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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t.co/ERmwwl04 [Daum블로그][53회] 새 재야단체 ‘전민련’ 조직: 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012/08/22 08:00 김삼웅 김근태는 달라진 변화의 상황에서,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변화하지 않는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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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회] 새 재야단체 ‘전민련’ 조직: 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012/08/22 08:00 김삼웅 김근태는 달라진 변화의 상황에서,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변.. http://t.co/VF6TFqAf

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012/08/22 08:00 김삼웅



김근태는 달라진 변화의 상황에서,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변화하지 않는 군부정권의 향방을 주시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모색하였다. 그는 어떠한 절망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투지를 갖고 있었다.

많은 정치인들이 즐겨 쓰는 말 중의 하나지만 김근태는 유난히 ‘희망’이란 단어를 자주 거론하는 정치인이다. 그가 정치에 입문하기 전인 1995년에 출간한 책의 제목도 <희망의 근거>다. 그런데 익숙한 일상의 언어가 시인의 손을 거치면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되듯이 김근태의 입을 통해서 전달되는 희망은 전혀 다른 감동으로 다가온다. (주석 1)

이승만에 출산되고, 박정희에 양육되고, 전두환ㆍ노태우로 이어진 정치 군부는, 그리고 이들에 빌붙어 실세가 되고 치부에 성공한 보수세력은 전혀 민주화의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1989년 1월 노태우 정부는 헝가리와 수교, 동구 공산권 국가와 첫 국교를 수립하는 등 열린 외교정책을 펴는 듯 하였다. 하지만 반공냉전 의식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김근태는 진정한 민주화만이 통일을 가져오고, 평화통일만이 민중의 생존권이 보장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노태우 군부정권과 타협적인 보수야당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재야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대선과 총선 과정에서 분열 양상을 보였던 민족민주운동단체들을 결속하는 일이었다.

반유신, 반5공 투쟁 과정에서 청년학생운동뿐 아니라 노동자ㆍ농민ㆍ여성 등 기층민중세력의 성장이 있었다. 값진 희생이 따랐지만, 그동안 소수 운동권에 머물렀던 반독재 시민저항운동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노태우 6공 정권에서는 다양한 시민단체가 결성되고 저항운동도 그만큼 튼실해졌다.

한 평자는 전민련의 창립과 관련,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썼다.

전민련은 분열과 무기력에 고개를 돌리고 있던 이 땅 민중들에게 희망과 신심을 안겨줄 강력한 단합된 구국운동 조직이고, 불신과 대립을 깨끗이 청산하고 단결과 투쟁의 길에 나선 모든 애국자ㆍ애국단체들의 합일된 의지의 결실체이며, 각계각층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대중운동발전의 요구에 화답한 조직적 총화이다.

이제 전민련의 건설로 대중운동 속에 확고한 구심이 마련되어 우리 구국운동이 일대 전진을 기하게 되었고, 각계 민중에게는 전민련이라는 민중운동의 견인차, 응원군이 생겨남으로 해서 더욱 날카로운 불패의 투쟁의 무기를 갖추게 되었으며, 미-노태우 독재에게는 자신들의 패퇴와 종말을 앞당길 화약고이자, 저들의 매국적 소행을 가로막을 바위산이 등장한 것이 되었다.
(주석 2)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은 1989년 1월 21일 창립대회를 열고, 상임공동의장에 이부영, 공동의장에 이창복을 선출했다. 민통련의 발전적 해체와 재야ㆍ노동자ㆍ농민 등 8개 전국단위 부문운동 단체와 전국 12개 지역단체 및 200여개의 개별단체가 참여하는 해방 이후 가장 규모가 큰 구국운동조직이라는 거대 협의체였다.

이날 전민련 대의원 총 1,103명 중 726명이 참석하고, 시민ㆍ학생 등 5,000여 명이 참관한 가운데 창립대회가 열렸다. 노동운동 영역 대의원 250명, 농민운동 대의원 230명을 비롯하여 청년ㆍ교육ㆍ종교ㆍ여성ㆍ비판적 지식인 등이 다수 참여했다.

6.29선언 1주기의 ‘정치적 선물공세’의 일환으로 88년 6월 3일, 2년 10개월 만에 가석방으로 출소한 김근태 씨는 대선을 거치면서 민통련이 자중지란을 겪다가 결국 와해되고 말자 다시 운동진영을 결집, 대중투쟁을 펼칠 상시적인 공동투쟁체 건설이 시급하다고 판단, 이부영 씨등 출소한 40대 인사들과 함께 전민련 건설논의를 해나갔다. (주석 3)

전민련은 창립대회의 결성선언문과 사업계획 발표를 통해 대북관계 및 5공청산 등 대내외 정치문제에 대해 제도정치권과는 다른 방향으로 영향력을 적극 행사할 것임을 천명했다.

전민련은 1988년의 3가지 과제를 목표로 제시했다.
첫째, 5공청산과 광주학살 책임자 처단투쟁을 통해 노정권의 동요의 폭을 극대화한다.
둘째, 대중투쟁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정치투쟁으로서의 진전을 위한 반민주악법 개폐투쟁을 전개한다.
셋째, 미국과 노태우 일당의 기만적 북방정책의 본질을 폭로하고, 두 개의 한국 정책을 저지한다.
(주석 4)

전민련은 이와 같은 목표 아래 5공청산과 광주학살 원흉처단투쟁, 반민주악법 개폐투쟁, 조국통일 촉진 투쟁 등을 줄기차게 전개하였다. 전민련은 창립 다음날인 1월 21일 15,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 대학로에서 ‘노태우 정권의 민중운동 탄압 및 폭력테러 규탄대회’를 시작으로, 2월 18일에는 ‘광주학살 5공비리 민중생존권탄압 책임자 노태우ㆍ부시 규탄 국민투쟁 기간’을 선포하여 6공정권의 폭압에 정면 저항했다.

전민련은 2월 27일 회원 30여 명이 “부시 방한 결사반대” 등을 요구하며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서 미대사관 앞쪽으로 시위를 벌이다가 전원이 연행되었다. 3월 14일 전민련 주최로 8개 단체가 연합하여 ‘노정권 퇴진을 위한 공동투쟁본부’ (공투본부) 결성식을 가진데 이어 3월 19일에는 공투본부 주최로 5,000여 명이 한양대 노천국장에서 ‘노태우정권 불신임투쟁 선포대회’를 열고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또 4월 2일에는 노운련ㆍ서총련 소속 회원 등 1,000여 명과 함께 동국대에서 ‘현대중공업노조에 대한 강제진압 규탄대회’를 열었다.

1989년의 대정부 투쟁의 중심에는 전민련이 있었다. 전민련은 시민조직과 노동운동 단체들과 전두환 체포, 5공청산, 노태우 퇴진, 노동탄압 중지 등 핵심 이슈를 제시하면서 6공정권을 압박했다. 여기에는 김근태의 조직력과 정세분석에 힘 입은 바 적지않았다.

그는 “대선시기의 전술적 차이를 전면에 내세우지 말고 중층적 타협을 통해 신속히 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의 이 ‘선 건설 후 내부투쟁’ 논리는 당시 운동의 통합을 요구하는 운동진영 내부의 정세와 결합하면서 강한 설득력을 가져나갔다. 그 후 전국적으로 지역민족민주협의회가 결성되면서 결국 89년 1월 전민련 발족을 가져오게 된다.

그가 출소한 직후인 88년 7월 성남민청련 창립대회에서 ‘80년대 후반 민족민주운동 현황과 과제’ 라는 주제로 연설한 ‘2개의 전선론’은 현재까지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민족민주연구소의 채만수 소장은 “그동안 추상적인 차원에서 전개되어온 통일전선론을 크게 진전시킨 것”으로 평가했다.

그는 이 강연에서 운동상황을 “민족민주전선, 즉 애국전선의 건설을 둘러싸고 진통을 겪고 있다”고 파악하고, 애국전선의 건설에 관한 문제에서 “민족민주운동 전선의 즉각적인 건설을 주장하는 소시민적 포퓰리즘과 국민운동 수준에서의 연합을 주장하는 영향을 경계해야한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2개의 전선론을 폈다.

“현재 민족민주운동은 기층의 민중운동 역량과 재야운동의 일부로 구성되어 있다. 국민운동은 보수야권으로 불리는 제도정치권 그리고 재야운동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 이 양자는 민주화 실천목표와 운동방식에도 큰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의 운동에는 명백한 두 개의 전선이 형성되어 있다. 민족민주전선과 국민전선이다. 이 양자의 관계는 민족민주전선이 기본모순, 국민전선이 현시기 주요모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강연은 향후 전민련의 위상과 발전전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주석 5)

주석
1> 정혜신, <희망의 근거가 됨직한 사람>, <신동아>, 2001년 9월호.
2> 이무명,
<애국민주운동론>, 270쪽, 녹두, 1989.
3> 이재화, 앞의 책, 166쪽.
4>
<민주화운동사연표>, 518쪽.
5> 이재화, 앞의 책, 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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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8장] 6월 항쟁기 외로운 옥중에서

2012/08/21 08:00 김삼웅

 

 

김근태는 1986년 6월 30일 2년 10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경주교도소에서 출소하였다.
가석방이었다. 그가 출소하게 된 데는 정치적 지형변동에 따른 조처였다. 정부는 6ㆍ29선언 2주년의 은사라고 생색을 냈다.

4월 26일 실시된 제13대 총선은 노태우의 민자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면서 여소야대 정국으로 바뀌었다. 김대중의 평화민주당(평민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공화당)의 순위로 3야당이 일정한 의석을 갖고 포진하였다.

정국은 모처럼 야당이 주도하는 가운데 5공 청산과 민주화 추진이 진행되었다.
야당들은 사안에 따라 연대 혹은 합종을 택해가면서 경쟁적으로 정치개혁에 나섰다. 하지만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열린 제24회 서울 올림픽으로 정치 현안은 스포츠 제전에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김근태는 세월의 변조 속에서 모진 고문과 3년여의 옥고로 망가진 건강을 추스르는 한편 다시 행동에 나섰다. 첫 발언은 10월 22일 서울대 민추위위원장 문용식 사건이 고문에 의한 조작이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이었다.

 


문용식과 박문식 등은 1984년 10월 7일 민주화추진위원회(일명 깃발 그룹)를 결성, 문용식이 위원장으로 선출되엇다. 민추위는 하부조직의 건설에 나서 서울대ㆍ연세대ㆍ성균관대ㆍ고려대 등의 민주화투쟁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전국민주화투쟁학생연합(민주학련)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민주학련 소속 대학생들은 11월 14일 민정당 중앙당사를 점거, 농성을 시작하면서 민중생존권 보장과 14개 항의 민주화 조치를 요구했다. 학생들은 또 민정당재집권저지투쟁을 비롯하여 격렬한 반독재투쟁을 벌였다. 공안 당국은 1985년 5월 23일 민족통일ㆍ민주쟁취ㆍ민중해방투쟁위원회 소속 대학생들의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등을 민추위가 배후 조종한 것으로 판단하고, 문용식 등을 체포하여 모진 고문을 자행하였다. 김근태가 이 사건이 고문에 의해 날조되었음을 폭로한 것이다.

김근태가 석방되었을 때에는 민청련은 정치상황의 변화와 주요 간부들의 장기 구속 등으로 거의 활동이 정지된 상태였다. 김근태로서는 안타까운 노릇이었으나 시대 상황의 변화에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5ㆍ3 인천항쟁 이후 주요 간부 구속과 수배로 민청련의 역량은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반면에 6ㆍ29선언으로 독재정권의 폭압적 성격이 약화됨으로써 열려진 공간은 엄청난 대중의 정치적 진출을 가져왔다.

이런 상황에서 민청련은 탄압시기에 보여왔던 민주화운동진영에서의 선도적ㆍ지도적 역할을 유지할 수 없었다.(…) 내부적으로는, 86년 초에 회원들이 대거 탈퇴한데다가 김근태 전의장, 김병곤 전상임위원장을 비롯한 지도부 간부가 장기간 구속상태에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5ㆍ3인천항쟁을 빌미로 한 민통련을 비롯한 민주화운동단체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11월의 건국대 항쟁의 대학생 대량 구속 사태 등 탄압국면 속에서 공개정치투쟁을 표방하는 민청련의 활동 입지가 협소할 수밖에 없었다.
(주석 9)

김근태는 민청련의 쇄락에 실망하면서도 절망하진 않았다.
새로운 희망을 걸었다. 먼저 더 이상 자신과 같은 고문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고문 경찰을 찾아내 세상에 알리는 일이 시급했다. 12월 15일 서울 고법의 제정신청이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근안 전 경감이 수배되기에 이르렀다. 역시 정치지형의 변화때문이었다.

올림픽이 끝나고 정국은 일해재단 청문회를 시작으로 5공비리 청문회로 이어졌다.
노량진 수산시장 비리 사건으로 전두환의 형 전기환과 사촌동생 그리고 전두환의 처남 이창석이 공금 횡령 혐의로 각각 구속되었다. 11월 23일 전두환ㆍ이순자 부부는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뒤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로 유배되었다.

새로운 정치질서가 잡혀가고 전두환이 몰락하면서, 세상의 관심은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와 김대중ㆍ김영삼ㆍ김종필의 이른바 ‘3김’에 쏠렸다. 그리고 반독재 투쟁을 ‘적당히’ 했던 운동권 출신들이 야당에 들어가 ‘투사’가 되었다. 이 무렵 김근태의 심경은 할프단 라스무센의 다음의 싯구대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고문가해자도
다시 일어설 수 없는 몸도 아니다
죽음을 가져오는 라이플의 총신도
벽에 드리운 그림자도
땅거미 지는 저녁도 아니다
희미하게 빛나는
고통의 별들이 무수히 달려들 때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무자비하고 무감각한 세상 사람들의
눈 먼 냉담함이다.
(주석 10)

김근태는 이 해 9월 말 도서출판 중원문화를 통해 고문과 옥중기록을 묶어 <남영동>을 간행하였다. 독재정권의 야만적인 고문실상, 옥중 편지와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에 썼던 주요 논설 등을 실었다. 한국민주화운동사와 고문의 야만성을 폭로한 5공시대의 대표적 고발문학으로 꼽히는 책이 되었다.

이 책은 문익환의 <근태가 살던 방이란다>의 서시에 이어,
제1부 : 무릎을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원한다 ① 예고되고 계획된 구속 ② 인간 도살장 남영동, 그곳에서 있었던 한 맺힌 내력 ③ 서울 구치소 ④ 지식인이여, 법관들이여 ⑤ 나는 처벌받을 수 없다.

제2부:민주화여, 민주화여, 민주화여! ⑥ 이제 나는 다시 일어나 ⑦ 민주주의를 향한 진군

발문 : 김근태 동지를 알자 / 문익환으로 구성되었다.

이 책은 원래 1987년 9월 김근태가 아직 경주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즈음 민청련에서 <김근태 고문 및 옥중기록 - 이제 다시 일어나>란 제목으로 중원문화원에서 출판한 것을 제목을 바꾸어 재간한 것이다. 민청련은 서문에서 “고문이 남긴 육체적ㆍ정신적 폐허상태를 추스르며 다시 깨어 일어나는 한 인간의 희생과 재기의 처절한 과정을 그의 기록을 통해 밝혀내고자” 간행했다고 밝혔다. 서문은 이어진다.

민청련 전의장 김근태 동지는 다른 어떤 점보다 인격적으로 고결한 사람이다. 한 단체의 대표로서, 남편으로서, 두 자녀의 아버지로서 그의 절실한 모습을 이 책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김근태 동지의 이러한 진실성을 통하여 참 용기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주석 11)

주석
9> <6월항쟁을 기록하다(1)>, 247쪽.
10> 할프단 라스무센,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박원순 <야만시대의 기록 2>, 21쪽, 역사비평사, 2007.
11> <이제 다시 일어나>,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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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8장] 6월 항쟁기 외로운 옥중에서

2012/08/20 08:00 김삼웅

 

 

6월 항쟁의 열기 속에서 인재근은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 후보자로 남편과 함께 추천된 사실을 알았다. 그런 상이 있다는 것도 몰랐던 그에게 전혀 뜻밖의 소식이었다.

김대중 선생 비서진들에게서 얼핏 들으니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후보자로 우리 부부가 추천되었다고 하였다. 그 당시 그 상에 대한 정보도 전혀 없었고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미국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추천하는 정도로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어렵게 전화로 김대중 선생께 사양하는 뜻을 전했다. (주석 7)

인재근은 옥중의 남편과 이 상의 수상 여부를 놓고 상의했다. 부부는 미국이 그동안 한국에서 자행한 여러 가지 범죄적 행위에 미국인이 주는 상을 받는 데 대해 거부감이 생겼던 것이다. 분단과 국민의 반대에도 자신들의 이익을 가장 잘 순종해주는 이승만ㆍ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 정권을 지지해주고 “한국민들은 들쥐와 같다”는 따위의 망언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특히 광주학살과 관련 미국의 행위에는 분노가 치밀었다.

6월항쟁으로 따낸 대통령 직선제로 인해 대통령후보 단일화가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되었고, 우리 본부가 우리의 주체 역량과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여 김대중 씨 비판적 지지를 표명할 당시 공교롭게 이 상의 수상자로 우리가 선정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으로 난처한 일이었다.

국내에 이러한 사정도 있었지만 원칙적으로 “미국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하는 문제가 더욱 우리를 어렵게 하였다. 조국의 분단은 누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며, 6ㆍ25전쟁은 왜 발생한 것이며, 그리고 그 이후 현재까지 미국은 우리에게 어떻게 해오고 있느냐에 대해서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동안 간과했었던 많은 사실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주석 8)

김근태 부부는 특히 미국의 광주사태와 관련된 부문에 이르러서는 분노를 삭이기 어려웠다. 곁들여서 ‘인권상’은 자신들보다 훨씬 큰 희생을 바친 동지들에게 돌려져야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 부부는 여러 날 고뇌 끝에 결국 이 상의 수상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미국 대통령후보였던 로버트 케네디를 추모하는 사업으로서 제3세계 인권운동가에게 주어지는 상의 케네디 재단은 비교적인 양심 세력이 이끌고 있어서 이 재단의 일을 연대 지지하는 입장이 배려되었다. 또한 한국 민주화운동에 깊은 관심과 격려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수상을 결정하고도 11월 20일 워싱턴에서 거행되는 시상식에는 참가하지 못하였다.
김근태는 옥중에 있었고, 인재근은 노태우 정부가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해 4월 로버트 케네디 추모사업회에서 이 상을 주기 위해 방한하기로 했지만, 정부는 그들의 비자발급을 거부하여 이것도 무산되었다. 외교적 문제로 비화될 듯 하자 정부는 뒤늦게 이들에게 비자를 발급해주고, 1988년 5월 4일 가톨릭센터 강당에서 수상식이 거행되었다. 김근태는 여전히 옥고중이어서 인재근 혼자 상을 받았다. 만감이 교차되는 수상이었다.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으로 김근태는 국제적인 양심수로 알려지게 되었다.


주석
7> 인재근 강연자료집 <엄마가 뿔났다>, 한반도재단 여성위원회, 54쪽, 2012.
8> 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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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8장] 6월 항쟁기 외로운 옥중에서

2012/08/19 08:00 김삼웅

 

직선제 헌법이 마련되고 대선 일정이 잡히면서 대선 후보가 속속 등장했다.
집권당의 노태우와 야권에서 김영삼ㆍ김대중ㆍ김종필의 이른바 ‘1노3김’이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민주화 진영에서는 야권 후보의 단일화에 노력하고 다수 국민도 이것을 바랐으니, 결국 김영삼과 김대중이 독자 출마를 강행하면서 야권은 분열상을 드러냈다.

재야ㆍ시민단체들도 분열되었다. 후보 단일화와 독자후보 출마문제를 놓고 격렬한 토론과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고, 이념ㆍ노선에 따라 각자도생에 나서기도 하였다. 김근태의 고민은 날로 깊어갔다. 민청련도 의견일치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분열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옥중에서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면서 옥중투쟁을 조직해냈으며 또한 바깥 현실에 대한 관심과 고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6월항쟁을 직시했으며 그후 대통령선거를 둘러싼 운동권 논쟁에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그의 옥중 메시지는 87년 12ㆍ16대선을 앞두고 세 차례 나왔다.
당시 경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그는 부인 인재근 씨가 면회 올 때마다 자신의 입장을 받아쓰게 했다. 10월 16일과 28일, 11월 4일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다. 10월 26일의 첫 메시지에서 그는 김대중 씨를 ‘범국민적 대통령후보’로 추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씨의 비판적 지지 천명으로 그는 출옥 후 상당한 궁지에 몰리게 된다. 김근태 씨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직 당시 어떤 입장이 옳았는가에 대한 평가를 유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앞으로 실천과정에서 그것은 판단될 것이다." (주석 6)

김근태는 대단히 함축적인 발언을 하였다. 양김 중에 자신의 김대중 지지를 두고 “앞으로 실천과정”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김근태의 메시지 때문이라고는 하기 어렵지만 6월항쟁을 이끈 핵심적 재야연합세력인 민통련에서는 회원 투표를 거쳐 압도적으로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정하였다. 핵심재야세력은 김대중을 선택적으로 지지하고 지원에 나섰다. 하지만 5공정권의 각급 부정과 관권동원, 야권후보의 난립으로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기에 이르렀다.

김근태의 실망은 컸다.
5공 폭압세력이 교활한 정치적 술책으로 6ㆍ29를 제의하고, 야권과 재야가 이를 덜컹 받아들이면서 국민의 혁명적 열기가 체제내로 순화되고, 후보 난립으로 군부독재 청산의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는 안타까움이었다.

주석
6> 이재화, 앞의 책, 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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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운산편지58] 다시 분노하라 / 진영우: 참혹한 패배로 끝났다 역사에 죄를 지었다 어찌 죄값을 치를 건가 박근혜대통령 이라니 말이 되는가 이명박 치하의 악몽을 5년 더 이어 간다.. http://t.co/KN0Dswn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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