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rtrait of Leo Tolstoy. 레오 톨스토이 초상화. 1887. by Ilia Repin. 
oil on canvas. 88 x 124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레오 톨스토이 초상화를 그린 일리야 레핀 (Ilya Yefimovich Repin)은 
러시아를 명실공히 대표하는 국민화가이다.
그는 1880년대부터 수많은 러시아 문화 엘리트들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톨스토이, 이반 투르게네프(Ivan Turgenev), 고골(Nikolai Gogol) 등을 비롯한 문학가, 
무소륵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Rimskii-Korsakov) 등의 음악가, 

스타소프(Vladimir Stasov) 같은 예술 비평가, 
그밖에 왕족과 귀족, 우아한 상류사회 여성 등 

문화계의 거의 모든 유명 인사들이 레핀의 모델이 되었다. 

레핀은 모델의 특징적인 포즈와 몸동작, 행동 등을 통해 

각각의 인물이 지닌 독특한 개성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리한 사색과 관조에 의거한 인물 내면의 심리 묘사에 탁월했다.
1894년 레핀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로 임명되어 
1907년 교수직에서 은퇴할 때까지 학생지도에 전념했다. 

일리야 레핀은 톨스토이와 가까이 살며 30여 년 간 우정을 나눈 친구였다.  
종종 만나 한적한 모스크바의 골목길을 산책하며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는 두 사람은 여름 휴가를 함께 보내기도 하였는데, 
이 그림도 톨스토이의 영지에 같이 머물며 그린 초상화 중 한 점이다.

 

Leo Tolstoy Barefoot. 맨발의 톨스토이. 1901. by Ilia Repin. 
oil on canvas. 207 × 73 cm.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rg.

톨스토이는 카잔 대학교 법학과에 다니다가 중퇴했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생각을 억압하는 

대학교 교육 방식에 실망을 느껴서라고 한다. 
그는 부모의 유산 가운데 자신의 몫이 된 야스나야 폴랴나로 돌아간다. 
영지에서 농노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계몽 실험을 벌이던 톨스토이는 

1848년에 다시 고향을 떠난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는 방탕한 생활에 빠져 빚을 많이 졌다. 
급기야 1855년에는 도박 빚 때문에 야스야냐 폴랴나의 저택을 매각하고 말았다.

젊은 시절의 톨스토이는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쾌락주의자였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이다. 
톨스토이의 주요 작품으로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 등의 장편 소설과 
<이반 일리치의 죽음>, <바보 이반> 등의 중편 소설이 잘 알려져 있다.

톨스토이의 작품에는 ‘삶을 사랑하는 톨스토이’와 
‘청교도적 설교자로서의 톨스토이’라는 ‘두 얼굴의 톨스토이’가 있다. 
톨스토이의 세계에서는 두 얼굴을 가진 분열된 자아가 계속해서 서로 싸운다. 
후기로 갈수록 톨스토이는 ‘삶을 사랑하는 시인’에서 ‘인생의 교사’이자 
‘삶의 재판관’이 되기를 갈망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두 얼굴을 가진 분열된 자아가 계속해서 서로 싸우는 그의 세계를 
이원론적으로만 볼 수도 있지만, 주제적으로 긴밀하게 얽혀 있는 
전일성이 드러난 세계로도 파악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작가 · 사상가로서 톨스토이를 이분법적 사고로 나누지 말고, 
영적인 탐구심에 기초한 도덕적 태도의 통일성에 기초해서 그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그의 창작 세계의 전일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Yasnaya Polyana Fleece Blanket에서 아내와 Leo Tolstoy. by Ilia Repin. 

톨스토이는 삶과 죽음, 육체와 정신, 사랑과 진리에 대한 관념들을 
일반적 · 보편적 형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는 예술가이자 인생의 교사로서 
이런 관념들에 대한 해답을 인류에게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톨스토이의 예술 세계에서는 자족적 관념이 만들어내는 
자기 완결적 순환 구조를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관념을 통하여 그리고 그 관념의 실천을 통하여 
절대적 자각자로서의 자기완성에 이르고자 하고, 

자기 구원과 인간 구원에 도달하고자 했다.

그 자신은 백작의 지위를 가진 귀족이었으나, <바보이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등의 집필을 통해 러시아 귀족들이 

너무 많은 재산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민중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음을 비판하는 문학 활동을 하여, 러시아 귀족들의 압력으로 

<참회록>과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출판 금지를 당했다. 

하지만 독자들은 필사본이나 등사본으로 책을 만들어서 몰래 읽었고, 
유럽, 미국, 아시아에 있는 출판사들이 그의 작품을 출판하여 
외국에서는 그의 작품이 유명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민중들에게 무관심한 교회 (러시아 정교회)를 비판하여 교회로부터 미움을 받고 
1901년 러시아 정교회의 교리감독기관인 종무원으로부터 파문을 당했을 정도로 
톨스토이는 교회와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지식인으로 활약하였다.

 

Portrait of Leo Tolstoy in peasant dress. shoeless. 1901. by Ilia Repin. 
oil on canvas. 207 X 73 cm.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rg.

톨스토이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내용은 몸으로 실천하는 지식인이어서, 
귀족들의 방해로 폐교되기는 했지만 1860년 고향 툴라에서 농민학교를 운영하여, 
부모의 강요로 아동 노동을 하는 게 전부였던 농민의 자녀들이 
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재미있게 놀기도 하게 해주었다. 
당시 부모들은 처음에는 일할 사람이 없어질 것을 걱정하여 

자녀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싫어했지만, 톨스토이가 진심으로 농민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는 아이들을 기꺼이 학교에 보냈다. 

농민학교는 자유로웠는데, 이는 자유로운 교육을 통해서 

진짜 교육이 진행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1871년에는 직접 교과서를 쓰기도 했는데, 농민과 귀족이 

평등하게 교육받도록 한 내용 때문에 자기들보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농민을 멸시하는 귀족들은 농민들과 평등한 교육을 받을 수 없다며 

거센 반발을 일으켰지만, 자신들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한 농민들에게는 칭찬을 들었다.

톨스토이가 1894년에 저술한 <하나님 나라는 당신 안에 있다> 에서 그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을 돕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 개개인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과 선포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 고 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그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핵심이었다. 

또한 그는 죽기 며칠 전인 1910년 11월 1일 자신의 딸 사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은 한계가 없으시다. 모든 사람들은 그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뿐이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존재한다..."고 말했다. 
“God is the limitless All of which man realises himself to be a limited part. 
The truth exists only in God…” 

또한 그는 기독교의 영성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가난한 사람과 죄인들까지 모두 사랑하며,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는 복음서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실제로 그의 단편소설인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도 있다>는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마태복음서 25장 설은 
폭력은 문제를 더 심하게 만들 뿐,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 평화주의의 대표적 인물이기도 하다.

톨스토이는 1850년대에 이미 이반 투르게네프나 

알렉산드르 오스트롭스키의 영향을 받아 극작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근대 연극사에서 유명하게 한 것은 주로 <어둠의 힘>(1886), 
<교육의 열매>(1891), <산송장>(1911) 등의 작품이라 하겠다. 
<어둠의 힘>은 실화에 의거해 러시아 농민의 음산한 생활을 그린 것으로 
자연주의 희곡으로 뛰어난 작품이며 러시아에서는 상연이 금지되어 프랑스에서 초연했다. 
<교육의 열매>는 시골 귀족의 무의미한 생활을 풍자한 것. 
<산송장>은 기독교적 자기 희생과 결혼법의 문제를 다룬 희곡으로 유럽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소설 <안나 카레니나>와 <부활>은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각색, 상연한 바 있다.

 

Trait of Leo Tolstoy as a Ploughman on a Field. 쟁기로 밭을 가는 레오 톨스토이. 1887. 
by Ilia Repin. oil on canvas. 40 x 28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대문호 톨스토이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

선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야스나야 폴랴나는 톨스토이의 외할아버지인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볼콘스키(1753~1821) 공작의 소유였다. 
외할아버지는 예카테리나 2세 시절 고관을 지냈다가 좌천되어 이 영지에 정착했다. 

니콜라이 볼콘스키는 이곳에서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Maria Nikolaevna, 1790~1830)를 낳았다. 
그러나 딸  마리야가 두 살 되던 해에 볼콘스키의 아내가 사망했고 
볼콘스키 공작은 평생 재혼하지 않고 딸 마리야만을 열심히 길렀다. 
딸 마리야는 볼콘스키 공작이 죽은 후 이 영지를 물려 받았다. 

1년 후, 마리야는 니콜라이 일리치 톨스토이(1794~1837) 백작과 결혼하게 된다. 
니콜라이 톨스토이는 집안의 파산을 막기 위해 4살 연상인 마리야와 일종의 정략결혼을 한 것. 
이 영지는 마리야의 결혼 지참금이었다. 
니콜라이 톨스토이와 마리야는 결혼 후 이 곳에서 다섯 남매 (4남1녀)를 낳았다. 

레프 톨스토이(Lev Nicolayevich Tolstoy, 1828~1910)는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니콜라이 톨스토이와 마리야 사이 

4남 1녀 가운데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레프 톨스토이가 두 살 때 어머니 마리야는 

막내 여동생이 태어난 지 몇 달 후 죽게 된다. 
두 살 때 어머니를 여읜 까닭에 톨스토이에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았다. 


아홉 살 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자 고모 또는 숙모로 불린

척집을 전전하며 성장기를 보내게 된다. 
후견인 ‘숙모’ 요르골스카야는 어머니를 대신해 어린 톨스토이를 기르다시피 했으나, 
어머니의 부재는 그에게 불우한 기억의 그늘을 드리우며 여성상을 형성하는 데 
어두운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친척집이 있는 카잔으로 이주한 후 톨스토이는 카잔대학에 들어가 
동양어학과 법학을 공부했으나 중도에 자퇴를 한다. 
당시 교수는 그를 ‘공부할 능력도 의사도 없는’ 불량 학생으로 평가했다.
톨스토이는 독학으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는 물론 그리스어, 라틴어, 터키어 등 
여러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고 하니 실제로는 어학에 꽤 소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젊은 백작은 학업과 관련 없는 분야의 책을 읽기 좋아했고 
도박, 사냥, 음주, 집시 여자 등 다른 데 관심이 많았다. 
열아홉 나이에 성병에 걸려 대학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그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 뒤 일기를 남기는 습관은 강박적일 만큼 평생토록 이어진다. 
야스나야 폴랴나의 영지로 돌아온 톨스토이는 농노들을 교육하고 그들 생활을 
개선하려는 계몽 활동을 벌이지만 농노들의 냉담한 반응으로 실패를 맛본다. 
그는 모스크바와 툴라, 페테르부르크를 돌며 

한량 생활을 하다가 엄청난 노름빚까지 지게 된다. 


톨스토이의 모순된 성격은 이렇듯 이미 젊은 시절에 드러났다. 
그는 수줍은 듯하면서도 거만했고 내성적인가 하면 

자기를 드러내길 좋아했으며, 감상적이면서도 격정적이었다. 

이상주의자이면서 쾌락주의자였다. 
성욕과 도박의 유혹에 빠진 자신에 대해

독한 환멸과 자책을 느끼면서도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1851년에 형 니콜라이를 따라 캅카스 지역으로 내려간 레프 톨스토이는 
군에 입대해 체첸 전투에 참전한다. 
크림 전쟁 때는 세바스토폴 공방전에서 공을 세워 중위로 진급하기도 했다. 
그는 전투를 치르며 수많은 목숨이 죽어나가는 끔찍한 상황을 목도했다. 
이즈음에 가명으로 데뷔작인 <유년 시절 (1852)>을 발표하고 
크림 전쟁에 참전한 경험을 살려 <세바스토폴 이야기>를 쓴다. 

<유년 시절>은 <소년 시절>, <청년 시절>로 이어져 자전소설 삼부작을 이룬다. 
사실, 그의 저작 대부분을 ‘자전적’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다. 
소설 속 주인공은 어머니를 저 세상으로 보내며 유년에서 소년 시절로 건너간다. 
이들 초기작에 담긴 예술, 사랑, 죽음 그리고 인생의 문제는 
이후 발표하는 작품들에 계속 따라다니는 주제가 된다. 

군을 제대하고 그는 두 차례 서유럽으로 여행을 떠난다. 
파리 여행 중에 생전 처음 단두대 처형 장면을 목격하고 크나큰 충격에 빠진다. 
두 번째 여행에서 빅토르 위고, 아나키스트인 푸르동 등을 만나기도 한다. 
전쟁과 여행을 통해 체험한 일들은 나중에 

비폭력 평화주의 사상을 세우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고향 야스나야 폴랴나에 돌아와서 농부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열고 
‘초등 독본’이라는 교재를 펴낸다. 
유렵을 여행한 목적 중 하나도 학교에 필요한 교과서를 만들 자료를 수집하는 데 있었다. 
또한 훗날 미국 경제학자 헨리 조지의 토지공유제 사상에 심취한 톨스토이는 
농민들이 토지를 공유하는 농장을 만들고, 소설 <부활>에서 
주인공 네흘류도프를 통해 그의 사상을 드러내기도 한다.

 

Leo Tolstoy in the forest. 숲에서 휴식을 취하는 톨스토이. 1890. 
by Ilia Repin. oil on canvas. 50 X 60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나무 그늘 아래 편안하게 누워 책을 읽는 톨스토이의 모습은 
지금까지 우리가 상상했던 엄격한 작가의 모습이 아닌 

옆집 할아버지 같은 친근함을 보여준다.  
러시아 국민화가 레핀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체류 시절 경험했던 

야외의 빛을 화폭에 담아내는 기법이 살짝 보이는 이 작품에는 

러시아 미술계의 톨스토이로 불렸던 
일리야 레핀의 대문호에 대한 존경심과 친분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그림의 색채는 다분히 안상주의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톨스토이와 레핀이 친교를 맺은 것은 1880년 모스크바에 있는 레핀의 아틀리에서이다.
레핀과 톨스토이는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살았으므로 종종 만나서
한적한 모스크바의 골목길을 산책하며 뜨거운 논쟁을 벌이곤 했다.
레핀은 여러차례 톨스토이의 영지 야스나야 폴라야에 머물렀으며
그때마다 레핀은 이 위대한 작가나 그 가족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
이들의 우정은 톨스토이가 사망할 때까지 30년 간이나 계속되었다.

 

Portrait of Leo Tolstoy. 레오 톨스토이 초상화. by Ilia Repin. oil on canvas.

서른넷 노총각 레프 톨스토이는 1862년 궁정 의사의 딸인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베르스(Sophia Andreevna Behrs)와 결혼한다. 
청혼한 지 일주일 만이었고 신부 나이는 열여덟 살에 불과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녀 간의 결혼은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 흔한 일이었다. 
<죄와 벌>의 작가 도스토옙스키만 하더라도, 그가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와 

재혼했을 때 둘은 나이 차이가 무려 스물다섯이나 났다. 
여담이지만, 동시대에 활동했던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두 문호가 
한 번도 만남을 가진 적이 없다는 사실은 놀랍다. 

청혼 전 베르스 집안의 영지를 방문했을 때, 톨스토이는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듯이 소냐 (소피야)와 카드 상자를 앞에 두고

낱말 첫소리 잇기 놀이를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순간적인 끌림이 있었을지언정 서로를 알아가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싹틀 겨를도 없이 결혼에 골인한 셈이었다. 
톨스토이에게 결혼은 어지러운 생활을 마감하는 구원의 수단이기도 했다. 

그는 결혼 전날 자신의 일기장을 신부에게 공개하는 무모한 짓을 벌인다. 
신랑의 일기를 읽고서 어린 새댁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도박에 빠져 빚을 진 일을 포함하여, 열네 살 때 창녀와 가진 첫 성 경험, 
영지에 사는 농부 아낙과의 육체 관계를 비롯한 여성 편력 등 
과거 성적 방탕과 온갖 치부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일기에서 젊은 유부녀에게 성적으로 계속 끌리는 자신을 ‘짐승’으로 
그녀를 ‘악마’로 표현했다(이때 이야기는 〈악마〉라는 미발표 단편에 실린다). 
소피야는 남편의 옛 정부(情婦)인 아낙이 자기 집에서 

하녀로 일하는 명랑하고 뚱뚱한 여자이고 심지어 그녀가 

남편의 아이까지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부적절한’ 관계로 태어난 서자(庶子)는 나중에 
적자(嫡子)들의 마부로 일하며 집안에 남아 있게 된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장편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오는 사생아 
스메르쟈코프가 카라마조프 가(家)의 하인 겸 요리사로 살았듯이 말이다.

일기 공개가 톨스토이 자신에게는 지난날 잘못을 청산하고 
안정된 삶을 새로이 꾸리며 거듭나려는 대단한 결심이었을지 모르지만, 

부인 소피야에게는 의심과 다툼으로 점철되는 악몽 같은 

결혼 생활의 개시를 알리는 신호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톨스토이 부부는, 그중 다섯이 아주 어릴 때 죽기는 했으나 

자녀를 열셋이나 낳아 길렀고, 톨스토이가 외딴 역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결혼 생활을 48년 동안이나 지속했다. 
남편보다 열여섯 살 어린 아내로서는 복잡하고 까탈스러운 성격을 지닌 
톨스토이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보였을 터이다. 
이상주의자인 작가 남편을 뒷바라지하려다 보니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현실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남편과 자주 싸우기는 했으나 소피야는 차라리 평범하고 헌신적인 아내에 속했다.

두 사람은 결혼 후 20년 가까이는 그런대로 온전하고 원만해 보이는 가정을 이루었다. 
소피야는 이곳에서 남편을 대신해 영지를 관리하고 

원고를 정리하는 등 내조에 힘을 쏟았다. 
둘 사이에서 13명(9남 4녀)의 자녀들이 탄생한다. 
다섯 명 (4남 1녀)은 어린 시절에 사망했고 총 8명 (5남 3녀)이 생존했다. 

레프는 1881년 (53세)에 아이들 교육을 위해 모스크바에 집을 사 들여 겨울을 보냈다. 
겨울만 보내고 그는 빨리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러니 그는 거의 평생 이곳에서 살았다고 해야 한다. 
레프는 영지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이 영지는 약 5백만 평(1,600헥타르)에 이르렀다. 
영지 윗 부분에는 고밀도의 원시림과 4개 연못, 
약 350명의 소작농이 살았으며 농민의 집이 네 군데 있었다. 
할아버지의 사과 과수원을 넓혔다. 
원래 정원의 면적은 4배나 늘어났고 총 5개의 정원이 있었다. 
레프는 오전 7시에 기상 후 공원을 걷는 등 운동을 했고 이 후 시간에 글쓰기를 했다. 
곡물 수확기에는 농부들과 함께 밭에서 일했다. 
그는 농부 자녀를 위한 학교를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안나 카레니나>를 발표한 1878년을 전후로 해서 흔히 톨스토이의 작품 세계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데, 
부부 사이 역시 <안나 카레니나>를 쓰던 무렵부터 톨스토이가 ‘중년의 위기’를 겪으며 크게 변화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소피야는 자식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챙기면서 
작가 남편의 비서와 편집자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결혼 이듬해인 1863년부터 집필을 시작해 1869년 발표한 <전쟁과 평화>만 해도, 
톨스토이가 악필로 갈겨쓴 방대한 분량의 원고를 아내 소피야가 여러 번 읽고 
정서해서 옮겨 쓰는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그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전쟁과 평화>나 <안나 카레니나> 같은 대작이 
제때 나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도박벽과 간질병에 시달리던 도스토옙스키를 구원한 아내 안나처럼. 
적어도 결혼 초기에 소피야는 ‘내조의 여왕’이었던 셈이다.

 

Leo Tolstoy reading. 1891. by Ilia Repin. pencil. 24 X 33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

 젊은 시절부터 톨스토이는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렸고 허위로 가득한 사교계를 싫어했다. 
톨스토이에게 남녀의 사랑은 육체적 욕망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육체에 탐닉하면서도 육체를 경멸했고 여자를 좋아하면서 여자를 증오했다. 
그의 소설 속에서도 외적인 매력에 홀려 빠져든 사랑은 결국 비극으로 끝나는 것으로 그려진다. 
사교계에서 잘나가는 훤칠한 사내들은 몰락하고,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들은 대체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전쟁과 평화>의 엘렌,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 

〈크로이체르 소나타〉의 포즈드니셰프의 아내처럼, 사고사나 자살 혹은 타살로

반면, 어쩌면 당연하게도, 톨스토이 자신의 경험과 이념을 반영한 

주인공은 긍정적인 인물로 표현된다. 
<전쟁과 평화>의 피에르 베주호프,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 
(‘레빈’은 톨스토이 자신의 이름 ‘레프’에서 따왔다), 

<부활>의 네흘류도프 등과 같이.

사랑과 결혼에 관한 톨스토이의 생각은 세월이 흐를수록 비관적으로 바뀐다.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네 가지 유형의 커플과 가정을 보여준다. 
돌리와 스티바(스치바)​ 오블론스키 커플은 흔히 볼 수 있는 현실적인 유형의 부부이다. 
바람피운 남편이 밉지만 커가는 아이들을 생각해서 적당히 타협해서 살아간다. 

카레닌과 안나는 진작 갈라서고도 남을 법한데도 사회적 체면과 

아들 양육권 때문에 이혼하지 못하는 ‘쇼윈도 부부’에 불과하다. 
카레닌은 ‘오쟁이진’ 늙은 남편일 뿐 악인은 아니다. 
그는 안나가 낳은 브론스키의 딸을 자기 딸로 받아들인다. 

안나와 브론스키는 달려오는 기차처럼 본능에 충실한 열정적인 커플이다. 
안나의 육체에 충만한 활기와 솔직함은 브론스키를 매혹하지만 

또한 그것은 집착으로 바뀌어 브론스키의 마음을 떠나게 한다. 
진정 어린 사랑도 언젠가는 변하기 마련이다. 
백작 부인 안나는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지만 

청년 장교 브론스키는 오히려 상탄을 누린다. 
둘의 사랑은 운명적으로 시작해 비극적으로 끝나는 사랑이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이 육체적 사랑이라면 

키티(키치)와 레빈의 사랑은 정신적 사랑에 가깝다. 
키티와 콘스탄친 레빈은 어찌 보면 차선책으로 맺어진 짝이다. 
처음에 레빈은 키티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하고, 키티는 브론스키가 안나에게 
빠져 있다는 걸 알고 나서야 레빈의 두 번째 청혼을 받아들이니 말이다. 
레빈은 톨스토이의 분신으로서 작가의 이상을 실현하는 인물이다. 
그는 상류층 사교계를 멀리한 채 농지 경영에 전념하며 육체노동을 즐긴다. 
키티는 그런 레빈에게 의지하며 검소하게 생활한다. 
하지만 이들을 이상적인 커플이라 부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면이 느껴진다.

톨스토이가 결혼 전에 쓴 〈가정의 행복〉(1859)에는 가정에 대한 환상과 기대가 남아 있다. 
그러나 그는 30년 뒤 〈크로이체르 소나타〉(1889)라는 중편 소설에서 질투에 눈먼 나머지 
아내를 살해하는 남자를 등장시켜 결혼 생활의 완전한 파탄을 선언한다. 
살인자의 인생 고백이라는 형식을 빌어, 육체적인 욕망만 있을 뿐 
낭만적 사랑이란 없으며 결혼은 구속이라 말한다.

“얼마나 지속되느냐고요? 아주 오랫동안이죠. 어떨 때는 평생이 되기도 하고요.” 
어깨를 으쓱하며 부인이 대답했다.

“그건 소설에나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현실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특별하게 좋아하는 시간은 아주 드물지만 일 년 정도고, 
보통은 몇 달, 몇 주, 며칠, 또는 몇 시간이죠.” 

그는 자신의 의견에 모두가 놀랐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만족스럽게 말했다.

“그건 완두콩 깍지 속에 훌륭한 완두콩 두 알이 

나란히 들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게다가 이것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문제만이 아니라 권태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평생을 한 여자 또는 한 남자만 사랑한다는 것은 

양초 하나가 평생 탄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Leo Tolstoy working at the round table. 1891. by Ilia Repin. Private collection

나는 언제가 죽는다. 그렇다면 삶은 무의미한 것인가? 
5년의 각고 끝에 탈고한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를 

명실공히 러시아 최고 작가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드넓은 영지에서 나오는 부와 위대한 문학가라는 명예를 함께 누리며 
남부러울 것 없는 가족을 꾸린 지주 귀족에게 어느 날 깊은 회의와 의혹이 찾아든다. 

나는 누구고 왜 여기에 있는가, 

삶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또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왜 살아가야 하며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삶인가 

따위 물음이 그를 괴롭힌다. 


이런 의문에 답을 얻으려고 그리스도교는 물론이고 

이슬람교, 불교, 동양 사상 등을 포함한 
종교, 철학, 과학, 문학, 역사 저작들을 두루 탐독한다. 
자신의 삶을 철저히 돌아보고 반성한다. 

이른바 ‘회심(回心)’으로 불리는 정신적 위기, 

내면적 방황의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사실 이러한 고민과 의문은 그가 젊었을 때부터 품어왔던 생각이었으나, 
1881년 겨울 모스크바 주민조사 작업에 참여해 빈민굴을 구석구석 둘러보고 
그곳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상과 마주친 일이 회심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참회록>을 완성한 1882년을 기점으로 톨스토이는 예술가, 소설가에서 
사상가, 설교가, 도덕가로 변모한다.

이후 그는 인생과 종교, 철학을 논하는 저술을 집필하는 데 전념한다. 
소설을 쓰더라도 장편 대작보다는 교훈을 담은 중단편이나 우화 위주였다. 
후기 작품으로는 〈사람은 무엇을 사는가〉, 〈이반 일리치의 죽음〉, 〈하지 무라트〉, 
〈크로이체르 소나타〉, 〈신부(神父) 세르게이〉, 희곡인 〈산송장〉 등을 꼽을 수 있다. 

1887년에 나온 <인생론>은 ‘신의 말이 없고 인간의 이성 만을 강조하여 교회와 교의에

불신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검열 당국으로부터 판매 금지 처분을 받았다. 

말년 역작인 <부활(1889)>은 당시 탄압을 받던 두호보르교도의 
캐나다 이주 비용을 대주기 위해 잡지에 연재한 작품이다. 
<부활>에서 교회와 사법제도를 비판한 톨스토이는 1901년 
러시아정교회 종무원으로부터 ‘사이비 교주’로 찍혀 파문을 당했다.

‘회심’ 또는 ‘변심’ 이후 톨스토이는 자신의 이전 삶을 통째로 거짓이라 선언한다. 
타락한 그리스도교를 비판하고 원시 그리스도교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다. 
또한 예술을 부정하고 가족을 기만의 산물로 여겼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1898)>에서 그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를 비롯하여 
자신에게 명성을 안겨준 모든 소설을 거부하고, 우리가 불후의 명작으로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예술 작품과 예술가를 싸잡아 비난하기에 이른다. 


예를 들면, 셰익스피어의 희곡, 미켈란젤로의 미술, 보들레르의 상징주의 시, 
바그너의 악극, 베토벤의 후기 음악 등을 나쁜 예술로 규정했다. 
대부분의 예술은 선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사람들을 타락시킨다고 여겼다. 
농부들이 일하며 어울려 부르는 노래가 
아무런 감정도 감염시키지 못하는 베토벤 소나타 연주보다 낫다고 주장했다.

그는 술 담배를 끊고 채식을 고집했고, 시골에서 소박하고 검소하게 살기를 바랐다. 
문명을 멀리하고 자연, 도덕, 영혼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 
급기야 재산과 저작권을 포기하고 농부로 살겠노라고 

폭탄선언을 하는 바람에 부인 소피야를 분노케 했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을 만나려고 그의 제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러시아와 세계 각지에서 야스나야 폴랴나로 몰려든 탓에 부부의 불화는 더욱 심해졌다.

 

Portraits Study, by Ilia Repin. 

톨스토이는 생애 후반기 들어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다. 
기실 그는 살아오며 주변에서 많은 죽음과 마주했고 

평생토록 삶과 죽음에 관한 사유에 몰두했다.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어머니는 어린 레프를 남겨두고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여행 중에 갑작스레 사망했다. 
톨스토이는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찾는다며 모스크바 거리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또한 그는 자기 자녀 가운데 다섯 아이를 잃었다. 
특히 막내아들 이반이 일곱 살로 죽었을 때는 너무나 슬퍼했다고 한다. 

크림 전쟁에 참전해 살육의 현장을 뛰어다녀야 했다. 
파리 여행 때 기요틴에 목이 잘린 남자를 눈앞에서 보고 끔찍함에 치를 떨었다. 
그는 1856년에 셋째 형 드미트리, 1860년에는 맏형 니콜라이를 병으로 잃었다. 
그는 형 니콜라이의 병세가 날로 악화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봐야 했다. 
톨스토이가 느지막한 나이에 결혼을 서두른 것은 
우애가 남달랐던 형 니콜라이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충격 탓도 있었다.

<유년 시절>, <전쟁과 평화>부터 <안나 카레니나>, 〈세 죽음〉, 〈광인의 수기〉,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톨스토이는 여러 소설에서 죽음을 다루었다. 
〈세 죽음〉에서 귀부인(여지주)과 마부와 나무의 죽음. 
<안나 카레니나>에서 레빈의 형 니콜라이의 죽음과 불륜녀 안나의 자살,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잘나가던 판사의 죽음…. 

그 가운데 중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은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탐구서라 할 만하다.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에서 여성 심리 표현의 대가였다면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는 죽음 분석의 달인이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중점적으로 들여다보기 전에 
다른 작품에 나타난 죽음이라는 사건을 살펴보자.

지주 톨스토이는 1869년 8월 말, 매물로 나온 영지를 보러 여행을 떠났다. 
결혼으로 생활에 안정을 찾았고 그해 발표한 <전쟁과 평화>가 
큰 성공을 거두어 명성까지 얻은 시절이었다. 
도중에 피곤함을 느낀 그는 아르자마스라는 마을에서 하룻밤 쉬어가기로 했다. 
어느 여관방에 여장을 풀고 몸을 누였으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온통 흰색으로 칠해진 사각형의 작은 방’에 홀로 누워 있자니 
느닷없이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건 으스스함, 낯선 친밀함, 낯익은 두려움으로 번역되는, 프로이트가 말한 
‘운하임리히(unheimlich)’한 감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죽음이 속삭이는 소리였다. 

톨스토이는 이때 엄습한 우울과 공포의 감정을 
15년 후에 〈광인의 수기〉라는 미완성 단편에 남겼다. 
〈광인의 수기〉에서 ‘광인’이 여관방에서 느낀 서늘한 공포는 
훗날 눈 덮인 숲속으로 사냥 나갔다가 길을 잃으면서 증폭되어 다시 나타난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덮어버리는 흰색은 죽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광인의 수기〉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예고편이라 할 수 있다. 

톨스토이는 〈광인의 수기〉에서 죽음의 공포가 유발한 우울증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왜 여기에 왔을까.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뭐가 그토록 두려워 도망치려 하는 걸까. 
도대체 어디로 도망치려 하는 걸까. 
무언가 끔찍한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데, 도망칠 수가 없다. 
나는 언제나 나다. 그런데 나를 괴롭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삶에는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 
나는 내 관심사, 즉 구입하려는 영지나 아내에 대해 생각해보려 했지만 
그 어떤 생각도 즐겁기는커녕 그저 무의미하기만 했다. 
내가 점점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너무나 끔찍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죽음이 끔찍한 것인 줄 알았는데, 삶을 떠올리며 생각해보니 끔찍한 것은 죽어가는 삶이었다. 
어쩐 일인지 삶과 죽음이 하나로 뒤엉켰다."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 레빈은 톨스토이를 대신해서 
죽음이라는 난제를 두고 답을 구하려 애쓰는 인물이다. 
총 8부로 구성된 <안나 카레니나>에서 유일하게 

표제가 붙은 장(章)이 하나 있는데 그 제목이 ‘죽음’이다. 
톨스토이가 형의 죽음으로 괴로워했듯이, 레빈은 형의 임종을 지키며 
이해할 수 없고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는 죽음 앞에 고뇌한다. 
그는 유한한 삶에 허무를 느끼며, 심지어 죽음 자체에 혐오를 드러낸다. 
죽음 탓에 행복할 수 없고, 죽음은 그동안 쌓아온 

모든 업적과 열망을 무(無)로 돌려버리기 때문이다.

형의 모습과 죽음의 접근은 레빈의 영혼 속에 

형이 찾아온 그 가을밤에 자기를 사로잡았던 불가해함에 대한 공포, 

죽음의 접근과 불가피함에 대한 공포를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금 그 감정은 예전보다 더욱 강렬해졌다. 
그는 자신이 예전보다 죽음의 의미를 더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죽음의 불가피함이 더욱 두렵게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내가 옆에 있어 준 덕분에 그러한 감정도 그를 절망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그는 죽음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살고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사랑이 그를 절망으로부터 구원했다는 것, 
그 사랑이 절망의 위협 아래서 더욱 강해지고 순수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은 자신이 
"무한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잠시 버티다가 터져버리는 거품 같은 유기체"
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살 욕구에 시달린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불러온 삶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을까, 
톨스토이는 가출만큼이나 자주 자살을 생각했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자살을 시도하지 않도록 밧줄이나 노끈 따위를 치워버리고 
좋아하던 사냥도 그만두었다. 
삶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서는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 자살을 미루었다. 
이것은 <참회록>(고백록)​에서 묘사한 톨스토이의 모습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일 뿐 아니라, 어떤 사악한 힘, 사악하고 협오스럽고 
절대 굴복해서는 안 되는 힘의 잔인한 조롱이었다.
그 힘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각자의 손에 달려 있었다. 
악에 대한 그런 종속을 끊어야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방법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었다.

그래서 행복한 가정을 가진 건강한 인간 레빈은 자신의 목숨을 매지 않도록 끈을 숨기고 
자신에게 총을 쏠까 봐 총을 들고 다니는 것조차 두려워할 만큼 수차례 거의 자살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레빈은 총으로 자살하지도 않고, 스스로 목을 매지도 않고 여전히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서둘러 자살하기를 원치 않았던 까닭은 일단 먼저 최선을 다해 
이 모든 현상의 원인을 규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을 밝히지 못한다면, 그때 자살해도 늦지 않으리라 스스로를 다독였던 것이다. 
그 당시 그야말로 행복한 사람이었던 나는 매일 밤 혼자 남게 되는 방 안에서 

옷을 갈아입다가 선반과 선반 사이의 횡목에서 목을 매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방에 있는 끈들을 모두 치워버려야 했다. 
그리고 너무나도 순식간에 나의 생명을 제거하고픈 유혹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총기를 들고 사냥에 나가는 것도 그만 두었다. 
나 자신도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다. 
나는 삶을 두려워하고 삶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면서도 
여전히 삶 속에서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 소피아와 가족들

아내 소피아와의 사이에서 13명의 아이들을 두었고 그 중 다섯은 어린 시절에 죽었다.
하지만 사실 톨스토이에겐 또 다른 아이가 있었다.
자신의 하녀였던 아크시니야 바지키나가 낳은 사생아 아들이었지만,
어쨌든 자식은 자식이었다.

티모페란 이름의 이 아이는 마구간 지기, 산지기로 평생을 살았다.
이 사실은 톨스토이가 부부 사이에 비밀은 없어야 한다며
자신의 옛 여자관계를 비롯한 자신의 15년 간의 과거를 적은 일기를
아내에게 보여줘서 아내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도박으로 수많은 재산을 날렸고 온갖 여자들, 집시, 창녀,
어머니 친구들의 농노들과 관계한 사실은 물론
사생아까지 있다는 사실들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톨스토이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안나 카레니나 속 레빈이란 인물에 투영한다.
레빈이란 인물 역시 자신의 더럽고 방탕한 과거와 무신앙을 고백한 일기장을
키티에게 건네고 용서받는다.

그외에 톨스토이는 자신의 젊은 시절의 방탕과 무신앙에 대해
처절하게 회개한 참회록을 남겼고 그의 참회록은
성 어거스틴, 루소의 참회록과 더불어 세계 3대 참회록으로 꼽힌다.

이런 독특한 남편 때문에 소피아는 대단히 힘든 삶을 이어가야 했다.
유모도 없이 혼자서 13명의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은 물론
톨스토이의 글을 일일이 읽고 필체를 교정하는 작업을 맡아야 했다.

게다가 노년에 겨우 대문호의 아내로서 편안하게 사는가 했더니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갑자기 남편이 모든 재산을 버리고
뛰쳐나가려 하니 분통이 터질 만도 하다.

또한 톨스토이가 지나치게 대문호로 추앙받은 나머지
소피아는 소크라테스의 아내인 크산티페처럼
'위대한 남편을 이해하지 못한 악처'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의 목가적 정신이 담긴 소설 작품들이나 소설책 표지나 속표지에서 볼 수 있는
수염이 성성한 푸근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할아버지와도 같은 인상과는 달리, 
청장년기는 매우 개인주의적이며 강한 성욕으로 유명했다.

그의 부인은 결혼 초기 10여 년간 임신 상태가 아닌 기간이 거의 없었다.
이와 같은 그의 정신적 사상과 행동간의 괴리는 톨스토이를 연구할 때
관심있게 보는 주제 중 하나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성경의 돌아온 탕자.

그러나 노년기에 처절한 참회를 거쳐 올바르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도
위선적이라는 이야기와 그의 극단적인 기독교적 아나키즘 사상 때문에
인격파탄자라는 비난도 들었다.
그리고 그의 철저한 성차별적인 사상도 아울러 비판받고 있다.

슬하에 13명의 자녀를 두었던 톨스토이 부부 

톨스토이는 <참회록>에서 동양에 전해지는 우화라며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불설(佛說) 비유경(比喩經)에 나오는 안수정등(岸樹井藤) 이야기이다.  
안수(岸樹)는 강기슭의 나무 즉 절벽의 나무, 

정등(井藤)은 우물 속의 등나무 덩굴을 말한다.  
조금 길지만 여기서는 안수정등을 원문에 가깝게 인용해 본다. 

"한 나그네가 넓은 들판에서 놀고 있는데 난데없이 불길이 일어나 

에워싸는가 싶더니 코끼리 한 마리가 나타나 미친듯이 쫓아왔다.  
코끼리를 피해 달아나다 보니 등나무가 덩굴을 늘어뜨린 우물에 이르렀다.  
그는 덩굴을 붙들고 우물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우물 밑에는 독룡(毒龍) 세 마리가 커다란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고  
위를 올려다보니 독사 네 마리가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못하고 등덩굴을 생명줄 삼아 중간에 매달려 있자니,  
설상가상으로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덩굴을 쏠아대는 것이 아닌가.  
만일 쥐가 갉아먹어 넝쿨이 끊어지거나, 팔 힘이 빠져서 아래로 떨어지면  
독룡들에게 잡아먹히는 수밖에 없는 신세다.  
그때 등나무에 매달린 벌집에서 꿀물이 떨어져 입 안으로 흘러들었다.  
그렇게 한 방울, 두 방울, 다섯 방울, 꿀을 받아먹는 동안 

그는 위태로운 처지도 잊고 황홀경에 빠졌다.  
나그네는 달콤한 꿀맛에 취해서 그만 자신이 우물 절벽에 매달려서  
코끼리를 피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흰 쥐와 검은 쥐가  
덩굴을 갉아먹어 언젠가는 떨어져 용의 밥이 되리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오히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꿀을 먹으려고 덩굴에 연결된 벌집을 

흔들어 보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벌집에 있던 벌들만이 날아들면서 쏘아대곤 하였다." 

슬하에 13명의 자녀를 두었던 톨스토이 부부 

불교식으로 보면, 불길은 ‘욕망’, 코끼리는 ‘죽음의 운명’, 

등나무 덩굴은 ‘목숨’, 흰 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 즉 세월, 

독룡 세 마리는 ‘탐 · 진 · 치의 삼독(三毒)’ 즉 번뇌,  
독사 네 마리는 ‘지 · 수 · 화 · 풍의 사대(四大)’,  
다섯 방울의 꿀은 ‘재물욕, 성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의 오욕락(五欲樂)’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안수정등 설화는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도 욕망에 목을 매는  
어리석은 인간을 비유한 이야기이다.  
<참회록>에서 톨스토이는 자신의 인생을 이 설화에 나오는 나그네의 처지에 비유했다. 

"나 역시 나를 갈기갈기 찢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죽음이란 뱀으로부터  
도저히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인생이란 가지를 붙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왜 이런 고통 속에 빠지게 되었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나는 지난날 나에게 위안을 준 꿀을 핥아먹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 꿀도 이제 더 이상 기쁨을 주지 못하고, 하얀 생쥐와 검은 생쥐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내가 매달려 있는 가지를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내 눈에는 뱀이 뚜렷이 보이고, 꿀은 이미 단맛을 잃었다.  
내 눈에 보이는 건 오직 피할 길 없는 뱀과 생쥐들뿐이고, 

그것들로부터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것은 단순한 우화가 아니다.  
이것은 반박의 여지가 없는, 누구나 수긍할 수밖에 없는 참된 진실인 것이다." 

 

톨스토이와 아내 소피아

 

이 사진을 보면 아내 소피아와의 갈등으로 인해

야스나야 폴라냐의 집에서 가출했다가 시골 간이역 아스타포 보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톨스토이의 최후가 떠오른다.
톨스토이는 엄청난 영지를 가진 부유한 귀족(백작)이었으나 

말년에 토지사유제도의 폐지를 주장하면서 자신의 땅을 비롯한 전 재산을 

농민 등에게 나눠주려고 했고 소피아는 극력 반대했다. 
“재산을 모두 다 나눠주면 남은 가족은 어떻게 사느냐”는 거였다. 

하지만 소피아를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소피아는 여자로서 아내로서 또 자녀들의 어머니로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갈등 상황 속에서 톨스토이가 몰래 집을 나왔다가 며칠만에 죽었기 때문에 
소피아는 종종 악처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소피아는 톨스토이와의 사이에 13명의 아이를 낳았고(이중 8명만 성장함),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를 쓸 때 7번이나 정서를 하는 등 
평생 톨스토이의 작품 활동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말년에 요구했던 전 재산의 포기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톨스토이의 무덤은 저택에서 10분 남짓 걸리는 영지 안의 숲 속에 있다. 
가는 길에는 중간 중 간 화 살 표지가 서 있었으나 정작 무덤 앞에는 
손가락 굵기 정도의 나뭇가지를 휘어 공원의 꽃 밭에서 흔히 보는 반원형의 
낮은 울타리를 쳐 놓았을 뿐 비석이고 뭐고 아무 표시도 없었다. 
파란 잔디에 덮인 길다란 관모양의 직육면체 흙 더미가 무덤임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톨스토이 사망 초기에는 무덤 주위에 나지막한 나무 울타리가 쳐져있었다고 하는데 
언제부터 인가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부인 소피아의 무덤은 영지 인근 코차코프스 키의 톨스토이 가족 묘지에 따로 있다고 한다.

 


<참회록>에는 자살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여겼던 톨스토이의 내적 고뇌가 담겨 있다. 
그는 <참회록>을 쓰며 자신의 지난 인생을 되새기고,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탐구했다. 
톨스토이는 <참회록>을 출간하고 4년 후에 <참회록>의 소설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 Смерть Ивана Ильича〉을 발표한다. 
삶과 죽음에 관한 성찰을 담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톨스토이의 중단편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소설은 이반 일리치의 부고(訃告)를 접한 지인들 반응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동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사람들이 먼저 떠올린 것은 애도의 감정이 아니라 
그가 자리를 비움으로써 가능해진 인사 이동이나 승진에 대한 기대이다. 
그들은 마치 죽음이란 자신들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재난이라는 듯 행동한다. 
오히려 죽음이 자신은 피해 갔다는 데서 ‘모종의 기쁨’마저 느낀다.

상갓집 문상은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하는 체면치레에 지나지 않는다. 
이반 일리치의 부인은 울음을 터뜨리는 와중에도 조문객을 불러 물어볼 정도로 
남편 사망 시 나오는 국가 지원금을 더 받을 낼 방법이 없을까 궁금해 하고, 
이반 일리치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조문객은 이날 저녁 

동료들과 벌일 카드놀이에 늦을까 봐 그게 걱정이다. 
이반 일리치의 친구들이 보인 행태는 이반 일리치의 예전 모습일지도 모른다. 
직장 동료의 불행이 자신에겐 다행으로 다가오고, 
가족 친지의 죽음에서 재산 상속이나 보험금을 떠올리며, 
장례식장조차 친교의 장소로 활용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 세태이기는 마찬가지다.

동료의 죽음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불러일으킨 것은 그로 인해 가능해진 
자리 이동이나 직위 변경에 대한 생각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가까운 지인의 사망 소식을 접하면 으레 그렇듯이 
죽은 것은 자기가 아닌 그 사람이라는 데에서 모종의 기쁨을 느꼈다.

“어쩌겠어, 죽은 걸. 어쨌든 나는 아니잖아.” 
모두들 이렇게 생각하거나 느꼈다.

 필립 로스의 소설 <에브리맨>에서도 위 구절과 비슷한 대목이 나온다. 
<에브리맨>은 보석상 아들로 태어나 화가가 되고 싶었으나 
광고 회사 아트디렉터로 살았던 한 이름 없는 남자의 ‘늙고 병들어 죽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빠졌다는 점이었다. 
몇 분이 안 되어 모두 가버렸다. 
지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우리 종(種)이 가장 좋아하지 않는 활동으로부터 떠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는 뒤에 남았다. 
물론 다른 누가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비통해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거나 자기도 모르게 안도했다. 
또는 좋은 이유든 나쁜 이유든 진정으로 기뻐하기도 했다.

“이반 일리치의 삶은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했으며, 그래서 대단히 끔찍한 것이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2장 서두를 장식하는 이 한마디로 
작가는 이반 일리치의 지난 삶을 요약해서 제시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만큼이나 인상적인 명문장이다.

단순하고 평범한 삶이었는데 왜 그게 끔찍한 것이었을까? 
이반 일리치 골로빈은 마흔다섯 나이로 사망했을 때 고등법원 판사로 재직하던 중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대기업 부장이나 임원, 정부 기관 고위 공무원 쯤 되는 지위에 오른 셈이다. 
마흔 다섯이면 19세기 말 당시 기준으로도 죽기에 이른, 
죽기에는 뭔가 억울할 법한 중년의 나이이다. 

그의 인생은 대체로 ‘유쾌하게’ 만사형통으로 흘러왔다. 
원인 모를 병으로 덜컥 몸져눕기 전에는 말이다. 
그는 노는 것을 좋아했지만 일할 때는 신중했고 

사교적인 자리에서는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권력을 누리면서도, 
자신이 약자들을 배려할 줄 안다는 사실 자체를 즐겼다. 
점차 높은 자리에 오르고 새로운 인맥을 확보하면서 그에 맞게 처신했고 
적당히 개화된 의식을 내비치며 이미지를 포장할 줄도 알았다. 
결혼에 대해 뚜렷한 생각은 없었지만 좋은 귀족 가문에 
외모도 괜찮은 아가씨를 만나 결혼했다.

이반 일리치가 이 아가씨를 사랑했고 또 인생관에 공감대가 있어서 

결혼했다고 하는 것은, 그가 속한 상류 사회가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결혼했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편파적인 말이다. 
그는 이 두 가지 이유 모두를 고려해서 결혼했다. 
그런 아가씨를 아내로 맞이하면 자기 자신에게 이득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최상류층 사람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주는 일을 한다는 뿌듯한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이반 일리치는 결혼했다.

단란한 신혼은 아내가 임신을 하면서 끝이 난다. 
아내의 짜증과 잔소리가 늘어날수록 이반 일리치는 

그것을 피해 자신의 직무로 파고들었다. 
이 소설을 쓸 무렵, 아내와의 불화에서 달아나 글을 쓰고 

이상을 실현하는 데 골몰했을 톨스토이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는 듯하다. 
그가 결혼 생활에서 원하는 것은 집밥과 집안 살림과 잠자리 뿐이었다. 
그는 오로지 일 속에서 삶의 재미를 느꼈다.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짓밟을 수 있다는 권력 의식, 부하 직원들에게 받는 존경심, 
스스로 뛰어나다고 느끼는 업무 수행 능력과 더불어 동료들과의 수다, 
카드 게임 따위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그렇게 결혼 후 17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다. 
이반 일리치는 고참 검사가 되었으나 노리고 있던 

더 좋은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고 만다. 
그는 ‘연봉 5천 루블짜리 자리’를 찾아 페테르부르크로 청탁 여행을 떠나는데, 
마침 운 좋게 인사 이동이 생기면서 높은 자리로 승진하게 된다. 
그 덕에 부부 사이에 일시적인 평화까지 찾아든다. 

이렇듯 이반 일리치에게 인생의 행복은 번듯한 자리와 두둑한 월급봉투, 
남들처럼 품위 있는 생활 같은 ‘평범한’ 것들에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사를 해서 새로 구한 멋진 집에서 들뜬 기분으로 
손수 집 단장에 나선 그에게 사소한 사고가 일어난다. 
하지만 사다리에서 미끄러져 옆구리를 다친 일은 곧 잊힌다. 
시시한 친구나 친척 따위는 떼어내 버리고, 고위층 인사들을 집에 초대하고 
상류층 사교계와 교류하며 남부러울 것 없이 사노라 바빴기 때문이다.

집 단장에 완전히 사로잡힌 그는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가구를 이리저리 옮겨 보기도 하고 커튼을 이쪽저쪽에 고쳐 걸어보기까지 했다. 
한번은 영 말귀를 못 알아듣는 도배장이에게 커튼 다는 법을 직접 보여줘야겠다 싶어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다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진 적이 있었다. 
워낙 건강하고 민첩한 그는 다행히 균형을 잡아 많이 다치지는 않고 
튀어나온 창틀 손잡이에 옆구리를 부딪히기만 했다. 
부딪힌 곳이 욱신거렸지만 금세 나아졌다.

공무를 수행하며 느끼는 기쁨은 자존심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고 
사교 활동을 하며 느끼는 기쁨은 허영심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의 진짜 기쁨은 빈트 게임이었다. 

"… 그렇게 그들은 살았다. 
모든 것은 변함없이 흘러갔고, 모든 것이 매우 좋았다."

나중에야 이반 일리치는 건강이 나빠졌다는 걸 느낀다. 
몸이 아파 병원을 찾지만 의사는 타성에 젖어 
뻔한 질문만 던지고 형식적인 진단을 내릴 뿐이다. 
병원에서 환자를 대하는 의사의 태도는 
법정에서 그가 피고를 심문할 때 드러낸 방식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여기에는 교회, 병원, 법원, 정부 등 모든 제도와 

문명을 비판했던 톨스토이의 시각이 드러난다. 
이반 일리치는 여기저기 의사들을 찾아다니고 
이런저런 치료법에 관심을 기울이건만 뾰족한 해결책은 나타나지 않는다.

죽음에 관한 강의를 정리한 책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셸리 케이건 교수는 ‘나는 결코 죽지 않는다’라는 믿음을 논하는 장(障)에서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사례로 들고 있다. 
소설 속 이반 일리치처럼 우리는 언제가 죽을 거라고 쉽게 말하면서도 
실은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셸리 케이건은 ‘믿음’을 의식적 믿음과 무의식적 믿음으로 구분하면서, 
의식적 차원에서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죽을 운명이라고 믿고 있지만 
무의식적 차원에서는 자신의 불멸성을 믿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가 아주 보편적인 인간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주려 했으며 대다수 우리는 그런 인간형에 속할 것이라고 밝힌다. 

이러한 논의에 들어맞는 내용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이반이 정언 삼단논법의 논리를 거부하는 대목에서 나온다. 
이반 일리치는 ‘사람은 죽는다, 카이사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카이사르도 죽는다’라는 
삼단논법은 카이사르 같은 ‘일반적인 인간’에게나 적용되는 것이지 
자신처럼 특별한 존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카이사르는 필멸의 인간이라 죽는 게 당연하지만, 수많은 감정과 생각을 가진 
‘나’는 절대 죽을 턱이 없을 거라 믿고 싶어 한다. 
마치 보편타당한 진리와 개별적인 사실 간의 차이를 주장하는 듯하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려 법원으로 출근해 
재판 업무에 매달려보지만 예전처럼 직장 일이 그를 구해주지는 못한다. 
통증은 심해지고 짜증이 늘어 가족과 불화만 깊어진다. 
자신은 혼자 고통에 시달리는데 그를 이해해주는 사람 하나 없고 
세상은 전과 다름없이 흘러갈 뿐이다. 
‘나’라는 존재가 소멸하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니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그 순간 그는 방어벽들 사이로 어슴푸레 모습을 드러낸 죽음을 보고야 말았다. 
어슴푸레 나타난 것뿐이니 곧 사라지려니 생각하면서도 
그는 무의식중에 옆구리에 신경을 집중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고, 옆구리가 다시 쑤시듯 아파왔다. 
그는 다시금 죽음의 존재를 잊어버릴 수가 없게 되었다. 
죽음은 꽃나무 너머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참회록>에는 톨스토이가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쓰게 된 동기를 짐작할 만한 구절이 나온다. 
‘그저 약간 거북한 느낌’이거나 ‘삶이 정지해버린 듯한 느낌’이던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대한 일’ 즉 ‘죽음’으로 바뀌는 현상에 관해 적고 있다.

그렇게 삶을 살다가 오 년 전에 뭔가 몹시 이상한 일이 내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함께 

삶이 정지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나를 덮친 것이다. 
나는 혼란에 빠졌고 우울해졌다. 
하지만 그런 상태는 곧 지나갔고, 나는 예전과 같은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이런 무력감의 순간이 

동일한 형태로 점점 더 자주 반복되는 것이었다. 
삶이 정지해버린 듯한 이 느낌은 언제나 

다음과 같은 동일한 질문을 통해 표출되고 하였다. 

“왜?”, 
“그래, 그렇다면 그다음은?”

"… 치명적인 속병에 걸린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처음에는 별거 아닌 그저 약간 거북한 느낌만 증세를 보여 환자는 별반 신경을 쓰지 않다가 
이후 증세가 점점 더 반복되면서 급기야 떨쳐버릴 수 없는 고통이 된다. 
고통은 점점 커지고 어느 순간 환자는 그저 약간 거북한 느낌으로만 치부했던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대한 일, 바로 죽음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런 울적한 상황에서도 이반에게 위안을 주는 존재가 있다. 
바로 병든 주인의 용변을 치우는 일을 도맡아 하는, 농부 출신 하인 게라심이다. 
그는 순박하고 쾌활한 성격을 지닌 건강한 젊은이다. 
이상하게도 이반 일리치는 게라심과 함께 있으면 

통증이 누그러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반 일리치가 게라심을 좋아하는 것은 그의 거짓 없음, 
남의 처지를 이해하고 가엾게 여길 줄 아는 마음 때문이다. 
가족이나 동료가 보이는 동정은 꾸며진 예절에 불과하지만 
게라심이 전하는 연민은 선량한 심성에서 우러난 것이다. 
병든 육신을 집에 남겨둔 채 화려하게 차려입고 싱싱한 몸뚱이를 뽐내며 
오페라 공연을 보러 외출하는 아내와 딸, 예비 사위보다야, 
어깨에 다리를 걸쳐 놓게 해달라는 주인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는 하인이 더 좋을 수밖에 없으리라. 

“우리는 언젠가 다 죽습니다요. 

그러니 수고 좀 못 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라는 
게라심의 말에는 죽음을 이해하고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소박한 태도가 드러난다. 
하인이 보여주는 어찌 보면 대수롭지 않은 따뜻한 말과 행동에 주인은 감화된다.

이반 일리치에게 몸의 통증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주변 사람들이 던지는 뻔한 거짓말이다. 
그들은 그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치료만 받으며 괜찮아질 거라는 식으로 빈말을 늘어놓는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진심으로 동정해주길 바라면서도, 

그러한 본심을 표출하지 못한다. 
아직 자신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죽음학자 퀴블러 로스의 ‘죽음의 5단계설’에 따르면 
인간의 죽음을 일생 동안 연구한 그녀는 인간이 죽음을 앞두고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이라는 다섯 단계를 거쳐 임종에 이른다고 보았다. 
이반 일리치는 분노와 우울에 빠져 있고 아직 ‘수용’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꺼이꺼이 울고 싶었고 그런 자신을 

누군가 달래주고 같이 울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법원 동료인 셰베끄가 찾아오자, 이반 일리치는 소리 내어 울거나 
다독임을 구하는 대신 진지하고 근엄하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기계적으로 상소심 판결의 의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해주고는 끝까지 그 의견을 고집했다. 
바로 이 거짓, 주변 사람들과 그 자신의 거짓이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나날들을 해치는 가장 무서운 독이었다.

 

이반 일리치는 지난 삶을 되짚어 본다. 
어린 시절에는 좋았던 순간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서 멀어지고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기쁨은 미심쩍은 것으로 바뀌었다. 
당시엔 기쁨으로 여겨지던 많은 것들이 
이젠 모두 부질없고 추악한 것으로 변해버렸다.

삶이란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 
쌓아온 모든 것들이 일순간 무너질 수 있는 게 삶이다. 
이반 일리치는 지금까지 삶이 잘못된 삶은 아니었는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나는 뭐든지 다 제대로 했는데 어떻게 잘못 살았을 수가 있었어?’라고 반문하지만, 
(소설에서는 나오지 않으나) 그가 관료주의 매너리즘에 빠져 내린 잘못된 판결로 
어떤 사람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거나 유형에 처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반 일리치의 직업이 판사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법정에서 판결을 내리던 입장에서 그는 이제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재판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 
그가 사다리에서 굴러떨어진 불상사는 가장 높이 오른 순간 맞닥뜨린 
지위의 추락과 삶의 전락을 의미하는 듯하다. 
죽음의 판결이 내려질 시점이 다가올수록 
그는 점점 어린 시절 기억 속으로, 고독 속으로 숨어든다.

"결혼…. 뜻하지 않게 했던 것. 
환멸, 아내의 입 냄새, 애욕, 위선! 이 생명력 없는 업무, 그리고 돈 걱정, 
그렇게 보낸 1년, 2년, 그리고 10년, 20년. 언제나 똑같은 삶. 
살면 살수록 생명은 사라져가는 삶. 
그래, 나는 산에 올라가고 있다고 상상했지. 
하지만 일정한 속도로 내려오고 있었던 거야. 
그래, 그랬었던 거야. 
분명 사람들 눈에 나는 올라가고 있었어. 
하지만 정확하게 그만큼씩 삶은 내 발아래서 멀어져가고 있었던 거야…. 
그래, 다 끝났어. 
죽는 것만 남았어!"

"처음 인생이 시작되던 바로 그 지점에 밝게 빛나던 한 점의 빛이 있었다. 
그러나 빛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어두워져갔고, 
어두워지는 속도 역시 점점 빨라져만 갔다. 
‘죽음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속도는 점점 빨라져 가는구나.’ 
이반 일리치는 생각했다. 
그러자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추락하던 이 생각은 
영혼 깊은 곳으로 돌덩이처럼 굴러떨어졌다. 
삶도, 기승을 부리던 고통도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끝을 향해, 
가장 끔찍한 고통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최소한 이유는 알아야 할 거 아냐? 
그런데 그게 불가능해.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한다면 설명이 가능하겠지. 
그렇지만 그건 인정할 수가 없어.’ 
그토록 반듯하고 올바르고 품위 있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떠올리며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죽음은 끝났어, 더 이상 죽음은 없어 
어느덧 육체적 고통이 정신적 고통으로 전이된다. 
그는 무심한 타인들의 처세에서 자신이 여태껏 해온 삶의 방식을 발견한다. 
자기 삶을 스스로 합리화시켜보려 하지만, 자신의 인생 전부가 
거대한 허위에 지나지 않았다는 의심을 떨쳐내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이 내보이는 거짓됨을 혐오했으나 알고 보니 
자기 안의 양심 자체가 거짓이었음을 깨닫는다.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것일까. 
그를 죽음에 몰리게 한 것은 낙상 사고나 맹장, 신장의 이상이 아니었다. 
이반의 삶은 무난했으나 무의미한 삶이었다. 
그에게 죄가 있다면 삶에 의심을 품지 않은 죄, 타인에게 삶의 기준을 맞춘 죄, 
인생의 의미에 관해 묻지 않은 죄, 자기반성과 성찰을 게을리한 죄가 있을 터이다.

단말마의 비명이 방을 울린다. 
그는 검은 자루 속에서 몸부림치는 신세다. 
죽음 앞에 눈을 가린 사형수 꼴이다.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려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다가 
알 수 없는 힘에 떠밀려 구렁텅이 속으로 떨어진다. 
나락 끝에서 무언가 환하게 빛을 발하는 것을 본다. 
그게 삶과 죽음의 고통을 끝낼 탈출구일까.

임종의 순간을 이토록 치밀하게 묘사한 작가가 또 있을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마무리하는 두세 페이지에서 
독자는 톨스토이가 파놓은 심연 속으로 서서히 빨려드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바로 이 순간 이반 일리치는 나락으로 굴러떨어져 빛을 보았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그래서는 안 되는 삶이었지만 
아직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으며 바로잡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이 도대체 뭐지?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는 조용히 입을 다문 채 귀를 기울였다. 
그때 누군가가 자신의 손에 입을 맞추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뜨자 아들이 보였다. 
아들이 불쌍했다. 
아내가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내는 입을 헤벌린 채 절망적인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눈물이 그녀의 코와 뺨을 타고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아내도 안쓰러웠다."

후회는 언제나 뒤늦게 오고 각성의 순간은 늘 짧다. 
가족이 임종을 지키는 짧은 시간 동안 이반 일리치는 
내적 변화를 겪으며 어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다. 
자기 삶을 모두 부정하니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진다. 
죽음을 받아들이자 고통에서 해방되어 마음이 편안해진다. 
부정의 과정을 통과해 긍정의 끝에 다다른 것이다.

울먹이며 바라보는 아내와 아들에게서 애절한 눈길과 손길을 느낀다. 
그들에게서 진심 어린 연민이 전해지고 
그의 내면에서도 연민과 동정의 감정이 스며 나온다. 
그는 욕망을 버리고 용서를 구한다. 

‘그래, 내가 이들을 힘들게 하고 있어. 
다들 불쌍해. 
하지만 내가 죽으면 좀 편해질 테지.’
라고 속삭이는 자신 안의 목소리를 듣는다. 

공감은 용서를 낳고 용서는 화해로 이어진다. 
비로소 이반 일리치는 자신과 화해하고 또한 타인과 세상과도 화해한다. 
농부 게라심이 보여준 이타적인 선과 더불어, 어린 아들이 죽어가는 아버지를 대하는 
거짓 없는 연민의 몸짓에서 그는 빛을 보았는지 모른다.

그러자 갑자기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이제까지 그를 괴롭히면서 마음 속에 갇혀 있던 것들이 
일순간 두 방향, 열 방향, 모든 방향에서 쏟아져 나왔다. 

저들이 불쌍해. 저들이 더 고통받지 않게 해주어야 해. 
저들을 해방시켜주고 나 자신도 이 고통에서 해방되어야 해. 
‘얼마나 좋아. 얼마나 단순해.’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 그는 그동안 익숙해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죽음은 어디 있지? 무슨 죽음? 두려움은 이제 없었다. 
죽음이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그래, 이거야!” 
그는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기쁠 수가!”
이 모든 것들은 한순간에 일어났고 그 순간의 의미는 이후 결코 바뀌지 않았다.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그는 두 시간이나 더 사경을 헤매는 것으로 보였다.

…" '끝났습니다!' 
누군가 그를 굽어보며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이반 일리치는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죽음은 끝났어.’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더 이상 죽음은 없어.’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도중에 멈추더니 온몸을 쭉 뻗었다. 
그렇게 그는 죽었다."

이반 일리치가 고통에 벗어나 ‘얼마나 좋아, 얼마나 단순해’라고 생각할 때 느끼는 ‘단순함’은 
소설 앞 부분에서 그의 삶을 규정지으며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해서 끔찍했다’고 할 때의 
단순함과는 구별되는 단순함이며, 이반 일리치가 ‘이렇게 기쁠 수가’라고 외칠 때 ‘기쁨’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동료들이 느끼는 ‘모종의 기쁨’과는 차원이 다른 기쁨이다.

이반 일리치가 ‘그것을 하면 되는 거야’라고 했을 때 ‘그것’은 무얼 가리킬까? 
죽음이 있던 자리에 나타난 ‘빛’은 무엇일까? 
선한 마음, 타인과의 교감, 용서와 사랑, 참된 삶, 올바른 삶, 
어쩌면 행복이나 자유, 영혼 같은 것일까?

 

육체적 죽음 뒤에도 육체를 초월하여 영혼이 영원히 살아남으리라 여긴다면 
죽음이 두려울 까닭이 없을 터이다. 
플라톤이 주장한 영혼불멸설을 따르자면

(플라톤은 이성을 영혼으로 연결시키는 무리수를 두기는 했다), 
죽음은 육체의 종말이지만 영혼 입장에서는 자유의 획득이다. 
영혼은 죽음을 통해 오히려 육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라 차라리 좋은 것이 된다.

말년에 톨스토이는 종교와 교회를 부정하면서도 종교와 신학을 깊이 연구했다. 
그런 그가 영혼불멸설까지 믿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영혼의 존재는 믿은 듯하다. 
위 단락에서, “끝났습니다!”라고 의사로 짐작되는 누군가가 선고를 내린 후 
이반 일리치가 사지를 뻗고 죽기까지는 시간의 틈새가 놓여 있는데, 
이를 혼이 몸에서 흘러나오는 찰나로 여겨도 되지 않을까. 
그러면 죽음으로 영혼은 ‘잠시’ 자유를 얻은 셈이다.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에서 ‘빛’을 

‘영혼의 빛’이나 ‘영적 부활’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부활이나 구원, 영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에서 ‘부활’은 내세에서의 부활이 아니라 
‘삶의 도덕적 갱생’을 의미한다​. 
톨스토이가 ‘육체는 사라지지만 영혼은 남는다’는 식으로 
죽음이라는 문제를 대충 봉합하려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존재다. 
내일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데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가는 존재이다. 
죽음이 두려운 건 죽음이 무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서야 죽음을 이해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숙명이다. 
그런 까닭에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죽음 없는 삶은 없고, 삶 없는 죽음도 없다. 
죽음은 삶의 일부이기에 삶이 끝나면 죽음도 끝이 난다. 
우리는 언제가 반드시 죽는다. 
그렇다면 문제는 죽음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것이다.

게라심의 말을 소환해 본다. 
“우리는 언젠가 다 죽습니다요. 
그러니 수고 좀 못 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 죽음을 기억하라!” 
내 삶이 유일하고 고유하며 유한하다는 사실을 늘 의식한다면, 
관성의 고리에서 빠져나와 어찌 삶을 제대로 살아보려 하지 않겠는가.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이라는 작품에서 소년 니콜라이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세 가지 질문의 답을 알아내기 위해 현자를 찾아 나선다. 
첫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둘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셋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현자의 입을 통해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현재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그 사람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일이다.” 

톨스토이는 삶에 대한 사랑을 기조로 한 예술에서 출발하여 종교에 몰입한 작가이다.  
그래서 그는 대문호임과 동시에 위대한 사상가이자  
구도자적(求道者的)인 삶을 산 기독교 신앙인이었다.  
그는 항상 인생에 대하여 절박하게 고민하고

자신의 사상을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그는 문학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교육 · 난민구제에도 힘을 기울였다.  
러시아의 부조리, 지배층이 저지른 가난하고 힘없는 농민에 대한  
폭압과 착취에 대한 속죄를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실천해 나갔던 것이다. 

톨스토이 작품에 있어 또 하나의 커다란 특징은  
자전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철저한 사실주의자였던 톨스토이는 주로 자기 자신의 삶에서 일어났던  
실제의 사건을 작품에 담았다.  
예를 들어 '전쟁과 평화'에서는 자기 자신을 삐에르에,  
그리고 마지막 작품인 '부활'에서는 네플류도프에 투영하고 있다.  
이점에서 또 다른 러시아의 문학가인 도스토예프스키가 주로 현실과  
공상을 결합시킨 타인들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표현한 것과 차별화되고 있다.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이다.  
그러나 둘은 태어난 배경뿐만 아니라 문학정신까지도 판이하게 다르다.  
톨스토이는 귀족 출신이고 부유했다.  
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당시 러시아에서 중인 계급 신분이었던  
가난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가난과 배고픔 그리고 병마에 시달렸다.  
그래서 그의 문학세계도 어둡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인간의 삶이란 논리로는 도저히 풀지 못할  
수수께끼로 가득 찬 암울한 여행이었다. 

이에 비해 톨스토이는 자신의 삶은 물론 자신의 예술 위에  
논리 정연한 건축물을 지으려 한 현실주의자였다.  
인간심리에 대한 분석과 개인과 역사 사이의 모순을 분석함으로써  
최상의 리얼리즘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톨스토이에게 있어 삶이란 그가 논리로 풀어내고자 했던 하나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톨스토이만큼 온 세계의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작가는 아마 찾아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는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신화적인 존재여서  
모든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오랜 동안 광활한 대륙에서 살아가는 러시아인들의 정신적 지주였고,  
지금까지도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확실히 그는 지금도 우리 가슴 속에 살아 있다.  
그는 이렇게 우리를 위로한다.  
“여러분은 왜 나를 스승이라 부르는가? 나는 스승이 아니다.  
죄(罪)에 있어서나 부활(復活)에 있어서나 나는 여러분의 형제다.”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내부

 

톨스토이 집필실 서재.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 대작이 탄생한 요람이다.    
보존을 위해 책상 위를 유리로 덮어 놓았다. 

 

톨스토이 집필실 서재

 

톨스토이 친필 원고

 

톨스토이 친필 원고

 

톨스토이 생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내부

박물관 안에는 실제 톨스토이의 개인 물건들과 
22,000여 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는 그의 서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톨스토이 박물관 안의 가구들도 1910년대에 사용되었던 것 그대로 
그 자리에서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현재는 톨스토이의 고손자인 블라디미르 톨스토이가 박물관을 관리하고 있다.

 

톨스토이 생가 내부


오늘날 야스나야 빨랴나는 해외의 여러 나라들과도 많은 교류를 하고 있다. 
박물관에서는 톨스토이의 문학에 관련된 주제들에 대한 
여러 가지 국제 컨퍼런스, 학술회의, 세미나 등이 열리고 있다.

 

톨스토이 생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내부
2만 2000여 권에 달하는 톨스토이의 서재

 

톨스토이 생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내부

 

[영상] SBS ‘톨스토이 생가’ 내부 모습 大공개

 

[영상] Yasnaya Polyana 톨스토이 생가

 

온실 출입구

 

온실 단지

 

온실

톨스토이의 할아버지인 N. S. 볼콘스키 (Volkonsky)가 윗쪽 연못 위 
공터에 지은 온실은 야스나야 팔랴나에서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재산이었고
할아버지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온실

볼콘스키(Volkonsky)와 톨스토이(Tolstoy )가족의 3 세대는 
자유 시간의 대부분을 온실에서 원예 수업과 재배로 바쳤다. 
톨스토이의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 M. N. 볼콘스카야(Volkonskaya)와
톨스토이 자신과 그의 아내에게도 원예와 재배는 관심의 대상이었다.
 
1867년에 온실이 화재로 파괴되었다. 
레오 톨스토이는 같은 장소에 새로 온실을 지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온실 

 

온실 

 

온실 

 

온실 

온실 단지

 

온실 단지

 

가든 파빌리온

1888 년에 지어졌다. 
여름에는 러시아 국민화가 일리야 레핀 (Ilya Yefimovich Repin) 및 
니콜라이 게(Nikolai Nikolaevich Ge)를 포함하여 
야스나야 폴랴나의 손님이 파빌리온에 살았다.

 

가든 파빌리온 

 

Leo Tolstoy's favorite bench 레오 톨스토이가 가장 좋아했던 벤치

톨스토이는 이곳을 특별한 느낌으로 대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벤치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는 항상 이 나무들을 존경합니다. 
이곳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아침에 이곳으로 산책합니다. 
가끔 여기 앉아서 글도 씁니다 .” 
라고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겸 교수였던 
알렉산더 골든바이저(Alexander Borisovich Goldenweiser)에게 말했다.

 

레오 톨스토이가 가장 좋아했던 벤치

 

깔때기 목욕탕

보론카 강에 있는 목욕탕
톨스토이 생전에는 사유지에서 강으로 이어지는 길을 "쿠팔나야"라고 불렀다. 
강을 건너는 교차로 근처에 수영장이 있었다. 
톨스토이는 거의 매일 목욕을 했다. 
종종 아들이나 방문 손님과 동행하기도 했다.

 

전망대. 로어 파크의 전망대 타워

 

이정표

 

낮은 연못 (Lower Pond) 길

 

낮은 연못 (Lower Pond)

야스나야 폴랴나의 이 아름다운 장소는 톨스토이 가슴에 

거룩한 이상으로 남아 있는 어머니를 생각나게 했다. 
하부 공원은 어머니(Maria)가 산책하기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여기에 그녀는 장미덤불, 개암나무, 화살나무(euonymus) 등을 심었다. 
그 덤불은 여름에는 눈에 띄지 않으나 가을에는 밝은 분홍색-빨강 "모닥불"로 타오르며 
공원 전체에 그림처럼 흩어져 있다. 
그리고 윗쪽 연못 근처에는 그녀가 한때 심었던 은빛 포플러가 여전히 살고 있다. 
가족의 전설에 따르면 공원 깊은 곳에 위치한 전망대에서 그녀는 종종 
부동산 사업에 열중한 남편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하부 공원, 낮은 연못 자작 나무 다리

야스나야 팔랴나 영지에 영국식 조경 공원을 만들 때 공원을 지나던 계곡이 
두 개의 댐으로 막혀서 세 개의 연못이 형성되었는데 이를 상부, 중간 및 하부라 이름한다.
하부 공원 낮은 연못(Lower Pond)에 우아한 자작 나무 다리가 가로 질러 지어졌다. 

옛날 연못 위에서는 활어를 잡어서 요리를 해 먹었다. 
가운데 하나는 야스나야 팔랴나 연못 중 가장 깨끗하고 깊은 곳이다. 
샘물을 먹고 여름에도 따뜻해 지지 않고 물이 아주 시원했다. 
1890년대에 스레드니(Sredniy Pond)에 목욕탕이 지어졌다. 
톨스토이 시대에 사람들은 이곳에서 목욕을 했을 뿐만 아니라 빨래도 했다.
스레드니 연못의 수위가 상승하면 그 물이 계곡의 가장 깊은 부분에 위치한 
나무 홈통을 따라 아래 쪽으로 흘러간다.

“오늘 나는 정원을 돌아 다니며 늘 그렇듯이 전혀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에게 거룩한 이상으로 남아 있는 어머니를 기억합니다.” 
(레오 톨스토이. 일기).

 

톨스토이 묘지 가는 길

 

톨스토이 묘지 가는 길

 

톨스토이 묘지

톨스토이 묘지가 있는 곳은 톨스토이가 어린 시절 형제들과 함께 
자주 가서 놀았던 스타리 자카스 (Старый Заказ Old Order) 숲이다. 
톨스토이는 그의 사랑하는 형제 니콜라이(Nikolai)로부터 

어린 시절 녹색 막대기에 대한 전설을 들었다. 
계곡 가장자리에 묻힌 녹색 막대기를 찾으면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고 

전쟁과 질병도 없을 것이며 사람들은 "개미 형제"가 될 것이다. 

톨스토이와 형제들은 머리에 스카프를 달고 안락 의자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까운 곳에서 함께 앉아 

“한 지붕 아래” 함께 기분이 좋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개미 형제애"를 꿈꿨다.
이제 계곡 가장자리에 묻힌 녹색 막대기를 찾는 일만 남아 있다. 

아이들은 이 녹색 지팡이가 발견되면 세상에 더 이상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으며 오랫동안 그것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철학적인 레오 톨스토이는 그의 죽음 직전에 전 세계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녹색 막대기에 대한 그의 사랑하는 형제의 비유를 회상했다. 

톨스토이는 생애 말년에 자신을 야스나야 폴랴나에 묻어달라고 반복해서 요청했다. 
“내 몸을 땅에 묻을 때 어떤 의식도 행하지 말라.
나무 관, 그리고 원하는 사람은 녹색 막대기 대신 계곡 맞은 편에 있는 
스타리 자카스(Old Order)를 숲으로 운반하거나 운반할 것이다."

톨스토이의 무덤은 매우 이례적이며 너무 단순해 보인다. 
계곡 가장자리에 있는 녹색 마운드, 묘비도 없고 십자가도 없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할 수있는 것은 
이 무덤, 평화롭고 조용한 오래된 숲이다. 
이것은 삶을 매우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피난처이다.

 

톨스토이 묘지

 

톨스토이의 무덤은 모르고 지나치면 무덤인 줄도 모를 정도로 단출하다. 
그 흔한 묘석이나 묘비도 없이 땅과 풀과 하늘과 맞대어져 있다.  
톨스토이는 영지 내에서도 이곳, "스타르이 자카즈"에 묻히고자 하였다.  
그가 사랑했던 형 니콜라이가 톨스토이에게 "이곳 스타르이 자카즈" 골짜기 끝에 
아무도 죽지 않고 전쟁과 질병이 없어지게 하는 초록색 지팡이를 숨겼다"고 말한다. 
평생 그 소망을 품고 살던 톨스토이는 
죽어서도 초록색 지팡이가 숨겨져 있는 이곳에 묻히고자 하였다.

육면체 관 크기 그대로, 흙과 풀로 덮인 작은 무덤이다.  
유언대로 그의 무덤임을 알리는 표식도 없고 묘석이나 묘비, 십자가도 없다. 
잘 모르고 찾아간다면 무덤 있는 데를 놓치기 쉽다. 
유언을 모르고 찾아간다면 실망하기 쉽다.

'아무도 죽지 않고 전쟁과 질병이 없어지게 하는 초록 지팡이'를 숨긴 곳, 
스타리 자카스 (Старый Заказ Old Order) 숲에 그는 묻혔다,  
스타리 자카스(Старый Заказ)는 직역하면 '오랜 금지'란 뜻으로, 
톨스토이 할아버지 대부터 이곳 나무들을 베지 못하도록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사람이 묻힐 묘 크기만큼이었던가. 

 

야스나야 폴랴나의 풀무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이반(Иван)은 ‘성(聖) 요한’(영어로는 ‘존’)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우리나라 ‘영수’나 ‘지훈’처럼 러시아에서 가장 흔한 남자 이름이다. 
‘이반’은 보통 사람의 대명사로, 이를테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보통 사람의 죽음’이자 익명의 흔한 죽음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한 남자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레프 톨스토이가 82세 나이로 가출했다가 아스타포보 간이역에서 객사했을 때 
그는 이미 유언장을 남겨둔 상태였다. 
저작권을 포기할 뿐 아니라, 추모행사 없이 비석도 세우지 말고 
흙무덤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유언이었다. 
그는 그저 평범한 한 농민의 죽음처럼 소박하게 장례를 치러주길 원했다. 
그의 가출 사건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생중계되었듯이, 톨스토이의 바람과는 달리, 
그의 장례에는 지인들뿐만 아니라 농민, 노동자, 학생 등 엄청난 추모 인파가 몰려들었고 
국민적인 행사로 장례식이 치러졌다. 
48년 간 고락을 함께했으나 남편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아내 소피야는 
9년 후 그의 무덤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묘지에 따로 묻혔다.

톨스토이는 평생토록 삶의 도덕적 완성을 추구했고, 
높은 이상과 실제 삶 사이에 놓인 간극에 괴로워했다. 
그는 위대한 작가, 지혜로운 현자였고 모순덩어리 인간이었다.

어린 시절 톨스토이는 형들과 함께 우애와 선의 삶을 살자고 맹세하며, 
세상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주문을 적은 '마법의 초록 지팡이'를 
야스나야 폴랴나의 숲 어딘가에 심어놓은 적이 있었다. 
톨스토이가 묻히길 바란 데가 그 지팡이가 있던 자리였다. 

“진리를 … 나는 … 사랑한다.”, 
“그러나 농부들은… 농부들은 어떻게 죽는가?” 
톨스토이가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말이다. 

이반 일리치처럼 톨스토이는 죽음을 맞이하며 ‘빛’을 보았을까. 
어린 톨스토이가 생각한 삶의 행복은 무엇이었을까. 
2019년 8월, 백야(白夜)가 다가온 어느 날, 
나는 야스나야 폴랴나 숲 그늘 아래, 묘비 없는 풀 무덤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성였다.

 

톨스토이 묘지 인증샷

 

톨스토이 묘지 인증샷

 

톨스토이 묘지 인증샷

 

톨스토이 묘지에서 나가는 길

 

[영상] Cemetry 톨스토이 묘지

 

[영상] Going to Moscow 모스크바를 향하여

 

[영화] The Last Station (마지막 역) 2009 full -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

 

The Last Station 은 마이클 호프만(Michael Hoffman)이 각본 및 감독을 맡은 
2009년 영어 독일어 전기 드라마 영화로, Leo Tolstoy 의 생애 마지막 달을 기록한 
제이 파리니(Jay Parini) 의 1990년 전기 소설을 기반으로 한다. 
이 영화는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톨스토이로, 헬렌 미렌이 아내 소피아 톨스테이아로 출연한다. 
이 영화는 소피아와 그의 제자 블라디미르 체르트코프가 
톨스토이의 유산과 작품의 저작권에 대한 싸움에 관한 것이다. 
2009 텔루라이드 영화제에서 초연되었다.
(자동번역 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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