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M 38-48> 20세기 초반 회화. 다양성의 시대 - 예술 세계파의 시대.

 

​20세기 초반 러시아 미술은 다양성의 시대라 정의 할 수 있다. 
비판적 리얼리즘이 주를 이루던 이동파의 시기를 벗어나 여러 가지 유형의 미술이 

한꺼번에 나타나 서로 각축하고 시도되던 그런 시기이며 특히 무대미술이 눈에 띄게 발전 한다. 
역사적으로는 니콜라이 2세의 통치기이며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 제1차 세계대전, 
거기다 날씨까지 흉흉하여 계속되는 흉작에 나라는 메마를 대로 메말라 있을 때였다. 
모두가 어두운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헤쳐 나갈 방법을 찾지 못하고 
예술 또한 음울한 '퇴폐적 낭만주의'에 빠져드는 시기이다.  
20세기 초반 러시아 예술가들은 '예술은 예술을 위해서 존재한다'라는 신념아래 
다양한 화파를 만들고 여러 작품들을 쏟아낸다.

 

Wedding Train in the 17th century Moscow. 1901, 17세기의 러시아 결혼 행렬 모습. 
by Andrei Petrovich Ryabushkin. oil on canvas. 90 x 206.5 cm. Tretyakov Gallery Room 38

17세기 모스크바의 모습에 흥미를 가진 역사화가.
안드레이 리아부쉬킨(Andrei Petrovich Ryabushkin, 1861-1904)은 러시아 중세사, 수리코프의 역사화, 
영웅서사시, 고대 건축물, 민요, 민속 공예 등을 연구하며 17세기의 시대상을 그림을 통해 재현하고자 한다. 
이 그림 또한 과거 결혼식 행렬을 재현한 것으로 시기는 눈이 막 녹기 시작하는 봄에 
결혼식 행렬이 무리지어 목적지로 이동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그러나 한 젊은 여자는 약간은 슬픈 듯한 표정으로 행렬을 빠져나와 다른 길로 향한다. 
그녀는 누구일까에 대한 정확한 답은 없지만 결혼 행렬과 어울려 많은 것을 상상케 한다.

안드레이 리아부쉬킨은 17세기의 러시아 평민들의 삶을 주로 그린 화가다.  
아버지와 형이 이콘화가여서 어려서부터 그들을 도왔다.  
14세에 고아가 되었는데, 그 마을을 방문했던 모스크바 미술 조각 건축학교 학생이 
그의 그림을 보고 감탄하여 모스크바 학교에 입학하도록 도왔다.  
14세의 그는 가장 어린 학생중의 하나였는데, 7년간 학교에 머물렀다.  
바실리 페로프의 지도를 받았다. 

1882년, 바실리 페로프 사후, 리아부쉬킨은 셍페테르부르그 황립미술학교로 옮겼다.  
그러나 그는 학교에 흥미를 읽고 길에서 스케치를 하는 등 성적불량으로 졸업을 못하게 되는데, 
그의 훌륭한 작품을 보고 학교의 교장인 대공이 사비로 그의 유학비를 대 준다.  
그는 유럽으로 가는 대신 노브고로드, 키에프, 모스크바 등 고도를 여행하며  
그곳 주민들을 모델로 그리고, 고건축, 무기, 민속품, 자수, 벽걸이 등을 연구하고 민요를 수집했다.

리아부쉬킨은 이동파와 1890-1894년까지만 전시하고 곧 결별했다. 
그는 17세기의 그림에 전념했고, 성당 벽화도 그렸는데, 19세기 말에는 당시 러시아 농민들의 
삶에 관심을 가져 "차 마시기"와 "처녀들의 댄스에 끼어든 청년"같은 그림이 탄생했다. 

리아부쉬킨의 역사에 관한 깊은 지식은 그의 그림의 신뢰도를 높였지만, 
당대의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높이 사지 않았다.  
극적인 역사적 일화를 주제로 그린 바실리 수리코프와는 달리 리아부쉬킨은 17세기의 
일상을 그렸기에 감동이 적었고, 또한 민주사상이 선호하는 계층간의 마찰도 결여되어 있었다.  
그런가하면, 러시아 부유층이 선호하는 미적 요소도 결여되었다.  
그 결과, 리아부쉬킨의 그림은 양쪽 어느 세력에도 소속되지 않은채 인정받지 못했다.
1903년 리아부쉬킨은 결핵 진단을 받아 스위스에서 요양했으나, 다음해 43세로 사망했다.

 

[영상] 안드레이 리아부쉬킨(Andrei Ryabushkin) Paintings!

 

March snow, 1904. 3월의 눈. by Igor Emmanuilovich Graba. 
oil on canvas. 62 x 80 cm. Tretyakov Gallery Room 38

러시아 색채 예술의 대가 이고르 그라바리 (Igor Emmanuilovich Grabar 1871~1960)가 그린 
<3월의 눈>에는 여전히 추운 겨울이 남겨져 있다. 
하지만 물동이를 이고 가는 여인의 모습에서 추운 겨울의 움추림은 없다. 
겨우내 꽁꽁 얼어 있었을 길이 봄 바람에 녹아 촉촉해 보인다. 
또, 길게 늘어진 나무 그림자를 보며 겨울보다 해가 긴 봄이 왔음을 느낄 수 있다. 
봄 느낌을 여러 소재를 통해 보여주는 작가의 센스는 정말 탁월하며 
눈의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촘촘히 찍은 듯한 터치와 눈밭에 비친 빛의 표현은 천재적이다.

 

이고르 그라바리는 러시아의 화가, 출판가, 미술사가이자 회화복원가로서
"점묘파와 비슷한 테크닉의 독특한 분할화법으로 특히 설경으로 유명한 후기인상파 화가"이다.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셍페테르부르그에서는레핀, 
뮌헨에서는 안톤 아즈베의 지도를 받았고 건축학도 공부했다.  
그라바르의 화가로서의 전성기는 1903-7년이고 20년대 후반에 미술비평가가 되었다. 
 
1910-15년에 그라바르는 최고 걸작인 "러시아 미술사"를 편집 출간했다.  
특히 그라바르 자신이 건축에 관해 썼는데 이는 누구도 따르지 못할 우수한 수준의 글이었다.  
1913년 그는 트레치코프 갤러리의 대표로 임명되어 13년간 야심찬 개혁을 했다.  
1913년 현대미술로 소장품을 확장하고 첫번째 도록을 만들었다.  
1921년에는 모스크바 국립대학의 최초의 미술복원학 교수가 되었다.

그라바르는 경력있는 정치인으로 말년까지 소비에트 예술계의 최고 자리에 있었다.  
그가 관리했던  미술복원소는 현재의 그라바르 인스티튜트이다.  
또한 그는 볼셰비키혁명 때 국유화했던 교회의 미술품을 재분배하여 새 뮤지엄을 여럿 세웠다.  
1943년에는 독일에서 세계2차대전 때 강탈했던 미술품의 보상에 관한 소비에트 독트린을 마련했다. 
전쟁후 그는 직접 스탈린에게 건축유적을 보존할 것을 조언했다고.

 

September Snow 1903. 9월의 눈.  1903. by Igor Emmanuilovich Graba.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8

 

[영상] 이고르 그라바리(Igor Grabar) A collection of 112 works (HD)

 

Whirlwind, 1906. 회오리 바람. by Philip Andreevich Maliavin. 
oil on canvas. 223 x 410 cm. Tretyakov Gallery Room 38

이 그림이 그려진 1906년의 러시아는 황실정치의 피폐에 몸서리치고
현실적 개혁과 새로운 시대를 요구할 때였다. 
필립 말랴빈 (Philip Andreevich Maliavin 1869~1940)은 그 개혁의 주체로 그림 속 여인들, 
붉은 색 러시아의 전통의상을 입고 강력한 생명력으로 움직이는 러시아 민중을 제시한다. 
말랴빈은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이동파의 대표 작가이면서도 
당시를 풍미하던 모더니즘적인 기법과 인상주의 기법을 모두 수용한 작가다. 
그러면서 러시아 혁명의 중심에 위치하며 혁명의 주체인 
농민을 가장 잘 표현한 작가이기도 하다. 


말랴빈의 <회오리 바람>의 붉은 색과 푸른 색은 러시아의 전통 문양을 이루는 기본 색채로, 
<회오리 바람은>은 러시아다운 색채의 폭풍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러시아 전통 공예품이나 의상 등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러시아 전통 색채는 말랴빈의 그림처럼 붉은 색과 푸른 색이 주를 이룬다. 

넓게 퍼져 둥그렇게 펄럭이는 치마와 머리에 둘러 쓴 숄, 
흥겨운 손동작의 율동감으로 작품 전체가 정열로 가득 차 있다. 
황토 빛으로 햇볕에 그을린 춤추는 농촌 아낙네들의 
상기된 얼굴들 역시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다. 
굵직굵직한 강한 붓의 터치가 현란하다. 
널름대는 화염 같기도 하고 만개한 꽃 같기도 하다. 
이미 탄력이 붙은 춤사위에 몸을 그대로 맡겨버린 농부(農婦)들에게서 
강한 생명력과 삶의 환희가 느껴진다. 
그렇게 보면 이 그림에서 성장하고 있는 민중 봉기의 전조를 느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편 붉은 색으로 상징되는 러시아 영혼의 힘을 느낄 수도 있다.

까잔의 한 마을, 형제 많은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던 말랴빈은 
16세 때 그리스의 한 정교회 수도원으로 보내져 성상화를 6년간 수학하였는데 
거기서 만난 유명한 조각가 V. A. 베클레미세프의 추천으로 
1892년 뻬쩨르부르크의 예술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 일리야 레핀을 만나 그의 후계자들 중의 하나로 명성을 얻기 시작, 
<웃음>(1899)이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고대 성상화가들 이후 말랴빈의 그림에서 최초로 
‘붉은 색’이 완전하게 표현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작품의 붉은 색도 이콘에서 많은 부분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말랴빈은 1922년 전시회 개최를 위해 외국으로 떠났다가 프랑스에 정착하게 되고 
1930년대에는 유럽 여러 도시들에서 전시회를 개최 하여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제 2차 세계 대전 때 브류셀에 머물렀는데 독일군에게 
스파이로 몰렸다가 풀려났지만 70세 고령으로 그의 집이 있던 
니스까지 걸어 도착한 후 건강 악화로 곧 사망하게 된다.

 

[영상] 필립 말리아빈(Philip Andreevich Maliavin) A collection of 97 works (HD)

 

Russia, 지금 러시아에서는. 1914. by Mikhail Vasilyevich Nesterov. 
oil on canvas. 206.4 X 483.5 cm. Tretyakov Gallery Room 39

참담한 현실을 벗어나 개혁과 변혁을 꿈꾸는 한 무리의 지식인들이 한 곳에 모여 밝은 미래를 기원한다. 
하지만 현재 그들이 보고 있는 그 곳은 그림 속 미치광이가 만들어 놓은 거짓 현실이고 
진정한 미래를 위해 현실을 직시하고 바로 캐어나 움직일 것을 일깨우는 그림이다. 
네스테로프는 러시아의 자연과 종교적 염원을 함께 표현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주제를 담아낸다. 
그의 손에 태어나는 하늘, 나무, 강, 풀 등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가장 깨끗하고 성스러운 종교 같은 것이다. 
전체적으로 그림을 지배하는 색채는 조화롭고 은은하고 깨끗하다.

미하일 네스테로프 (Mikhail Vasilievich Nesterov, 1862~1942)는 좀 특이한 장르의 작가이다. 
러시아의 종교 상징주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네스트로프는 예술에 관심이 많은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2살 되던 해 그를 기술자로 만들려고 기술학교 입학을 위해서 모스크바로 보내졌다. 
그러나 미술가이자 모스크바 예술학교의 교사였던 투르토프스키의 눈에 띄어 
그의 추천으로 러시아 예술가들의 요람인 모스크바 예술학교에 입학한다.

러시아 화가들이 공부한 경로를 보면 대개 모스크바 예술학교를 거쳐 
상페테스부르그 왕립학교 그리고 다시 모스크바 예술학교로 돌아 오는 길을 밟는데, 
네스테로프도 같은 코스를 밟았다. 
1877년 15세 되던 해 부터 4년 간은 모스크바 예술학교에서, 다시 1881년부터 3년 간은 
상페테스브르그, 그리고 모스크바로 돌아와서 2년간 학교를 다니 후 공부를 마친다. 
10년 동안의 미술공부를 하였다.

 

Silence, 고요. 1903. by Mikhail Vasilyevich Nest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9

저녁 무렵 조각배 두 척이 물을 따라 흐르고 있다.  
원근법 같은 것은 무시하기로 했다.  
복장으로 봐서는 앞에 가는 사람은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 같고 뒤를 따르는 배는 시종처럼 보인다.  
흘러가는 물의 몸짓이라도 보일 법한데 물은 산과 하늘의 모습을 안고 흐르는 듯 마는 듯 한다.  
세상은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  
강 건너 작은 교회가 보이는데 산 너머 살짝 고개를 내민 교회가  
물에 흘러가는 두 사람을 내려다 보고 있다.  
얼마만에 만나는 고요인가...

화가로서의 네스테르프의 관심은 일상 생활과 역사에 대한 묘사였다. 
그러나 독실한 러시아 정교 신자였던 그는 20대 후반부터 종교적인 주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또한 표현 방법도 이전까지의 다른 러시아 화가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23살이 되던 해 네스테로프는 마리아라는 여인과 결혼한다. 
그런데 다음 해 딸 올가를 낳고 마리아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만다. 
아내의 죽음은 그의 작품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훗날 네스테로프는 ‘아내의 죽음이 나를 미술가로 만들었다’라고 했는데 
이 때를 기준으로 그의 작품에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분위기와 감정이 더 강조된다. 
물론 그 뒤로 혼자 살지는 않았다. 나중에 에카테리나라는 여인과 재혼해서 1남 2녀를 더 두었다.

상페테스브루그에서 돌아온 네스테로프는 아브람체보에 있는 한 별장을 찾게 된다. 
그곳은 당시 러시아의 ‘철도왕’으로 불리던 사바 마몬토프 소유였는데 러시아 아르누보의 진원지였다. 
네스테로프는 이 곳에서 많은 화가들을 난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종교와 새로운 화풍을 접목시키고자 했지만 
결과는 프랑스 상징주의 화가들에 가깝게 되어 버렸다. 

 

The Hermit, 1888~1889. by Mikhail Vasilyevich Nest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9

하늘과 세상의 진리를 알기 위해 온 몸을 던졌는데 세월은 조그만 지팡이와  
구부정해진 허리를 은둔자에게 남겨 주었다.  
왼 손에 쥔 것은 묵주로 보인다. 그렇다면 러시아 정교회 수도자이겠다.  
잔설이 남은 길을 보다가 그가 걸어온 길보다는 걸어 갈 길이 많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수도자의 길은 혼자 외로운 길을 걷는 것이겠다.  
외로운 길이 나눔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고 그리고 사회 정의를 지키는 것일 수도 있다. 

The Hermit, 1888~1889. by Mikhail Vasilyevich Nesterov. 

 

1890년부터 1910년까지 네스테로프는 키에프와 상테페스브르그에 머물면서 
수많은 성당의 프레스코화, 모자이크 작업에 참여한다. 
또 자주 러시아 외진 곳에 있는 수도원과 은둔 장소를 찾아 여행을 하였다. 
목적은 수도원과 은둔자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는 것도 있었지만 
실제로 그가 머물기 위한 것도 있었다.

 

The Vision to the Youth Bartholomew, 어린 바르톨레메오의 꿈. 1890.  
by Mikhail Vasilyevich Nest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9

한 소년이 현자로부터 자신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장면이다.  
그림 속의 소년은 러시아 최대 성인으로 추앙 받는  
라도네츠의 성 세르게이 (Saint Sergius of Radonezh)의 어릴 때 모습이다.  
원래 세르게이 성인은 어려서 바르톨로메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1910년 이후 네스테로프는 모스크바에 있는 수도원의 작업을 주로 한다. 
1917년 10월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러시아 정교회의 신자였던 네스테로프는 이 혁명을 받아 들일 수 없었지만 
그는 외국으로 나가지 않고 모스크바에서 생을 마친다. 
혁명 이후 그는 당대 러시아를 대표할 만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에 몰두한다. 

 

The Vision to the Youth Bartholomew, 어린 바르톨레메오의 꿈. 1890.   

 

소년은 전쟁으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서 이곳 저곳을 떠돌다가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 때 부여 받은 이름이 세르게이였다.  
성 세르게이는 곧 은둔 수도자 생활을 하면서 수도자들의 공동체인 ‘성삼 수도원’을 건립한다.  
세속의 여러 명예가 그에게 주어졌지만 그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수도자의 길을 걸었던 성인이었다.  
이 작품은 러시아 상징주의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도 평가 받고 있다.

​네스테로프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인물을 앞에 배치하고 러시아 전통 풍경, 
예를 들면 나무와 초원, 숲과 교회 그리고 강을 병풍처럼 둘렀다는 점이다. 
때문에 그의 그림은 차분하고 시적인 분위기가 가득하다. 
그만큼 그림을 놓고 생각할 것이 많다는 이야기도 된다.

네스테로프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영혼을 울리는 듯한 장면을 간결하게 그린 점이다.  
복잡하지 않은 화면, 그러나 풍부한 색상은 작품 속에 서정성을 듬뿍 담아 놓았다.  
네스테로프를 두고 러시아 화화에 새로운 서정성의 이정표를 제시했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을 떠나기 전 네스테로프는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는다.  
그가 러시아 미술사에 남긴 공헌에 대한 보답일 것이다. 

 

Youth Bartholomew, 1889. by Mikhail Vasilyevich Nesterov. 
oil on panel. Tretyakov Gallery Room 39

 

수도사 Sergius의 작품 삼부작. by Mikhail Vasilyevich Nest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9

 

Portrait of Olga Nesterova, 1905. by Mikhail Vasilyevich Nest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9

 

Archbishop (Portrait of Antoniy Volynskiy), 1917. by Mikhail Vasilyevich Nest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9

 

Alenushka, 1925. by Mikhail Vasilyevich Nest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9

 

Landscape, ​Date unknown. by Mikhail Vasilyevich Nest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9

 

Youth of St. Sergius, 1897. 성 세르지오의 청소년. by Mikhail Vasilyevich Nesterov. 
oil on canvas. 247 x 229cm. Tretyakov Gallery Room 39

캔버스의 중앙에는 젊은 세르지오가 그려져 있다. 
울창하고 혼합된 숲 사이에 가벼운 우렁이 속에 서 있는 당당한 청년. 
그의 얼굴은 가볍고 사랑과 친절로 가득 차 있다.
갈색 곰이 그의 발에 누어 있다. 

작가는 야생의 모든 색을 전달하기 위해 많은 녹색 톤을 사용했다. 
풍부한 녹지와 야생화는 계절이 봄임을 나타낸다. 
작은 목조 교회가 배경에 보인다. 
아마도 그녀와 함께 Trinity-Sergius Lavra의 역사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캔버스에는 인간과 주변 자연의 조화가 지배적이다. 
가슴 위로 팔짱을 끼고 세르지오는 멀리서 시선을 집중하며 온 세상을 위해 기도한다.
청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그의 머리 위에 빛을 묘사한다.

Mikhail Nesterov는 위대한 성도를 깊이 존경했으며 
그의 작품에서 그 의의와 순결 및 믿음을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어렸을 때부터 바돌로매 청년은 금식, 끊임없는기도, 그리고 더 많은 수도원을 택했다.

 

Calvary, 1899. gouache. by Mikhail Vasilyevich Nesterov. Tretyakov Gallery Room 39

 

Portrait of Ekaterina Nesterova, 1905. by Mikhail Vasilyevich Nest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9

 

Three Old Men (also known as The Fox), 1915. by Mikhail Vasilyevich Nest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9

 

Philosophers (also known as S.N. Bulgakov and P.A. Florensky), 1917. 
by Mikhail Vasilyevich Nesterov. oil on canvas. 126 X 126 cm. Tretyakov Gallery Room 39

 

Girl by the Pond, 1923. by Mikhail Vasilyevich Nest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9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39. 미하일 네스테로프 (Mikhail Nesterov) 작품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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