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생가 야스나야 빨랴나(Yasnaya Polyana) 가는 지도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190㎞, 그러니까 서울에서 전주 쯤 떨어진 '툴라' 주(州)에서
다시 남쪽으로 14㎞ 더 가면 톨스토이의 생가가 있는 작은 마을 
'야스나야 팔랴나(Yasnaya Polyana, Ясная Поляна)'가 있다. 
 
야스나야 팔랴나(Yasnaya Polyana)는 러시아어로 ‘밝은 숲속의 초지’라는 뜻으로 
이 지역에서 많이 자라는 활엽수에서 연유된 것이다. 
북쪽에는 유목민 침략에 대비하는 큰 숲이 있어 툴라를 방위하는 역할을 하였다.

 

Lev Tolstoy in Yasnaya Polyana, 1908, the first color photo portrait in Russia.
1908년, 러시아 최초의 컬러 사진 톨스토이 초상화.

야스나야 팔랴나는 세계적인 대문호 레오 톨스토이 (Leo Tolstoy 1828∼1910)의 

출생지로 1763년 그의 외증조부인 C. F. 볼콘스키가 이 지방을 매입하였다. 
톨스토이는 1862년 결혼한 뒤 귀향하여 이곳에서 48년 동안 살았다. 
야스나야 폴랴나는 그의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1864∼1869)>에서 

‘헐벗은 산’으로 묘사되고 있다. 

톨스토이가 그리스도교 무정부주의자가 된 이후 이곳은 추종자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1850년대 후반에 톨스토이가 농민을 위해 이곳에 세웠던 학교는 문학박물관이 되었다. 
그의 집은 1941년에 독일군에게 점령당해 손실을 입은 후 재건되었으며, 
약 2만 2천 권의 장서가 있는 그의 본가와 볼콘스키 대저택, 

공원 등은 톨스토이 기념박물관이 되었다. 
이 박물관은 1978년 레닌훈장을 받았으며, 현재는 국립박물관으로 되어 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고향집에서 가까운 스타리자카스(Старый Заказ) 언덕 위에 안장되어 있다.

 

[영상] Yasnaya Polyana 가는 길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 입구


봉고차와 비슷한 미니버스로 4시간 정도 달려 톨스토이 생가 야스나야 폴랴나에 

도착하니 입구에 주차장과 기념품 판매점, 레스토랑 등이 있다. 

 

레스토랑

 

우리 일행은 레스토랑을 빌려 준비해 온 도시락으로 식사를 한다.

 

도시락

 

긴 시간 여정으로 약간은 허기진 배를 채운다. 

 

유료 화장실

 

야스나야 폴랴나(Ясная Поляна) 안내 광고판

 

엔트리 타워


야스나야 팔랴나 입구에 설치된 원통형 2개는 200여 년 된 것이라고 한다.

엔트리 타워는 레오 톨스토이의 외할아버지인 N. S. 볼콘스키(Volkonsky)에 의해 지어졌다. 
내부에는 탑이 비어 있어 파수꾼들이 추운 날씨에 가끔 피난처로 사용했다. 
입구 왼쪽에 "카멘카(Kamenka)"라는 작은 집이 있다. 
정원사는 여기에 살았다. 
1890년대에 "카멘카"는 톨스토이의 장녀인 타티아나(Tatiana Lvovna)와 
마리아(Maria Lvovna)가 가르치는 농민 어린이를 위한 학교로 사용되었다. 
오늘날에는 박물관 매표소가 있다.

 

엔트리 타워
야스나야 팔랴나(Yasnaya Polyana) 출입구 엔트리 타워에 들어서자마자 왼쪽에
정원사가 살던 "카멘카(Kamenka)"라는 작은 집이 있다. 
지금은 박물관 매표소로 쓰인다.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 안내도

 

야스나야 폴랴나는 톨스토이가의 '영지'로 여러 건물들과 정원, 연못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좌 우측으로 연못이 나오고
톨스토이의 생가는 위 그림에서 4번 건물, 그의 외증조부 볼콘스키의 집은 6번 건물이다.  

큰 연못

야스나야 팔랴나 영지에 영국식 조경 공원을 만들 때 공원을 지나던 계곡이 
두 개의 댐으로 막혀서 세 개의 연못이 형성되었는데 이를 상부, 중간 및 하부라 이름한다.

입구에 들어서면 길 좌 우편에 상부 큰 연못이 있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낚시를 하고 여름에는 뱃놀이를 하고 
겨울에는 썰매와 아이스 스케이트를 탔다. 
연못 기슭을 따라 몇 개의 오래된 버드나무가 보존되어 있으며 
연못 기슭에 목욕탕이 있었다.

 

큰 연못

 

큰 연못

 

"Preshpekt" (프레쉬펙트)

입구 엔트리 타워에서 톨스토이의 집으로 이어지는 그림같은 숲길은 17세기부터 있어 왔다.
자작나무는 골목을 따라 두 줄로 심었다.
1903년에는 오래된 자작나무 대신 여기에 가문비나무를 심었다. 
1965년에 가문비나무는 다시 자작나무로 대체되었다. 
"Preshpekt"는 톨스토이가 "아침기도"라고 부르는 전통적인 산책로의 일부였다. 
이 자작나무 골목은 톨스토이의 예술 작품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으며 
소설 "전쟁과 평화"에서도 전통적인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프레쉬펙트(Preshpekt)

 

프레쉬펙트(Preshpekt) 인증샷

 

프레쉬펙트(Preshpekt) 인증샷

 

프레쉬펙트(Preshpekt) 인증샷

 

프레쉬펙트(Preshpekt)

 

이정표

 

한글이 표기되어 있는 길 이정표

나무로 만든 모든 방향 안내 화살 표지에 
러시아어 · 영어와 함께 한글이 표기되어 있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2003년 삼성전자가 톨스토이 탄생 175주년을 맞아 

레프 톨스토이 박물관과 함께  ‘톨스토이 문학상’을 제정하고 

이후 꾸준히 후원해 온 인연 때문이라고 한다. 


표지판은 영지 내에 한두 개가 아니다. 

한국인 방문객으로서는 기분 좋은 일이다.
‘톨스토이 문학상’은 제정된 이후 러시아 최고 권위의 문학상 중 하나가 되었다.
2017년까지는 표지판에 한글이 표기되어 있었는데
2018년 중국어로 바뀌었다.

 

[영상] Yasnaya Polyana에 들어 서서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 조감 사진

앞쪽 초록색 지붕으로 길게 뻗은 건물은 마굿간
중간에 잘 지어진 초록색 석조 건물은 볼콘스키 하우스 (Volkonsky House)
볼콘스키 하우스 뒷쪽 건물은 윙 쿠즈민스키(Wing Kuzminsky)
뒷쪽 오른쪽 건물이 바로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이다.

 

볼콘스키 하우스 (Volkonsky House) 조감 사진

톨스토이의 할아버지 볼콘스키(Volkonsky)가 거처하던 집이다.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건물이다.
건물 중앙 부분에는 린넨, 카펫 및 가죽 가공을 위한 작업장이 있었다.

볼콘스키 하우스의 동쪽 건물에는 톨스토이의 딸 
타티아나 톨스타야(Tatiana Lvovna Sukhotina- Tolstaya)의 미술 작업장이 있었다.

 

볼콘스키 하우스 (Volkonsky House) 조감 사진

현재 건물에는 박물관의 행정 및 과학 도서관이 있다. 
볼콘스키 하우스의 전시장에는 임시 전시회가 열린다. 
직접 방문 할 수 있다.

 

볼콘스키 하우스 (Volkonsky House)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는 톨스토이 외가인 볼콘스키 공작 가문의 영지였다.
이 영지는 톨스토이 외할아버지인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볼콘스키(1753~1821) 공작의 소유였다. 
외할아버지는 예카테리나 2세 시절 고관을 지냈다가 좌천되어 이 영지에 정착했다. 
그는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볼콘스카야(Maria Nikolaevna, 1790~1830)를 낳았다. 
그러나 딸이 두 살 되던 해에 아내가 사망했고 

공작은 평생 재혼하지 않고 딸 하나만을 열심히 길렀다. 
마리야는 공작이 죽은 후 이 영지를 물려 받았다. 

1년 후, 마리야는 니콜라이 일리치 톨스토이(1794~1837) 백작과 결혼하게 된다. 
니콜라이 톨스토이는 집안의 파산을 막기 위해 

4살 연상의 마리야와 일종의 정략결혼을 한 것. 
이 영지는 마리야의 결혼 지참금이었다. 


결혼 후 이 곳에서 다섯 남매(4남1녀)를 낳았다. 
니콜라이, 세르게이, 드미트리, 레프 그리고 딸 마리아. 
레프 톨스토이는 4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레프 두 살 때 어머니는 막내 여동생이 태어난 지 몇 달 후 죽게 된다. 
어린 시절 레프 톨스토이는 숙모 등 친척집에서 컸고 

청년 때는 도박을 하는 등 방황도 했으며 군입대도 했다.

 

볼콘스키 하우스 (Volkonsky House)

그러다 1862년 (34세), 레프 톨스토이는 지인의 딸인 18세의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이슬레네프 (1862~1910)와 결혼하면서 영지로 돌아온다. 
16살이 어린 그녀는 이곳에서 남편을 대신해 
영지를 관리하고 원고를 정리하는 등 내조에 힘을 쏟았다. 

둘 사이에서 13명(9남 4녀)의 자녀들이 탄생한다. 
다섯 명 (4남 1녀)은 어린 시절에 사망했고 총 8명 (5남 3녀)이 생존했다. 
레프는 1881년 (53세)에 아이들 교육을 위해 모스크바에 집을 사들여 겨울을 보냈다. 
겨울만 보내고 그는 곧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러니 그는 거의 평생 이곳에서 살았다고 해야 한다. 

레프는 영지 개발에 심혈을 기울인다. 
당시 이 영지는 약 5백만 평 (1,600헥타르)에 이르렀다. 
영지 윗 부분에는 고밀도의 원시림과 4개의 연못, 
약 350명의 소작농이 살았으며 농민의 집이 네 군데 있었다. 
할아버지의 사과 과수원을 넓혔다. 
원래 정원의 면적은 4배나 늘어났고 총 5개의 정원이 있었다. 

레프는 오전 7시에 기상 후 공원을 걷는 등 운동을 했고 이후 시간에 글쓰기를 했다. 
곡물 수확기에는 농부들과 함께 밭에서 일했다. 
그는 농부 자녀를 위한 학교를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 영지에는 많은 문화 및 예술가들이 찾아왔다. 
안톤 체홉, 투르게네프, 막심 고르키, 화가 발렌틴 세로브, 일리야 레핀 등. 
톨스토이는 생전에 당대의 누구보다도 더 영향력 있고 존경 받은 인물이었다. 
톨스토이는 1862년~1869년까지 <전쟁과 평화>를 썼고, 
1873년~1877년 사이에 <안나 카레리나>를 집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레프는 이 영지에서 죽음을 맞지 못했다. 
그의 1910년 (82세) 11월 7일, 부인에게 인세를 넘겨주지 않으려고 
10일간 기차 타고 부인 곁을 떠났다가 모스크바 남부의 
톨스토이 역 (옛 아스타포보 역)에서 7일 만에 죽음을 맞이했다. 
시신은 야스나야 폴랴나로 운구되어 묻혔다. 

영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 (2009년 작)을 보면 말년의 생을 들여다 볼 수 있다.
톨스토이 사후 영지의 역사 레프 톨스토이 사후, 미망인 소피아는 정부에 
이곳을 국가가 관리해 줄 것을 차르 니콜라이 2세에게 청원했으나 거절당한다. 
그러자 레프 사후 1년 뒤인 1911년, 소피야는 곧바로 작가의 서재와 침실 등 
2개의 방을 일반 방문객들에게 개방한다. 

1917년, 볼셰비키가 집권한 후 바로 이곳을 사적지로 지정하고 국가가 관리했다. 
맏딸 타티야나가 박물관의 첫 관장이 된다.  
1919년 소피아가 75세로 세상을 떠나자 막내딸 알렉산드라에게 맡겼는데, 
그녀는 공산주의 정부가 싫어서 이후 미국으로 귀화해 버리고 만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자손이 많았으므로 다른 자손들 중 한 명씩을 골라서 관리하도록 했다. 

1921년에는 주립으로 정식 개관하게 된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에게 점령 당한다. 
자택은 독일군의 야전병원으로, 그가 남긴 원고들은 독일군의 땔감이 되는 굴욕을 당한다. 
거기에 레프 톨스토이 묘지 옆으로 전사한 독일 병사들의 무덤을 줄줄이 썼다. 
당시 박물관의 전시물들은 모스크바와 톰스크(Tomsk)로 대피시켰다. 
이후 독소전쟁 후에 모두 원상복귀 되었다. 

볼콘스키 하우스 (Volkonsky House) 인증샷

1921년 6월 이 영지는 국유화되었고 공식적으로 그의 기념 박물관이 되었다. 
처음에는 작가의 딸인 알렉산드라(Alexandra Tolstaya)가 운영했다. 
박물관의 현재 감독은 톨스토이의 증손자 블라디미르 톨스토이다. 
이 박물관에는 톨스토이의 개인 소지품과 영화, 22,000 권의 도서관이 있다. 
부동산 박물관에는 작가의 저택, 그가 농민 어린이를 위해 세운 학교, 
톨스토이의 장식되지 않은 무덤이 있는 공원이 있다.
이 박물관에는 매년 전 세계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마구간

 

마구간

마구간은 지은지 최소한 2백 년 정도 되었다. 
톨스토이는 말 애호가이자 감정가였다. 
포장 마차에는 항상 여행하고 일하는 말이 있었다.

건물 오른쪽에 마차 창고가 있다. 
오늘날 말은 사유지의 살아 있는 세계에서 없어서는 안될 부분이므로 
야스나야 폴랴나는 원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 
오늘날 마구간에는 12 마리의 말과 셰틀랜드 조랑말이 살고 있다. 

 

마구간

마구간

 

농기구 등 재고 창고, 헛간
1890년대에 지어졌다.

 

재고 창고, 헛간

 

[영상] Volkonsky House

 

쿠체르스카야(Kucherskaya) 오두막

쿠체르스카야 오두막은 머슴 일꾼들이 살던 곳이다.
지금은 19세기 농민 오두막의 내부가 온전히 재현되어 있다. 
어린이를 위한 대화형 여행과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내부에서 기억에 남는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쿠체르스카야(Kucherskaya) 오두막 

 

쿠체르스카야(Kucherskaya) 오두막 내부

 

쿠체르스카야(Kucherskaya) 오두막 내부

 

쿠체르스카야(Kucherskaya) 오두막 내부

 

쿠체르스카야(Kucherskaya) 오두막 내부

내부 시설과 당시 농민들의 삶을 자세히 설명해 주는 해설사.

 

쿠체르스카야(Kucherskaya) 오두막 내부

 

쿠체르스카야(Kucherskaya) 오두막 내부

 

쿠체르스카야(Kucherskaya) 오두막 내부

 

쿠체르스카야(Kucherskaya) 오두막 

 

[영상] Kucherskaya 오두막 해설

 

쿠체르스카야(Kucherskaya) 오두막 앞에서 인증샷

 

단조 공장
대장간은 아마도 야스나야 폴랴나에서는 늦게 지어진 건물일 것이다. 
이 건물은 1930 년대에 다용도실로 지어졌다.

 

야스나야 폴랴나 숲길

 

지트냐 (Zhitnya)

1890년대에 지어졌다. 
겨울 동안 건초와 짚을 놓는 데 사용되었다. 
예전에는 탈곡기, 쟁기, 써레, 쟁기가 있었다.

 

이정표

 

톨스토이가 태어난 집은 없어지고 작은 표지석만 남아 있다.

 

톨스토이가 태어난 집이 있었던 장소에 세워진 작은 비석

 

윙 쿠즈민스키(Wing Kuzminsky)

톨스토이가 태어난 집과 쿠즈민스키(Kuzminsky) 건물이 두 개의 날개로 구성되어 있어
윙 쿠즈민스키(Wing Kuzminsky)라 이름하였다.
1859년부터 1862년까지 존재했던 톨스토이의 농민 어린이 학교가 여기에서 문을 열었다. 
2층의 밝은 방에는 교실이 배치되고 첫 번째에는 체조 기구가 있다. 
학교에는 작은 자연사 박물관도 있었다.

 

윙 쿠즈민스키(Wing Kuzminsky)

나중에는 톨스토이의 처제 타치야나 내외가 거처했다.
박물관 전시 기간 동안 윙 쿠즈민스키에는 문학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1990년대부터 이 건물은 톨스토이의 개인적이고 창조적인 삶과 
그의 가족의 역사를 자세히 설명하는 임시 전시회로 사용되었다.

 

윙 쿠즈민스키(Wing Kuzminsky)

현재 윙 쿠즈민스키는 테마별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다. 
야스나야 폴랴나의 포괄적인 투어 일부로 방문할 수 있다.

 

윙 쿠즈민스키(Wing Kuzminsky)
인솔자 김창준 교수의 설명

 

[영상] Yasnaya Polyana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으로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Yasnaya Polyana) 조감 사진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는 레오 톨스토이가 살았던 곳으로
러시아의 박물관이다.  
야스나야 폴랴나는 러시아어로 "빛나는 공터"를 뜻한다. 
툴라에서 남서쪽으로 12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톨스토이는이 집에서 50년 넘게 살았다. 
여기에 있는 모든 것, 책, 그림 등은 진품이다. 
톨스토이 생애의 마지막 해인 1910년의 분위기는 지금까지 여전히 집 안에 보존되어 있다.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외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외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외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외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외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외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인증샷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인증샷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인증샷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인증샷

 

[영상] Yasnaya Poly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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