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의 전시물품은 혁명 이후를 제외한 러시아의 전 역사에 관련된 것을 

석기시대의 것부터 전시해 놓고 있으며, 전시품이 너무 많아서 한꺼번에 전부 돌아보기는 힘들다. 



국가 행사 등에 사용되고 있는 크렘린 안의 대궁전 천장을 본따 만든 입구


1883년 알렉산드로 3세의 대관식에 맞춰 개관했으며,

1986년부터 2002년까지 내부를 개조해서 다시 오픈하였다.



박물관 천장에 그려진 러시아 황제들의 초상화는 참으로 대단하다.


천장에 그려진 러시아 황제들의 초상화



천장에 그려진 러시아 황제들의 초상화


천장과 벽 등 내부 인테리어에서 러시아의 독특한 양식을 엿볼 수 있다.



노브코로드와 키에프공국 시대 전시실


이 박물관은 2층과 3층으로 나뉘어져 있고, 2층에는 원시시대부터 류릭왕조, 로마노프왕조 전까지.

3층에는 17세기 로마노프 왕조와 표도르 대제부터 최후의 니콜라이 2세까지의 시대를 순서대로 전시되어있다.

러시아 역사가 소련이 되기 전까지 전부 알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키에프공국은 동(東)슬라브 민족이 세운 최초의 나라이다. 

창시자는 류리크의 친족이자 왕조의 후계자인 올레크 공(公)으로 

오늘날 노브고로드 부근였던 근거지를 882년 키예프로 옮기면서 시작된다.

12개의 부족으로 구성되었던 동슬라브 부족들이 키예프 공국에게 정복되면서 통일이 되었다.


원주민인 슬라브 및 우랄계와 북유럽에서 이주해 온 바이킹계 주민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이미 올레크의 뒤를 이은 스뱌토슬라프 대에 하자르의 수도 아틸을 함락했고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을 거의 점령하는 등 그 군사력을 입증한 바 있다.  

이런 키예프 공국의 병사들의 활약을 본 동로마 제국은 바랑인 친위대를 창설하기도 했다.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12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발트해에서 우랄산맥 북부에 걸친 광대한 영역을 점유했던 중세 루스국가이다. 

공화국 시민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존엄한 대(大) 노브고로드(Gosudař Gospodin Velikij Novgorod)라고 불렀다. 


학자들은 노브고로드 공화국이 당대로서 상당히 높은 문헌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는 데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고고학자들이 천여 점의 자작나무껍질 문서를 발굴했는데, 그 연대는 모두 11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걸쳐 있다. 

이 문서들 중 약 950 개는 노브고로드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화재로 노브고로드의 문헌 거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며, 

발굴된 것과 유사한 문서 2만여 점이 도시 어딘가에 파묻혀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1471년 7월 모스크바군은 셸론 강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그로 인해 노브고로드의 자유는 심대한 침해를 받게 되었다. 

노브고로드는 이후 7년 동안 형식적인 독립을 유지했으나, 마침내 1478년 이반 3세가 군대를 보내 도시를 점령했다. 

이반은 학살을 벌이고 베체를 파괴했으며, 도서관과 기록보관소를 불태웠다. 

이 시점에서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역사는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이반은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영토 81.7%를 차지하고 그 중 절반은 자기 땅을 삼고 나머지는 대공족들에게 분배하였다.


여러 공국으로 분열된 키예프 공국


12세기 초반부터 흑해와 스칸디나비아를 잇는 무역로가 쇠퇴함에 따라서 키예프 공국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당시 키예프 공국은 체계적인 세금 징수 시스템이 잡혀 있지 않은 상태였기에 무역 쇠퇴는 치명적이었다. 

더욱이 키예프 공국은 체계적인 왕위 계승 시스템이 갖춰졌다기 보다는 왕위 계승자들이 각 지방 도시를 다스리며 

상황에 따라 서로 내전을 벌이는 상태였기에, 국력을 단결시키기 어려웠다. 

종종 볼로디미르 모노마흐 같은 유능한 지도자들이 나타나서 

쇠퇴기에 접어든 키예프 공국을 중흥시켰을 때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마련되지 못했다. 

하자르 칸국과 페체네그인을 주무르던 키예프 공국이었지만, 

말기에 접어들면 유목민족인 쿠만과 볼가 불가르의 침략 앞에 끙끙대기 시작한다. 

키예프 루스의 중심지였던 보리스테네스 강(드니프로 강) 일대 비옥한 흑토 평야는 

전성기 시절에는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평야 지대 특성상 유목제국의 기습과 침략에 매우 취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13세기 중반에 몽골 제국이 침공하면서 처참하게 멸망하였다. 

키예프 공국의 난민들은 북쪽에 척박한 삼림 지대로 대거 피난을 떠났다 한다.

이후 키예프 공국의 영토 대부분 타타르의 멍에에 시달리게 된다.


류리크 왕조의 블라디미르 시대.


류리크 왕조는 초대 노브고로드 공국 대공 류리크를 시조로 하는 동유럽의 가문. 

700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존속하면서 수없이 많은 러시아 공국들의 대공들과 

그들을 하나로 묶은 루스 차르국의 차르를 배출해 내며 동유럽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블라디미르는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2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류리크 왕조의 시조인 류리크는 여러 설화에서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바이킹으로 전해진다.


류리크 왕조는 이후 전세계를 강타한 몽골 제국과 그 후계인 킵차크 칸국의 침략과 억압 속에서도 명맥을 유지하다가 

새로이 성장한 모스크바 대공국이 러시아 통합, 몽골 축출의 업적을 이루고 루스 차르국으로 거듭나면서 

차르를 배출해 내는 황가로 거듭난다. 

그러나 제권 강화를 위해 친척들을 숙청하고 황태자와 임신한 며느리를 직접 때려 죽인 이반 4세의 화끈한 폭정과 

그 뒤를 이은 병약한 표도르 1세의 요절로 류리크 왕조는 단절되고, 

러시아의 제위는 혼란 끝에 로마노프 왕조에게 넘어간다. 

이 과정에서 굉장한 막장 드라마가 시전되었는데 이반 4세의 막내아들인 우글리치 공 드미트리라 자처한 

가짜 드미트리가 3명씩이나 나와서 그 중 한 명이 차르에 즉위하여 

9개월 동안의 치세기간을 지내는 데 성공하는 등 왕조가 개판이 되었다.


블라디미르 - 수즈달 시대


블라디미르 - 수즈달은 1157년부터 1331년까지 동유럽 일대에 존재했던 공국이었다. 

모스크바 대공국의 전신이며 수도가 로스토프 벨리키, 수즈달이였던 적도 있어서 

로스토프-수즈달 공국으로도 불린다.


당시 키예프 대공국은 류리크 왕조 일원에게 분할상속된 여러 루스 공국을 휘하에 거느리고 있는 대공국이었다. 

키예프의 대공은 다른 공국들의 공작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여서 키예프의 대공이 되기 위해서 

다른 루스 공국의 공작들은 키예프를 점령하여 키예프의 대공이 되었고 

그 키예프를 다른 공작이 점령하여 키에프의 대공 자리를 뺏는 식이 되었다. 

유리 돌고루키도 키예프를 점령해 키에프의 대공이 되었다.

블라디미르-수즈달은 몽골로부터의 독립과 루스의 완전 통일을 열망한 

모스크바 대공국의 확장 정책에 의해 1331년 흡수되었다.



수즈달의 크렘린, 로즈데스트벤스키 성당의 13세기의 문 '황금의 문'을 모방했다.


13세기 타타르의 멍에


타타르의 멍에는 1240년부터 1480년까지 루시가 몽골 제국의 지배를 받은 시기를 말한다.

칭기즈 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은 1236년 조카 바투에게 15만의 병사를 주어 다시 루스로 보냈다. 

전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은 바투의 유럽 원정이 시작된 것이다. 

바투의 원정군에 맞선 루스의 군대는 용감히 싸웠으나 몽골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단지 바투의 군대가 대군이라서만이 아니었다. 

몽골군은 당시 어느 군대도 따를 수 없는 조직력과 무기 ·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몽골군은 기동성이 뛰어난 기병으로, 중장 기마대와 경장 기마대를 함께 운용했으며, 

군대를 10명, 100명, 1,000명 단위로 편성하고 지휘부에는 참모부를 두는 등, 잘 조직되어 있었다. 

또 정찰과 첩보공작을 조직적으로 전개했고, 투석기와 파벽기를 앞세운 공성술도 뛰어났다.


뿐만 아니라 전략도 다양하게 구사했다. 

예컨대 야전에서는 보조부대를 진의 중앙에 두고 양측방에 활을 가진 주력부대를 배치했다. 

적병이 돌격해 들어오면 중앙이 후퇴하면서 양측방에서 적에게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적병은 처음엔 이기고 있다고 생각하나 곧 함정에 빠져들었음을 깨닫는다.


몽골군은 적의 용기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했지만 자비심을 베푸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칭기즈칸이 '후회는 동정의 열매'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바투는 우랄 산맥을 넘어 먼저 볼가 불가르인을 침략했다. 

그리고 1237년 뜻밖에도 북쪽에서 돌연히 나타나 루스-목셀 대공국인 랴잔 대공국으로 들이쳤다. 

랴잔의 병사는 물론 온 시민이 나서서 끝까지 항전했으나, 

5일간의 싸움 끝에 도시는 함락되고 시민들은 몰살당했다.


다음 차례는 블라디미르 대공국이었다. 

1237~1238년 사이의 겨울에 몽골군은 얼어붙은 강을 빠른 속도로 건너다니며 

당시 루스-목셀 최강의 군대를 가지고 있던 대공국의 여러 도시를 휩쓸었다. 

아마도 역사상 루스를 겨울에 침략하여 성공한 유일한 예일 것이다.


이어서 야로슬라블과 트베르, 볼가 강변의 여러 도시가 몽골군의 발굽 아래 초토화됐다. 

노브고로드를 비롯한 북서부 루스-목셀 대공국만은 유일하게 화를 면했다. 

얼음이 풀려 그 일대가 뻘수렁으로 변하면서 몽골군이 전진을 포기하고 초원지대로 말머리를 돌렸기 때문이다.


초원지대를 평정하며 잠시 재정비를 마친 몽골군은 이제 키예프 루스로 들이닥쳤다. 

1240년 키예프가 점령되어 주민이 모두 죽거나 노예가 되었다.


몽골군은 이어 갈리치와 볼린을 휩쓸고 루스의 국경을 넘어 폴란드와 헝가리로 쳐들어갔다. 

폴란드에 침입한 몽골군은 계속 서진해 슐레지엔의 발슈타트 전투에서 독일군을 크게 무찔렀고, 

헝가리로 진출한 몽골군의 선발대는 오스트리아까지 나아갔다. 

온 유럽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것이다.


그 때 몽골 본국의 카라코룸에서 오고타이 칸이 죽었다는 전갈이 왔다. 

바투는 군대를 초원지대로 불러들여 1243년 볼가 강변의 사라이를 도읍으로 킵차크 한국을 세웠다. 

이후 거의 대부분의 루스는 킵차크의 칸에게 무릎을 꿇고 몽골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오고타이 칸이 사망하고 장남 구유크가 몽골 제국 제 3대 칸이 되자, 

바투는 루시땅에 남아 킵차크 한국을 세우게 된다. 


동유럽을 정복한 몽골의 바투는 볼가 강변의 사라이를 도읍으로 킵차크 한국을 세우고 

거의 대부분의 루스를 지배한다. 

루스인들은 킵차크 한국을 '졸로타야 오르다'라 부르고 몽골족의 루스 지배를 '타타르의 멍에'라 했다. 

'졸로타야 오르다(금장한국, 金帳汗國)'는 

'황색 천막 속에서 칸이 중심(황색은 중앙의 상징이기도 함)에 앉아 지배하는 나라'라는 뜻이다. 


'타타르의 멍에'는 루스의 서부 지방에서는 약 1세기, 북부와 중부 지방에서는 약 2세기, 

남동부 지방에서는 3세기 이상 이어졌으며, 지역과 시기에 따라 지배의 강도가 달랐다. 

몽골족이 루스를 침략하면서 루스에 끼친 피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대량학살로 인한 인명의 손실, 약탈과 파괴로 인한 재산의 손실, 

노예로 팔려간 포로들은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조세의 수취로 땅은 척박해지고 사람들은 절대 극빈에 시달렸다. 


몽골은 키예프 루스의 유산을 송두리째 사라지게 했다. 

키예프 루스의 찬란한 문화는 그 뿌리를 뽑히고 문화의 암흑시대로 접어들었다. 

도시와 마을의 몰락은 각계 각층의 기반을 없애 상업, 공업, 경제, 산업, 과학기술을 멸망시키고 

루스를 농업 일색의 사회로 바꾸어놓았다. 

그리고 북서부 일부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민회와 함께 시민의 자유를 박탈해버리고 

국민들을 질곡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루스를 지배하게 된 몽골은 처음에는 직접 다루가치(총독)와 바스카크(사정관)를 파견해서 

행정 · 징세 · 징병 등의 업무를 집행했다. 

세금을 거두기 위해 인구조사도 세 차례나 했다. 

1275년에 실시한 세 번째 인구조사에서 당시 루스 인구는 약 1,000만 명이었다. 

세금은 납세능력에 관계없이 머릿수대로 거두었다. 

사정관의 징세는 철저했고, 이에 저항하는 주민들은 참혹하게 진압됐다. 

인구조사 결과는 징병에도 이용돼, 많은 루스인 청년이 몽골을 위해 병역에 복무했다.


그러나 루스인의 반발을 고려하여, 13세기 말에 루스의 여러 공에게 

권한을 위탁하고 세금을 받는 간접지배 방법으로 전환했다. 

킵차크의 칸은 루스 공들에게서 세금을 받고 그들에게 공국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허가장인 

야를리크를 내주었으며, 그들 가운데 가장 믿음직한 공에게 '전 루스의 대공' 칭호를 주어 

러시아의 모든 공후 위에 서게 했다. 

루스의 공들은 야를리크를 받기 위해, 그리고 '전 루스의 대공' 칭호를 얻기 위해 

앞다투어 사라이를 드나들었고, 킵차크의 칸은 루스 공후들의 대립과 반목을 교묘히 이용하여 지배를 강화했다.


몽골 지배하에서 루스는 북서부 일부를 제외하고는 상업, 공업, 경제, 산업, 과학기술이 몰락하여 

농업이 유일한 주된 나라로 변했다. 

그나마 혹독한 기후와 황폐한 땅에서 쉽게 농업을 정착, 발전시키는 것마저도 어려웠다. 

게다가 몽골의 징세가 빈약한 루스 경제를 더더욱 쥐어짰다. 

한 역사가는 몽골의 수탈을 이렇게 표현했다.


"한 거대한 기생충이 루스인 대중의 생체에 달라붙어 그 즙을 빨아먹었다. 

그리하여 그 생명력을 고갈시켰고 때때로 그 생체 안에 커다란 혼란을 일으켰다. 

농민들의 지위는 계속 악화되어 점점 더 지주에게 예속돼갔다. 

그와 함께 여러 단계의 군신 관계가 형성되면서 귀족들의 봉건제후화 경향도 강화됐다. 

루스는 몽골의 지배를 거치면서 봉건제 하의 중세 유럽과 유사한 사회구조를 갖게 된다."


몽골 지배하에서 가장 큰 발전을 보인 것은 동방정교회였다. 

가혹한 지배자였던 몽골인도 종교에 대해서만은 가장 관대했다. 

교회와 수도원은 면세특권을 부여받았고, 재산도 보호를 받았다. 

또 사라이에까지 주교 관구를 설치하고 교회도 건립했다. 

루스의 여러 공도 자신을 위해 기도해준 대가로 교회에 많은 재산을 기증했다. 

몽골 지배 말기에 이르면, 경지의 약 1/4이 교회의 소유가 된다.


모스크바가 가장 화려했던 시대



이반 5세 시절에는 암염이 아주 귀했다고 한다.


암염으로 만든 도구들도 전시되어 있다.


표도르 대제 부모님의 초상화가 있는 방.




보리스 고두노프 (Boris Godunov)의 시대


유명한 오페라 대작으로 만들어진 보리스 고두노프 (Boris Godunov) 시대 

이 후 류리크 시대는 끝나고 러시아는 전국 시대를 거쳐 로마노프 왕조의 시대가 된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황권 찬탈의 야심을 품고 황태자를 살해하고 그 망령에 시달리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의 러시아는 일명 ‘동란 시대 (Time of Troubles)’였다.  

‘동란 시대’란 러시아 역사에서 류리크 왕조의 멸망과 로마노프 왕조 탄생 사이의 공백기를 일컫는다.


1601년에서 1603년 사이에 러시아는 인구의 3분의 1 가량인 2백만 명이 죽는 대기근을 겪었다.

또한 1605년에서 1618년 사이에는 가짜 드미트리 전쟁으로 인해 폴란드 제1공화국에 일시적으로 점령당하여

민중들이 고통을 겪은 아주 힘들었던 고난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황제 이반 4세의 최고 고문으로 활약했으며 자신의 여동생을 

황제의 아들 표도르 1세에게 시집보내며 엄청난 권력을 누렸다. 

이반 4세의 사망 이후 표도르 1세가 왕위에 오르자 보리스는 황제의 배후에서 섭정으로서 통치하였다.


보리스는 섭정 기간동안 비밀경찰들을 이용해 자신의 대항세력에게 심문, 고문, 사형 등을 감행했다.

표도르 1세가 사망한 후 보리스는 정식 황제가 되어 1598년부터 1605년까지 재위했다.


이후에 황제가 된 보리스 고두노프는 몇몇 왕족들을 추방하고 귀족들의 힘을 견제해 자신의 지배력을 확고히 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러시아 대기근이 닥치고 보리스는 일명 ‘가짜 드미트리 전쟁’이라고 불리는 

폴란드-모스크바 전쟁의 시작과 함께 사망한다.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는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쉬킨의 동명 희곡을 원작 삼아 무소륵스키가 완성한 유일한 오페라로, 

‘러시아판 맥베스’라 불릴 만큼 권력의 비극적 속성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작품이다. 

솔로 가수의 화려한 기교와 아름다운 선율의 아리아가 중심인 이탈리아 오페라와 달리, 

또다른 주역인 민중들의 장엄하고 숙연한 합창과 중창이 두드러지는 무대다.


17세기 초, 이반 4세의 어린 아들 드미트리를 살해하고 왕좌에 오른 보리스 고두노프는 

민중의 기대와 의심을 동시에 받으며 내내 시달린다. 

죽은 드미트리를 사칭하는 젊은 수도승 그리고리가 폴란드 군대를 앞세워 나타나자 

보리스 고드노프는 스스로 무너지지만, 

민중들은 가짜 드미트리를 환영하며 새로운 비극을 예고한다.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는 그의 생애 중에서 그가 표도르 1세 뒤에서 섭정하던 시기부터 사망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전 황제였던 이반 4세의 어린 아들 드미트리가 죽고 사람들은 당시 섭정하던 보리스가 그를 죽였다는 의혹을 거두지 않는다.

이에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고 심지어 드미트리의 망령에 시달리기까지 한 고두노프는

결국 자신이 드미트리라고 주장하는 ‘가짜 드미트리’의 등장과 함께 비극적으로 사망한다.


이 ‘가짜 드미트리’는 사실은 왕자 드미트리가 죽지 않았다는 소문에 힘입어

자신이 사실 살아있는 진짜 드미트리라고 주장했던 그리고리 오트레피예프라는 사람이다.


푸시킨은 이처럼 러시아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비극적인 희곡을 탄생시켰으니 그것이 바로 <보리스 고두노프>이다.

작곡가 무소륵스키는 이 희곡과 니콜라이 카람친의 '러시아 정부의 역사'라는 책을 바탕으로 대본을 작성했고

개정판본이 187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 초연 상영되었다.


우리나라 국립오페라단에서도 2017년 4월 20~23일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상영한 바 있다.



국립 역사 박물관 3층 로마노프 왕조

유명한 표트르 1세의 초상화와 머리 동상. 18세기 초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황제다.


표트르 1세는 키가 무려 2m 3cm의 거구에 얼굴은 이렇게 생겼다고 한다.


표트르 1세의 커다란 손바닥이 부조로 남아 있다.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로마노프 (Пётр Алексе́евич Романов 1672 ~ 1725년)


루스 차르국 로마노프 왕조의 4대 차르이자 러시아 제국의 초대 황제(임페라토르)로 

표트르 대제(표트르 벨리키 Пётр Великий)라고 불린다. 

표트르는 베드로에서 따온 이름이므로 문화권에 따라 '피터 대제(Peter the Great, 영어권)', 

'페터 대제(Peter der Große, 독일어권), '피에르 대제(Pierre le Grande, 프랑스어권), 

'페드루 대제(Pedro o Grande, 포르투갈어권)'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몽골-타타르의 멍에 때문에 서유럽과의 교류 단절 및 중세 수준 문화에 머물던 러시아를 발전시키기 위해 

급진적인 서구화를 밀어붙인 지도자다. 

지나친 서구화의 반발로 여러 번의 정변이 있었으나, 모두 피의 숙청으로 마무리했고, 

스웨덴과의 대북방전쟁에서 대승해서 변방의 국가였던 러시아가 

이후 유럽에 주요 정치세력으로 당당히 등장할 수 있게 한 사람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훗날의 이오시프 스탈린과 비견되는 인물. 스탈린이 존경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는 스탈린 시절에 표트르 대제가 높이 평가된 사실을 봐도 알 수가 있다.


참고로 키가 엄청나게 컸는데 지금 기준으로도 장신이다 못해 거인인 203cm였다. 

오늘날로 따지면 농구선수나 배구선수에게서나 나올 법한 체격.


로마노프 왕조의 여제시대를 전시하고 있다.


예카테리나 2세와 주변 인물들의 초상화

에카테리나 2세가 거느린 남자들 사진도 모두 전시되어 있다.


예카테리나 2세 (1729년 5월 2일 - 1796년 11월 17일)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 제국의 황후이자 여제(1762년 - 1796년)다. 

로마노프 왕조의 8번째 군주로, 본래는 프로이센 슈테틴 출신의 독일인이었다. 

무능한 남편 표트르 3세를 대신해 섭정을 맡았으며, 화려한 남성 편력으로도 유명했다. 

1762년 남편 표트르 3세를 축출하고 임페라토르가 되었다.


그는 남편인 표트르 3세를 축출하기 이전부터 정부들을 두었다. 

67세 되던 해 뇌졸중으로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았을 때에도 나이가 젊은 정부들을 두고 있었다. 

사실상의 남편으로 여겨지던 포템킨과의 관계가 끝나고 난 후 

그녀의 공식적인 애인 또는 첩은 20명 이상 바뀌었다. 

그녀는 평민 출신 사병과 시종을 비롯한 잘생기고 신분이 낮은 젊은 남자들을 정부로 골라서 동거했다. 

이들 중 몇명은 적당한 때에 두둑한 상금이나 관직을 주어 내보내는 한편 

일부는 평생토록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후일 이들 중 한 사람은 자신들은 여제의 남자 후궁이나 남자 첩이라고 증언했다. 

그의 증언대로 예카데리나의 남자들은 황제의 후궁과 같은 예우를 받았다.


그녀의 남성 편력에 대한 비판은 당대에도 나왔지만 그는 남자 첩, 후궁을 두는 것이라며 

군주가 후궁과 정부를 두는 것을 근거로 들어 이를 반박했다. 

또한 옐리자베타 여제가 많은 남자와의 관계로 염문을 뿌렸던 것을 예를 들며 

자신은 정식으로 남자 후궁을 둔 것이라며 반박했다. 

그녀는 권력과 국정, 정복 사업 등에 집중하였지만 한편으로 

서로 함께 사랑을 나누는 즐거움을 끊임없이 희구하기도 했다 한다. 

지능이 낮았던 남편과의 원만하지 못했던 성생활은 일찍부터 그녀의 그런 욕구를 더욱 부추겼다.


1745년 러시아의 황태자이던 표트르 3세와 결혼했으나 

지능이 부족하던 남편을 대신하여 섭정을 했다. 

그러나 남편 표트르에 대한 평판이 나빠지자 

1762년 정변을 일으켜 남편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표트르 대제의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러시아를 유럽의 정치무대와 문화생활에 완전히 편입시켰다. 

내각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제국의 행정과 법률제도를 개선했으며 

크림 반도와 폴란드의 상당부분을 차지함으로써 영토를 넓혔다. 

계몽주의 사상에 감명하여 볼테르 등과도 문학으로 교류하였고, 

문학과 예술, 학예와 교육 등의 장려에 큰 관심을 쏟았고 

각 지방관들로부터 직접 정무를 결재받음으로써 황권을 강화시켰다.


투르크와 싸워 영토를 넓혔으며 폴란드 분할의 주역의 한사람이었다. 

내각의 도움으로 러시아 제국의 행정과 법률 제도를 개혁했다. 

본래 이름은 조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 폰 안할트체르프스트

(독일어: Sophie Friederike Auguste von Anhalt-Zerbst)며, 

개명한 이름은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러시아어: Екатерина Алексеевна)다. 

루터교 세례명은 조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 러시아 정교 세례명은 예카테리나, 

이후 그는 러시아 정교회 세례명을 이름으로 사용했다. 

행정 개혁과 내치, 문예 부흥 등의 공적을 높이 평가해 예카테리나 대제로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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