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2장] 독재와 싸운 저항사상의 본질

2012/11/29 08:00 김삼웅

 

신학자 김경재(한신대)는 “함석헌의 문화 종교적 삶의 자리는 계몽주의적 자율적 이성에 대한 신뢰, 자연과학과 종교의 화해, 동양문화와 서구 기독교문명의 지평융합 그리고 세계문명 전체가 영적으로 크게 한번 털갈이를 하려는 진통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문명전환기적 카이로스 의식으로 충만해 있었다” 면서 “오산학교 학장시설 다석 류영모와 남강 이승훈 선생을 만나 청년시절 기본사상의 기틀을 닦고, 일본 동경사범학교 유학시절 우치무라 간조, 간디, 톨스토이, 주세페 마치니, H.G.웰츠의 영향을 받아 그의 역사철학의 토양으로 삼았다.” (주석 14)고 한다. 그렇다면 그의 ‘육화’된 저항사상은 어디서 기원하고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먼저 출생지역을 들 수 있다.
그는 “서북 끄트머리 평북 용천군에서도 바닷가인 부라면 원성동이다. 그는 ‘물 아랫놈들,’ 즉 ‘감탕물 먹는 놈’ 으로 자라났다. 그곳은 일명 사자섬이라고 하는데 일찍 그리스도가 들어와서 소박한 농민생활에 히브리적 바탕의 신앙이 뿌리를 내린 동리였다.” (주석 15)

내가 난 곳은 평안도, 상놈이 산다는 평안북도, 거기서도 용천, 용천에서도 맨 서쪽 바닷가다. 거기를 ‘사섬’이라 불렀는데 그 뜻은 ‘사자섬’ 이란 말이다. …용천에서도 그 위대로 사는 사람들이 여기를 업신여겨 ‘물 아랫놈들’ ‘감탕물 먹는 놈들’ 하였다. 감탕이란 높은 지대의 흙이 비에 씻겨 흘러 바닷가에 내려가 가라앉아서 생긴 유기물질 많은 까만 충적토이므로 퍽 살찐 흙이나, 진흙이므로 샘물은 늘 흐리고 비가 오면 다니기가 참 불편한 흙이다. 그래 감탕물을 먹는다고 멸시하는 것이다. (주석 16)

함석헌은 그가 다른 글에서도 밝혔듯이 평안도 용천의 ‘상놈’으로 태어났다.
조선왕조가 지역차별로 소외시킨 데다 가계상으로 한번도 벼슬을 하지 못한 평민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와 같은 태생적인 환경은 생애를 두고 저항정신의 기본바탕을 형성하였다.

두번째는 성장기의 배경이다.
나라가 망하기 시작하는 1901년에 태어나 어린 시절에 망국을 지켜 보고 감수성이 예민한 19살 때 3․1 운동을 겪었다. 직접 3․1 항쟁에 참여하여 평양고보 3학년 때 학업을 중단하고, 2년 후 오산학교에 들어가 류영모, 이승훈, 안창호, 조만식을 만나면서 신앙과 민족의식에 눈뜨게 된다. 동경으로 건너가 동경교보 시절에 겪은 대진재와 이 때 잔혹한 조선인학살을 지켜보면서 청년 함석헌은 식민지백성의 참상을 ‘육화’시킨다. 동경유학 시절에 무교주의자 우찌무라를 만나고, 셸리의 <서풍의 노래>에 접하게 되고, 김교신 등 동지들을 만난다. 함석헌의 저항사상이 움트기 시작한 정신사적 토양이다.

세번째는 시대적 배경이다.
식민지, 해방, 분단, 동족상쟁, 미군정, 이승만 독재, 5․16쿠데타, 한일굴욕회담, 유신, 5 ․17쿠데타 등 한국근현대사의 모순과 역리를 온 몸으로 겪으면서, 이에 대한 저항을 양심과 정의의 수단가치로 채택하고 이를 실천하였다. 그리고 저항의 방법은 비폭력 평화주의였다. ‘싸우는 평화주의자’라는 닉네임은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의 모든 것을 포괄한다.

무저항주의라고, 아는 체 그런 소리를 하지 마라. 그것은 사실은 저항의 보다 높은 한 방법 일 뿐이다. 바로 말한다면 비폭력 저항이다. 악을 대적하지 말라 한 예수가 그렇게 맹렬히 악과 싸운 것을 보아라. 말은 들을 줄 알아야 한다.

하늘에 올라가도 저항, 물속에 들어가도 저항, 허무 속에 가도 거기에 스스로 일으키는 회오리바람 속에 버티고 있는 하나님이 있는데, 너 만이 저항을 모른단 말이냐?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내가 너를 박차 너를 살려내고야 말리라.
(주석 17)


주석
14> 김경재, <함석헌의 ‘역사철학’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교수신문>, 2003. 1. 1.
15> 안병무 , 앞의 책, <씨알 인간 역사>.
16> <물 아래서 올라와서>,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함석헌 전집 4, 한길사.
17> 함석헌, 앞의 책, <저항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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