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탄고프 극장 (E. Vakhtangov State Academical Theatre)


이 건물은 배우이자 연극 감독이었던 예브게니 바흐탄고프

(Yevgeny Bagrationovich Vakhtangov, Евге́ний Багратио́нович Вахта́нгов 1883~1922)의 

이름을 붙인 바흐탄고프 극장 (E. Vakhtangov State Academical Theatre)이다. 

1921년 11월, 바흐탄고프의 연극 스튜디오로 만들어져 1922년에 “투란도트 공주”를 첫 시연했다. 

바흐탄고프가 첫 시연 후 사망하자 그의 명 연출을 추모하기 위해 투란도트 공주 분수대를 만들었다. 

그의 사후에도 재능 있는 제자들은 창립자의 뜻을 훌륭하게 이어갔다.


러시아 말르이(Maly, 1824년) 극장이나 모스크바 예술극장(1898년)처럼 지금도 제1선의 극장이다. 

여전히 이 극장에 대한 애호가와 지지자들이 많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현재의 건물은 독소 전쟁(1941~1945)때 폭격으로 파괴되었다가 재건된 건축물. 

대형 객석은 최대 1055석, 작은 객석은 최대 250명을 수용하며 부대시설로 예술 카페 등이 있다. 

비록 이 극장에서 공연은 보지 못하고 극장 내부에 붙여진 포스터를 보는 것으로 족했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공연을 보고 싶은 곳이다.


바흐탄고프 극장 


예브게니 바흐탄고프는 러시아의 연출가다.

혁명 전부터 모스크바 예술극장 및 그 연구 극장에서 연출가 · 배우로서 일하는 한편, 

젊은 학생들의 연극 서클의 지도자가 되었고 또한 몇 개의 연극학교에서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의 가르침을 넓히는 배우 교육자가 되었다. 


1920년 그가 이끄는 집단은 예술극장 제3 연구 극장의 명칭을 받고, 이듬해 11월 그가 연출한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성 안토니의 기적>으로 새로운 극장이 공식적으로 발족하였으며, 이것이 바흐탄고프 극장의 창립일이 되었다. 

이 밖에 그가 연출한 작품은 예술극장 제1연구 극장에서의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의 <에릭크 14세>, 

유태극장 가비마에서의 S. 안스키의 <가디부크>, 카를로 고치(Carlo Gozzi) 원작의 <투란도트 공주>뿐이다. 

이들 4개의 작품은 혁명 전 그가 연출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1920년대에 있어서의 혁명연극은 무대에서의 내면적 체험을 부정하고, 배우술을 단순한 외면적 기술로 만들고 말았다. 

그들의 연기는 그 기교의 다채로움으로 해서 관객의 눈을 즐겁게 하기는 했으나, 

등장인물의 행동은 내면의 심리적 필연성이 결여(缺如)된 것이었다. 

바흐탄고프의 길은 이와는 달리, 자연주의나 심리주의 연극에서 가치있는 것, 

즉 인간감정의 살아 있는 진실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우로부터 구한 것이다. 

이것은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와 프세볼로트 메이예르홀트의 연극 시스템의 유기적 결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바흐탄고프 극장


아르바트 한가운데에 1921년부터 화려한 연극 극장이 있었다. 

1941년 7월 독일군의 폭격에 의해 파괴되고, 1947년 재건되었다.

극장을 더욱 화려하고 섬세하게 꾸미고 각 공연을 축제의 한 장면처럼 만들어 연극계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킨 

바흐탄고프의 이름을 따 극장을 설립하였다. 


 '투란도트 (Turandot) 공주의 상'


오른편 분수 한가운데에는 1922년 초연된 '투란도트 공주'의 무대에 올랐던 배우들을 기념하여 

황금동상으로 된 투란도트 공주의 상이 세워졌다.

1997년 오페라 투란도트 (Opera Turandot) 초연 75주년에 맞춰 알렉산더 부르가노프라는 조각가가 세웠다.

오페라 공연의 투란도트 줄거리는 중국의 공주 투란도트가 청혼의 조건으로 수수께끼를 내걸자

페르시아의 칼리프 왕자가 도전하여 공주의 사랑을 쟁취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오페라 <투란도트 Turandot>는 전설의 시대 중국이 배경이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우화 작가 카를로 고치(Carlo Gozzi:1720~1806)가 이야기를 썼고, 

후일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1759~1805)가 근대 희곡 스타일로 다시 만든 것을 

오페라의 원작으로 삼았다.


남자를 협오하는 중국의 공주 투란도트는 세계 각국에서 몰려오는 구혼자들을 모두 물리치는데, 그 방법이 독특하다.

공주는 세 가지 수수께끼를 낸다. 모두 맞히면 공주와 결혼할 수 있지만, 하나라도 틀리면 곧바로 참수형이다.

이때 타타르의 왕자 칼라프(Calaf)가 자신의 이름을 숨긴 채 그녀에게 구혼장을 내민다.

왕자는 우여곡절 끝에 난해한 수수께끼를 모두를 풀어내지만 그래도 공주는 계속해서 그의 구애를 거부한다.

왕자는 말한다. "그렇다면 이번엔 내가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내일 아침까지 내 이름을 알아내면 공주 당신의 승리, 그렇지 않으면 내가 사랑으로 당신의 마음을 녹여낼 것입니다."


위대한 사랑의 승리를 노래한 푸치니 (Giacomo Puccini:1858~1924)의 찬연하게 빛나는 최후의 오페라.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푸치니는 교회 음악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음악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이탈리아 서북부의 도시 루카(Lucca)에서 나고 자랐다. 

1876년 '아이다'를 보기 위해 루카에서 피사까지 30km나 되는 거리를 걸어갔을 정도로 

베르디의 작품에 깊은 애정을 가졌으며, 그의 작품에 크게 감명받고 오페라 작곡가의 꿈을 품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베르디의 작품처럼 전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의 이탈리아 오페라 전통의 상징이 됐다.


푸치니 음악의 특별함은 극적인 음악표현에 있다. 

그는 대본과 음악에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완벽주의자였다고 전해진다. 

그의 강렬하고도 섬세한 음악은 마치 귀로 한 편의 극을 보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특히 유작이 된 '투란도트'에 많은 애정을 쏟았는데, 작곡할 당시 푸치니는 

“이 전의 오페라는 잊어도 좋다” 라고 말했을 만큼 작품에 확신을 가지고 

새로운 음악을 창작해 내려 혼신의 힘을 다했다. 

'투란도트'의 어두운 동화 속 분위기와 고대 중국설화의 소재를 극대화하기 위해 

동양적인 언어와 중국 선율을 가져와 풍부한 소리 세계를 만들어 내면서 

그는 이전의 작품들보다 훨씬 더 독창적이며 화려한 음악색을 표현해 냈다.


'투란도트'는 카를로 고치(Carlo Gozzi)의 희곡으로 페르시아의 서사시 '7명의 미녀(Haft Peycar)'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12세기 시인 니자미(Nizami)가 고대 중국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투란도트 공주에게 

구애하기 위해 노력하는 칼라프 왕자의 이야기를 썼다고 전해진다. 

푸치니는 주세페 아다미와 레나토 시모니와 함께 대본 작업에 들어갔다. 

그동안 한 번도 다뤄 보지 않은 초현실적인 시대 배경과 낯선 중국문화를 재현해 내기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음에도 환상적인 내용은 그를 매료시켰고, 

끊임없는 창작과 수정을 거듭하고서야 마침내 2막을 완성할 수 있었다.


<투란도트>는 푸치니에게는 여러모로 낯선 소재였다. 

그동안은 청순가련형의 여주인공을 앞세워 달콤한 로멘티시즘으로 가득 찬 오페라를 만들었던 그였다. 

<라보엠>의 미미, <토스카>의 토스카와 <나비부인>의 초초상 등은 모두 다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 전형적인 푸치니 형의 여주인공이다.

그러나 투란도트 공주는 출발부터 다르다. 

남자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심지어 남자를 혐오하거나 멸시한다.


그는 이탈리아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머나먼 땅 중국의 공주다. 

이 색다른 테마를 푸치니는 보다 현대적인 음악어법으로 풀어가기로 마음먹는다. 

바그너의 반음계와 불협하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현란한 관현악, 

드뷔시의 섬세하고 신비한 인상주의 음악의 요소를 모두 다 쓸어 담았다.


마침 내용 자체도 비극과 희극이 뒤섞여 있다. 

영웅적인 구애자인 칼라프 왕자와 차가운 매력의 투란도트 공주, 그리고 두 사람을 말없이 지켜보며 

속을 태우는 여자 노예 류(Liu)는 전형적인 낭만 오페라의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그들 주위를 핑(Ping) · 팡(Pang) · 퐁(Pong)이라는 희극적 이름의 중국대신들이 감싼다.


조성의 모호함이 던져주는 신비감은 곧 동양세계를 다룬 이 오페라를 보다 실감나게 만들었고, 

뒤뚱거리듯이 불완전한 리듬으로 단숨에 중국 음악의 분위기를 표현해 낸 것도 

분명 푸치니만의 천재적인 능력이다.


5성부로 폭넓게  구성된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섬세한 감정선을 표현하고, 

무대 위와 뒤쪽에 각각 배치된 트럼펫, 트럼본, 섹소폰 등은 현란한 입체음향으로 관객들의 귀를 즐겁게 한다. 

팀파니, 트라이앵글, 북, 심벌즈, 공, 첼레스타, 탐탐, 글로겐슈필 등 총동원된 타악기들이 

이국적 신비감이 넘치는 음악을 들려주고, 동양적인 5음계 등도 절묘하게 깊은 매혹의 세계로 이끈다.


3막의 도입부에서 동터 오는 북경의 신비로운 새벽하늘을 묘사하는 음악은 

특히나 푸치니 음악 세계의 절정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음악을 통한 인물묘사도 대단히 뛰어나다. 

칼라프는 현악기, 투란도트는 목관과 현, 류는 목관 현 솔로, 핑·팡·퐁 

세 대신들은 피콜로와 첼레스타, 황제는 트럼펫을 위시한 금관 등이 테마악기로 배치돼 

관객들은 들리는 음악만으로도 각 인물들의 개성과 상호관계를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다.


고려인 3세 빅토르 초이의 벽 (Стена Цоя)


러시아 젊은이들의 자유 영혼이 숨쉬는 아르바트 거리 한쪽에는 

우리에게 조금 익숙한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아르바트 거리 한쪽, 길이 100m가 채 안되는 골목에 빅토르 초이의 벽화가 있다.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초이(Ви́ктор Ро́бертович Цой, 1962 ~ 1990)는 소련의 록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 겸 영화배우이며, 소련 록 음악 밴드 키노(КИНО)의 리더였다.


이 골목은 초이가 무명가수일 때 노래를 부르던 곳이었다.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등진 이후 이곳은 초이를 위한 성전이 되었다. 

골목 담벼락에는 초이를 기리는 낙서들과 사진으로 가득했다. 

'초이를 사랑 한다.' '초이는 영원하다'... 같은 내용들이라고 한다. 

한 구석에는 누가 갖다두었지 싱싱한 장미꽃이 한다발 놓여져 있고, 

담배불이 향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빅토르 초이는 한국인 3세로 아버지 쪽이 고려인이다. 

락밴드 '키노'를 이끌었고 글도 쓰고 영화도 만들었다. 

영화를 사랑했던 초이는 영화를 직접 감독하고 출연까지 했었다. 

그의 노래 모두는 4장의 앨범으로 나왔다. 

그 앨범 모두가 러시아 젊은이들의 가슴에 강하게 자리잡았고, 

1991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자동차 사고로 요절하면서 

그의 노래와 이야기는 신화가 되어 러시아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초이 (Ви́ктор Ро́бертович Цой, 1962~1990)


빅토르 초이는 1962년 6월 21일,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아버지 로베르트 막시모비치 초이(최동열)와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슬하 무녀독남 외동아들로 출생하였다. 

친조부 막심 초이(최승준)는 본래 대한제국 함경북도 성진 출생이었고 

후일 일제 강점기 초기에 러시아 제국으로 건너간 고려인 출신이었다.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소련 카자흐스탄 사회주의 자치공화국 

키질로르다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7세 때부터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했으며, 

초기 곡들은 레닌그라드 거리에서의 삶, 사랑과 친구들과의 어울림 등을 다루고 있다. 

노래의 주인공은 주로 한정된 기회만이 주어진 채 각박한 세상을 살아나가려는 젊은이였다. 

이 시기에 록은 레닌그라드에서만 태동하고 있던 언더그라운드의 한 움직임이었으며, 

음악 차트 등의 대중 매체들은 모스크바의 팝 스타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소련 정부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가수들에게만 허가를 내 주었고, 

집과 녹음실 등 성공이 필요한 많은 것들을 제공하여 길들였다. 

그러나 록 음악은 그 당시 소련 정부에게 너무도 마땅치 않은 음악이었다. 

록은 자본주의 진영의 록 그룹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외에도 젊은이들을 반항적으로 만들었으며, 

의사 표현의 자유 등 표현 관련 가치를 중시했다. 

따라서 록 밴드들은 정부로부터 거의 원조를 받지 못했고 관영 매체에 의해 마약 중독자나 

부랑자라는 편견으로 그려지는 수준이었다.


빅토르 초이는 레닌그라드에 있는 세로프 미술전문학교에 입학였으나, 

결국 낮은 성적 때문에 1977년에 퇴학 처분을 받았다. 

그 후 레닌그라드 기술전문학교에서 목공업을 공부하였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또 중퇴하였다.

이와 같은 사항들로 인하여 그의 학력은 전문대학 중퇴이다. 

그러나 그는 이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록 음악에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이 시기에 이르러 그는 보일러 수리공으로 일을 하면서 파티 등의 장소에서 

자신이 만든 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한 연주를 록 그룹 아쿠아리움의 멤버였던 보리스 그레벤시코프가 보게 되어, 그

레벤시코프의 도움으로 그는 자신의 밴드를 시작하게 된다.


레닌그라드의 록 클럽은 록 밴드들이 연주할 수 있던 극소수 장소에 속했다. 

이곳의 연중 록 콘서트에서 빅토르 초이는 처음 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그는 두 명의 아쿠아리움의 멤버들이 연주를 맡은 가운데 솔로로 연주한다. 

그의 혁신적인 가사와 음악은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가 유명해지기 전에 그는 음악하는 사람들이 도전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실험적으로 가사와 음악을 만들었다. 

이런 시도는 성공을 거두고, 데뷰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멤버들을 모아 키노

(러시아어로 영화, 극장이라는 뜻이다)를 결성한다. 

그들은 빅토르 초이의 아파트에서 데모 테이프를 만들고, 이 테입은 처음엔 레닌그라드, 

그리고 나중에는 전국의 록 매니아들에게 퍼지게 된다.


1982년 키노는 첫 앨범인 45(소로크 피아트; 러시아어로 45라는 뜻)를 발표한다. 

이 앨범의 이름이 45로 정해진 것은, 이 앨범의 재생 시간이 총 45분이었기 때문이다. 

후에 46 (쏘록 쉐스찌)라는 앨범도 냈다. 

이 앨범에서 빅토르 초이는 음악에 정치적 목소리를 내려는 의지를 내비친다. 

"엘렉트리치카(Elektrichka, 소련의 광역 전철)"이란 노래는 원치 않은 곳으로 가는 

전차에 끼여 끌려가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런 가사는 분명히 당시의 소련에서의 삶을 은유한 것이었으며, 이 노래는 공연이 금지된다. 

이 노래의 메시지로 노래는 반항운동을 하던 젊은이들 사이에 유명해지며 

키노와 빅토르 초이는 그들의 우상으로 떠오른다. 

제2회 레닌그라드 록 클럽 콘서트에서 키노는 자신의 정치색을 더욱 분명히 드러낸다. 

키노는 빅토르 초이의 반전음악 작품인 "내 집을 비핵화지대로 선포한다"로 1등을 차지하고, 

이 노래는 당시 수만의 소련 젊은이들의 목숨을 빼앗고 있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더욱 더 유명해진다.


1987년은 키노의 해였다. 

7집 앨범 《혈액형(Gruppa krovi)》은 "키노마니아"로까지 불리는 사회현상을 불러일으킨다. 

글라스노스트로 조금 더 개방적이 된 정치상황은 그의 가장 정치색이 짙은 앨범인 

"혈액형"을 만들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앨범의 메시지만이 청중을 사로잡은 것이 아니었고, 앨범에 담긴 음악 또한 

이전에는 듣지 못하던 것이었다. 

대부분의 곡은 소련의 젊은이들을 향한 외침이었으며, 능동적으로 나가서 국가를 변화시키라고 호소했다. 

몇 개의 노래는 소련을 옥죄고 있던 사회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 앨범은 빅토르 초이와 키노를 러시아 젊은이들의 영웅으로 등극시켰다. 

1988년에는 영화 《이글라》의 주연으로 영화배우 데뷔를 하기도 하였다. 

이후 몇 년간 그는 몇 편의 성공적인 영화를 찍었으며 영화제에 

그의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미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 몇 개의 앨범이 더 나왔으며, 대부분이 정치적 메시지를 담았으며 밴드는 인기를 유지했다. 

그는 당시 소련 젊은이 모두의 우상이었지만, 그런 것에 비하여 그는 소위 비교적 보통 수준의 삶을 살았다. 

그는 계속 아파트 빌딩의 보일러 실에서 살며 일했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즐기고 있으며 정부의 보조를 받지 못하고 있고, 

자신들의 앨범은 공짜로 복제되어 퍼지기 때문에 밴드를 유지하기 위하여서라도 금액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런 소박한 삶의 방식은 대중들이 그와 더욱 친밀감을 느끼기에 매우 충분했다.


1990년 키노는 모스크바의 레닌 스타디움에서 콘서트를 열어 6만 2천의 팬들을 모았다. 

1990년 8월 14일 다음 앨범의 녹음을 마쳤으며, 레닌그라드에서 다른 멤버들이 녹음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8월 15일 아침 소련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투쿰스에서 빅토르 초이가 운전하던 차가 

마주오던 트럭과 충돌하였고 그 사고로 죽고 말았다. 

그가 운전하였던 차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망가졌으며, 타이어 하나는 결국 찾지 못했다.


음모론에 따르면, KGB가 의도적으로 초이를 살해했다고 한다. 

평소 반전과 평화 사상을 주장하던 초이가 러시아 권력자들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이다. 

실제로 트럭 기사가 종적을 감추고, 초이에게 유리한 목격자들의 증언이 기각되었으며

초이는 졸지도 운전 규칙을 어기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트럭 기사가 그에게 돌진했다는 사실, 

시체가 봉인된 관에 담겨 서둘러 매장되었다는 사실 등 의문스러운 점이 한두 곳이 아니지만, 

현재 러시아 경찰과 정부는 27년 동안 이 사안에 대해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1990년 8월 17일 소련의 유력 잡지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다음과 같이 그의 의미를 간추린다.


"빅토르 초이는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에게 다른 어떤 정치인들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는 한번도 거짓말하거나 자신을 팔아먹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빅토르 초이였고,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그를 믿지 않을 수 없다. 

대중에게 보인 모습과 실제 삶의 모습이 다름없는 유일한 락커가 빅토르 초이이다. 

그는 그가 노래부른 대로 살았다. 그는 록의 마지막 영웅이다."


놀랍게도 교통사고에서 온전하게 건질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다음 앨범에 쓰일 

그의 목소리를 담은 테이프이었다. 

목소리는 남은 멤버들의 나머지 녹음과 합쳐져 현재는 "블랙 앨범"으로 불리는 앨범으로 남아 있다. 

이 유작 앨범은 밴드의 가장 인기있는 작품이며 러시아 록 역사에 있어서 키노의 자리를 확고하게 했으며, 

빅토르 초이를 최고의 영웅이자 전설로 만들었다.


빅토르 초이의 벽 (Стена Цоя) 인증샷


빅토르 초이의 벽 (Стена Цоя) 인증샷


[영상] 빅토르 초이의 벽 (Стена Цоя)


러시아 록 음악의 전설 빅토르 초이


키노(КИНО)가 소비에트 음악과 사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들은 이전의 다른 어떤 그룹도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음악과 가사로 노래를 만들었다. 

키노는 모던 러시아 록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키노는 아직도 러시아 전역에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레닌그라드 벽에는 그들에 대한 그라피티가 그려지고 있으며,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가에는 한 벽 전체가 그들에게 헌정되었고, 

그곳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팬들이 모인다. 

사망 10주기였던 2000년에는 러시아의 록 밴드들이 모여 빅토르 초이의 38번째 생일을 맞아 

빅토르 초이의 헌정 음반을 만들었다.


러시아 록 음악의 전설 빅토르 초이


사후 30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는 여전히 우상시되고 있으며 그의 팬덤은 더욱 거대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적어도 다섯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첫째로 “그와 같은 가사를 쓴 사람은 없었다”

빅토르 최는 1980년대 중반 소련 사회의 급진적 개혁의 시기였던 페레스트로이카 시절 

청년 대중문화의 가장 돋보이는 스타였다. 

당시 소련 정부가 록음악을 허가함으로써 신문들은 록 콘서트에 대한 기사를 쓸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그 시절 빅토르 최와 그가 이끈 그룹 ‘키노’는 가장 인기 있는 록밴드 중 하나였다.


키노의 노래들에는 당시 청년층의 세계관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있었다. 

기성 세대와는 다른, 젊은이들의 언어로 씌여진 키노의 노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이와 시적 울림을 갖고 있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록 음악의 또 다른 우상이었던 그룹 

‘아크바리움’의 리더 보리스 그레벤시코프는 이렇게 말했다. 


“빅토르는 단순, 명료, 진실 그 자체다. 

그와 같은 가사를 쓴 사람은 러시아에서 아무도 없었다. 

그가 아직 새파란 애송이였을 때 내가 그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이제 뒤로 물러나고 자네들이 러시아를 대표하는 그룹이 될 거야’라고. 

그러자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웃었다. 내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영상] Виктор Цой - Перемен '변화'


둘째로 ‘변화’의 시대

그의 노래 대부분이 한 개인이 겪는 감정에 대한 것이었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징이었던 히트곡 ‘변화’도 그가 만든 노래였다. 

사람들은 이 노래 속에서 소련식 생활방식의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는 정치적 메시지를 들었다. 

‘변화’가 처음 공개된 것은 1986년이었지만 이듬해 개봉한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의 전설적 영화 <아싸(Асса)> 덕분에 대중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그리고 말그대로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에서 ‘페레스트로이카의 노래’로 각인됐다.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변화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을 반영한 빅토르 최의 노래가 

자신이 소련의 개혁을 추진하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우리의 심장이 변화를 원한다

우리의 두 눈이 변화를 원한다

우리의 웃음소리와 우리의 눈물 속에서

그리고 혈관 박동 속에서

변화가 꿈틀거린다!

우리는 변화를 원한다."


이 후렴구에서 정치적 마니페스토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룹 키노의 멤버들은 그런 직설적 해석에 거부감을 표했다. 

키노의 기타리스트 알렉세이 리빈은 빅토르가 염두에 둔 것이 

‘정치체제의 변화’가 아니라 ‘자기 내면의 더 깊은 변화’였다고 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클럽 캄차카(Камчатка)


셋째로 그의 생애

빅토르 초이의 인기에는 그의 경력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소련 엔지니어를 부친으로 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980년대 초 그는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보일러실에서 화부로 일했다. 

이 보일러실에는 ‘캄차카’라는 별칭이 붙었으며 전설적인 장소가 됐다. 

자신에 대한 한 다큐 영화에서 그는 바로 이 보일러실의 화실에 석탄을 퍼넣으며 

“나는 내가 자유롭다고 느낀다. 나는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했다.


그가 보일러실에서 일하게 된 것은 그의 음악 활동이 당시의 공권력 구조 밖에서 행해졌기 때문이었다. 

소련에서 무직자는 형법의 ‘무위도식죄(тунеядство)’로 기소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현재 ‘캄차카’ 보일러실은 빅토르 초이의 박물관 겸 클럽이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클럽 캄차카(Камчатка)


클럽 캄차카는 빅토르 초이를 기념하는 공간으로서, 그가 활동했던 당시의 자료도 보관되어 있고, 

관련 영상이나 CD를 팔며, 빅토르 최 - 키노의 커버 공연을 비롯해 

80년대 당시의 러시아 록 관련 공연을 하는 곳이다. 

키노의 시대를 기념하는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캄차카는 원래 러시아의 지명인데, 이 단어가 '보일러'를 뜻하는 별명 같은 것으로도 쓰인다고 한다.

캄차카가 보일러로 쓰이는 까닭인즉슨 빅토르 초이는 원래 저작권이나 정부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음악 활동을 하며 수입을 거의 얻지 못했고, 그래서 보일러공으로 일하면서 록밴드 활동을 같이 했기 때문이다. 

이 클럽 캄차카가 세워진 장소는 바로 빅토르 최가 보일러공으로 일했고, 

친구들과 함께 음악을 연주했던 지하의 작은 보일러 방이었던 것이다. 

캄차카는 빅토르 초이의 흔적 위에 세워진 곳이다.


[영상] Bar-Museum Kamchatka (бар-музей "Камчатка")


[영상] Club Kamchatka "Acoustic Bard - Rock Concert (Акустический бард - рок концерт)

넷째로 영화 속 ‘키노’ - 영화 <바늘>의 장면


빅토르 초이와 키노에 유명세를 안겨준 것은 영화였다. 

키노의 공연 장면으로 끝이 나는 위에서 언급한 영화 <아사> 외에도 빅토르는 1988년 

<바늘(Игла)>이란 영화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다. 

영화에서 빅토르는 마약상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주인공 역을 맡았다. 

영화 속에서 키노의 최고 인기곡인 ‘혈액형(Группа крови)’과 

‘태양이란 이름의 별(Звезда по имени Солнце)’이 OST로 울려퍼진다.


<바늘>은 1989년 소련에서 개봉된 영화 흥행 순위에서 상위권을 차지했다. 

당시 인기있던 영화잡지 ‘소련 스크린’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빅토르는 

‘올해 최고의 남자배우’로 뽑히기도 했다.


러시아 젊은이들이 빅토르 초이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


다섯째로 빅토르 초이의 우상화

빅토르 초이는 1990년 8월 리가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사고는 그가 몰던 자동차의 중앙선 침범으로 일어났으며 과로로 인한 졸음 음전이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당시 그는 28세였다. 그의 비극적 죽음 이후 팬들은 그를 우상화하기 시작했다.


모스크바의 유명한 예술가의 거리 아르바트에 등장한 ‘빅토르 초이의 벽 (Стена Цоя)’은 그를 상징하는 것이 됐다. 

그가 죽은지 30년이 지났지만 벽 위에는 ‘최는 살아 있다’ 또는 

‘비탸(빅토르의 애칭)는 죽지 않았다. 담배 한 대 피우러 갔을 뿐’이라는 글귀 등 

그래피티와 새로운 문장들이 계속 추가되고 있다. 다른 도시들에도 이런 벽이 존재한다.


빅토르 초이는 여전히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있는 가수 중 한 명이다. 

검색포털 ‘얀덱스’의 집계 결과에 따르면 ‘얀덱스 음악’ 서비스에서 

빅토르 초이의 노래가 플레이된 총 시간은 무려 1000년이 넘었다. 

유명 영화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가 조만간 빅토르에 대한 영화 촬영을 시작할 계획이며 

키노의 노래는 주기적으로 여러 인기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 되고 있다.


아르바트 거리에서 옛 정취가 서린 골목은 빅토르 초이 벽을 지나 오른쪽으로 있다.


스파소페스콥스키 골목을 들어서면 전형적인 모스크바 스타일의 교회를 볼 수있다.

다섯 개의 쿠폴과 높은 종탑이 있는 그리스도 변용 교회는 1711년에 건축되었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화가 폴레노프의 <모스크바의 뜰>이라는 그림에서

이 교회가 시적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교회 앞 정원은 푸시킨이 자주 산책을 했다고 하여 푸시킨 정원이라고 불리며

푸시킨 동상 앞에는 그의 대표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원문이 적혀 있는 비석이 놓여 있다.


아르바트스카야역


아르세니 모로조프 (Arseny Morozov) 저택


메트로 3호선 아르바트스카야 역에서 나와 맞은 편에 보이는 네오 고딕 양식의 독특한 건축물은

19세기 후반 모스크바의 부호 모로조프의 저택이다.

10월 혁명 이후 아나키스트들의 본거지가 되었고 1918~1928년에는 예술가협회 극장이 들어와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이 동참하여 아방가르드 연극이 상연되기도 하였다.


이후 외무 인민위원회에 넘겨져 여러 국가의 대사관들이 이 건물에 들어오게 되었다.

1928~1940년에는 일본 대사관이, 1941~1945년은 영국대사관과 신문사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1952년부터 2년간은 인도대사관이 들어오기도 했다. 

1958년부터 민족 친선의 집이라고 불리기 시작아여 콘퍼런스, 해외 문화행사, 영화상영, 관계자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2006년 G8 회담을 준비하여 2003년부터 정부의 관할 아래 보수 및 재건축을 하고 

현재까지 국가 회담이나 국제기관 콘퍼런스 장소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아르세니 모조로프 저택이 있는 길과 연결된 대로는 신아르바트 거리이다.




러시아 동방정교회 (Khram Prepodobnogo Simeona Stolpnika Na Povarskoy)

구 아르바트와 대조되는 현대적인 아스팔트 대로 신아르바트 거리 (New Arbat Ave)에 있다. 



러시아 동방정교회 내부


러시아 동방정교회 내부


러시아 동방정교회 내부


러시아 동방정교회 내부


신 아르바트 거리 (New Arbat Ave)


아르바트 거리 옆에 건물을 넘어 나란히 위치한 커다란 대로를 신 아르바트라는 뜻의 '노븨 아르바트'라고 부른다.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구 아르바트와는 대조적으로 높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넓은 아스팔트 도로가 펼쳐져 있다. 

1935년 모스크바 중심에서 서쪽으로 넘어가는 대로를 건설하는 도시계획에 따라 생겨났고

자연스럽게 이러한 이름을 갖게 되었다.

레스토랑과 고급 쇼핑몰 등이 들어서 있고, 늘 차량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돔 끄니기(Dom Knigi, Московский Дом Книги) 


젊은이들의 거리인 신아르바트 거리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돔 끄니기는 외국어 서적도 다량 구비하고 있는 

모스크바 최대의 서적센터이다. 

지도, CD, 오래된 서적과 미술서적, 과학서적 등 폭넓게 갖추고 있다. 

서점 밖 도로 변을 따라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서적상에게서도 의외로 싼 가격에 원하는 책을 구입할 수 있다.


돔 끄니기(Dom Knigi, Московский Дом Книги)


돔 끄니기 매장





[영상] 신 아르바트 거리와 돔끄니기


[영상] 신 아르바트 거리와 모스크바 롯데호텔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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