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1]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전의장 김근태 제1차 공판기록

 

 

"무릎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

 

 

일 시 : 185. 12. 19(목) 오전 10시

장 소 : 서울 지방법원 118호 법정

 

 

재판장 : 서성 부장판사

변호인 : 홍성우, 김상철, 이돈명, 황인철, 장기욱, 조준희(이상 참석자), 신기하, 목요상

담당검사 : 김원치

 

 

민청련 전의장 김근태씨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등 사건 첫 공판이 19일 오전 10시 서울형사지법 합의 11부 심리로 열렸다.

공판은 재판부의 인정심문에 이어 변호인들이 방청 제한을 항의하는 바람에 여러 차례 중단되는 사태를 빚었다.

 

 

인정심문이 끝난 후 변호인단의 장기욱 변호사는 "재판공개원칙은 절대로 필요하며 확신범이나 정치범인 경우 더욱 그러하다"고 말했고,

김상철 변호사는 "재판공개는 가족만 방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방청을 원하는 누구에게나 방청의 기회를 주는 것이므로

20 여 명에 이르는 교도관들을 내보내고 차라리 일반인들의 방청을 허용해야 한다"고 재판부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 때 방청석에서 누군가가 "김근태씨의 부인도 방청제한으로 이 자리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고 항의하였다.

 

 

이어 김원치 검사가 5분 가량 공소사실 요지를 낭독하는 동안 방청권을 얻지 못해 법정에 들어오지 못한 가족, 친지, 민주단체인사,

민청련 회원 등 30 여 명은 법정 입구에서 출입문을 손으로 치며 "김근태, 재판받지 말라!"고 외치기도 했다.

 

 

이때 김상철 변호사는 "재판부기 공판에 앞서 방청객 수를 예정해 방청을 원하는 사람 모두가 방청할 수 있도록

큰 법정으로 장소를 옮겨야 한다"고 해서겨우 들어올 수 있었다 (5분간 휴정).

 

 

변호사 : 기소된 후 20 여 차례에 걸친 피고인 접견신청을 했으나 출정 등의 이유로 접견이 거부되어

첫 공판 10일 전인 12월 9일에야 첫 접견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재판을 충분히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재판에 들어가기 전 그동안의 이러한 절차상의 문제에 대해 재판부에 두 가지 이의를 제기합니다.

 

 

피고인에 대해 출정이라는 이유로 접견이 금지된 것이 실제 검찰청으로 출정을 해서 그런지와

기소된 이후에도 출정한 것이 타당한지 먼저 충분한 사실의 조회가 있기를 요구합니다.

 

 

검 사 : 경찰조서의 20개 항의 조사사실 중 피고인의 진술거부로 인하여 9개항 만을 기소할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 11개항을 조사하기 위해 기소 후에도 피고인을 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변호사가 구치소에서 피고인을 접견하기를 원했다며 출정과 겹치지 않도록 검사에게 요청할 수도 있었는데

한번도 그러한 요청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변호사 : 접견 허락을 검사에게 받아야 된다는 이야긴데 지금까지 그러한 전례가 과연 있었습니까?

또한 일반적으로 기소된 후에 검찰조사를 받기 위해 출정하는 것은 상례가 아닙니다.

 

 

기소 후 계속 피고인을 조사한 것은 기소된 사실이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기소 이후에 검찰조사를 목적으로 출정을 계속시킨 것은 공소권의 남용입니다.

공소의 제기가 수사 절차상에 문제가 있었을 때는 재판 자체가 무효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절차문제를 먼저 처리함으로써 이 재판 자체가 성립될 수 있는지 여부를 확인해야 합니다.

 

 

재판장 :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사실 여부에 대해 피고인이 직접 진술할 수도 있습니다.

우선 피고인이 재판에 들어가기 전에 재판진행에 대하여 피고인의 의견을 진술하시오.

 

 

김근태 : 지금 검찰과 변호사 간에 있었던 공방에 대하여 본인이 자세하게 증명을 한다면 보다 더 좋은 증명을 할 수 있겠지만,

이것보다 더 급박하고 현존하는 위협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본인은 지난 9월 한달 동안 남영동에 있는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참혹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검사 제지) 본인의 이 사건은 지난 9월 한달 동안 남영동에서 있었던 비인간적이고, 불법적인 고문에 의해

그리고 동물적인 능욕과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생명에 대한 위협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진실이 밝혀지고 사법적 정의가 이루어지고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본인에게 가해졌던

참을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이러한 고문이 조사되고 색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본인은 당 재판부에 본인에게 가해졌던 고문의 경위에 대한 조사를 요청합니다.

 

 

그 다음, 9월 한달 동안 가해졌던 고문의 후유증이 현재 본인에게 상당한 정도로 남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보행이 불편하고 머리가 대단히 아프고 등이 아픕니다.

소화가 되지 않고 몸의 균형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것은 이러한 한달 동안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본인에게 가해졌던 정신적인 상처입니다.

본인의 인간적인 자존심과 주체성은 산산이 부서지고 찢어졌습니다.

동시에 인간에 대한 신뢰와 희망은 짓밟혀졌습니다.

이것이 심각한 후유증으로 지금도 남아 있고 이것이 당 재판부에 조사를 요청하는 두번째 이유입니다.

 

 

세번째 이유는 본인이 변호인을 만난 것이 재판 시작일에서 불과 열흘 전 밖에 안됩니다.

이것은 방어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일 뿐만 아니라 본인에게 가해졌던 용서할 수 없는 고문행위를 은폐하려는 기도였습니다.

 

 

9월 26일 기소가 된 후 10월 초순 내지는 중순 쯤 변호인이 접견을 요청할 시기에 검찰측은

여러차례에 걸쳐 오후3시30분 내지 5시에 출정을 요구해왔습니다.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은 출정을 나갔을 때 검찰관을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돌아온 경우가 네 차례나 있었고,

또한 검찰청에 도착했을 때 검찰관이 없는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과 당시의 여러 사정을 미루어 보아 이것은 본인에게 가해졌던 고문의 흔적,

그것을 은폐하려는 기도가 검찰과 정치권력 사이에 긴밀한 연결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임이 명백했다고 보여집니다.

 

 

더구나 마지막으로는 이러한 은폐기도와 더불어 본인에게 가해지고 있는 안전에 대한 위협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지난 9월 남영동에서 고문을 받을 때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어지러운 듯 난간을 붙들고 숨을 몰아쉼)

담요 위임에도 불구하고 발뒤꿈치가 짓뭉개졌습니다.

그 발뒤꿈치 상처가 딱지로 아물면서 지난 10월 말 내지 11월 중에 딱지가 떨어졌습니다.

 

 

이 딱지를 본인은 당 재판부에 증거로 제시하기 위해 보관해 왔습니다.

지난 12월 13일 오전 4시경 이돈명 변호사, 목요상 변호사, 조승형 변호사 세 분이 접견을 오셨길래 하도 반가와서,

그리고 형사소송법에 공판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자유롭게 수거할 수 있다는 규정을 생각해서 세 분에게 보여드리고

그것을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교도관 세 명의 제지에 의해서 이것이 전달되지 못했고 예측했던대로 본인이 병사에 돌아가자마자 서울구치소

보안과장 송선홍의 지휘 아래 10 여 명이 달려들어서 불편한 본인의 몸을 항거불능 상태로 만들어 놓고 그것을 탈취해갔습니다.

본인도 "이러면 증거인멸의 죄에 해당한다"고 주지시키고 또한 "이러지 말라"고 애원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증거인멸뿐만 아니라 본인의 안전이 아직도 심각하게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재차 말씀드립니다만 본인에게 가해졌던 고문행위에 대해서 명백하고 엄정한 조사를 요청합니다.

 

 

이제 간략하게 9월 한달 동안 남영동에서 본인에게 가해졌던 고문내용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때 검사가 제지하고자 이의신청을 하였고 이에 대해서 방청석에서 '놔 둬, 도둑놈들' 이라고 아우성이 터짐).

지난 9월 한달 동안 참혹한 고문행위에 대해서 이제 간략하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본인은 이 기억을 되살리며 치떨리는 분노와 굴욕감을 느낍니다.

 

 

우선 남영동 치안본부에서 본인에게 요구했던 것은 '항복'입니다.

항복을 받기 위해서 깨부수겠다고 이야기했고 또한 그와 같이 했습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더 많이 깨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두번째는 국가보안사건과 관련된 본인의 사건과 같은 경우에는 신체적 한계에 부딪치게 하여, 좀더 일찍 체념을 주기 위해서,

그리고 본인에게 자신을 포기할 계기를 주기 위해서 고문을 할 수밖에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세번째는 새로운 사실에 대한 신문이 시작될 때면 언제나 고문으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네번째는 본인을 고문대 위에 올려놓고 고문자들이 요구하는 것을 암기시키고 학습시키고 복습을 시켰습니다.

 

 

본인에게 가해졌던 고문은 준비되고 계획되고 의도된 것이 분명합니다.

(지친 듯 잠깐 중단함) 이러한 과정에서 고문자들이 본인에게 요구했던 것은 첫 번째로 폭력혁명주의자인 것을 자백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본인의 사상이 사회주의자다.

세 번째로 민청련이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첫 깃발을 80년대 이후에 올렸고. 그리고 각계각층에 작용하는 선과 인물을 대라.

다시 말하면 본인이 한국의 민주화운동, 반군사독재운동에 있어서의 지휘자, 슈퍼맨이 될 것을 자백하라고 요구해 왔습니다.

 

 

예컨대 학생, 노동자, 현실정치인, 재야, 개신교, 가톨릭, 심지어 미국의 사업가 또는 현 정치권력 내부에서

누구와 민주화운동을 의논해서 해나가는지 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슈퍼맨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랬더니 무조건 요구하는 대로 자백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본인은 이 용서할 수 없는 고문을 가하는 자들에게 인간적 절망과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곳에서 그 사람들은 본인에게 절대전능한 신으로 군림했습니다.

 

 

본인은 9월 한달 동안, 9월 4일부터 9월20일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매일 각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

전기고문을 주로 하고 물고문은 전기고문으로부터 발생하는 쇼크를 완화하기 위해 가했습니다.

 

 

고문을 하는 동안 비명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습니다.

그리고 비명 때문에 목이 부어서 말을 못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하여 목을 트이게 했습니다.

(어지러운 듯 말을 중단하고 난간을 붙들면서 잠깐 쉬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9월 4일날 각 5 시간 씩 두차례 물고문을 당했고 9월 5일, 9월 6일 각 한차례씩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골고루 당했습니다.

8일에는 두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10일 한차례. 13일... 13일 금요일 입니다.

 

 

9월 13일 고문자들은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죽었던 최후의 만찬이다"

"네 장례 날이다"라는 협박을 가하면서 두차례의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검사가 이의제기하자 방청객에서 "조용히 해", "계속해"라고 외침)

 

그 다음에 20일 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한 차례 받았습니다.

그리고 25일 날 집단적인 폭행을 당했으며 그 후 여러차례 구타를 당했습니다.

물론 잠을 못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밥을 굶긴 것도 대략 절반쯤 됩니다.

고문 때문에 13일 이후에는 밥을 먹지 못했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밥을 먹지 못합니다.

 

 

그 다음에, 고문할 때는 밥을 주지 않는데 고문을 하지 않을 때도 밥을 주지 않아

심리적인 압박과 고문이 다가오고 있다는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몇가지 증언을 하면, 이 고문자들은 고문을 가하면서, 예컨데 8일날에는 이 사건을 지휘하고 있는 사장이란 자가

10시에 5층 15호실, 본인이 고문을 받았던 그곳 실내로 들어와서

"콧구멍에 고추가루를 넣어서 폐기종을 만들어 죽여버리겠다, 내가 직접 이것을 지휘하겠다"

말을 하는가 하면 또 전무라는 자는 '정치가 법보다' 다시 말하면 '주먹이 법보다 가깝다'는 것을

본인에게 납득시키고 받아들이도록 강요했습니다.

 

 

델시가방을 갖고 다니면서 그 가방에 고문도구를 넣고 다니는 건장한 사내는 본인에게

"장의사 사업이 이제야 제 철을 만났다. 이재문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서져서 병사를 했다.

너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그 고문대위에 서줄테니까, 그때 네가 복수를 해라"

는 참혹한 이야기를 하며 본인에 대해 동물적인 능욕을 가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본인은 알몸이 되고 알몸 상태로 고문대 위에 묶여졌습니다.

 

 

추위와 신체적으로 위축돼 있는 상태에서 본인에 대해 성적인 모욕까지 가했습니다.

말씀드리면 제 생식기를 가리키면서

"이것도 X라고 달고 다녀? 민주화운동을 하는 놈들은 다 이따위야!"

이렇게 말하면서 깔아뭉개고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고문을 할 때는 온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눕히면서 몸을 다섯군데로 묶었습니다.

 

 

발목과 무르팍과 허벅지와 배와 가슴을 완전히 동여매고 그 밑에 담요를 깝니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하면서 전기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와

(이때 방청석에서 울음이 터지기 시작, 본인도 울먹이며 진술함)

이때 마음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

(방청석은 울음바다가 되고 심지어 교도관들조차 숙연해짐)

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으며 이러한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인간성의 절망에 몸서리쳤습니다.

(방청석 통곡)

그리고는 이렇게 비인간적인 고문이 자행되는 것을 보니 '새로운 광주사태가 발생하거나 준비되고 있구나'하고 생각을 하며

본인은 여기에서 죽을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러한 결심을 고문 담당자에게 말하자 "그것은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굴복하라"고 강요했습니다.

 

 

본인에 대한 고문은 진술거부 때문이 아니라 미리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고문을 하면서도 분노나 흥분의 빛이 없이 냉담하게 미소까지 띠우고 있었습니다.

과연 인간이, 한 인간의 고뇌와 죽음의 몸부림 앞에서 저렇게 냉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인간에 대한 신뢰가 산산이 부서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고문을 하면서

"시집간 딸이 잘 사는지 모르겠다",

"아들놈이 체력장을 잘 치렀는지 모르겠다"

는 등 자신의 가족에 대한 애정어린 말들을 주고받았으며 본인에게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고문과 폭력적 행위를 자행하는 자들이 개인의 가족에게는 인간적인 사랑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이렇게 양면성이 공존할 수도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고문을 전담하던 자 중의 한 사람은 -이름은 밝히지 않겠지만- 나중에 혼자서 제손을 잡고 이야기하기를

"고문을 하는 것을 보고 구역질이 났다. 여기서 빨리 나가라, 허위라도 인정해라, 여기 있으면 당신은 죽는다"고 울면서 이야기했습니다.

결국 9월20일이 되어서는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9월25일에는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만 더 버티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이상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그들은 본인에게 집단폭행을 가한 후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대로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9월 26일날, 포니 자동차를 타고 서부역을 지날 때 낯익은 거리,

푸른 하늘이 아직도 있구나, 푸른하늘이 나에게 다시 왔다. 이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복된 것인가 하는 감회가 새로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검찰청 5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제 처를 만났습니다.

 

 

대기실에서 짓뭉개진 본인의 발뒤꿈치를 제 처와 이을호 씨 부인 최정순 씨가 보았습니다.

그때 대기실 건너편 옥상에서는 인부 10여 명이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인간의 땀과 창조가 저렇게 계속되고 있구나, 저것이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구나.

그래 다시 시작하자, 다시 시작하자....'고 결심을 새로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치소로 이송된 이후 현재까지도 협박적인 분위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 사건의 실제적 진실 - 사법적 정의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군사독재정권을 물리치고 인간답게 살고자하는 모든 사람의 요구가

보장되고, 현재 양심수나 재소자의 인간적 권리를 지키기 위해 위의 사실이 충분히 조사되기를 바랍니다.

 

 

변호사 : 본 안에 들어가기에 앞서 고문에 의해 공소가 제기되었다면 이 공소사실은 무효입니다.

따라서 공소의 적법여부, 고문 및 용공조작이 밝혀져야 합니다.

그리고 '딱지'를 강제 압수한 서대문구치소 보안과장 송선홍 과장에게 증인심문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현재 피고인의 몸에 남아있는 고문 흔적에 대한 확인을 신청합니다.

 

 

검 사 : 사실 심리를 시작하겠습니다.

 

 

재판부 : 공소내용의 1항이라도 오늘 진행합시다.

 

 

김근태 : 심문은 다음 기회로 연기되었으면 합니다.

방어권에 대한 기본적인 봉쇄와 방해가 있었습니다.

본인은 변호사와 공소내용에 대해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공소사실에 대한 재판은 다음으로 연기할 것을 요청합니다.

 

 

변호사(김상철) : 그동안 변호사 접견이 20여 차례나 거부되는 등 피고의 방어권이 침해당한 상태에서,

피고인과 변호인이 공소사실에 대해 한 마디의 이야기도 안 해본 상태에서 재판을 진행할 수는 없습니다.

공소내용에 대한 심문은 다음기회로 연기되었으면 합니다.

 

 

재판부 : '고문흔적에 대한 확인'과 '수사과정에 대한 조사신청'을 구두로 접수합니다.

다음 재판일자는 86년1월9일 오전10시 118호 법정에서 있을 예정입니다

 

080103.zip
2.99MB
080103.swf
1.88MB
080103.swf
1.88MB

12. 모리스 돕의 '자본주의의 과거와 현재'

 

원심법원이 모리스 돕의 "자본주의의 과거와 현재"라는 책 소유를 유죄로 인정한 것은

현 개명한 20세기 후반의 건전한 사회상식에 위배되는 것이며, 또한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나는 사실 이처럼 점잖게 말하고 싶지 않다.

상스럽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나를 이해해 달라.

이렇게까지 되고 보면 발길로 걷어차 버리고, 서로 침을 퉤퉤 뱉고 돌아서는 편이 피차간에 차라리 솔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슬프고 기가 막히고 놀라서 어질어질 하기도 하지만, 정치군부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우리 사회를 정말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정치군부의 부릅뜬 눈아래 오금을 펴지 못하는 겁쟁이,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린 판사, 검사의 모습이 정치군부보다도 더

인류사회와 민족사회의 발전속도에 저만치 뒤떨어져 있는 집단이 어디에 있는가를 웅변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겠지.


김영학 씨의 증언과 감정서를 유죄의 증거로 한 원심법원의 판결은 수치스런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들으면서, 들여다보면서 절간에 간 색시처럼 얌전하게 공판에 임해 왔던 나 자신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이처럼 오늘날, 도대체 정치적 사건이란 게 그런 재판이란 것이 본질적으로 농담이고 장난임을 이 이상 더 잘 드러내 주는 것은 없으리라.

도대체 '내외 문제연구소'라는데가 아리송할 뿐만 아니라 미안한 얘기지만, 경제학에 대한 소양이 나보다 없음은 물론,

돕의 주저인 "정치경제학과 자본주의", "자본주의 발전연구"의 책 이름조차 잘 모르고, 그 책이 어떻게 다른지는 물론 모르고,

도무지 헷갈리는 이런 사람의 증언과 감정서를 증거로 하여 유죄로 인정하는 이 철면피의 뻔뻔스러움은

역사에 길이길이 남겨져 기억되야할 것이다.


이것은 김영학 씨 개인에게도 괴로운 일이었을 게며 모독이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여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과 3~4일 전에 검찰로부터 감정 부탁을 받은 후

책을 받고 책을 읽고 감정서를 썼다는 이런 주장을 믿어주어야 하는가.

뭐 이것 뿐만은 아니지만, 거짓말과 사기는 쉬지 않고 줄을 지어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단언한다. 이것은 한낱 사기일 뿐이라고.

검찰청에 뻔질나게 불려 다닐 때 나는 담당검사에게 공소제기된 사실에 대해 모두 말했다고 밝혔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공판장에서 한 말 이상으로 자세히 설명했다.

 

돕의 주저에 대해서, 그런 책들이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에 대해서, 또한 문제된 이 소책자가

'자본주의 발전연구'의 한 장을 조금 손대어서 정리하여 강연한 것이라는 것을 검사에게 말했다.

김영학씨는 아마도 그것을 검사한테서 듣고 앵무새처럼 외우려했던 것 같은데, 아주 서툴렀던 것이다.

반대심문의 기회가 왔을 때 분노가 아닌 슬픔이 밀려와 나는 김영학씨에 대한 심문을 포기했다.

그것이 최소한의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과거와 현재'는 물론 '정치경제학과 자본주의'라는 돕의 주저가 근대 경제학의 추세라는 이름으로

합법적으로 출간된 사실을 인정하면서, 유죄를 인정한 것은 법리를 오해하고 위법적으로 판결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것은 나의 법적 이익을 깡그리 박탈하는 것으로 자빠진 놈 한 번 더 밟아주자는 것인가.

이것은 법 앞의 평등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으로 국민으로서의 기본적 권리를 형해화시켜 버리는 것이다.

또한 지성인의 한사람으로서, 경제학도로서 학문의 자유 그리하여 연구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다.

참으려 해도 속이 느글느글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다.


그래서 한마디 하겠다.

하려면 이정도로 화끈하게 오로지임을 보여주는게 마땅할 것이다.

출세를 하라. 출세를 하라. 그리하여 출세를 하라.

 

 

그래도 못다한 말 한가지

 

행방불명된 나의 탄원서에 대하여.


다 아는 바와 같이 1심 공판정에서 탄원서 집필허가 문제에 대해 나는 네번 문제를 제기하였고, 마침내 재판거부 선언에까지 이르렀었다.

집필신청을 한 지 만 40일 후인 2월 5일 오후 3시 반 경에 허가통지를 받았다.


탄원서 집필문제를 가지고 이처럼 격렬하게 싸운 이유는 너무나 분명한 것이다.

나는 '탄원서'라는 이름으로 저 남영동에서 받았던 고문을 낱낱이 밝히고자 했던 것이며,

정치군부는 그것을 체면불구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막아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공판 사이사이에 나는 혼신의 힘을 다 기울여 탄원서를 썼다.

보통 구치소에서 두 부 작성하는 다른 사람의 경우와 달리, 오직 한 부만을 작성하도록 미리 페이지가 매겨진 조사용지를 공급받아 썼다.

나는 그 때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소심해지지 않기로 결심했다.

결국 이것이 행방불명된 것이다.


이제 탄원서 내용을 간략히 얘기하자.
고문준비, 계획은 어떻게 되었으며, 누가, 왜 했고, 어떻게 했으며, 그 때 고문자가 요구한 것은 무엇이었으며,

그에 대해 나는 어떻게 견디고 또 굴복했는지, 그 고문대 위에서 또 아래에서 내 심정은 어떠했는지를 기록했다.

여기서 우선 고문자들의 이름을 밝혀 두겠다.

이 탄원서는 피가 흥건히 고여 있는 기록이다.


총경 윤재호(남부경찰서장),

경정 김수현(전무),

경정 백남은(전무),

경감 장의사 둘째주인(고문 전문기술자),

경위 김영두,

경장 정현규,

경장 박병선,

경장(경북사람) 등


검찰은 피로 적셔 있는 남영동 기록을 증거서류로 제출했다.

공판정에서 고문사실과 그에 의해 강제된 것임을 여러 차례에 걸쳐 고발하였는데도 검찰은 이를 재판부에 제출한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을 개진했었는데 서성 판사는 그것이 피고인에게 불리할 수도 있고 유리할 수도 있다고 했다.

결국 이에 보기좋게 속아넘어갔지만, 나는 이 탄원서에서 남영동 증거서류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서

고문은 물론 그 때 고문자들이 요구한 것을 자세히 기록하며 반박했다.

그런데 이를 절취하여 숨겨버린 것이다.


영화 '25시'에 이런 장면이 있다.

강제수용소 철조망 안에 갇혀 있는 한 지식인이

자신의 신념을 적은 글(아마도 성명서-적절한 이름은 아니지만)을 손에 들고 보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긴장이 고조되다가 보초가 들고 있는 총에서 아무런 머뭇거림도 없이 총알이 튀어 나왔고 그 지식인은 거기서 퍽 꺾여졌다.

종이는 이리저리 바람에 날리면서 땅에 떨어지고 쓰러진 몸뚱아리에서 흘러나온 피로 적셔지고....

그 종이는 어쩐지 그 사람의 입에 물려졌던 것 같은 착각이 자꾸 들었다.

지식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인가.


그렇다. 나는 오른쪽 가슴을 관통당한 채 쓰러져 피 흘리며, 속으로 울고 웃으면서 쓴 것이다.

그런 탄원서가 행방불명된 것이다.

검찰이나 법원 둘 중에서 어디선가 꽉 틀어쥐고 내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재판이 끝난 직후 서성 판사에게 열람등사를 요청하였더니 "이미 발송했다"고 하며 역시 훌륭하게 따돌렸다.

검찰에 가서 확인하니 "서성 판사가 틀림없이 갖고 있다"고 하고....,

시작부터 끝까지 코미디이고, 거짓말이고......


지금 이 탄원서는 어디쯤에서 강철상자 쯤에 들어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나, 아 그러나 이것은 언제 끝날 것인가.


맨 끝으로 고문을 당하며 속으로 통곡하고 지내온 지난 겨울,

이 가막소에서 나는 애정이 넘쳐 나는 수많은 학생, 그리고 버림받은 재소자들의 격려 속에서 다시 되살아났다.

그때 두 겹의 비닐창문을 때리는 북풍에 견디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되뇌고 되뇌었다.

 

내 귀여운 아이들아
느이들 하고 놀아주지도 못하고
애비가 어디 가서 오래 못 와도
슬퍼하거나 마음이 약해져선 안된다
외로울 때는 엄마랑 들에도 나가보고
봄이 오는 소리를 들어봐야지
바람이 차거들랑 옷깃 잘 여며
감기들지 않도록 조심도 하고...

 

 

11. 슈퍼맨이 되지 못한 죄

 

 

나 중심으로 얘기하면 이렇다.

혼란과 당혹 속에 검찰에 넘겨진 세 사람은 각자 자신들의 절박함의 우선 순위에 따라 움직여 나를 검찰에 내주고,

그리하여 법관의 손에 넘겨주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여기엔 아무런 다른 선택이 없던 것이다.

오직 마련된 길을 따라 등 떠다밀려갈 수밖에 없었으며, 누구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검찰에 갇힌 사람들이 부닥치는 문제점에 대해서 얘기하겠다.

우선 고문기관인 남영동 상급기관으로서 갖는 위엄과 그로 말미암은 위협감, 답답함이 가슴을 조이게 만들고

이런 사건이 모두 '괘씸죄'이기 때문에 이것저것 잘 대처하고 따지게 되면 오히려 손해가 되지 않을까 염려 되어

잘 보이려고 아양을 떨고 싶어 몸이 비비꼬일 지경이다.

나보고 '또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고, 또 그 얘기를 수긍할 수 있지만,

'또라이' 같은 얘기, 그러나 그때 내 심정이 그토록 어지러웠던 것을 말해 보겠다


나를 이대로 밀고 나가 결국은 죽이려고 하는가.

합법을 가장한 이러저러한 절차를 밟아서, 그리고는 분업화된 과정으로

아무도 큰 심리적 부담 내지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교살하려고 하는가.

 

저 고문 남영동은 확실히 그런 방향이었고, 이 검찰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도대체 난데없이 KBS 방영이니 연합통신의 기승은 뭐란 말인가.

 

헷갈리고 또 헷갈리고, 돈다.

세상이 돌고, 내가 돌고.

 

나는 검찰의 손에 무릎꿇어 구애하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고 어지러웠다.

제법 딴에는 점잖은 체면이어서 호모 비슷한 분위기를 조성해서는 안된다고 굳게굳게 결심했기 때문에 거기까지 나가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이렇게 차단된 상태에서 검찰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병적인 애정구걸 같은 심리를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죽었다 깨어나도 검찰에서 '피고인은 당시 그렇게 인정하지 않았느냐' 고 준엄한 얼굴로, 노기띤 음성으로 법정에서 꾸짖는다.

담당검사는 이렇게 하여 비열한 거짓말쟁이로 피고인을 입증해 내고, 그렇게 해서 증거가 발딱 일어나고,

판사는 유죄의 심증을 거기서 형성하고, 우습고 웃기고 웃겨서 웃기는 장난이 된다.

이게 모두 두려움에 얼어버린 채 남영동에서 검찰로 왔을 때, 끊임없이 교양있는 검사를 짝사랑하고, 또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혹시 버티다가 재차 남영동으로 끌려가지 않을까 싶어 가슴이 두근반 세근반하며 저려온다.

한편 그래도 끔찍한 고문을 안해서 고맙고 감사하고, 때로는 슬쩍 가족 얼굴을 보게 해주고

따스한 입김이 볼에 닿게 해줄 때 우리들의 검사님은 너그러움의 표상이 되는 것이다.

 

어찌 이 하늘같은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는가.

그것은 오직 배덕자, 패륜아의 짓이고, 인간이면 검사님의 묻는 말에 또박또박 대답하고, 요구와 기대에 알아서 부응해야하는 것이다.


"오호 통재로다. 이것이 올가미구나."


깨닫게 되는 것은 세월이 한참 흐른 다음인 것이다.

때는 이미 지나가 버린 뒤고. 우리들의 눈이 크게 열려 올바로 보게될 때는.

그러나 언젠가 온다.

 

검찰은 남영동 서류를 굳게 믿는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공격적 충동을 기르고 길러 내서 피묻은 남영동 서류조차 별 양심의 가책없이 믿도록 감시는 인도된다.

조종된다.

 

공소유지 의무와 더불어 정치적 사건에서의 기여도에 따라서 정치군부는 평가하여 훈장을 주고 처벌을 한다.

인사정책을 통해서, 검사는 이렇게 해서 검사가 되는 것이다.

 

나도 검찰에서 얘기할 것 다 얘기했다.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더 버틸 마음이,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다만 글로, 조서로 남기지 않았을 뿐이다.


내겐 기적같은 만남이었다.

은혜처럼, 성령처럼, 비둘기같은 성령으로 날아들었던 것이다.

검찰청 청사 그 계단에서 내 처 인재근을 만난 것은.

 

그리하여 김상철 변호인을 만난 것은 나에겐 축복이었다. 구원이었다.

그 만남이 없었다면 나도 틀림없이 남영동에서 두드려서 훌륭하게 만들어 낸 모든 것을 검찰 신문조서에,

자술서에 올리고 손도장을 꽝꽝 찍어댔을 것이다.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던 만남이 발생하여 거기에 기대어 나는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검사의 도발적 언사 한마디가 계기가 되어 화를 낼수있는 기력이 되돌아와준 것이다.


법정에서는 명백히 나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고, 그렇게 이용될 가능성이 충분히 높다고 예견하면서도 진술한 것이 많이 있다.

검찰에서 이미 모두 말했던 것들이다.

그것을 잘라서 얘기하거나 수정 변경하지 않았다.

나는 더이상 째째해지지 않기로 결심했고, 검찰한테서 비웃음을 받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건 자존심이었을게다.

그러나 나는 그래도 법관을, 법원을 믿으려 했고 검찰의 기본적 양심을 믿으려고 했던 시기였다.

어떤 신뢰를 저버리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사실이 너무나 명백하므로 재판에, 그 결과에 아주 자신하였던 것이다.


아, 그러나 재판이 무엇인지 나는 몰랐던 것이다.

아니 재판은 한낱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는, 특히 정치적 사건에서는 그렇다는 소문을,

나의 사전 인식은 아마도 지나친 단순화이고 편견이라고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검사 또는 판사 그 개인들과 은근히 통하고 있다고 믿고 싶은 모종의 분위기, 어떤 관계에 나는 취해 있었다.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분위기, 그리고 거기서 느껴지는 개인적 관계를 확대해서 재판을 보려고 했다.


나는 반쯤 눈이 멀었던 것이다.

참담한 결과가 올 수밖에 없었다.

 

논리학 교과서 첫 부분 어딘가에 나오는 확대적용의 오류를 그래도 뒤집어써 버린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개인적인 관계에서 그 모순은 작고 미미하지만, 좋은 나라인 민주화운동세력과 나쁜 나라인 정치군부 사이 속에서

그것은 아주 심각하고 격렬한 불신과 갈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라는 것을 말끔히 잊어버렸었다.

 

아니다. 그 간극을 사실의 증명격과 지식인으로서 판, 검사들의 양식이 메꾸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인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집단)'라는 책의 어떤 페이지들이 떠오른다.


판사, 검사 중에 개인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정치군부 체제 아래에서 이러저러한 재판을 하는 판사들, 검사들은

주관적 선의와 상관없이 군사독재의 옹호자이며 방위자로서 역할을 틀림없이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대중에게는 마땅히 존경을 바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본래 알고 있었던 그대로가 맞는 것이었다.

사물과 사건 속에 휘말려 어지러웠고 직접성에 노출되어 피곤하였으며, 심약해진 마음때문에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눈을 잃었던 것이다.

단어가 너무 격렬하고 선동적이어서 쓰고 싶지 않지만, 군사독재 지속에 단단히 한 역할하면서도 태연스러운 위선자들은 틀림없이 있다.

이 사건 재판에 관계했던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은 없었는지 자꾸만 따져보게 된다.

그건 그렇고 어쨌거나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본다.

남영동에서 고문에 끝까지 버텨 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5층 15호실, 그 방안에는 죽음의 공포와 그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었고 그렇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굴복하고 말았지만, 다시 그런 경우에 부딪쳐도 역시 무릎꿇겠지만, 누구도 나처럼 당하면 결국 꺾일 것이라고 단정하지만,

만일 내가 끝까지 버텼더라면 나는 거기서 살해되었을까, 아니면 그것으로써 사건은 끝나 버렸을까.


"남영동에서 누가 당신더러 굴복하고 인정하라고 했는가.

더구나 그럴듯하게 꿰어 맞추도록 협조도 하고, 증거가 될 것이라고는 말뿐임을 피차 진작 눈치챈 것이니,

그것을 손바닥 뒤집듯 홰까닥 엎지 못하도록 요리조리 꿰어 맞추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또한 예측 가능한데도 그것에 코 꿰어 끌려간 당신 자신이 잘못한 것이다.

이제와서 고문을 당해서 그랬느니, 어쨌느니 해봐야 다 소용없는 일이다.

딱 잘라서 말하면 그건 당신 사정이고, 그러니 찧고 까불며 나를 원망하지 마라.

그렇게 되면 피차 지저분해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이리하여 나는 깨달음에 이르른 것이다.

그렇다. 모두 내 탓이로소이다.

 

능히 슈퍼맨이 되지 못한 나한테 죄가 있는 것이지, 강제로 정치군부가 가두고 때리고 짓밟고 한 그것은 배경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슈퍼맨이 되지 못한 내 죄가 톡 튀어나와 누구 눈에도 아주 잘 보이도록, 극적 대비가 되도록 하기위해서 고문이 필요했었던 것이다.


어쩐지 시력이 나쁜 판, 검사들이 잘 볼 수 있도록,

그리하여 흔들리는 팔로 꽝꽝 유죄를 내리 찍을 수 있도록 고문을 활용한 것뿐이니까.

내가 오해를 했었던 것이다. 오해, 오해, 해오, 해오....


그렇다면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렇다면 결국 힘에 진 것이니까.


모든 깨달음은 위대할진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