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제(謙齊)를 생각하며
 

비오고 눈이 오고, 비가 오고 비 가운데로 싸라기 우박이 가끔씩 뿌려지고, 이 3월 하순에 말이오.
겨울 떠나보내고 봄 기다리는 마음에 심술이겠지만 그게 어디 가능한 일이겠소.
착각은 그냥 자유일 뿐이지.
번갈아가며, 다투며 내리는 눈비가 익살스러워 차라리 마음이 들뜨는구려.


창틀 기대어 눈 쏟아지는 하늘 올려다보고, 희끗희끗 가려지는 앞산 건너다 보았지.
저 높은데서 거뭇거뭇하고 벌떼처럼 몰려 짓쳐 내려오는데, 점점 가까워지면 몸놀림 가뿐히 공간 넉넉하게 비워두고 하얗게 내렸다오.
한눈파는 사이 스르르 땅속으로 스며 하나 남기지 않고, 이 겨울 마지막 눈 전혀 쌓이지 않았어. 건너편 산골짜기에도.


지난 겨울 앞산 자주 눈 덮여 있었어.
가물가물한 두 겹 비닐 통해 쳐다봤지.
가끔 창 열고 바라봐도 '흑~' 찬바람 한입에 얼른 닫아 버렸었지.


거리에 캐롤 울릴 때쯤이었을까.
눈덮힌 산 그 아래 뾰족 첨탑 보이고 사슴이 끄는 썰매 탄 산타할아버지 눈에 어른거렸네.
언제부턴가 생활속으로 슬쩍 들어와 버린 카드 속 그림 닮은 그런 산, 그런 건물, 썰매, 그런 아이들 삼삼하였네.
난 그만 실소하구 말았지. 감수성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꿈속에서도 그리워하는 로렐라이 언덕, 하이델베르크 대학 앞 어디쯤 있을 황태자 첫사랑의 그 맥주집에 몸살나는 이 시대 교양인들,
브로드웨이와 헐리우드에 몸 자지러지는 저 대중들, 그 중에 하나일까, 나도.


겸제(謙齊) 생각했지, 부끄러워 하면서.
어떤 사회적 변화가 있어 가능했겠지만, 그것은 고뇌 끝의 결단이었어.
그렇더라도 상상 속 중국 산과 강 그리는 기법, 그 흉내 버리고, 펄펄 살아 뛰는 우리네 강산 선택한 건 모험이었어.
서러운 삶의 감정 스며있는 이 산하를.
차라리 반역이었을까, 사대 그늘아래 왕권질서에 대한.
위험하지 않았을까.
겸제는 얼마나 조롱당했을까, 경멸 또한.
눈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 어두움들 어디에서 오는가.
허위의식 물든 관념에서, 감수성으로부터 올까, 누구였을까, 저주받은 바리새인들은.


중국적 봉건질서의 정치 문화적 표현인 주자학이 조선사회 발전에 기여한 바 크겠지.
헌데 일자 일획이 온통 진리였던 그것을 왜 한글로 번역하지 않았는지.
수많은 사람들 공맹의 길에 보다 쉽게 접할 수 있었을 텐데.


우리 글 쓰임대 한층 풍부해졌을 게고.
이젠 복종의 다른 표현된 충효 빈 껍데기만 남겨놓고서 가버린 허망함 아니었을지도.


너무나 심오하여 감히 번역할 능력 아무도 없고, 언문으론 진서 그걸 제대로 표현할 길 도무지 없고,
누군가 개거품 물고 주장한 사람 있었을 게야.
많았을지도 모르고.
당시 시대적 제약 있어 모두 학문할 수는 없는 거고, 어차피 한정될 수밖에 없다는 말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지.


그러나 진정한 이유는 딴데 있는 거지.
혈통에 의한 봉건적 신분질서 유지 너무 적나라하여 문화적 구획으로 덮어 씌워놀 필요 정말 있었겠지.
깊은 진리 터득한 사람 있었을 게고, 많지 않지만.
일부만 알거나 형식적으로 아는 체하여 양반 지배계층에서 탈락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별 상관없었을 것이지.
아는거야, 이런 것은.

 

오늘은 어떤가.
혹시 진서 대신 원서가, 한문 대신 영어가, 중국 대신 서양이 또 그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 아닐까.
꼬부랑 관념과 감수성, 글씨 몇 개 아는 지식인들 지배계층에 끼여들고 그렇게 제도화 되어 있고,
그 아랫사람들 열심히 흉내내고, 흉내바람은 사회적 강제가 되고, 분명하지 않은가 말이여.


여기에 끼지 못하는 것 처벌이고 소외인 거야.
세련됨, 모던함을 소유하고 즐기는 것, 그러기 위한 훈련, 학습, 교양 가지려고, 한마디로 간판 따려고 우리 모두 서둘러 왔던 것 같지.
서양의 문화, 문물, 예술 모두 암암리에 보편적인 것 되고, 특히 진정한 그 내용이나 진리가 아니라 단편적 사실,
어떤 형식이나 약간의 흉내가 오히려 기승부려 진짜 인류의 보편적 발전방향은 목졸라 버리는 것 같고,
그것으로써 우리자신의 주체성과 주인의식은 잊어버려 민족 허무주의에 빠지게 만들고,
인간성 구현을 위한 발전방향과 진리는 서양의 특수한 것이라고 매도해 버리고, 역사는 반복할 것인가, 수치스럽게도.


소중화(小中華)로 자부하며 더욱 중국적이었던 조선,
또다시 개명한 20세기 후반에 우리는 자신을 서양보다 더욱 서양적으로 만들어 버릴 것인가.
진리냄새 피우는 한 글자 한 글자 붙들고 부들부들 떠는 위대한 지도자들이 등장한 이 시대에.


재판에 임하면서 참 묘한 느낌이 들었다오.
그 중에 하나가 판검사, 변호사들과 만났을 때 나도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서로 동류임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었지.
말씨나 절차 그것에서도 상호 느낄 수 있었고 말이오.
물론 서 있는 입장이 다르면서도.
우린 한국사회의 지배계층임을, 아니 적어도 상류계층임을 암암리에 인정하고 있는 것 같았소.


그러다가 구치소로 돌아와, 특히 자신의 감방에 들어가 갇혀질 때면 최하 천민계층으로 급락하는 것이었소.
부자유, 그건 능멸받아 마땅한 것이오.
옛날 노예가 살아있는 도구라고 짓밟혔던 그림자 아직도 여기에 살아있는거요.


여하튼 이런 차이를 반복하여 느끼면서 나는 사실 꽤 당황했다오.
정서적으로 묘한 혼란도 오고, 특별한 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얄팍한 마음도 생기고 말이오.
자꾸 설명하고 싶어지고, 이것 모두 쓰잘 데 없는 것임을 잘 알면서도 말이요

<후략>


(1986년 3월 20일. 서울구치소에서 부인 인재근씨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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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2장] 가족사의 비극, 우수한 모범생의 소년기

2012/07/04 08:00 김삼웅

 

김근태 고문의 학창시절. 사진은 김근태를 말하다 블로그에서 옮겨왔습니다. http://gtcamp.tistory.com

김근태는 1947년 2월 14일, 경기도 소사(지금의 부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진용과 어머니 이한정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교장 선생이고 어머니는 평범한 주부였다. 부모는 교육열이 강하여 아버지의 박봉에도 자식들 중에는 일본유학까지 보냈다.

김근태는 아버지가 번번히 전근을 하는 바람에 초등학교를 4번이나 옮겨다니면서 졸업을 하게 되었다. 평택군에서는 청북과 진위초등학교를 다니고, 양평군에서는 원덕과 양수초등학교를 다녔다. 양수초등학교에서 졸업하였다. 어린시절부터 잦은 이사와 전학으로 김근태에게 ‘고향’에 대한 인식은 별로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이승만 대통령을 찬양하는 교내 웅변대회에 나가 이승만을 찬양하는 열변을 토했으나 3등밖에 못해 어린 마음에 좌절을 겪기도 하였다.

상처받은 어린 시절이었고, 또한 상처받은 고향으로 경기도 평택과 양평이 나에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런 나의 상처받은 고향조차 사라져버리고 없다. ‘그리운 양평’은 모두 유원지로 전락되어버렸고, 평택은 공업지역으로 바뀌어버려 고향을 박탈당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도시화되고 산업화되는 시대적 추세 속에서 나의 고향 또한 잠겨버린 듯하다. (주석 1)

어릴적의 잦은 이사와 전근은 김근태가 아니라도 소년의 정서에 심리적 부담을 안겨주기 마련이다. 소년은 뒷날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자주 전학 다니는 것은 나에게 크나큰 고문이었다. 새로 친구를 사귀면서는 텃세를 부리는 본토 애들과 싸우기도 하고 알랑방귀도 뀌어야 했다. 어느 정도 안정된 관계가 이루어질 즈음해서는 어김없이 떠나야 하는 그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나에게 혹독한 처벌이었다. 몸살을 앓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아버지께서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권력자로 방패막이의 역할을 해주어서, 그나마 견뎌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주석 2)

해방 직후에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장 선생이면 당시로서는 비교적 안정된 가정이다. 다만 교직자의 신분이어서 잦은 전근으로 인하여 감수성이 예민한 자식들에게는 여간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매우 따뜻하신 분이었고, 어머니는 대단히 열정적이셨다. 아니 극성맞다고 해야 옳을 지 모르겠다. 두 분 다 자식을 공부시키는 데에는 만장일치셨다”고 김근태는 회고한다.

<민족과 지평> 편집위원 이재화는 1991년 봄 김근태가 홍성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고 있을 때 본인의 접견과 부인 인재근, 친형 김국태 교수(추계예술대 문예 창작과)를 비롯, 손학규ㆍ최민화ㆍ조화순ㆍ안병직ㆍ문익환ㆍ채만수 등 지인들을 만나고 <김근태의 삶과 사상>을 썼다. 그의 생전에 쓴 글이기 때문에 신뢰도가 높다.

사진은 김근태를 말하다 블로그

김근태가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를 따라 네 차례씩이나 전학을 하는 것과 관련, “어린 김근태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위대하거나 호방한 분이 아니라 작고 소심하여 두려움에 떠는 가슴을 가진 분이었다.’ 그는 ‘이 때문에 아버지를 존경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와 대립하고 갈등하면서 10대를 보냈다. 자연히 성격도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는 노력 속에 형성된 구석이 많았다.” (주석 3)라고 소개하였다.

김근태는 이와 관련 부친에 대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갖게 되었던 것 같다. 그의 부인 인재근에 따르면, 남편은 “정열적인 면은 ‘기가센’ 어머니를 닮았고, 자상하고 섬세한 부분은 아버지를 닮았다” 고 전한다. 김근태의 아버지에 대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또는 반항심은 더 있었다.

그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아버지로부터 3.1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다.
아버지 나이 19살이었을 때였다. 아버지는 읍내시장에는 나가지 못하고 뒷동산에 혼자 올라가서 실컷 만세를 불렀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에이 왜 좀더 대담하지 못했을까” 하며 투덜거린 적이 있다고 한다. 어린 그에게 아버지가 교과서에 나오는 유관순 누나같이 당당하지 못한 것이 창피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처럼 소심하고 무능력한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자존심을 가진 그는 어려서부터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했고 모든 면에서 항상 최고여야 만족하는 성격이 형성되어 갔다.
(주석 4)

소년 김근태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반항심은 성장하면서 반독재 저항운동을 전개하는 적극적인 성격으로 발산되었다. 어릴적에 “마음씨는 좋지만 무능하여” 늘 지방으로 옮겨다니는 아버지로 인해, 토박이 아이들 속에서 막 뿌리를 내릴 때쯤이면 다시 전학을 가야 하는 ‘뿌리뽑히는’ 고통을 어린 김근태의 가슴에 ‘약함’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서울에 올 ‘빽도 없고’ 돈을 모을 수 있는 ‘능력도 없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주석 5)

김근태가 태어난 1947년은 해방 2년차로서 미군정 시절이다.
해방은 되었지만 분단에 이어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격렬한 찬반 투쟁이 전개되었다. 1947년 2월 5일 남조선과도정부가 수립되고, 5월 21일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되고 12월 2일에는 장덕수가 피살되었다. 1948년 4월 3일 제주 4ㆍ3항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5월 10일 남한 단독 선거가 실시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9월 9일에는 북한에 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한반도는 남북에 상이한 두 개의 정권이 서게 되었다. 해방 3년만의 결과였다.

김근태는 동시대의 아이들처럼 6.25전쟁의 혼란 속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가 교직에 있어서 혼란시기에서도 생계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전란기에 가족사에 불행이 겹쳤다. 김근태가 민주주의와 함께 민족주의에 남다른 관심을 갖는 데는 이때의 가족사에서 영향을 받은 바 적지 않았다.


주석
1> 김근태, <희망의 근거>, 415쪽, 당대, 1995.
2> 앞의 책과 같음.
3> 이재화, <김근태의 삶과 사상>, <민족지평> 제3호(1991.봄여름), 153쪽.
4> 앞의 책, 153~154쪽.
5> 앞의 책,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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