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사진 한장 안남은 조선 사회주의운동사 지도자

조선공산당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안광천은 혁명가인가 배신자인가


조선공산당의 역대 책임비서. (왼쪽부터)초대 김재봉, 제2대 강달영, 제3대 김철수와 제4대 안광천의 펜글씨 필적. 고등교육을 이수한 지식인답게 세련된 필치를 보인다. 그의 인물 사진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임경석 제공

안광천(安光泉)은 비밀결사의 최고 지도자였다. 일제강점기의 가장 강력한 항일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였다. 1926년 12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재임 기간이 10개월인 점이 눈에 띈다. 짧아 보일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게 아니었다. 고등경찰과 밀정의 삼엄한 감시망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지하단체의 수뇌로서는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었다. 선임자들의 재임 기간에 비하면 오히려 긴 편이었다.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은 8개월, 제2대 책임비서 강달영은 5개월, 제3대 책임비서 김철수는 5개월간 재임했다.

제4대 안광천 책임비서의 당내 입지는 강력하고 안정돼 있었다. 당권 승계 과정이 적법했기 때문이다. 그는 당내 최고 의결기구에서 선출됐다. 1926년 12월6일 경성에서 비밀리에 열린 조선공산당 제2차 당대회에서 그의 책임비서 취임이 결정됐다. 창당대회에서 선출된 제1대 김재봉 책임비서에 뒤이어 두 번째였다. 제2대, 제3대는 달랐다. 그들은 일제 탄압으로 책임비서 자리가 비게 된 급박한 조건에서 보선(補選)으로 취임했다. 보선이란 당규약에 명시된 중앙위원회의 권한으로서, 중앙위원 가운데 결원이 생겼을 때 당대회 결정을 거치지 않고 자체 결의로 후임자를 충원하는 제도였다. 강달영과 김철수는 선임자가 경찰에 체포된 뒤 잔존 중앙위원들의 합의에 따라 책임비서에 올랐다. 그에 비하면 안광천의 취임 과정은 훨씬 더 적법할 뿐만 아니라 당당했다.


사회주의 진영의 통합을 이루다


안광천은 문필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항일 비밀결사의 요직에 오르기 전부터 언론 지면에 그의 이름이 빈번히 오르내렸다. 일본에 유학 중일 때는 물론이고 국내에 귀국한 이후에도 신문과 잡지 지면에 곧잘 그의 글이 실렸다.

그는 이름 높은 논객이었다. 기고 활동을 통해 사회운동의 진로와 정책에 관해 다채로운 담론을 생산해냈다. 그의 문필 능력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보기를 들어 조선어 종합잡지 <동광>의 흥미로운 한 앙케트 기사를 보자. 잡지사는 경성에서 간행되던 4대 조선어 신문사(<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매일신보>)의 언론인 44명에게 물었다. 여러 신문을 통폐합해 단일한 거대 신문사를 세운다고 가정하면, 과연 어떤 인물들이 그 신문사를 이끌어가는 적임자가 될 것인가? 놀랍게도 안광천이 편집국장 직위에 올랐다. 다수의 언론인이 안광천을 가리켜 거대 통합 신문사의 지면 배치와 논조를 좌우하는 넘버 3위의 요직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꼽았다.1

정연한 이론 능력과 뛰어난 문장이 그를 공산당 책임비서 물망에 오르게 한 요인이 됐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요인이 있었다. 안광천은 신진 세대의 대표자로 간주됐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서울파와 화요파 사이에 전개됐던 이전 시기 사회주의운동 내부 대립에서 자유로운 위치에 서 있었다. 새로운 간부 인선에는 전임 책임비서 김철수의 의중이 실려 있었다. 김철수는 당대회를 열기에 앞서 옛 중앙위원들과 함께 신임 중앙위원회 윤곽을 미리 협의했다.2


특히 책임비서 인선이 중요했다. 김철수의 판단에 따르면, 안광천은 재능이 뛰어난데다 분파투쟁에 가담한 경력이 없으므로 각파를 망라한 통일된 공산당을 이끌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이제 안광천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책임비서 취임 이후 조직, 대중, 정책 각 영역에서 눈에 띄는 약진이 있었다. 첫째, 양분된 국내 사회주의 진영을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전임 김철수 책임비서 시기인 1926년 11월 당외 서울파 공산그룹의 구성원 140명이 입당한 데 뒤이어, 안광천 취임 이후인 1927년 3월 나머지 서울파 구성원 100여 명이 최종적으로 공산당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달리 말하면 사회주의운동을 양분하던 두 공산그룹 화요파와 서울파가 조선공산당 이름 아래 통합하게 됐다. 대단결을 바라는 사회주의자들의 숙원이 해결된 셈이었다.


당 사조직에 가담


둘째, 합법 공개 영역의 대중운동에 대한 장악력이 급격히 높아졌다. 보기를 들면 1927년 5월 전국 923개 가맹단체를 망라하는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대회가 열렸을 때 그 진로를 안광천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의 의사대로 좌우할 수 있었다. 공산당 집행부는 그 협의회 설립을 저지하기로 결정했고, 대회 석상에서 압도적 다수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정책을 관철할 수 있었다.

셋째, 민족통일전선 기관인 신간회가 설립된 것도 안광천 책임비서 재임 시기의 업적이다. 1927년 2월 신간회와 민흥회 두 갈래로 나뉘어 추진된 민족통일전선 설립 운동이 결국 신간회라는 이름 아래 단일화될 수 있었던 것도 비합법 영역의 사회주의운동이 통합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안광천의 공로이자 통일된 조선공산당 덕분이었다.

그러나 대립물로 전화하지 않는 사물은 없는가보다. 달도 차면 기운다. 1927년 9월 즈음, 안광천의 리더십이 위기에 빠졌다. 위기의 진원지는 둘이었다. 하나는 당내 조직 문제고, 다른 하나는 정책 문제였다. 조직 문제란 공산당 내부에 ‘레닌주의동맹’(Leninist League)이라는 비밀단체가 은밀히 만들어져 1년 이상 암약해왔음이 동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사건을 말한다. 일부 간부가 ‘당 중 당’을 만든 것이다. 이 단체는 ‘엘(L)단’ ‘엘엘(LL)단’ ‘엠엘(ML)단’ ‘엠엘당’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는데, 당원들 사이에 쉬쉬하면서 널리 회자됐다.

당 중 당을 몰래 만드는 것은 당의 규범에 반하는 범죄행위였다. 바윗덩이같이 강고한 단결을 지향하는 전위당 조직론에 배치되는 행위였다. 이전에도 분파투쟁은 있었지만 그것은 조직체를 달리하는 공산그룹 사이의 분쟁이었다. 당 내부에 은밀히 분파 조직이 만들어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충격적인 것은 책임비서 안광천이 그 일원이었다는 점이다. 모든 당원이 책임비서가 당의 규범을 해치고 사조직을 운용했음을 알게 됐다. 책임비서가 당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내 비밀분파의 이익을 위해 행동해왔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일반 당원들은 배신과 분노의 감정을 느꼈다.


안광천 등 중앙위원 연서명. 임경석 제공


‘친일파·자치파’와 협동 사업 주창

정책 문제도 리더십 위기를 낳은 또 하나의 진원이었다. 당내에서만이 아니라 전 사회적으로 그의 명성이 실추되는 사건이 터졌다. 영남친목회 사건이다. 영남친목회란 경성에 거주하는 경상남북도 출신자들의 친목단체였다. 이 단체가 창립된 1927년 9월 즈음에는 동향 출신자들의 친목단체가 경성에 여럿 존재했다. 호남 출신자들의 친목단체인 호남동우회, 서북 5도 출신자들이 결성한 오성구락부, 일부 영남 출신자들이 따로 만든 상우회 등이 있었다. 지방에서 태어나 경성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출신지 동일성을 식별 기준으로 하여 이 단체들을 조직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인간집단이 참여했다. 출신지가 같으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입회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관리, 부유한 지주와 상공업자도 있고 노동운동 참가자와 사회주의 문필가도 포함돼 있었다.

문제는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안광천이 영남친목회에 가담했다는 사실이었다. 단지 참여만 했을 뿐 아니라 깊숙이 주도적으로 개입했음이 드러났다. 그는 단체 설립의 이유와 논리를 적은 ‘영남친목회 취지서’를 작성했다.3

그 단체의 이론가 역할을 자담한 것이다. 취지서에는 눈길을 끄는 곳이 있었다. “용기를 고취하여 전 민족적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가 분투”하겠노라고 천명했다. ‘전 민족적 사업’이란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었다. 식민지 약소민족의 해방을 뜻할 수도 있고, 일본제국의 소수민족으로서 자치제를 실시하거나, 제국의회나 지방의회의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끔 참정권을 획득하자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하지만 총독부 관료, 대지주들과 같이하는 ‘전 민족적 사업’이란 적어도 조선 독립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

경향 각지에서 영남친목회 반대운동이 터져나왔다. ‘영남친목회반대책강구회’라는 단체가 결성되고, ‘영남친목회 반대 성명서’가 발표됐다. 머지않아 운동의 외연이 확장됐다. 단지 영남친목회 한 단체만이 아니라 그와 성격을 같이하는 모든 지방열단체를 반대하는 사회적 캠페인으로 확장됐다. 그것을 ‘지방열단체 반대운동’이라고 불렀다. 지방열단체는 ‘반동단체’로, 그에 참여한 사회운동자들은 ‘반동분자’로 간주됐다. 반대운동은 광범한 호응을 받았다. 전국 규모의 3대 대중단체로 촉망받던 노총(조선노동총동맹), 농총(조선농민총동맹), 청총(조선청년총동맹)이 지방열단체를 반대한다는 데 한목소리를 냈다. 그뿐인가. 전 조선의 ‘민족유일당’으로 존중받는 신간회도 지방열단체 배척을 결의했다. 막중한 무게를 갖는 결정이었다. 여론의 향배는 이미 결정된 거나 진배없었다.

조선공산당 내부 동향도 심각했다. 안광천의 책임을 묻는 당내 흐름이 나타났다. 책임비서가 ‘친일파·자치파’와 협동 사업을 주창하는 것은 심각한 과오였다. 누가 혁명의 적이고 누가 벗인지를 가르는, 혁명운동의 근본 문제를 혼란하게 하는 행위였다. 안광천을 책임비서 직책에서 면직시킴과 아울러 당에서 제명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됐다. 이 때문에 조선공산당은 다시 둘로 나뉘었다. 안광천을 옹호하는 그룹과 그의 면직을 요구하는 당원들로 분열됐다. 전자에는 엠엘당 그룹이 섰고, 후자에는 엠엘당을 비난하는 그룹이 섰다.

결국 1927년 10월 안광천은 책임비서 직위에서 물러나야 했다. 영남친목회에 참여하여 사회적 분란을 야기한 책임을 진 셈이다. 조선공산당이 출범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의 최고 지도자가 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책임비서 직위에서 물러나는 현상 말이다. 그러나 엠엘당 그룹이 반대파의 요구를 백퍼센트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단지 책임비서 직위만 벗을 뿐이지 중앙위원 자격은 그대로 유지됐다. 당내 갈등은 계속됐다.


사진 한 장 안 남아


안광천 책임비서 시기는 조선 사회주의운동사의 한 전성기였다. 그의 재임과 동시에 사회주의운동 진영이 하나로 통일될 수 있었고, 그의 사임과 더불어 조선공산당이 새롭게 분열되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안광천은 조선공산당 성쇠의 바로미터였다. 또 안광천 책임비서 시기는 전환기이기도 했다. 이전의 내부 다양성이 화요파와 서울파의 갈등으로 대표된 데 반해, 안광천 이후에는 엠엘파와 비엠엘파의 대립으로 표출됐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이래저래 안광천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역사 속 인물이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의 용모를 전하는 사진 한 장 발견되지 않았다. 그의 용모에 관한 묘사가 남아 있다. “머리를 길러 뒤로 젖혔으나 지나치게 길지는 않았다. 얼굴은 빼빼 말라 골격이 훤히 드러났으며, 좌우 뺨은 두드러지고 턱은 뾰족했다. 과묵한 편이고, 말을 하고 나면 해죽해죽 웃는 습관이 있어서, 다정스럽고 친절한 기분이 느껴졌다. 키가 호리호리하고 약질이었다. 체격만을 놓고 보면 투사 같은 느낌은 없었다.”4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新聞戰線總動員, ‘大合同日報’의 幹部 公選’, <동광> 29호, 1931.12, 63쪽.

2. <김철수 외 20인 조서(2)> 419~420쪽,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3>, 청계연구소, 1986, 197쪽.

3. ‘영남친목회 취지서’ 1927.9. (김철수, <福本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중요 재료> 1928.4.1, 4~5쪽 수록),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55 л.43~45об.

4. ‘名士諸氏 맛나기 前 생각과 맛난 後의 印像’, <별건곤> 11호, 1928.2, 68쪽.




임경석의 역사극장

레닌에게 면박당했다는 소문의 정체

1930년대 사회주의 잡지 <이러타>에서 비난당한 이동휘 사회주의 내부 불화 과정에서 이득 얻은 세력은 누구일까


1921년 11월28일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 접견실에서 만난 왼쪽부터 레닌, 박진순(캐리커처), 이동휘. 임경석 제공

잡지 <이러타> 1931년 8월호에는 이동휘(1873~1935)에 관한 흥미롭지만 자못 기이한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이동휘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레닌과 회견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봉변당했다는 얘기다. 조선 실정에 관한 무지로 레닌에게서 책망받았다는 거였다.

회견 석상에서 레닌이 물었다. 현재 조선에 부설된 철도 길이가 얼마인지, 또 해안선이 몇 마일이며, 최근 1년간 산물이 얼마인지를 질의했다. 이동휘는 쩔쩔맸다. 거듭되는 질문에 한 번도 제대로 답을 못했다. 레닌이 책망하듯 말했다. “동무여, 그렇게 조선 실정을 모르고 어떻게 조선 일을 하시렵니까?”

과연 사실일까? 일국의 혁명을 대표하는 사람에게 그처럼 면박을 주었다는 게, 아무리 세계를 뒤흔든 러시아혁명의 지도자 레닌이라 할지라도 있을 법한 일인지 의심스럽다. <이러타>는 1931년 6월 창간해 <비판> <시대공론> <신계단> <대중> 등과 더불어 여론에 영향력을 미치던 합법 사회주의 잡지였다.1)


유학생 출신 2030 사회주의 지식인들의 비난


이동휘 에피소드의 집필자는 필명 ‘지양’(止揚)을 썼다. 그는 ‘레닌과 우리 선구 이동휘군’이라는 기사를 써서 이동휘에 관한 무지와 책망의 서사를 소개했다. 혁명운동 노선배를 ‘군’이라고 일컫는 것을 보면 일본식 풍습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일본 유학생 출신 젊은이였을 것이다. <이러타> 관련자들은 사회주의 실천 운동과는 별다른 관계를 맺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비밀운동을 이끌던 이재유는 <이러타> 같은 합법 사회주의 잡지를 ‘프롤레타리아트혁명운동과 유리된 유동분자들의 무책임한 언론’으로 지목했다. 이로 미뤄보면 <이러타> 관련자들은 비밀결사와 연계하지 않은 채 합법 영역에서만 활동하던, 유학생 출신 20~30대 사회주의 지식인 그룹인 것으로 판단된다.

아니나 다를까, <이러타> 기사는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당시 가장 대중적이고 인기 있는 종합지 <삼천리> 1931년 11월호 지면에 ‘시베리아의 회상, 잡지 <이러타> 소론에 대하여’라는 비판 기사가 떴다. 이 글을 쓴 필명 ‘창해거사’는 러시아 조선인 사회에 오랫동안 체류했음을 밝히고, 자신이 ‘저간의 사정’을 잘 알고 있음을 피력했다. 이어서 그는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앞뒤 맥락을 잘 모르는 일개 서생의 무책임한 발언에 분노가 솟구친다고 통박했다. 그는 레닌과 이동휘의 회견에 관해서 자신이 아는 내용을 소개한 뒤, 필명 ‘지양’을 향해 혁명운동의 오랜 선배에게 존경을 표할 줄 알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이동휘에게 들씌운 불명예는 그 뒤로도 계속 사람들 입에 회자됐다. 레닌 회견 때 무지로 인해 면박당했다는 소문은 수그러들지 않고 꾸준히 유포됐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1905~38)도 그 일화를 들었다고 한다. 1937년 중국 연안에서 미국의 진보적 언론인 님 웨일스에게 조선혁명 역사를 술회하던 김산은 이렇게 말했다.


“1918년에 이동휘가 맨 처음 시베리아에서 모스크바로 갔을 당시 그는 이론이라고는 전혀 갖고 있지 못했으며, 오로지 대중운동과 소련에 대한 믿음밖에 없었다. 조선에- 공장, 철도, 농촌에- 얼마만큼의 노동자가 있느냐고 레닌이 물었을 때, 그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것은 하나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레닌은 웃으면서 지노비예프를 불러서 말했다. ‘우리는 여기 있는 이동휘 동지를 도와주어야만 합니다. 이동휘 동지는 조선 독립에 대한 뜨거운 피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방법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동양의 자연적인 상태입니다. 그들은 혁명적 기지를 전혀 갖지 못하고 다만 테러리즘과 군사행동의 배경만을 갖고 있을 따름입니다.’”2)

김산이 노혁명가 이동휘를 의도적으로 깎아내리려던 것은 아니리라. 그는 아마 들은 대로 가감 없이 얘기를 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산의 진술 내용은 근거 없이 왜곡된 부분이 많았다. 회견 연도도 틀렸고, 배석자 정보도 근거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 후대로 내려갈수록 이동휘 불명예 서사는 덧붙여지고 윤색까지 됐음을 알 수 있다.


이동휘 불명예 서사를 퍼뜨린 잡지 <이러타> 창간호(1931년 6월호) 속표지. 임경석 제공

한인사회당 vs 고려공산당

악의적인 풍문은 왜 오랫동안 지속됐을까? 앞뒤 맥락을 잘 아는 이동휘 쪽 인사들이 백방으로 나서서 변호했는데도 말이다. 혹시 그 풍문이 사실이기 때문일까. 사실의 힘이 그처럼 오랫동안 소문에 생명력을 줬던 게 아닐까. 또 다른 추정도 가능하다. 이동휘 불명예 서사로 이득을 얻는 세력이 있다면, 게다가 그 세력이 복수였다면 그런 현상이 나타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의문에 답하려면 이동휘와 레닌의 회견이 어떤 맥락에서 언제 어떻게 이뤄졌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동휘는 한국 최초로 사회주의 정당을 만든 인물이다. 그가 45살이던 1918년 4월, 망명지이던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이란 이름의 혁명정당을 결성해, 중앙위원회 위원장직에 올랐다. 식민지 조선의 해방 투쟁에 헌신하기 위해 망명길에 오른 지 6년 만의 일이었다. 망명길에 함께 나섰던 비밀결사 신민회의 젊은 동료들이 행보를 같이했다. 이 단체에는 재러동포 출신의 저명한 여성 혁명가 김알렉산드라도 합류했다. 그녀는 하바롭스크를 임시 수도로 하는 극동소비에트 정부의 외교부 장관이자, 러시아 볼셰비키 지방당의 임원이었다.

한인사회당의 지도이념은 마르크스·레닌주의였다. 적백 내전에 휩싸인 러시아의 혼란한 정세 속에 볼셰비키와 보조를 같이했다. 이듬해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이 창설되자, 지체 없이 당대표단 3명(박진순·박애·이한영)을 파견한 데서도 이 당의 성격을 쉽게 가늠할 수 있다. 당대표단은 한인사회당을 국제당 지부로 가입시키고, 러시아 레닌 정부에서 거액 지원을 약속받는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

이동휘 자신이 직접 국제당에 대표로 나간 것은 3년 뒤였다. 1921년이었다. 국제당 조직 원칙에 따라 고려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꾼 이동휘는 당면한 당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향했다. ‘위기’란 무엇을 말하는가? 국제당 동아시아담당관들과의 불화가 그것이다. 국제당의 동방부와 극동비서부의 요직에 취임한 보리스 슈먀츠키, 그리고리 보이틴스키 등이 이동휘 그룹을 배제하고, 이르쿠츠크에 기반을 둔 또 하나의 고려공산당을 내세워 조선혁명을 주도하려고 나섰다. 이에 호응한 조선인 그룹이 있었다. 이른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다.


이동휘 불명예 서사를 퍼뜨린 <아리랑> 1941년 영문판 초판 표지. 임경석 제공

민족해방혁명 vs 사회주의혁명

당시에는 조선혁명의 성격에 관해 민족해방혁명이냐, 사회주의혁명이냐를 둘러싸고 논쟁이 심각하게 벌어졌다. 이동휘 그룹은 전자를 지지했고, 이르쿠츠크파 세력은 러시아혁명과 마찬가지로 조선혁명도 사회주의혁명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양쪽 대립은 심각했다. 화해할 수 없는 적대성마저 나타났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동휘가 직접 모스크바로 간 것은 이 때문이었다.

1921년 11월28일 이동휘 일행은 레닌과 만났다. 고려공산당 대표단 자격으로 러시아공산당과 소비에트러시아 정부의 지도자인 레닌과 공식 면담을 했다. 약속 시간은 오후 5시, 장소는 크렘린 내부 접견실이었다. 회견에 초대된 조선 대표단은 4명이었다. 고려공산당 대표단 이동휘·박진순·홍도 3명과 러시아어 통역 김성우(러시아 이름 ‘김아파나시’)였다. 박진순과 김성우는 러시아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재러동포 2세였다.

예정된 회견 시간은 30분이었다. 통역 김성우의 기록에 따르면, 접견실로 들어서는 레닌은 활달했다. 일제히 일어서서 경의를 표하는 조선 대표단에 가깝게 다가와 한 사람씩 악수했다. 그의 첫 발언은 “고려공산당과 만나니 참으로 기쁩니다”였다. 그는 안락의자에 앉으면서 손님 일행에게도 앉으라고 권했다. 이동휘가 조선어로 먼저 말을 꺼냈다. 시간이 많지 않으므로 혁명운동의 여러 문제를 솔직하게 묻겠다고 했고, 레닌도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그렇게 하자고 동의했다. 양쪽 사이에 조선의 정치·경제 상황, 일제의 식민정책, 고려공산당의 내부 상황, 3·1혁명 운동의 특성, 조선혁명 투쟁 조건 등의 얘기가 오갔다. 레닌은 특히 조선에 부설된 철도선과 산업화에 관심을 표명했다. 조선인들은 책상 앞에 놓인 지도를 가리키면서 레닌의 질의에 답했다.

담화 중에 비서관이 들어왔다. 회견 시간이 다 지났다고 통보하기 위해서였다. 레닌은 여유 시간이 25분 있으니 좀더 얘기해도 괜찮다고 했다. 회견 시간은 1시간 가까이 계속됐다. 회견 말미에 양쪽은 작별 인사를 했다. 레닌은 대표단장 이동휘의 손을 굳게 쥐고 오랫동안 석별의 정을 표했다.3) 그때 레닌은 51살, 이동휘는 48살이었다.


이동휘·레닌 회견기를 남긴 러시아어 통역 김성우(김아파나시). 임경석 제공


레닌의 지지가 불러온 악의적 풍문

이동휘는 레닌과의 담화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뒷날 국내 신문에 기고한 회상기에서 말하기를, 그날 레닌은 다섯 개 요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첫째, 테러 정책을 사용하지 말 것. 둘째, 일본 노동계급과 연대할 것. 셋째, 대중에 대한 선전과 조직에 노력할 것. 넷째, 3·1운동 전개 과정에서 철도가 큰 역할을 했음에 주목할 것 등이었다. 끝으로 가장 깊은 감화를 줬던 것은 조선혁명의 성격에 관한 견해였다. 레닌은 조선혁명의 첫 계단이 민족혁명운동이라고 지적했다.4) 레닌은 초창기 조선 사회주의자들의 혁명 성격에 대한 논쟁에서 이동휘 그룹의 견해를 지지했던 것이다.

이동휘에게 들씌운 불명예가 어떤 맥락 속에 형성됐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것은 이동휘 그룹이 성취한 조선 사회주의운동 주도권을 자파의 수중으로 옮기기를 바랐던 경쟁자들, 국제당 동아시아담당관들과 이르쿠츠크파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미지였다. 이동휘에 대한 악의적 풍문은 그들에게 정치적 이득을 가져다줬다. 그 풍문이 지속해서 유포된 배경에는 바로 이런 사정이 가로놓여 있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1930년대 초 사회주의 잡지 <이러타>의 성격과 지향’, 전명혁, <역사연구> 34, 2018.
2. <아리랑>, 님 웨일스 지음, 조우화 옮김, 동녘, (개정4판), 96~97쪽, 1992.
3. ‘레닌과의 회견기’, <태평양의 별>, 김아파나시, 1929년 1월22일. <재소 한인의 항일투쟁과 수난사>, 김블라지미르 지음, 조영환 옮김, 국학자료원, 177~180쪽, 1997.
4. ‘동아일보를 통하여 사랑하는 내지 동포에게 (5)’, 이동휘, <동아일보> 1925년 1월22일치.





임경석의 역사극장

‘12월테제’ 조선어 필기본의 발견

모스크바 기록관에서 90년 만에 모습 드러내
누가 작성했나… 서울상하이파 또는 김단야 추정


‘12월테제’ 러시아어 정본. ‘조선문제에 관한 결정’이라는 제목 옆에 ‘최종본’이라는 펜글씨 메모가 쓰여 있다. 

1928년 12월10일 코민테른 정치비서부가 채택할 때 사용한 문서다. 임경석 제공


‘12월테제’ 조선어 필기본이 발견됐다. 모스크바의 한 기록관에서 근 90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코민테른과 소련공산당 기록을 소장한 것으로 유명한 러시아사회정치사기록관의 한 서류 파일에서 잠자고 있던 문서다.

이 문서는 국한문 혼용체로 작성됐다. 개성 있는 유려한 펜글씨로 쓰인 것으로 보아 작성자는 필시 중등 이상의 근대 교육을 이수한 사람으로 보인다. 군데군데 가감첨삭의 교정 흔적이 남아 있다. 그 때문에 현장감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종이는 밑줄이 인쇄된 21줄짜리 편지지로 보이는데, 혹여 노트 속지일 수도 있겠다. 페이지마다 글자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모두 합쳐 19쪽이다. 200자 원고지로 환산했더니 62장에 해당한다.


통일 교과서에 실릴 역사적 문서


12월테제란 1928년 12월10일 코민테른 정치비서부가 채택한 조선문제결정서를 가리킨다. 조선 혁명운동의 기본 방침을 논하는 강령적 문서이기에 ‘테제’라고 했다. 이 테제는 일제하 조선 사회주의운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기념비적인 문헌이다. ‘기미독립선언서’(1919)와 ‘조선혁명선언’(1923)이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위상이 있다면, 12월테제 조선어 필기본은 사회주의운동사 속에서 그런 구실을 하는 텍스트라 할 수 있다. 뒷날 남북한이 통일되면 국어 교과서에 실릴 개연성이 큰, 역사적인 텍스트다.

12월테제를 기점으로 사회주의운동 내부에 ‘테제 정치’라고 해도 좋을 행동양식이 출현했다. 새로운 현상이었다. 1928년 이전에도 여러 차례 코민테른 조선문제결정서가 채택된 바 있다. 그러나 내용이 길지 않았다. 꼭 필요한 사항만 짧은 문장으로 명시했다. 그런데 12월테제 이후 달라졌다. ‘테제’라고 부르는 긴 정치적 문서가 채택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혁명운동의 주·객관적 정세, 전략과 전술, 조직 문제 등 체계를 세운 일종의 논문이었다. 이후 ‘9월테제’ ‘10월서신’ 등으로 불리는 긴 문서가 줄을 이었다. 이 현상은 해방 직후까지 계속됐다. 1945년 조선공산당 지도자 박헌영이 작성한 8월테제는 이 행동양식을 계승한 것이었다.

‘테제 정치’가 20년 가까이 지속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1929년 이후 통일된 전위당(노동자계급의 전위대로서 사회주의혁명 투쟁을 선도하는 정당)의 중앙기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국내외에 산재한 여러 층위의 비밀결사 구성원들의 생각을 일치시키는 데 테제와 같은, 논리적으로 잘 짜인 장문이 유용했다. 어느 비밀결사에 속했든지 상관없이 그 구성원들의 정체성을 통합하는 데 적합했다. 그뿐인가. 테제는 정치·사상적으로 비밀결사 구성원을 교육하는 구실도 했다. 국내외에 조성된 복잡한 정세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떤 정책을 추진해야 하는지 등의 문제에 일목요연하게 해답을 제시했다. 그 때문에 비밀리에 활동하는 현장의 사회주의자들은 이 테제를 구하려 했고,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탐독하는 현상이 생겨났다. 하지만 해방 이후 통합 공산당이 세워진 뒤로 ‘테제 정치’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구성원 사이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훨씬 유용한 수단이 많이 쓰였기 때문이다.


12월테제 조선어 필기본 첫 쪽. ‘조선문제에 대한 결정서’라는 제목 아래 펜글씨로 적혀 있다. 전체 분량은 모두 합해 19쪽에 이른다. 임경석 제공

문서 발견 장소가 유일한 단서


도대체 누가 이 기록을 작성했는가? 유감스럽지만 문서의 어느 곳에도 작성자가 누군지 알려주는 구절이 없다. 부득이 추정할 수밖에 없다. 이 문서가 발견된 장소가 유력한 단서다. 조선어 필기본은 12월테제를 작성한 코민테른 조선위원회 파일에 켜켜이 쌓인 초안들 속에 있었다. 그렇다면 조선어 필기본의 작성자는 12월테제 채택 논의 과정에 참여한 조선인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코민테른 조선위원회의 구성은 쿠시넨(핀란드), 퍄트니츠키(러시아), 레멜레(독일) 3명으로 이뤄졌다. 이들은 모두 코민테른의 최상급 집행기구인 정치비서부 위원이었다. 최고위직 인사 11명 가운데 3명으로 이뤄진, 권위 있는 기구였다.

조선인이 포함되지 않은 점에 눈길이 간다. 그렇다고 조선인이 문제 심의에 전혀 참여하지 않거나 배제됐던 것은 아니다.

조선위원회의 심의 과정에 참여한 조선인은 5명이었다. 이들은 분열된 조선공산당의 어느 한쪽을 대표했다. 이동휘와 김규열은 1927년 12월 당대회에서 성립한 조선공산당, 이른바 서상파(서울상하이파의 줄임말)를 대변했다. 그에 반해 양명과 한빈은 1928년 2월 당대회에서 결성된 조선공산당, 이른바 엠엘(마르크스레닌주의)파를 대표했다. 또 한 사람은 러시아 모스크바 국제레닌대학에 유학 중이던 김단야였다. 그는 분열되기 이전 조선공산당의 관점에서 독립적인 의견을 진술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이 5명은 조선공산당의 내부 상황에 대해 상세한 서면 보고서를 제출했고, 위원회가 요청하는 참고 자료를 작성했다. 주요 인물에 대한 평도 썼고, 직접 위원회 회의에 출석해 질의에 답변도 했다. 물론 어느 사안이든 자신의 관점에서 진술했다. 그 덕분에 조선위원회는 중요 사안마다 세 종류의 상이한, 때로는 서로 대립되는 정보를 볼 수 있었다.

조선인 대표단은 의사소통을 위해 통역을 둘 수 있었다. 서상파 공산당 대표단은 박진순의 도움을 받았다. 1920년 코민테른 제2회 대회에 한인사회당 대표로 참석했던 그 사람이다. 그는 러시아에서 정규교육을 받았고 모스크바대학 철학과를 졸업했기에 세련된 고급 러시아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엠엘파 공산당 대표단이 어떤 사람을 통역으로 내세웠는지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마 국제공산청년회 제5회 대회(1928년 8월20일~9월18일)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와 있던, 고려공청 대표 강진일 가능성이 높다. 강진은 러시아 연해주 포시예트에서 태어나 러시아 초·중등 교육을 이수하고 극동대학 공대에서 수학했던지라, 러시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김단야는 통역을 세우지 않고 직접 자기 의사를 밝혔다. 그는 러시아어로 대화할 수 있는데다, 서면으로 문서를 제출할 때는 영어를 썼다.

12월테제 조선어 활자본 첫 쪽. 조선공산당 엠엘(NL)파 기관지 <계급투쟁> 창간호에 실렸다. ‘국제%癤愿瑛� 조선문제에 대한 결의’라는 제목으로 6쪽에 걸쳐 게재됐다. 제목에서 ‘공’에 해당하는 글자가 빠진 것이 이채롭다. 임경석 제공


공산그룹별로 다양한 번역본


12월테제 조선어 필기본의 작성자는 바로 조선인 대표와 통역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판단된다. 한 걸음 나아가 좀더 후보자군을 줄일 수 있다. 12월테제 조선어 판본들을 비교하는 방법을 통한다면 말이다.

12월테제가 채택된 지 불과 5개월 만에 조선어 활자본이 출간됐다. 중국 상하이에서 발간되는 조선공산당 엠엘파의 기관지 <계급투쟁> 창간호에 그 전문이 게재됐다. ‘국제공산당의 조선문제에 대한 결의’라는 제목 아래 6쪽에 걸쳐 실려 있다.

두 가지가 놀랍다. 코민테른의 최고위급 결정 내용을 신속히 당원들에게 알리고 있다는 점이 그렇고, 기관지 창간호의 권두 논설로 활자본을 실을 만큼 조직 역량이 우수하다는 점도 그렇다.

내용을 비교해봤다. ‘필기본’과 ‘계급투쟁본’ 사이에 내용상 차이는 발견하기 어려웠다. 다만 선택된 용어나 문투, 표현 방식이 같지 않은 점이 눈에 띄었다. 예컨대 필기본의 첫머리는 “조선 경제의 모든 지배적 우월권은 일본 금융자본의 수중에 들어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에 비해 계급투쟁본에는 “조선의 모든 경영의 지배권은 일본 금융자본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다”고 표현됐다. 한 군데 더 살펴보자. 조선혁명의 성격을 논하는 대목이다. 필기본에는 “조선혁명은 그 자체의 사회적 경제적 내용으로 보아서 다만 일본제국주의만 대항할 것이 아니라 역시 조선의 봉건주의도 대항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표현됐다. 계급투쟁본에는 “조선혁명은 그 사회적 경제적 내용에 있어서 다만 일본 제국주의뿐 아니라 조선의 봉건주의까지도 반대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결국 양자 사이에 내용상 유의미한 차이는 없지만, 용어와 문투가 동일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다음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첫째, 필기본과 계급투쟁본은 서로 다른 사람이 작성했음을 뜻한다. <계급투쟁>이 엠엘파 공산당의 기관지임을 고려한다면, 그에 게재된 활자본은 모스크바에 파견된 양명과 한빈, 그들의 러시아어 통역을 맡은 강진 등이 작성했음이 분명하다. 둘째, 12월테제의 조선어 정본이 코민테른에 의해 독립적으로 채택된 적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코민테른이 채택한 12월테제 정본은 러시아어본 하나고, 조선어나 일본어 등 다른 언어로 쓰인 것은 모두 그 번역본이다. 조선어 판본의 다양성은 12월테제의 번역과 전파가 통일된 게 아니라 공산그룹별로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필적 대조하고 개인 행적 추적을


12월테제 조선어 필기본은 누가 작성했는가. 두 부류의 인물들로 좁힐 수 있다. 서상파 공산당 대표로서 조선위원회 심의에 참가했던 이동휘, 김규열, 통역 박진순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제3의 입장에서 심의에 참가했던 김단야일 것이다. 딱 여기까지다. 현재 확보한 단서로 추적할 수 있는 한계가 말이다. 만약 전자라면 12월테제 조선어 필기본은 서상파 계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참가자들이 숙독하던 문서일 것이다. 후자라면 김단야가 이끌던 국제선 공산주의 그룹이 사용하던 문서일 것이다. 앞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추론의 단서를 확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후보자들이 직접 쓴 문서의 필적을 대조하거나, 12월테제 채택 전후 각 개인의 행적을 정밀하게 추적하는 일 등이 그것이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조선문제에 대한 결정서’,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50 л.144~153.

2. 강호출, <코민테른 ‘조선문제결정서’를 통해 본 조선공산당운동(1925~1928)>, 고려대 박사학위 논문, 141~142쪽, 2004년.

3. ‘국제공산당의 조선문제에 대한 결의’, <계급투쟁> 1호, 33~39쪽, 1929년 5월. 朴慶植 編, <朝鮮問題資料叢書> 7, 東京, アジア問題硏究所, 1982.




그라노비타야 궁전 (Granovitaya Palata, Грановитая Палата)


이반 대제 시절인 1491년에 지어진 다면체 궁전 그라노비타야는 독특한 벽면의 석축공법에서 유래되었는데 

르네상스 시대를 대변하는 건축물이다.

크레믈린 대궁전과 테렘 궁전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다면체 궁전은 15세기 무렵에 

마르코 루포와 피에트로 솔라리오라는 이태리 건축가에 의해 지어졌다.  


이반대제 종루에서 정면 서쪽으로 바라보면 오른쪽 끝에서부터 왼쪽까지 성모승천성당​, 성모성의안치성당, 

테렘궁 예배당 열 한 개 돔을 지나 가운데 흰 대리석 건물 그라노비타야 궁전이 서 있고

왼쪽 뒤로는 크렘린 대궁전의 동쪽 날개가 보인다.


러시아 통일의 기반을 다진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대제)는 이탈리아 건축가를 초빙해 

1472년 성모승천성당을 성공적으로 완공하자 이탈리아에서 마르코 루포와 피레트로 솔라리오를 더 불러와

1492년 그라노비타야 궁전을 왕실 연회장과 리셉션장으로 지었다.


크렘린에 남아 있는 옛 건물 가운데 종교 건축을 빼고는 가장 오래되었다.

겉보기엔 삼층 같지만 천장과 벽 모두를 화려한 프레스코 벽화로 장식해 툭 트인 공간이다.


'그라노비타야'는 보석을 가공하면서 절삭한 면(面)을 가리킨다. 영어로는 'Facet'로 번역할 수 있겠다.

창문마다 양쪽에 세운 장식 기둥이 보석을 깎아내듯 섬세하고 아름다워서 붙인 이름이다.​

넓이는 160평밖에 안 되지만 차르(황제)들의 취임 축하연, 외교사절 환영연을 열었고

이반4세(뇌제)는 카잔한국 정복을 자축하며 사흘 동안 연회를 벌였다고 한다.


표트르대제는 수도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기고도 스웨덴전쟁 승전 축하연을 여기까지 와서 치렀다고 한다.

현대에도 신임 대사들이 부임해 오면 여기서 신임장을 제정한다.


1994년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방문했을 때도 리셉션이 열렸다.

2012년 대대적인 개보수를 거쳐 일반에 개방됐지만 인원을 제한해 미리 예약한 관광객만 들어갈 수 있다.


그라노비타야 궁전  (Granovitaya Palata, Грановитая Палата)


삼각 대리석의 장식주가 전면을 둘러싸고 있는 이 건물의 높이는 29m이며 장방형 건물이다. 

현관은 모자이크로 장식 아름답지만 고풍스러운 주위의 경관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그라노비타궁과 수태고지성당 사이로 크렘린 대궁전의 동쪽 날개 일부가 보인다.


14세기 목조 궁전이 있던 자리에 이탈리아 건축가들이 지었던 차르의 바로크 궁전을 허물고

로마노프 왕조의 위세를 뽐내기 위해 1849년에 지었다.

광장에서 보이는 부분은 너비 125m, 높이 47m에 이르는 궁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이층 건물이지만 이층 창을 2단으로 만들어 삼층처럼 보인다.


그라노비타야 궁전  (Granovitaya Palata, Грановитая Палата )


그라노비타야 홀 (Granovitaya Hall)


1491년 마르코 라포와 피에트로 솔라리가 완성한 건축물로 외국 대사의 접견, 귀족 의식 등에 사용되었다. 

크렘린에서 가장 큰 공식 알현실로 둥근 천장, 웅장한 샹들리에, 

성서와 역사의 장면을 묘사한 벽화들이 그라노비타야 궁전의 접견실을 아름답게 빛내고 있다.


화려한 그라노비타야 궁전 내부


이반대제 종루의 맞은편에  '그라노비타의 궁전'이 만들어져 이 건물 4층에 짜르가 군림했다. 

그라노비타야 Granovitaya라는 뜻은 '다면(多面)의'라는 뜻인데 

궁전에 붙여진 이유는 주 현관을 장식하는 돌이 다면형이기 때문이다.


그라노비타야 궁전 내부


이반대제, 표트로 대제 등이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으며 왕비나 왕녀 등 연인들은 

참가할 수 없었고 궁전을 장식하고 있는 태피스트리로 밖을 엿보았다고 한다.


그라노비타야 궁전 내부


크렘린 궁전의 꽃은 역사의 흔적과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어 있는 그라노비타야 궁전이다.

우스펜스키 대성당과 마주 보고 있는 그라노비타야 궁전은 이반 대제에 의하여 1491년에 건설된 궁전으로 

이반 대제는 이탈리아 건축가 마르코 루포와 안토니오 솔라리를 불러 이 궁전을 짓도록 했다. 

그라노비타야 궁전이 완성되자 이반 대제는 매우 만족하여 궁전을 만든 이탈리아 건축가들을 몹시 칭찬했다고 한다.


보야르 방(Boyar's Room)


그라노비타야 궁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장소로는 보야르 방이 있다. 

보야르(Boyar)는 봉건 영주를 뜻하는 러시아어인데 러시아의 각 지역을 다스리던 영주와 제후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면 모여서 문제를 해결하고, 또 황제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던 곳이다. 























[영상] 그라노비타야 궁전  (Granovitaya Palata, Грановитая Палата )


[영상] 그라노비타야 궁전  (Granovitaya Palata, Грановитая Палата )





























































































































하늘에서 본 크렘린궁전


1875년 크렘린 대궁전


모스크바 강과 크렘린 궁전


'크렘린'이니 '크레믈린 궁전'과 같은 영어식 표현으로 신문과 방송에서 소개되곤 하는 끄레믈(Кремль)은

사실 특정한 건물이나 성벽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끄레믈의 원래 사전적인 의미는 ‘성벽’, ‘요새’라는 뜻의 보통명사다. 

러시아 지역 상당수에 ‘끄레믈’이라고 불리우는 성벽이 하나씩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어느 지역의 끄레믈이라는 수식어가 붙여 불리운다. 

그러나 단순히 끄레믈이라 불리우는 곳은 단 하나 모스크바에 있는 것을 지칭한다. 

더불어 끄레믈은 수도 모스크바의 정치적 심장부를 상징하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모스크바 중심부에서 약 26만 제곱미터의 넓은 구내에 들어선 끄레믈 내의 건물들은 

과거 ‘짜르’와 정교 대주교의 거처였다. 

끄레믈은 세상의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도 러시아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는 옛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사실 끄레믈은 아주 강렬하게 옛 러시아를 상징하는 것이어서 러시아 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뾰뜨르 대제(표트르 대제)는 러시아를 근대 - 근세화 시키려고 결심했을 때 끄레믈이 있는 모스크바를 뒤로한 채 

북서쪽 650km 지점에 새 수도인 쌍뜨 뻬쩨르부르그를 세워 새 출발을 하기도 했었다.


지금 남아 있는 ‘끄레믈’은 1812년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에 의해 소실된 이후 재건축한 것이다. 

여러 궁전과 사원, 최고회의 건물, 병기고, 무기고, 대포의 황제, 종의 황제 등 다양한 볼거리들이 있다.


크렘린 대궁전 ( Большой Кремлёвский дворец, Great Kremlin Palaces )


발쇼이 끄레믈룝스키 드바례쯔(Большой кремлевский дворец - 1838-50 - Тон К.А.)’라고 부르는 건물이며, 

크렘린 대궁전이라고 불리운다. 

모스크바 강에 면하고 있는 이곳은 과거 제국시절인 15∼17세기 역대 황제의 처소였던 곳이다. 

전장 125m, 방의 수는 700개, 총 2만㎡의 넓이를 자랑한다. 


건물의 1층에는 집무실 외에 역대 황제의 대리석, 호화로운 방들이 있고 

2층에는 저 유명한 예식용 ‘게오르기 홀’이 있다. 

이곳에는 19세기의 가구, 샹들리에, 양탄자, 악기, 그림, 조각 등이 다양하게 갖추어져 있어 

파리의 루브르 궁전 못지 않게 화려함을 갖고 있다. 


그 후 1934년 개축 때에는 3,000명 수용의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의장이 만들어졌었다. 

주요한 몇 개의 홀에는 러시아 훈장의 이름이 붙어 있는데 에카테리나 훈장의 홀, 블라디미르 훈장의 홀 등이 그것이다. 

그 중 가장 아름다운 홀이 ‘게오르기 홀’이다. 

이 곳은 러시아 대통령 취임식을 벌이는 상징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게오르기 홀은 연간 공개되는 날이 극히 한정되어 있을 정도로 외부 공개를 하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1년 내내 외부 공개를 하지 않을 때도 있다. 

게오르기 홀을 비롯해 대 끄레믈 궁전 안을 이미지로 만나본다. 


크렘린 대궁전 ( Большой Кремлёвский дворец, Great Kremlin Palaces )


중세 러시아의 성새(城塞) · 성벽(城壁)으로, 오랫동안 러시아 황제의 거성(居城)이었으나 

18세기 초 페테르스부르크(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겨울궁전 [동궁 冬宮]'이 세워지면서 

황거(皇居)로서의 기능을 잃었으며, 1918년 이후 소련 정부의 본거가 되었다. 


러시아어(語)로는 크레믈리(kreml")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모스크바의 크렘린이며, 러시아어 대문자로 시작할 때는 모스크바의 것을 가리킨다. 

전설에 의하면, 모스크바의 창건자 유리 돌고루키공(公)이 1156년 무렵 

작은 언덕 위에 숲과 목책으로 요새를 구축하였다 한다. 


14세기 타타르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떡갈나무로 두껍게 성벽을 건설하였고, 1367년 이것을 하얀 돌로 대체하였다. 

이것이 벽돌의 총안(銃眼)이 있는 성벽이 되었으며, 15∼16세기에 다시 축조되어 현재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으로 모스크바는 다시 수도가 되어, 1918년 이후 크렘린은 소련 정부의 본거가 되었다. 


따라서 "크렘린"이란 말은 소비에트연방 시대에 소련 정부와 당(黨) 또는 당국자(當局者)의 대명사로서도 사용되었다. 

현재의 크렘린 궁전은 모스크바 강(江)을 따라 1변이 약 700m의 삼각형을 이루고, 

높이 9∼20m, 두께 4∼6m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장식적인 성벽의 첨탑, 피라미드형 탑, 북동의 주문(主門) 레데멜문의 시계탑 등은 17세기에 증축되었다. 

성내에는 3대 성당인 성모승천교회(건축 기간 1475~1479), 성수태고지교회(1484~1489), 

대천사교회(대천사미가엘교회:1505~1508)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당과 수도원 · 궁전 · 관청 · 탑 등이 있다. 


중앙에는 높이 100m의 대종탑(이반대제 종탑)이 서 있는데, 이 종탑이 서 있는 자리는 

모스크바의 정중앙에 해당한다고 하며 적이 칩입하면 종탑에 있는 21개의 종이 일제히 울렸다고 한다. 

대부분의 건물은 15~16세기에 이탈리아 건축가들이 설계하여 지은 것이다.


크렘린 대궁전 ( Большой Кремлёвский дворец, Great Kremlin Palaces )


1층의 창문에 있는 2개의 줄은 17세기 러시아 건물의 특징인 백석장식으로 기둥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궁전 중앙부 위에는 금으로 도금된 난간과 깃대가 장식되어 있다. 

화려함과 아름다움이 같이 공존하고 있으며 지금은 외국 정부 요인들과의 접견이나 회견에 자주 상용되고 있다.


크렘린대 궁전의 외관은 중세 러시아의 건축과 비잔틴양식의 다양한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 크레믈린 궁전의 4층에는 황제가 거주했다고 한다. 

옥좌가 있는 방의 가운데 창은 '탄원의 창'이라고 하는데 창 밖으로 늘어뜨린 긴 천 끝에는 상자가 매달려 있었는데 

이곳은 누구라도 탄원할 일이 있으면 서면으로 그 원하는 바를 직접 황제에게 건의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크렘린궁전 안뜰


게오르그홀 (Georgievsky Hall)


궁전의 1층에는 집무실외에 역대 황제의 대리석, 호화로운 방들이 있고 

2층에는 저 유명한 예식용 ‘게오르기 홀’이 있다. 

이곳에는 19세기의 가구, 샹들리에, 양탄자, 악기, 그림, 조각 등이 다양하게 갖추어져 있어 

파리의 루브르 궁전 못지 않게 화려함을 갖고 있다. 

그 후 193년 개축 때에는 3,000명 수용의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의장이 만들어졌었다.


크렘린궁의 대통령궁                   

             

대통령궁은 1776년부터 1787년까지 마트베이 카자코프에 설립. 

역대 당서기장들의 집무실이기도 했으며 3층은 1918년부터 1922년까지 레닌이 거주했었다.


첼무노이 궁전


1636년에 건설된 첼무노이 궁전은 황제와 여제가 머물던 궁전이다. 

돌로 지은 석조 건물이지만 전통적인 러시아 목조 양식으로 지어졌다. 

황금으로 도금한 방을 비롯하여 화려한 조각이 새겨진 천장 등 궁전 전체가 호화롭게 꾸며져 있다. 


황제의 방 (Throne Room)


주요한 몇 개의 홀에는 러시아 훈장의 이름이 붙어 있는데 에카테리나 훈장의 홀, 블라디미르 훈장의 홀 등이 그것이다. 

그 중 가장 아름다운 홀이 ‘게오르기 홀’이다. 현재 일반인에게는 관람이 허용되지 않고 있다.



황제의 방 (Throne Room)


1934년 개축 때에는 3만 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의장이 만들어졌으며 

현재는 러시아 최고 회의의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 외에 몇 개의 주요한 홀이 만들어졌는데 그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게오르기 훈장의 홀이다.

현재 대 크레믈린 궁전은 국가 원수와의 회견장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내부는 관람할 수 없다고 한다.


황제의 옥좌


화려한 성 안드레프스키 홀 (Andreevsky hall)


성 알렉산드로스 홀 (St. Alexander Hall)

1812년 소실된 후 1838-1849년 사이에 치챠코프, 게라모프, 리히텔, 돈 등의 러시아인 건축가들에 의해 재건되었다. 




































[영상] 크렘린 대궁전 (Great Kremlin Palaces)





삼위일체탑 입구


크렘린(Кремль)은 성체, 성벽이란 뜻으로 모스크바 외에도 크렘린이란 이름은 여러 곳이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크렘린 하면 우리는 바로 모스크바 성채를 떠올린다

러시아 내의 오래된 도시들은 다 크렘린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모스크바의 크렘린이 가장 유명하며, 러시아어 대문자로 시작할 경우 보통 모스크바의 크렘린을 말한다.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서 쌓아 놓은 성벽이었지만 러시아 공산주의 시절 그들은 높은 담 안에서 회의를 하며 

회의 내용이 노출되지 않게 그들의 비밀을  알지 못하게 하는 의미로 

크레믈린이란 사람들에게 음흉하다,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함 등 다른 의미의 단어로 새겨지게 되었다.


삼위일체탑을 지나면 우측에 크레믈린 대회당, 왼쪽에 대통령궁이 있다.


1961년에 완공한 유일한 현대식 건물로 구 소련 때 공산당 전당대회,  중앙위원회 총회장으로 쓰였으나 

지금은 국제 회의장,  볼쇼이 제2극장으로 문화예술 공연을 하고 있다.

유일한 현대식 건물로 크레믈린 대회당은 크렘린 안에서 유일한 현대식 건물인데

이 건물 때문에 크레믈린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크렘린 대회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Кремлёвский Дворец 국가 크렘린 궁전)


후루쇼프 시절인 1961년에 지어진 건물로, 크렘린 경내의 가장 큰 현대식 건축물이다. 

소련공산당 전당대회 등 주요 국가행사에 사용되었다가, 요즘은 주로 콘서트홀로 활용된다. 

다소 비싼 볼쇼이 극장 대신, 가성비 좋은 발레 공연이 많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여행가이드북에는 종종 '크렘린 극장'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공산당 시절 당 간부들이 모여서 회의를 주로 하던 장소인데 그들이 어디서 회의를 하는지,  

어떤 내용을 하는지 항상 비밀이었고 그들의 소재 파악에 대해서도 비밀 사항이었다 한다.

흔히 사람들이 말을 잘 안하고 비밀이 많으면 우리들은 크렘린 같다고 하는 것이 여기서 나온 말이 아닌가 한다.

삼각형 모양의 대리석 기둥이 전면을 장식하고 있는 크레믈린 궁전 내의 유일한 현대식 건물로서, 

1961년에 완공된 높이 29m의 장방형 건물이다.


크레믈린 대회당 정면에 러시아의 상징인 쌍두 독수리 문장이 있다.


콘서트, 발레 등의 공연장으로 사용되며 최근에 머라이어 캐리 등도 공연했다.   

또한 KBS 열린 음악회도 여기서 한번 열린 적이 있다.


쌍두독수리 문장


제정 러시아에서 사용되던 문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말탄 게오르기 승리자가 창을 들고 사악한 용을 찌르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쌍두독수리 모습이다. 

전자는 모스크바의 문장이며 후자는 이반 3세 시절 즉 15세기 말에 비잔틴으로부터 계승받은 문장이다. 

이렇게 두 가지 모습을 한 문장이 17세기부터 러시아를 상징하는 공식문장이 되었는데, 

이때에는 왕관과 홀(笏), 황금구가 추가되었다. 


쌍두독수리 문장


쌍두독수리의 머리 위에 각각 작은 왕관이 있고, 그 두 왕관 위에 하나의 큰 왕관이 설정되었다. 

독수리의 오른쪽 발에는 홀이 쥐어져 있고, 왼쪽 발에는 황금구가 쥐어져 있다. 

홀은 세속 통치자의 권위를 상징하고, 황금구는 전 세계를 그리스도교화 하겠다는 상징으로 

지구 위에 십자가가 놓여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세 개의 왕관은 통합된 러시아의 국가를 상징한다. 

18세기에는 문장에 색깔이 추가되었는데, 쌍두독수리는 검은색으로, 바탕은 노란색으로 처리되었고, 

게오르기는 빨간색 바탕에 청색으로 칠해 졌다.


소비에트 문장


1917년 공산주의 혁명 이후 쌍두독수리 문장은 사라지고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소련)이

공식적으로 출범하면서 1922년 붉은 바탕 위에 낫과 망치가 놓여 있는 소비에트 문장이 등장하게 되었다. 


쌍두독수리 문장 다시 부활

1991년 소연방이 해체되면서 제정러시아 시대에 사용되던 쌍두독수리 문장이 다시 부활하게 되


무기박물관


무기박물관


노란색의 병기고 건물 주위에는 나폴레옹과의 전쟁 때 노획했다는

대포들이 건물 주위에 전시되어 있었고 출입문 좌우에는 경비병이 지키고 있는데 관광객은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관람로를 벗어나면 어디선가 스나이퍼가 쳐다보고 있으니 안내에 따라 달라는 가이드의 농담반 진담반 부탁이 있었습니다.


무기박물관에는 다이아몬드 박물관도 함께 있다세계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도 있다고 한다.


차르 캐논 (Царь-пушка 황제의 대포)


1586년에 제작된 황제의 대포는 유명한 대포 전문가, 안드레이 초크노프의 작품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대포는 당시 황제였던 페오도르 이바노비치(Feodor Iannovich)의 명으로 제작되었다. 


차르 캐논 (Царь-пушка 황제의 대포)


이 거대한 대포는 길이 5.34m, 구경 890mm, 무게 40톤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대포 중 하나로 꼽힌다. 

1586년 안드레이 초호프(Andrey Chokhov)가 만든, 당시 세계 최대의 대포였지만 아직까지 발사된 적은 없다.   

이 대포 앞에 놓여 있는 3개의 대포 알은 지름이 105cm, 무게가 1톤이나 되는 장식용이다.

1960대 이후로 이바노프스카야 광장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대포를 감싸고 있는 정교한 프리즈와 화려한 장식을 살펴보고 말 위에 올라탄 페오도르 황제도 찾아본다. 

대포 옆에는 가짜 포탄과 화려하게 디자인된 운반대도 놓여 있다.


황제의 종 (Царь–колокол)


황제의 대포에서 20m 정도 떨어진 곳에 놓여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종으로 

높이 6.14m, 지름 6.6m, 무게 200톤의 이 종에는 금 72kg, 은 525kg이 들어가 있다.


황제의 종 (Царь–колокол)


1733년~1735년에 이반 모토린과 미하일 모토린 부자가 안나 이바노브나 여제를 위해 만든 황제의 종이다.  

대형 종으로서 화재가 있고 난 후 균열이 가서 조각이 떨어져 나가 있다. 

1735년 2년 간의 작업 끝에  본체의 작업이 완료됐는데  1737년 크렘린 궁 화재 당시,  

누군가 급하게 진화하면서 종 위에 찬물을 붓는 바람에 종의 일부가 균열이 생기면서 깨졌는데,   

떨어져 나간 부분만도 무려 11.5톤 이나 된다고 하니 전체 무게는 상상하기 어렵다.   

이 종은 1836년에 깨진 조각과 함께 미완성인 채로 전시되어 아무도 이 종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황제의 종 (Царь–колокол)


바로크 양식의 종 부조 장식을 살펴보면 안나 여제와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황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외관에 종의 역사가 설명된 문구도 찾아볼 수 있다. 

그 외 예수, 마리아, 천사와 다양한 종교적 인물 등의 유명인도 묘사되어 있다. 

깨진 부분이 있음에도 이 종은 러시아 궁중 역사의 흔적을 사진에 담고자 하는 방문객들을 계속해서 불러 모으고 있다. 

어쩌면 깨진 조각이 더 큰 매력으로 다가오는 건지도 모르겠다.


광장 주변에는 1812년 나폴레옹 군대가 퇴각할 때 버리고 간 프랑스식 대포가 곳곳에 전시되어 있다.


소보르나야 광장 (Соборная плошадь)


크렘린 내에서 가장 넓은 광장. 

러시아 제정시대 공식 행사와 매우 화려한 제전이 열렸던 광장이다.

러시아의 가장 화려했던 역사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우스펜스키 대성당을 비롯해 12사도 교회, 이반 대제의 종루, 아르항겔리스키 성당, 블라고베시첸스키 성당 등을 볼 수 있다.


모스크바 강과 소보르나야 광장 (Соборная плошадь) 겨울 풍경


소보르나야 광장 (Соборная плошадь)



소보르나야 광장 (Соборная плошадь)


소보르나야 광장 (Соборная плошадь)


크렘린 궁


2층 전면에 보이는 방이 푸틴의 집무실이다.

역대 공산당 서기장들의 집무실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3층에는 1918~1921년 레닌부부가 거처하던 곳이다.


크렘린 궁의 역사는 1156년 이 언덕 위에 목조로 된 작은 요새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1840년 모스크바가 수도로 정해지면서 1485년 부터 10년간의 공사끝에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궁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은 길이가 2,235m, 높이 5~9m, 두께 3.5~5m이며, 

성벽 위에는 20개의 크고 작은 망루가 설치되어 있으며, 이 중 가장 높은 트로이츠카야 탑은 높이가 80m나 된다.


크렘린 궁


크렘린 궁은 러시아어로 성채를 뜻하며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의 중심을 흐르는 모스크바 강가에 있는 옛 러시아 제국시절의 궁전이다

2.25km의 성벽과 스무개의 성문을 갖추고 있으며  크레믈린 궁 안에는 많은 역사적인 건축물들과 전시물 들이 있다.

역대 황제가 거주했으며, 현재는 외국 귀빈의 회견장으로 사용하는 ‘크레믈린 궁전’과 레닌이 거주했던 원로원, 대통령집무실, 

성모승천 사원이라 불리는 ‘우스펜스키 사원’, 12사도 사원, 모스크바에서 가장 높은 탑인 ‘이반대제의 종루’, 

높이 6m에 무게 200톤으로 세계 최대의 종인 ‘황제의 종’과 세계에서 가장 큰 ‘황제의 대포’, 궁전 무기고 등이 있다.


크렘린 궁


차르 대포 맞은편에 보이는 건물로 러시아 제국시절에는 상원이었다. 

이름에서 '국회의사당' 즈음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현재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제국 시절의 상원은 오늘날의 국회 상원의 기능을 뛰어넘었던 기관으로, 

입법 · 사법 · 행정을 아우르던 황제 직속의 회의체였다. 현재 대중에게 개방되어있지 않다.


크렘린 궁


12세기 초 처음 토성으로 건립된 것이 시초가 되어 오랫동안 황제의 성이었던 곳이다. 

그 안의 면적은 84,000평으로 우리나라 경복궁 보다 작은 규모이다.   

800년의 역사를 가진 크렘린 궁은 이제 모스크바의 최고 관광명소가 되었는데,  

과거  역대 황제들의 거처로 러시아 정교회의 중심지였고 지금도 대통령이 근무하는 곳이다.


크렘린 궁


사원의 광장에 있는데 이 건물을 언뜻 보면 3층 같아 보이나 실제는 2층 건물이다. 

공산당 시절 당 간부들이 모여서 회의를 주로 하던 장소. 

그들이 어디서 회의를 하는지  어떤 내용을 하는지 항상 비밀이었고 그들의 소재 파악에 대해서도 비밀 사항이었다 한다.


크렘린 상원 뒷편으로 보이는 성벽과 차르 탑.


[영상] 소보르나야 광장


[영상] 소보르나야 광장


[영상] 크렘린/Kremlin/Alexander Garden/Troitskaya/Bell Tower




크렘린 조감도 (Bird's Eye View from the southwest)


모스크바의 크렘린은 남쪽의 모스크바 강, 북동쪽의 붉은 광장, 북서쪽의 알렉산드로프스키공원에 둘러싸여 있으며 

전체적으로 거의 삼각형 형태를 띠고 있다. 

길이 125m, 높이는 47m, 전체 면적은 약 26헥타르(25,000 평방미터) 정도 되며, 붉은 성벽에 둘러싸인 건물 안에는 

각 시대 별로 크고 작은 아홉 개의 궁전과 성당, 탑 등이 자리 잡고 있으며, 700개 이상의 방을 갖추고 있다.


크렘린 안에는 14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건축의 발전 단계를 반영하는 건축물들이 가득하다. 

긴 역사를 통해 황제의 성으로 번영해 온 크렘린에는 러시아의 보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다양한 건축물과 수없이 많은 역사의 유적들이 남아 있다.


크레믈린(Kremlin)은 원래 러시아어로 성채 또는 성벽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다.

하지만 대문자로 시작할 때는 모스크바의 크레믈린 궁전을 의미한다.

오랫동안 러시아 황제의 거처이자 러시아 정교회의 중심지였다.


 크렘린은 모스크바의 창건자 유리 돌고루키공(公)이 1156년 무렵 작은 언덕 위에 숲과 목책으로 요새를 구축하였다 한다. 

그러나 1382년 타타르족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버렸고, 15세기에 이반 3세가 이탈리아의 건축가들을 불러 

러시아 전국을 둘러보고 러시아의 건축 양식으로 짓게 한 것이 바로 오늘날의 크렘린이다.


성곽과 내부 주요 건물들은 백여 년에 걸쳐 복원되었으며, 스무 개의 크고 작은 고딕 양식 탑,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을 대표하는 네 개의 대성당과 성벽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속을 알 수 없거나 비밀이 많은 사람을 크레믈린 같다고 하는데, 정말 요새와도 같은 Secret 궁이다.


1601년 최초의 크렘린 세부 지도


16세기 이반3세 통치 하에 크렘린 (by Apollinary Vasnetsov)


1797년 크렘린에서 Terem 궁전 (by 자코모 콰렝기 Giacomo Quarenghi)


1908년 크렘린궁전 풍경


1917년 크렘린의 도면



크렘린 외벽의 탑들


1. 바라비쯔까야 탑(Боровицкая башня)   

2. 블라고베쉰스까야 탑(Благовещенская башня)

3. 아루줴이나야 탑(Оружейная башня, 무기의 탑)  

4. 까멘단트스까야 탑(Комендантская башня, 감독의 탑)

5. 뜨로이쯔까야 탑(Троицкая башня)   


6. 아르세날이나야 탑(Арсенальная башня, 무기고의 탑)

7. 시나뜨스까야 탑(Сенатская башня, 의회의 탑)  

8. 니꼴스까야 탑(Никольская башня)

9. 우글로바야 아르세날이나야 탑(Угловая Арсенальная башня) 

10. 스빠스까야 탑(Спасская башня, 구원의 탑)


11. 짜르스까야 탑(Царская башня, 황제의 탑)  

12. 나바뜨나야 탑(Набатная башня, 경계탑) 

13. 꼰스딴찌노-엘레닌스까야 탑(Константино-Еленинская башня)

14. 베끌리미쉡스까야 탑(Беклемишевская башня)  

15. 삐뜨롭스까야 탑(Петровская башня)


16. 2번째 무명탑(Вторая Безымянная башня)  

17. 첫번째 무명탑(Первая Безымянная башня, 1670~80년)

18. 따이나야 탑(Тайницкая башня, 비밀의 탑) 

19. 바다브즈보드나야 탑(Водовзводная башня, 1488년)



끄레믈(Кремль, 크레믈린, 크렘린)은 '성벽'이라는 의미의 러시아어이자 러시아의 심장부를 뜻하는 고유명사화 된 명칭이다. 

러시아인에게 있어서 끄레믈은 러시아의 심장부이자 역사를 대표하는 곳이나 다름 없다. 

지금 남아 있는 ‘끄레믈’은 1812년 나폴레옹 점거 때 소실된 이후 재건축 한 것이다.

여러 궁전, 사원, 최고회의 건물, 병기고, 무기고, 대포의 황제, 종의 황제 등 다양한 볼거리들이 있다. 









크렘린과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의 꽃들을 본다.  

오른쪽에 솟은 크렘린 성벽 탑은 트로이츠카야 타워



계속 이어져 있는 아름다운 정원을 지나야 크렘린 궁으로 들어갈 수 있다.


첨탑 꼭대기 커다란 루비색 붉은 별이 올려져 있는 트로이츠카야(삼위일체)탑 아래에 입구가 있다.


5~19m 높이로 모두 2235m에 걸쳐 뻗어 있고 폭도 3.5~6.5m에 이른다.  

성채 또는 성벽을 가리키는 러시아어 '크렘린'이 모스크바 왕궁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된 것도 무리가 아닐 만큼 

위세당당 하고 아름다운 성이다.


트로이츠카야탑  (삼위일체탑, Troitskaya Троицкая башня)


트로이츠카야탑 - 삼위일체탑은  공중에서 보면 삼각형의 모양으로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1495-1499년 사이 만들어진 탑문이다.

이 문은 나폴레옹 황제와 러시아 군이 전투를 했을때 나폴레옹이 패전을 하고 나간 곳으로 

16-17세기에는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

지름 3.75m와 1500kg의 금도금으로 만들어진 별은 겨울 눈보라에도 이겨낼 수있도록 단단하게 만들어졌다.


크레믈린 궁 출입구 광장에서 본 쿠타피아탑과 트로이츠카야 (삼위일체)탑


크렘린은 보통 북쪽에 있는 쿠타피아(Kutafya) 문을 통해 들어간다.

크렘린은 모스크바의 구도심이다. 

11세기 이곳 모스크바 강 유역에 슬라빈스키라는 이름의 마을이 형성되었고, 

1147년 사서에 현재의 크렘린 지역에 대한 기록이 처음 나온다. 

1156년에는 모스크바 강물을 끌어 들여 해자를 만들고 그 주변에 토성을 쌓는 등 도시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크래물린 궁으로 들어가려면 통과해야 할 쿠타피아 문으로  요새형 탑문이다.

쿠타파탑 아래 둥근 대문 밑의 검색대를 통과해서 크렘린궁으로 들어가기 위해 줄이 길게 서 있다.

1516년 이탈리아의 건축가 안리오시오 카르카노라는 건축가에 의해 지어진 건물이다.


검색대가 있는 쿠타파탑의 측면 모습


검색대 통과 절차를 거쳐 이곳에서 가장 높은 탑 트로이츠카야탑을 통과해야 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입구를 통과하면 러시아에서 가장 높은 망루인 삼위일체 망루를 지나 크레믈린 궁으로 들어갈 수 있다.


크렘린 입구 쿠타피아 타워 (Kutafya Tower)


크레물린 궁으로 들어가려면 통과해야 할 쿠타피아 문으로 크렘린의 다리를 방어하기 위해 지어진 탑문이다.

1516년 이탈리아의 건축가 안리오시오 카르카노(Aliosio de Carcano)에 의해 지어진 건물이다

높이 13.5m 약간 웅크린듯한 모습으로 현재 남아 있는 크렘린 다리의 교두보 역할을 하는 유일한 탑이다. 

적의 침입이 있을 때 탑문은 굳게 닫히며 막강한 공격을 보인다.


크렘린 쿠타피아타워 입구



성벽의 북쪽문인 트로이츠카야탑  [삼위일체탑, Troitskaya Троицкая башня]


1495~1499년에 건립된 트로이츠카야탑은 황제와 군대가 싸움을 끝내고 귀환하던 입구로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공격해 크렘린에 입성하여 대화재로 퇴각할 때 나가던 문이다.  

‘뜨로이쯔끼 모스트’ 라고 불리는 다리는 크렘린으로 입장할 때와 나갈 때 건너게 되는 출입구라고 할 수 있다.


크레믈린으로 입장하는 아치문으로 삼위일체탑이라고도 불리는데

크레믈린 궁전에서 내려다 볼 때 삼각형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이곳은 관광객이 드나드는 통로로 사용되고 있지만, 짜르시대에는 전쟁에서 돌아온 군대가 입성하였고,

또한 이 문으로 러시아를 침공한 나폴레옹의 군대도 입성하였다.


트로이츠카야탑과 쿠타피아 타워 모형


표를 내고 출입구를 들어가면 크레믈린 성벽에 만들어진 20개의 문 중 북쪽문인 

트로이츠카야(삼위일체,Trinity)탑을 만나게 된다. 

이 탑 앞으로 큰 길이 나 있으며, 길 오른쪽이 크레믈린 궁과 성당, 사원 지역이고 

왼쪽이 무기고 (현재: 무기 박물관)와 대통령궁 지역이다. 


왼쪽 대통령 궁에는 푸틴 대통령이 집무하고 있어 접근할 수 없으며, 

오른쪽 성당과 사원 지역만 둘러볼 수 있다.


크렘린 서쪽 성벽 중앙에 선 트로이츠카야 타워는 스무 개 성벽 탑 가운데 가장 높아 80m에 이른다. 

15세기 말 이탈리아에서 초빙해 온 건축가 알로이시오 다 밀라노가 설계했다.   

여러 차례 이름을 바꿔 오다가 1658년 크렘린 안에 있는 성삼위 수도원 이름을 따 트로이츠키야(트리니티)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첨탑 위에 소비에트의 상징인 왕별 '루비 스타'가 올라서 있다. 

17세기에는 이 탑의 지하실이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탑 아래 난 문은 방문자, 관광객들이 입장권을 사고 해자 다리를 건너 

크렘린으로 들어가는 출입구 구실을 하고 있다.  

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 검색대를 통과해서 크렘린으로 드는 육교에 이르면

아치로 되어 문의 양쪽으로는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병사가 서 있다.


트로이츠카야(삼위일체)탑 출입구


탑의 높이는 80m로 크레믈린을 둘러싸고 있는 2235m의 성벽 사이사이에 있는 20여 개의 탑 중에서 가장 높다.

삼위일체탑은 공중에서 보면  삼각형의 모양으로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1495-1499년 사이 만들어진 탑문이다. 

이 문은 나폴레옹 황제와 러시아 군이 전투를 했을 때 나폴레옹이 패전을 하고 나간 문으로

 6-17세기에는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지름 3.75미터와 1500kg의 금도금으로 만들어진 별은 겨울 눈보라에도 이겨낼 수 있도록 단단하게 만들어졌다.

현재 이곳은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통로로 사용되고 있다.


모스크바의 대형 건물의 가장 높은 곳에는 별로 장식되어 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붉은 에메랄드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별의 크기는 지름 3.75m, 무게가 1톤으로 루비색에 멀리서도 잘 보이도록 금 도금을 해 놓았다.


공산주의의 또 다른 상징처럼 떠오르는 별,  민중을 이끄는 빛나는 별이  되고 싶다는 뜻인지 붉은 에메랄드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1495년부터 만들기 시작해 1499년에 완공했다니 제법 오래된 유적과도 같은 타워이다.

이 타워는 반대편이 동쪽의 붉은 광장으로 드나드는 스파카냐 바쉬냐(Spasskaya Bashnya)와 쌍벽을 이룬다.


[영상] 크렘린궁전 입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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