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ishna, 1946. by Nikolai Roerich.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7

니콜라이 레리흐(Nikolai Konstantinovich Rerikh 1874-1947)는 러시아어 화가, 작가, 고고학자, 
신지학, 철학자, 그리고 그의 젊은 시절에 러시아 사회의 영적 운동에 영향을 받은 공인이다. 
그는 최면 및 기타 영적 관습에 관심이 있었고 그의 그림은 최면 표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19세기 말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자란 레리흐는 1893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 대학과 제국예술아카데미에 동시에 등록했다. 
그는 1897년에 "예술가"라는 칭호를 받고 다음 해에는 법학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06년부터 1917년까지 학교를 이끌었던 제국예술장려협회에 일찍 취업했다. 
그룹과의 초기 긴장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 예술의 세계 "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예술적으로 레리흐는 고고학에 대한 평생의 관심과 양립할 수 있는 주제인 러시아 고대의 
가장 재능 있는 화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또한 무대 디자이너로 성공하여 큰 명성을 얻었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디자인은 보로딘의 이고르왕자 (1909 년 이후 제작), 
의상과 세트로 이고르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한 봄의 의식을 위한 것이다.

색채와 선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선율, 러시아 화가 니콜라이 레리흐 (1874-1947)의 히말라야다 .
인간이 쉽게 정복할수 없는 히말라야의 신비가 그의 다채로운 색채에 의해 재탄생된다.
접해 보지 못한 히말라야지만 그림의 색채 만큼이나 다양하리라.
그런 레리흐의 빛깔과 과감히 사랑에 빠진다.

 

Guga Chohan, 1931. 구가 초안. by Nikolai Roerich. 
Tempera on cardboard, 73.5 x 117 cm. Tretyakov Gallery Room 47

구가 초안은 고대 인도왕자로 레리흐가 어릴 적 살던 클루가에 이 동상이 서 있었다 한다. 
그때 보았던 고향 마을의 봄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역사화가 레리흐는 러시아 역사의 근원을 다루면서, 고고학적 연구와 
역사적 고증에 기반하여 키예프 루시에 대한 새로운 회화적 시각을 창출해 내었다. 
레리흐 가문 자체의 발원이 류리크와 바랴그족과 관련된다는 믿음은 
화가 레리흐로 하여금 키예프 루시의 발원을 다루는 역사화를 구상하도록 이끌었다. 
바랴그의 러시아 도래를 다룬 그의 역사화는 고고학적․역사적 고증에 기반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유년 및 청년시절의 영지 이즈바라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이즈바라 영지 근처의 옛 고분들을 발굴하고 탐구하면서 느꼈던 
머나먼 과거가 지닌 조화와 아름다움의 감정, 고고학적 자료 등을 
화가 레리흐는 자신의 역사화 화폭에 그대로 담아내었다. 
또한 이즈바라의 어원처럼 신의 지혜를 찾아 순례하는 구도자의 길을 평생 걸으며, 
역사의 근원과 세계문명의 원천들을 탐구해 얻어낸 지혜들을 인류에게 알리는 
‘전령’으로서의 소명도 이 영지의 삶에서 영향 받았다. 
슬라브 문화의 원천에 대한 사유가 결국 다양한 문화와 
문명권의 근원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으며, 평생을 역사의 전령, 
인류 정신의 전령으로서 자신의 존재론적 사명을 예술적 방법으로 풀어내었다.

러시아 역사의 근원인 키예프 루시를 다루는 역사화를 창출하면서, 
화가 레리흐는 기존의 다른 화가들이 키예프 루시를 다루는 방식인 
영웅적인 인물과 극적인 사건 중심의 접근법, 서사성과 세밀한 장면 묘사 등에서 탈피하여, 
익명화된 인물과 시대 전체의 색채와 사건의 전반적 분위기를 전달하고자 하였다. 

그는 최소화한 디테일, 선명한 선과 리듬, 보편적이고 장식적인 형태, 대담하고 화려한 색채, 
장식적 스타일, 색채를 통한 상징 등을 통해 망각되거나 저평가된 
먼 중세인 키예프 루시의 역사를 자신만의 모던한 화법으로 신선하고 활기차게 부활시켰다. 
역사의 근원과 정신의 본질에 대한 평생의 추구를 멈추지 않았던 화가 레리흐는 
자신의 모던한 역사화를 통해 러시아의 중세 역사를 소환하고, 
다가올 미래의 역사를 예감하였으며, 러시아 국가의 기초와 방향성에 대해 통찰한 역사의 '전령'이었다.

 

Guests from Overseas, depicting a Viking raid. 1901. 바이킹 습격을 묘사한 해외에서 온 손님
by Nicholas Roerich, oil on canvas. 85 x 112.5 cm. Tretyakov Gallery Room 47

새로운 문명의 유입,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대한 레리흐만의 독특한 표현이 돋보이는 그림이다. 
장식적이고 패턴적인 아르누보의 효과가 강렬한 색채와 함께 빛을 발한다. 
러시아 최초의 철권 통치자 바이킹(바랑기아)의 선장 류리크가 러시아로 들어와 통치한다는 
러시아 역사를 바탕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Shadow of the Teacher. Tibet. by Nikolai Roerich.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7

20세기 초, 니콜라이 레리흐는 인도 철학을 직접 배우게 되었다. 
인도의 형이상학적 교리, 우주적 및 역사적 주기에 대한 그들의 관점은 레리흐를 사로 잡았다. 
티베트와 티베트 기적의 일꾼들은 그에게 특히 매력적이었다. 
1911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최초의 불교 사원이 건립되었을 때
니콜라스 레리흐의 동방에 대한 관심이 너무 확실했던 그는 건축 지원위원회에 참여했고 
인도는 레리흐의 그림과 에세이에 점점 더 많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Roerich는 인생의 대부분을 Petersburg에서 보냈다. 
여기에서 그는 예술 아카데미와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예술가, 고고학자, 시인, 교사가 되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그는 멋진 그림을 만들어 명성을 얻었다. 
여기서 그는 예술가, 시인, 과학자와 같은 러시아 문화의 많은 뛰어난 인물과 교류했다. 

 

Chenrezig. 1931. by Nicholas Roerich. Tempera on canvas. 74 × 107 cm. Tretyakov Gallery Room 47

 

St. Panteleimon the Healer, 1916. by Nicholas Roerich. Tretyakov Gallery Room 47

 

Messenger. Clan revolted against to clan. 1897, by Nicholas Roerich. Tretyakov Gallery Room 47

 

Solveig`s Song, Set design for the theatre production of "Peer Gynt" titled 'Solveig' Song' 1912.
오페라 'Solveig'Song '의 "Peer Gynt" 극장 제작을 위한 세트 디자인. by Nicholas Roerich. 
tempera on paper mounted on canvas. 64.7 x 85.7 cm. Tretyakov Gallery Room 47

 

Ashram (Ceylon), 1931. by Nicholas Roerich. 
canvas, tempera. 117.5 x 74.5 cm. Tretyakov Gallery Room 47

 

Rostov the Great, 1903. by Nicholas Roerich. Tretyakov Gallery Room 47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47 니콜라이 레리흐(Nicholas Roerich) 작품 전시실

 

[영상] Nicholas Roerich: A collection of 261 works (HD)

 

Moscow landscape. Rainbow. 모스크바 풍경화 무지개. by Nikolai Krymov
oil on canvas. 59 x 60 cm. Tretyakov Gallery Room 48

니콜라이 크르이모프(Nikolay Petrovich Krymov 1884~1958)의 작품은 
아이의 시선으로 그려진 그림처럼 단순하고 동심에 가득 차 있다. 
소묘는 단순하고 밝은 색채가 평면적으로 펼쳐져 있으며 
인물이나 동물은 아이들의 장난감처럼 표현되어 있다. 
크르이모프의 이런 작품은 밝은 유머와 맑은 감각으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한다. 
특히 이 그림은 산업화 이후 도시화된 모스크바의 모습이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일반적인 풍경화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도시 주택과 여러가지 색깔의 지붕이며, 
작가의 상상속에 모든 도시의 소재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Windy day : Bull, 1908. 바람 부는 날. by Nikolay Krym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8

이 작품을 볼 때 불안감과 설렘이 느껴지고, 참을 수 없는 힘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무섭고, 
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하늘은 구름으로 덮여 있고 바람은 땅에서 먼지 구름을 일으킨다.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바람이 곧 밀어 닥칠 것이다.
태풍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가축을 마구간에 몰아 넣는 목자가 보인다. 
문에서 그의 조수는 마치 동물들에게 서두르라고 재촉하듯 팔을 흔든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다가오는 태풍으로 동물뿐만 아니라 사람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흰 암소는 천천히, 은밀하게 올바른 위치로 이동하고, 
작품에 검은 색으로 그려진 황소는 두려움에 반항하기 시작한다. 
그의 꼬리는 쏠리고 뿔은 두려움으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으며 땅에 몸을 숙였다. 
천둥과 번개가 치고, 두려움에서 황소가 태풍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다. 
태풍은 황소와 비교할 수 있으며 기질과 반항적인 성격이 닮았다.

 

Landscapes. Cloud, 1910. by Nikolai Krym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8

니콜라이 크르이모프(Nikolay Petrovich Krymov 1884~1958)는 러시아 화가이자 예술 이론가였다.
그는 예술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크르이모프는 모스크바 회화, 조각 및 건축학교 에서 공부했으며
세로프(Valentin Serov) 및 코로빈(Konstantin Korovin) 스튜디오에서 공부했다 .
그는 1910년부터 1923년까지 Union의 회원이었고 

1923년부터 1931년까지 모스크바 예술가협회 회원이었다. 

그는 주로 지방 도시와 마을 풍경을 그렸으며, 특히 시골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원시 민속의 영향을 받았지만 나중에는 더 고전적인 접근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처음에 그는 인상이 아닌 감정을 묘사하면서 주로 기억으로 그렸다. 
1920년대부터 크르이모프는 plenair 작업을 시작했고 

유명한 무대 세트를 디자인하면서 극장에서 일했다.

1949년 크르이모프는 소련 예술아카데미 준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42년 그는 러시아 연방 명예예술노동자계급, 그리고 
1954년 노동레드배너 훈장, 1956년 러시아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
크르이모프는 1958년 5월 6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

 

A New Pothouse, by Nikolay Krym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8

 

Yellow Shed. by Nikolay Krym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8

 

Sunny day, 1906. TG. by Nikolay Krym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8

 

[영상] Nikolai Petrovich Krymov 작품 모음

 

Self-portrait. 1909. by Martiros Saryan. paper, gouache. Tretyakov Gallery

마르티로스 사리안 (Martiros Sergeevich Sariyan 1880~1972)은

아르메니아의 현대 미술가이자 현대 아르메니아 국립 회화학교의 설립자였다.
사리안은 돈 강변의 로스로프에서 아르메니아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1895년 15세의 나이로 Nakhichevan 학교를 수료했고 
1897년부터 1904년까지 모스크바 예술학교에서 

Valentin Serov 와 Konstantin Korovin 등과 함꼐 공부했다. 

1910년부터 1913년까지 사리안은 터키, 이집트, 이란을 광범위하게 여행하고, 
이탈리아, 프랑스에 유학했다. 
고갱과 마티스의 영향을 받아 생명력이 넘치는 색채 감각과 자유로운 터치에 의한 
풍경화, 초상화에 뛰어나고, 침체기의 소련 화단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A Date Palm. Egypt, 1911. by Martiros Saryan. 
Tempera. 106 × 71 cm. Tretyakov Gallery Room 48

1915년 사리안은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 대량 학살에서 탈출한 

난민들을 돕기 위해에 흐미아진으로 갔다. 
1916년에 그는 Tiflis (현재 Tbilisi )로 여행하고 루식 어가얀(Lusik Agayan)과 결혼했다. 
1917년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후 그는 가족과 함께 러시아에서 살았다. 
1921년에 그들은 아르메니아로 이사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아르메니아 풍경을 반영했지만, 
한편 아르메니아 SSR의 문장을 디자인하고 최초의 아르메니아 국립극장의 커튼을 디자인했다.
1926년부터 1928년까지 그는 파리에서 살면서 일했지만, 
이 시기의 작품 대부분은 그가 소련으로 돌아오는 배의 화재로 소실되었다. 

1928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사리안은 소련 아르메니아에 살았다.
사리안은 이집트, 터키를 여행하고 자신의 고향 아르메니아에 살면서 여러 작품을 남긴다. 
중동의 아름다운 자연, 작열하는 태양, 낙타와 나귀를 탄 사람들, 과일 꽃 등을 많이 그린다. 
또한 동방의 원시적인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해 오렌지 색, 청색, 녹색, 황색을 조화롭게 배치하고 
색채가 만들어내는 강렬한 이미지를 통해 성취한다. 
사리안은 색채, 구조 소묘를 극단적으로 단순하게 표현하지만 높은 예술성에 근거한 신선한 감각이 있다.

 

The outside. Noon. Constantinople, 1910. 정오 콘스탄티노플의 거리. 
by Martiros Sariyan. oil on canvas. 66 x 39 cm. Tretyakov Gallery Room 48

1930년대의 어려운 시기에 그는 주로 초상화뿐만 아니라 풍경화에 전념했다. 
그는 또한 소련 최고 소비에트의 대리로 선출되었고 레닌 훈장을 3회 수상하고 다른 상과 메달도 받았다 . 
그는 소련 미술 아카데미 (1974)와 아르메니아 과학 아카데미 (1956) 의 회원이 되었다.

사리안은 1972년 5월 5일 예레반에서 사망했다. 
예레반에 있는 그의 이전 집은 현재 수백 개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이 되었다. 
그의 아들 Ghazaros (Lazarus) Saryan 은 작곡가이자 교육자가 되었고
그의 증손녀 Mariam Petrosyan은 화가, 만화가이자 수상 경력에 빛나는 소설가이기도 하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아르메니아'(1923, 예레반 아르메니아 화랑), '남국의 겨울', 
'자화상'(모스크바, 트레차코프 미술관) 등이 있다.

 

The outside. Constantinople, 1910. by Martiros Sariya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8

 

Wistarias 1910. by Martiros Sariya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8

 

Green jug and bouquet. Still life. 1910. 녹색 용기와 꽃다발. 정물.
by Martiros Sariya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8

 

Grapes. Still life, 1911. by Martiros Sariya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8

 

[영상] Martiros Sarian 작품 모음

 

Indian summer. 1916. 인도 여름. by Sergey Sudeikin. 
Oil on carton. 51×76 cm. Tretyakov Gallery Room 48

세르게이 수데이킨 (Sergey Yurievich Sudeikin 1882-1946)은 발레루스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관련된 러시아 예술가이자 세트디자이너였다.

 

Flowers and a Statuette. by Sergey Sudeik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8

 

Flowers in a Vase. by Sergei Sudeik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8

 

[영상] Sergey Yurievich Sudeikin 작품 모음

 

Salome. ‘살로메’. by Leon Nikolaevich Bakst. Tretyakov Gallery Room 48

레온 박스트(Leon Nikolaevich Bakst 1866-1924)는 러시아의 화가, 무대 미술가, 의상 디자이너이다.
레온은 현재의 벨라루스 흐로드나 지방인 로젠베르크에서 중산층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학교에서 비정규 학생으로 공부하면서, 
시간제로 책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였다.

1889년 그의 첫 번째 전시회에서 그는 어머니의 할머니의 이름인 Baxter를 기초로 
Bakst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890년대 초기에 박스트는 수채화가 조합과 함께 작품을 전시하였다. 
그는 1893 - 1897년 동안 파리에 살면서, Académie Julian에서 공부하였으며, 
자주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하였다. 
1890년대 중반 이후, 그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와 알렉산드르 브누아가 구축한 
작가와 화가들의 집단의 구성원중 하나가 되었다. 이는 Mir Iskusstva 미술 운동이 되었다.

1899년 박스트는 디아길레프와 함께 영향력있는 정기 간행물인 
《미술 세계》를 공동으로 설립하였다. 
그의 그 잡지를 위한 그래픽 디자인은 박스트의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1900년대 10년 동안 박스트는 대부분 무대 디자이너로 활동하였다. 
박스트는 그리스 비극을 위한 무대를 디자인했고, 1908년에 디아길레프와 
발레루스를 위한 무대 화가로 이름을 얻었다. 
《클레오파트라》(1909년), 《세헤라자데》(1901년), 《사육제》(1910년), 
《나르시스》(1911년), 《다프네와 클로에》(1912년) 등이 있다. 
유태인은 영구적으로 러시아에서 유태인 거주지 바깥에서는 살 권리가 없었기 때문에 
박스트는 이때 유럽에서 살았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있는 동안 박스트는 Zvantseva's school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마르크 샤갈도 그의 제자 중 한 명이다. 
박스트는 샤갈에게 파리에 가지 말 것을 충고하였다. 
박스트에 따르면 파리로의 이주는 샤갈의 예술과 재정적으로도 위험하기에 
아마도 그가 굶어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1914년 박스트는 황실 미술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박스트는 1918년 디아길레프와 발레루스의 관계를 끝냈다. 
그는 1924년 파리에서 폐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48 작품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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