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드름 낙수소리


얼음장 밑으로 물 흐르는 소리


동굴 낙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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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아름다운 소리 100선 사계 향토 추억 생명 사계 향토 추억 생명 사계 향토 추억 생명 사계 향토 추억 생명



한국의 아름다운 소리 1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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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롭스키 정원(Alexander Garden ; Александровский сад) 정문


정문 입구로 들어서서 돌아 보면 출구 쪽으로 러시아 국립박물관 건물이 바로 보인다.


입구 왼쪽 크렘린 서쪽 성벽 아래 무명 용사의 묘


제2차 세계대전 기간 1941 ~ 1945년 사이에 전사한 수백 만 명의 소비에트 군인들에게 헌정된 전쟁기념관

무덤의 왼쪽에는 "1941 조국을 위해 희생된 사람들에게 1945"라고 적힌 화강암 벽이 있다.



“1941-1945년에 희생된 무명용사에게 바침. 

비록 그대들의 이름은 알지 못하지만 

그대들의 숭고한 희생은 영원하리라”


러시아 사람들은 결혼식과 같은 개인적인 기념일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무명용사의 묘’를 찾는다.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이름 모를 영웅들에게 헌화하며 감사와 존경의 뜻을 표한다.


묘 양 옆의 경비병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부동 자세를 유지하며 무명의 용사들을 지키고 있다. 

매 시 정각에 치르는 경비병 교대식으로 유명하다.


대통령 직속 연대의 '제1영예 위병부대'는 붉은광장의 레닌묘를 지키다가 

1997년 대통령령에 따라 무명 용사 묘를 지키도록 했다고 한다.  

사회주의 붕괴 후 레닌보다는 무명 용사들의 희생을 기리는 것이 더 값지다고 판단한 듯 하다.



영원한 불꽃 - 꺼지지 않는 불 (Eternal Flame)


중앙부에 있는 별 모양의 조형물에서는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른다. 

1957년 이래 상트 페테르부르크 마르스광장에서 타고 있는 불에서 채화해 왔다고 한다.

이렇게 무명 용사 시신과 꺼지지 않는 불을 모시는 묘는 1921년 파리 개선문 아래에 

제1차 세계대전 무명 용사의 묘를 처음 만든 이래 여러 나라에서 본뜨고 있다.


1967년 5월 8일 당시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여기 ‘꺼지지 않는 불’에 최초로 점화했고, 

2010년 초 보수 공사 이후 메드베데프 당시 대통령이 재점화했다. 

꺼지지 않는 불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이름 없는 병사들의 

애국심과 정신을 영원히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다.


월계관 청동 조각과 군인 헬멧


가운데 대리석 묘엔 모스크바 외곽에 있던 전몰 장병 묘지에서 이름 모를 병사의 시신 한 구를 옮겨와 묻었다.

짙은 붉은 반암 기념물은 월계관의 청동 조각과 배너에 군인의 헬멧으로 장식되어 있다 . 


별 조각과 영원한 불꽃 (Eternal Flame)

기념비 앞에는 중심에서 영원한 불꽃을 발산하는 라브라도 라이트의 사각형 필드에 5개 별이 있다. 

불꽃은 청동색 비문 " Имя твоё неизвестно, подвиг твой бессмертен "를 밝게 비추고 있다. 




[영상] 2019. 08. 17


영웅 도시의 기념비


무명용사의 묘 옆쪽으로 크레믈린 성벽을 따라서 ‘영웅 도시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주요 격전지 도시들의 명칭이 새겨져 있으며 기념비 내부에는 

각 도시에서 가져온 흙이 보관되어 있다.


영웅 도시 레닌그라드 , 키예프 , 스탈린그라드 , 오데사 , 세바스토폴 , 민스크 , 케르치 ,

노보로시스크 , 툴라 및 브레스트 , 무르만스크 및 스몰렌스크의 토양이 보관되어 있는 붉은 반암 블록. 















[영상] 근위병 교대식 영상 자료



[영상] 문재인 대통령, 러시아 '무명용사의 묘' 헌화




마네쥐 광장 옆에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이 있다.


알렉산드롭스키 정원 앞


알렉산드롭스키 정원(Александровский сад) 정문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은 크렘린 서쪽 성벽 아래로 865m를 뻗어 간다.​

공원 초입에 무명 용사 묘가 있다.


크렘린 성벽 쪽으로 길게 꾸민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의 동쪽 입구로 

청춘 남녀는 누가 보건 말건 서슴없이 애정 표현을 한다.


정문 입구로 들어서서 뒤로 돌아 보면 출구 쪽으로 러시아 국립박물관 건물이 바로 보인다.


알렉산드롭스키 정원(Alexander Garden ; Александровский сад)


1156년에 유리 돌고루키(Yuri Dolgoruki)는 크렘린을 보호하기 위해 모스크바(Moskova) 강과 

니에글린나야(Nieglinnaya) 강이 만나는 지점 언덕 위에 목조 요새를 축조하였다. 

오늘날 이 요새가 있던 지역은 알렉산드로프스키(Alexander)정원으로 뒤덮여 있다. 

14세기에 드미트리 돈스코이(Dimitri Donskoi)가 통나무 성곽을 쌓았고 

나중에 처음으로 석조 성곽을 건설하였다.


역사와 배치가 변화함에 따라 프스코프(Pskov), 툴라(Tula), 카잔, 스몰렌스크(Smolensk)같은 

러시아의 옛 성채들이 크렘린을 모델로 하여 건축되었다.

현재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의 면적은 10 헥타르이다.


알렉산드롭스키 정원 의병대의 교대식 모습.


의병대의 교대식 모습.


알렉산드롭스키 정원(Александровский сад)


여러 정원을 포함하는 것으로, 모스크바 마네지 광장과 크렘린 사이에 있는 정원을 의미하기도 한다.

1812년 나폴레옹군 침공으로 쑥대밭이 된 도심을 재건하면서 알렉산드르 1세가 

네글리나야 강의 바닥에 정원을 지으라고 명하면서 1819년에서 1823년까지 건설한 러시아 첫 공공 공원이다. 

그래서 크렘린 가든으로 불렸다가 나폴레옹 침략 전쟁에서 승리한 알렉산더 1세를 기리는 의미로 황제의 이름이 붙었다. 

오늘날에는 정원의 이름을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으로 지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옛날옛적에 니에글린나야(Nieglinnaya) 강은 크렘린 성벽 근처로 흘러 갔다. 

그곳에는 욕조, 단조 공장, 제재소가 있었다. 강에 댐을 설치한 후 연못이 형성되었다. 

니에글린나야(Nieglinnaya) 강은 점차 쓰레기와 하수로 심하게 오염되었고 강은 얕아 졌다.

정원은 지하에 자리 잡은 니에글린나야(Nieglinnaya) 강 위에 석조로 세워졌다. 

이 프로젝트의 저자는 건축가 Osip Bove였다. 웅대한 정원의 개통은 1821년 8월 30일에 열렸다.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의 영토에는 많은 관광 명소가 있다. 


포시즌스 호텔


마네쥐 광장 북동쪽엔 포시즌스 호텔이 있는데 제일 싼 방값이 50 몇만 원에서 시작하는 6성급 호텔로 

유서 깊은 1930년대 호텔 모스크바 자리에 2014년 새로 들어섰는데  

전면 구조는 옛 모스크바호텔 구조를 그대로 재현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롭스키 정원 서쪽으로는 짤막한 개울이 흐른다. 


모스크바 중심부에는 복개 하천 네글린나야 강이 북에서 남으로 흘러 인공 터널을 통해 

모스크바강으로 들어가는데 크렘린도 이 강을 해자 삼아 지었다.

이 개울은 1996년에 네글린나야 강을 지상으로 드러냈다며 만든 인공 개천이지만  

실제 강은 이 개천보다 한참 더 지하로 흐른다고 한다.

개천 왼쪽과 크렘린 성벽 사이에 알렉산드롭스키 공원이, 오른쪽으론 아케이드가 늘어서 있다.



네글린나야 강  주위로 알렉산드롭스키 공원의 인공 개천 끝에 네 마리 말 동상이 선 분수대가 있다.




말 조각상이 분수와 함께 어우러져 보기에도 시원스럽다.

러시아 예술아카데미 원장을 지낸 그루지야계 조각가 주라브 체레텔리의 작품 '사계' 이다.  

네 마리 말로 각기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표현했다고 한다.


말 조각상들은 갈기를 날리며 금방 분수대로 뛰어들 듯 역동적이다.



크렘린과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의 꽃들을 본다. 오른쪽에 솟은 크렘린 성벽 탑은 트로이츠카야 타워


헤르모겐 (Hermogenes)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에 십자가를 치켜 든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의 동상이 서 있다.


거룩한 순교자 헤르모겐 (Hermogenes)


모스크바와 러시아의 총 대주교인 거룩한 순교자 헤르모겐(Hermogenes)은 

돈 코사크(Don Cossacks)에서 1530년경 태어났다. 

그는 1582년 이래 성 니콜라스라는 이름으로 카잔 수도원의 성직자였다. 


카잔에서 총 대주교를 섬기는 동안 

그는 1579 년에 신의 어머니의 기적적인 카잔 아이콘이 나타나고 은사를 받았다.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가진 그는 1594 년에 기적적인 아이콘의 출현과 그로부터 나온 기적에 관해 서술했다.

이 글에서 그는 자신에 대해 겸손하게 썼다.

“그러나 그때 나는 마음이 따뜻하지만 하나님의 어머니와 기적적인 아이콘과 

영원한 유아, 구주 그리스도에게 울며 울었습니다 ... 

그리고 대주교의 명령에 따라 툴라 (Tula)라고 불리는 성 니콜라스 (St. Nicholas) 근처 교회에 

다른 거룩한 십자가와 함께 아이콘을 가지고 갔습니다."


1592년 1월 9일, 헤르모겐은 카잔에서 신앙과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정교회 군인들에 대새

각별한 기념식을 올려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족장 욥에게 보냈다. 

이 편지에 대한 응답으로, 총 대주교는 2월 25일자로 법령을 보냈다.

카잔 근처와 카잔에서 살해된 모든 정통 군인들에게 토요일에 카이로와 카잔 대도시 전역에서 

추모식을 개최하고 가장 신성한 시토코인들의 보호를 받고 큰 회당을 쓰도록 명령했다. 


1595년에 성도의 적극적인 참여와 함께 카잔의 기적 일꾼들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유물의 주인공은 카잔의 첫 대주교인 성자 구리아와 성도들이었다. 

차르 테오도레 이바노비치는 성도들이 묻힌 곳의 카잔 수도원에 새로운 석조교회 건축을 명령했다. 

성도들의 관이 발견되었을 때 헤르모겐은 성직자 협의회와 함께 관을 열도록 지시했으며 

성도들의 부패한 유물과 예복을 보고 가부장과 차르에게 알렸다. 

성결 축복과 왕의 명령에 따라 새롭게 채굴된 경이로운 성도들의 유물이 새로운 교회에 배치되었다. 

헤르모겐은 카잔의 성도 게리와 바사누 피우스의 삶을 정리했다.


1606년 7월 3일 헤르모겐은 모스크바와 모든 러시아의 총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70 세가 넘었다.

성 헤르모겐의 가부장은 시대의 어려운 시기와 일치했다. 

특히 그는 총 대주교가 러시아 국민을 노예로 만들고, 러시아에서 일원주의와 카톨릭교를 도입하고, 

정교회를 근절하기를 원했던 조국의 반역자와 적들을 반대했다. 

1608년 6월 거짓 드미트리 2 세가 모스크바에 접근하여 투시노에서 멈췄을 때, 

헤르모겐 총 대주교는 반란군과 반역자에게 두 가지 메시지를 보내서 그들을 비난하고 훈계했다. 


"당신은 당신의 형제에 있지 않습니까? 조국을 망치고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당신을 불러 내고, 끝까지 멸망하지 않을 시간이 있는 동안 

당신의 사업에서 나를 내버려 두십시오 ...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알고 회심하여 부모, 아내, 자녀, 그리고 우리 모두를 기쁘게하십시오. 

우리는 당신을 위해 하나님을기도하기 시작합니다 ... "


한편, 모스크바에서 기근이 시작되었다. 

가부장 헤르모겐 (Patriarch Germogen)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침략자들로부터 수도원을 

이기적이고 영웅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삼위 일체-세르지오 라 브라 승려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1608년 9월에 수천 개의 강력한 분리가 Lavra를 포위했다. 

1614년 1월, 침략자들은 수치심으로 후퇴했다. 

이때 총독 대주교는 메시지를 계속 전하면서 신앙과 조국의 방어를 요구했다.


1610년, "투시 노 도둑"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기꾼은 그의 친한 동료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는 외국 침략자들을 공개적으로 반대하면서 러시아 국민들에게 고국을 지키라고 촉구했다. 

헤르모겐의 축복을 받은 성모 마리아의 카잔 아이콘이 카잔에서 옮겨져 민병대의 주요 성소가 되었다.


1611년 밝은 월요일에 러시아 민병대는 몇 달간 지속된 크렘린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폴란드는 한번 이상 크렘린에 포위되어 대사관을 족장에게 파견하여 러시아 민병대에게 

도시를 떠나라고 명령하고 사형을 선고 할 것을 요구했다. 

성자는 확고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무엇을 위협하고 있습니까? 나는 하나의 신이 두렵다. 

리투아니아인 여러분 모두가 모스크바 주를 떠나면, 

러시아 민병대가 모스크바에서 나올 수 있도록 축복하겠습니다. 

이곳에 머무르면 모든 사람이 당신을 대적하여 정통 신앙을 위해 죽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미 교도소 수감자인 헤르모겐은 러시아 국민들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러시아 국민들에게 믿음에 강하게 서서 

“당신은 당신의 영혼을 Prechistaya의 집과 믿음에 두는 방법”에 대해서만 생각할 것을 촉구했다. 


생 헤르모게네스 (Saint Hermogenes)는 9개월 이상 동안 투옥되었다. 

1612 년 2 월 17 일에 그는 굶주림과 갈증으로 순교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은 민병대를 더욱 강요했다. 

결정적인 전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3 일 전에, 거의 절망적인 러시아 군대는 금식과 기도에 소비했다. 

그리고 1612년 10월 27일, 폴란드-리투아니아 분리의 격렬한 저항이 마침내 무너졌다.


성 헤르모겐이 그처럼 흔들리지 않는 용기로 서 있던 러시아의 해방은 

러시아 국민에 의해 그를 대표해서 성공적으로 완료하게 되었다. 

거룩한 순교자 헤르모겐의 몸은 기적 수도원에 합당하게 장사되었다. 

가부장적 위업과 그의 성격 전체의 신성함은 나중에 성도의 유물과 함께 1652년에 부검에서 조명되었다. 

사망한 지 40년 만에 헤르모겐은 살았고, 

1654년 그의 불멸의 유물은 모스크바 크렘린의 가정성당으로 옮겨졌다.


정통의 순수함과 러시아 땅의 단결을 위해 지칠 줄 모르는 헤르모겐은 국가적 중요성이 크다. 

몇 세기 동안, 그의 교회적이고 애국적인 활동은 러시아 남자들에게 

그의 백성에 대한 열렬한 믿음과 사랑의 생생한 모범이 되었다. 

고위 계층의 교회 활동은 세심하고 엄격한 예배 태도를 특징으로 한다. 


뛰어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성 헤르모겐 (Saint Germogen)은 수도원 도서관에서 

주로 모스크바 기적 수도원의 가장 부유한 도서관에서 많은 것을 공부했다. 

그는 고대 사본에서 연대기의 기초가 된 가장 귀중한 역사적 정보를 썼다. 

러시아 교회 영장류와 그의 대목장 서한에는 지속적으로 역사에서 취한 성경과 예가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깊은 지식과 그 당시 교회 기록에 대해 잘 알고 있음을 증거한다. 

1913 년에 러시아 정교회는 총대주교 헤르모겐을 성자로 찬양했다. 






각종 병장비 등이 전시되어 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푸쉬킨의 스페이드의 여왕 시대를 그대로 옮긴 듯한 전시물이다.


19세기 중반, 나폴레옹 전쟁의 전승 기념과 전사자들의 위령을 목적으로 알렉산드르 1세부터 니콜라이 1세 시대에 

이 배경이 된 장소에 교회가 세워진 것 같다. 복원하기 전의 교회도 이런 형태였다.


1881년에 테러 조직에 의해 암살된 알렉산드르 2세가 습격당했을 때의 전시물.

실제와 같은 종류의 폭탄은 현대 역사 박물관에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순수 러시아 스타일의 교회, 
알렉산드르 2세의 죽음을 애도하며 '피 흘린 구세주 교회'가 그 자리에 세워졌다.

마지막 로마노프 황제인 니콜라이 2세 (1868년 5월 18일 ~ 1918년 7월 17일)

본명은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러시아어: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Романов)이다.


마지막 로마노프 황제인 니콜라이 2세


로마노프 왕조의 14번째 군주로 1917년 혁명으로 퇴위했으며, 1918년 총살당했다. 

2001년, 니콜라이 2세는 가족 및 다른 러시아 혁명시의 교회 순교자들과 함께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니콜라이 2세는 영국의 조지 5세의 이종사촌이다. 

즉, 조지 5세의 모후 알렉산드라와 니콜라이 2세의 모후 다그마르는 자매 지간이다. 

아내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는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와 이종사촌, 

즉 알렉산드라의 어머니 앨리스와 빌헬름 2세의 어머니 빅토리아는 서로 자매지간이다.


니콜라이 2세는 1868년 5월 1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당시 황태자였던 사샤와 덴마크 출신의 덴마크의 다그마르 공주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애칭은 니키. 어린 시절부터 그는 남에게 봉사하는 따뜻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유약했기 때문에 군주감으로는 적합하지 못한 성격이었다. 

1881년 황태자에 책봉되었고, 1891년 극동 방문 중 일본 제국에 들렀을 때, 

오쓰 사건의 주모자 쓰다 산조의 암살시도로 부상을 입었으나 동행중이었던 친척 요르요스에게 구조되었다.


진외재종매 알렉산드라,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이자 앨리스 공주의 4녀와 열렬한 연애 끝에 

1894년 4월 8일 코부르크에서 약혼했다.


선제인 알렉산드르 3세는 1888년 10월 29일 가족 여행 중 의문의 열차사고를 당했으며 

후유증으로 추측되는 신장병이 1894년에 발병했고 같은 해 11월 1일에 갑자기 사망했다. 

니콜라이는 장남으로서 같은 날 즉위한 뒤 같은 달 26일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에서 부랴부랴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황제가 될 준비가 아직 안 되어 무척 당황했다고 전해진다. 

공식적인 대관 행사들은 18개월 뒤인 1896년 5월 26일에 시작되었는데, 

모스크바 크렘린의 성모안식주교좌당에서 열린 대관식의 도중 

목걸이가 그의 목에서 떨어지자 모두가 이를 불길한 징조로 여기고 목격자들을 함구시켰다. 

축제기간인 1896년 5월 30일에도 역시 불길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옥외행사에 10만~수 십만 명의 군중이 몰려 1,389명이 압사하고 1,300명이 부상당했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애도의 뜻을 표하고 행사를 취소했다. 그 불길함은 1917년에 현실이 되었다.


헌신적인 남편이자 매우 가족적이고 관대한 아버지였던 니콜라이 2세는 

정치보다 가정생활에 더 큰 관심을 쏟았다. 

하지만 그는 근본적인 개혁의 소리에 대해서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제국이 변화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언론은 엄격히 감시받았고 젬스트보의 권한은 축소되었으며 비정교회 신자들과 소수민족, 

특히 유대인들이 박해를 받아 그 결과 차르와 그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1901년 교육부 장관 니콜라이 보골레포프가 암살되고 

1902년 내무장관 드미트리 스피야긴이 암살되었으며

1903년 우파 지사 보그다노비치와 스피야긴의 뒤를 이은 내무장관 플레프가 암살되었으며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범을 사냥한 경찰 간부이자 새 내무장관으로 임명된 비야체슬라프 플레베도 

1904년 6월 폭탄 테러로 암살되었다.


황후 알렉산드라는 혈우병을 앓고 있는 아들 알렉세이를 치료하기 위해 

라스푸틴을 초청했는데 이것이 큰 화근이었다. 

라스푸틴은 황후의 후원을 등에 업고 정치에 그다지 관심 없는 황제를 대신하여 

나라를 암묵적으로 다스렸는데 아주 크게 악정을 행하여 결과적으로는 

니콜라이 2세가 황제가 되고 나서 부황 못지않은 시대착오적인 반동정치를 계속 펼쳐 

전제 정치의 힘만 더욱 강해지는 결과물을 초래했다.


피의 일요일


1905년 1월 22일, 여느 때라면 성당에 갈 시간에 굶주림에 지친 15만 명의 노동자들이 

황제에게 급료를 올려달라고 청원할 생각으로 성가를 부르며 눈길을 걸어 황궁으로 갔다. 

청원서를 가지고 행진하는 대열은 점점 불어나 급기야는 20만 명을 넘어섰다. 

이 행렬 앞에는 이콘과 황제의 초상이 게양되어 있었다.


그 행렬 선두에는 러시아 정교회의 게오르기 가폰 신부가 있었다. 

브치로프의 공장에서 노동자 3명이 부당해고를 당한 것이 원인이 되어, 

가폰 신부 아래 노동자가 결집하게 되었고, 

이들이 황제에게 제출할 청원서를 들고 행진하게 된 것이다. 

이 파업은 이미 1주일 전에 발생하여 계속되다가 이날 22일에는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직접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비상수단을 쓰게 된 것이다.


청원서 행렬은 오후 2시, 광장에 집결했다. 

이 대열 앞에는 “병사들이여, 국민들을 쏘지 말아라”고 하는 플래카드가 들려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막아선 황제의 군대는 대열을 향해 일제사격을 가했다. 

뒤이어 대포도 여러 발 발사되었다. 

이 일제사격으로 1천 명 이상의 노동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 행렬에 대해 마지막으로 황제의 기병대가 돌진하여 칼을 휘둘렀다. 

이리하여 거룩한 주일은 피의 일요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자의 파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모스크바, 사라토프, 바르샤바 등지에서 노동자들은 연일 시위에 나섰다.


그 결과 66개 도시의 44만 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항의의 표시로 작업을 중단했다. 

이때까지 니콜라이 2세가 이 사건이 얼마나 큰 파정을 가져올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사이, 

10월에는 대규모의 파업이 발생하여 러시아 경제는 파탄에 빠지게 되었는데 

3000가구 이상의 귀족 저택이 파괴되고 1월 ~ 10월까지 봉기가 2700회나 일어났다.


그리고 유사한 시기 니콜라이의 숙부 세르게이(1857년 ~ 1905년, 알렉산드르 2세의 다섯번째 아들)와 

1906년 장성 두브라소프까지 암살되면서 지금까지 하느님을 받들듯이 섬겨온 황제의 명령에 의해서 

수많은 동료들이 살상된 사실을 알게 되자 러시아 민중 속에 신앙과 같이 뿌리 깊던 황제 숭배는 

일시에 무너지고 사람들은 황제에 대해 적대감을 품게 되었다.


당시 조선과 만주를 놓고 일본과 전쟁 중(러일 전쟁)이던 러시아 정부로서는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위기를 맞은 셈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포츠머스 회의에 전권대사로 파견된 세르게이 비테는 

의회를 구성하겠다는 약속으로 국민을 설득하여 가까스로 난국을 진정시켰으나, 

제국 정부의 도덕적 정통성이 무너짐으로써 로마노프 왕조의 붕괴는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 피의 일요일 사건은 훗날 러시아 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무능함과 더욱 악독해진 전제정치


니콜라이는 정치적으로 무능했고, 미신을 신봉하기도 했다. 

라스푸틴은 니콜라이 2세를 사실상 허수아비로 만들고 1881년의 임시법을 

계속 적용, 확대하여 언론과 사상을 엄격히 통제했고, 교육에도 일부 제한을 가했다. 

젬스트보와 시 정부의 권한은 더욱 축소됐다. 

젬스트보의 과세대상도 줄였고, 젬스트보 위원과 고용인의 임명 비준을 거부하여 

정권에 충성하는 사람만이 공적인 지위를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때 라스푸틴은 라스푸틴대로 황권을 등에 업고 사리사욕을 챙기느라 급급했다.


니콜라이 2세의 치세기간동안 러시아의 국민들로부터 착취한 보물들은 전부 라스푸틴이 가로챘다. 

종교 핍박도 더욱 심해졌다. 

분리파 정교도가 심한 탄압을 받았고, 아르메니아 교회와 그 밖의 종파들에도 일부 제약이 가해졌다. 

유대인의 지위도 더 악화됐다. 

유대인의 토지 매입을 일부 규제했고, 1903년 베사라비야의 키시뇨프에서 시작돼 

우크라이나 일대로 확대된 대규모의 유대인 약탈과 학살을 방관했다.


1809년 러시아에 합병된 이래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받고 있던 핀란드에도 

강력한 러시아화 정책을 추진하여 많은 권리를 박탈했다. 

반대 운동이 격화되면서 핀란드는 혁명 세력의 주요 근거지가 됐다. 

이렇게 니콜라이 2세는 파계성직자인 라스푸틴에게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여 

군주로서의 리더쉽적인 자질에 대해 의심받기도 했다.


경제 면에서는 1906년까지 비테를 계속 중용, 

강력한 산업화 정책으로 큰 성과를 낳았으나, 균형 잃은 산업화는 결국 위기에 처하게 된다.


피의 일요일 이후


1905년의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로 진전되지않다가 1907년 즈음 가서야 겨우 진전되어 갔다. 

또한 러시아에는 표트르 스톨리핀 총리의 개혁에 힘입어 연평균 7%의 산업 성장화를 보이면서 

한때 로마노프 왕조의 위세를 떨치기도 했으나 

1911년 9월 14일 스톨리핀 총리까지 암살되면서 개혁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한편 노동자와 농민층이 황제에 대한 불만세력이 여전하다고 여긴 니콜라이 2세는 

이러한 국내의 불만을 진정시키기 위해 제1차 세계대전 때 총동원령을 내려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 

처음에 민중들은 애국심에 불타서 1차세계대전에 지지를 하였고, 

무려 1500만 명이 전선에 나가 지원했었다.


하지만, 지휘관들의 무능함이 여실히 드러난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자멸적인 대패를 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군에 지원한 것 때문에 러시아의 노동력은 급격히 저하되어,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국내의 불안은 고조되어가면서 제정 러시아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1914년 8월 ~ 1915년 8월까지 러시아군은 병력의 절반을 잃어 

140만 명이 전사하고 97만 6000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각지에서 파업과 시위가 발생하고, 

니콜라이 2세 황제는 1915년부터 직접 최전선 전투 지휘에 나서며 국정은 황후에 맡기고, 

황후를 등에 업은 라스푸틴을 중심으로 자연히 되어가면서 국정도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특히 라스푸틴의 폭정과 착취는 전대미문의 엄청난 규모에 달했다. 

예를 들어 민중들 사이에서는 검열되지 않은 책 같은 것이 출판되어 

그리고리 라스푸틴과 황후, 공주들이 불건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등 내용의 소문이 파다했을 정도였다.


결국 황제와 친했던 관리들마저 라스푸틴의 악행에 치를 떤 나머지 

사퇴하여 혁명파에 붙은 자도 있었는데 이후 1916년 12월, 

니콜라이 2세와 친척 측근인 펠릭스 유수포프 공작을 비롯한 관리들이 

라스푸틴을 죽이려고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하지만 라스푸틴은 극약을 먹고도 

2시간 동안 춤을 추는 등 초인적인 체력을 보여주다가 총에 맞고도 죽지 않았다.


그 후 라스푸틴의 변사체가 발견되었는데 사망 원인은 독극물도, 총살도 아닌 익사였고 

혁명의 기운은 날이 갈수록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진압령과 배신


1917년 3월 8일, 마침내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9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이 파업 데모에 참가하여 “빵을 달라”고 외쳤다. 

이틀 후에는 시위가 시내 전체로 확산되었다(2월 혁명). 

시위대는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붉은 깃발을 휘날렸다.


이에 니콜라이 2세는 알렉산드라의 총신이자 내무장관 알렉산드르 프로토포포프에게

 '체제안정에 유지해라'는 사실상 무력진압을 명령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수만 명의 군 병력과 예비군을 배치시켜 시위대를 저지하려 했으나 

3월 12일 월요일 아침 6시 유명한 볼린스키 연대의 한 하사가 자신의 지휘관을 쏘는 것을 시작으로 

다른 세모노프스키, 이스마일로프스키, 리토프스키, 

마지막에는 표트르 대제가 직접 창설한 역사가 오래된 프로오브라젠스키 수비대까지 혁명에 가담했다.


이로써 군대는 물론이요 예전에 혁명가들을 칼로 살해했다던 악명 높은 기병대조차도 

시위대에 동정심과 자책감을 느껴 결국 혁명군에 가담했고 그리하여 혁명의 물결은 더욱 거세졌다.


결국 시위진압 지휘를 하던 사령관들은 진압을 포기했으며, 

황제와 친했던 관리들마저 사퇴하여 혁명파에 붙은 자들도 있었다.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며 절망에 빠진 니콜라이 2세는 제위에서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당시로서는 큰 변화를 예고하는 선언을 하게 된다. 

정부는 총사퇴하고,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케렌스키의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원래 니콜라이 2세는 자신의 아들 알렉세이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어린 나이인데다 혈우병을 앓고 있는 알렉세이였기에 

자신의 동생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에게 제위를 양위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노동자와 농민들은 미하일 역시 니콜라이 2세와 다를 바 없다 하여 반대했다.


이러한 사태를 지켜보던 임시 정부는 미하일에게 제위를 버릴 것을 권고했고, 

미하일은 그러한 제의를 받아들였다.

미하일은 "저 또한 폐하처럼 백성들로부터 욕들을 짓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로써 군주제는 폐지되었고, 

304년 동안 지속되어 온 독일계 왕조인 '홀슈타인-로마노프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된다.


임시 정부와 10월 혁명


2월 혁명을 주도했던 케렌스키 임시정부(멘셰비키가 다수를 차지)가 집권해도

 '가난한 국가'라는 오명을 벗기지는 못했다. 

케렌스키가 내놓은 정책은 아주 파격적이고 근본적인 개혁안을 내놓았지만, 식량 부족만은 여전했다.


1917년 6월에 대공세를 펼쳤으나, 자멸에 가까운 패배를 겪고 1917년 9월 어느 날, 

당시 러시아의 영토였던 라트비아에서는 독일의 겨자가스 살포로 

수많은 러시아의 사병과 장교들이 죽음을 당했다.


당시 수도였던 페트로그라드(現 상트페테르부르크)조차 

독일-오스트리아 주도의 동맹국들에게 점령을 당할 것이라는 분위기가 나돌았다. 

그 시기에 케렌스키 내각은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에게 전복당할 뻔한 아찔한 상황을 겪게 된다.


1917년 10월 어느 날, 민중들은 또 다시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2월 혁명이 피를 많이 흘렸는 데 반해, 

10월 혁명은 무혈 혁명으로 마무리되었으며 기간도 길지 않았다. 

여기에 케렌스키 내각은 퇴임을 선언하게 되고 레닌 주도의 볼셰비키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된다.


하지만 케렌스키는 니콜라이와는 달리 

서유럽의 제도를 러시아에서 제도화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자유인의 몸이 된다.

케렌스키는 어렸을 때 레닌과 동문이었고 당시 심스부르크 학교의 교장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레닌이 힘들어할 때 항상 위로해주었다고 한다. 

케렌스키나 레닌은 둘 다 제정반대자였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케렌스키는 당시 러시아 인구의 20%도 채 안 되었던 '대졸자'였고, 

신용을 잃지 않는 성격 덕분인지 정계 진출도 쉬웠다. 

실제로 1912년 두마에도 진출했다. 그는 내각으로 집권하여 온건 정책을 내세웠다.


퇴위 이후


니콜라이의 처리를 놓고 사형을 하자는 볼셰비키 강경파와 

수감으로 끝내자는 멘셰비키 및 케렌스키 일파의 의견이 대립했다. 

하지만 레닌이 주도하는 볼셰비키가 집권한 뒤 제1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였던 1918년, 

러시아에는 내전의 기운이 감돌았다. 

국민들은 기근으로 죽어갔고, 볼셰비키에 반감을 드러낸 자들은 

그들로부터 숙청 당하여 백군으로 돌아선 자도 있었다. 

니콜라이가 퇴위당한 이후 케렌스키와 온건파 및 일부 멘셰비키는 

니콜라이의 동생 미하일 대공을 황제로 추대했다. 

그러나 미하일은 1개월만에 암살당하고 만다.


그리고 볼셰비키가 동맹국과 상대로 맺은 가혹한 조약 때문에 

서방 연합국들은 물론이요 일본과 미국조차도 볼셰비키를 비판하여 백군을 지원하기에 이른다. 

이들 중에는 수억 달러의 돈을 들여서라도 우랄 지방에 감금된 니콜라이 가족을 구해주자는 자도 있었다.


백군은 제정 러시아 시절의 장교들의 강력하고도 냉철한 지휘력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특히 알렉산드르 콜차크, 안톤 데니킨, 라브르 코르닐로프 등이 지휘하는 백군은 

볼셰비키 정권을 심각하게 위협했었다. 

하지만, 백군에는 구체제로 구성된 지주 출신들이나 장군들이었으며, 

이들에게 뚜렷한 제도나 정책이 없었다.


백군의 목표는 단순히 볼셰비키 정권을 무너뜨리고 구체제로 회복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기에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백군에 등을 돌려 볼셰비키 정권에 지지했다. 

결국 백군은 수치스러운 패배를 당하였다. 

10월 혁명으로 내각에서 물러난 케렌스키도 백군을 지원했다가 

참패를 당하여 프랑스로 망명생활을 하게 되었다.


2월 혁명 이후의 니콜라이


2월 혁명 이후, 니콜라이와 그의 가족들은 황제의 명령이 아닌 케렌스키의 명령을 따르게 된 군인

러시아가 아닌 케렌스키 개인 소유의 군인들의 감시를 받아 가면서 우랄 지방에 거처하게 되었다.


약 8개월 동안 단란한 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예전에 깨끗했던 궁전이 아닌, 평범한 민가(民家)에 살아야 했다. 

군인들은 그들의 대화까지도 엄격히 검열했다. 

이때 황후 알렉산드라만은 아주 지독한 신경쇠약에 시달리게 된다.


니콜라이와 그의 가족들은 1918년 7월 어느 날, 

유대인 출신의 야코프 스베르들로프의 적군(赤軍)에 의해 

예카테린부르크의 이파티에프 하우스에 감금되었고 바로 그날 총살형을 당하였다.


이들의 시신은 전원 불태워져 소각되었고, 

소각된 시신들은 1991년에 들어서야 발굴되었다. 

이때 적군은 니콜라이 일가족들을 서둘러 처형했는데 

니콜라이 황제의 지지세력인 백군(白軍)이 

그들을 구출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니콜라이의 사후


사후 무려 73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소련이 해체되었고 러시아 연방이 들어서면서 

1991년 니콜라이 2세와 그의 직계가족들은 순교자로서 러시아 정교회의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1991년 예카테린부르크 근처의 숲에서 발견된 시신이 유럽 족보 기록을 바탕으로 

니콜라이 2세 및 황후 가문의 사람들과의 혈연 관계 대조를 통한 DNA 검사에서 

니콜라이 2세 가족의 시신으로 밝혀졌다.


이후 러시아는 니콜라이 2세 가족의 시신을 찾았다고 공식 발표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베드로-바울로 성당에 안치하였다. 

2008년 10월 1일에 러시아 대법원은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정치적 탄압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판결을 내려, 그의 정치적 복권이 이뤄지게 되었다.

















































박물관의 전시물품은 혁명 이후를 제외한 러시아의 전 역사에 관련된 것을 

석기시대의 것부터 전시해 놓고 있으며, 전시품이 너무 많아서 한꺼번에 전부 돌아보기는 힘들다. 



국가 행사 등에 사용되고 있는 크렘린 안의 대궁전 천장을 본따 만든 입구


1883년 알렉산드로 3세의 대관식에 맞춰 개관했으며,

1986년부터 2002년까지 내부를 개조해서 다시 오픈하였다.



박물관 천장에 그려진 러시아 황제들의 초상화는 참으로 대단하다.


천장에 그려진 러시아 황제들의 초상화



천장에 그려진 러시아 황제들의 초상화


천장과 벽 등 내부 인테리어에서 러시아의 독특한 양식을 엿볼 수 있다.



노브코로드와 키에프공국 시대 전시실


이 박물관은 2층과 3층으로 나뉘어져 있고, 2층에는 원시시대부터 류릭왕조, 로마노프왕조 전까지.

3층에는 17세기 로마노프 왕조와 표도르 대제부터 최후의 니콜라이 2세까지의 시대를 순서대로 전시되어있다.

러시아 역사가 소련이 되기 전까지 전부 알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키에프공국은 동(東)슬라브 민족이 세운 최초의 나라이다. 

창시자는 류리크의 친족이자 왕조의 후계자인 올레크 공(公)으로 

오늘날 노브고로드 부근였던 근거지를 882년 키예프로 옮기면서 시작된다.

12개의 부족으로 구성되었던 동슬라브 부족들이 키예프 공국에게 정복되면서 통일이 되었다.


원주민인 슬라브 및 우랄계와 북유럽에서 이주해 온 바이킹계 주민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이미 올레크의 뒤를 이은 스뱌토슬라프 대에 하자르의 수도 아틸을 함락했고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을 거의 점령하는 등 그 군사력을 입증한 바 있다.  

이런 키예프 공국의 병사들의 활약을 본 동로마 제국은 바랑인 친위대를 창설하기도 했다.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12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발트해에서 우랄산맥 북부에 걸친 광대한 영역을 점유했던 중세 루스국가이다. 

공화국 시민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존엄한 대(大) 노브고로드(Gosudař Gospodin Velikij Novgorod)라고 불렀다. 


학자들은 노브고로드 공화국이 당대로서 상당히 높은 문헌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는 데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고고학자들이 천여 점의 자작나무껍질 문서를 발굴했는데, 그 연대는 모두 11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걸쳐 있다. 

이 문서들 중 약 950 개는 노브고로드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화재로 노브고로드의 문헌 거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며, 

발굴된 것과 유사한 문서 2만여 점이 도시 어딘가에 파묻혀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1471년 7월 모스크바군은 셸론 강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그로 인해 노브고로드의 자유는 심대한 침해를 받게 되었다. 

노브고로드는 이후 7년 동안 형식적인 독립을 유지했으나, 마침내 1478년 이반 3세가 군대를 보내 도시를 점령했다. 

이반은 학살을 벌이고 베체를 파괴했으며, 도서관과 기록보관소를 불태웠다. 

이 시점에서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역사는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이반은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영토 81.7%를 차지하고 그 중 절반은 자기 땅을 삼고 나머지는 대공족들에게 분배하였다.


여러 공국으로 분열된 키예프 공국


12세기 초반부터 흑해와 스칸디나비아를 잇는 무역로가 쇠퇴함에 따라서 키예프 공국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당시 키예프 공국은 체계적인 세금 징수 시스템이 잡혀 있지 않은 상태였기에 무역 쇠퇴는 치명적이었다. 

더욱이 키예프 공국은 체계적인 왕위 계승 시스템이 갖춰졌다기 보다는 왕위 계승자들이 각 지방 도시를 다스리며 

상황에 따라 서로 내전을 벌이는 상태였기에, 국력을 단결시키기 어려웠다. 

종종 볼로디미르 모노마흐 같은 유능한 지도자들이 나타나서 

쇠퇴기에 접어든 키예프 공국을 중흥시켰을 때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마련되지 못했다. 

하자르 칸국과 페체네그인을 주무르던 키예프 공국이었지만, 

말기에 접어들면 유목민족인 쿠만과 볼가 불가르의 침략 앞에 끙끙대기 시작한다. 

키예프 루스의 중심지였던 보리스테네스 강(드니프로 강) 일대 비옥한 흑토 평야는 

전성기 시절에는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평야 지대 특성상 유목제국의 기습과 침략에 매우 취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13세기 중반에 몽골 제국이 침공하면서 처참하게 멸망하였다. 

키예프 공국의 난민들은 북쪽에 척박한 삼림 지대로 대거 피난을 떠났다 한다.

이후 키예프 공국의 영토 대부분 타타르의 멍에에 시달리게 된다.


류리크 왕조의 블라디미르 시대.


류리크 왕조는 초대 노브고로드 공국 대공 류리크를 시조로 하는 동유럽의 가문. 

700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존속하면서 수없이 많은 러시아 공국들의 대공들과 

그들을 하나로 묶은 루스 차르국의 차르를 배출해 내며 동유럽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블라디미르는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2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류리크 왕조의 시조인 류리크는 여러 설화에서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바이킹으로 전해진다.


류리크 왕조는 이후 전세계를 강타한 몽골 제국과 그 후계인 킵차크 칸국의 침략과 억압 속에서도 명맥을 유지하다가 

새로이 성장한 모스크바 대공국이 러시아 통합, 몽골 축출의 업적을 이루고 루스 차르국으로 거듭나면서 

차르를 배출해 내는 황가로 거듭난다. 

그러나 제권 강화를 위해 친척들을 숙청하고 황태자와 임신한 며느리를 직접 때려 죽인 이반 4세의 화끈한 폭정과 

그 뒤를 이은 병약한 표도르 1세의 요절로 류리크 왕조는 단절되고, 

러시아의 제위는 혼란 끝에 로마노프 왕조에게 넘어간다. 

이 과정에서 굉장한 막장 드라마가 시전되었는데 이반 4세의 막내아들인 우글리치 공 드미트리라 자처한 

가짜 드미트리가 3명씩이나 나와서 그 중 한 명이 차르에 즉위하여 

9개월 동안의 치세기간을 지내는 데 성공하는 등 왕조가 개판이 되었다.


블라디미르 - 수즈달 시대


블라디미르 - 수즈달은 1157년부터 1331년까지 동유럽 일대에 존재했던 공국이었다. 

모스크바 대공국의 전신이며 수도가 로스토프 벨리키, 수즈달이였던 적도 있어서 

로스토프-수즈달 공국으로도 불린다.


당시 키예프 대공국은 류리크 왕조 일원에게 분할상속된 여러 루스 공국을 휘하에 거느리고 있는 대공국이었다. 

키예프의 대공은 다른 공국들의 공작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여서 키예프의 대공이 되기 위해서 

다른 루스 공국의 공작들은 키예프를 점령하여 키예프의 대공이 되었고 

그 키예프를 다른 공작이 점령하여 키에프의 대공 자리를 뺏는 식이 되었다. 

유리 돌고루키도 키예프를 점령해 키에프의 대공이 되었다.

블라디미르-수즈달은 몽골로부터의 독립과 루스의 완전 통일을 열망한 

모스크바 대공국의 확장 정책에 의해 1331년 흡수되었다.



수즈달의 크렘린, 로즈데스트벤스키 성당의 13세기의 문 '황금의 문'을 모방했다.


13세기 타타르의 멍에


타타르의 멍에는 1240년부터 1480년까지 루시가 몽골 제국의 지배를 받은 시기를 말한다.

칭기즈 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은 1236년 조카 바투에게 15만의 병사를 주어 다시 루스로 보냈다. 

전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은 바투의 유럽 원정이 시작된 것이다. 

바투의 원정군에 맞선 루스의 군대는 용감히 싸웠으나 몽골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단지 바투의 군대가 대군이라서만이 아니었다. 

몽골군은 당시 어느 군대도 따를 수 없는 조직력과 무기 ·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몽골군은 기동성이 뛰어난 기병으로, 중장 기마대와 경장 기마대를 함께 운용했으며, 

군대를 10명, 100명, 1,000명 단위로 편성하고 지휘부에는 참모부를 두는 등, 잘 조직되어 있었다. 

또 정찰과 첩보공작을 조직적으로 전개했고, 투석기와 파벽기를 앞세운 공성술도 뛰어났다.


뿐만 아니라 전략도 다양하게 구사했다. 

예컨대 야전에서는 보조부대를 진의 중앙에 두고 양측방에 활을 가진 주력부대를 배치했다. 

적병이 돌격해 들어오면 중앙이 후퇴하면서 양측방에서 적에게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적병은 처음엔 이기고 있다고 생각하나 곧 함정에 빠져들었음을 깨닫는다.


몽골군은 적의 용기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했지만 자비심을 베푸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칭기즈칸이 '후회는 동정의 열매'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바투는 우랄 산맥을 넘어 먼저 볼가 불가르인을 침략했다. 

그리고 1237년 뜻밖에도 북쪽에서 돌연히 나타나 루스-목셀 대공국인 랴잔 대공국으로 들이쳤다. 

랴잔의 병사는 물론 온 시민이 나서서 끝까지 항전했으나, 

5일간의 싸움 끝에 도시는 함락되고 시민들은 몰살당했다.


다음 차례는 블라디미르 대공국이었다. 

1237~1238년 사이의 겨울에 몽골군은 얼어붙은 강을 빠른 속도로 건너다니며 

당시 루스-목셀 최강의 군대를 가지고 있던 대공국의 여러 도시를 휩쓸었다. 

아마도 역사상 루스를 겨울에 침략하여 성공한 유일한 예일 것이다.


이어서 야로슬라블과 트베르, 볼가 강변의 여러 도시가 몽골군의 발굽 아래 초토화됐다. 

노브고로드를 비롯한 북서부 루스-목셀 대공국만은 유일하게 화를 면했다. 

얼음이 풀려 그 일대가 뻘수렁으로 변하면서 몽골군이 전진을 포기하고 초원지대로 말머리를 돌렸기 때문이다.


초원지대를 평정하며 잠시 재정비를 마친 몽골군은 이제 키예프 루스로 들이닥쳤다. 

1240년 키예프가 점령되어 주민이 모두 죽거나 노예가 되었다.


몽골군은 이어 갈리치와 볼린을 휩쓸고 루스의 국경을 넘어 폴란드와 헝가리로 쳐들어갔다. 

폴란드에 침입한 몽골군은 계속 서진해 슐레지엔의 발슈타트 전투에서 독일군을 크게 무찔렀고, 

헝가리로 진출한 몽골군의 선발대는 오스트리아까지 나아갔다. 

온 유럽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것이다.


그 때 몽골 본국의 카라코룸에서 오고타이 칸이 죽었다는 전갈이 왔다. 

바투는 군대를 초원지대로 불러들여 1243년 볼가 강변의 사라이를 도읍으로 킵차크 한국을 세웠다. 

이후 거의 대부분의 루스는 킵차크의 칸에게 무릎을 꿇고 몽골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오고타이 칸이 사망하고 장남 구유크가 몽골 제국 제 3대 칸이 되자, 

바투는 루시땅에 남아 킵차크 한국을 세우게 된다. 


동유럽을 정복한 몽골의 바투는 볼가 강변의 사라이를 도읍으로 킵차크 한국을 세우고 

거의 대부분의 루스를 지배한다. 

루스인들은 킵차크 한국을 '졸로타야 오르다'라 부르고 몽골족의 루스 지배를 '타타르의 멍에'라 했다. 

'졸로타야 오르다(금장한국, 金帳汗國)'는 

'황색 천막 속에서 칸이 중심(황색은 중앙의 상징이기도 함)에 앉아 지배하는 나라'라는 뜻이다. 


'타타르의 멍에'는 루스의 서부 지방에서는 약 1세기, 북부와 중부 지방에서는 약 2세기, 

남동부 지방에서는 3세기 이상 이어졌으며, 지역과 시기에 따라 지배의 강도가 달랐다. 

몽골족이 루스를 침략하면서 루스에 끼친 피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대량학살로 인한 인명의 손실, 약탈과 파괴로 인한 재산의 손실, 

노예로 팔려간 포로들은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조세의 수취로 땅은 척박해지고 사람들은 절대 극빈에 시달렸다. 


몽골은 키예프 루스의 유산을 송두리째 사라지게 했다. 

키예프 루스의 찬란한 문화는 그 뿌리를 뽑히고 문화의 암흑시대로 접어들었다. 

도시와 마을의 몰락은 각계 각층의 기반을 없애 상업, 공업, 경제, 산업, 과학기술을 멸망시키고 

루스를 농업 일색의 사회로 바꾸어놓았다. 

그리고 북서부 일부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민회와 함께 시민의 자유를 박탈해버리고 

국민들을 질곡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루스를 지배하게 된 몽골은 처음에는 직접 다루가치(총독)와 바스카크(사정관)를 파견해서 

행정 · 징세 · 징병 등의 업무를 집행했다. 

세금을 거두기 위해 인구조사도 세 차례나 했다. 

1275년에 실시한 세 번째 인구조사에서 당시 루스 인구는 약 1,000만 명이었다. 

세금은 납세능력에 관계없이 머릿수대로 거두었다. 

사정관의 징세는 철저했고, 이에 저항하는 주민들은 참혹하게 진압됐다. 

인구조사 결과는 징병에도 이용돼, 많은 루스인 청년이 몽골을 위해 병역에 복무했다.


그러나 루스인의 반발을 고려하여, 13세기 말에 루스의 여러 공에게 

권한을 위탁하고 세금을 받는 간접지배 방법으로 전환했다. 

킵차크의 칸은 루스 공들에게서 세금을 받고 그들에게 공국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허가장인 

야를리크를 내주었으며, 그들 가운데 가장 믿음직한 공에게 '전 루스의 대공' 칭호를 주어 

러시아의 모든 공후 위에 서게 했다. 

루스의 공들은 야를리크를 받기 위해, 그리고 '전 루스의 대공' 칭호를 얻기 위해 

앞다투어 사라이를 드나들었고, 킵차크의 칸은 루스 공후들의 대립과 반목을 교묘히 이용하여 지배를 강화했다.


몽골 지배하에서 루스는 북서부 일부를 제외하고는 상업, 공업, 경제, 산업, 과학기술이 몰락하여 

농업이 유일한 주된 나라로 변했다. 

그나마 혹독한 기후와 황폐한 땅에서 쉽게 농업을 정착, 발전시키는 것마저도 어려웠다. 

게다가 몽골의 징세가 빈약한 루스 경제를 더더욱 쥐어짰다. 

한 역사가는 몽골의 수탈을 이렇게 표현했다.


"한 거대한 기생충이 루스인 대중의 생체에 달라붙어 그 즙을 빨아먹었다. 

그리하여 그 생명력을 고갈시켰고 때때로 그 생체 안에 커다란 혼란을 일으켰다. 

농민들의 지위는 계속 악화되어 점점 더 지주에게 예속돼갔다. 

그와 함께 여러 단계의 군신 관계가 형성되면서 귀족들의 봉건제후화 경향도 강화됐다. 

루스는 몽골의 지배를 거치면서 봉건제 하의 중세 유럽과 유사한 사회구조를 갖게 된다."


몽골 지배하에서 가장 큰 발전을 보인 것은 동방정교회였다. 

가혹한 지배자였던 몽골인도 종교에 대해서만은 가장 관대했다. 

교회와 수도원은 면세특권을 부여받았고, 재산도 보호를 받았다. 

또 사라이에까지 주교 관구를 설치하고 교회도 건립했다. 

루스의 여러 공도 자신을 위해 기도해준 대가로 교회에 많은 재산을 기증했다. 

몽골 지배 말기에 이르면, 경지의 약 1/4이 교회의 소유가 된다.


모스크바가 가장 화려했던 시대



이반 5세 시절에는 암염이 아주 귀했다고 한다.


암염으로 만든 도구들도 전시되어 있다.


표도르 대제 부모님의 초상화가 있는 방.




보리스 고두노프 (Boris Godunov)의 시대


유명한 오페라 대작으로 만들어진 보리스 고두노프 (Boris Godunov) 시대 

이 후 류리크 시대는 끝나고 러시아는 전국 시대를 거쳐 로마노프 왕조의 시대가 된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황권 찬탈의 야심을 품고 황태자를 살해하고 그 망령에 시달리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의 러시아는 일명 ‘동란 시대 (Time of Troubles)’였다.  

‘동란 시대’란 러시아 역사에서 류리크 왕조의 멸망과 로마노프 왕조 탄생 사이의 공백기를 일컫는다.


1601년에서 1603년 사이에 러시아는 인구의 3분의 1 가량인 2백만 명이 죽는 대기근을 겪었다.

또한 1605년에서 1618년 사이에는 가짜 드미트리 전쟁으로 인해 폴란드 제1공화국에 일시적으로 점령당하여

민중들이 고통을 겪은 아주 힘들었던 고난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황제 이반 4세의 최고 고문으로 활약했으며 자신의 여동생을 

황제의 아들 표도르 1세에게 시집보내며 엄청난 권력을 누렸다. 

이반 4세의 사망 이후 표도르 1세가 왕위에 오르자 보리스는 황제의 배후에서 섭정으로서 통치하였다.


보리스는 섭정 기간동안 비밀경찰들을 이용해 자신의 대항세력에게 심문, 고문, 사형 등을 감행했다.

표도르 1세가 사망한 후 보리스는 정식 황제가 되어 1598년부터 1605년까지 재위했다.


이후에 황제가 된 보리스 고두노프는 몇몇 왕족들을 추방하고 귀족들의 힘을 견제해 자신의 지배력을 확고히 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러시아 대기근이 닥치고 보리스는 일명 ‘가짜 드미트리 전쟁’이라고 불리는 

폴란드-모스크바 전쟁의 시작과 함께 사망한다.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는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쉬킨의 동명 희곡을 원작 삼아 무소륵스키가 완성한 유일한 오페라로, 

‘러시아판 맥베스’라 불릴 만큼 권력의 비극적 속성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작품이다. 

솔로 가수의 화려한 기교와 아름다운 선율의 아리아가 중심인 이탈리아 오페라와 달리, 

또다른 주역인 민중들의 장엄하고 숙연한 합창과 중창이 두드러지는 무대다.


17세기 초, 이반 4세의 어린 아들 드미트리를 살해하고 왕좌에 오른 보리스 고두노프는 

민중의 기대와 의심을 동시에 받으며 내내 시달린다. 

죽은 드미트리를 사칭하는 젊은 수도승 그리고리가 폴란드 군대를 앞세워 나타나자 

보리스 고드노프는 스스로 무너지지만, 

민중들은 가짜 드미트리를 환영하며 새로운 비극을 예고한다.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는 그의 생애 중에서 그가 표도르 1세 뒤에서 섭정하던 시기부터 사망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전 황제였던 이반 4세의 어린 아들 드미트리가 죽고 사람들은 당시 섭정하던 보리스가 그를 죽였다는 의혹을 거두지 않는다.

이에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고 심지어 드미트리의 망령에 시달리기까지 한 고두노프는

결국 자신이 드미트리라고 주장하는 ‘가짜 드미트리’의 등장과 함께 비극적으로 사망한다.


이 ‘가짜 드미트리’는 사실은 왕자 드미트리가 죽지 않았다는 소문에 힘입어

자신이 사실 살아있는 진짜 드미트리라고 주장했던 그리고리 오트레피예프라는 사람이다.


푸시킨은 이처럼 러시아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비극적인 희곡을 탄생시켰으니 그것이 바로 <보리스 고두노프>이다.

작곡가 무소륵스키는 이 희곡과 니콜라이 카람친의 '러시아 정부의 역사'라는 책을 바탕으로 대본을 작성했고

개정판본이 187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 초연 상영되었다.


우리나라 국립오페라단에서도 2017년 4월 20~23일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상영한 바 있다.



국립 역사 박물관 3층 로마노프 왕조

유명한 표트르 1세의 초상화와 머리 동상. 18세기 초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황제다.


표트르 1세는 키가 무려 2m 3cm의 거구에 얼굴은 이렇게 생겼다고 한다.


표트르 1세의 커다란 손바닥이 부조로 남아 있다.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로마노프 (Пётр Алексе́евич Романов 1672 ~ 1725년)


루스 차르국 로마노프 왕조의 4대 차르이자 러시아 제국의 초대 황제(임페라토르)로 

표트르 대제(표트르 벨리키 Пётр Великий)라고 불린다. 

표트르는 베드로에서 따온 이름이므로 문화권에 따라 '피터 대제(Peter the Great, 영어권)', 

'페터 대제(Peter der Große, 독일어권), '피에르 대제(Pierre le Grande, 프랑스어권), 

'페드루 대제(Pedro o Grande, 포르투갈어권)'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몽골-타타르의 멍에 때문에 서유럽과의 교류 단절 및 중세 수준 문화에 머물던 러시아를 발전시키기 위해 

급진적인 서구화를 밀어붙인 지도자다. 

지나친 서구화의 반발로 여러 번의 정변이 있었으나, 모두 피의 숙청으로 마무리했고, 

스웨덴과의 대북방전쟁에서 대승해서 변방의 국가였던 러시아가 

이후 유럽에 주요 정치세력으로 당당히 등장할 수 있게 한 사람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훗날의 이오시프 스탈린과 비견되는 인물. 스탈린이 존경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는 스탈린 시절에 표트르 대제가 높이 평가된 사실을 봐도 알 수가 있다.


참고로 키가 엄청나게 컸는데 지금 기준으로도 장신이다 못해 거인인 203cm였다. 

오늘날로 따지면 농구선수나 배구선수에게서나 나올 법한 체격.


로마노프 왕조의 여제시대를 전시하고 있다.


예카테리나 2세와 주변 인물들의 초상화

에카테리나 2세가 거느린 남자들 사진도 모두 전시되어 있다.


예카테리나 2세 (1729년 5월 2일 - 1796년 11월 17일)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 제국의 황후이자 여제(1762년 - 1796년)다. 

로마노프 왕조의 8번째 군주로, 본래는 프로이센 슈테틴 출신의 독일인이었다. 

무능한 남편 표트르 3세를 대신해 섭정을 맡았으며, 화려한 남성 편력으로도 유명했다. 

1762년 남편 표트르 3세를 축출하고 임페라토르가 되었다.


그는 남편인 표트르 3세를 축출하기 이전부터 정부들을 두었다. 

67세 되던 해 뇌졸중으로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았을 때에도 나이가 젊은 정부들을 두고 있었다. 

사실상의 남편으로 여겨지던 포템킨과의 관계가 끝나고 난 후 

그녀의 공식적인 애인 또는 첩은 20명 이상 바뀌었다. 

그녀는 평민 출신 사병과 시종을 비롯한 잘생기고 신분이 낮은 젊은 남자들을 정부로 골라서 동거했다. 

이들 중 몇명은 적당한 때에 두둑한 상금이나 관직을 주어 내보내는 한편 

일부는 평생토록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후일 이들 중 한 사람은 자신들은 여제의 남자 후궁이나 남자 첩이라고 증언했다. 

그의 증언대로 예카데리나의 남자들은 황제의 후궁과 같은 예우를 받았다.


그녀의 남성 편력에 대한 비판은 당대에도 나왔지만 그는 남자 첩, 후궁을 두는 것이라며 

군주가 후궁과 정부를 두는 것을 근거로 들어 이를 반박했다. 

또한 옐리자베타 여제가 많은 남자와의 관계로 염문을 뿌렸던 것을 예를 들며 

자신은 정식으로 남자 후궁을 둔 것이라며 반박했다. 

그녀는 권력과 국정, 정복 사업 등에 집중하였지만 한편으로 

서로 함께 사랑을 나누는 즐거움을 끊임없이 희구하기도 했다 한다. 

지능이 낮았던 남편과의 원만하지 못했던 성생활은 일찍부터 그녀의 그런 욕구를 더욱 부추겼다.


1745년 러시아의 황태자이던 표트르 3세와 결혼했으나 

지능이 부족하던 남편을 대신하여 섭정을 했다. 

그러나 남편 표트르에 대한 평판이 나빠지자 

1762년 정변을 일으켜 남편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표트르 대제의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러시아를 유럽의 정치무대와 문화생활에 완전히 편입시켰다. 

내각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제국의 행정과 법률제도를 개선했으며 

크림 반도와 폴란드의 상당부분을 차지함으로써 영토를 넓혔다. 

계몽주의 사상에 감명하여 볼테르 등과도 문학으로 교류하였고, 

문학과 예술, 학예와 교육 등의 장려에 큰 관심을 쏟았고 

각 지방관들로부터 직접 정무를 결재받음으로써 황권을 강화시켰다.


투르크와 싸워 영토를 넓혔으며 폴란드 분할의 주역의 한사람이었다. 

내각의 도움으로 러시아 제국의 행정과 법률 제도를 개혁했다. 

본래 이름은 조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 폰 안할트체르프스트

(독일어: Sophie Friederike Auguste von Anhalt-Zerbst)며, 

개명한 이름은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러시아어: Екатерина Алексеевна)다. 

루터교 세례명은 조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 러시아 정교 세례명은 예카테리나, 

이후 그는 러시아 정교회 세례명을 이름으로 사용했다. 

행정 개혁과 내치, 문예 부흥 등의 공적을 높이 평가해 예카테리나 대제로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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