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과 문화의 상징, 아르바트 거리(Arbat Street)


우리 나라로 보면 명동 거리와 같은 곳으로 아르바츠까야(Arbatskaya, Арбатская)역 입구에서 

스몰렌스카야(Smolenskaya, Смоленская)역 외무성 건물까지 약 2km정도 보행자 전용 거리이다. 

이 거리가 생긴 것은 15세기이며 러시아의 대문호 푸쉬킨이 이 거리 No.53의 

2층 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더 유명해 졌다. 

옛날에 아르바트 거리는 귀족들의 저택이 한적하게 들어서 있던 곳으로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들이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한 곳이다. 


스몰렌스카야역(Smolenskaya, Смоленская)


모스크바 롯데호텔 건물

스몰렌스카야역(Смоленская)에서 나오면 한 편에 모스크바 롯데호텔 건물이 있다.


모스크바 롯데호텔 건물


스탈린 양식의 러시아 외무성 청사. 


스몰렌스카야역 다른 한 편에는 스탈린 양식의 러시아 외무부 청사가 있다.

구소련 시절을 대표하는 스타일의 건물로, 유럽풍의 화려한 외관에 압도적인 스케일이 특징이다. 

모스크바를 비롯 과거 동구공산권 국가들에는 이런 풍의 건물들이 종종 있다.


아르바트 거리 (Arbat Street)


주변으로 각종 전문 직업인들이 모여들어 골목마다 목공골목, 대장간 골목, 과자와 빵 골목, 

음식점 골목, 식탁보 골목 등의 이름이 붙여 있다.

아르바트는 번화한 거리로 변모하여 한쪽에서 소규모의 악단이 연주를 하는가 하면, 

시를 낭송하기도 하고,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노브이 아르바트 거리에는 지금 거의 외국 브랜드 상점과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기념품 가게와 노점상 등이 있어 러시아의 현주소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아르바트 거리는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이자, 

개혁과 개방의 거센 바람을 주도했던 곳이기도 하다. 

모스크바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이 거리는 러시아 젊은이들의 혼이 숨쉬는 곳이다. 

무명화가들의 고향이자 이름없는 화가, 연극배우, 가수들의 안식처이자 

전시장이고 무대이며 히피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1988년 "아르바뜨의 아이들"이라는 소설이 우리나라에도 소개됐고,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었다.


아르바트 거리 (Arbat Street)


안드레이 벨리(Andrey Belyi)의 기념 아파트


작가 안드레이 벨리가 태어나고 자란 곳

푸시킨 박물관인 하늘색 건물 입구 바로 옆에 시인이자 작가인 상징주의자 안드레이 벨리의 박물관이 있다.


안드레이 벨리(Andrey Belyi)의 기념 박물관


그는 1880년 이곳에서 태어나 26살까지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살았다.

예전에 작가가 살던 집에서 현재 방 2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전시된 사진을 통해 작가의 작품과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안드레이 벨리(Andrey Belyi)의 기념 박물관

안드레이 벨리(Андрей Белый, 1880 ∼ 1934)는 러시아의 상징주의 시인이자 소설가, 문학 비평가이다. 

본명은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부가예프(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Буга́ев)이다.


수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연과학에 관심을 갖고 모스크바 대학교 물리-수학학부에 입학하였고, 

이때 다윈을 비롯하여 여러 철학자들의 사상을 접하게 된다. 

종교 철학가인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와 교제하면서 그의 가족들과 친하게 지내는데, 

필명인 '안드레이 벨리' 는 블라디미르의 동생 미하일 솔로비요프가 지어준 이름이다. 


상징주의자로서 벨리의 사상은 복잡한 발전 과정을 겪는다. 

초기에는 솔로비요프의 철학과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사상, 리케르트의 신칸트주의 이론에 매료되었다가, 

후기에는 루돌프 슈타이너와 같은 신비주의 철학자의 인지학 이론을 주창하게 된다.


작가로서 창작 활동을 시작한 벨리는 1904년 첫 번째 시집 《쪽빛 황금》(Золото в лазурь)을 출간한다. 

두 번째 시집 《재》(Пепель, 1908)는 네크라소프를 기념하는 것이고, 

《유골 항아리》(Урна, 1909)는 마지막 시집이다. 

이와 함께 벨리는 소설 작가로서 《심포니야》(Симфония) 4부작(《영웅》(1903), 

《드라마》(1902), 《귀환》(1904), 《눈보라의 잔》(1908)을 비롯하여 《은빛 비둘기》(Серебряный голубь, 1909), 

《코틱 레타예프》(Котик Летаев, 1922) 등 산문소설을 창작하였고, 

1911년에 집필을 시작한 《페테르부르크》(Петербург)는 1916년 단행본으로 출판한다. 


이 밖에도 《녹색 초원》(Луг Зеленый, 1910)과 《상징주의》(Символизм, 1910), 《아라베스크》(Арабески, 1911) 등 

상징주의 철학과 문학 이론에 대한 많은 논문을 저술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벨리는 세 편의 회상록을 저술하는데, 이들은 당대를 풍미했던 상징주의 문학은 물론, 

격동기 러시아 사회의 역사적 문화적 흐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회상록은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까지 집필되었고, 

《두 세기의 분수령에서》(На рубеже двух столеций, 1930), 《세기의 시작》(Начало века, 1933), 

《두 혁명 사이에서》(Между двух революций, 1935)가 출간되었다.


〈페테르부르크〉는 조이스의 《율리시스》, 카프카의 《변신》과 더불어 20세기 모더니즘 산문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특히 은유와 환유, 반복과 전위, 라이트모티프 등 독특한 스타일로 

모더니즘 계열 작품들 중에서도 실험성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난해한 상징으로 가득찬 이 소설에는 니체와 베르그송 같은 20세기 초 철학자들의 사상에 투영된 

러시아 상징주의 특유의 역사적, 철학적 사색이 담겨 있다.


Belyi Museum-Apartment는 1993년에 설립되었지만 박람회의 공식 개관은 2000년 9월에 이루어졌다. 

Arbat와 Money Lane의 모퉁이에 있는 집에서 Bely는 1880년부터 생애 첫 26년을 살았다. 

2018년 초, 박물관에는 가족 사진, 작품 사본, 개인 용품, 그림 등 4천 점이 넘는 기념품이 있다.


Belyi Museum-Apartment 내부


안드레이 벨리(Andrey Belyi) 사진


Belyi Museum-Apartment 내부


Belyi Museum-Apartment 내부


Belyi Museum-Apartment 내부


푸시킨 박물관 전시장 (Vystavochnyy Zal Muzeya A.s. Pushkina)

푸시킨이 결혼 후 3개월 간 살았던 집


푸시킨 박물관 뒤로 스탈린 양식의 러시아 외무성 청사가 보인다.


푸시킨 박물관 1960년대 사진


푸시킨 박물관과 러시아 외무성





푸시킨 박물관은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옆 건물로 들어가 지하 통로를 통해 입장하도록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므로 그렇게 출입구를 별도로 만들어 놓은 것 같다.

기념관 입구에서는 신발에 얇은 1회용 비닐 덧신을 신도록 되어 있다. 

기념관의 바닥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도 러시아에서 극장, 박물관, 기념관, 식당 등에 들어갈 때처럼 두터운 겉옷은 보관소에 맡겨야 한다.


Vasily Tropinin. Portrait of Alexander Pushkin. 1827. Oil on canvas.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ушкин, 1799 ~ 1837)은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외조부는 표트르 대제를 섬긴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 흑인(지중해 인종) 출신 귀족이었다.


그는 모계로 흑인(지중해 인종)의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18세기 표트르 대제의 총애를 받은 

아브람 페드로비치 간니발 장군의 손녀였다. 

외증조부 간니발은 아프리카 출신의 노예였으나 표트르 대제에 의해 속량받아 군인이 되었고, 

실력을 인정받아 표트르 대제는 그의 세례 때 대부(代父)가 되어주기도 했다 한다. 

외조부는 표트르 대제를 섬긴 아비시니아 지중해 인종 출신 귀족이었다.


곱슬머리와 검은 피부를 가진 푸시킨은 자신의 몸속에 에티오피아 지중해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어린 시절, 그는 프랑스인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유모 아리나 로지오노브나로부터 

러시아어 읽기와 쓰기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민담과 민요를 들었다. 

또한 그는 유모를 통해서 러시아 민중의 삶에 대해 깊이 동정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어렸을 때 유모 아리나가 들려준 러시아의 옛날 이야기 및 설화가 그를 대시인으로 성공시키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가정교사로부터 배운 외국어 가운데 프랑스어에 가장 뛰어나 10세경에 이미 프랑스어로 시를 썼다.


1811년(12세), 차르스코예 셀로에 있던 학습원에 들어가서 자유주의적 교육의 영향을 받았다. 

1816년(17세)의 공개 진급시험에서는 자작시 <차르스코예 셀로의 추억>을 낭독하여 

이곳에 나와 있던 노시인 가브릴라 데르자빈을 감격시켰다고 한다.


1817년(18세), 학습원을 졸업하고 외무성에 들어간다. 

그 후 거의 3년간은 고등 룸펜이 되어 사교계에 출입하면서 방탕한 생활을 보냈으나 명석한 판단력은 잃지 않고 

자유주의적 정신으로 농노 제도 및 전제정치를 공격하는 시 《자유》(1817), 《마을》(1819) 등을 발표했는데, 

이 때문에 1820년 남러시아로 추방당하기에 이르렀다. 

그해 설화를 주제로 하면서 구어를 대담하게 채용한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발표하여서 

러시아 시에 새 경지를 개척하는 동시에 시인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추방생활 중 바이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카프카스의 포로》(1822), 《집시》(1823), 《바흐치사라이의 샘》(1824) 등 

낭만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서사시 및 서정시를 썼으며, 이 동안에 릴레예프 등 데카브리스트와 친해졌다. 

1824년 오데사 총독과 충돌, 프스코프 현에 있는 모친 영지 미하일로프스코 촌에 칩거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점차로 바이런의 영향에서 벗어나 이미 남방체제 중에 제1장을 발표한 바 있는 

시형식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의 후속 장이나 《보리스 고두노프》에는 리얼리즘에의 이행이 엿보인다. 

1825년의 데카브리스트 반란 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거주는 허용되었으나 

위험인물로 취급되어 황제의 직접 검열을 받아야 하는 중압하에 우울한 기분을 나타내는 

서정시나 연애생활을 하면서 기분전환을 꾀하다가, 1830년부터 새로운 창작생활 시기에 들어간다.


그는 우선 《오네긴》을 완성하고 이어 《인색한 기사》(1833) 등 시작품을 내는 한편, 

신문에도 손을 대 단편집 《벨킨 이야기》(1830), 《스페이드 여왕》(1834), 소설 《대위의 딸》 등 허다한 걸작을 썼다.


1831년 미모로 소문난 나탈리야 곤차로바와 결혼하였다. 

나탈리야는 그보다 13년 연하의 여성으로 첫 남편과 사별한 상태였다. 

1831년 푸시킨은 격렬한 구애 끝에 나탈리야 곤차로바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탈리야 곤차로바와 결혼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집을 마련하고 정착했다.

그는 다시 관직에 등용되었고 표트르 대제 치세의 역사를 쓰도록 위촉받았다. 

1834년 황제의 시종보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그의 실력 보다는 부분적으로는 

나탈리야가 궁정행사에 참석하기를 바란 황제의 속셈이 작용한 때문이었다.

이 기간 중 그의 아내 나탈리야와 황제 표트르 간의 불륜관계라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1836년에는 잡지 SOVREMENNIK를 간행하는데 참여하였다.

1837년 그의 반역정신을 적대시하는 귀족들이 나탈리야가 부정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날조된 소문을 퍼뜨림으로써 

푸시킨은 나탈리야가 바람을 피운다고 지목한 프랑스인 귀족 조르주 단테스와 결투를 벌이다가 

총상으로 인해 비운의 죽음을 당했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그는 러시아 근대문학의 창시자로서 문학의 온갖 장르에 걸쳐 그 재능을 발휘했다. 

과거 100년간 러시아 시 분야에서 그의 간결하고 평이 명료한 시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지 않은 시인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산문에 있어서도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의 기초는 그에 의해 구축되었다.


푸시킨은 ‘러시아 국민 문학의 아버지’, ‘위대한 국민 시인’ 등으로 불린다. 

막심 고리키의 말대로 ‘시작의 시작’이라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많은 비평가 역시 푸시킨의 작품을 심도 있게 연구하면서 ‘모든 것을 포용하는 보편성’(도스토옙스키의 표현)을 강조했다. 

그의 문학작품은 모든 예술사조(ism)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예술사조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는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의 모든 요소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모든 것을 부정하는 아이러니한 대화를 하고 있다.


그는 1812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로 고무된 러시아 민족의 애국주의 사상, 

민족적 자각과 민족적 기운이 고조되는 역사적 시기에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러시아 국민 사상과 감정을 훌륭히 표현한 러시아 국민 문학의 창시자이자 러시아 문학어의 창시자다. 

국민 생활과의 밀접한 유대, 시대의 선구적 사상의 반영, 풍부한 내용 등의 측면에서 그를 따를 러시아 작가는 없다. 

투르게네프가 푸시킨 이후의 작가들은 그가 개척한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것처럼 

그의 문학적 영향력은 매우 크다.


푸시킨의 아내 나탈리아 곤차로바 (Nataliya Nikolaevna Pushkina-Lanskaya, 1812 ~ 1863년)


푸시킨 박물관 전시장


건물 안에는 푸시킨의 초상화와 친필 유고, 그리고 그림을 곧잘 그렸던 푸시킨이 연필로 스케치한 몇몇 얼굴들, 

시계, 테이블, 의자, 피아노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1층 한쪽 구석에는 길쭉한 모양의 당시에 사용하던 권총이 작은 유리장 안에 있었는데, 

이유는 푸시킨이 권총 결투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결투 때 사용했던 그 권총은 아니지만 일종의 상징물인 셈이다. 


당시 귀족들간의 결투는 일반적으로 입회인의 건네준 권총을 들고 서로 등진 채 

일정한 거리만큼 걸아간 다음 돌아서서 발사하는 방식이었다. 

“돌아서” “발사” 등 입회인의 구령에 따라 진행됐다. 

첫 발에 맞은 자가 없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당시 단테스의 총이 먼저 발사됐고 푸시킨은 복부에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그러나 푸시킨은 복부를 움켜쥐고 안간힘을 다해 일어나 단테스를 향해 쐈다. 

그러나 이 총알은 단테스의 오른팔과 갈빗대 두 대를 부러뜨렸을 뿐이었다.


결투가 벌어진 곳은 모스크바가 아닌 상트 페테르부르그다.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의 집은 푸시킨이 나탈리야 곤자로바와 결혼한 1831년에 

3달가량 신혼생활을 했던 곳으로 이집 2층이 주거 공간이었다. 

상트 페테르부르그로 이사한 후론 내내 그곳에서 살았다.


기념관 이층의 한쪽 벽에는 나탈리야 곤자로바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는데, 

이미 사진에서 본 얼굴이지만 과연 그림 속의 그녀는 백옥과 같은 피부의 절세 미인이다.



실내에는 생전에 푸시킨이 사용했던 집기며 피아노, 의자, 탁자 등이 보존되어 있고, 

벽 곳곳에는 그의 초상화와 글, 그에 대한 정보가 전시되어 있다. 



결투용 권총









푸시킨의 신혼집 맞은편에 있는 알렉산드르 푸쉬킨과 나탈리야 곤자로바의 동상


관람을 마치고 다시 아르바트 거리를 걷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푸쉬킨과 나탈리아의 동상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관광객뿐 아니라 많은 모스크바 시민들이 줄을 서 가며 이 동상과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푸쉬킨은 러시아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모스크바에 몇 개의 푸시킨 박물관이 있지만 아르바트의 푸시킨 박물관은 관광 중 쉽게 찾을 수 있는 높은 접근성과, 

대문호의 삶을 직접 볼 수 있는 푸시킨의 생가로서의 의미, 그리고 전 세계에 러시아의 이름을 알린 대문호 푸시킨에 대한 

다양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어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분들에게는 만족스러운 장소가 되고 있다. 


푸시킨 박물관 앞 아르바뜨 거리 인증샷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하는 재즈음악을 배경음악으로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모습으로 그림처럼 지나간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들, 배우들,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소년들, 

노천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사람들, 친구들, 연인들, 모두 풋풋한 젊음을 보이고 있다.


음유시인 불라트 샬보비치 오쿠자바

불라트 샬보비치 오쿠자바(Bulat Shalvovich Okudzhava, Булат Шалвович Окуджава, 1924 ~ 1997)는 

러시아의 시인이며 작곡자이자 가수이다.


오쿠자바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그는 노래를 직접 쓰고 부르는 러시아 음유시가의 개척자로 평생 200여 곡을 작곡하고 노래함으로써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와 더불어 잔나 비쳅스카야와 같은 음유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오쿠자바가 어렸을 때 조지아인 아버지는 소련 공산당에 의하여 사형 당하였으며 아르메니아인 어머니도 
감옥에서 18년간이나 복역하는 아픔을 겪어 일찍부터 독재에 대한 저항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에 참전한 후 트빌리시 주립대학교에 진학하여 1950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교사로 재직하다가 1956년 모스크바로 이주하여 몰도다야 그바르디야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작곡을 하고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서정적인 멜로디를 지적인 음성으로 부른 그의 노래는 1970년대 말까지 공식적으로 출판되지 못하였으나 
그의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비공식적으로 녹음되어 여러 나라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오쿠자바의 노래와 시는 1980년도에 들어 와서와 공식적으로 출판되었으며 
1991년 [USSR State Prize]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1997년 6월 12일 파리에서 사망하였으며 모스크바의 바간코보 묘지에 묻혔다.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에 그를 추모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아르바트를 노래한 음유시인의 동상


1924년에 태어난 그는 러시아 역사의 격동의 시간을 겪으며 전쟁에 관련된 많은 노래와 서정적인 사랑의 시,

그리고 모스크바에 관한 노래들을 남겼다.

아르바트 거리에 대한 찬양이 담겨 있는 그의 대표곡 '아르바트 거리의 노래'를 기념하여 2002년에 동상을 세웠다.


그는 러시아 젊은이들의 저항 정신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시와 노래는 1980년에야 해금되었다. 

그가 만든 <<아르바트 거리의 노래>>는 시인이 성장한 이 거리를 찬미하는 시다. 


너의 낯선 이름과 너의 아스팔트는

강물처럼 흐르고 강물처럼 투명하다

아, 아르바트 거리, 나의 아르바트 거리여.

너는 나의 부름이요,

너는 나의 기쁨이요, 나의 불행이다.




 게오르기 콘스탄티노비치 주코프(Georgy Konstantinovich Zhukov) 장군


1896년 12월 1일 ~ 1974년 6월 18일. 소비에트 연방의 군인이자 정치가. 

제1차,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소련의 군인으로, 소련 육군 최고 계급인 소비에트 연방 원수까지 승진했다.

붉은광장 러시아 국립역사박물관 앞에 주코프 장군 기마상이 있고 여기에도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이순신 장군 만큼이나 존경과 사랑을 받는 분인 듯하다.


[영상] 젊음과 문화의 상징, 아르바트 거리(Arbat Street)


[영상] Walking in Moscow 4K - Old Arbat Str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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