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국립역사박물관 (State Historical Museum) - 붉은 광장에서 본 원경


러시아 국립역사박물관(러시아어: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исторический музей)은 

모스크바 붉은 광장과 마네쥐 광장(Manege Square) 사이에 4개의 탑이 있는 붉은 벽돌 건물이다. 

러시아 영토에 살았던 선사 시대 유물부터 로마노프 왕조까지 전 역사에 걸친 다양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러시아 국립역사박물관 - 붉은 광장에서 본 전경


원래는 1755년 미하일 로모노소프(Mikhail Lomonosov)가 세운 것으로, 모스크바 대학교의 학과 건물이었다. 

이후, 1875~1881년에 영국계 러시아 건축가 블라디미르 셔우드(Vladimir Osipovich Shervud)가 

네오 러시아 양식으로 설계해서 건축하여 역사박물관으로 출범​했다. 

셔우드는 19세기 초 러시아가 영국에서 초청해 온 면방직기계 엔지니어의 손자로 붉은광장도 설계했다.

러시아 국립역사박물관 - 마네쥐 광장에서 본 원경


국립역사박물관 앞 마네쥐 광장은 '승마' '승마장'을 뜻하는 프랑스어 마네즈(manège)에서 나온 이름으로 
19세기 초반 근처에 건물 너비 45m, 승마 트랙 180m에 이르는 실내 마장(馬場)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장은 소비에트 시대 10월혁명 광장이 되었다가 사회주의 붕괴 후 옛 이름을 되찾았다.

박물관은 1872년 이반 자벨린(Ivan Zabelin), 알렉세이 우바로프(Aleksey Uvarov) 와 그외 여러 슬라보필에 의해 설립되어
개인의 기부금으로 유지해 오다가 러시아 혁명 뒤에 국립으로 개편되었다.

러시아 국립역사박물관 - 마네쉬 광장에서 본 전경


역사박물관은 선사시대 유물부터 근-현대까지 1백만 점 넘는 소장품을 지니고 있다. 

로마노프 왕조가 수집한 고가 미술품도 많다고 한다. 

석기 시대의 단단한 참나무로 만든 거대한 보트, 소년 onfim의 노브 고로드 자작 나무 껍질 문자, 

첫 번째 인쇄 책 "사도", 이반 4세의 끔찍한 왕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웅장한 세이버, 

기본 도구, 보석류, 고대 동전, 늙은 러시아 연대기, 군사 갑옷 및 기타 여러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국립역사박물관 앞 주코프(Georgy Konstantinovich Zhukov) 장군 기마상


게오르기 콘스탄티노비치 주코프(Georgy Konstantinovich Zhukov)

1896년 12월 1일 ~ 1974년 6월 18일. 소비에트 연방의 군인이자 정치가. 

제1차,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소련의 군인으로, 소련 육군 최고 계급인 소비에트 연방 원수까지 승진했다.


주코프는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 근처 스트렐코브카 촌락 농가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초등학교 교육만 받고 모스크바로 와서 가죽직공의 도제가 되었다. 

중노동에 시달리면서도 틈이 있을 때마다 독서를 했으며, 

결국 도제 과정을 마치고 가죽 장인의 조수로 일하게 되었다.


19살 때인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징병되어 일개 병사로서 제5예비 기병연대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훈련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신병 훈련이 끝나자마자 장교의 권유로 부사관 교육 과정에 다시 들어갔다. 

1916년 봄 부사관으로서 교육을 받기 위해 제10용 기병연대에 배속되었다. 

주코프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용감하게 싸운 덕분에 성(聖)게오르기 십자훈장을 2번 수여받았다.


러시아 민중들이 러시아 제국의 무능과 핍박에 저항한 러시아 10월 혁명이 발발하자, 

러시아 군은 해체되어 주코프는 집에 돌아왔고, 티푸스에 걸려 1년 여를 요양했다. 

이후 소련군에 부사관으로 입대하여 러시아 내전에 참전하고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처음에는 부사관의 계급이었으나, 부대 내에 배속된 정치 장교의 추천으로 장교 교육 과정에 입학했다.


이후 장교로서 군에 돌아와 계속 승진하여 기병 대대장이 되었고, 

이때 농민반란을 진압한 공적으로 인해 적기 훈장을 수여 받았다. 

1923년 기병연대장, 1930년 5월에는 기병여단장으로 계속 승진을 거듭했다. 

후에 소련군 기병감찰관 보좌관, 제4기병사단장, 제3기병 군단장, 제6기병 군단장을 역임하였다. 

주코프 원수는 군대의 기계화에 의한 전쟁 곧 군대의 시대 변화에 대비한 유능한 군인이었다. 

그는 기계화부대의 운용과 새로운 이론의 강력한 제창자 중에 한 명이며, 

자신이 수립한 계획에 치밀하여 엄격한 훈련과 군율을 실시하는 군인으로 유명해졌다.


스탈린에 의한 1937년부터 1939년까지의 대숙청에서 살아 남았고, 

중장으로 승진하여 벨라루스 군관구 사령관을 역임하고 있었다. 

한편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과 몽골인민공화국의 국경구획이 불확실했기 때문에 

일본의 관동군과 여러 번의 국경 충돌이 일어났다. 

6월의 국경의 노몬한에서 벌어진 몽골인민공화국군과 만주국군의 작은 충돌이 

양국의 보호자 노릇을 하고 있었던 소련과 일본의 충돌로 발전하였다. 

관동군은 처음에 소련의 국경 방위 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의도로 전투를 개시하였으나 

급속히 대규모 전투로 발전하여 최종적으로는 전차 500대 이상, 항공기 500기 이상, 

병력수 수만 명이 투입되는 정규전 수준까지 이르렀다.


정세가 심상치 않자, 주코프는 6월 벨라루스에서 급히 이곳으로 전임되어 소련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주코프는 일본군의 공세가 소진되기를 기다려 충분한 전력을 준비해 1939년 8월 20일부터 관동군에 대한 반격을 지휘했다. 

기계화된 포병과 보병의 지원을 받는 2개 전차여단이 전선의 양익을 진격시킨다는 대담한 기동을 실시하여 

일본 제6군을 포위하고, 1개사단을 전멸시키는 대타격을 주었다. 

2주 안에 관동군은 후퇴하고 그 후 국경선은 소련, 몽골의 주장대로 확정되었다. 


이 공적으로 주코프는 "소련 영웅"의 칭호을 하사받았다. 

소련 이외에는 이 전투는 잘 알려지지 않았기에 

주코프의 기계화부대의 기동적인 운용과 혁신적인 전술도 서방측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이러한 전술이 주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후에 나치 독일에 의해 폴란드와 프랑스의 전격전이 일어날 즈음이었다. 

이 공적으로 주코프는 상급대장으로 승진했다.


1940년 5월초 스탈린은 주코프를 불러들여 키에프 특별군관구사령관에 임명하고, 

차수(Генерал армии, 상급대장과 소련방 원수의 사이에 있는 계급)의 계급을 수여했다. 

주코프는 키에프 군관구에서 임박한 전쟁에 대비한 엄격한 훈련을 실시했고, 

그가 훈련시킨 부대는 다른 곳과는 달리 1년 후 독일군의 남방집단군의 진격을 상당히 늦추었다.


12월 참모본부에 의해 각 군관구사령관의 회의가 이루어졌으나, 주코프는 독일군의 소련 공격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전차, 기계화부대의 편성을 가속하고, 공군, 항공부대의 강화를 최중요 과제로서 제기했다. 

1941년 1월 주코프는 소련군 총참모장, 부국방인민위원에 임명되었다.


1940년부터 나치 독일이 독소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는 많은 경로로 소련 지휘부에 전달되었다. 

주코프는 총참모장으로서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티모셴코와 함께 독일군에 공세에 대한 방위 태세를 정비하였으나, 

나치독일을 자극할 것을 우려한 스탈린은 적극적으로 방위태세를 정비하는 것을 금지했다. 

주코프와 티모셴코는 거듭 경계령을 발령해 줄 것을 요청했고, 독일군의 침략 하루전인 1941년 6월 21일에야 

스탈린의 허가를 얻어 경계령을 발동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이 305만 대군으로 소련 침공을 개시했다(바르바로사 작전). 

주코프는 총참모장으로서 전선 여러 곳을 방문하고 상황을 조사하였다. 

주코프는 키에프가 포위의 위기에 몰리자 독일군의 예봉을 피해 일단 후퇴를 하여 

병력을 보존하기를 스탈린에게 권고했으나, 스탈린은 이를 무시하였다. 

주코프는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이지 않자 총참모장 직을 사임하고 전선으로 나가기를 스탈린에게 희망하였다. 

스탈린은 주코프의 실력을 믿었으므로 당시 포위되어 있었던 레닌그라드 전선군 사령관으로 파견했다. 


그는 무능한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를 대신하여 도시방어 임무를 맡았다. 

여기서 주코프는 눈부신 군사적 수완과 비정하기까지 한 결의를 보이며, 

갈팡질팡하던 방위군의 군율을 회복시키고, 시민의 협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로 인해 1941년 가을에는 레닌그라드 남쪽 교외에서 독일군의 진격을 정지시켰다.


1941년 10월 모스크바에 독일군이 접근했기 때문에 주코프는 레닌그라드로부터 송환되어 

모스크바 방위 지휘관을 맡아 세묜 티모셴코를 대체하였다. 

그는 모스크바 주위의 방위선을 강화하고 극동에서 동계전투 훈련을 받은 부대를 차례로 철도수송시켰다. 

1941년 12월 소련군의 반격으로 인해 이 방면의 독일군을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대이동을 신속하게 성공시킨 주코프의 병참 수완이 없었다면 모스크바 방위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1942년 8월 주코프는 소련군의 최고 사령관 대리에 임명된 후, 

독일군의 맹공을 받던 스탈린그라드 구출을 위해 파견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는 소련측도 100만 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나왔지만, 

1943년 1월 독일 제6군을 포위 궤멸시켜 동부 전선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공적으로 주코프는 원수로 승진했다.


주코프(Georgy Konstantinovich Zhukov) 장군


1943년 7월 쿠르스크 전투에서는 니콜라이 바투틴을 돈 전선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독일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1944년 1월에는 레닌그라드의 포위를 해제시켰다. 

1944년 6월부터 개시된 소련의 대반격작전(바그라티온 작전)과 계속된 1945년 1월 


독일본토에 대한 침공(오데르-나이세 작전)을 지휘하여 4월에 베를린을 점령하고 독일의 카이텔 원수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았다. 

전쟁 승리 후 그대로 소련의 독일 점령군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


대조국전쟁에서 대활약했던 군인으로 영웅시되어, 1945년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전승퍼레이드를 벌일 때 

주코프는 스탈린을 대신하여 말을 타고 참여부대의 사열을 받았다.


이러한 주코프의 존재와 인기는 스탈린의 독재정치에 대해 적지않은 위협이 되었다. 

게다가 그의 오만하고 투박한 성격 때문에 적도 많았다. 

그리하여 그의 안하무인적인 행동으로 말미암아 스탈린의 의심을 샀고, 

전리품 약탈 등의 혐의로 베를린으로부터 모스크바로 송환되었다. 

주코프는 스탈린 앞에서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 자아비판했다. 

그래서 좌천되어 1947년에는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지휘 병력도 적었던 오데사 군관구, 후에 우랄군관구의 사령관을 전전하였다. 


스탈린 사후, 다시 정계에 복귀하여 1953년 국방장관 대리, 1955년 국방장관에 취임했다. 

1953년에는 내무인민위원장(NKVD)으로 있던 라브렌티 베리야를 체포하여 처형하는 등 

스탈린 사후의 소련 공산당의 지도 체제를 지탱하였다.


1957년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이후 스탈린을 옹호하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조직한 

이른바 반당 그룹과의 권력 투쟁에서는 흐루쇼프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6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간부회의(정치국)에서 군사면에 관한 정책을 둘러싸고 흐루쇼프와 중대한 의견 차이가 일어났다. 

흐루쇼프는 육해군의 병력 삭감과 함께 억제력으로 전략핵무기부대를 증강시켜서, 

남겨진 인적, 물적 자원을 민간 경제 발전으로 돌리려고 하였다.


한편 주코프는 군의 이익을 제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 정책에는 반대했다. 

흐루쇼프는 군에 대한 당의 우위성을 방패삼아, 주코프를 장관직에서 해임시키고 중앙위원회에서도 추방했다. 

흐루쇼프의 회고록에서는 주코프가 쿠데타를 기도했다고 믿고 있었기에, 

중앙위원회의 회의에서 이를 이유로 주코프를 고발하여 추방시켰다고 회상했다.


1964년 10월 흐루쇼프가 실각하고,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와 알렉세이 코시긴이 뒤를 이었고, 

그들로부터 주코프의 명예는 회복되었다. 

정계에 복귀하지는 않았으나, 소련에서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던 인물 중 한명이었다. 


후에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 《추억과 회고》(Воспоминания и размышления)을 집필하여 

세계 30개국, 19개 언어로 약 800만부가 출판되었다.

1974년에 사망했고, 군인으로서 최고의 영예를 받으며 다른 원수들과 마찬가지로 크렘린 벽묘지에 안장되었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그의 이름이 붙은 거리가 존재한다. 

또한 모스크바, 에카테린부르크, 옴스크, 트베리, 하르코프, 쿠르스크 등에는 기념비와 동상이 

고향 스토렐코프카에는 화강암의 기념비가 건립되어 있다.


게오르기 콘스탄티노비치 주코프(Georgy Konstantinovich Zhukov) 장군 기마상


그가 말발굽으로 밟고 있는 것은 독일 나치 깃발 군기(軍旗)와 뱀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표트르 대제 기마상이 뱀을 짓밟는 것과 비슷한 발상이다.


주코프는 전사(戰史)를 쓰며 만년을 보내다 78세에 세상을 뜬다.

붉은광장에 그의 동상을 세우려는 움직임은 소비에트 시대부터 있었지만 

사회주의 붕괴 후인 1995년에야 이뤄졌다.

유네스코 유산인 붉은광장에 새로 시설물을 들일 수 없어 이곳 역사박물관 앞 마네쥐 광장에 세우게 된다.

조각가 V M 클리코프는 주코프가 1945년 전승 퍼레이드에서 

군대를 사열하면서 손을 들어 인사하는 모습을 재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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