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4장] 수난의 땅 평북 용천에서 출생

2012/12/08 08:00 김삼웅

 

 

함석헌의 치열하고 파란많은 생애를 예증이나 하듯이, 그가 태어난 이후 한반도 주변의 파고는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갔다. 두 살이 되던 해 영국과 일본이 동맹을 맺고, 용암포사건이 벌어졌다. 러시아가 두만강ㆍ압록강 유역의 삼림 벌채권을 얻고 이를 계기로 한국에 대한 경제ㆍ군사적 침투의 발판으로 삼고자 했다. 용암포는 압록강 유역에서 베어 낸 목재가 모이는 곳이다. 러시아는 용암포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망루를 설치하는 등 군사기지로 만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과 일본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대치하게 되었다.

세 살 때인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그것도 접전이 한반도에서 이루어졌다. 일본군이 서울에 진주하고, 한일의정서가 체결되는 등 일본의 한국 침략이 본격화되었다. 러일전쟁은 어린 함석헌의 정신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직 어린 나이였으나 자기집 사랑채에 다수의 일본군이 머문 것을 지켜봐야 했다. 일본군은 용암포의 아라사(러시아)를 몰아낸다는 구실로 진주하여 한동안 함석헌의 집에 주둔하였다.

함석헌은 뒷날 어른들로부터 당시 일본군의 행패를 듣게 되고, 주민들이 어떻게 일본군과 대처했으며, 총소리에 놀라 달아난 이야기까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일본군과 러시아군이 싸우는 모습의 전쟁놀이를 하면서 자랐다. 어른들로부터 들은 어린 시절 그의 심중에는 외세의 분탕질이 아우라로 자리잡았다.

어수선하고 살벌한 국경 마을에서도 함석헌은 총명하게 자랐다.
별세할 때까지 가졌던 선풍도골의 잘 생긴 얼굴은 타고난 귀골이었다. 미모의 얼굴에 두뇌도 총명하여 첫 돌 전에 말을 다 하고, 여섯 살에 큰 누이와 고모가 공부하는 곁에서 천자문을 익혔다.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다섯 살에 서당 삼천재(三遷 )를 다니다가, 서당이 기독교 학교 덕일(德一) 소학교로 바뀌면서 신식 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 학교는 집안 아저씨뻘 되는 함일형(咸一亨)이 세운 것이다. 덕일소학교는 서당과는 달리 역사, 산술, 지리, 유년필독 등을 가르쳤다. 함석헌이 어린 나이에 신식교육을 받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어린 함석헌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함일형이다. 그가 아명 애놈으로 불릴 때, 항렬자 석(錫)자와 불화 변(火)의 법 헌(憲)자로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불화 변의 헌(櫶)자는 자전에도 없는 글자여서 그냥 법 헌자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함석헌은 1959년 자서전에서 이름과 관련, 다음과 같이 썼다.

당초에는 ‘헌’ 자를 불 ‘火’ 변에 憲을 한 자를 주었다.
석은 항열자요, 정말 내 것은 헌(헌)인데, 한문을 잘 아는 학자인 그가 왜 자전에도 없는 글자를 지어주었던지, 후에 다른 사람들이 그것은 자전에 없는 자라 해서 불 ‘火’를 떼어버리고 憲만을 쓰게 됐다.

내 성격을 미리 알고 뜨거움이 부족한 듯해서 예수께서 시몬에게 베드로를 주었듯이 일부러 불을 붙여주었던 것인지, 혹은 본래 성격대로 되노라고 불이 떨어져 나갔는지 알 수 없는 일이나, 나는 오늘날 불이 그리운데 불은 떨어져 나가고 없다. 이름대로 되는 것이라면 이제라도 다시 잃었던 불 도로 찾아 볼 ‘火’변에 쓰고 싶다.
(주석 4)

함석헌보다 한 해 뒤에 태어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박열(朴烈)은 본명이 박준식이었다.
그러나 서당에 다닐 때 자기는 기질로 보아 스스로 열(烈)이라 쓰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그렇게 썼다. 실제로 그는 이름대로 치렬하게 일제와 싸웠다.

<초의 불꽃>을 쓴 프랑스의 과학철학자ㆍ사상가인 가스통 바슐라르는 초의 불꽃은 현실에서 현실을 초월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본래 모습이라고 분석했다.

“불꽃은 탈 때 하나의 살아있는 실체가 되며, 그 실체는 거기에서 타오르고 환하게 된다. 실로 여러 가지 존재가 불꽃에서 그 실체를 얻고 있다.”
“촛불은 원래 혼자이며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혼자서 꿈꾸는 것, 이것은 인간 본래의 모습이다.”
“불꽃은 하나의 꽃이다. 불꽃은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걸친 불의 다리이며,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끝없는 공전이며, 철학자에 있어서는 형이상학의 아름다운 순간이다.”
(주석 5)

소년 함석헌에게서 불(불꽃)을 연상한 함일형은 범상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농민운동에 앞장서고, 1898년 용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나서 용천부사의 해임을 주장하는 등 선각자였다. 고향에 처음으로 교회를 세우고 함석헌을 기독교에 인도한 것도 그였으며, 신식 체조를 가르쳐 준 것도 그였다. 함일형은 함석헌 일가에 민족주의의 혼을 심어 주었다.


주석
4> 함석헌, <물 아래서 올라와서>, <전집>, 89쪽.
5> 김삼웅, <백범김구 평전>, 30~31쪽 재인용, 시대의 창,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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