며 화려한 음악색을 표현해 냈다.


'투란도트'는 카를로 고치(Carlo Gozzi)의 희곡으로 페르시아의 서사시 '7명의 미녀(Haft Peycar)'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12세기 시인 니자미(Nizami)가 고대 중국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투란도트 공주에게 

구애하기 위해 노력하는 칼라프 왕자의 이야기를 썼다고 전해진다. 

푸치니는 주세페 아다미와 레나토 시모니와 함께 대본 작업에 들어갔다. 

그동안 한 번도 다뤄 보지 않은 초현실적인 시대 배경과 낯선 중국문화를 재현해 내기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음에도 환상적인 내용은 그를 매료시켰고, 

끊임없는 창작과 수정을 거듭하고서야 마침내 2막을 완성할 수 있었다.


<투란도트>는 푸치니에게는 여러모로 낯선 소재였다. 

그동안은 청순가련형의 여주인공을 앞세워 달콤한 로멘티시즘으로 가득 찬 오페라를 만들었던 그였다. 

<라보엠>의 미미, <토스카>의 토스카와 <나비부인>의 초초상 등은 모두 다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 전형적인 푸치니 형의 여주인공이다.

그러나 투란도트 공주는 출발부터 다르다. 

남자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심지어 남자를 혐오하거나 멸시한다.


그는 이탈리아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머나먼 땅 중국의 공주다. 

이 색다른 테마를 푸치니는 보다 현대적인 음악어법으로 풀어가기로 마음먹는다. 

바그너의 반음계와 불협하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현란한 관현악, 

드뷔시의 섬세하고 신비한 인상주의 음악의 요소를 모두 다 쓸어 담았다.


마침 내용 자체도 비극과 희극이 뒤섞여 있다. 

영웅적인 구애자인 칼라프 왕자와 차가운 매력의 투란도트 공주, 그리고 두 사람을 말없이 지켜보며 

속을 태우는 여자 노예 류(Liu)는 전형적인 낭만 오페라의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그들 주위를 핑(Ping) · 팡(Pang) · 퐁(Pong)이라는 희극적 이름의 중국대신들이 감싼다.


조성의 모호함이 던져주는 신비감은 곧 동양세계를 다룬 이 오페라를 보다 실감나게 만들었고, 

뒤뚱거리듯이 불완전한 리듬으로 단숨에 중국 음악의 분위기를 표현해 낸 것도 

분명 푸치니만의 천재적인 능력이다.


5성부로 폭넓게  구성된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섬세한 감정선을 표현하고, 

무대 위와 뒤쪽에 각각 배치된 트럼펫, 트럼본, 섹소폰 등은 현란한 입체음향으로 관객들의 귀를 즐겁게 한다. 

팀파니, 트라이앵글, 북, 심벌즈, 공, 첼레스타, 탐탐, 글로겐슈필 등 총동원된 타악기들이 

이국적 신비감이 넘치는 음악을 들려주고, 동양적인 5음계 등도 절묘하게 깊은 매혹의 세계로 이끈다.


3막의 도입부에서 동터 오는 북경의 신비로운 새벽하늘을 묘사하는 음악은 

특히나 푸치니 음악 세계의 절정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음악을 통한 인물묘사도 대단히 뛰어나다. 

칼라프는 현악기, 투란도트는 목관과 현, 류는 목관 현 솔로, 핑·팡·퐁 

세 대신들은 피콜로와 첼레스타, 황제는 트럼펫을 위시한 금관 등이 테마악기로 배치돼 

관객들은 들리는 음악만으로도 각 인물들의 개성과 상호관계를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다.


고려인 3세 빅토르 초이의 벽 (Стена Цоя)


러시아 젊은이들의 자유 영혼이 숨쉬는 아르바트 거리 한쪽에는 

우리에게 조금 익숙한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아르바트 거리 한쪽, 길이 100m가 채 안되는 골목에 빅토르 초이의 벽화가 있다.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초이(Ви́ктор Ро́бертович Цой, 1962 ~ 1990)는 소련의 록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 겸 영화배우이며, 소련 록 음악 밴드 키노(КИНО)의 리더였다.


이 골목은 초이가 무명가수일 때 노래를 부르던 곳이었다.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등진 이후 이곳은 초이를 위한 성전이 되었다. 

골목 담벼락에는 초이를 기리는 낙서들과 사진으로 가득했다. 

'초이를 사랑 한다.' '초이는 영원하다'... 같은 내용들이라고 한다. 

한 구석에는 누가 갖다두었지 싱싱한 장미꽃이 한다발 놓여져 있고, 

담배불이 향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빅토르 초이는 한국인 3세로 아버지 쪽이 고려인이다. 

락밴드 '키노'를 이끌었고 글도 쓰고 영화도 만들었다. 

영화를 사랑했던 초이는 영화를 직접 감독하고 출연까지 했었다. 

그의 노래 모두는 4장의 앨범으로 나왔다. 

그 앨범 모두가 러시아 젊은이들의 가슴에 강하게 자리잡았고, 

1991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자동차 사고로 요절하면서 

그의 노래와 이야기는 신화가 되어 러시아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초이 (Ви́ктор Ро́бертович Цой, 1962~1990)


빅토르 초이는 1962년 6월 21일,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아버지 로베르트 막시모비치 초이(최동열)와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슬하 무녀독남 외동아들로 출생하였다. 

친조부 막심 초이(최승준)는 본래 대한제국 함경북도 성진 출생이었고 

후일 일제 강점기 초기에 러시아 제국으로 건너간 고려인 출신이었다.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소련 카자흐스탄 사회주의 자치공화국 

키질로르다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7세 때부터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했으며, 

초기 곡들은 레닌그라드 거리에서의 삶, 사랑과 친구들과의 어울림 등을 다루고 있다. 

노래의 주인공은 주로 한정된 기회만이 주어진 채 각박한 세상을 살아나가려는 젊은이였다. 

이 시기에 록은 레닌그라드에서만 태동하고 있던 언더그라운드의 한 움직임이었으며, 

음악 차트 등의 대중 매체들은 모스크바의 팝 스타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소련 정부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가수들에게만 허가를 내 주었고, 

집과 녹음실 등 성공이 필요한 많은 것들을 제공하여 길들였다. 

그러나 록 음악은 그 당시 소련 정부에게 너무도 마땅치 않은 음악이었다. 

록은 자본주의 진영의 록 그룹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외에도 젊은이들을 반항적으로 만들었으며, 

의사 표현의 자유 등 표현 관련 가치를 중시했다. 

따라서 록 밴드들은 정부로부터 거의 원조를 받지 못했고 관영 매체에 의해 마약 중독자나 

부랑자라는 편견으로 그려지는 수준이었다.


빅토르 초이는 레닌그라드에 있는 세로프 미술전문학교에 입학였으나, 

결국 낮은 성적 때문에 1977년에 퇴학 처분을 받았다. 

그 후 레닌그라드 기술전문학교에서 목공업을 공부하였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또 중퇴하였다.

이와 같은 사항들로 인하여 그의 학력은 전문대학 중퇴이다. 

그러나 그는 이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록 음악에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이 시기에 이르러 그는 보일러 수리공으로 일을 하면서 파티 등의 장소에서 

자신이 만든 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한 연주를 록 그룹 아쿠아리움의 멤버였던 보리스 그레벤시코프가 보게 되어, 그

레벤시코프의 도움으로 그는 자신의 밴드를 시작하게 된다.


레닌그라드의 록 클럽은 록 밴드들이 연주할 수 있던 극소수 장소에 속했다. 

이곳의 연중 록 콘서트에서 빅토르 초이는 처음 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그는 두 명의 아쿠아리움의 멤버들이 연주를 맡은 가운데 솔로로 연주한다. 

그의 혁신적인 가사와 음악은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가 유명해지기 전에 그는 음악하는 사람들이 도전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실험적으로 가사와 음악을 만들었다. 

이런 시도는 성공을 거두고, 데뷰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멤버들을 모아 키노

(러시아어로 영화, 극장이라는 뜻이다)를 결성한다. 

그들은 빅토르 초이의 아파트에서 데모 테이프를 만들고, 이 테입은 처음엔 레닌그라드, 

그리고 나중에는 전국의 록 매니아들에게 퍼지게 된다.


1982년 키노는 첫 앨범인 45(소로크 피아트; 러시아어로 45라는 뜻)를 발표한다. 

이 앨범의 이름이 45로 정해진 것은, 이 앨범의 재생 시간이 총 45분이었기 때문이다. 

후에 46 (쏘록 쉐스찌)라는 앨범도 냈다. 

이 앨범에서 빅토르 초이는 음악에 정치적 목소리를 내려는 의지를 내비친다. 

"엘렉트리치카(Elektrichka, 소련의 광역 전철)"이란 노래는 원치 않은 곳으로 가는 

전차에 끼여 끌려가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런 가사는 분명히 당시의 소련에서의 삶을 은유한 것이었으며, 이 노래는 공연이 금지된다. 

이 노래의 메시지로 노래는 반항운동을 하던 젊은이들 사이에 유명해지며 

키노와 빅토르 초이는 그들의 우상으로 떠오른다. 

제2회 레닌그라드 록 클럽 콘서트에서 키노는 자신의 정치색을 더욱 분명히 드러낸다. 

키노는 빅토르 초이의 반전음악 작품인 "내 집을 비핵화지대로 선포한다"로 1등을 차지하고, 

이 노래는 당시 수만의 소련 젊은이들의 목숨을 빼앗고 있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더욱 더 유명해진다.


1987년은 키노의 해였다. 

7집 앨범 《혈액형(Gruppa krovi)》은 "키노마니아"로까지 불리는 사회현상을 불러일으킨다. 

글라스노스트로 조금 더 개방적이 된 정치상황은 그의 가장 정치색이 짙은 앨범인 

"혈액형"을 만들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앨범의 메시지만이 청중을 사로잡은 것이 아니었고, 앨범에 담긴 음악 또한 

이전에는 듣지 못하던 것이었다. 

대부분의 곡은 소련의 젊은이들을 향한 외침이었으며, 능동적으로 나가서 국가를 변화시키라고 호소했다. 

몇 개의 노래는 소련을 옥죄고 있던 사회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 앨범은 빅토르 초이와 키노를 러시아 젊은이들의 영웅으로 등극시켰다. 

1988년에는 영화 《이글라》의 주연으로 영화배우 데뷔를 하기도 하였다. 

이후 몇 년간 그는 몇 편의 성공적인 영화를 찍었으며 영화제에 

그의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미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 몇 개의 앨범이 더 나왔으며, 대부분이 정치적 메시지를 담았으며 밴드는 인기를 유지했다. 

그는 당시 소련 젊은이 모두의 우상이었지만, 그런 것에 비하여 그는 소위 비교적 보통 수준의 삶을 살았다. 

그는 계속 아파트 빌딩의 보일러 실에서 살며 일했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즐기고 있으며 정부의 보조를 받지 못하고 있고, 

자신들의 앨범은 공짜로 복제되어 퍼지기 때문에 밴드를 유지하기 위하여서라도 금액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런 소박한 삶의 방식은 대중들이 그와 더욱 친밀감을 느끼기에 매우 충분했다.


1990년 키노는 모스크바의 레닌 스타디움에서 콘서트를 열어 6만 2천의 팬들을 모았다. 

1990년 8월 14일 다음 앨범의 녹음을 마쳤으며, 레닌그라드에서 다른 멤버들이 녹음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8월 15일 아침 소련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투쿰스에서 빅토르 초이가 운전하던 차가 

마주오던 트럭과 충돌하였고 그 사고로 죽고 말았다. 

그가 운전하였던 차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망가졌으며, 타이어 하나는 결국 찾지 못했다.


음모론에 따르면, KGB가 의도적으로 초이를 살해했다고 한다. 

평소 반전과 평화 사상을 주장하던 초이가 러시아 권력자들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이다. 

실제로 트럭 기사가 종적을 감추고, 초이에게 유리한 목격자들의 증언이 기각되었으며

초이는 졸지도 운전 규칙을 어기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트럭 기사가 그에게 돌진했다는 사실, 

시체가 봉인된 관에 담겨 서둘러 매장되었다는 사실 등 의문스러운 점이 한두 곳이 아니지만, 

현재 러시아 경찰과 정부는 27년 동안 이 사안에 대해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1990년 8월 17일 소련의 유력 잡지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다음과 같이 그의 의미를 간추린다.


"빅토르 초이는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에게 다른 어떤 정치인들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는 한번도 거짓말하거나 자신을 팔아먹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빅토르 초이였고,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그를 믿지 않을 수 없다. 

대중에게 보인 모습과 실제 삶의 모습이 다름없는 유일한 락커가 빅토르 초이이다. 

그는 그가 노래부른 대로 살았다. 그는 록의 마지막 영웅이다."


놀랍게도 교통사고에서 온전하게 건질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다음 앨범에 쓰일 

그의 목소리를 담은 테이프이었다. 

목소리는 남은 멤버들의 나머지 녹음과 합쳐져 현재는 "블랙 앨범"으로 불리는 앨범으로 남아 있다. 

이 유작 앨범은 밴드의 가장 인기있는 작품이며 러시아 록 역사에 있어서 키노의 자리를 확고하게 했으며, 

빅토르 초이를 최고의 영웅이자 전설로 만들었다.


빅토르 초이의 벽 (Стена Цоя) 인증샷


빅토르 초이의 벽 (Стена Цоя) 인증샷


[영상] 빅토르 초이의 벽 (Стена Цоя)


러시아 록 음악의 전설 빅토르 초이


키노(КИНО)가 소비에트 음악과 사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들은 이전의 다른 어떤 그룹도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음악과 가사로 노래를 만들었다. 

키노는 모던 러시아 록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키노는 아직도 러시아 전역에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레닌그라드 벽에는 그들에 대한 그라피티가 그려지고 있으며,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가에는 한 벽 전체가 그들에게 헌정되었고, 

그곳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팬들이 모인다. 

사망 10주기였던 2000년에는 러시아의 록 밴드들이 모여 빅토르 초이의 38번째 생일을 맞아 

빅토르 초이의 헌정 음반을 만들었다.


러시아 록 음악의 전설 빅토르 초이


사후 30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는 여전히 우상시되고 있으며 그의 팬덤은 더욱 거대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적어도 다섯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첫째로 “그와 같은 가사를 쓴 사람은 없었다”

빅토르 최는 1980년대 중반 소련 사회의 급진적 개혁의 시기였던 페레스트로이카 시절 

청년 대중문화의 가장 돋보이는 스타였다. 

당시 소련 정부가 록음악을 허가함으로써 신문들은 록 콘서트에 대한 기사를 쓸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그 시절 빅토르 최와 그가 이끈 그룹 ‘키노’는 가장 인기 있는 록밴드 중 하나였다.


키노의 노래들에는 당시 청년층의 세계관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있었다. 

기성 세대와는 다른, 젊은이들의 언어로 씌여진 키노의 노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이와 시적 울림을 갖고 있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록 음악의 또 다른 우상이었던 그룹 

‘아크바리움’의 리더 보리스 그레벤시코프는 이렇게 말했다. 


“빅토르는 단순, 명료, 진실 그 자체다. 

그와 같은 가사를 쓴 사람은 러시아에서 아무도 없었다. 

그가 아직 새파란 애송이였을 때 내가 그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이제 뒤로 물러나고 자네들이 러시아를 대표하는 그룹이 될 거야’라고. 

그러자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웃었다. 내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영상] Виктор Цой - Перемен '변화'


둘째로 ‘변화’의 시대

그의 노래 대부분이 한 개인이 겪는 감정에 대한 것이었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징이었던 히트곡 ‘변화’도 그가 만든 노래였다. 

사람들은 이 노래 속에서 소련식 생활방식의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는 정치적 메시지를 들었다. 

‘변화’가 처음 공개된 것은 1986년이었지만 이듬해 개봉한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의 전설적 영화 <아싸(Асса)> 덕분에 대중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그리고 말그대로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에서 ‘페레스트로이카의 노래’로 각인됐다.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변화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을 반영한 빅토르 최의 노래가 

자신이 소련의 개혁을 추진하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우리의 심장이 변화를 원한다

우리의 두 눈이 변화를 원한다

우리의 웃음소리와 우리의 눈물 속에서

그리고 혈관 박동 속에서

변화가 꿈틀거린다!

우리는 변화를 원한다."


이 후렴구에서 정치적 마니페스토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룹 키노의 멤버들은 그런 직설적 해석에 거부감을 표했다. 

키노의 기타리스트 알렉세이 리빈은 빅토르가 염두에 둔 것이 

‘정치체제의 변화’가 아니라 ‘자기 내면의 더 깊은 변화’였다고 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클럽 캄차카(Камчатка)


셋째로 그의 생애

빅토르 초이의 인기에는 그의 경력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소련 엔지니어를 부친으로 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980년대 초 그는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보일러실에서 화부로 일했다. 

이 보일러실에는 ‘캄차카’라는 별칭이 붙었으며 전설적인 장소가 됐다. 

자신에 대한 한 다큐 영화에서 그는 바로 이 보일러실의 화실에 석탄을 퍼넣으며 

“나는 내가 자유롭다고 느낀다. 나는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했다.


그가 보일러실에서 일하게 된 것은 그의 음악 활동이 당시의 공권력 구조 밖에서 행해졌기 때문이었다. 

소련에서 무직자는 형법의 ‘무위도식죄(тунеядство)’로 기소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현재 ‘캄차카’ 보일러실은 빅토르 초이의 박물관 겸 클럽이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클럽 캄차카(Камчатка)


클럽 캄차카는 빅토르 초이를 기념하는 공간으로서, 그가 활동했던 당시의 자료도 보관되어 있고, 

관련 영상이나 CD를 팔며, 빅토르 최 - 키노의 커버 공연을 비롯해 

80년대 당시의 러시아 록 관련 공연을 하는 곳이다. 

키노의 시대를 기념하는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캄차카는 원래 러시아의 지명인데, 이 단어가 '보일러'를 뜻하는 별명 같은 것으로도 쓰인다고 한다.

캄차카가 보일러로 쓰이는 까닭인즉슨 빅토르 초이는 원래 저작권이나 정부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음악 활동을 하며 수입을 거의 얻지 못했고, 그래서 보일러공으로 일하면서 록밴드 활동을 같이 했기 때문이다. 

이 클럽 캄차카가 세워진 장소는 바로 빅토르 최가 보일러공으로 일했고, 

친구들과 함께 음악을 연주했던 지하의 작은 보일러 방이었던 것이다. 

캄차카는 빅토르 초이의 흔적 위에 세워진 곳이다.


[영상] Bar-Museum Kamchatka (бар-музей "Камчатка")


[영상] Club Kamchatka "Acoustic Bard - Rock Concert (Акустический бард - рок концерт)

넷째로 영화 속 ‘키노’ - 영화 <바늘>의 장면


빅토르 초이와 키노에 유명세를 안겨준 것은 영화였다. 

키노의 공연 장면으로 끝이 나는 위에서 언급한 영화 <아사> 외에도 빅토르는 1988년 

<바늘(Игла)>이란 영화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다. 

영화에서 빅토르는 마약상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주인공 역을 맡았다. 

영화 속에서 키노의 최고 인기곡인 ‘혈액형(Группа крови)’과 

‘태양이란 이름의 별(Звезда по имени Солнце)’이 OST로 울려퍼진다.


<바늘>은 1989년 소련에서 개봉된 영화 흥행 순위에서 상위권을 차지했다. 

당시 인기있던 영화잡지 ‘소련 스크린’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빅토르는 

‘올해 최고의 남자배우’로 뽑히기도 했다.


러시아 젊은이들이 빅토르 초이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


다섯째로 빅토르 초이의 우상화

빅토르 초이는 1990년 8월 리가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사고는 그가 몰던 자동차의 중앙선 침범으로 일어났으며 과로로 인한 졸음 음전이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당시 그는 28세였다. 그의 비극적 죽음 이후 팬들은 그를 우상화하기 시작했다.


모스크바의 유명한 예술가의 거리 아르바트에 등장한 ‘빅토르 초이의 벽 (Стена Цоя)’은 그를 상징하는 것이 됐다. 

그가 죽은지 30년이 지났지만 벽 위에는 ‘최는 살아 있다’ 또는 

‘비탸(빅토르의 애칭)는 죽지 않았다. 담배 한 대 피우러 갔을 뿐’이라는 글귀 등 

그래피티와 새로운 문장들이 계속 추가되고 있다. 다른 도시들에도 이런 벽이 존재한다.


빅토르 초이는 여전히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있는 가수 중 한 명이다. 

검색포털 ‘얀덱스’의 집계 결과에 따르면 ‘얀덱스 음악’ 서비스에서 

빅토르 초이의 노래가 플레이된 총 시간은 무려 1000년이 넘었다. 

유명 영화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가 조만간 빅토르에 대한 영화 촬영을 시작할 계획이며 

키노의 노래는 주기적으로 여러 인기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 되고 있다.


아르바트 거리에서 옛 정취가 서린 골목은 빅토르 초이 벽을 지나 오른쪽으로 있다.


스파소페스콥스키 골목을 들어서면 전형적인 모스크바 스타일의 교회를 볼 수있다.

다섯 개의 쿠폴과 높은 종탑이 있는 그리스도 변용 교회는 1711년에 건축되었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화가 폴레노프의 <모스크바의 뜰>이라는 그림에서

이 교회가 시적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교회 앞 정원은 푸시킨이 자주 산책을 했다고 하여 푸시킨 정원이라고 불리며

푸시킨 동상 앞에는 그의 대표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원문이 적혀 있는 비석이 놓여 있다.


아르바트스카야역


아르세니 모로조프 (Arseny Morozov) 저택


메트로 3호선 아르바트스카야 역에서 나와 맞은 편에 보이는 네오 고딕 양식의 독특한 건축물은

19세기 후반 모스크바의 부호 모로조프의 저택이다.

10월 혁명 이후 아나키스트들의 본거지가 되었고 1918~1928년에는 예술가협회 극장이 들어와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이 동참하여 아방가르드 연극이 상연되기도 하였다.


이후 외무 인민위원회에 넘겨져 여러 국가의 대사관들이 이 건물에 들어오게 되었다.

1928~1940년에는 일본 대사관이, 1941~1945년은 영국대사관과 신문사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1952년부터 2년간은 인도대사관이 들어오기도 했다. 

1958년부터 민족 친선의 집이라고 불리기 시작아여 콘퍼런스, 해외 문화행사, 영화상영, 관계자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2006년 G8 회담을 준비하여 2003년부터 정부의 관할 아래 보수 및 재건축을 하고 

현재까지 국가 회담이나 국제기관 콘퍼런스 장소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아르세니 모조로프 저택이 있는 길과 연결된 대로는 신아르바트 거리이다.




러시아 동방정교회 (Khram Prepodobnogo Simeona Stolpnika Na Povarskoy)

구 아르바트와 대조되는 현대적인 아스팔트 대로 신아르바트 거리 (New Arbat Ave)에 있다. 



러시아 동방정교회 내부


러시아 동방정교회 내부


러시아 동방정교회 내부


러시아 동방정교회 내부


신 아르바트 거리 (New Arbat Ave)


아르바트 거리 옆에 건물을 넘어 나란히 위치한 커다란 대로를 신 아르바트라는 뜻의 '노븨 아르바트'라고 부른다.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구 아르바트와는 대조적으로 높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넓은 아스팔트 도로가 펼쳐져 있다. 

1935년 모스크바 중심에서 서쪽으로 넘어가는 대로를 건설하는 도시계획에 따라 생겨났고

자연스럽게 이러한 이름을 갖게 되었다.

레스토랑과 고급 쇼핑몰 등이 들어서 있고, 늘 차량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돔 끄니기(Dom Knigi, Московский Дом Книги) 


젊은이들의 거리인 신아르바트 거리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돔 끄니기는 외국어 서적도 다량 구비하고 있는 

모스크바 최대의 서적센터이다. 

지도, CD, 오래된 서적과 미술서적, 과학서적 등 폭넓게 갖추고 있다. 

서점 밖 도로 변을 따라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서적상에게서도 의외로 싼 가격에 원하는 책을 구입할 수 있다.


돔 끄니기(Dom Knigi, Московский Дом Книги)


돔 끄니기 매장





[영상] 신 아르바트 거리와 돔끄니기


[영상] 신 아르바트 거리와 모스크바 롯데호텔 건물




젊음과 문화의 상징, 아르바트 거리(Arbat Street)


우리 나라로 보면 명동 거리와 같은 곳으로 아르바츠까야(Arbatskaya, Арбатская)역 입구에서 

스몰렌스카야(Smolenskaya, Смоленская)역 외무성 건물까지 약 2km정도 보행자 전용 거리이다. 

이 거리가 생긴 것은 15세기이며 러시아의 대문호 푸쉬킨이 이 거리 No.53의 

2층 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더 유명해 졌다. 

옛날에 아르바트 거리는 귀족들의 저택이 한적하게 들어서 있던 곳으로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들이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한 곳이다. 


스몰렌스카야역(Smolenskaya, Смоленская)


모스크바 롯데호텔 건물

스몰렌스카야역(Смоленская)에서 나오면 한 편에 모스크바 롯데호텔 건물이 있다.


모스크바 롯데호텔 건물


스탈린 양식의 러시아 외무성 청사. 


스몰렌스카야역 다른 한 편에는 스탈린 양식의 러시아 외무부 청사가 있다.

구소련 시절을 대표하는 스타일의 건물로, 유럽풍의 화려한 외관에 압도적인 스케일이 특징이다. 

모스크바를 비롯 과거 동구공산권 국가들에는 이런 풍의 건물들이 종종 있다.


아르바트 거리 (Arbat Street)


주변으로 각종 전문 직업인들이 모여들어 골목마다 목공골목, 대장간 골목, 과자와 빵 골목, 

음식점 골목, 식탁보 골목 등의 이름이 붙여 있다.

아르바트는 번화한 거리로 변모하여 한쪽에서 소규모의 악단이 연주를 하는가 하면, 

시를 낭송하기도 하고,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노브이 아르바트 거리에는 지금 거의 외국 브랜드 상점과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기념품 가게와 노점상 등이 있어 러시아의 현주소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아르바트 거리는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이자, 

개혁과 개방의 거센 바람을 주도했던 곳이기도 하다. 

모스크바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이 거리는 러시아 젊은이들의 혼이 숨쉬는 곳이다. 

무명화가들의 고향이자 이름없는 화가, 연극배우, 가수들의 안식처이자 

전시장이고 무대이며 히피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1988년 "아르바뜨의 아이들"이라는 소설이 우리나라에도 소개됐고,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었다.


아르바트 거리 (Arbat Street)


안드레이 벨리(Andrey Belyi)의 기념 아파트


작가 안드레이 벨리가 태어나고 자란 곳

푸시킨 박물관인 하늘색 건물 입구 바로 옆에 시인이자 작가인 상징주의자 안드레이 벨리의 박물관이 있다.


안드레이 벨리(Andrey Belyi)의 기념 박물관


그는 1880년 이곳에서 태어나 26살까지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살았다.

예전에 작가가 살던 집에서 현재 방 2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전시된 사진을 통해 작가의 작품과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안드레이 벨리(Andrey Belyi)의 기념 박물관

안드레이 벨리(Андрей Белый, 1880 ∼ 1934)는 러시아의 상징주의 시인이자 소설가, 문학 비평가이다. 

본명은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부가예프(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Буга́ев)이다.


수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연과학에 관심을 갖고 모스크바 대학교 물리-수학학부에 입학하였고, 

이때 다윈을 비롯하여 여러 철학자들의 사상을 접하게 된다. 

종교 철학가인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와 교제하면서 그의 가족들과 친하게 지내는데, 

필명인 '안드레이 벨리' 는 블라디미르의 동생 미하일 솔로비요프가 지어준 이름이다. 


상징주의자로서 벨리의 사상은 복잡한 발전 과정을 겪는다. 

초기에는 솔로비요프의 철학과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사상, 리케르트의 신칸트주의 이론에 매료되었다가, 

후기에는 루돌프 슈타이너와 같은 신비주의 철학자의 인지학 이론을 주창하게 된다.


작가로서 창작 활동을 시작한 벨리는 1904년 첫 번째 시집 《쪽빛 황금》(Золото в лазурь)을 출간한다. 

두 번째 시집 《재》(Пепель, 1908)는 네크라소프를 기념하는 것이고, 

《유골 항아리》(Урна, 1909)는 마지막 시집이다. 

이와 함께 벨리는 소설 작가로서 《심포니야》(Симфония) 4부작(《영웅》(1903), 

《드라마》(1902), 《귀환》(1904), 《눈보라의 잔》(1908)을 비롯하여 《은빛 비둘기》(Серебряный голубь, 1909), 

《코틱 레타예프》(Котик Летаев, 1922) 등 산문소설을 창작하였고, 

1911년에 집필을 시작한 《페테르부르크》(Петербург)는 1916년 단행본으로 출판한다. 


이 밖에도 《녹색 초원》(Луг Зеленый, 1910)과 《상징주의》(Символизм, 1910), 《아라베스크》(Арабески, 1911) 등 

상징주의 철학과 문학 이론에 대한 많은 논문을 저술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벨리는 세 편의 회상록을 저술하는데, 이들은 당대를 풍미했던 상징주의 문학은 물론, 

격동기 러시아 사회의 역사적 문화적 흐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회상록은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까지 집필되었고, 

《두 세기의 분수령에서》(На рубеже двух столеций, 1930), 《세기의 시작》(Начало века, 1933), 

《두 혁명 사이에서》(Между двух революций, 1935)가 출간되었다.


〈페테르부르크〉는 조이스의 《율리시스》, 카프카의 《변신》과 더불어 20세기 모더니즘 산문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특히 은유와 환유, 반복과 전위, 라이트모티프 등 독특한 스타일로 

모더니즘 계열 작품들 중에서도 실험성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난해한 상징으로 가득찬 이 소설에는 니체와 베르그송 같은 20세기 초 철학자들의 사상에 투영된 

러시아 상징주의 특유의 역사적, 철학적 사색이 담겨 있다.


Belyi Museum-Apartment는 1993년에 설립되었지만 박람회의 공식 개관은 2000년 9월에 이루어졌다. 

Arbat와 Money Lane의 모퉁이에 있는 집에서 Bely는 1880년부터 생애 첫 26년을 살았다. 

2018년 초, 박물관에는 가족 사진, 작품 사본, 개인 용품, 그림 등 4천 점이 넘는 기념품이 있다.


Belyi Museum-Apartment 내부


안드레이 벨리(Andrey Belyi) 사진


Belyi Museum-Apartment 내부


Belyi Museum-Apartment 내부


Belyi Museum-Apartment 내부


푸시킨 박물관 전시장 (Vystavochnyy Zal Muzeya A.s. Pushkina)

푸시킨이 결혼 후 3개월 간 살았던 집


푸시킨 박물관 뒤로 스탈린 양식의 러시아 외무성 청사가 보인다.


푸시킨 박물관 1960년대 사진


푸시킨 박물관과 러시아 외무성





푸시킨 박물관은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옆 건물로 들어가 지하 통로를 통해 입장하도록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므로 그렇게 출입구를 별도로 만들어 놓은 것 같다.

기념관 입구에서는 신발에 얇은 1회용 비닐 덧신을 신도록 되어 있다. 

기념관의 바닥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도 러시아에서 극장, 박물관, 기념관, 식당 등에 들어갈 때처럼 두터운 겉옷은 보관소에 맡겨야 한다.


Vasily Tropinin. Portrait of Alexander Pushkin. 1827. Oil on canvas.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ушкин, 1799 ~ 1837)은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외조부는 표트르 대제를 섬긴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 흑인(지중해 인종) 출신 귀족이었다.


그는 모계로 흑인(지중해 인종)의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18세기 표트르 대제의 총애를 받은 

아브람 페드로비치 간니발 장군의 손녀였다. 

외증조부 간니발은 아프리카 출신의 노예였으나 표트르 대제에 의해 속량받아 군인이 되었고, 

실력을 인정받아 표트르 대제는 그의 세례 때 대부(代父)가 되어주기도 했다 한다. 

외조부는 표트르 대제를 섬긴 아비시니아 지중해 인종 출신 귀족이었다.


곱슬머리와 검은 피부를 가진 푸시킨은 자신의 몸속에 에티오피아 지중해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어린 시절, 그는 프랑스인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유모 아리나 로지오노브나로부터 

러시아어 읽기와 쓰기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민담과 민요를 들었다. 

또한 그는 유모를 통해서 러시아 민중의 삶에 대해 깊이 동정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어렸을 때 유모 아리나가 들려준 러시아의 옛날 이야기 및 설화가 그를 대시인으로 성공시키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가정교사로부터 배운 외국어 가운데 프랑스어에 가장 뛰어나 10세경에 이미 프랑스어로 시를 썼다.


1811년(12세), 차르스코예 셀로에 있던 학습원에 들어가서 자유주의적 교육의 영향을 받았다. 

1816년(17세)의 공개 진급시험에서는 자작시 <차르스코예 셀로의 추억>을 낭독하여 

이곳에 나와 있던 노시인 가브릴라 데르자빈을 감격시켰다고 한다.


1817년(18세), 학습원을 졸업하고 외무성에 들어간다. 

그 후 거의 3년간은 고등 룸펜이 되어 사교계에 출입하면서 방탕한 생활을 보냈으나 명석한 판단력은 잃지 않고 

자유주의적 정신으로 농노 제도 및 전제정치를 공격하는 시 《자유》(1817), 《마을》(1819) 등을 발표했는데, 

이 때문에 1820년 남러시아로 추방당하기에 이르렀다. 

그해 설화를 주제로 하면서 구어를 대담하게 채용한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발표하여서 

러시아 시에 새 경지를 개척하는 동시에 시인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추방생활 중 바이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카프카스의 포로》(1822), 《집시》(1823), 《바흐치사라이의 샘》(1824) 등 

낭만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서사시 및 서정시를 썼으며, 이 동안에 릴레예프 등 데카브리스트와 친해졌다. 

1824년 오데사 총독과 충돌, 프스코프 현에 있는 모친 영지 미하일로프스코 촌에 칩거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점차로 바이런의 영향에서 벗어나 이미 남방체제 중에 제1장을 발표한 바 있는 

시형식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의 후속 장이나 《보리스 고두노프》에는 리얼리즘에의 이행이 엿보인다. 

1825년의 데카브리스트 반란 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거주는 허용되었으나 

위험인물로 취급되어 황제의 직접 검열을 받아야 하는 중압하에 우울한 기분을 나타내는 

서정시나 연애생활을 하면서 기분전환을 꾀하다가, 1830년부터 새로운 창작생활 시기에 들어간다.


그는 우선 《오네긴》을 완성하고 이어 《인색한 기사》(1833) 등 시작품을 내는 한편, 

신문에도 손을 대 단편집 《벨킨 이야기》(1830), 《스페이드 여왕》(1834), 소설 《대위의 딸》 등 허다한 걸작을 썼다.


1831년 미모로 소문난 나탈리야 곤차로바와 결혼하였다. 

나탈리야는 그보다 13년 연하의 여성으로 첫 남편과 사별한 상태였다. 

1831년 푸시킨은 격렬한 구애 끝에 나탈리야 곤차로바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탈리야 곤차로바와 결혼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집을 마련하고 정착했다.

그는 다시 관직에 등용되었고 표트르 대제 치세의 역사를 쓰도록 위촉받았다. 

1834년 황제의 시종보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그의 실력 보다는 부분적으로는 

나탈리야가 궁정행사에 참석하기를 바란 황제의 속셈이 작용한 때문이었다.

이 기간 중 그의 아내 나탈리야와 황제 표트르 간의 불륜관계라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1836년에는 잡지 SOVREMENNIK를 간행하는데 참여하였다.

1837년 그의 반역정신을 적대시하는 귀족들이 나탈리야가 부정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날조된 소문을 퍼뜨림으로써 

푸시킨은 나탈리야가 바람을 피운다고 지목한 프랑스인 귀족 조르주 단테스와 결투를 벌이다가 

총상으로 인해 비운의 죽음을 당했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그는 러시아 근대문학의 창시자로서 문학의 온갖 장르에 걸쳐 그 재능을 발휘했다. 

과거 100년간 러시아 시 분야에서 그의 간결하고 평이 명료한 시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지 않은 시인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산문에 있어서도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의 기초는 그에 의해 구축되었다.


푸시킨은 ‘러시아 국민 문학의 아버지’, ‘위대한 국민 시인’ 등으로 불린다. 

막심 고리키의 말대로 ‘시작의 시작’이라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많은 비평가 역시 푸시킨의 작품을 심도 있게 연구하면서 ‘모든 것을 포용하는 보편성’(도스토옙스키의 표현)을 강조했다. 

그의 문학작품은 모든 예술사조(ism)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예술사조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는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의 모든 요소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모든 것을 부정하는 아이러니한 대화를 하고 있다.


그는 1812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로 고무된 러시아 민족의 애국주의 사상, 

민족적 자각과 민족적 기운이 고조되는 역사적 시기에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러시아 국민 사상과 감정을 훌륭히 표현한 러시아 국민 문학의 창시자이자 러시아 문학어의 창시자다. 

국민 생활과의 밀접한 유대, 시대의 선구적 사상의 반영, 풍부한 내용 등의 측면에서 그를 따를 러시아 작가는 없다. 

투르게네프가 푸시킨 이후의 작가들은 그가 개척한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것처럼 

그의 문학적 영향력은 매우 크다.


푸시킨의 아내 나탈리아 곤차로바 (Nataliya Nikolaevna Pushkina-Lanskaya, 1812 ~ 1863년)


푸시킨 박물관 전시장


건물 안에는 푸시킨의 초상화와 친필 유고, 그리고 그림을 곧잘 그렸던 푸시킨이 연필로 스케치한 몇몇 얼굴들, 

시계, 테이블, 의자, 피아노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1층 한쪽 구석에는 길쭉한 모양의 당시에 사용하던 권총이 작은 유리장 안에 있었는데, 

이유는 푸시킨이 권총 결투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결투 때 사용했던 그 권총은 아니지만 일종의 상징물인 셈이다. 


당시 귀족들간의 결투는 일반적으로 입회인의 건네준 권총을 들고 서로 등진 채 

일정한 거리만큼 걸아간 다음 돌아서서 발사하는 방식이었다. 

“돌아서” “발사” 등 입회인의 구령에 따라 진행됐다. 

첫 발에 맞은 자가 없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당시 단테스의 총이 먼저 발사됐고 푸시킨은 복부에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그러나 푸시킨은 복부를 움켜쥐고 안간힘을 다해 일어나 단테스를 향해 쐈다. 

그러나 이 총알은 단테스의 오른팔과 갈빗대 두 대를 부러뜨렸을 뿐이었다.


결투가 벌어진 곳은 모스크바가 아닌 상트 페테르부르그다.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의 집은 푸시킨이 나탈리야 곤자로바와 결혼한 1831년에 

3달가량 신혼생활을 했던 곳으로 이집 2층이 주거 공간이었다. 

상트 페테르부르그로 이사한 후론 내내 그곳에서 살았다.


기념관 이층의 한쪽 벽에는 나탈리야 곤자로바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는데, 

이미 사진에서 본 얼굴이지만 과연 그림 속의 그녀는 백옥과 같은 피부의 절세 미인이다.



실내에는 생전에 푸시킨이 사용했던 집기며 피아노, 의자, 탁자 등이 보존되어 있고, 

벽 곳곳에는 그의 초상화와 글, 그에 대한 정보가 전시되어 있다. 



결투용 권총









푸시킨의 신혼집 맞은편에 있는 알렉산드르 푸쉬킨과 나탈리야 곤자로바의 동상


관람을 마치고 다시 아르바트 거리를 걷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푸쉬킨과 나탈리아의 동상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관광객뿐 아니라 많은 모스크바 시민들이 줄을 서 가며 이 동상과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푸쉬킨은 러시아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모스크바에 몇 개의 푸시킨 박물관이 있지만 아르바트의 푸시킨 박물관은 관광 중 쉽게 찾을 수 있는 높은 접근성과, 

대문호의 삶을 직접 볼 수 있는 푸시킨의 생가로서의 의미, 그리고 전 세계에 러시아의 이름을 알린 대문호 푸시킨에 대한 

다양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어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분들에게는 만족스러운 장소가 되고 있다. 


푸시킨 박물관 앞 아르바뜨 거리 인증샷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하는 재즈음악을 배경음악으로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모습으로 그림처럼 지나간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들, 배우들,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소년들, 

노천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사람들, 친구들, 연인들, 모두 풋풋한 젊음을 보이고 있다.


음유시인 불라트 샬보비치 오쿠자바

불라트 샬보비치 오쿠자바(Bulat Shalvovich Okudzhava, Булат Шалвович Окуджава, 1924 ~ 1997)는 

러시아의 시인이며 작곡자이자 가수이다.


오쿠자바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그는 노래를 직접 쓰고 부르는 러시아 음유시가의 개척자로 평생 200여 곡을 작곡하고 노래함으로써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와 더불어 잔나 비쳅스카야와 같은 음유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오쿠자바가 어렸을 때 조지아인 아버지는 소련 공산당에 의하여 사형 당하였으며 아르메니아인 어머니도 
감옥에서 18년간이나 복역하는 아픔을 겪어 일찍부터 독재에 대한 저항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에 참전한 후 트빌리시 주립대학교에 진학하여 1950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교사로 재직하다가 1956년 모스크바로 이주하여 몰도다야 그바르디야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작곡을 하고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서정적인 멜로디를 지적인 음성으로 부른 그의 노래는 1970년대 말까지 공식적으로 출판되지 못하였으나 
그의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비공식적으로 녹음되어 여러 나라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오쿠자바의 노래와 시는 1980년도에 들어 와서와 공식적으로 출판되었으며 
1991년 [USSR State Prize]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1997년 6월 12일 파리에서 사망하였으며 모스크바의 바간코보 묘지에 묻혔다.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에 그를 추모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아르바트를 노래한 음유시인의 동상


1924년에 태어난 그는 러시아 역사의 격동의 시간을 겪으며 전쟁에 관련된 많은 노래와 서정적인 사랑의 시,

그리고 모스크바에 관한 노래들을 남겼다.

아르바트 거리에 대한 찬양이 담겨 있는 그의 대표곡 '아르바트 거리의 노래'를 기념하여 2002년에 동상을 세웠다.


그는 러시아 젊은이들의 저항 정신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시와 노래는 1980년에야 해금되었다. 

그가 만든 <<아르바트 거리의 노래>>는 시인이 성장한 이 거리를 찬미하는 시다. 


너의 낯선 이름과 너의 아스팔트는

강물처럼 흐르고 강물처럼 투명하다

아, 아르바트 거리, 나의 아르바트 거리여.

너는 나의 부름이요,

너는 나의 기쁨이요, 나의 불행이다.




 게오르기 콘스탄티노비치 주코프(Georgy Konstantinovich Zhukov) 장군


1896년 12월 1일 ~ 1974년 6월 18일. 소비에트 연방의 군인이자 정치가. 

제1차,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소련의 군인으로, 소련 육군 최고 계급인 소비에트 연방 원수까지 승진했다.

붉은광장 러시아 국립역사박물관 앞에 주코프 장군 기마상이 있고 여기에도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이순신 장군 만큼이나 존경과 사랑을 받는 분인 듯하다.


[영상] 젊음과 문화의 상징, 아르바트 거리(Arbat Street)


[영상] Walking in Moscow 4K - Old Arbat Street




뒤돌아 보는 크렘린 사원 지구


황금빛 돔이 찬란하다. 

성당들은 역사의 부침에도 파괴와 복원의 과정을 거치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교회의 용도는

긴 역사만큼이나 많이 변모하고 있다. 

크렘린에 이렇게 아름다운 사원 지구가 있다는 것도 놀랍고, 소련 공산당의 폐쇄적이고

비밀스러운 이미지로 각인된 대명사 크렘린의 장벽(울타리) 안에 있었다는 것 또한 놀랍다.


모스크바에는 정원과 공원들이 많다. 크레믈린궁에도 정원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그라노비타야 궁전과 리즈뽈로줴니예 사원과 베르호스빠스키 사원


전면에 그라노비타야 궁전 (Granovitaya Palata)이 있고 오른쪽으로 한 개의 금빛 돔이 있는 곳이 

리즈뽈로줴니예 사원(Church of the Deposition of the Virgin's Robe - 총주교사원)이다.

그 뒤로 베르호스빠스키 사원 (Verkhospassky Cathedral - 테렘사원)의 아름다운 꾸뽈들이 보인다. 


우스펜스키 사원과 베르호스빠스키 사원



리즈뽈로줴니예 사원과 베르호스빠스키 사원


리즈뽈로줴니예 사원과 베르호스빠스키 사원


베르호스빠스키 사원 (Verkhospassky Cathedral, Верхоспасский собор)


1679~1681년에 만들어진 베르호스빠스키 성당의 지붕 모습. 

지근에서 보면 무척 아름답다. 대 크렘린 궁전에 부속된 교회로 차르의 가족 예배당이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왕이  988년 그리스 정교로 개종한 후 

러시아는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의 관할에 들어간다.

그 후 1453년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 투르크(터어키)에 의해 멸망하고 이슬람 지배하에 놓이면서 

그리스도교는 러시아로 옮겨와 꽃을 피게 되는데 이때 러시아 정교회가 대주교구로 되어 동방정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베르호스빠스키 사원의 꾸뽈들


러시아 정교회의 십자가는 아래에 반달 모양이 하나 더 있다.

러시아식 성당의 양파 모양의 돔을 꾸뽈이라고 부르며 이는 인간의 신에 대한 간절한 기도를 형상화한 것으로

둥근 양파 머리는 촛불이고 그 위의 십자가는 촛불의 심지다.

양파 머리의 꾸뽈이라는 촛불이 간절한 염원을 인간을 대신하여 하늘을 향해 불태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베르호스빠스끼 사원의 꾸뽈들 (1679~1681)


베르호스빠스끼 사원의 꾸뽈들 (Главки Верхоспасского собора, 2012 год)


Postage stamp of Russia from the series “Architecture of the Moscow Kremlin” 

with the image of the Terem Palace, 1993

1993년 테렘궁전 이미지와 함께 “모스크바 크렘린 건축” 시리즈에서 러시아의 우표


Palais des Térems du Kremlin de Moscou. 테렘궁의 파사드


테렘궁(러시아어: Теремной дворец)은 모스크바 크렘린 내에 위치한 궁전으로, 

17세기 차르들의 공식 거주지로 사용되었다. 

'테렘'이라는 이름은 '머무르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단어 '테렘논'(τερεμνον)에서 따온 것이다. 

현재는 러시아의 대통령 공식 관저로 활용되고 있어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테렘궁의 역사는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6세기에 알로시오 데 밀라노가 이 자리에 처음으로 궁전을 건설했는데, 

이후 로마노프 황조의 첫 번째 차르였던 미하일 1세가 1635년에 건물을 완전히 철거하고 다시 짓게 함에 따라, 

당시에 지어졌던 구조물은 현재 궁전의 지하실에서만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미하일 1세가 새로 지은 건물은 수없이 많은 부속건물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이들 중 대대수는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참고로 이 때 보수된 황후의 궁전은 이반 4세 시절까지 올라가는데, 

이 건물은 이반 4세가 자신의 아내를 위해 지어준 건물로써, 11개의 황금 돔이 그 위에 올라가 있다. 

현재의 테렘궁은 몇몇 교회들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들 중 가장 대표적인 예가 

1360년대에 지어진 '성모 마리아의 탄생' 성당이다.


테렘궁은 총 5층이다. 3층은 황후와 그녀의 자식들이 모여 살았으며, 4층에는 차르의 개인 주거지가 있었다. 

그리고 5층에는 두마(러시아의 의회)가 모여 토론을 벌이는 회의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테렘궁의 외관은 색채 타일들과 벽돌들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는데, 

대부분이 붉은색, 황색, 주황색으로 색을 맞추어 만들어졌다. 

내부에도 다양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으나, 

1812년에 일어난 대화재로 인하여 원래 그려져 있던 벽화들은 모두 소실되었으며,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벽화들은 대부분 1837년에 다시 복원한 것들이다.


View of the Terem Palace, image of 1797. 1797년 테렘궁의 이미지


1780 년대 Terem Palace의 이미지


크렘린의 테렘과 1800대 보르의 스파(Spas on Bor)


Fedor Alekseev, 보야르스카야 지역, 1810년대


1839년 테렘궁의 이미지


테렘궁의 내부장식. 2007년 모습.


테렘궁의 내부장식. 2007년 모습.


테렘궁전의 벽화, 2007년 모습


테렘궁전 침실, 2007년


테렘궁전 내부 벽난로


Painting Vasily Polenov "Terem Palace. The way out of the chambers on the Golden Porch ", 1877


테렘궁전 내부 창문


2007년 테렘궁전 내부


테렘궁전 내부 복도


테렘궁전 내부 응접실, 19세기 이미지


[영상] 베르호스빠스끼 사원 (Verkhospassky Cathedral)


테렘궁전의 베르호스빠스끼 사원(Verkhospassky Cathedral)은 하나의 지붕으로 덮여 있으며 

섬세한 개방형 십자가가 있는 11개의 우아한 돔으로 장식된 여러 가족 예배당의 복합체이다.







Frescoes inside the dome and on the vaults

Interior of the Church of the Deposition of the Virgin's Robe


1644년 Patriarch Joseph의 명령에 따라 아이콘 화가 Sidor Pospeyev, Ivan Borisov 및 

Semyon Abramov에 의해 그려졌다. 교회 전체를 채색하는 데 3개월 정도 걸렸다. 

1605년 이전에 교회가 처음으로 그려졌다는 증거가 있고, 아이콘 화가들은 그 그림 체계를 따랐다. 

주요 벽화가 그려진 시기는 15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Frescoes on the south-west pillar and south wall

Interior of the Church of the Deposition of the Virgin’s Robe


Frescoes on the north wall and north-west pillar

Interior of the Church of the Deposition of the Virgin's Robe


Frescoes on the west wall

Interior of the Church of the Deposition of the Virgin's Robe


The Nativity and the Adoration of the Magi. 동방 박사의 탄생과 경배

Fresco on the south vault, 1644


Transfiguration. Fresco on the west vault.


The Raising on the Cross. Fresco on the north vault. 1644


The Crucifixion. Fresco on the north wall lunette, 1644


SS Zosimus and Sabbatius of Solovki

Frescoes on window walls, mid-17th century


St Sabbas Stratelates

Fresco on the south-west strengthened arch. 1644


Towel

Fresco of the bottom tier of the wall, 1644


Iconostasis of the Church of the Deposition of the Virgin's Robe


ICONOSTASIS


이 아이콘은 벽에 고정된 수평 트랜섬의 여러 계층에 배치된 아이콘으로 구성된다. 

19세기에는 건축이 변형되었지만 1950년대에는 벽에 장착된 것으로 판단하여 원래 상태로 재구성되었다. 

대부분의 아이콘은 1627년 로마노프 왕조의 첫 번째 러시아 차르인 미하일 페오도비치의 아버지인 

교황 니콘의 명령에 따라 1627년에 교회를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귀중한 그림은 금으로 만든 반짝이는 아이콘 덮개 및 후광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인 Nazary Istomin Savin의 장인 정신이 돋보인다. 

그는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의 아이콘 화가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Istoma Savin은 법정 아이콘 화가였다. 

Nazary Istomin은 차르와 족장 모두의 명령을 수행했다. 

그의 그림은 완벽한 기술, 정확한 형태 및 세련된 이미지로 유명하다. 

처녀의 예복교회 그림들은 그 작가의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The Old Testament Trinity

Icon of the Veneration tier of the iconostasis in the Deposition of the Virgin’s Robe Church.

Moscow, 1627. Nazary Istomin Savin


The Virgin and Child (Hodegetria)

Icon of the Veneration tier of the iconostasis in the Deposition of the Virgin’s Robe Church.

Moscow, 1627. Nazariy Istomin Savin


The Holy Doors

Moscow, 17th-18th centuries. Cover - Russia, 17th century, fabric: late 18th – early 19th century, 

painting - Moscow, 17th century


The Communion in the Species of Wine and Bread of the Apostles

The canopy above the Holy Doors. Moscow, late 17th - early 18th century


The Good Thief

The door to the Prothesis. Moscow, 1627 (?)


The Calvary Cross and the Instruments of Christ's Passions

The door to the Diaconicon. Moscow, 1627 (?)


The Deposition of the Holy Robe of the Virgin in Blachernae

Icon of the Veneration tier (fragment). Nazary Istomin (?)

Moscow, first half of the 17th century


Our Lady of the Sign

Icon of the Veneration tier from the Church of St Nicholas in the Moscow Kremlin.

Russia, late 16th - early 17th century.

Temporary on display while the 16th-century icon of Our Lady of Tikhvin under conservation.


Our Lady of Tikhvin with marginal scenes

Icon in cover of the Veneration tier. Russia, 16th century. Under conservation.


SS Zosimus and Sabbatius of Solovki

Icon of the Menaion tier. Russia, 17th century, cover - 17th century


The Virgin Enthroned with the Saints Interceding

Icon of the Menaion tier. Russia, 16th century, cover - 16th century


St Maximus

Icon of the Menaion tier. Moscow, 18th century


The Saviour (half-length image), the Virgin and St John the Precursor

Icon of the Menaion tier. Russia, 17th century, cover - 17th century


Metropolitan Peter

Icon in cover of the Deisis tier. Nazary Istomin. Moscow, 1627


St Basil the Great (Basil of Caesarea)

Icon in cover of the Deisis tier. Nazary Istomin. Moscow, 1627


Peter the Apostle

Icon in cover of the Deisis tier. Nazary Istomin. Moscow, 1627


The Archangel Michael. 대천사 미가엘

Icon in cover of the Deisis tier. Nazary Istomin. Moscow, 1627


The Virgin. 동정녀 마리아

Icon in cover of the Deisis tier. Nazary Istomin. Moscow, 1627


Christ Almighty. 전능하신 그리스도

Icon in cover of the Deisis tier. Nazary Istomin. Moscow, 1627


St John the Baptist (Precursor). 세례 요한

Icon in cover of the Deisis tier. Nazary Istomin. Moscow, 1627


The Archangel Gabriel. 대천사 가브리엘

Icon in cover of the Deisis tier. Nazary Istomin. Moscow, 1627


Paul the Apostle. 사도 바울

Icon in cover of the Deisis tier. Nazary Istomin. Moscow, 1627


St John Chrysostom

Icon in cover of the Deisis tier. Nazary Istomin. Moscow, 1627


Metropolitan Jonah

Icon in cover of the Deisis tier. Nazary Istomin. Moscow, 1627


Annunciation

Icon in cover of the Feasts tier. Nazary Istomin. Moscow, 1627


The Nativity of Christ. 그리스도의 탄생

Icon in cover of the Feasts tier. Nazary Istomin. Moscow, 1627


The Ascension of Christ. 그리스도의 승천

Icon in cover of the Feasts tier. Nazary Istomin. Moscow, 1627


The Old Testament Trinity

Icon in cover of the Feasts tier. Nazary Istomin. Moscow, 1627


The Dormition of the Virgin

Icon in cover of the Feasts tier. Nazary Istomin. Moscow, 1627


Prophet Elijah

Icon in cover of the Prophets tier. Nazary Istomin. Moscow, 1627


Prophet David

Icon in cover of the Prophets tier. Nazary Istomin. Moscow, 1627


Our Lady of the Sign

Icon in cover of the Prophets tier. Nazary Istomin. Moscow, 1627


Prophet Solomon

Icon in cover of the Prophets tier. Nazary Istomin. Moscow, 1627


Prophet Zechariah

Icon in cover of the Prophets tier. Nazary Istomin. Moscow, 1627


[영상] Правильный храм Ризоположения


[영상] После того, что ты уснул / After that Thou hast fallen asleep


참조 https://holy-robe-deposition-church.kreml.ru/en-Us/history/view/




리즈뽈로줴니예 교회 (Church of the Deposition of the Virgin's Robe)


몇 세기 동안 모스크바 공국의 대주교들과 러시아 제국 총대주교들의 개인 예배당이었다.

1451년 성모의 성의를 비잔틴으로 옮겨온 것을 기념하는 종교 명절에 모스크바가 타타르의 침공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여 프스코프의 장인에 의해 요나 대주교 궁에 교회가 건축되었으며, 

초기 모스크바 양식과 프스코프 건축 양식이 조화를 이루어 외관이 매우 우아하다.


1484~1485년 게론티우스 대주교가 구 교회를 허물고 새로운 석조 사원을 건설하였다.

17세기에 긴 복도를 건축하였고, 1965년에 교회 안에 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오늘날 총대주교는 1년에 한 번 교회 공식 행사일인 7월 15일에 종교 예배를 갖는다.


크레믈린 리즈뽈로줴니예 교회


총주교사원 - 리즈뽈로줴니예 사원은 러시아 총주교와 부주교(府主敎)들의 저택에 딸린 사원으로 

1484~1486년 건축예술가 프스코프 등에 의해 고대 모스크바 건축예술 전통에 따라 만들어졌다. 

16~18세기에 재건하는 과정에서 외형이 많이 변했으나 1930~1960년대에 본 모습으로 복원시켜 놓았다.


성당 내부에 보존되어 있는 벽화들은 황실 화가들이었던 

이반 보리쏘프, 씨도르 뽀스빼예프, 쎄몬 아브라아모프 등에 의해 1643~1644년에 제작된 작품이다.

17세기 중반 12사도 교회가 지어져 총주교 저택에 딸린 교회가 되자, 

이 교회는 그냥 황제 궁전을 구성하고 있는 건물 중의 하나로 되었다.


리즈뽈로줴니예 사원은 푸스코프 장인들에 의해 지어진 러시아 정교 사원의 공간적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총주교 한 사람만을 위한 크기가 작은 종교적 공간이다.

단순하면서도 어떤 세속적 의미도 용납치 않는 오직 신과 주교만이 존재하는 종교적 공간으로 지어졌다.


총대주교 교회 (Church of the Deposition of the Virgin's Robe)


총대주교 교회 (Church of the Deposition of the Virgin's Robe)


Church of the Deposition of the Virgin's Robe. South-east view. 남동쪽 전망


Church of the Deposition of the Virgin's Robe. Southern facade. 남부 외관


Church of the Deposition of the Virgin's Robe. Northern facade. 북부 외관



Miniature from the Illustrated Chronicle, 2nd half of the 16th century. 16세기 후반


Metropolitan Jonah. 요나

Covered icon. Diesis tier of the iconostasis. Moscow, 1627. Nazary Istomin Savin


Metropolitan Jonah

Covered icon. Diesis tier of the iconostasis.. Moscow, 1627. Nazary Istomin Savin


Reliquary of Metropolitan Jonah in the Assumption Cathedral in the Moscow Kremlin

Shrine – Moscow, 1585. Wood, silver; chasing, carving, gilding.

요나의 무덤 – 모스크바, 1585. 목재,은; 추격, 조각, 금 도금.

Velvet – Turkey, 17th century; sewing – 1851. 벨벳 – 터키, 17 세기; 재봉 – 1851. 


CHURCH PLAN


1.Covered arcade

2. Portals

3. Apsides

4. South porch

5. Sanctuary

6. Iconostasis

7. “Hollow” floor candle holders

8. Exposition of Russian wooden sculpture and carvings


Church of the Deposition of the Virgin's Robe. South portal


Ornamental bend in the central part of the southern facade


Church of the Deposition of the Virgin's Robe. East part. Apsides


Decorative frieze on the apsides


Dome of the Church of the Deposition of the Virgin's Robe


Niche in the south wall


Painting 'South facades of the Deposition of the Virgin's Robe Church and Chapel of Our Lady of the Kiev Caves'

Russia, over 1833

성당의 북쪽과 서쪽에 인접한 갤러리가 있다. 

덮은 현관이 있는 이 갤러리는 1643-1645 년에 교회에 첨부되었다. 

서쪽에서 Terem Palace까지의 통로가 있다. 

교회 서쪽에는 17세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키예프 동굴의 성모 (Pecherskaya)의 유명한 이미지가 있다. 


Covered porch of the Church and the passage to the Chapel of Our Lady of the Kiev Caves

교회의 현관과 키예프 동굴의 성모 예배당으로 가는 통로

Card. Late 19th – early 20th century. 카드. 19 세기 후반 ~ 20 세기 초


Northern gallery of the Church of the Deposition of the Virgin's Robe


Northern facade of the Church of the Deposition of the Virgin's Robe


Arched gables on the northern side of the Church. 교회 북쪽의 아치형 박공


Niche with fresco

Northern façade of the Church of the Deposition of the Virgin's Robe. 17th century (?)


Interior of the Deposition of the Virgin's Robe Church. South wall and south-west pillar view


INTERIOR
성당 내부의 특징은 메트로폴리탄이 프라이버시로 기도할 수 있는 장소인 목적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훌륭한 비율과 작은 공간이다. 교회의 문 앞에는 현관이 있다. 
갤러리로 이어지는 북부 및 서부 포털은 17세기에 재건축 되어 당시의 형태 특성을 갖고 있다. 
북부 포털의 장식용 벽돌과 색 장식이 지워지고 복원되었다. 
계단 위의 북쪽 교회 현관의 동쪽 벽 부분에는 18세기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복원되고 다시 그려졌다.

교회의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높이, 두꺼운 기둥 및 프레스코가 있는 벽은 모스크바 교회에 엄숙함을 준다. 
인테리어의 또 다른 특징은 모든 구성 요소 (아이콘, 벽화, 17세기 초의 적용 예술 작품)의 문체 균일성이며 
아름답게 구성되고 잘 보존 된 앙상블을 제시한다. 

Interior of the Deposition of the Virgin's Robe Church

Iconostasis and "hollow" floor candle holders view


Cupola and vaults of the Deposition of the Virgin's Robe Church


Painting on the east wall of the porch

End of the 19th century. Restored in 2008. 19세기 말. 2008년에 복원.

갤러리로 이어지는 북쪽 포털

Painting on the east wall of the porch

End of the 19th century. Restored in 2008. 19세기 말. 2008년에 복원.


Hollow floor candle holders

Russia, Moscow, 1644. Wood, copper, wax; casting, chasing, egg tempera, silvering. 

Donated by Patriarch Joseph in 1649.


Hollow floor candle holders

Russia, Moscow, 1644. Wood, copper, wax; casting, chasing, egg tempera, silvering.

Donated by Patriarch Joseph in 1649.


Interior of the Deposition of the Virgin's Robe Church

South wall and south-west pillar view


Church chandelier. Russia, Moscow, 17th century.

Maker - Dmitry Sverchkov (?). Copper; casting, chasing, silvering. 

제작자-Dmitry Sverchkov (?). 구리; 캐스팅, 추격, 은도금.


Exposition of Russian Wooden Sculpture and Carvings. Showcases 1 and 2

15 세기에서 19 세기에 걸친 러시아 목조 조각

교회의 북쪽 회랑에는 모스크바 크렘린 박물관의 러시아 목조 조각품이 전시되어 있다.


컬렉션의 기본은 역사적으로 크렘린, 교회 및 수도원과 관련된 예술 작품이다. 

이 전시물은 모스크바, 노브고로드, 로스토프 벨리키 (Rostov Velikiy) 및 

러시아 북부 수도원과 같은 문화 센터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유형의 작품을 보여준다. 


Exposition of Russian Wooden Sculpture and Carvings. Showcase 2


Exposition of Russian Wooden Sculpture and Carvings. Showcase 3


Saint George

Icon. Sculptural image (high relief).

Moscow, late 14th – early 15th century. Wood; carving, gesso, tempera

가장 오래된 나무 조각 중 하나가 바로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에 만들어진 

세인트 조지(Saint George)의 Sculptural image (high relief)이다.


Exhibits layout in showcase 2


Sts Florus and Laurus, the Archangel Michael and Elijah the Prophet

Sts Florus와 Laurus, 대천사 Michael과 예언자 엘리야 

Icon. Novgorod, 16th century. Wood; carving.


Icons made by carvers from Rostov Velikiy

1. Christ Emmanuel, St Nicholas the Wonderworker and Rostov saints

2. Our Lady of the Sign and the symbols of the four evangelists

3. The Appearance of the Angel to the Myrrh-Bearing Wives

 

Icons made by carvers from Velikiy Novgorod

5. Sts Florus and Laurus, the Archangel Michael and Elijah the Prophet

6. St George and the Dragon with the Deisis and Selected Saints

7. The Descent from the Cross

8. Portable church

 

Works by carvers from artistic centres of the Russian North

4. Reliquary cross

9. Guardian Angel

10. Venerable Zosimas and Sabbatius of Solovki

11. Cherub

12. The Mandylion, the Theotokos and St John the Theologian

13. Memorial and pectoral crosses

14. The Crucifixion, the New Testament Trinity and Selected Saints

15. Our Lady of Smolensk, the Holy Trinity and Selected Saints

16. St Nicolas of Mozhaysk

17. St Paraskeva the Friday

18. The Deisis

19. A part of a carved icon

20. Pantocrator

21. The Church

22. Our Lady of Smolensk

23. Christ Emmanuel

24. Elijah the Prophet

 

Works by carvers from Moscow

25. St Nicolas of Mozhaysk

26. Our Lady of the Passion

27. St Jonah the Metropolitan of Moscow


The Descent from the Cross

Icon. Novgorod, the first third of the 16th century. Wood; carving, tempera.


St George and the Dragon with the Deisis and Selected Saints

Icon. Novgorod, 16th century. Wood; carving, tempera.


Portable Church

Folding icon. Novgorod, mid-16th century. Wood; carving.


Portable Church. Wing 1

Folding icon. Novgorod, mid-16th century. Wood; carving.


Portable Church. Wing 2

Folding icon. Novgorod, mid-16th century. Wood; carving.


Portable Church. Wing 3

Folding icon. Novgorod, mid-16th century. Wood; carving.


Portable Church. Wing 4

Folding icon. Novgorod, mid-16th century. Wood; carving.


The Crucifixion with the Two Thieves

Icon (high relief). Moscow, last quarter of the 17th century.

Wood; carving, gesso, tempera, oil.






 “Uspensky” bell. Central aperture of the Assumption Belfry

"우스펜스키" 종. 종탑의 중앙 조리개

Moscow, 1817. Factory of Mikhail Gavrilov Bogdanov. Bronze, iron; casting, chasing, forging

1817년 모스크바. Mikhail Gavrilov Bogdanov 공장. 청동, 철; 주조, 추격, 단조

The bronze bell with six canons is decorated with icons and portraits in cartouches and a memorial inscription in the lower part.

6개의 캐논이 있는 브론즈 벨은 카 터치의 아이콘과 인물 사진, 아래쪽에는 기념비로 장식되어 있다.


“Reut” bell. “Reut” 벨

Placed under the vault of south facing aperture of the Assumption Belfry

Moscow, 1622. Craftsman Andrey Chokhov. Bronze, iron; casting, chasing, forging

1622년 모스크바. 장인 Andrey Chokhov. 청동, 철; 주조, 추격, 단조

The upper part of the bronze bell is decorated with four bands: the upper one – with stylized floral ornament with trefoils, 

the lower – with inscriptions, the lowest – with a motif of coiling stem.

브론즈 벨의 상단 부분은 4개의 밴드로 장식되어 있다. 상단은 트레 포일이 있는 양식화 된 꽃 장식, 

하단은 비문, 가장 낮은 부분, 코일링 스템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Semisotny” bell. “Semisotny” 종. Philaret’s annex

Moscow, 1704. Craftsman Ivan Motorin. Bronze, iron; casting, chasing, forging

모스크바, 1704. 장인 이반 모토 린. 청동, 철; 주조, 추격, 단조

The upper part of the bronze bell is decorated with an inscription on a band; 

there is an ornamental frieze with floral motifs above the inscription.

브론즈 벨의 윗부분은 밴드에 새겨져 있다. 비문 위에 꽃을 모티브로 한 장식용 프리즈가 있다.


 “Dormition of Our Lady” and the cartouche with the bell founder’s name. Fragment of the “Novgorodsky” bell décor

“성모님의 기숙사”와 종 제작자의 이름을 가진 cartouche. “Novgorodsky” 종 장식의 조각

The lower (first) tier of the Ivan the Great Bell-Tower.

Moscow, 1730. Craftsman Ivan Motorin. Bronze, iron; casting, chasing, forging

모스크바, 1730. 장인 이반 모토 린. 청동, 철; 주조, 추격, 단조


 “The Crucifixion”, inscriptions and ornament. Fragment of the “Medved” bell décor

"십자가", 비문 및 장식. "Medved"종 장식의 조각

Moscow, 1775. Craftsman Semyon Mozhzhukhin. Bronze, iron; casting, chasing, forging

모스크바, 1775. 장인 Semyon Mozhzhukhin. 청동, 철; 주조, 추격, 단조


“Lebed bell”. Fragment of the inscription with the bell founder’s name

"Lebed bell". 종 설립자 이름이 새겨진 비문 조각

The lower (first) tier of the Ivan the Great Bell Tower

Moscow, 1775. Craftsman Semen Mozhzhukhin. Bronze, iron; casting, chasing, forging

모스크바, 1775. 장인 정액 Mozhzhukhin. 청동, 철; 주조, 추격, 단조


 “Rostovsky” bell. “Rostovsky” 종

The lower (first) tier of the Ivan the Great Bell Tower

Russia, Belogostitsky monastery of St George, Rostov district, 1687

Craftsman Philip Andreev. Bronze, iron, casting, embossing, forging

장인 필립 안드레 에프. 청동, 철, 주조, 엠보싱, 단조


 “Shirokiy” bell. 시로키 벨

The lower (first) tier of the Ivan the Great Bell Tower

Moscow, 1679. Craftsmen Vassily and Yakov Leontievs. Bronze, iron, casting, embossing, forging

모스크바, 1679. 장인 Vassily와 Yakov Leontievs. 청동, 철, 주조, 엠보싱, 단조


Detail of a decorative frieze with cherub and lily in the inscription of the bell “Nemchin”

종 “Nemchin”의 비문에 천사님과 백합 장식 프리즈의 세부 사항

Middle (second) tier of the Ivan the Great Bell-Tower

Germany, 1550(?). Bronze; casting, chasing

독일, 1550 (?). 청동; 캐스팅, 추격

The upper part of the bell is decorated with two figured ornamental bands with floral motifs; 

the relief inscription in German with the date of production (1550) is placed between the bands.

종의 윗 부분에는 꽃을 모티브로 한 두 개의 장식용 밴드가 장식되어 있다. 

생산 날짜 (1550)와 함께 독일어로 구호 비문이 밴드 사이에 배치되어 있다.


Bell “Glukhoy”

Middle (second) tier of the Ivan the Great Bell-Tower

Moscow, 1621. Craftsmen Andrey Chokhov and Ignaty Maximov Shpilin. Bronze; casting, chasing

모스크바, 1621. 장인 Andrey Chokhov와 Ignaty Maximov Shpilin. 청동; 캐스팅, 추격


벨 타워의 두 번째 (중간) 계층은 Nemchin을 포함하여 더 작은 크기의 8 종으로 채워져 있다 .

Nemchin은 외래 비문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Andrey Chokhov와 Ignatiy Maximov의 

부드러운 소리가 나는 Glukhoy (청각 장애인) 및 Mariinsky는 Sretensky Monastery에서 이집트의 성모 마리아 교회. 

벨 캐스팅 왕조의 창시자인 표도르 모토린 (Fyodor Motorin)의 Danilovsky 벨은 천사의 나팔 소리로 

벨 펄의 상징적 해석을 상기시켜주는 6개의 날개 달린 천사의 아름다운 프리즈로 장식되어 있다. 

층 안에 5 개의 종이 더 있다. 

차임의 시작을 의미하는 두 개의 벨이 이름이 지정되지 않은 6개의 벨과 함께 상단에 배치되었다. 

Korsunsky라는 이름을 가진 처음 두 개의 종은 매우 가혹한 소리를 낸다. 


Bell of the third tier of the Ivan the Great Bell-Tower, 1621

Moscow, 1621. Craftsman Andrey Chokhov and Ignaty Maximov Shpilin. Bronze; casting, chasing

모스크바, 1621. 장인 Andrey Chokhov와 Ignaty Maximov Shpilin. 청동; 캐스팅, 추격

The upper part of the bell is decorated with ornamental band with the inscription under it.

종의 윗 부분에는 그 아래에 비문이 있는 장식용 밴드가 장식되어 있다.


Bell of the third tier of the Ivan the Great Bell-Tower, 1687

Russia, Belogostitsky Georgievsky Monastery by the Rostov Velikiy, 1687

Craftsman Philip Andreev. Bronze, iron; casting, chasing, forging

장인 필립 안드레에프. 청동, 철; 주조, 추격, 단조

The upper part of the bell is decorated with ornamental figured band with grassy ornament 

and “pearls”, and a band with cherubs. The lower part is shaped.

종의 윗 부분에는 잔디 장식과 진주로 장식된 장식용 밴드와 천사가 달린 밴드가 장식되어 있다. 

하부는 모양이 있다.


Bell of the third tier of the Ivan the Great Bell-Tower, 1647

Russia, 1647. Bronze; casting, chasing

러시아, 1647. 청동; 캐스팅, 추격

The upper part of the bell is decorated with grassy ornament, 

relief image of the Calvary cross and an inscription made in ligatured script.

종의 윗 부분은 잔디 장식, 갈보리 십자가의 구호 이미지 및 

장식이 된 대본으로 만든 비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차르 벨 (Tsar Bell)

Moscow, 1733-1735. Craftsmen Ivan and Mikhail Motorin, sculptor Fyodor Medvedev.

Bronze, casting, embossing

모스크바, 1733-1735. 장인 Ivan과 Mikhail Motorin, 조각가 Fyodor Medvedev. 청동, 주조, 엠보싱


이 종은 금과 은, 황동, 청동, 주석이 포함된 중량이 202t으로 높이 6.6m 지름이 6.1m에 이른다,

러시아 이반 벨타워와 크레믈린 벽 사이에 놓여진 이 종은  "짜르 콜로콜 (Tsar Kolokol)" 이라 불린다. 

두 개의 같은 이름의 종이 이 종 이전, 1600년 및 1655년에 제작되었으나 두 번 모두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다. 

따라서 같은 이름의 종이 3번재 제작되었다 하여 Tsar Koloko III라 불리우기도 한다.


이 세 번째 종은 피터대제의 조카인 안나 왕비의 주문으로 이반 모토린(Ivan Motorin)과 그의 아들 마이클에 의해 

1733년~1735년에 주조된 세계 최대 크기의 종이다.

종의 표면에는 짜르 '알렉세이'와 여제 '이바노프'의 초상과 종의 유례를 기록하고 있으며, 

5개 종류의 문양이 장식된 세계적인 걸작이다.


그러나 이 종은 한번도 울려지지 않았다. 

1737년 아직 종이 완전히 굳어지지 않았을 때 모스크바 대화재로 지붕이 내려 앉아 화재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찬물이 종의 일부분에 집중적으로 접촉되어 열이 급랭하면서 깨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깨진 조각만도 11.5t이다.

1836년 이 종은 크레믈린의 이반대제 벨타워 옆에 놓여졌다.


Postcard by Sherer & Nabholz. Sherer & Nabholz의 엽서.

Russia (?), late 19th—early 20th centuries.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 러시아 (?)


Tsar Bell. Fragment


Tsar Bell. Fragment


Tsar Bell, base of the Ivan the Great Bell-Tower and the Archangel Cathedral

차르 벨과 이반대제의 종탑과 아르항겔리스키 성당.


Relief decor of the Tsar Bell


Tsar Bell

Fragment with a relief portrait of Empress Anna Ivanovna


Detail of the decor of the Tsar Bell

Mark of the Motorins


Tsar Bell

Fragment with a relief portrait of Tsar Alexey Mikhailovich


Exposition on the ground floor of the ‘Ivan the Great’ Bell Tower

'Ivan the Great' 종탑 1층 박람회

Fragments of architectural décor. The 14th- and the mid-15th century Kremlin

건축 장식 조각. 14세기와 15세기 중반 크렘린


Through-the-wall stairs of the ‘Ivan the Great’ Bell Tower

'Ivan the Great' 종탑으로 올라가는 계단


First bell ringing tier of the ‘Ivan the Great’ Bell Tower

There are six bells on the first tier now.

Four of them are used in bell-ringing.


'Ivan the Great' 벨 타워의 첫 번째 벨 울림 계층

첫 번째 계층에는 6 개의 종이 있다. 그중  4 개가 벨 울림에 사용된다.


The Golden Age of the English Court: From Henry VIII to Charles exposition

Exhibition hall of the Assumption Belfry


종탑 1층은 모스크바 크렘린 박물관의 전시 프로젝트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된다. 

크렘린 컬렉션과 다른 러시아 및 외국 박물관의 예술 작품을 전시하는 임시 전시회가 개최되기도 한다. 

지난 몇 년 동안 종탑 홀은 "세계를 매혹시킨 인도 보석",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차르와 황제의 대결", 

"예술 보존과 예술의 복원"과 같은 유명한 프로젝트의 박람회를 개최했다. 

"영국 법원의 황금 시대", "헨리 8세에서 찰스 1세에" 등등을 전시하기도 했다.


The Art of Conserving Art. Restoration at the Moscow Kremlin Museums exposition

Exhibition hall of the Assumption Belfry


Henry Moore and the Classic Canon of Modern Sculpture exposition

Exhibition hall of the Assumption Belfry


Henry Moore and the Classic Canon of Modern Sculpture exposition

Exhibition hall of the Assumption Belfry



[영상] Ivan Velikiy Belltower of Moscow Kremlin


[영상] Rostov The Great. Chimes. Sysoy (on 2 edges). Egoryevsky zvon


참조 https://ivan-the-great-bell-tower.kreml.ru/en-Us/exhibition-hall/view/




이반 대제의 종탑(The Bell Tower of Ivan)


'Ivan the Great' 종탑 단지는 크렘린의 중심이다. 

벨 타워는 1505~1508년 이탈리아 건축가 본 프라진(Bon Fryazin)에 의해 세워졌다. 

돔 아래 기념비에는 1600년과 차르 보리스고누노프와 그의 아들 페오도르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532~1552년, 이탈리아 건축가 빼뜨로크 말리(Petrok Maly)가 8면체의 종루를 증설하였고 

이를 "그리스도의 부활" 이라고 하였다. 

1624년 건축가 오구르쪼프(Bazhen Ogurtsov)는 텐트 모양의 상판 (Filaret 's Annex)이 있는 종탑을 추가하여

총 높이가 81 미터가 되었다. 


1812년 나폴레옹의 군대는 모스크바에서 퇴각하면서 '이반 대왕' 벨 타워 단지를 폭발시킬려고 했지만

'이반 대왕' 타워는 살아 남았다. 

종탑과 필라렛의 별관은 1814 ~ 1815 년에 완전히 파괴되어 원래 크기로 복원되었다. 

현재 16세기에서 17세기의 종 24 종은 종탑과 종루에 위치해 있고

러시아에서 사용하고 있는 종들 중에서 가장 큰 종이 이곳에 있으며, 성모승천종, 또는 제전종이라고 불린다.


Assumption Belfry


'Ivan the Great' 북쪽 벽에 인접한 건물은 1814~1815년에 건축가 D.Gilardi, L.Ruska 및 IVEgotov가 

1812년에 파괴한 16세기 교회의 터 위에 세워졌다. 

고대 건축의 모습을 보았지만 19세기 초의 특징적인 요소를 파사드의 건축 장식에 추가했다. 

1849년에서 1852년까지 건축가 K.A. 톤에 의해 구 세인트니콜라스 교회로 이어지는 서쪽 외관의 현관이 세워졌다.


모스크바에서 가장 높은 권력을 상징하는 이반 대제의 종루(The Bell Tower of Ivan)


'Ivan the Great' 종탑은 1505~1508 년 Ivan Kalita 시대에 

세인트 존 클리마쿠스 (St John Climacus)의 백석교회 종탑 부지에 세워졌다. 

이탈리아 건축가 Bon Fryazin은 약 60 미터 높이의 팔각형 건물을 건축했다. 

고대 교회의 제단은 종탑의 첫 번째 층에 보관되었다.


16 세기 말에 Boris Godunov는 예루살렘에 있는 것과 같은 에큐메니칼 성당을 세우고자 했으며 

금박을 낸 돔이 있는 높은 드럼을 추가하여 종탑의 크기를 늘리라고 명령했다. 

결과적으로 십자가를 포함한 건축 길이는 81 미터에 이른다. 

수직선이 건축 구성을 지배하는 관행은 나중에 러시아 건축에서 훌륭하게 발전했다.


이반 대제의 종루는 모스코바에서 가장 높은 탑이다. 

러시아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높은 종루를 건설하는 일종의 경쟁이 있었는데

모스코바에서는 이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권리를 지닌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폴레옹이 모스코바에서 퇴각할 때 종루를 폭파하도록 명령했으나 

다행히 폭파는 면했으며 아직까지도 그 위엄을 자랑하고 있다. 

종루에는 적의 습격을 알리는 두 개의 종이 있다. 

매달려 있는 종 중에 무거운 것은 70톤이나 되며 종루의 높이는 81m에 이른다.


Draft ‘Church Bell-tower of St John Climacus and the Belfries’

A.Mikhailov under the measurement of I.Zlobin


대성당 광장과 Ivanovskaya 광장의 경계에 위치한 'Ivan the Great' 종탑 단지는 크렘린의 중심이다. 

이 앙상블을 만들기 위해 1505년에서 1815년까지 3세기 이상이 걸렸다. 

여기에는 'Ivan the Great' 종탑, 가정 종탑 및 필라렛 별관의 탑이 서로 다른 시기에 세 개의 기념물로 세워졌다.


벨 타워는 1505-1508년 이탈리아 건축가 Bon Fryazin에 의해 세워졌다. 

한 세기 후에 종을 위한 하나의 층이 종탑에 추가되어 총 높이가 81 미터가 되었다. 

돔 아래 기념비에는 1600년과 차르 보리스고누노프와 그의 아들 페오도르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 

1532~1552년, 이탈리아 건축가 Petrok Maly의 프로젝트에 따라 Bell Tower 근처에 새로운 교회가 세워졌다. 

그것은 17세기 말에 Uspenskaya (Assumption)라는 종탑으로 변형되었다. 

1624년 건축가 Bazhen Ogurtsov는 가정 종탑에 텐트 모양의 상판 (Filaret 's Annex)이 있는 종탑을 추가했다.


1812 년 나폴레옹의 군대는 모스크바에서 퇴각하면서 '이반 대왕'벨 타워 단지를 폭발 시켰지만 

'이반 대왕' 타워는 살아 남았다. 

종탑과 필라렛의 별관은 1814~1815년에 완전히 파괴되어 원래 크기로 복원되었다. 

현재 16세기에서 17세기의 종 24종은 종탑과 종루에 위치해 있다.


1838년 이반대제 종탑과 아르항겔리스키 성당


1812년 프랑스 침략자들은 모스크바를 떠날 때 'Ivan the Great' 종탑의 건축물을 폭파시킬려고 했다. 

그러나 종탑 자체는 구조와 기초의 힘으로 인해 약간만 파괴되었을 뿐이었다. 

1813년 12월 Muscovites는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추방된 후 'Ivan the Great' 종탑의 종소리를 처음으로 들었다. 

앙상블은 1814-1815 년에 완전히 재구성되었다.


이반대제 종탑과 대성당 광장


 ‘Ivan the Great’ Bell Tower and the Belfry as seen from the Cathedral Square, after the restoration of 1913-1914

1913-1914년 복원 후 대성당 광장에서 본 'Ivan the Great' 종탑


Drawing ‘Superposed drafts of the eastern facade of the ‘Ivan the Great ’Bell Tower due to the measuring in 1910 

and stereomer of the Filaret’s Annex in 1961’

‘1910년 측정과 1961년 필라렛 ‘Ivan the Great’ 벨 타워의 동부 외관 초안 그림


이반대제 종탑과 우스펜스키사원


20세기에 기념비는 두 번 이상 복원되었다. 

과학적 연구에 따르면 화이트스톤 디테일이 있는 원래 벽돌 외관은 자연스러운 색상을 띠고 있다.

오늘날 이 독특한 러시아 건축 기념물에는 모스크바 크렘린의 건축 앙상블 역사를 기념하는 박물관이 있다.


Drum and dome of the Assumption Belfry


Drum and dome of the Assumption Belfry


Marquee of the Filaret’s Annex


 Ivan the Great Bell Tower - a focal point of the Kremlin

크렘린의 중심이자 가장 높은 '위대한 이반대제의 종탑'


The Ivan the Great Bell Tower


천국으로 가는 계단에 대한 아이디어는 'Ivan the Great' 종탑의 모습으로 구현되었다. 

이 건물은 1329년 해체된 St John Climacus 교회 부지에 1505 ~ 1508년 

이탈리아 건축가 Bon Fryazin에 의해 건축되었다. 

원래 종탑은 St John 교회 위의 높이 60미터의 3층 구조였다. 

'Ivan the Great' 종탑의 벽은 벽돌처럼 칠해져 흰색 석재 디테일이 더욱 인상적인 색조를 주며 

건물의 골격을 드러낸다. 

두 개의 하위 계층은 오픈 갤러리로 완성된 긴 팔면체 타워 모양이었고, 

세 번째 계층은 작은 종을 위한 하나의 오픈 갤러리로 구성되었으며 작은 큐폴라로 장식되었다.


1600년 차르 보리스 고노노프 (Tsar Boris Godunov)의 명령에 따라 종탑은 현재 높이까지 확장되었으며 

돔의 바닥 바로 아래 파란색 배경에 새겨진 화려한 돔으로 마무리되었다. 

동시에 팔각형 3층이 드럼으로 팔각형 3층을 융합하도록 만들어져 종탑의 탑 모양을 강조한다. 

결과적으로 ‘대전 반’의 높이는 81미터에 이르렀으며, 화이트스톤 팔각형의 지름은 25 미터였다.


1532-1543 년에 부활의 교회가 종탑에 인접 해 있었고 이탈리아 이민 건축가 Petrok Maly의 감독하에 

큰 종소리가 추가되었지만 1543-1552 년에 완공되었다. 

1812 년 나폴레옹의 군대는 모스크바에서 퇴각하면서 '이반 대왕'벨 타워 단지를 폭발 시켰지만 

'이반 대왕' 타워는 살아 남았다. 

종탑과 필라렛의 별관은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1814~1815년에 D.Gilardi, I.Egotov 및 

L.Ruska에 의해 원래 크기로 복원되었다. 


1849 년에서 1852년까지 K.Ton의 디자인으로 종탑의 서쪽 정면에 높은 현관이 부착되었다.

17세기 후반, 프스코프 (Pskov) 유형의 석조 종탑이 건축되었다. 

1624년 Patriarch Filaret은 건물에 종탑을 하나 더 추가하여 Filaret의 별관 (건축가 B.Ogurtsov)으로 지명했다.


Church of St John Climacus, 1329

Author of the architectural reconstruction V. Ryabov


The Bell Tower construction under the supervision of Bon Fryazin


The Ivan the Great Bell Tower in the 16th century

Author of architectural reconstruction V. Ryabov


The Ivan the Great Bell Tower in the 17th century (with an additional tier, 1600)

Author of architectural reconstruction V. Ryabov


Ivan the Great Bell Tower. Present-day view

Author of the architectural reconstruction V. Ryabov


Bells of the 1st tier of the Bell Tower


Ivan the Great Bell-Tower complex. View from the south


Fragment of the gilded memorial inscription covering the dome of the Ivan the Great Bell Tower

이반의 종탑을 덮고있는 화려한 기념비 조각


Fragment of the decor of the Bell Tower. Eastern façade

종탑의 장식 조각. 동부 파사드

Plan of the 1st tier of the ‘Ivan the Great’ Bell Tower in 1508. Present-day drawing

1508 년 'Ivan the Great'종탑의 1 층 계획. 오늘의 그림


The architectural ensemble of the ‘Ivan the Great’ Bell Tower


Fragment of the architectural decor of the Bell Tower’s drum

벨 타워 드럼의 건축 장식 조각


Ornament of the drum of the Assumption Belfry


Spires on the marquee of the Filaret's Annex


Bells of the first tier of the Ivan the Great Bell Tower


모스크바 크렘린 박물관의 컬렉션은 33개의 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이 독특한 복합 단지에는 16세기에서 19세기의 기념비가 포함되어 있으며, 

대부분은 뛰어난 벨 창업자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컬렉션은 큰 크기의 무거운 종을, 거의 각각 특별한 장식이나 역사적 비문이 있다.


거의 예외없이, 모든 종은 구리와 주석을 포함하는 소위 종 금속이라고 불리는 특수 합금으로 주조되었다. 

수명이 다한 후 발생하는 금속 특성, 벨 또는 혀가 부적절하게 매달려 있고 껍질을 벗기는 동안 

너무 강한 스트로크로 인해 금속 특성으로 인해 종의 출현과 결함으로 인해 종이 종종 파괴되었다. 

부러진 종은 대개 새로운 종으로 개편되었으며 때로는 금속을 추가했다. 

모스크바 크렘린의 종 40개가 1929년 ‘비철금속 조달로 인해’ 파괴되었다. 

그중에서도 17세기에서 18세기 사이의 종은 이반 대종탑, Chudov 및 승천 수도원, Bor 성당의 구세주 종탑, 

Borovitskaya 및 성모영보대축 탑에서 Fyodor 및 Ivan Motorin 및 Semyon Mozhzhukhin과 같은 

훌륭한 주인이 만든 종소리가 있었다. .


크렘린 종의 대부분은 이반 대종탑과 가정종탑에 가깝게 위치하고 있다. 

1508년, 바실리 왕세 3 ​세의 통치 기간 동안 '종을 위한' 2단계 종탑이 

세인트 존 클라 마쿠스교회 위에 세워졌다. 

보리스 고두노프 통치 기간인 1600 년에 세 번째 레벨이 나타났다. 

가정 종탑은 1543년 종탑 근처에 지어졌다. 

종은 가장 무거운 종을 위한 것으로 가정 대성당의 제단 뒤에 위치한다는 이름을 받았다. 

또 다른 큰 종을 걸기 위해 1624년에 종탑 북쪽에 별관이 추가되었다. 

별관은 당시 수도였던 Philaret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박물관 박람회에 현대 멀티미디어 기술을 도입하면 벨 타워의 가장 큰 종소리인 Novgorodskiy, Swan 및 

Bear의 소리를 재구성하고 재현할 수 있다. 

가장 깊은 '음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첫 번째 레벨에 있다. 

'중간'이라고 불리는 두 번째 레벨의 종은 보충하여 800에서 3200 킬로에 달한다. 

그중에서도 16세기 중반의 Nemchin과 Korsunskiy 'ㄹ종이 있는데, 가장 오래된 종은 크렘린에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160 킬로에 달하는 가장 작은 종은 세 번째 수준을 형성한다. 

여기에 차르 대포를 캐스팅한 유명한 마스터 Andrey Chokhov의 종소리가 걸려 있다.


Bells of the Ivan the Great Bell Tower and Tsar Bell

View from Ivanovskaya Square of the Kremlin


18세기 초의 인벤토리에 따르면, 'Ivan the Great' 단지에는 34개의 종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 중 절반은 사용되었으며 다른 절반은 혀를 놓쳤다. 

화재와 추락으로 종들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크렘린에 보존된 가장 오래된 종은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크렘린의 가장 웅장한 종 3개는 종탑에서 볼 수 있다. 

중앙 조리개는 Uspensky 종 – 차르 종 다음으로 큰 종이며 작업 종 중 가장 큰 종이다. 

모스크바 장인인 야코프 자블로프 (Yakov Zavjalov)는 파운드리의 90세 족장이며, 

미하일 보그다노프 (Mikhail Bogdanov) 상인의 공장에서 일한 14위 루시노프의 종 창업자는 

1817년에서 1819년까지 종을 재건했다. 


벨 톤의 무게는 1.750kg이며 벨 자체의 무게는 약 64 톤이다. 

Uspensky(가정) 종의 거대한 크기는 우려를 불러 일으켰다. 

벨 캐스팅 공장 상인 Bogdanov의 소유자는 벨 타워로 그것을 높이는 허가를 거의 받지 못했다. 

이를 위해 벨 타워가 특수 타워를 세웠다. 

종을 필요한 높이의 중간으로 올렸을 때 누군가 이반 대왕이 흔들리고 있다고 소리쳤다. 

군중들은 공황 상태에 빠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것은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주머니를 잠그는 사기꾼들에 의해 이루어 졌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잘 드러났고 종은 의도된 장소를 차지했다. 

종은 아주 엄숙한 날과 대축일에만 통행료를 지불했으며 종을 캐스팅하기 위해 

상당한 금액의 돈을 기부한 상인 보그다노프 (Bogdanov)는 종탑에 와서 

계단에서 새벽을 듣고 기쁨을 위해 울었다.


또 다른 큰 종은 Reut (즉, 울부 짖는 소리-낮고 단단한 소리의 종)이라고한다. 

19톤 이상의 무게는 1622년 차르 대포의 작가 Andrey Chokhov가 차르 미하일 피요로비치의 명령에 따라 생산되었다. 

1812년 폭발로 인한 추락 후 캐논을 잃었지만 수리 후에도 소리가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40 년이 지난 후, 크렘린에 있는 알렉산더 2세의 안식에 전념하는 엄숙한 제재 중에, 

Reut는 쓰러지면서 종탑 보관소를 뚫고 여러 사람들을 죽였다. 

이와 관련하여 Metropolitan Philaret은 알렉산더 통치의 불행한 종말을 예언했다.


16톤 이상의 무게를 가진 세 번째 큰 종은 Semisotny, Velikopostny, Voskresny 

(즉, 일곱 번째, Lenten, Resurrection)라는 이름으로 문서에 언급되었다. 

작곡가 A.G. Rubenstein이 특별히 들어서 들려주었다. 

이반 모토린 (Ivan Motorin)이 18세기 초에 캐스팅한 필라레 (Philaret) 별관의 풍성하게 장식된 종은 

사순절 동안 울려 퍼졌다.


The First Tier of the Bell Tower


종탑의 첫 번째 층에는 6개의 종이 있다. 

즉 Medved (곰), Lebed (백조), Shirokiy (넓은), Novgorodsky (Novgorod), Slobodsky (Sloboda) 및 Rostovsky (Rostov)이다. 

그 중 4 개가 차임에 사용된다. 

17세기까지는 "ochepny"방법으로 키밍을 했다 (벨이 레버로 땅에서 흔들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Novgorodsky 종의 무게는 430 poods이다(약 7톤).


Medved와 Lebed 종은 1775년 종 제작자 Semyon Mozhzhukhin에 의해 주조되었다. 

그것들은 매우 유사하며 무게는 약 450 poods (7톤 이상)이다. 

두 종 모두 16세기 초에 주조되었다. 

Rostovsky 종은 Rostov eparchy의 Belogostitskiy 수도원에서 가져왔다.





Exposition in the Church of the Twelve Apostles. Fragment


God Rested on the Seventh Day

Russia, second half of the 17th century. Wood, canvas, gesso; egg tempera.


Cross with Icons. Russia, mid-17th century.

Wood, gesso; tempera. Mount – silver; carving, chasing, gilding.


Old Testament Trinity

Russia, first half of the 17th century. Wood, gesso, canvas; tempera.


Metropolitan Alexis against a background of the Kremlin

Russia, mid-17th century. Wood, gesso; egg tempera.


Alexander Oshevensky

Russia, 17th century. Wood, canvas, gesso; egg tempera.


Eulogy of the Theotokos with the Akathist in the margins

Russia, Yaroslavl (?), 17th century. Wood, canvas, gesso; egg tempera.


Holy Gates with the images of the Annunciation and the Four Evangelists

Russia, 17th century. Icon painter Simon Ushakov. Wood, gesso; egg tempera.


St Andrew the First-Called

Russia, Moscow, late 17th – early 18th century. Wood, gesso; egg tempera.


Adoration of the Cross

Russia, Moscow, 1677-1678. Icon painter Ivan Saltanov (?).

Wood, canvas, gesso; egg tempera, oil painting, coloured varnish.


St John the Warrior

Russia, late 17th – early 18th century. Wood, canvas, gesso, fabric; egg tempera.


Nativity of the Theotokos

Russia, Moscow, 1698-1699. Icon painter of the circle of Kirill Ulanov.

Wood, canvas (?), gesso; egg tempera.


Forefather Job

Russia, Moscow, 1698-1699. Icon painter of the circle of Kirill Ulanov.

Wood, canvas (?), gesso; egg tempera.


The Crucifixion and Suffering of the Apostles


Interior of the living quarters housing authentic medieval utensils 

and interior furnishings of rich Russia house of the XVIIth century

Exposition in the Patriarch's Palace


Interior of the cabinet with authentic medieval utensils 

and interior furnishings of rich Russia house of the XVIIth century

Exposition in the Patriarch's Palace


Children's chair

Moscow, the XVIIth century. Wood, leather, metal; carving, turnery


Portrait (parsuna)

Russia, 1770–1680. Canvas; oil painting, wood carving


Copper pendant ink-pots

Moscow, the late XVIIth century. Bronze; casting


Mica lantern. Russia, the XVIIth century.(?)

Wood, sheet metal, mica, tin, lacquer; chiselling, openwork


Metal forged painted chest

Russia, the XVIIth century.(?). Iron; forging, casting


Stove covered with ornamented tiles

The XVIIIth century


Triptych with icons of Archangel Michael, Christ Emmanuel and Archangel Gabriel

Moscow, the late XVII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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