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코프스키 (Moskovsky) 역 플렛홈
밤새 8시간을 달려 아침 07:55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코프스키 (Moskovsky)역에 도착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코프스키 (Moskovsky) 역 대합실

 

모스코프스키 (Moskovsky) 역 대합실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를 설립한 표트르 대제(Peter I the Great)의 동상이 시선을 모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코프스키 (Moskovsky) 역 대합실

 

[영상]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코프스키 (Moskovsky) 역 플렛홈과 대합실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코프스키 (Moskovsky) 역 전경

 

보스타니야(Vosstaniya) 광장과 레닌그라드 영웅 도시 오벨리스크

보스타니야 광장은  모스코프스키 (Moskovsky) 철도 터미널 앞
넵스키(Nevsky) 대로, 리고프스키(Ligovsky) 대로, 보스타니야(Vosstaniya) 거리 및 
곤차나야(Goncharnaya) 거리의 교차점에 있다.

레닌그라드 영웅 도시 오벨리스크(Leningrad Hero City Obelisk)
1944년 1월 백만 명이 넘는 레닌그라드 주민들이 기아, 폭로 및 독일군 포격으로 사망했다. 
레닌그라드를 수호하고 구호하는 과정에서 300,000 명의 군인이 사망했다. 
레닌그라드(Leningrad)는 1945년에 영웅 도시(Hero City)라는 칭호를 받았고, 
그 명성을 얻은 최초의 도시다.

 

보스타니야(Vosstaniya) 광장과 지하철 플로시차드 보스타니야 역
좌측 앞에 보이는 건물이 지하철 플로시차드 보스타니야(Ploschad Vosstaniya) 역이다.

 

모스코프스키 (Moskovsky) 역과 레닌그라드 영웅 도시 오벨리스크

오벨리스크(Obelisk)를 설치하려면 고도로 숙련된 건축업자와 기술자가 필요하다. 
기념물의 몸체를 만들기 위해 군인의 외투 색을 닮은 회색 화강암이 선택되었다. 
이 암석은 비보르크(Vyborg) 마을 근처의 보쯔로즈드니(Vozrozhdenie) 
광상 채석장에서 채취할 수 있었다. 
화강암의 마무리와 연마는 현장에서 이루어졌다. 
1985년 4월 초에는 "Gold Star"로 장식된 오벨리스크가 받침대에 설치되었다.

오벨리스크의 총 높이는 36 미터이다. 
밑면의 지름은 3.5m, 너비는 9m, 기념물의 전체 질량은 약 390 톤이다. 
베이스가 있는 기념비의 총 질량은 750톤이다. 
꼭대기 'Gold Star'는 직경이 4.5 미터, 지름이 1.8 미터이다. 

광장은 격동의 시대 혁명의 집회 장소로 자주 쓰였기에 볼셰비키혁명 후 
사회주의 정부는 '봉기' 광장으로 이름을 바꿨고 1937년엔 
광장 복판에 서 있던 걸작 조각품 알렉산드르 3세 기마상도 치워버렸다.

보스타니야라는 지금 광장 이름은 1955년에 들어선 지하철역에서 따 왔다.
광장 복판에 화강암을 쌓은 높이 36m '레닌그라드 영웅 도시 오벨리스크'는 
1945년 소련이 나치 독일에게 거둔 승전의 40주년을 기념해 1985년 세웠다.

이 오벨리스크가 2차대전 승전보다 각별하게 기리는 것은 
현대 전사에서 가장 끔찍한 사건으로 꼽는 '레닌그라드 봉쇄'다.
나치 독일군이 1941년부터 900일 동안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를 

포위하다 퇴각하기까지 당시 시민 3분의 1, 100만 명이 굶주리거나 

질병으로 죽고 군대 30만 명이 전사한 전무후무한 참극이다.

스탈린은 1945년 레닌그라드에 '영웅 도시' 칭호를 부여했고 그 이름이 오벨리스크에도 붙었다.
오벨리스크 꼭대기에 '영웅 도시'의 상징으로 올린 황금 별(실은 스테인리스) 높이만 1.8m 이다.

 

모스코프스키 (Moskovsky) 철도 터미널 야경

 

지하철 플로시차드 보스타니야(Ploschad Vosstaniya) 역 

세계 최초로 스크린도어가 설치된 지하철 역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흔한 유리 스크린도어와는 달리 1955년 초창기의 스크린도어답게 
투박하고 육중한 철문으로 되어 있다. 
쾅 하고 닫히는 철문 스크린도어의 굉음과 압박이 대단하다.
모스코프스키 (Moskovsky) 철도 터미널과 바로 연결된다.

 

지하철 플로시차드 보스타니야(Ploschad Vosstaniya) 역 야경

 

넵스키 대로 (Nevsky Prospect) 

 

넵스키 대로(Nevsky Prospect, Невский проспект)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번화가로, 네바 강에 위치해 있다.  
명칭은 '네바 강의 거리'란 뜻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모든 길들은 넵스키 대로로 통한다는 말이 있을 만큼  
해군성에서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까지 4.5km로 뻗어 있는 이 거리에는  
호텔, 레스토랑과 카페, 상점들, 음악당 등이 위치하고 있다. 

 

넵스키 대로 (Nevsky Prospect)

원래는 습한 늪지대였던 이곳은 1710년에 처음으로 길이 뚫리게 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대표하는 문화, 상업의 중심지이자 

가장 아름다운 거리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거리에는 19세기에 건축된 화려하면서도 

아담한 건물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더욱 운치가 있다. 

 

넵스키 대로 (Nevsky Prospect)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발트해 핀란드만으로 흘러드는 네바강 남쪽에 자리잡았다.
봉건 농업국가 러시아를 근대 유럽 강국으로 끌어올린 개혁군주 표트르 대제가
18세기 벽두 이곳에 새 수도를 건설할 때부터 짧게는 서쪽 전진기지 나르바까지,
멀리는 동남쪽 수도 모스크바까지 연결하는 신수도 중심 도로로 구상했다.

처음엔 그저 '넵스키 수도원 가는 길'이라고 부르다가
1781년 '넵스키 대로'라는 이름을 얻었다.
13세기 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역을 지배한 노브고로드 공국의 
알렉산드르 대공은 나르바 전투에서 스웨덴군과 게르만 기사단을 차례로 물리쳐 
나라를 구한 영웅이자 러시아 정교회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출생지가 지금 넵스키 대로 동쪽 끝 수도원 근처여서
'네바강의'라는 형용사 '넵스키'가 그의 이름 뒤에 따라붙게 되었다.

넵스키 대로는 서쪽 네바 강변에서 시작해 동쪽 네바 강변에서 끝나는데, 
관광객이 많이 다니는 상징적인 구간은 구 해군성이 있는 서쪽 끝에서부터 모스콥스키 역까지다. 
이 대로 근처에 운하들, 에르미타주 박물관, 러시아 박물관, 카잔 대성당, 피의 성당 등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주요 관광지가 도보 이동권에 모두 모여 있어서 
관광객들도 이 대로를 중심으로 다니게 된다.

 

[영상] 보스타니야(Vosstaniya) 광장과 넵스키 대로

 

넵스키 대로 (Nevsky Prospect)

걷다 보면 고색창연한 건물이 양쪽 길 옆에 즐비하다.
현재의 대로 형태는 이미 러시아 제국 시대에 완성되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즐겨 산책해 그의 저작에도 넵스키 대로가 종종 등장하고 
피의 일요일 사건 때도 민중들은 차르를 외치며 이 대로를 행진했다. 
도로는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차들이 다니지만 그 외 길가의 건축물들은 
모두 당시부터 보존되는 것이 대부분이며 대단히 고풍스럽다.

 

콜롯세움(Колизей)이라 씌여진 간판이 있다. 

 

작가 고골(Nikolai Gogol 1809~1852)은 그의 단편 <넵스키 대로(Nevsky Prospekt)>에서 
넵스키 대로의 열광적인 삶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넵스키 대로만큼 멋진 곳은 없다. 
넵스키 대로는 곧 페테르부르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다 빛을 발한다. 
이 거리에서 즐겁지 않은 자가 누구란 말인가. 
아무리 사무적인 페테르부르크 사람일지라도 

넵스키 대로만은 세상 어느 곳과도 바꾸지 않으리라. 
젊은이, 늙은이 모두에게 이 거리는 매력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여인! 그들에겐 이 거리가 더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19세기 러시아 문학 황금기에 유명한 작가들이 자주 방문한 카페 레스토랑은 
넵스키 대로에 여전히 "문학 카페" 로 남아 있다.

 

콜롯세움(Колизей) 내부

 

1834년에 지은 연두색 건물

왼쪽 연두색 건물은 1834년에 건축되었는데 
1904년 건물의 기초와 층 구조는 그대로 두고 외관만 아르누보로 리모델링했다고 한다.

 

기둥마다 신화에 나오는 얼굴을 부조상으로 장식했다.

 

1872년에 지은 붉은 색 건물

오른쪽 붉은색 건물은 장식이 더 복잡하고 화려하다. 
1872년 17세기풍 파리 건축과 바로크 양식을 결합한 절충식으로 지어
볼셰비키 혁명까지 40년 동안 은행과 러시아 최초의 항공우주 전문 잡지사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넵스키대로는 이미 1720년에 돌을 깔아 포장했고
1883년 전기 가로등이 들어와 진작부터 유럽풍 거리로 번창했다.

 

아니치코프(Anichkov) 다리와 벨로셀스키-벨로제르스키(Beloselsky Belozersky) 궁전

아니치코프(Anichkov) 다리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의 

원고를 들고 평론가를 찾아가며 건넜던 바로 그 다리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넵스키 대로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만남, 
이것 하나만으로도 웬만한 책 한 권은 쓸 수 있을 것" 
이라고 했듯 사연도 이야기도 많은 넵스키 대로.

폰탄카 강과 넵스키 대로 아니치코프(Anichkov) 다리 교차로 남동쪽 코너에 
폰탄카 강을 끼고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로코코 장식으로 눈을 사로잡는
벨로셀스키-벨로제르스키(Beloselsky Belozersky) 궁전이 있다.

 

벨로셀스키-벨로제르스키(Beloselsky Belozersky) 궁전

최초의 벨로셀스키-벨로제르스키 궁전은 1747년 러시아 엘리자베스의 통치 기간에 
미하일 안드레비치 벨로셀스키 (1702-1755) 왕자를 위해 넵스키 대로에 지어졌다. 
당시 오늘날보다 훨씬 작았던 이 건물은 프랑스 스타일로 설계되었고,
치장 벽토를 씌우고 파리 석회암을 모방하여 페인트했으며 넓은 정원이 있었다.

궁전을 재건하고 대중에게 공개하면서 벨로셀스키-벨로제르스키 궁전은 러시아에서 
가장 호화로운 궁전 중 하나이자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호화로운 무도회와 
콘서트의 장소로 명성을 얻었다. 

이 집 2대 주인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벨로셀스키는 저택을 증축하면서 
친하게 지내던 황제 파벨1세에게 부탁해서 벨로제르스키라는 옛 대공 성씨를 받아 낸다.
그때부터 이 가문의 성(姓)은 벨로셀스키-벨로제르스키가 되고 저택 이름에도 붙게 된다.

 

벨로셀스키-벨로제르스키(Beloselsky Belozersky) 궁전

19세기 초 저택을 허물고 지금의 아름다운 궁으로 새로 지은 것은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의 미망인 엘레나 파블로브나였다.
우랄 광산을 운영하던 친정의 부를 쏟아 부어 자기 취향대로 화려한 궁전을 세웠다.
황제 니콜라이 1세의 허락을 얻어 궁정 건축가 안드레아스 스타켄스나이더가 공사를 지휘하게 했다.
스타켄스나이더가 왕궁 아닌 귀족 사저를 설계한 유일한 사례라고 한다.  

 

벨로셀스키-벨로제르스키(Beloselsky Belozersky) 궁전

전면 기둥들을 떠받치듯 선 부조상들은 제우스로부터 하늘을 떠받치는 형벌을 받은 
그리스 신화 타이탄족 아틀라스이다.
아틀라스상들은 궁이 지닌 파란만장한 러시아 근대사도 함께 떠받치고 있다.

벨로셀스키궁은 새로 짓자마자 러시아에서 가장 화려한 저택이자 가장 멋진 
무도회와 콘서트장이 됐고 엘레나 파블로브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사교계의 여왕이 됐다.
1848년 개축 때 벨로셀스키궁은 대형 응접 홀, 콘서트 홀, 실내 교회와 함께 
지금의 화려한 로코코풍 외부 장식을 갖췄​다.

1883년 궁을 사들여 새 주인이 된 대공작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제정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가 전횡과 호사와 민중의 굶주림 끝에 
몰락을 예고한 1차 러시아혁명 때 폭탄 테러로 사망한다.
미망인은 수녀가 되고 궁은 후견인 드미트리 공작 소유가 됐다.
1차대전 중에는 영국 적십자 의사 간호사들이 들어와 
부상한 러시아 병사들을 치료하는 적십자 병원으로 쓰인다.

궁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2년 뒤인 1919년 

국유 재산으로 몰수돼​​ 시립 문화센터가 된다.
2차대전 때 내부 로코코 장식이 많이 부서져 1950년대 복원됐고 
지금은 시 재산이 돼 콘서트홀, 미술관 그리고 러시아의 역사적 인물과 
문호들의 밀랍인형 80여 개를 모아놓은 밀랍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영상] 걸어서 넵스키 대로 / 엘리세예프 상점 - 폰탄카 강 아니치코프(Anichkov) 다리

 

벨로셀스키-벨로제르스키(Beloselsky Belozersky) 궁전

1차 세계대전 중 1916년 1월부터 1918년 1월까지이 궁전은 러시아 군인을 
치료하기 위해 설립된 자발적인 영국 적십자 병원인 앵글로-러시안 병원의 기지였다. 
2년 후 국유화되어 1991년까지 지역 소비에트가 거주 하게되었고, 
시립 문화 센터로 지정되었다. 
궁전의 로코코 내부는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1954년에 원래 상태로 복원되었으며 현재 소규모 청중을 위한 실내 콘서트를 개최한다. 

2012년 2월 28일 궁전 지붕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러시아 언론, 텔레비전 및 관광객이 이를 보도했다. 
건물이 상트 페테르부르크시의 소유가 된 이후로 
콘서트홀로 이용되고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아니치코프(Anichkov) 다리

폰탄카(Fontanka) 강을 가로지르는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다리이다. 
아니치코프 다리는 1715년 표트르 1세의 명령으로 나무다리로 만든 이래 
여러 차례 고쳐 놓았고 1842년 지금 돌다리 형태를 갖췄다.
18세기 초 도시 건설 초기 이 일대에 미하일 아니치코프 중령이 이끄는 연대가 주둔하며 
처음 나무다리를 놓아​ 아니치코프라는 이름이 붙었다.

운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베네치아나 암스테르담처럼 수상 운송과 교통이 발달해 있다.​
운하나 강물은 불그스레하고 뿌옇기 때문에 오염된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철분과 석회석 성분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실제로는 깨끗하다고 한다.
물고기가 많아 낚시를 즐기기에도 좋다고 한다.

눈여겨 볼 점은 다리 네 모퉁이에 있는 말 동상.
네 개의 유명한 말 조각품 (1849–50)과 함께 이 다리에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하고
화려한 철 난간이 있다. 
푸쉬킨(Pushkin), 고골(Gogol) 및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y)의 문학 작품에서 단골로 언급되고 있다.

 

1850년대 벨로셀스키-벨로제르스키 궁전과 아니치코프(Anichkov) 다리

 

[영상 자료] 벨로셀스키-벨로제르스키 궁전

 

아니치코프(Anichkov) 다리에 있는 말과 조련사 조각

 

조련사 조각상은 로마 퀴리날 언덕에 있는 4세기 조련사상 한 쌍에서 유래한다.
난폭한 말을 다루는 조련사의 몸짓과 근육이 역동적이어서 영감을 얻은 여러 버전이 
프랑스, 영국, 독일, 현대 뉴욕에 이르기까지 세계 여러 곳에 섰다.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이곳 조련사상이다.

역동적이고 사실적인 조각 솜씨가 빼어날 뿐 아니라 한 쌍인 로마 오리지널 작품을 넷으로 늘려 
네 가지 인간형을 묘사해,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로마 오리지널 조각상보다 유명하다.

 

아니치코프(Anichkov) 다리 말과 조련사 조각상 

러시아 조각가 표트르 클로트 폰 유르겐스부르크(Peter Klodt von Jurgensburg) 남작이  
그리스 로마의 신화를 모티브로 해서 4필의 말과 조련사(Horse Tamers)를  
디자인하고 조각하여 1849년에 설치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동물, 특히 말을 좋아해 말 애호가였던 황제 니콜라이 1세와 가까웠고  
황제의 의뢰로 조련사상을 만든다. 
1842년 황제는 그중 둘을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선물했고  
1846년엔 이탈리아 여행 때 환대해 주었던 시실리 왕 페르디난드 2세에게 보낸다. 

 

아니치코프(Anichkov) 다리 말과 조련사 조각상

그래서 상트에 남아 있던 주조 거푸집으로 다시 지어부어 만든 것이 이 조련사상이다. 
힘 센 아라비아 종마 아말라트벡을 누드의 남자 조련사가 
각기 네 가지 모습으로 다루는 형상을 표현했다.
1848년 표트르 클로트가 만든 두 점의 새 동상은 예전의 것과는 다른 형상이었다. 
표트르 클로트는 이 다리 말 동상 외에도 여름동산에 있는 
쿠르이로프 동상 제작을 비롯하여, 초기 러시아 조각 발전에 기여했다.

살아서 힘이 넘치는 듯한 말과 마부의 동상이다. 
네 곳 각기 다른 동작의 모습을 한 역동적이고 살아있는 모습이다. 
조각상의 공통적인 소재는 날뛰는 말을 진정시키는 장면이라 하겠다. 
이 동상들은 러시아 미술 역사상 작품을 구상한 사람이 

주조도 겸하여 행한 유일한 사례라고 한다.

 

아니치코프(Anichkov) 다리에 있는 말과 조련사 조각

조련사가 말을 감당 못해 쩔쩔매는가 하면 날뛰는 말에 깔려 죽을 지경에 처하기도 하고 
그런대로 겨우 수습하거나 고삐를 단단히 쥐고 의연하게 말을 길들인다.
인간의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네 단계로 표현해 어떤 인간형이​ 이상적인지를 말한다

 

아니치코프(Anichkov) 다리에 있는 말과 조련사 조각

말 뒷다리 핏줄까지 선명하게 조각한 모습이 마치 살아 있는 듯하다.
1841년 청동으로 된 동상들이 다리의 서쪽 끝에만 세워졌다. 
다리 동쪽 끝에는 석고 모형들이 있었는데, 이는 청동으로 된 것들을 
니콜라이 1세가 프러시아 왕에게 선물했기 때문이었다.

 

조각가가 이 석고 모형을 그대로 청동으로 대치해서 작품을 만들었을 때, 
이 작품 또한 러시아를 떠나야만 했으니, 이는 나폴리의 왕궁 앞 광장을 장식하기 위해서였다.

 

아니치코프(Anichkov) 다리에 있는 말과 조련사 조각

이 다리에 있는 말 조각과 관련한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가 전해 온단다. 
이 말 동상을 만든 조각가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자, 
화가 난 조각가는 간통한 정부의 얼굴을 네 마리 말 중, 
한 마리의 성기 부근에 조각해서 붙였다나, 어쨌다나.

 

말과 조련사 조각상 기단에 2차 대전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다.

 

김창준 교수의 설명

"1941~44년 사이에 레닌그라드를 봉쇄했던 파시스트들이 

쏘아버린 148,478개의 총탄 자국 중 하나이다"
라고 씌여 있다.

 

[영상] 김창준 교수의 설명

"1941~44년 사이에 레닌그라드를 봉쇄했던 파시스트들이 

쏘아버린 148,478개의 총탄 자국 중 하나이다" 라고 씌여 있다.

 

아니치코프(Anichkov) 다리에서 폰탄카(Fontanka) 강을 배경으로 

아니치코프(Anichkov) 다리는 넵스키 대로 중간 즈음에 있는 곳으로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한 사람은 모두 몇 번씩 지나가는 곳이다.
유람선을 타고 내리는 선착장도 있어서 넵스키 대로의 중심지이다.

 

[영상] 아니치코프(Anichkov) 다리에서

 

아니치코프 궁전(Anichkov Litsey)

넵스키 대로와 폰탄카 강 교차점에 있는 옛 제국 시대 궁전이다.
이오니아 양식(Ionic Order) 기둥에 바로크 양식으로 화려하게 설계되고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 (Elizaveta Petrovna 1709–1762 )를 위해 건축된 궁전이다.
이 궁전은 넵스키 대로에서 가장 규모가 큰 최초의 석조 건물이다.

 

아니치코프 궁전(Anichkov Litsey)

건축 공사는 13년 동안 계속되었다. 
1754년에 마침내 궁전이 완공되었을 때, 엘리자베타 여제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그리고 내연의 남자인 백작 알렉세이 라즈모프스키에게 궁전을 선물했다. 
1771년 라즈모프스키 백작의 죽음 이후 궁전은 왕실로 되돌려졌지만 
1776년 러시아 예카테리나 대제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포템킨 왕자에게 이 궁전을 기증했다. 
1791년 포템킨의 죽음으로 이 궁전은 왕실로 복원되었고 

황실 폐하의 내각으로 사용되도록 개조되었다. 

1866년 미래의 차르 알렉산더 3세와 그의 아내 

마리아 페오도로프나 (Maria Feodorovna )는 아니치코프 궁전을 

상트 페테르부르크 거주지로 삼아 다양한 역사적 스타일로 새롭게 단장했다. 
마지막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Nicholas) 2세를 포함한 그들의 아이들은 어린 시절을 보냈고, 
알렉산더 3 세가 1881년에 왕위에 오른 후 그는 아니치코프 궁전에 머물기를 선호했다. 


아니치코프 궁전은 니콜라스 황제의 조카 이리나 알렉산드로프나(Irina Alexandrovna) 공주와 
펠릭스 유수포프(Felix Yusupov) 왕자의 결혼식을 포함하여 수많은 가족 행사가 열린 곳이다. 
니콜라스 2세의 어머니는 황후가 된 후 1917년 2월 혁명 때까지 궁전에서 거주할 권리를 
계속 가지고 있었지만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멀리 키예프로 이사를 했다. 

 

아니치코프 궁전(Anichkov Litsey)

1917년 11월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 정부는 아니치코프 궁전을 국유화하고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립 박물관으로 지정했다. 
1934년 이후 영 파이오니어 팰리스(Young Pioneer Palace)로 개조되었을 때 

이 궁전에는 10,000 명 이상의 어린이를 위한 방과 후 클럽이 백 개가 넘었다. 
내부의 작은 박물관은 지정된 시간에 일반인에게 개방되지만 

일반적으로 건물은 관광객이 접근 할 수 없다.

 

1750년대 아니치코프 궁전(Anichkov Litsey)
가장 화려한 엘리자베타 시대 바로크 양식의 눈부신 아니치코프 궁전(Anichkov Litsey)

 

1753년 폰탄카 강 아니치코프 다리와 아니치코프 궁전(Anichkov Palace) 모습

 

1810 년대 아니치코프 궁전

1817년 알렉산더 1세는 다가오는 결혼식을 위해 그의 동생 
니콜라이 파블로비치(Nikolai Pavlovich)에게 아니치코프 궁전을 주었다. 
1825년에 니콜라이 파블로비치는 황제가 되었고 

궁전은 "황실 폐하 자신의 것"이라고 불렸다. 
아니치코프 궁전에서는 웅장한 축하 행사가 많이 열렸고, 
푸쉬킨 부부도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종종 참석했다. 

1841년 아니치코프 궁전의 다음 소유자는 알렉산더 미하일로비치(Alexander Mikhailovich) 

대공이었으며 그는 아버지에게 결혼식을 위해 이 궁전을 선물로 받았다.
궁전 단지의 마지막 여주인은 니콜라스 2세의 어머니인 

마리아 페도로로프나 (Maria Fedorovna) 황태후였다.

1918년 혁명 직후 아니치코프 궁전은 1935년까지 국유화되고 
상트 페테르부르크 역사 박물관의 전신인 도시 박물관이 되었다. 
아니치코프 궁전의 역사는 미세한 형태의 러시아 역사다. 
사람들이 하나의 궁전을 건축하고 유지하는 데 비용이 얼마나 들었는지는 상상하기 어렵다. 
공공 비용과 국가 돈으로 건축 및 재건을 했다. 

 

1830년대 궁전 : 신고전주의적으로 개조된 이후의 모습

이오니아 양식(Ionic Order) 열주는 그리스 고전 건축양식의 한 가지로, 
이오니아로부터 일어나 아테네 전성시대 이래 한 세기동안을 지배하였다.
기둥에 주춧돌이 있고 곡선상의 소용돌이 모양을 한 기둥머리가 그 특색인데 
우아하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1862년 궁전.
Anichkov 궁전의 전망, 1862. by 바실리 사도브니코프(Semyonovich Sadovnikov)

 

알렉산더 2세(Alexander II) 황제가 개최한 아니치코프 궁전 연회. 수채화.

 

알렉산더 2세(Alexander II) 황제가 개최한 아니치코프 궁전 연회. 수채화.

 

1880년대 아니치코프 궁전 사진. 

1917년 혁명 이전,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스 2세의 어머니이자 알렉산더 3세의 

미망인 마리아 페도로프나 (Maria Fedorovna)는 아니치코프 궁전에서 살았다.

 

아니치코프 궁전(Anichkov Palace) 단지

 

황태후(Empress Dowager) 마리아 페도로프나 (Maria Fedorovna)와 
아들 니콜라스 2세 (Nicholas II) 마지막 황제

 

1900년대 초 내부 홀 중 하나의 모습

 

아니치코프 궁전 주요 계단

 

아니치코프 궁전 내부

 

아니치코프 궁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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