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4장] 수난의 땅 평북 용천에서 출생 2

012/12/07 09:18 김삼웅

 

제국주의 열강의 땅따먹기 광풍이 동북아 끝자락까지 세차게 몰려오는 20세기 첫 해 한반도 북녘 용천에서 한 총명한 사내 아이가 태어났다. 한국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함석헌(咸錫憲)이다. 1901년 양력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군 부라면 원성동 마을이다. 당시 사람들은 섬의 생김새가 사자와 비슷하다하여 사점이라 불렀다. 원래는 섬이었으나 오래 전부터 좁은 바닷길을 매축하여 육지와 연결되었다.

아버지 함형택(咸亨澤)과 어머니 김형도(金亨道) 사이에 셋째 아들로 태어난 함석헌은 첫째와 둘째가 출생 뒤에 곧 사망하였으므로 실제로 장남이 되었다. 위로 누이 1명과 아래로 1남 2녀가 더 태어났다. 함석헌의 아명은 애놈이었다. 부모는 둘 다 16세 때에 결혼하였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농부이고, 가문은 벼슬한 선대가 없는 평민이었다. 그래서 함석헌은 스스로 ‘평안도 상놈’으로 자처하였다.

그가 태어난 1901년은 새 세기의 정기를 받아서인지, 한반도에 굵직한 인물이 다수 태어났다. 각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군이다.

우리 귀에 익숙한 1901년생 동갑내기들의 뚜렷한 족적과도 견줄 수 없었다. 예컨대 그의 말투대로 하자면, 춘사 나운규처럼 영화인도 못되고, 사회주의혁명가 박헌영처럼 해방투쟁가도 못되고, 장공 김재준처럼 기독교의 도착화도 실현시키지 못하고, 그리고 천재 시인 이상처럼 자기 몸을 던져 선구적인 시 한 편도 쓰지 못했다. (주석 1)

1901년생 중에 여기에서 빠진 인물이 있다. 약산 김원봉이다. 경남 밀양 출신으로 3ㆍ1운동 뒤 만주로 망명하여 의열단을 조직하고,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폭렬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조선의용대,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등을 역임한 대표적 독립운동가다.

평안북도 서단에 위치한 용천군은 동남쪽은 철산군, 동북쪽은 신의주시ㆍ의주군, 서북쪽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단둥(安東)과 마주보며, 서남쪽은 황해와 접하고 있다.

용천은 예부터 민족의 아픔이 굽이굽이 서린 곳이다. 본래 안흥군이라 불렀으며, 993년 거란의 제1차 침입 때 서희 장군의 활약으로 수복한 강동6주 가운데 한 곳이다.

1231년 몽골의 제1차 침입 때에는 몽골군에게 포위되었다가 항복하여 부사가 포로로 잡혀갔으며, 서북면의 요충이었기 때문에 거란ㆍ몽골ㆍ홍건족 등이 침입할 때마다 성이 함락되는 등의 비운을 겪었다. 수난은 계속되어 1270년 원나라의 동녕성에 속하였다가, 1278년 복구되었다.

조선시대 정묘호란 때에는 이광립ㆍ이립ㆍ김우 등이 용골산성을 끝까지 사수했으며, 병자호란 때는 안극함ㆍ차원철ㆍ장후건 등이 적군과 싸우다가 전사당하고, 1811년 홍경래의 난군에는 용천군이 함락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1895년 지방관제를 개혁하여 부ㆍ군제를 실시할 때 용천군으로 개편되어 의주부에 속하였다. 1896년 전국을 13도로 개편하면서 평안북도 용천군이 되었다. 함석헌이 자랄 때는 홍경래에 관한 구전 설화가 많이 전해왔다. 그는 홍경래를 남달리 흠모하였다.

내가 난 곳은 평안도, 상놈이 산다는 평안북도, 거기서도 용천, 용천에서도 맨 서쪽 바닷가다. 거기를 ‘사점’이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사자섬’이란 말이다. 백두산에서 서남으로 내리닫는 맥이 끝에 와서 천마산을 일으켜서 삭주ㆍ의주ㆍ구성 세 고을의 만나는 곳이 되니, 그 산을 의주, 천마, 삭주 천마, 구성 천마, 소위 삼천마(三千摩)라고 부른다. 거기서 내려와서 의주의 백마산이 있고, 그 백마에서 떨어져 몇십 리 내려오다가 솟은 것이 용골산, 그 아래에는 평지가 계속되어 폭 560리의 살진 들이 열리는데, 그것이 용천군이다.

일망무제라 하고 싶은 마냥한 들이 이어닿아 여름에는 푸른 비단이요, 가을에는 황금바다다. 그러므로 인총(人總)이 배여 그 빽빽하기가 전라도와 같은 곳이다. 사점은 그 끝에 내려가 있는, 길이 십리도 못 되는 조그만 섬이다. 그것이 가장 큰 것이고, 그 부근 십 리 안 팎에 신점, 간염, 삽섬, 구염, 남경하는 졸망졸망한 섬 다섯이 있어 그것을 합해 사자육도(獅子六島)라 하는데, 수 백년 전부터 둑을 막아 육지에 대었으므로 이젠 이름만 섬이지 섬이 아니다. 땅은 살져서 곡식은 많이 나고, 바다의 고기잡이도 잘 되어 살기는 괜찮으나 워낙 교통이 불편한 곳인지라 사는 사람은 대개 가난하고 하잘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주석 2)

인간은 자연(환경)의 산물이다. 함석헌이 태어나기 전이나 후에 그의 본향 용천은 ‘고난의 역사’ 중에서도 유독 수난이 심했던 곳이다. 반면에 일망무제의 바다와 넓은 평야, 수려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

함 선생의 고향은 끝없이 파도치는 흰 물결이 서쪽 하늘에 맞닿는 황해 바닷가, 천마산 줄기의 백마산성 끝자락에 우뚝 솟은 용골산 아래, 여름에는 푸른 비단, 가을에는 황금 물결치는 일망무제(一望無際)의 기름진 평야가 펼쳐지는 곳.

함 선생의 그 한없이 넓은 가슴은 하늘과 맞닿는 황해가 낳은 것이고, 어떠한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 강철 같은 의지는 용의 골격 같이 굳세고 준엄한 용골산이 낳은 것이고, 그 인자하고 온화한 마음씨는 비단같이 펼쳐진 용천 평야가 낳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주석 3)

함석헌의 부모는 1894년에 결혼했다.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던 이 해 8월에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평안북도 철산 가두섬으로 피난하였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모든 재산이 없어지고 폐허상태였다.

아버지는 평범한 소작농이었으나 그림을 잘 그리고, 가구를 직접 만들어 사용할 만큼 손재주가 있었다.
20세 무렵까지 서당에 다니고, 청년이 되어서는 스스로 한의술을 공부하여 인근 마을에까지 소문이 나서 농어민들을 치료해주었다. 아버지는 중년에 기독교에 귀의하여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교회 장로가 되었다. 정의감이 강하고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어서 한의사로 번 돈을 교회ㆍ학교 설립에 내놓았다. 함석헌은 아버지로부터 이런 성품을 타고났다.

어머니는 용천 진고지(진곶) 마을 농부의 둘째 딸이었다. 부모는 역시 소작농이었다. 어머니는 매우 부지런하여 농삿일은 물론 무명베, 삼베, 명주를 잘 짜고, 베틀이 방을 가득 차지하여 ‘장베틀집’으로 불렸다. 50이 넘어서야 한글을 배우고 <성경>을 공부할만큼 정신력이 강하고 인자하였다. 함석헌의 빼어난 정신력은 어머니의 유전자를 이었다. “내 사상의 밑돌을 어머니가 놔주셨다”고 했다.


주석
1> 이치석, <씨알 함석헌 평전>, 35쪽, 시대의 창, 2005.
2> 함석헌, <물 아래서 올라와서>, <함석헌전집 4권>, 한길사. (이후 <전집>표기)
3> 노명식 엮음, <함석헌 다시 읽기>, 82쪽, 인간과 자연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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