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장] 왜 김근태를 기억해야 하는가

2012/07/03 08:00 김삼웅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한 가운데,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 영정사진이 놓여져 있다. ⓒ유성호

 

김근태는 흔히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불린다. 그래서 2011년 말 별세했을 때, 생자(生者)들은 입을 모아 그에게 ‘민주주의자’ 라는 헌사를 붙이고, 장례를 ‘민주주의자 김근태 사회장’으로 치렀다. 명색이 민주공화국에서 ‘민주주의자’는 모든 성원에게 주어지는 보통명사일 터인데도 유독 김근태에게 주어졌다. 이 헌사가 돋보이고, 그의 고유명사가 되다시피한 것은, 그동안 한국 민주주의의 파행과 불구성을 말해준다.

그가 성장하여 활동한 기간에 겪은 군부독재 30년은 민주주의가 처절하게 유린되는 반이성, 야만이 지배하는 몰상식의 시대였다. 그 시대에 김근태는 결코 관념적인 민주주의론자가 아니었다. 민주주의의 파수꾼이고 수호자 노릇을 하였다. 그래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게 되고, 그로 인해 긴 세월을 병마에 시달리다가 홀연히 떠났다.

그는 불의에 저항하고 압제와 싸웠다. 청년들을 조직하고 동지들과 연대하면서 바빌론의 철옹성에 불을 질렀다. 그는 용기가 있었고 담력이 남달랐다. 무인(武人)의 기질이 있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때문이었다.

 



1985년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이었던 고 김근태 의원이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살인적인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받았던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 515호 조사실앞에 14일 오후 조화가 놓여 있다. ⓒ권우성

 

짧다고도 길다고도 하기 어려운 64년의 생애, 특히 청년기와 중년시절은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기간이었다. 동시대의 인물들 중에서 그만큼 치열하게 싸우고, 처절하게 육신이 망가진 ‘민주인사’도 흔하지 않았다. 그래서 분신ㆍ투신ㆍ자결ㆍ의문사 등 숱한 의열사들과 같은 반열에서 김근태를 ‘민주화의 화신’ 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김근태에게는 ‘햄릿’ 말고도 몇 가지 별명이 따랐다. ‘공소외(公訴外)’ ‘국제신사’ ‘김진지’가 그것이다. ‘공소외’는 독재시대 조영래ㆍ장기표ㆍ심재권 등과 반정부 시위를 도모하다가 이들은 체포되고 용케 피신했을 때 검사의 기소장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독립운동가 출신 백봉 나용균 선생을 기려 제정된 ‘백봉 신사상’의 단골 수상자일만큼 언행이 신사적이다. 일반적으로 투사와 신사는 잘 어울리지 않지만 그에게는 이것이 가능했다. 독립운동가 중에 몽양 여운형과 우사 김규식은 투사이면서 신사의 이미지를 갖는다. 어느 시인의 표현을 차용하면,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은 아름답다 / 그대 내면이 아픔으로 꽉차서 / …” 내면이 아픔으로 꽉 찬 김근태는 투사와 신사의 모습이 불편하지 않게 공존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는 세속의 KS출신에 민주 투사이면서도 뽐내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험한 말이나 함부로 말하는 법이 없었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진중하고 소박하고 겸손하고 진지하였다. ‘김진지’ 의 별명은 ‘햄릿’과도 연관이 닿는다. 행동하지 않는 진지함이란 자칫 햄릿이 되기 쉽지만, 누구도 그를 일러 실천성 없는 관념론자라 말하지 않는다.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장례위원을 맡은 최경환 김대중평화센터공보실장이 3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서 지난 1988년 9월 3일 서남 민청련 창립대회에 참석한 고인의 사진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은 고인이 창립대회에서 민중운동의 진로에 대해 강연하는 모습). ⓒ유성호

박정희가 짓밟은 헌정을 다시 짓밟고 광주학살을 통해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5공의 독기가 시퍼렀던 1983년 김근태는 공개적으로 살인 정권에 도전장을 보냈다. 민청련의 조직이 그것이다. 민청련은 5공체제 등장 이후 최초의 공개적인 반정부 청년조직이었다. ‘김진지’와 그의 동지들은 오랜 진지한 사유 끝에 민청련의 상징으로 두꺼비를 내걸었다. 양서 동물로서 독성이 강한 두꺼비는 뱀에게 잡히면 죽지만 뱀 역시 두꺼비의 독성 때문에 죽는다. 하지만 두꺼비 새끼들은 그 안에서 뱀을 자양분으로 자란다.

실제로 민청련은 5공이라는 뱀파이어에게 치명타가 되었다. 그 대신 독사의 뱃속에 들어간 김근태는 남영동의 지옥에서 오랜 ‘짐승의 시간’을 보내어야 했다. 일찍이 죽음을 대면했던 사람이다.

그는 민족모순과 시대모순이 활개치는 시절에 젊음을 보내면서, 그리고 ‘제도적 약탈’에 민중의 삶이 고통받는 시대를 살면서 뜨겁게, 불꽃같이 저항하였다. 작은 체구에서 불같은 열정이 치솟았다. 혁명가들의 생애가 그렇듯이 독재시대 그의 삶에는 비장감이 서렸다.

김근태는 3선 국회의원, 원내대표, 당대표, 보건복지부 장관 등 정계에 투신한 이래 세속적인 출세를 하고, 정치적으로 민주화를 다지는 큰 역할을 하였다. 참여정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서 노인요양보험을 제정하고 암환자 진료의 본인부담률을 10%로 낮추는 등 민주주의, 통일 등 거대 담론과 함께 서민들의 복지에도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보였다. 그는 본디 서민출신이고 서민과 함께 살아왔다.

하지만 그의 꿈이 채 영글기도 전에 ‘민간 독재자’가 나타나서 역사를 87년 이전 체제로 되돌리고, 그는 병마에 쓰러졌다.

김근태는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다가 2011년 12월 30일 눈을 감았다.
송건호ㆍ리영희 등이 겪었던 그 증상이었다. 체포 26회, 구류 7회, 5년 6개월에 걸친 두 차례의 투옥과 숱한 가택연금과 수배 …. 망국기 독립운동가들이나 겪었던 험난한 길을 그는 해방된 나라에서 겪게 되었다.

김근태는 대단히 겸손하고 성실한 품성이었다. 공사 생활에서 깨끗하고 정직한 정치인이었다. 지극히 가정적이고 서민적인 인물이었다. 그만한 정치적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재산을 모을 줄 몰라 부인은 항상 생활에 쪼들리고,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뒤에는 그 흔한 자동차 한 대 굴리지 못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였다. 그는 야권의 누구보다 개혁성이 강한 진정성의 지도자였다. 장준하를 닮은 데가 많았다. 그는 어디서나 허투루 말하지 않고, 야당 정치인으로서 언론플레이용 강성 발언도 함부로 하지 않았다.

그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면서 의회주의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진짜배기 민주주의자였다. 이승만으로부터 군부독재 그리고 민간독재에서 신줏단지처럼 모셔온 국가보안법 등 악법을 폐기하고, 외세가 갈라놓은 조국의 분단을 이어보려는 큰 꿈을 간직했던, 우리 정계에서 흔치 않은 한반도의 미래를 구상하는, 진정성의 정치인이었다. 그러던 그는 “2012년을 점령하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등 북아프리카ㆍ중동의 아랍국가에서 민중들이 독재자와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을 때, 반독재 민주화의 ‘원조(元祖)’ 격인 한국에서는 ‘민간독재’가 극성을 부렸다. 여기에 독재자 이승만과 박정희의 망령을 불러들이는 ‘초혼제’가 그치지 않았다. 이승만의 거대한 동상이 다시 세워지고, 박정희의 호화판 기념ㆍ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경상도 어디선가는 ‘전두환공원’이 만들어졌다.

벤 알리(튀니지 전 대통령), 무바라크(이집트 전 대통령), 카다피(리비아 전 대통령)는 온갖 만행을 저지르다가 분노한 시민들에게 쫓겨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비슷한 시각, 한국에서는 60여 년 전과 30여 년 전에 죽은 독재자들의 망령이 부활하는 모습을 병상에서 지켜보면서 김근태는 “그동안 헛 살아오지 않았는가!” 라는 자괴감을 갖게 하고,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김근태는 “2012년을 점령하라”는 피울음을 유언처럼 남기고 갔다. 그리고 지역구민들은 그의 ‘바깥사람’ 인재근을 의회로 보냈다. 김근태의 부음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많은 국민이 때이른 그의 죽음을 안타까와 했다. 그의 많은 동지와 후배들이 빈소에서, 영결식장에서 고인의 유지를 잇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자 시몬 발리바르는 조국해방전선에 나서면서 선서하였다.

“나 자신의 명예와 하나님의 이름과 조국의 이름으로 맹세하노니, 내 마음과 팔뚝은 스페인의 권력이 우리를 속박한 그 사슬을 깨뜨릴 때까지 한 시도 쉬지 않을 것이다.”

김근태의 <남영동> 표지 ⓒ중원문화

남한의 반독재 민주주의자 김근태는 감옥에서 다짐하였다.

“지나온 그 짙은 어둠은 어렴풋하게 느껴진다오. 잠속에서 꿈속에서 짓눌려 오는 공포로 되살아나곤 하는구려. 그때는 숨을 몰아쉬어 방어의 채비도 서두르게 되고, 윤동주 시인의 맑은 눈물이 스며있을 듯한 벽에 기대어 밤하늘의 별을 끌어안고 다짐을 하기도 한다오. 이제 나는 다시 일어나 걸어갈 채비를 해나가고 있는 중이오.”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지도자 문익환 목사는 1980년대 중반에 이미 <김근태 동지를 알자>고 광야에서 목메이게 외쳤다. 아직 대중이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한 시점이다.

김근태 동지는 이제 나이가 겨우 마흔을 갓 넘었지만 그는 이미 우리가 깊이 알지 않으면 안 될 사람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80년대 민족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나아가 90년대 민족사를 구상하고 전망하는 데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에 그치지 않고 이미 그는 민족사의 핵심에 서 있고, 앞으로도 그는 그 핵심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라는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지난날의 투쟁 때문만이 아니다. 지난날의 투쟁을 미루어 앞으로 전개될 민족사에 그가 담당할 몫을 생각하면서 나는 우리가 알아야 할 미래의 인물가운데 그를 첫 손에 꼽지 않을 수 없다. (주석 6)


주석
6> <김근태씨의 고문 및 옥중기록 남영동>, 277쪽, 중원문화, 1987.(이후 <남영동>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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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다시 생명의 불씨를...

 

내가 살고 있는 감방에 창이 두 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바깥마당으로 열려져 있지.
북동쪽을 향한 창문이어서 지난 추운 겨울 내내 햇빛과는 서로 엇비켜 서 있는 꼴이었소.
해는 떠서 아침을 먹을 녘까지만 창틀 옆 변소 담벼락을 비추다가 이내 그늘 속으로 내 방 창문을 묻어버리곤 했소.
해서 더욱 얼어 있었고 그 위를 회색빛 우울과 바람이 서성거리고 있었다오.
용기를 내서 창문을 열었다가도 이내 닫아 버리곤 했다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창문은 나에게 설레임으로 다가왔소.
저 고대하는 우리들의 희망을 향한 발돋움대이기도 하고, 열려진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이기도 하기 때문이요.
때로는 울적함을 노래에 실어 날려보내기도 하고, 저 아랫배로부터 토해져 나오는 짐승같은 신음소리를 쏟아내는 나의 창문이 되었다오.
지금 나에게는 꽤 중요한 것이 되었소.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작년 11월말 이후였다오.
그 전 두어 달 동안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뿐 아니라 불필요하게 간섭해 오는 존재였다오.


내가 있었던, 또 지금 내가 있는 방들은 정신질환자들을 수용하는 곳이었소.
앞뒤의 창들은 비닐로, 아스테이지로 완전히 밀봉되어 있었소.
조그만 구멍들이 뻥뻥 뚫린 철판을 대어 어두컴컴 했었소.
바깥에서 이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상당한 주의력을 집중해야 가능한 일이었고 뭔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분위기였소.
그 안에는 흉츳스런 것이 갇혀 있어야 마땅한 일이었고 경멸받아서 마땅한 존재로서 말이오.


작년 9월말 처음 이곳에 내던져졌을 때 난 이러한 것에 흥미나 관심이 전혀 가지지 않았다오.
아니 주의를 가질 기력이 나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오.
오직 필요한 것은 컴컴한 짙은 어둠과 외부의 모든 자극으로부터의 차단, 그것이었다오.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폭력과 그로 인한 고통으로부터는 어느정도 비켜설 수 있게된 것이었으나,

더욱 깊어져 가는 마음의 상처, 나는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오.
그냥 정신적 위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절박하였소.

 

어떤 와해, 버텨가는 것의 종착역에 이르러 가고 있었다고 하는 편이 보다 정확할 것이요.
나는 내가 이제 황폐함 속으로 밀려 떨어져 쓰러지겠구나, 이러한 것을 뻔히 들여다보면서도 속수무책이었던 것이오.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어 무너져 내리는 곰 같은 신세였소.

컴컴한 동굴 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한편으로는 굴 입구에 나타날 수상쩍은 적을 경계하면서 상처가 아물도록 자꾸 혀로 핥는 것이었다오.
그래도 나는 안심이 되지않아 이불 속으로, 이불 속의 컴컴함으로 더욱 기어 들어갔다오.

오감도 속의 이상(李箱)처럼 나는 점점 이상해져 갔다오.


아, 이때 나는 정말 누군가의 체온, 그것을 갈망했다오.
인간의 목소리, 사랑이 담긴 그 눈빛을 나는 고대했던 것이오만 다 소용없는 일이었소.
상처를 확인해 나가는 완화된 형태의 적의만이 순간순간 번득이는 것이었소.
그러나 구원은 나에게, 나에게 있었다오.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부터 구원은 나타난 것이었소.
그것은 마루 밑바닥으로부터였소.
그곳에서 사랑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오.
애정이 넘쳐흐르는 코 먹은 소리였다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쥐들의 사랑이었소.

 

오. 쥐가, 쥐의 그 목소리가 나의 구원이었소.
그러면서도 한편 나의 이성은 주저주저 하였소.

쥐는 나에게 이런 것이었소.
쥐약 먹고 골목길에 나자빠져 시뻘개진 창자가 툭 튀어나온 채 길바닥에 내던져 있는 것이거나,

무서운 전염병을 옮기는 페스트처럼 파괴와 죽음의 그림자였다오.
미키 마우스같은 영리함은 우리들의 감수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고, 아마 누구나 이 점은 나와 비슷할 것이오.
그래도 이성은 살아서 이것은 뭐 이상하고 섬찍한 일인 것 같다고 나를 끊임없이 제동걸려고 했지만 제껴 버렸소.
내가 상식세계 그 바깥으로 쫓겨나 있던 그때 이성의 힘은 약합디다.


가슴에 다시 생명의 불씨를 살려 내는 것은 이성이 아니고, 사랑의 눈빛과 목소리일 뿐이오.
사람의 사랑이 봉쇄되어 버렸던 나에게는 그나마 이것은 크게 다행한 일이었소.
이렇게 막상 쓰다 보니까 뭔지 좀 어색해지고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그 때는 정말 사실이었소.
그리고 나의 희생에 큰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오.
저희들끼리 나눈 쥐들의 그 사랑이 말이오.


그리고 참 인재근씨가 계속해서 넣어준 과일과 우유, 음료수, 이것도 나에게는 큰 용기를 주었소.
그 때 나는 별로 무엇을 먹고 싶거나 설사 어느 것을 먹었어도 소화해 낼 능력이 없었지만 이렇게 나를 기억하고,

이 물건들을 통해서 확인해 주는 그 손길이 눈물겨웠소.
거기에서 내가 아는 냄새를 맡으려고 킁킁대기고 했고, 혹시 체온이 남아있지는 않을까 싶어 자꾸 만져보기도 했다오.
모두 빼앗겨 버렸던 당시의 나는 무엇인가를 소유하고도 싶었던 것이오.
이것을 채워주었던 것이지.

인재근씨, 당신이 말이오.


어쩌다가 하루 걸러서 이틀이 되고, 사흘이 그냥 지나면 나는 불안해졌던 거요.
잘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요.

하지만 당시의 나는 정말로 버려져 있었던 것이오.
돌이켜보면 나 스스로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오.


또 다음에.


(1986년 3월 11일, 서울구치소에서 부인 인재근씨에게 보낸 편지)


김근태 평전/[1장] 왜 김근태를 기억해야 하는가

2012/07/02 08:00 김삼웅

 


지금까지 한국에서 실시해온 각종 선거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계층은 기권을 많이 하고, 부자들은 투표에 적극 참여하는 편이다. 그리고 가난한 계층에서는 부자 정당(보수정당)을 더 선호한다는 최근의 여론조사도 나타났다. 그래서 부자들의 대변자가 다수 당선되는 역설이 진행된다. 앞의 대학생들처럼 ‘민주화의 화신’과 ‘고문의 화신’을 환치시키는 경우가 낯설지 않았다. 이를 소급하면 친일파가 ‘건국의 주역’이 되고, 현재화하면 독재세력이 민주인사들을 ‘종북주의자’로 내모는 꼴이다.

김근태가 그토록 혹독한 고문과 끝없는 감시, 정보기관의 용공조작과 족벌신문들의 흠집내기에도 정신적으로 망가지지 않고 버틴 데에는 역사에 대한 낙관때문이었다. 앞의 ‘남은 자’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그는 민중(국민)을 믿었고, 역사의 진보를 확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세월 동안 그가 겪은 고통, 특히 육신의 고통은 필설로 다하기 어려웠다.

최후진술을 통해 밝힌 고문의 한 대목이다.

…잠을 못 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밥을 굶긴 것도 절반쯤 됩니다. 고문할 때는 밥을 주지 않는데, 고문을 하지 않을 때도 밥을 주지 않아 심리적인 압박과 고문이 다가오고 있다는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델시가방에 고문도구를 들고 다니는 건장한 사내는 ‘이재문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셔져서 병사했다. 너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고문대 위에 서줄 테니까 그때 네가 복수해라’ 이런 참혹한 얘기를 하며 동물적 능욕을 가했습니다.

제 생식기를 가르키며 ‘이것도 잎이라고 달고다녀? 민주화 운동을 하는 놈들은 다 이따위야!’ 하면서 깔아뭉개고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고문할 때는 온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머리와 가슴ㆍ사타구니에 전기고문이 잘되게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했습니다. 처음에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하며 전기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와 이때 마음 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절감했습니다.
(주석 3)

여기서 나오는 ‘이재문’은 남민전사건에 끌려가 고문 당해 죽은 사람을 말한다. 숱한 사람이 저들의 고문으로 죽거나 불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우리 애국자들이 겪었던 고문과 비슷했다. 이승만이 친일파를 중용하면서 일제의 고문 기술자들이 살아남고, 박정희ㆍ전두환 시대에는 그 후예들이 ‘고문기술’을 전수받았다. 다음은 1912년 ‘105인사건’ 당시 심한 고문을 당했던 선우훈의 기록이다.

네 놈이 밤낮 30여일간 혹형을 계속했다. 묻는 말을 부인할 적마다 네 놈이 달려들어 때리고 찼다. 두 엄지손가락을 포승으로 결박하고 한편 팔은 앞으로 돌려 어깨위로 올리고 한편 팔은 뒷등으로 돌려 두 손이 서로 닿을 만큼 하고 매어다니 몸이 오척 가량 공중에 달렸다. 두 놈이 두 자 가량 되는 대막대기 두 개를 마주잡고 옆구리에서 허리까지 쭉쭉 훑드니 몸이 두 동강이 되는 듯 하체의 힘은 쭉 빠지고 전신의 기력이 없어진다. 다른 놈이 채찍으로 머리부터 다리까지 숨쉴 틈 없이 난타하니 땀은 낙숫물 같이 쏟아지고 호흡은 하늘에 닿고 가슴에는 불이 붙고 코에서는 불길이 훅훅 쏱아진다.

금시 목숨이 끊어질 듯 사지가 떨리고 눈에는 안개가 피어오르고 가슴이 터질 듯하다. 이러기를 약 20분 만에 전신은 동태같이 얼고 감각도 없어졌다. 눈은 곧아지고 혀를 빼어 물고 숨소리가 사라지자 이 때는 맥박도 끊어져 죽는 것 같이 되는 때라 한다.
(주석 4)

1988년 케리 케네디 대표로부터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수여받은 인재근씨와 자녀들. (출처 - 김근태 블로그) ⓒgt

일제가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붙잡아다가 혹독한 고문을 자행하고, 일본군출신 박정희 정권과 그의 충복 전두환ㆍ노태우 정권은 수많은 민주인사들을 체포하여 잔인한 고문을 하였다. 그 중에서 김근태는 가장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하수인은 ‘고문 기술자’로 불린 이근안이었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 한국의 대학생 중에는 김근태와 이근안을 분별하지 못하고, 6월항쟁과 김대중ㆍ노무현 민주정부 10년을 거친 뒤에 나타난 이명박 정권에서는 철거민들이 경찰의 공격으로 불에 타서 숨지고, 대통령의 측근들이 국무총리실에 아지트를 설치, 민간인을 사찰하는 야만의 세상으로 되돌아 갔다. 전두환이 육군사관학교에서 사열을 받고, 하나회출신이 국회의장이 된다. 독재자의 딸은 집권당의 유력한 대통령후보이고, 5공의 대표적 조작시국사건인 ‘학림사건’의 판사는 집권당 대표, 배석판사는 헌법재판소 소장이 되었다. 역사는 가끔 반복되기도 한다지만, 이처럼 잔혹사가 단기간에 되풀이되기도 쉽지 않을 것이었다.

김근태는 5공의 폭압 속에서도 기죽지 않고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조직하여 전두환 세력과 전면에서 싸웠다. 1983년의 민청련은 1919년 만주 길림에서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의 정신을 닮았을 것이었다. 일제가 그랬듯이, 5공 정권의 보복은 혹독했다. 김근태는 치안본부 대공분실과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살인적 고문으로 ‘지옥’과 대면하게 되었다. 그래도 꺾이지 않고 옥살이 끝에 출감해서는 다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을 결성하여 청년 민주화운동을 주도하였다.

김근태는 감옥에서 부인 인재근과 함께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갇힌 몸이라 수상은 뒷날로 미뤄졌다. 그는 노태우 정권에서 또 체포되어 2년여의 옥고를 치뤄야했다. 그 시대에도 동기생 중에는 고시를 하여 법관이 되거나 5.6공에 참여하고, 선량이 되기도 하였다.

1985년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그의 지명도를 사서 김영삼이 종로 출마를 제의했으나 “지금은 군부독재와 싸우는 재야의 결집된 힘을 약화시키고 개인적 지위상승으로 그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때 국회의원이 되었으면 5선, 6선은 따놓은 당상이 되었을 것이고, 정계의 거물로 성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나설 때와 머무를 때를 알았고, 어느 때에 어느 쪽에 서는 것이 정도인 지를 알았다. 백범 김구의 “정도냐 사도냐”를 늘 가슴에 새겨왔다.

그는 뒤늦게 정권교체와 정치혁명을 꿈꾸며 정치에 참여했다.
1991년 출감했을 때 김대중이 신민당의 부총재를 제의하여, 44세에 정계에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원외의 부총재, 그것도 임명직 부총재의 지위는 별로 힘을 쓰기가 어려웠고, 성격상 ‘정치적’이지도 못하였다. 한국의 정계에는 여야를 불문하고 정치보다는 정략에 능숙한 정상배들이 들끓었고, 정도보다는 사도가 정치의 능력으로 평가되었다. 더욱이 그가 정계에 입문했을 때에는 5공세력과 일부 야당이 야합한, 3당 야합 세력이 판치던 시절이었다.


김근태는 도전 끝에 제15대 국회의원이 되고, 이후 집권당의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서기도 했으며, 참여정부에서는 보건사회부 장관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그가 별세했을 때 어느 신문의 사설처럼 “정치인으로서 김근태는 많은 대중적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권력 정치나 심지어 너무 진지해서 탈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대신에 그는 정치개혁을 위해 과감하게 행동했다. 정치권에서 그는 몇 안 되는 존재였다.” (주석 5) 김근태는 ‘정치공학’에는 서툴렀으나 진정성 있는 정치인의 길을 걸었던 정치인이다.

김근태는 정치에 입문하고서도 도덕성과 순결성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영혼’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마키아벨리즘이 판치는 한국의 정치판에서 ‘영혼을 지키면서’ 정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찍이 독립운동가로 <사상계> 발행인이었던 장준하도 정치에 뛰어들었다가 좌절을 겪어야 했던 그런 길이었다. 한마디로 김근태는 정치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순결한 지성인이었다.


주석
3> 김근태, <무릎을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원한다>, 1심 최후진술.
4> 김삼웅, <일제는 조선을 얼마나 망쳤을까>, 65쪽, 사람과 사람, 1998.
5> <한겨레> 사설, 2011년 12월 31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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