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m 16-31] 19세기 중 후반 그림 <이동파 시대> 

 

The Rooks Have Come Back. 산까마귀 떼가 돌아오다. 1871.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62 × 48.5 cm. Tretyakov Gallery Room 18. 

화가 알렉세이 사브라소프 (Aleksei Kon Dratevich Savrasov 1849~1860)는 모스크바에서 출생하고 사망했다.
이동파 창설자의 한 사람으로 모스크바 미술 학교에서 많은 풍경화가를 배출했다.
대표작 <산까마귀 떼가 돌아오다>(1871)는 러시아 풍경화의 걸작으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자연의 미를 서정적으로 파악하연서 
동시에 전혀 새로운 뜻을 더해 주고 있다는 데에 특색이 있다.

러시아 자연의 풍부한 표정을 최초로 주목한 것은 이동파 화가들이었다. 
이전에 아카데미 풍의 풍경화는 아름다운 풍경, 곧 그려질 가치가 있는 풍경을 그린 그림을 의미했다. 
아름답고 그려질 가치가 있는 풍경이란 찬란한 태양이 빛나는 남국의 이상향을 연상시키는 그림, 
구체적으로는 이탈리아 같은 지중해 지방을 그린 그림이었다.

추운 겨울이 6개월 이상 지속되는 러시아의 자연이 그림의 주제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러시아 사회에 대한 애정을 함양 하고자 했던 이동파는 풍경을 보는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주었다. 
이동파 풍경화가들은 조국 러시아 자연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했으며 그려질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러시아 시골 모습을 고스란이 담아낸 19세기 대표적인 풍경화가. 
알렉세이 사브라소프는 심오하고 가치 있는 삶을 화폭에 담아냈다. 
1871년 딸의 죽음 이후 예술활동의 위기가 찾아왔다. 
결국 알콜중독에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거지생활을 하다 쓸쓸히 죽었다고 한다.

<산까마귀 떼가 돌아오다>는 러시아 무드 풍경화를 처음 연 화가 알렉세이 사브라소프의 봄 그림이다. 
한국의 봄은 알록달록 꽃피고  새 우는 그런 환한 햇살 속의 자연을 말하는 거지만 러시아의 봄은 다르다. 
그림에서처럼 눈이 반쯤 녹아 곳곳에 물 웅덩이가 만들어지고 
세상 만물이 겨울을 털어내고 새롭게 약동하듯 기지개를 편다. 
까마귀가 날아 오는 풍경에도 봄의 온기를 받아 만물이 살아나는 느낌, 
꿈틀대는 공기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어 러시아 봄의 시작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산까마귀 떼가 돌아오다>는 사브라소프의 최고의 작품이자 러시아 풍경화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어느 흐린 날 긴 겨울의 침묵을 깨고 자작나무 위로 어수선하게 산까마귀 떼가 날아든다. 
언덕 아래에는 러시아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목조교회가 눈에 띈다. 
화면은 언덕 능선에서 가로로 잘려 있어
원근법적 깊이감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파격적인 구도를 이루고 있다. 
이 작은 신의 집은 그곳을 찾는 사람들만큼이나 소박하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자연의 위력을 느끼게 하는 장관도 아니고, 
물레방앗간과 오리들이 있는 아기자기한 전원풍경도 아니다. 
그저 문을 열고 나가면 불 수 있는 러시아 시골마을 어귀의 평범한 풍경이다.  
하지만 사브라소프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산까마귀떼가 둥지로 돌아오는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일을 통해 깨닫게 된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자연의 미묘한 변화다.  
무거운 구름 사이로 맑은 하늘이 얼굴을 내밀고 봄은 눈을 조금씩 녹이면서 살금살금 다가오고 있다 

러시아의 봄 날씨는 여자보다도 변덕스럽고 흐린날이 많다고 한다.  
러시아인의 기억 속에서 산까마귀의 부산한 날갯짓 소리는 봄이 다가오는 가슴 설레는 전조다.  
풍경은 이런 기억과 주관적인 느낌속에서 재해석 되어 표현되고 있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무드 풍경화(mood landscape)'라 일컬어지는 흐름의 시조로 여긴다.  
이런 서정적인 그림은 관람자를 빨아들이는 힘이 있다.  
낯선 풍경이지만 친숙한 감정을 통해서 그림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서정성 있는 풍경화였고, 이 그림으로 사브라소프는 유명해졌다.   
1870년대에 사브라소프는 정부 지원의 아카데미 미술과 결별하고 Peredvizhniki(이동파) 운동에 합류했다. 
그림을 살펴보면 기념비적 작품이라기에는 평범해 보인다.  
이제 날이 조금 풀렸는지 눈이 녹는 언덕과 그 위에 자작나무,  
그리고 그 나무에 어수선하게 몰려드는 까마귀들이 먼저 보인다.  


또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러시아의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목조건물의 교회가 등장한다.  
들판에서 언덕을 배경으로 교회를 바라보는 구도가 아니라 원근법적 깊이를 느끼기도 힘든 구도다. 
눈이 부시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절경도 아니고 자연의 위력을 보여주는 장관도 아니고  
러시아의 어디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풍경에 
트레티아코프 미술관을 찾는 러시아 사람들이 감탄하는 이유가 뭘까? 

사브라소프가 이 단순한 풍경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작은 변화다.  
겨우내 먹이를 찾아 떠났던 까마귀들이 둥지를 찾아 돌아와서 날갯짓을 하고 있다.  
겨우내 하늘을 차지했던 무거운 구름 사이로 맑은 하늘이 찾아오는 느낌이다.  
그 기운을 받아서인지 자작나무 주변에는 눈들이 녹아 작은 물웅덩이가 생겼다.  
자작나무 가지들은 혹한의 강풍을 이겨내고 돌아온 까마귀들을 맞이하며 
다시 잎사귀를 튀울 준비가 되어 있나 보다.  
왼쪽에 있는 어느 집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며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고향에 돌아온 까마귀는 그 동안 겨울바람에 부서진 집을 수리하려고 하는지 
땅에 떨어진 자작나무 가지를 입에 물고 있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교회의 종탑에서는 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릴 듯하고 집안에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도  
내일부터는 봄 농사 준비를 위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시기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브라소프가 그린 비슷한 내용의 그림은 이후에도 계속 제작되었다.

 

Country Road, 1873. 시골길.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70 cm X  57 cm.  
Tretyakov Gallery Room 18.

1873년에 그려진 <시골길>이란 작품도 러시아 풍경화의 백미다.  
하늘과 몇그루의 나무가 있는 휘어진 시골 길.  
일렬로 늘어선 나무는 화면의 중간 부분부터 시작해 우리의 시선을 더 먼 공간으로 유도한다.  
눈 앞에는 비가 지나간 뒤의 온통 질퍽거리는 길이다.  
채 얼굴을 내밀지 못한 태양은 구름 속에서 그 황금빛 파장을 길에 적셔 줄 뿐이다.  
깊이 파인 마차 바퀴자국으로 누군가 방금 지나갔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 길을 걷는다고 생각해 보라.  
아마 진흙탕 속에 발이 빠져서 한 걸음도 움직이기가 힘들고 
옷은 흙탕물이 튀어 금방 더러워질 것이다.  
현실속에서는 쉽게 걸을 수 없는 길을 시각적으로 걷는 것은
힘들었던 보행마저도 따뜻한 기억으로 재생시킬 것이다.  
몇 그루의 나무와 비에 젖은 질척거리는 길 하늘에 떠 있는 구름으로  
러시아 시골의 기억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드는 웅대한 장관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 속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을법한 풍경은 언제나 아름답다.  
그런데 사브라소프가 걸어간 마지막 길은 고통스러운 진흙탕 길이었다.  
1870년대에서 1880년대에 걸쳐 매우 생산적인 작품 활동을 보여주었던 그는 알콜중독에 빠졌다 
그를 이 병에서 구해 내려고 친지들과 친구들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그는 구제불능의 알콜 중독자가 되어 거렁뱅이처럼 떠돌아다니다 숨을 거둔다.  
그의 장례식에는 그가 가르쳤던 미술학교의 문지기와 파벨 트레티야코프만이 참석했다.

 

Losiny Ostrov in Sokolniky, 1869,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62 cm X 88 cm. 
Tretyakov Gallery Room 18.

 

Landscape with Oaks, circa 1855.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66.5 cm X 77.5 cm. Tretyakov Gallery Room 18.

 

Village Bulgarians. 1872.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8.

 

 View in the Neighborhood of Oranienbaum. 오라니엔바움 이웃의 전경. 1854.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8.

 

View of the Kremlin from the Krymsky Bridge in Inclement Weather. 1851.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혹독한 날씨에 크림스키 다리에서 바라본 크렘린 전경. 67 cm X 90 cm, Tretyakov Gallery Room 18.
 

Spring is coming. 1874.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8.

 

Autumn. 1871. oil on canvas. by Aleksei Savrasov. Tretyakov Gallery Room 18.

 

Yard. Winter, 겨울의 뜰. 1875,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53 cm X  43 cm, Tretyakov Gallery Room 18.

 

A Provincial Cottage. Spring, 1878,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8.

 

Rye. 1881.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8.

 

218-10-5. Country Landscape, 1867.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8.

 

Volga lagoons, 볼가 라군. 1870. by Fyodor Vasiliev. oil on canvas. 71.8 x 134 cm. Tretyakov Gallery Room 18.

표도르 바실리예프(Fyodor Alexandrovich Vasilyev 1850–1873)는 하급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탄생 4년 후 부모가 결혼했지만 그는 항상 사생아로 여겨졌다 한다.  
바실리예프는 12살부터 우편배달, 사본 필사, 미술품 재생의 일로 돈을 벌었고, 부친의 사후에는 가족을 부양했다.

1863년(13세때) 바실리예프는 미술학교의 야간학생으로 다니며, 그를 돌봐준 여러 화가를 만났다.  
1866년 유명한 풍경화가 쉬시킨이 그의 누나와 사랑에 빠졌고, 
틈틈이 바실리예프에게 풍경화를 가르쳤고, 후에는 크람스코이, 트레치코프 등에게 소개도 해 주었다.  
그러나 바실리예프가 자신의 그림과 강한 경쟁상대가 되자 쉬쉬킨은 집행부의 영향력을 이용해 
자신이 상을 받도록 했다는 비난도 받았다고.

표도르 바실리예프는 가난한 페테르부르크 우편 관리의 가족으로 태어났다. 
돈이 부족하여 12 세의 청년이 우체국에서 일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미를 포기하지 않았다. 
15살 때 예술진흥협회의 드로잉 스쿨에 입학하여 크람스코이(Ivan Kramskoy) 등 저명한 예술가들을 만났다. 
크람스코이는 표도르 바실리예프보다 나이가 13살이 더 많았지만 나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매우 가까워졌다. 
크람스코이는 바실리예프에게 편지로 다음과 같이 고백하여 보존되고 있다. 
“내 인생은 부자가 아니고 인생에서 당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내 자존심이 그렇게 근본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는 매우 귀중하다. 당신의 개발은 나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신의 인생 - 내 응답 ... " 

아티스트로서 바실리예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은 이반 쉬스킨(Ivan Shishkin)이 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은 친척이 되었다. 
쉬스킨은 바실리예프의 여동생 예브게니(Yevgeny Vasilyeva)와 결혼했다. 
쉬스킨은 처남에게 최대한 정확하게 전달하도록 가르치고 그림의 기술에 대해 이야기했다. 
젊은 예술가 바실리예프가 쉬스킨 부부에게 보낸 편지가 여러 통 남아 있다. 
1872년 8월 11 자 그들 중 한 명은 얄타 (Yalta)에서 쓰여졌으며 그곳에서 예술가는 폐 질환 때문에 움직였다. 
“저는 항상 그렇듯이 돈 때문에 일을 해야 하는데 항상 저를 화나게 합니다. 
이미 내 그림 중 하나를 받은 대공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Brand Duke Vladimir Alexandrovich)는 4점을 더 주문했습니다. 
그러나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이 그림들은 12월 24일 마감일까지 완료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작된 그림은 낭비되고 올해 내년 1월과 2 월에만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대회에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2 개월 후 1873년 10월 6일에 일을 끝내지 못했다.

1870년, 20세의 표도르 바실리예프는 그의 예술가 일리야 레핀(Ilya Repin) 및 
예브게니 마카로프(Evgeny Makarov)와 함께 볼가 강을 따라 여행을 갔다. 
몇 년 후, 일리아 에피모비치 (Ilya Efimovich)는 그의 저서 “먼 거리”에서 
그 젊은이가 일하는 방식에 대해 동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그의 오랜 동지들에게 “훌륭한 교사”가 되었다고 썼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훌륭한 교사였다. 
” 그에 따르면“ 머그컵 앨범의 작은 잎을 따라 재봉틀 바늘의 속도를 가진 얇은 연필은 
가파른 곳으로 구부러진 집들이 있는 가파른 은행의 사실적이고 인상적인 전체 그림을 그렸다. 
먼 거리에서 뾰족한 곤경과 뾰족한 스파이크 ... 
" 여행 중에 만들어진 연구는 나중에 볼가 라군을 포함한 여러 그림의 기초로 사용되었다. 
앞으로 캔버스는 Pavel Tretyakov 컬렉션에 떨어졌다. 
그는 바실리에프가 병과 사망으로 인해 후원자에게 지불할 수 없는 부채 때문에 
1874년 작가의 그림을 사후에 전시한 후에 그것을 가져갔다.

 

해동. 1871. by Fyodor Vasiliev. oil on canvas. 53.5 x 107 cm. Tretyakov Gallery Room 18.

그림은 특별한 유형의 풍경이다. 
추위에 휩싸인 음울하고 탐욕스럽지 않은 바람에 휩쓸리는 공간을 묘사한 것이다. 
작가는 시야를 넓게 확대하여 거의 파노라마처럼 보이도록 하여 
어렵고 목적없는 여정, “고통으로 가득 찬 길”의 느낌을 육체적으로 볼 수있게 한다. 
절망감은 배경의 세부 사항에서 강조된다. 
얼음으로 덮인 나무와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농민 오두막. 
삶의 순환을 상징 할 수있는 여행자와 어린이는 길과 약간 녹은 개울로 형성된 교차로의 중심에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단어의 직접적인 의미에서 “충돌”이다.

바실리예프의 "해빙"은 발표되자마자 그를 유명하게 했다.  
알렉산더 왕자 즉 미래의 알렉산더 3세가 카피 한 점을 주문했고, 
Society for Promotion of Artists는 그에게 일등상을 수여했다.  
이 그림은 1872년 런던 박람회에서 메달을 받았다. 
바실리예프는 황립예술학교의 인턴이 되었고, 군대징집을 면제받았다.

그러나, "천재소년" (바실리예프가 러시아 예술가들 사이에 불렸던)에겐 그 인기를 즐길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폐결핵 진단을 받아 셍페테르부르그를 영원히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크리미아로 이주했던 바실리예프를  Society for Promotion of Artists가 계속 후원했으나, 
그는 그림으로 비용을 갚아야했다.

 

Wet Meadow, 1872. 젖은 초원. by Fyodor Vasilyev. Oil on canvas.

70 x 114 cm. Tretyakov Gallery Room 18.

 

바실리예프 최고의 작품 중 하나인 "젖은 초원(Wet Meadow)"
1871에 바실리예프는 치료를 위해 크림 반도에 있었다. 
날씨가 변하는 순간이 캔버스에 그려져 있다. 
뇌우에서 햇빛으로의 전환. 그림은 시각적으로 두 부분으로 나뉜다. 
왼쪽에서는 하늘이 더 밝지만 여전히 우울하고 

오른쪽에서는 하늘이 어둡고 때로는 진한 파란색이다. 
이것들은 멀리 떨어진 뇌운이다. 
하늘에 작은 줄무늬가 있고 비가 내린다. 
작가는 대부분의 그림에 그것을 주었다.

조금 아래는 넓은 녹색 초원을 묘사했다. 
비가 막 지나가고 풀과 땅이 모든 물을 흡수했다. 
여름 비가 내린 후 공기가 얼마나 아름답고 신선한 지 떠올려본다. 
그리고 예술가가 묘사한 곳에서 얼마나 깨끗하고 가벼운 공기. 
이 순간 관객은 신발을 벗고 맨발로 잔디 위를 달리며 이슬 방울을 모으고 싶다. 
불행히도 이것은 현실이 아니라 그림이다.

지평선에는 크고 푹신한 나무가 그려져 있다. 그들은 짙은 녹색이다. 
나무는 그림의 오른쪽에 있다. 중앙에는 작은 호수가 있다. 
그것은 거울과 같으며 구름을 통과하는 태양 광선을 그 자체로 반사한다.

작가가 그림자로 어떻게 연주하는지 자세히 살펴보자. 
그림의 가장 가장자리에는 풀과 초원 꽃이 태양에 의해 선물되며 조금 더 구름이 그를 통과하지 못하게 한다.
사진 자체는 시골에서 보낸 멋진 어린 시절의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관객은 그런 초원을 보았고, 비가 방금 지나가는 순간에 얼마나 멋질 지 알고 있으며, 
가슴이 가득한 이 향기를 숨 쉬고 있다. 
신선한 공기와 초원 꽃의 향기. 저 멀리 어딘가에 천둥 소리가 들리고 뇌우도 볼 수 있다. 
이들은 되돌릴 수 없는, 잊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다.

 

언뜻 보기에 그림 "Wet Meadow"는 친숙함과 단순한 동기로 모든 시청자를 매료시킨다. 
넓은 공간의 깊숙한 곳에서 두 그루의 나무가 솟아 오르고 
멀리 나가는 거대한 구름 아래에서 작은 하늘 조각이 나타난다. 
앞서 틈새 시장을 따라 부드럽고 촉촉한 푸른 잔디로 덮인 가파른 경사면이 있다. 
그림의 거의 중앙 전경에서 검은 뇌운을 통해 따뜻한 태양이 늪지대의 역류에 반사되려고 한다.
얽히고 설킨 회색 구름이 소용돌이 치고 강력한 힘으로 충돌한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천둥 소리가 들리고 끝없는 공간에 반영된다. 

그림은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으며 여기 주변의 모든 것이 숨을 쉬고 살아간다. 
나무가 강한 바람에 구부러지고 물이 물결 치며 하늘과 멀리서 보이는 숲...
표도르 바실리예프의 그림에서 하늘은 변함없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Wet Meadow"에서는 거의 핵심 수단이며 작가의 시적 사고를 표현한다. 
푸른 초원 위 구름 위의 따뜻하고 반짝이는 채광창은 물에 반사되어 풀에 비추며 
크고 차가운 검은 구름과 전쟁을 벌이며 젖은 땅에 우울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긴장된 하늘의 존재와는 대조적으로 그림의 나머지 부분은 매우 단순하다. 
그녀의 그림의 선은 더 차분하고 부드럽다. 
풍경의 모든 세부 사항은 주요 아이디어의 변형이며 

모든 세부 사항이 전체적으로 용해되어 신중한 고려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바실리예프는 새 풍경에 익숙해질 수 없었기에, 그는 계속 러시아의 풍경을 기억이나 
옛 스케치에 의존해서 또는 상상으로 그렸다.  
이때의 예가 1872년의 "젖은 초원"이다.  
그후 크리미아의 풍경에 매료되며 그린 그림이 "크리미아의 산"이다.

바실리예프는 23세에 사망했다.  
그의 사후 셍페테르부르그에서 열린 추모전시회는 대성공이었고, 전작품은 사전에 예매되었다.  
그의 그림은 러시아의 다음 세대 풍경화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니콜라이 게는 "바실리예프가 우리를 위해 '하늘'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미술사가들은 바실리예프가 이사크 리비탄, 발렌틴 세로프, 빅토르 보리스-무사토프에 끼친 영향을 강조한다.

 

Hot Summer Day, 뜨거운 여름 날. 1869. by Fyodor Vasilye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8

 

In the Crimean Mountains, 1873. 크림반도의 산들. by Fyodor Vasilyev. 
Oil on canvas. 116 x 90 cm. Tretyakov Gallery Room 18.

뿌연 안개 사이로 내비치는 산의 모습 표현이 대단하다. 
소가 끄는 수레가 내려왔을 길이 그대로 보여지며 크림 산의 위용이 가슴에 와 닿는다. 
조금 세심히 들여다 보면 소나무, 풀, 작은 길 등 작가의 사실적이고 섬세한 표현에 아~하고 탄성 짓게 된다. 
설명이 필요없는 풍경화, 마치 내가 산길을 거닐고 있는 것처럼 
내 눈 앞에서 자연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풍경화다.

캔버스의 오른쪽 하단에서 왼쪽 상단까지 빛이 점차 물결 모양으로 짙어지고 
왼쪽으로 뒤덮인 래그 가드의 플레어를 잡아 두 마리의 황소를 사용한다. 
또한 흰 가운에 기대는 사람이 있는 앞 부분에만 조명이 비치고 있다. 
마차의 나머지 부분과 그 바퀴 근처의 사람은 더 어두운 지역에 있다. 


그림의 상단 부분도 비슷하게 강조하고 표시된다. 
그림의 오른쪽에 있는 잔디로 덮여 있는 경사는 조명이 밝지만 왼쪽의 협곡은 그늘에 있다. 
이 경우 캔버스의 상단 부분인 하늘이 전체적으로 조명된다. 
그러나 왼쪽 위 모서리가 약간 더 밝다. 
내부에서 하늘을 통해 광원이 지구를 비추고 점차 빛을 움직인다. 
그것은 빛이 움직이는 느낌을 만들어 내고, 화가가 쓴 거의 모든 것이 빛으로 비춰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은 예술가 지원협회 (Society for the Supports for Artists)를 대상으로 한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그의 죽음 직전에 기록된 이 작품은 영원한 생명의 빛으로 승천, 
하늘에 있는 표도르 바실리예프를 기다린 미지의 것으로 찬송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18 전시실

 

'바다의 화가' 이반 아이바조프스키 Self-portrait. 자화상. 1874. by Ivan Aivazovsky

이반 콘스탄티노비치 아이바조프스키(Ivan Konstantinovich Aivazovsky, 1817 ~ 1900)는 
러시아 제국의 크림반도에 있는, 페오도시야의 마을에서 가난한 아르메니아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그가 유럽 전역을 여행하기 전인 그의 인생 전반기에는 풍경화와 바다 그림마다 
수상작이 되면서, 그는 해안 마을의 크림반도인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 후반기에, 해군 장면을 그린 작품들은 
러시아 해군으로부터 오랫동안 지속되는 직권을 부여받게 되었다. 

1845년, 아이바조프스키는 술탄 압둘마지드의 초대에 응해 콘스탄티노플로 갔다.  
그는 1845~1950년 사이 8회에 걸쳐 콘스탄티노플 도시를 여행했다.  
아이바조프스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긴 체류 기간 동안에, 몇 점의 그림들을 그리기 위하여  
오스만 술탄 압둘마지드와 압둘아지즈, 압둘하지즈에 의해 황실 화가로 임명되었다.  
그의 작품들 중에 30 점은 현재 오스만 제국의 궁전과,  
터키의 돌마바흐체 박물관과 다른 많은 박물관들에 전시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시 미술관과  
우크라이나 페오도시야에 있는 아이바조프스키의 미술 작품전시관을 포함하여,  
러시아와 과거 소비에트 연방 전역의 박물관들에서도 수십 점이 발견된다.  
터키의 외무부 장관이었던 압둘라 귈의 장관실 벽에는 아이바조프스키의 그림들이 걸려 있다.  


아이바조프스키는 31세 때, 영국인 가정교사 줄리아 그레이브스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결혼했다.  
그들은 네 명의 딸을 두었다. 그들의 결혼생활이 끝나고, 아이바조프스키는 65세때, 
페오도시야의 젊은 아르메니아인 과부 안나 부나지언과 재혼했다. 

아이바조프스키는 1985년, 소아시아의 아르메니안들의 하미디안 대학살에 의해 짙은 영향을 받아,  
몇몇 작품들은 "터키 함선의 축출", "트라브존에서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과 같은 주제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콘스탄티노플에 있을 때, 모든 메달들의 수여를 거절하였다.  


그는 그의 인생 후반기를 페오도시아에서 보냈다.  
그는 데오도시아에서 그의 사유지로부터 마을에 불을 공급했으며, 예술 학교를 열었다.  
그는 그 지역에서 첫 고고학적 유적 발굴을 시작했고, 역사 박물관을 건축했다.  
그의 노력 덕분에 페오도시아에는 무역 항구가 건설되었고, 철도 기차역 네트워크가 연결되었다.  
아이바조프스키는 1900년 사망하였다. 

아이바조프스키는 바다 그림과 해안 장면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파도와 바다 거품의 아른아른 빛나는 움직임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그의 화법과 상상력을 특히 감탄하게 된다.  
특별히 인상적인 점은 달빛이 퍼짐을 묘사하는 그의 능력은 참으로 탁월했다. 
아이바조프스키 그림의 햇빛과 달빛은 대부분은 투명한 대기층에 있지만,  
구름 뒤로부터 퍼지기도 하고, 안개를 지나기도 한다.  

그가 그린 1840년대의 해군 전투 작품 시리즈들은 물과 구름에 반사된 
불타는 배의 불길을 묘사한 것과 함께, 그의 극적인 역량을 그림의 앞 부분에 나타나게 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농부의 삶과 콘스탄티노플 시민의 삶의 장면들을 포함하여, 풍경화들도 그렸다.  
몇몇 비평가들은 그의 그림은 콘스탄티노플 동양학자의 작품이라고 하며,  
그의 수백 점의 그림들은 반복적이고 멜로드라마적 일 수 있는 다른 느낌이 있다고 한다. 

아이바조프스키는 그의 일생동안 가장 많은 작품을 그렸다.  
1900년, 그가 죽을때, 6,000 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재산은 그가 예술가로써 데오도시아의 고향에서 예술 학교를 열고  
전시관을 개장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 성공적인 활동을 하는 동안에 축적되었다. 

2006년에는, 아비아조브스키의 작품들은 3,200,000 달러 정도의 가격에 
경매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의 국제적인 명성은 계속하여 커지고 있다.  
2007년 7월 14에는 그의 그림 "지브롤터 암초에 밀린 아르메니안 선박
(American Shipping off the Rock of Gibraltar)"이  2,710,000 파운드에 낙찰되어 되어, 
그 가격은 "아이바조프스키 작품 중에서 경매 낙찰 최고가"이다.  
그는 모든 아르메니아인 화가들의 최고의 용광로라고도 불린다. 

1977년, 소비에트 천문학자 니콜라이 스테파노비치 체르닉에 의해 발견된  
소행성 아이바조프스키 3787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아이바조프스키는 안톤 체홉의 바냐 아저씨 작품 활동에도 참고되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아르메니아에서는 아이바조프스키의 작품이 담긴 우표가 발행되고 있다.

 

The Black Sea. 1881. 흑해.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149 X 208cm, Tretyakov Gallery Room 19.

바다를 사랑한 화가 이반 아이바조프스키
그는 바다의 위대함과 무한의 광대함을 평생 그렸다. 
이 <흑해>는 아이바조프스키의 대표작으로 
우리에겐 익숙치 않은 검은 바다에 대해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검은 구름과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는 마치 하나의 세상인 것처럼 어우러져 있다.

이반 아이바조프스키는 러시아 회화의 별과 같은 존재이며 
역사상 가장 완벽하게 바다를 표현한 화가로 알려져 있다. 
당대의 비평가들조차 그를 가리켜 "아마도 유럽에서 아이바조프스키처럼 풍부한 감정과 표현력으로 
바다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25살의 나이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사실을 
19세기 예술사에서 가장 흥미있는 일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 나이에 러시아, 스투트가르트, 피렌체, 로마, 암스테르담의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으니까 
그런 말을 들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 

 

The Black Sea. 1881. 흑해.

 

달빛이 비치는 바다는 그의 주요 주제이다. 
낭만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초기 작품들은 마음을 편하게 하는 고요함이 있다. 
물론 소위 ‘내공’이 쌓이면서 그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 무르익으면 바다도 거칠어지지만 말이다.

시장의 도움으로 상페테스브르그 미술학교에 진학하게된 아이바조프스키는 
풍경, 특히 바다 풍경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에게 외국 유학의 혜택이 주어진다. 
그러나 그는 바로 유학을 가지 않고 크리미아 반도를 돌면서 
자신의 풍경화 세계를 더욱 단련시키기로 결심한다.
크리미아 반도에서의 ‘내공 쌓기’를 끝내고 유학을 간 이태리에서 머무는 동안 
엄청난 양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또한 독일과 프랑스 스페인, 홀란드를 여행하면서 
전시회와 모임에 참석하게 되는데 가는 곳마다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그에 관한 신문 기사가 있다. 
"‘... 교황 그레고리 16세가 아이바조프스키의 ‘카오스 (Chaos 1841)’를 구입해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들의 가치가 있는 작품만 전시하는 바티칸에 걸었다. 
그의 ‘카오스’는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것으로 예술 기교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림에 대한 신문의 평이 대개 호의적임을 감안해도 극찬에 가까운 기사이다.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스물 다섯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낭만주의 회화의 선구자로써 한참이나 선배화가였던 영국화가 윌리엄 터너는 그를 천재라고 칭했고 
프랑스의 들라크루와는 자신의 우상이라 말했다고 할 정도로 국제적인 화가였다.

 

The Rainbow, 1873. 무지개.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102 X 132cm, Tretyakov Gallery Room 19.

바다에서 배가 난파당하고 사람들은 조그만 배에 몸을 싣고 구사일생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이들은 살 수 있을까? 작가는 죽음의 문턱에 있는 그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 
무지개가 떠 있으니 곧 폭풍우는 잠잠해질 것이고, 
저 멀리 갈매기가 나는 것을 보니 육지가 가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아이바조프스키의 <무지개>는 희망을 상징한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우리 삶을 끌어주는 힘인 희망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거다.

 아이바조프스키는 세계 미술 경매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러시아 작가로 
2012년 소더비 경매에서 작품의 가격은 520만 달러(약 60억 원)에 달했다 하니, 
러시아 그림의 세계적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The Billowing Sea. ‘파도가 크게 이는 바다’. 1889.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9.

아마도 유럽에서 아이바조프스키처럼 풍부한 감정과 표현력으로 
바다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진을 넘어서 동영상을 보는듯한 착각마저 들만큼 정교하다. 
그가 파도를 그리는 기법에 대한 설명을 보면 

그의 탁월한 기억력과 풍부한 상상력에 감탄하게 된다.  
그는 사전 스케치 작업없이 기억 속에 있는 바다와 파도를 
연필로 대강 윤곽을 잡은 후 바로 채색작업에 들어갔다고 한다.  
윌리엄 터너가 왜 그를 두고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천재라고 극찬했는지 실감할 수밖에 없게 한다.  


이 작품에 잠재된 공포를 바깥으로 꺼내어 극대화하면 
‘파도가 크게 이는 바다(The Billowing Sea)' 같은 화면이 도출된다.  
작품에 묘사된 바다는 흑해(Black Sea)인데, 피쿼드 호를 침몰시켰던  
거대한 향유고래 모비딕 만큼이나 바다는 분노로 들끓고 있다. 

“버들잎 같은 배가 산마루 같은 파도마루에 올라떴다가는 또 눈 깜박할 사이에  
파도골로 떨어져 내려 가고 또 올라떴다가는 떨어져 내리고 하는” 
어느 거친 바다의 실물을 이 그림 앞에서 상상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2019. 08. 18 인증샷

 

2019. 08. 18 인증샷

 

On The Storm, 1872.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92 X 72 cm. Tretyakov Gallery Room 19.

그가 살았던 당시,  러시아는 서로 다른 두 개의 흐름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이 끝나고 시작된 러시아의 문화가 거대한 꽃을 피우는 시기이기도 했지만 
또 한 편으로는 니콜라스 1세의 가혹한 전제정치와 불경기가 러시아를 휩쓸던 때이기도 했다. 
19세기 말 러시아, 그 거대한 역사와 혼란했던 시대를 목격한 아이바조프스키는 
그의 작품에 자유에 대한 사랑, 휴머니즘에 대한 그의 생각 그리고 시대 정신 등을 작품에 쏟아부었다.

 

The shores of Dalmatia. 1848.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9

 

View of the Coast Near St. Petersburg. 1835.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107 X 133 cm. Tretyakov Gallery Room 19. 

 

Sea coast. 1840.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61 X 40 cm. Tretyakov Gallery Room 19. 

 

View of Leandrovsk tower in Constantinople. 1848.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45 X 58 cm. Tretyakov Gallery Room 19. 

 

Meeting of a fishermen on coast of the bay of Naples. 1842.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85 X 58 cm. Tretyakov Gallery Room 19. 

 

Near Crimean coast. 1890.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9. 

 

The Bay of the Golden Horn in Constantinople, 콘스탄티노플의 골든 혼. by Alexey Bogolyubov. 
oil on canvas. 51.1 X 29.4 cm. Tretyakov Gallery Room 19.

알렉세이 보골류보프 (Alexey Petrovich Bogolyubov 1824 ~ 1896)
알렉세이 보골류보프는 Novgorod Gubernia 의 Pomeranie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은퇴한 대령 표트르 가브리일로비치 보골류보프다. 
보골류보프의 외할아버지는 유명한 철학자이자 사회비평가 Alexander Radishchev다.

1841년 알렉세이 보골류보프는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러시아 해군에서 복무하고 함대와 함께 여러 국가를 여행했다. 
1849년에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예술 아카데미에서 Maxim Vorobiev 지도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젊은 화가 보골류보프는 Ivan Ayvazovsky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853년 그는 메이저 금메달로 아카데미를 마쳤다. 
그는 해군 장교로 은퇴하고 해군 본부의 예술가로 임명되었다.

1854년부터 1860년까지 그는 유럽을 여행하며 많은 일을 했다. 
한편 Alexander Nevsky 대성당에 프레스코 화를 그렸다. 
Bogolyubov는 1860년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그의 작품을 전시하고 교수직을 받았다. 
얼마 동안 그는 아카데미에서 가르쳤다. 


1860 년대에 그는 볼가 강을 따라 여행했다. 
그의 그림은 낭만주의의 모든 흔적을 잃어 버렸고 

그 요소를 자연의 확고한 사실주의로 대체했다. 
1871년에 그는 Imperial Academy of Arts 에 선출되었다 .

1870년부터 그는 Wanderers 미술 운동에 가까워 졌고 모든 전시회에 참여했다. 
그는 운동의 다른 구성원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사회적 생각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1873년, Bogolyubov는 동료 순회자들과 연대하여 아카데미를 떠났다. 
그는 심지어 로마에 대안적인 러시아 예술 아카데미를 만들려고 했다. 

1873년 이후, 보골류보프는 그의 심장 상태 때문에 주로 파리에 살았다. 
그의 집은 러시아 예술가 사랑방 같았다. 
빈번한 방문객으로는 Ivan Turgenev, Ilya Yefimovich Repin, Vasily Polenov, 
Mark Antokolski, Vasili Vasilyevich Vereshchagin 등이 있었다. 

1885년, 보골류보프는 그의 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사라토프에 
Radischev Art Museum 이라는 미술관을 열었다. 
"러시아 최초의 혁명가"인 Alexander Radishchev 의 이름을 딴 

박물관 이름은 당국에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보골류보프는 허가를 얻기 위해 법적 싸움을 견뎌야 했다.

보골류보프는 1896년 2월 3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 후, 보골류보프의 모든 돈과 자본은 그의 회화학교에 기증되었다. 

 

Nizhny Novgorod Fair (Row of Bells), 니즈니 노브고로드 시장. by Alexey Bogolyubov. 
oil on canvas. 51.8 X 29 cm. Tretyakov Gallery Room 19.

 

The Mouth of the Neva, 1872, by Alexey Petrovich Bogoliubov. 
oil on canvas, 54.5 x 110 cm, Tretyakov Gallery Room 19.

 

The Ipatiev Monastery near Kostroma, 1861, by Alexey Petrovich Bogoliub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9

 

Auvers, 1881, by Alexey Petrovich Bogoliub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9

 

Treport, Date unknown, by Alexey Petrovich Bogoliub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9

 

Fountain of Annibal in Rocca di Papa near Rome, 로마 근처 로카 디 파파에 있는 한니발 분수.
1857. by Lev Felixovich Lagorio. oil on canvas. 48 X 31 cm. Tretyakov Gallery Room 19.

 

레브 펠릭소비치 라고리오(Lev Felixovich Lagorio, 1826-1905)는 러시아의 화가이자 
수채화가였으며 특히 크림반도 주변의 바다와 해양, 코카서스 산맥의 경치를 묘사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는 남부 크림반도에서 일한 예술가들로 구성된 "Cimmerian" 회화학교와 관련이 있다 .

그의 아버지 펠리체(Felice Lagorio 1781-1857)는 시칠리아 왕국의 부영사를 역임하는 제노바 상인이었다. 
1839년부터 1840년까지 그는 Ivan Aivazovsky의 스튜디오에서 첫 번째 예술 교육을 받았다. 
1842년에 Taurida의 주지사인 Alexander Kaznacheyev의 지원으로 
그는 Imperial Academy of Arts에 등록할 수 있었다. 
나중에 그는 아카데미의 새로운 회장인 로이 히텐베르크 공작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의 선생님들 중에는 Alexander Sauerweid, Maxim Vorobiev 및 Bogdan Willewalde 등이 있다.

1850년에 그는 자신의 그림인 "View of Lakhta" 로 "예술가"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2년 후 러시아 시민이 되었다. 
그는 또한 해외 유학 연금을 받았는데, 파리를 먼저 방문(1853)하고, 

그 다음 로마를 방문하여 1859년까지 머물렀다가 추가로 2년 동안 자비로 머물렀다. 

러시아로 돌아온 후 1860년 교수로 임명되어 이탈리아에서 자신이 만든 작품을 전시했다. 
그는 1861년 코카서스로 여행하여 그곳에서 성 안나교단을 수여한 

차르 알렉산더 2 세에게 일련의 풍경을 선물했다.

그는 1863년과 1864년에 코카서스 전쟁에 참가한 

대공 Mikhail Nikolayevich의 수행원과 함께 코카서스로 돌아왔다. 
그 후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정착하여 종종 해외로 여행을 떠났다.

1885년에 그는 1877-1878년의 러시아-터키 전쟁에 관한 일련의 작품을 그리는 의뢰를 받고 
유럽과 아시아 전역의 전장을 방문했다. 
1900년에 그는 아카데미 명예 회원으로 지명되었다. 
그는 노보데비치 묘지(Novodevichy Cemetery)에 묻혔다.

 

On the island of Capri. Fisher's house, 노르망디 해변, 1859. by Lev Felixovich Lagorio.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9.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19

 

 

 

[Room 16-31] 19세기 중 후반 그림 <이동파 시대> 

 

Tretyakov Gallery Room 17. 바실리 페로프(Vasily Perov) 작품 전시실.

 

Self Portrait. 1870. 바실리 페로프 자화상.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7. 

바실리 페로프(Vasily Grigorevich Perov 1833-1882)는 1833년 시베리아에서

지방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모스크바 회화조각학교에서 수학했다(1853~62).   
이때의 스승들 중에는 세게이 자란코 (Sergey Konstantinovich Zaryanko 1818~1870)가 있었다.   
학교를 마치던 무렵 러시아 현실에 대한 분노와 민초들에 대한 연민을 버무려 

그가 그려낸 풍자화들은 러시아 화단이 바실리 페로프란 이름을 주목하도록 만든다.   

‘키치(Kitsch)’라는 용어가 있다.   
고매한 품격을 갖지 못한, 싸구려 또는 사이비 미술품을 조롱하는 말이다.   
예전 우리나라에서는 머리 깎는 이발소에 꼭 그런 그림들이 걸려 있어서   
흔히 ‘이발소 그림’이라고 불리던 것들이 바로 이런 부류이다.  

세계 미술사의 주류에 속하지 못했던 19세기 러시아 회화들을  
서유럽 쪽 화단에서는 흔히 키치로 취급했었다.   
외관상으로 어딘지 그 ‘이발소 그림’의 냄새가 나는 듯한 작품들이 없지 않다.   
현란한 빛이 세련되게 부서지는 인상파 그림들을 익숙하게 보며 자라온 우리 눈에는,   
러시아 회화들의 칙칙한 색채나 가끔 좀 갸우뚱한 사실적 묘사는 뭔가 촌스러운 느낌을 줄 때가 있다.  

바실리 페로프는 러시아 회화사에서 빠트릴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상당수는 이발소 그림을 닮은 데가 있다.   
그의 독특하고 우울한 화면 분위기는 세련된 도회인들의 입맛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처음 러시아 회화들에 매혹되었을 때도 그 대상은 주로 레핀이나 크람스코이, 
세로프처럼 기존의 취향으로도 충분히 전율할 수 있는 화가들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페로프 미학의 핵심은 시대정신과 휴머니티에 있다.   
우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변함 없이 피어나는 모네의 수련이나   
고흐의 해바라기와는 다른 관점에서 그의 그림에 접근해야 한다.   
페로프가 살았던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현실에 발을 딛고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의 그림은 어떤 예술 작품들보다도 깊은 감동을 가져다준다.   
그런 점에서 페로프의 그림들은, 투박하지만 씹을수록 깊은 맛이 나는 러시아의 흑빵을 닮았다.   

그의 장르화들을 특징에 따라 구분해 보면 사회비판, 해학, 

그 외 인물과 역사 쯤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현실 비판적 시각의 그림들을 살펴보자.   
그가 비판한 ‘현실’, 즉 19세기 러시아 사회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당시 러시아 국민의 대다수는 농노이거나 가난한 농민들이었다.   
농노는 지주의 토지를 경작하고 지대를 납부할 뿐 아니라  
주 3일 이상 지주의 직영지에서 부역으로 노동을 제공해야 했다.  

국가는 그들로부터 인두세를 걷고 병역의무를 부과했지만 그 대가로 어떤 보호도 제공하지 않았다.   
지주는 재판 없이 그들에게 체형을 가할 수 있었으며 매매할 수도 있었다.   
농민들은 농노에 비해 다소 덜 예속적이었지만, 그 궁핍한 삶은 농노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것은 상상 속의 지옥 풍경이 아니고 노예가 콜로세움에서 사자와 싸우던 글래디에이터 시대의 이야기도 아니다.   
불과 150년 전의 러시아 사회는 그런 곳이었다.  

그뿐이랴. 갓 불붙은 산업혁명으로 노동자계급이 탄생하면서 지옥은 농촌에서 도시로 확산된다.   
초기 자본주의 시절, 서로 먹고 먹히는 자본 간의 처절한 전쟁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던 그때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본이 노동자의 육신과 영혼을 

깡그리 망가뜨리는 데에 아무런 제약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런 러시아 사회의 정점에는 무능하며 폭압적인 로마노프 황실과  
한줌도 안 되는 귀족들의 화려한 삶이 놓여 있었다.   
이런 세상을 점진적으로 바꾸어 보고자 했던, '브나로드 운동'처럼  
평화적이고 낭만적인 시도는 무참히 좌절되었다.   
우리 앞에 그런 상황이 놓이게 된다면 이제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들처럼 그들의 혁명에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9세기 러시아 사회를 살아가는 각계각층 사람들의 일상이 

카키색 톤으로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장르화 (풍속화)의 대가 바실리 페로프의 걸작들이 

트레차코프 갤러리 Room 17을 가득 매우고 있다. 

 

Troika. Apprentices fetch water (also known as Children Carrying Water). 1866.  
by Vasily Grigorevich Perov. Oil on canvas. 123.5cm x 167.5cm. ​Tretyakov Gallery Room 17. 

바실리 페로프의 작품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유명하고 빈번하게 언급되는 작품이 바로 
<트로이카, 물을 나르는 견습생들 (Troika Apprentices Carrying Water. 1866)>이다.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고 세상이 꽁꽁 얼어붙은 겨울밤, 행복한 사람이라면  
아무도 길에 나와 있지 않을 그 시간에 이를 악물고 물을 길어 나르는 어린 도제들의 모습이다. 

페로프는 당시의 부조리한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풍자하여 그린 대표적 화가이다.  
그의 유명한 그림 ‘트로이카'에서는 세 명의 어린 아이들이 눈보라가 치고 얼어 있는 길을  
아주 커다란 수레를 끌고 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당시의 비참하던 아이들의 생활과 처지를 그림으로서 어른들의 횡포와 무자비함을 고발하고 있다.  
3을 뜻하는 ‘트로이카' 라는 말은 황제의 마차를 끄는 말을 지칭하기도 하는데  
그와 대비되어 아이들의 모습은 더욱 더 서글프게 느껴진다. 

추운 겨울날 말이 대신해야 할 수레끌기를 열 살 남짓 어려 보이는 아이들이 하고 있다.  
핏기 없는 얼굴에 피곤에 찌든 아이들, 삶에 지쳐 보이는 아이들의 얼굴에서  
참혹했던 당시 러시아 현실을 읽어 낼 수 있다.  
이 그림은 당시 러시아 현실을 담아 낸 민중화, 풍속화 중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힌다.

 

 

트로이카, 물을 나르는 견습생들 (Troika. Apprentices fetch water) - detail (부분) 

칼바람에 건물 지붕의 눈가루가 모래처럼 휘날리고,  
넘쳐흐른 물은 이내 수레에 얼어붙어 고드름을 만들었다.  
이런 길이라면 튼실한 말들이 삼두마차를 끌고 지나가더라도 안쓰러울 법하다.  
맨 왼쪽의 작은 아이는 오르막을 넘어서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튿어진 모자, 그리고 얻어 입은 어른 코트의 소매 안으로 주먹 쥔 고사리 손.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트로이카, 물을 나르는 견습생들 (Troika. Apprentices fetch water) - detail (부분) 

가운데 녀석은 셋 중 제일 덩치가 크지만 아직 이 빠진 구멍이 숭숭한 어린아이다.  
길이 아직 많이 남은 것일까, 수레의 무게와 추위에 그는 혼이 거의 빠져버린 것 같다.  
오른쪽 계집아이는 오히려 처연한 표정이다.  
발에 맞지 않아 덜그럭 거리는 구두의 끈은 풀어져 있고,  
실제 그림을 보면 그러쥔 조그만 주먹에는 핏줄과 힘줄이 솟아 있다. 

세상은 저 어린 것에게 낡은 장갑 하나 건네줄 여유가 없다.  
헌 외투 사이로 드러난 분홍치마. 아이가 저 옷을 처음 가졌을 때, 저 꽃무늬를 보고 기뻐하지 않았을까.  
꽃분홍 치마는 그가 현실에서 가 닿을 수 없는 행복의 신기루 같다.  
세 아이의 뒤에는 비슷한 운명의 소년 하나가 온힘을 다해 수레를 밀고 있다. 

 

트로이카, 물을 나르는 견습생들 (Troika. Apprentices fetch water) - detail (부분) 

그들과 함께 하는 건 오직 앞장서서 뛰어가는 개 한 마리뿐이다.  
힘차게 뛰어가는 털북숭이 개.  
뜬금없는 이야기 같지만 그 모습에 화가 페로프가 자꾸 겹쳐 보인다.  
민초들의 고난을 자신의 일처럼 아파한 바실리 페로프.  
털북숭이가 날카롭게 드러난 이빨은 냉혹한 세상에 대한 그의 분노이며,  
힘찬 뜀박질은 어떻게든 이겨나가야 한다고 아이들을 독려하는 그의 애틋한 마음이 아닐까.  
안타까움이 가득한 털북숭이의 눈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도록에서는 잘려버렸지만, 그림 왼쪽 끝에는 건물의 창이 그려져 있다.  
유리를 통해 비치는, 따뜻하지만 온기 한 점을 나눌 수 없는 촛불은  
오히려 아이들을 더 큰 절망에 빠트릴 것이다.  
세상은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수레 뒤쪽 어둠 속의 사내도 추위에 몸을 웅크린 채 종종 걸음으로 제 길을 가고 있다.

 

Portrait of Writer Fedor Dostoyevsky. 도스토예프스키. 1872. by Vasily Grigorevich Perov. 
oil on canvas. 94 x 80.5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바실리 페로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화로 유명하다.   
페로프는 개인적으로 19세기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함께   
러시아 민중을 대표하는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를 무척 존경했다.   
인간과 인간의 세계를 그려내고, 사실주의에 자부심을 가졌던 작가와 화가는 서로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페로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나오는 주제와 유사한 현실을 표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페로프의 초상화는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빛을 비춤으로서   
미묘한 음영을 만들어 인간의 내면까지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페로프는 기민한 관찰력으로 대상을 포착해 내면 심리를 화폭에 담아 냈다.  
하나의 초상화 속에 인물의 성격을 포착한 페로프의 묘사로  
19세기 러시아 미술은 한층 리얼리즘의 가치를 더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은 말년에 이르러 추락했다고 한다. 페로프는 1882년 결핵으로 사망했다.   

정부의 탄압에 저항하고 민중들에게 진정성을 가르쳤던 예술가들은 
1917년 소련의 출발과 함께 모두 사라졌다.   
정치가들과 볼셰비키 정부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더 이상 '사실적'인 그림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부의 정치 이상을 지지하는 작품들만을 원했다. 무서운 세상이 되었다.   
전제 정치 하에 점차 독창적인 예술이 사라지고 국가 조직으로부터의 압력은 점점 강화되었다.   
정부에 대항하면 즉각적으로 강력한 처벌이 내려졌고, 그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소련 정부는 문화정책에 반대하는 예술가들을 출판, 전시, 공연 활동을 할 수 없도록 고립시켰고,  
이를 어긴 예술가들은 강제노동수용소에 구류, 감금시켰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은 다시는 그곳에서 되돌아오지 못했다.  
이 시기에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1930년 천재시인이라 칭송 받던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의 자살 사건이다.   
마야코프스키는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성향을 가진 예술가였다.  
물론 스스로 열렬한 혁명가이기도 했다. 그의 삶은 삶은 정말 인간적이고 처절했다.  
마야코프스키는 청춘을 불사르며 혁명을 위해 헌신했다.   
하지만 3번의 구속까지 거치며 혁명을 향해 달려온 시인에게  
막 눈앞에 시작된 관료주의는 참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철저하게 관습을 거부했던 그의 눈에 이런 현실은 배반당한 혁명으로 비쳐졌다.   
게다가 그는 끊임없는 검열과 감시 속에서 거대한 정치적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그는 비열하고 남루한 현실에 절망,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아 자살한다.  
더욱 끔찍스러운 일은 1937~53년 소련 정부가 수백 명에 달하는 뛰어난 예술가들과   
그들을 지지하던 수백만 명의 시민들을  문화영역에 미친 이같은 정부의 강압정책의 결과   
1930년대에서부터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할 때까지 소련에서 창작된 예술작품의 대부분은   
소련인들의 표현을 빌리면 '책상서랍' 속에 쌓아두기 위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 이 작품들은 출판이나 전시, 공연활동을 위해 결코 제출되지 않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어떤 경우에는 1980년대말까지 숨겨져 왔다.  
하지만 40대에 접어들며 페로프의 그림은 상당히 변화한다.  

미술사가들은 종종 그것을 ‘성숙’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숙'이란, 그 의미가 매우 주관적인 단어가 아닐지.   
어쨌거나 ‘성숙’해 가는 페로프의 작품 세계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그 소재가 매우 다양해졌다는 점이다.   
반면 그의 초기작들이 하나같이 품고 있던, 

심장에 사정없이 날아와 꽂히던 그 서슬 퍼런 비수는 찾을 수 없었다.  

그의 대표작들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1872)>은   
페로프가 40대에 들어서기 직전 그린 작품이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소개할 때면 어김없이 인용되는 이 그림도   
페로프의 ‘성숙’한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되곤 한다.   
그림 속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아주 금욕적인 구도자 같은 모습으로 생각에 잠겨 있다.   
어떤 평자는 이 그림이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기술한 수천 편의 논문보다도   
더 함축적으로 그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감탄한다.  

그쯤에서 나는 좀 혼란스럽다.   
만약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림에 나타난 것처럼 강고한 신념과 지혜를 가진 구도자였다면,   
이 초상은 대단한 걸작으로 이야기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잘 알려진대로 금치산자에 가까운 낭비벽과 도박으로  
평생 가난의 구렁텅이를 벗어나지 못하였던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닌가.  

돈 몇 푼을 빌리기 위해 주변사람들에게 아첨과 자학으로 가득한 비굴한 편지를 보내고,   
그렇게 빌린 돈을 또다시 허망하게 탕진해버렸던 그가 아닌가.   
그가 온갖 남루한 인생들의 심리를 탁월하게 기술한 기념비적 소설들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허점투성이인 그의 삶은 구도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좀 멀다. 

이 초상화는 1872년 유명한 미술품 수집가 파벨 미하일로비치 트레티야코프(1832~1898)의 요청으로  
바실리 페로프가 그린 것인데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적인 초상화라고 할 수 있다. 
트레티야코프는 당시 유명 문인들의 모습을 당대 최고의 화가들에게 부탁해 그리도록 했다.  
이 그림은 도스토옙스키가 유럽에서 귀국한 그해인 1871년 말에 시작돼 이듬해 완성됐다.  
도스토옙스키가 귀국해 보니 <백치>, <악령>등의 성공으로 그의 명성이  
트레티야코프가 초상화를 부탁할 정도로 높아져 있었던 것이다.  

짙은 그린색 두터운 재킷 차림의 수수한 그의 복장은  
당시 넉넉지 않았던 그의 경제 상황을 짐작케 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초상화에 대해서 안나는 회고록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에 이렇게 기록했다.   
  
  "그해(1871년) 겨울에는 모스크바의 유명한 미술품 수집가이자 미술관 소유주인  
트레티야코프가 남편에게 미술관에 소장할 그의 초상화를 그리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를 위해 유명한 화가인 페로프가 모스크바에서 왔고,  
작업을 시작하기 전 일주일 간 그는 매일 우리를 찾아왔다.  
페로프는 그야말로 다양한 정서 상태의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논쟁을 유도하면서 남편의 얼굴에서 가장 특징적인 표정을 포착해 냈다.  
그것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가 예술적 사고에 몰입해 있을 때의 표정이었다.  
페로프는 ‘도스토에프스키의 창작 순간’을 초상화에 붙박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표도르 미하일로비치의 서재에 들어갔다가 그의 얼굴에 그런 표정이 떠오른 것을 여러번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그가 마치 ‘자기 마음 속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 같을 때는 

아무 말 없이 서재를 빠져나오곤 했다.  
나중에 이야기하다 보면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는 자기 생각에 완전히 빠져서  
내가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고, 내가 자기 방에 다녀갔다는 것도 믿지 않았다. 
페로프는 똑똑하고 친절한 사람이어서 남편은 그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그가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면 언제나 그 자리에 참석했다.  
페로프에 관해서는 정말 좋은 추억을 갖고 있다." 

페로프가 도스토옙스키의 초상화를 완성한 것은 1872년 5월이었다. 다섯달이나 걸린 것이다.  
이 초상화에 대해 트레티야코프가 페로프에게 준 사례비는 6백 루블이었다.

 

Christ in the Garden at Gethsemane. 겟세마네 동산의 그리스도. 1879. by Vasily Perov. 
tempera on canvas. 151.5 X 238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제자들이 잠든 사이 예수는 땅에 엎드려 기도한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화폭 속은 지금 깊고 푸른 밤이다. 페로프에게서는 일찍이 엿볼 수 없었던 특이한 암록색.  
그 두꺼운 어둠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비장하게 엎드려 있다.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끝내고 이곳에 오른 그는 곧이어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잘 알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림에서 건너오는 서늘한 기운. 커다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어둡고 푸른빛 탓일 수도 있다.  
혹은 필생의 사건을 앞둔 예수의 고뇌가 그만큼 처절한 탓일지도 모른다.  
멀리 보이는 마을의 불빛은 누구와도 이 두려운 짐을 나눌 수 없는 예수의 고독을 더 사무치게 드러낸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많은 의문들이 꼬리를 잇는다. 페로프는 무슨 생각으로 이 그림을 그렸을까.  
젊은 시절의 대표작 <트로이카>와 이 그림은 어떤 맥락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혹시 '성숙'한 페로프는 많은 이들이 나이가 들며 그랬듯이  
세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덧없이 여기고 종교의 세계로 침잠해 갔던 것일까. 

페로프의 작품세계에서 이 그림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건 간에,  
보는 이의 가슴을 단숨에 꿰뚫고 지나가는 힘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 흥미로운 건, 니콜라이 게(1831~94)가 내놓은 예수 연작들과의 유사성이다.   

19세기 러시아 풍속화가들의 작품은 시대를 대변하는 대변인이요, 현실을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이 시기 그림을 보며 당시 러시아가 얼마나 피폐하고 궁핍하며 아파했는지를 가늠 할 수 있다.  
그런 러시아의 시대상을 걱정하는 작가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았다.  
겟세마네 동산에 쓰러져 절규하는 예수의 모슴을 통해 아픈 러시아의 치유을 작가는 바라고 있다.  
예수의 머리 위로 떠있는 가시 면류관이 현실의 고통을 상징하는 듯 해서 참으로 가슴 저린 그림이다.

 

Nikita Pustosviat. Dispute on the Confession of Faith. 니키타 푸스토스비아트, 신앙에 관한 논쟁 
1880 - 1881.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512 x 337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니키타 푸스토스비아트, 신앙에 관한 논쟁>은 페로프 이야기에서 대단원을 장식할만한 작품이다.  
이는 페로프가 49세로 세상을 뜨기 한 해전에 완성한 대작이다.    
화사한 색채로 가득한 화면. 페로프가 집착하던 카키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이다.   
게다가 그려진 내용은 생뚱맞게도 17세기 러시아 정교회의 내분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이에 대해서는 약간의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988년 비잔틴으로부터 러시아로 전래된 동방정교는   
몽골의 지배기(1240~1480)에 급성장하여 부와 세속적 권력까지 틀어쥐게 된다.   
그러나 한때 차르와 맞설 정도의 위세를 떨치던 러시아 정교회는 16세기 초 그 세속화에 대한   
내부적 비판이 터져 나오며 소유파-무소유파의 충돌이라는 내홍에 직면한다.  

소르스키를 중심으로 한 ‘무소유파’ 수도자들은,   
교회는 국가와 분립하여 과다한 토지를 포기하고 원래의 청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당시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권력과 연대한 소유파들이었다.   
이들은 무력으로 무소유파들을 축출하여 추방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이러한 교회의 분열에 따라 그 세속적 힘은 이미 현저히 약화되고 있었다.      

러시아정교회가 더 결정적으로 분열함으로써 교회의 수장인 총대주교(Patriarch, 가톨릭의 교황에 해당함)가   
차르의 신하로 완전히 종속되는 계기는 17세기 전례 개혁을 둘러싼 개혁-분리파의 분열(‘라스콜 Раскол’)이었다.   
정교회는 갖가지 화려한 비잔틴 문화와 함께 러시아에 도입되었지만, 수백 년이 지나면서 점차 토착화한다.   
이에 따라 종교예식의 세부적 내용에 있어서 원래의 비잔틴 양식과 상이한 점이 하나둘 나타나게 된다.  
이는 모든 외래종교의 전래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가톨릭이 조선에 전래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와 달리 러시아의 전례개혁은 비극적인 양상으로 전개된다.  

1654년 당시 러시아정교의 수장은 총대주교 니콘(니키타 미노프, 1605~1681)이었다.   
그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에 빠져 있는 러시아 교회를 개혁한다는 명분으로   
기도서와 예배의식을 비잔틴 본래의 양식으로 되돌리겠다고 선언하고 주교회의의 승인을 받는다.   
표면상 이는 단순한 전례형식의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적지 않은 신자들은 이러한 조치가 사실은 신앙의 본질과 무관하며,   
‘개혁파’들이 교회 조직을 장악하기 위해 꾸미는 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많은 고위 성직자와 수백만의 신도들이 이에 대해 강하게 저항한다.   
그들은 온갖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 토착화한 전례의 전통을 고집하게 된다.  

이들이 바로 ‘라스콜니키 파’ 즉 ‘분리파’ 또는 '구교도'이다.   
로마노프 왕조의 두 번째 차르 알렉세이 (재위 1645~76)는 이 대목에서 개혁파의 손을 들어주었고,   
분리파는 차르에게도 맞서다가 무려 80년 간 갖은 고난을 겪는다.   
분리파의 수장인 수좌대주교 아바쿰 페트로비치(1621~82)가 화형 당하고,   
수많은 신도들이 분신으로 이에 저항하는 처참한 사건도 발생한다.  

이러한 비극의 원인이 되었던 전례의 차이란 실상 매우 사소해 보이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성호를 긋는 손가락의 수였는데, 비잔틴의 원래 방식은   
손가락 3개를 사용하였으나 러시아에서는 2개로 토착화함으로써 문제가 된 것이다.  
이는 Room 28에 전시되어 있는 19세기 역사화의 대가 바실리 수리코프의 작품  
<대귀족 모로조바(1887)>에 잘 나타나 있다.  

바실리 수리코프의 그림은 분리파의 거물이었던 대귀족 모로조바가 어느 겨울날 먼 귀양길을 떠나는 장면이다.  
사슬에 묶인 채 짚으로 바닥을 깐 초라한 썰매에 몸을 맡긴 모로조바의 깡마르고 창백한 얼굴.  
그는 오른손을 들어 두 개의 손가락을 허공에 내지르며 저항의 몸짓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화면 우측에는 분리파들이 안타깝고 슬픈 얼굴로 그를 배웅하고 있고,  
뒤쪽으로는 개혁파들이 유쾌한 얼굴로 패배자를 조롱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 대립의 패배자는 분리파뿐이었을까.  
니콘은 러시아정교회를 과도한 민족주의로부터 구하고  
교회의 일체성을 강화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투쟁의 과정에서 파문한 수많은 인재들을 상실함으로써 교회의 역량을 현저히 약화시키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우위의 환상을 버리지 못한 니콘은  
차르 알렉세이와 대립하다가 1667년 주교회의에서 파면되고  
수도원에 유폐되어, 1681년 아바쿰보다 오히려 한 해 먼저 세상을 마감하게 된다. 

그 후 18세기 표트르 대제가 실행한 사회전반의 개혁에서 교회는 공식적으로  
국가의 한 기관으로 전락하고 정교회의 수장은 차르의 신하로 완전히 복속하게 된다.  
이처럼 러시아 정교회는 두 번에 걸친 내부분열을 거치면서  
그 화려했던 권력을 세속 군주에게 반납하고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니키타 푸스토스비아트, 신앙에 관한 논쟁, Detail (부분 1) 

아수라장이 된 분리파 진영. 왼쪽 위 흰수염의 사나이가 니키타이다.  
오른쪽 붉은 망토의 병사가 바로 '스트렐치' 부대원이다.  
왼손에는 머스켓 소총을, 오른손에는 도끼의 일종인 '바디쉬'를 들고 있다.

 

니키타 푸스토스비아트, 신앙에 관한 논쟁, Detail (부분 2) 

헤게모니를 쥔 자들의 냉랭한 여유, 오른쪽 흰수염이 개혁파의 수장 총대주교 요아킴.   
페로프의 그림은 이러한 개혁파-분리파의 대립이 극점에 있었을 때  
차르의 궁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주연은 분리파 구교도 사제 니키타 푸스토스뱌트(? ~ 1683)이며,  
조연은 총대주교 요아킴과 소피아 공주이다.  
요아킴은 개혁파의 수장이었고, 소피아는 공동 차르를 맡은 어린 동생들 위에서  
수렴청정을 하며 사실상 러시아를 통치하고 있었다(재위 1682~9). 

수즈달의 사제 니키타는 당시 구교도 측의 리더 중 한 명이었다.  
반대파들은 그에게 '헛일 하는자'란 의미의 '푸스토뱌트(Пустосвят)'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는 1659년 수즈달의 대주교인 스테판을 이단으로 고발하였으며,  
그의 무죄가 선고되자 다시 차르 알렉세이에게 고발하였다. 

대세는 개혁파 쪽으로 이미 기울어 버렸지만, 1682년 구교도들은 한 가닥 희망을 갖게 된다.  
차르의 근위대 역할 맡았던 머스켓 소총부대 ‘스트렐치’ 의 지지를 얻었던 것이다.  
스트렐치는 소피아를 위해 세 차례나 쿠데타를 일으킨 적이 있는, 그녀의 핵심적 권력 기반이었다. 

이들의 지지에 힘입어 니키타 푸스토뱌트는 그해 7월 5일 차르 소피아의 면전에서  
개혁파들과 최후의 일전을 벌일 기회를 얻게 된다.  
페로프의 그림은 바로 그 장면을 그린 것이다. 

러시아 정교회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도 이 그림을 보면  
그 승부가 어떻게 되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우선 우측의 수염 덥수룩한 무리들은 전통을 고집하는 분리파 구교도들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좌측의 세련된 귀족풍 인사들은 총대주교 요아킴과 개혁파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수렴청정의 억센 통치자 소피아가 서 있다.  
그녀와 개혁파 인사들이 한통속으로 냉랭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는 것만 보아도  
니키타의 상황이 절망적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분에 못 이겨 돌진하며 몸싸움을 하느라 니키타의 웃옷이 반쯤 벗겨져 있다. 

발밑에 어지러이 펼쳐진 책, 그리고 나동그라진 그릇과 사람들.  
분리파 진영은 수라장이 되어있다.  
니키타가 의지할 것이라고는 손에 쥔 십자가와 등 뒤의 이콘 밖에 없다.  
당신들, 하늘이 무섭지 않은가 라고 외쳐보지만, 하늘은 늘 멀리 있다. 

 

△ 바실리 페로프 <신앙에 관한 논쟁 중 소피아 (부분)> △ 일리야 레핀 <공주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부분)>

소피아의 냉랭하면서도 카리스마 있는 표정은 이태 전에 그려진  
일리야 레핀의 <공주 소피아 알렉세예브나(1879)>를 연상케 한다.  
그녀의 권력기반인 스트렐치는 니키타를 배신하고 입장을 바꾸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개혁파의 손을 들어준다.  
가련한 니키타는 다음날 처형되고 만다.     

크기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범상찮은 이 그림은 왜 페로프의 대표작으로 도록에 소개되지 않았을까.  
비록 <겟세마네 동산의 그리스도>나 이 그림이나 종교적 소재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고통 받고 억압 받는 자에 대한 연민’이란 코드로 작가의 시선을 이해한다면  
젊은 시절로부터 시종일관한 주제의 연장선상에 있다고도 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페로프는 모교인 모스크바 예술학교의 교수가 되어  
네스트로프, 코로빈 같은 뛰어난 제자들을 길러내기도 했다.  
그리고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아직 오십이 되지 못한 나이였다. 

 

The Funeral Procession / Last Journey, 1865. 마지막 여정.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57 x 45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Funeral Procession / Last Journey 마지막 여정>   
도록에 따라서는 <Following a Dead Man> 또는 <Bidding Farewell to the Dead Man>로도 번역되어 있다.   
앞에서 소개한 걸작 <Troika Apprentices Carrying Water>의 왼쪽 아랫부분에 걸려 있는 이 그림은   
크기도 작을 뿐 아니라 전혀 아름답다고도 할 수 없는 을씨년스런 작품이다.  

그러나 이는 트레차코프 갤러리에 걸린 어떤 화려하고 거대한 그림들에도 뒤지지 않을  
강력한 인상을 우리에게 남겨준다.   
화폭에 담긴 것은 겨울 눈길을 헤치고 가장의 시신을 운구하는 한 가족의 절망적 모습이다.  
고개를 숙이고 웅크린 채 썰매를 끄는 여인의 막막한 등,   
마른 풀을 깔고 누운 사내아이는 잠든 것이 아니라 신열에 들떠 눈을 뒤집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부서질 듯 엉성한 관을 꽉 부여잡고 있는 딸아이는 제법 눈을 부릅뜨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넋 나간 표정이긴 마찬가지이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눈길은 아주 춥고 멀 것만 같다.  

봄이 올 때까지 그들이 살아 남을 수 있을까.   
페로프의 전매특허인 카키색조는 이 작품에서 아주 극단적으로 누렇게 떠 있어 황폐한 느낌을 더 해준다.   
이 그림은 무심히 지나가던 사람의 발길을 한동안 묶어놓는다.  
그리고 그림이란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무언가 진심으로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은 기분에 빠지게 만든다.   
하지만 결국 아무런 말을 붙일 수가 없다. 그것이 이 조그만 그림에 담긴 페로프의 힘이다.

 

The Last Tavern at the City Gates. 1868. 마을 입구의 마지막 주점.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66 x 51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트로이카의 우측에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것이

<마을 입구의 마지막 주점 (The Last Tavern by the City Gates)>이다.  
도록마다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작품이지만 생각보다 크기가 아주 작은 소품이다.  
이 조그만 그림으로부터 사람들은 무얼 찾아 내었을까.  
도시 관문에 인접해 있는 작은 여관, 먼 길을 왔거나 떠날 사람들은 

따뜻한 불빛이 비치는 창안에서 휴식하고 있다. 

그 안에 들지 못한 소녀는 어둠 속에서 추위에 떨고 있다.  
밤이 시작되는 것인지 새벽의 미명인지 화면은 전체적으로 어둡지만 

그 속의 디테일은 하나하나 살아 있다.  
얼어붙은 먼 길을 다시 떠나야할 말은 눈 위에서도 건초를 씹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혹독하더라도 이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아야 한다는 뜻인 건지.  
눈길에는 역시 개 한 마리, 그리고 하늘에는 차가운 새 몇 마리.  
이 시기 페로프의 대표작들에는 어김없이 먼 하늘을 날고 있는 새들이 등장한다.    
페로프의 매서운 새들은 무슨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일까. 

화려하지도 크지도 않은 이 작품을 어떻게 사람들이 주목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후세의 사람들이야 페로프의 주요 작품으로 소개되니 곰곰이 뜯어보게 되는 것일 테지만,  
이 그림의 핵심은 아마도 어둠 속 소녀가 아닐까 싶다.

 

마을 입구의 마지막 주점 (The Last Tavern by the City Gates) - detail (부분) 

이발소 그림을 연상할 정도로 어수룩해 보이는 이 작품을  
빛나는 걸작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은 바로 이 소녀라 생각된다.  
계집아이는 추위에 웅크린 채 불안과 천진함이 담긴 눈빛으로 돌아보고 있다.  
눈밭에 나앉은 어린 것의 그 눈빛과 마주친다면

아무리 가슴 두꺼운 당신이라도 그만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페로프가 전하고자 했던 모든 생각들이 아무 설명할 필요 없이 온몸으로 젖어든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다.

 

A Drowned Woman (also known as Found Drowned). 익사한 여자. 1867. oil on canvas. 68 X 108 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n Federation 

익사한 채로 발견 된 여인의 시신을 앞에 놓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형사의 모습이다.  
멀리 바라보이는 큐폴라들과 강위를 떠가는 큼직한 배를 볼 때 무대는 필경 모스크바이다.  
페테르부르크의 스카이라인은 모스크바의 그것과 확연한 차이가 있어 어렵지 않게 구별된다. 

강에서 건져낸 여자는 밀랍 같은 얼굴로 누워 있고, 관리 하나가 그 곁에 앉아 담배를 피운다.  
왜 죽은 것일까. 혹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인지, 그림만 보아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채 감지 못한 그녀의 눈으로 미루어 한이 많은 죽음이란 느낌은 분명하다. 

시체 옆에서 태연히 담배를 물고 있는 관리의 무심한 얼굴은 또 무엇인가.  
이제 이골이 난 타인의 불상사 같은 건 자신의 삶과 무관하다는 의미일까.  
또는 그치지 않는 불행들에 그도 덤덤해져 버린 것일까.  
주검의 냄새를 맡은 까마귀들이 접근하고 있다.

한 마리는 머리맡을 어슬렁거리며 시신을 넘본다. 

병든 러시아에 바싹 다가선 재앙의 예고편처럼 

그녀의 다리와 손을 휘감고 있는 건 아마도 물풀인 것 같다.  
경직되어가는 여자의 시신에 작가가 감아놓은 부드러운 물풀의 줄기와 꽃.  
페로프의 전형적인 황색 색조만으로도 이미 더할 나위 없이 황량한 느낌을 주는 화면에서  
그나마 위로 받을 대상이라고는 그것들 밖에 없다. 

 

<익사한 여자 (1867)> detail (부분) 

화면상 잘 보이지 않지만,  왼쪽의 동그란 물체 둘은 물풀(?)의 꽃이고 손가락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다. 
그녀의 오른손에 남은 반지는 한때 지상에서 그녀가 꾸었던 꿈의 흔적이리라.   
19세기 러시아의 참혹한 현실을 고발한 비판적 리얼리즘 회화의 기수 바실리 페로프.   
격동의 1860년대는 갓 삼십대에 접어든 그가 슬픈 러시아의 현실과 고통스럽게 교감한 시기이다.  
그리고 그로 인한 분노를 에두르지 않고 우리의 눈앞에 그대로 들이민 시절이다. 

이들 그림에서 우리는, 그래 세상이 이래도 정말 괜찮은 거냐고 외치는 그의 절규를 듣는다.  
얼어붙은 땅에 가장의 시신을 묻으러 가는 초라한 장례행렬,  
그리고 살을 에는 추위 속에 자기 덩치보다 훨씬 큰 물수레를 끌어야 하는 어린 것들의 모습.  
이 정도라면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절망적인 상황이 아닐까. 
절망의 깊이 만큼 분노하고 분노한 만큼 내지르는, 삼십대는 그런 시기인 것이다.  
크람스코이 등 주류 미술에 반기를 든 일단의 진보적 화가들이 1871년 ‘이동파’를 발족하였을 때  
페로프가 창립 멤버로 참여한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The bird-catcher. 새 사냥꾼. 1870.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7. 

바실리 페로프가 흥미를 가진 또 다른 소재는 '사냥하는 사람들'이다.   
페로프 자신의 말에 의하면 <새 사냥꾼(1870)>, <휴식 중인 사냥꾼들(1871)>, <낚시꾼(1871)>에서   
그는 “자연과 하나가 되고 세속적 행복에 취한" 젠틀하고 유머러스한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림들을 보면 그는 앞서 Room 15에서 살펴본 파벨 페도토프 (Pavel Fedotov 1815~52)를 계승하여   
해학적 풍속화의 영역으로 들어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The Hunters at Rest. 1870. 휴식 중인 사냥꾼들.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119 X 183cm. Tretyakov Gallery Room 17.

 

낚시꾼 The Angler. 1871.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7. 

Room 15에서 살펴본 파벨 페도토프 (Pavel Fedotov)의 <새 수훈자 - 첫 훈장을 받고난 아침의 관리>  
<불청객, 아침을 먹고 있는 귀족>을 페로프의 '사냥꾼과 낚시꾼 시리즈'와 섞어 놓으면   
처음 보는 사람은 같은 화가의 그림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후자에는 바실리 페로프의 전매특허인 카키색조가 좀 더 진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림의 분위기나 묘사가 아주 비슷하다.

 

The Sermon in a Village. 마을에서의 설교. 1861.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7. 
  
이 작품을 얼핏 보면 주일을 맞아 시골마을 교회에 모여 앉은 부자와 빈자가  
사제의 설교를 오순도순, 그러나 좀 따분하게 듣고 있는 광경이다.   
하지만 이 그림의 메시지를 이해하려면 뒤쪽 어둠 속에서  
완전히 따로 놀고 있는 군중들의 모습에 주목해야한다. 

 

The Sermon in a Village. 마을에서의 설교. Detail (부분) 

그들은 설교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화면 제일 오른쪽의 서류를 든 사내가 하는 말에 온통 정신을 빼앗겨 있다.   
그는 마을 학교의 교사쯤 될 것이고, 그가 들고 있는 종이에 쓰여 있는 것은   
아마도 농노해방을 알리는 차르의 칙령일 것이다.   
당시 러시아 방방곡곡에서는 해방령 칙서가 주로 교회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알려졌다고 한다.  

반노예나 다름없던 오랜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소식이건만 군중들은 아무도 기뻐하지 않는다.   
그들의 얼굴은 회색 어둠 속에서 여전히 깊은 시름에 잠겨있다.   
그도 그럴 것이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4년의 준비 끝에 단행한  
역사적 농노해방은 매우 불충분한 것이었다.   
노예의 사슬만 끊어준다고 상황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였다.  

해방된 농노들이 농민으로 살아남으려면 경작할 토지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국가는 그들에게 토지를 배분하였다.   
하지만 절반 이상의 땅이 여전히 지주의 손에 남아 있었으므로  
농민들에게 할당된 토지는 매우 부족했다.   
뿐만 아니라 농민들은 토지 대금의 일부를 자신이 직접 부담해야 했다.  

또한 농민공동체의 연대책임이 강화됨으로써 농민은 공동체에 강하게 예속되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 농노들은 해방되었으나 여전히 그 신분이 자유롭지 못했고,   
경제적 부담의 증가로 궁핍이 가속화 되었다.

 

Wanderer(Pilgrim). by Vasily Perov. 1870 Oil on canvas, 54 x 88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프랑스 대혁명 이후 1848년 2월 혁명으로 공화정이 들어설 때까지  
리얼리즘은 부르주아들의 부정적인 면을 고발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비인간적인 부르주아 계급의 모습을 묘사한 리얼리즘을 비판적 리얼리즘이라고 하는데,  
러시아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그리고 나중에 고리끼가지 이어지는 흐름인데  
페로프도 작품 활동을 할 때가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예술가가 눈을 감는 것을  
부도덕하다고 여기는 그런시기였다.    
  
1861년, 27세가 되던 해 페로프는 졸업 작품으로 금메달을 수상한다.  
부상으로는 해외 유학이 주어졌으나 그 해 그가 제작해서 전시한 작품이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부활절의 마을 십자가 행렬’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성직자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전시회에서 철거되고 말았다.  
비판적 사실주의 작품이기 때문이었고 한다.   
당시 페로프의 친구가 남긴 글 중에는  
‘이태리 유학 대신에 솔로베츠키섬으로 유배를 갈지도 모른다’라는 대목이 있다고 한다. 

 

The Organ-Grinder. 1864. by Vasily Perov. Oil on panel,  
25 x 31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떠돌이 음악가의 삶이 참으로 만만치 않다.   
곁에 내려 놓은 것은 등에 지고 다니던 소형 오르간 ‘샤르만카(шарманка)’이다.   
퇴락한 돌담 곁 벤치에 팔을 괴고 앉은 그의 모습은 Savoyard 만큼 남루하지는 않다.   
하지만 표정없이 멍한 생각에 잠긴 그의 얼굴에서는 내일에 대한 작은 희망의 기미마저 찾아볼 수 없다.       
   
2년 동안의 짧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페로프는 곧바로 그의 대표적 걸작들을 그려 나간다.   
그의 사회비판 정신은 이무렵 절정에 이른 듯하다.   
그림에서는 거친 세상을 헤쳐 나가기가 힘겨운 가련한 자들에 대한 연민과  
아울러 그들을 그렇게 만든 세상에 대한 분노가 느껴진다.

 

The  Organ-Grinder in Paris. 파리 거리의 악사. 1864.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56 x 76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다음 해 독일의 몇 개 도시를 거쳐 파리로 유학을 간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서유럽 거리의 풍경은 이 때 그려진 것이다.   
파리에서의 유학 생활에 대해 그 자신은 ‘그림을 그리는 기술에서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라고 했지만   
실제로 뚜렷하게 남긴 것은 없다고 한다.

 

Savoyard Boy. 1863. 거리의 아이.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32 x 41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짧은 파리 시절 그가 남긴 작품들인 거리의 아이(Savoyard Boy)  
그리고 <파리 거리의 악사(Organ-Grinder in Paris)>를 보자.   
Savoy는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에 걸쳐 있는 지역으로서 휴양지로 유명하다.   
‘Savoyard’를 직역하면 ‘사보이 사람’이지만, 그곳에 거지가 많았는지 19세기 유럽에서는   
거리의 거지아이들을 ‘Savoyard’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림에서 길가 돌 위에 주저앉은 아이는 곤한 잠에 빠져 있다.   
남루한 행색. 비정상적으로 커 보이는 얼굴에 담겨 있는 고단함은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아서, 정말 ‘아이’가 맞는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시골의 부활절 행진-Easter Procession in the Country. 1861,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71.5cm x 89cm. Tretyakov Gallery Room 17. 

바실리 페로프 역시 19세기 유명한 사실주의 화가이자 초상화가이다.   
그는 <도스도예프스키의 초상화>로 유명한데 페로프의 작품은 대부분  
강한 사회적 의미가 담겨있으며, 당시 러시아 회화 역사에서 중요한 랜드마크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현실과 사건을 들여다보는 냉정한 리얼리즘의 시선으로 고고하고 가식적인 주제가 아닌   
평범한 삶의 세속성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했다.   
보이는대로 과장없는 색감이 무채색에 가까울 정도로 삭막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페로프는 1834년 유형에 처해진 급진 귀족의 서자로 태어났다.   
검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화가가 되는 것에 적극적이었고,   
아버지의 후원으로 1854~1861년까지 모스크바 예술 학교에서 회화, 조각, 건축등을 공부한다.  

평범하게 보이지만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현실의 어두움을 직시한 페로프는  
성직자의 타락을 폭로한 <시골의 부활절 행진>을 비롯하여  
통렬한 풍자와 사회적 항의를 담은 그림을 그렸다.  
당시 <시골의 부활절 행진>은 그 풍자로 인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고,   
1862년부터 2년 동안 유럽 체류 후의 일련의 작품 <트로이카>, <들판의 환송> 등에도  
사회적 항의의 자세가 역력하다.   
크람스코이와 레핀 등 젊은 미술가 그룹이 '이동파'를 결성했을 때,  
선배 화가로서 그는 그들과 함께 행동하기도 했다.    

먼저 <시골의 부활절 행진 Easter Procession in the Country(1861)>을 보자.   
부활절을 맞아 시골교회의 문을 나선 사람들은  
십자가와 깃발을 앞세우고 성가를 부르며 행진하기 시작한다.   
그림이 그려진 1861년은 러시아 역사상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인 농노해방령이 내려진 해이다.  

게다가 이날은 또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쯤 되면 그림 속의 사람들은 새로운 기대와 환희에 들뜬 표정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모습은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다.   
깃발과 십자가를 든 사내, 그리고 이콘을 가슴에 안은 여인은 아무런 표정이 없다.  

교회문 앞 좌우로는 고주망태가 된 사내 셋이 널브러져 있으며,   
기둥에 몸을 의지한 정교 사제 역시 술에 취해 계단을 잘 내려 설 수 있을지 아슬아슬하다.  
그리고 화면 중앙에는 남루한 사내가 굽은 등을 하고 또 다른 이콘이 그려진듯한 널빤지를 안고 있다.   
만약 오랜 숙원이던 농노해방 조치가 세상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면   
화가는 이런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페로프는 음산한 잿빛 하늘과 눈이 녹아 질척한 시골 흙길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던 미래에 대한 음울한 전망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Tea party in Mytischi near Moscow. 1862.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7. 

<모스크바 근교 므이치시치에서의 다회 (Tea party in Mytischi near Moscow)> 역시 암울한 그림이다.   
값비싼 옷을 입고 차를 마시는 사제.   
그의 혈색 좋고 거대한 몸집에 비해, 적선을 구걸하는 눈먼 거지부자의 행색은 남루하기 이를 데 없다.   
사제의 반들거리는 구두 한 켤레면 이들은 며칠간 배고픔을 잊겠지만,   
거대한 기름덩어리로 타락한 짐승은 인간의 불행에 도통 관심이 없고 시종은 그를 냉정하게 밀어낸다.  

당시 귀족들과 함께 특권지배계급에 속했던 정교회의 사제들은   
이처럼 페로프 초기 그림에서 집중적인 풍자의 대상이 되어 있다.   
귀족들보다는 사제가 아무래도 좀 만만해서일까.   
혹은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사제들의 타락한 영혼이 그만큼 더 가증스러워서일까.   
150년 전 먼 러시아에서 그려진 이 그림 속 비계덩어리들이 그리 낯설지 않음은,   
그 수많은 아바타들을 오늘 이 땅에서도 쉽게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유럽의 화가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바실리 페로프도 세상의 중심이었던 파리로 건너간다.   
하지만 그가 그곳에 머무른 것은 1863~4년의 짧은 기간에 불과했다.   
이 무렵은 파리에서 인상파가 막 태동하던 시기로서, 1863년은 마네가 낙선화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   
<풀밭위의 점심>을 두고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던 기념비적인 해이다.  

대혁명과 그에 뒤이은 두 차례의 혁명을 거치며 시민사회로 이행하는 횃불을  
가장 치열하게 들었던 나라 프랑스. 누구 하나 빠짐없이 사회의식으로 충일하였을 것 같은 그곳에서,   
사회의식을 가장 멀리 하는 예술가 집단인 인상파가 탄생한 것은 흥미로운 아이러니이다.  

이는 19세기 후반 들어 노동조건이 조금씩 개선되고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예술가란 원래가 앞 사람이 해 오던 방식을 좇아 생각하고 살아가기를  
생리적으로 싫어하는 자유로운 영혼들이다.   
먹고살기가 조금 나아지면서 도시를 중심으로 한 근대 시민사회의 새로운 생활양식들이 등장하자   
파리의 화가들은 대번 그쪽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공원과 카페, 나이트클럽의 풍경은 그들의 단골소재였다.   
화가들은 그곳의 무용수와 가수, 여급, 창녀들의 모습을 즐겨 그렸으되,   
그를 통해 무거운 메시지를 전하거나 사회진보 따위를 꾀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을 빼앗은 건 새로운 세상을 비추는 빛과 우연성의 미학이었다.  

그러나 당시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 국가였던 러시아의 사정은 프랑스와 전혀 달랐다.   
1861년 농노해방령이 내려지긴 하였으나 여전히 곤궁한 처지에 있던 농민들,   
그리고 산업혁명의 태동과 함께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 도시노동자들.   
러시아는 여전히 참혹한 환경 속에서 빵과 자유를 갈구하는 존재들로 가득했고,   
프랑스와는 달리 어디서도 희망의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했던 페로프의 눈에,  
빛과 색채에 혼을 빼앗긴 파리 인상파의 그림들이 탐탁하게 느껴졌을 리 만무하다.   
똑같은 대상을 마주하고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  
볼 준비가 되어있는 것만 보게 된다.   
모네와 르느와르, 드가의 현란한 그림들이 태동하고 있는 파리에서도   
페로프의 눈길은 그 사회의 가장 아랫바닥 사람들에게 닿아있었다.

 

Lent Monday (Going to the Bath House). 1866. by Vasily Perov.  

19세기 러시아 민중들의 삶은 비참했다. 짓밟히고, 고통받고, 숨 막히는 삶이었다.   
사회는 부패했고, 비판세력이나 국민에 대한 정부의 탄압은 극에 달했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언론을 장악하고 전 러시아를 향해 광범위한 세뇌정책을 시행했다.    
하지만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략은 러시아인의 민족적 자각을 낳았다.  

이어 1825년 터진 데카브리스트 반란은 이 자각이 사회변혁의 열정으로 표출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러시아 미술은 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진화하고 변모했다.   
19세기 러시아에서 화가들은 예술가이기 이전에 지식인이었다.   
그들에게 그림은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었고 삶을 변혁하는 도구였다.   
‘비판적 리얼리즘’은 러시아 화가들의 창작 규범이었다. 그들은 사회를 비판했고, 정부에 맞섰다.   
그런 예술가 정신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것이 1870년 결성된 ‘이동파’였다.  

이동파의 등장이야말로 근대 러시아 미술을 서유럽 미술과 근본적으로 단절시키는 지점이다.   
여러번 언급했지만, 이동파란 러시아 모든 사람들에게 예술작품을 감상할 기회를 주려고   
여러 도시로 옮겨다니며 전시회를 연다는 취지에서 비롯한 이름이다.   
이동파는 말하자면, 미술계의 브나르도(‘민중 속으로!’) 운동이었다.  

이동파는 정치적, 경제적으로는 후진국이면서도   
정신적으로 이것을 극복하려 했던 지식인들 중심의 민주적 미술 유파였다.   
세계 미술사에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반체제적 성격을 유지한 미술운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동파는 ‘삶의 진실’을 추구한다는 러시아 미술의 전통을 극대화시켰다.

 

Arrival schoolgirl to a blind father(Visiting the Blind Father). 눈먼 아버지에게 돌아온 여학생.   
1870. by Vasily Perov. sketch and study. 53 x 60.5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Sleeping children. 잠자는 아이들. 1870.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61 x 53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Portrait of the Playwright Alexander Ostrovsky. 1871.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80.7 X 103.5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Old Parents Visiting the Grave of Their Son. 아들의 무덤을 찾아온 노부부. 1874.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37.5 X 42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The Seller of Song Books  in Paris. 1864.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7.

 

Portrait of Vasily Bezsonov. 1869.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62.5 X 74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Portrait of the Author Vladimir Dahl. 1872.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80.5 X 99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Portrait of the Historian Mikhail Pogodin. 1872.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84.3 X 104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Portrait of the Poet Apollon Maikov. 1872.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89.8 X 103.5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Caretaker-Letting-an-Apartment-to-a-Lady. 숙녀에게 아파트를 세주는 관리인. 1878.  
by Vasily Perov. Tretyakov Gallery Room 17.

 

The Judgement of Pugachev. 1873.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7

 

Portrait of Painter Alexei Savrasov. 1878.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7.

 

The Arrival of a New Governess in a Merchant House. 상인의 집에 도착한 가정교사. 1866,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54 x 44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The Investigation (Arriving at an the inquiry). 1867.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43 X 38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Festivities in Paris. 1863-1864. by Vasily Perov. Tretyakov Gallery Room 17.

 

Portrait of the historian Mikhail Petrovich Pogodin. 1872.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88.8 X 115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Fomushka-owl, 1868. by Vasily Perov.  
oil on panel. 36.8 X 44.8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17. 바실리 페로프 작품 전시실

 

 

 

 

[Room 16-31] 19세기 중 후반 그림 <이동파 시대> 

1864년 이반 크람스코이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이동파는 지배층에 저항하는, 
그리고 러시아 현실을 고발하는 사실주의적 화풍을 기치로 내걸고 
1871년부터 러시아 전역을 돌며 순회 전시회를 연다.

예술의 현실 참여를 중요시하며 아카데미 화파에서 혜택 받지 못한 많은 작가들이 
이동파 전시를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하였다.
또 러시아 대부호 파벨 트레챠코프는 전시 때마다 이동파의 그림을 구매했다.

쉽게 말해 이동파는 제도권에서 신분 보장받지 못하는 작가들이 그림을 그리면 
언제든지 전시할 수 있는 전시 공간을 제공해 주고, 
전시가 끝나면 바로 구매해 주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니 작가들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었다.
바로 이런 예술적 시스템이 19세기와 20세기 러시아 미술 부흥을 이끌어 내는 큰 힘이 된다.

 

Tretyakov Gallery Room 16. 바실리 푸키레프 작품 전시실.

바실리 푸키레프 (Vasily Vladimirovich Pukirev 1832-1890)는 러시아 풍속화가이다.
푸키레프는 1832년 툴라(Tula)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정확한 출생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농민 가정에서 자랐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초등교육을 받은 후 모길레프 현의 무명 화가 도제로 들어 갔다.

그 후 우연한 기회로 모스크바 회화조각건축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세게이 자란코 (Sergey Konstantinovich Zaryanko 1818~1870) 교수 밑에서 회화를 배웠는데 
탁월한 재능을 나타내서 1853년 예술아카데미에 보내진다.

1860년 초상화 작품으로 아카데미 회원 칭호가 수여된다.
1861년~1873년 모스크바 회화조작건축학교에서 교사를 했지만
말년의 작품들도 <어울리지 않는 결혼>(1863년)과 같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The Unequal Marriage 어울리지 않는 결혼식. 1862. by Vasili Vladimirovich Pukirev. 
oil on canvas. 173cm X 136.5 cm. Tretyakov Gallery Room 16.

사랑을 통한 배우자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거래로 성사된 혼인임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림의 제목에서 나타나듯이, 나이 든 남자와 너무도 여리고 어려 보이는 신부와의 
부적절한 혼례 장면이 19세기 중반 러시아 사회에서는 꽤나 일반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칠십 살은 넘어 보이는 노인과 손녀뻘 되어 보이는 여린 소녀가 백 년을 함께 살자고 가약을 맺는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늙은 남자가 금방 핀 한 떨기 꽃같은 예쁜 여자 옆에 서서 결혼의 촛불을 밝힌다.
쭈글쭈글 한 남자는 제일 좋은 양복을 입고 반짝반짝 광을 낸 블라우스 리본으로 한껏 멋을 부렸다. 
가슴에는 황제에게 하사받은 황실 훈장을 다는 센스도 잊지 않는다.

알코올에 찌든 것일까, 
너무 어여쁜 신부 모습에 수줍은 것일까,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늙은 남자는 곁눈질로 가련한 소녀를 힐끔거린다.

<어울리지 않는 결혼>이라는 작품은 그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 
원치 않는 강제 결혼을 주제로 그려졌다.
그러나 문제의 사회 심리적인 의미에서 아무도 보지 못했다. 
오직 신부만이 고통을 받고 증오하는 신랑의 괴롭힘을 견뎌야했다. 
물질적인 관심, 좋은 거래를 수행하려는 욕망은 부모가 자신의 딸에게 희생하도록 강요했다. 

 

The Unequal Marriage 어울리지 않는 결혼식. Detail (부분)

백옥같이 빛나는 하얀 드레스에 우아함과 순수함까지 차려 입은 청초한 여자는 
'행복, 순결, 반드시 행복해집니다'라는 꽃말을 지닌 은방울 꽃을 가슴에 달고 
머리에는 아직 피지도 않은 은방울 꽃 화환을 예쁘게 쓰고 
축 늘어진 힘없는 손을 어렵게 내밀어 결혼반지를 끼려 한다. 
밤새 울어 퉁퉁 부은 두 눈은 초점을 잃고 바닥을 헤맨다. 
이미 포기한 맘이야 붙들어 맬 수 있지만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애써 참으려는 그녀의 울음이 눈 주위로 붉게 일어나고 앙다문 양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그림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어린 소녀 신부다.
신부는 여전히 아이이며, 처진 머리에 눈물을 머금고 있다. 
금발 머리카락에 부드러운 얼굴이 참으로 슬픈 표정이다. 
그녀의 오른손은 제사장에게로 연장되며, 제사장은 얇은 손가락에 결혼 반지를 끼워 넣을 것이다. 
신부의 표정은 무관심하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운명에 무관심하다. 
웨딩 드레스를 입고 소녀는 경제적으로 잘 살게 될 가족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The Unequal Marriage 어울리지 않는 결혼식. Detail (부분)

유명한 미술 ​​비평가이자 역사가 블라디미르 바실리에프 스타소프 (Prado Vadilyevich Stasov)는 
푸키레프 (Pukirev)의 그림을 보았을 때 
"마침내 현대 사회의 깊은 곳에서 찍은 오늘의 주제에 관한 연구, 
새로운 재능있는 예술가가 러시아에 나타났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의 의견을 말한 것은 아니다. 
작가는 주제를 충분히 깊이 고치지 않고 그를 비난하기 시작한 많은 적을 발견했다. 
언론은 논란의 물결을 피우고 있다. 

그림의 묘사, 그 분석, 비평가의 의견은 걸작의 출현에 대한 적시성에 대해 결론을 맺게 했다. 
러시아 사회는 그들의 부도덕한 이유로 결혼 생활을 비난할 준비가 되었다.
불평등한 결혼! 슬픔과 고통, 연약한 처녀 영혼을 위한 죽음. 
이 주제의 비극은 A. N. Ostrovsky "The Poor Bride"의 연극으로, 
F. Zhuravlev의 "Before the Crown" 그림으로, V. Makovsky의 "To the Crown"과 같은 
회화와 문학 작품으로 구체화되었다. 

 

The Unequal Marriage 어울리지 않는 결혼식. Detail (부분)

금실 은실로 겹겹이 수놓은 사제복을 휘황찬란하게 차려 입은 대머리 사제는 
구부정한 허리를 똑바로 펴지도 못하고 어린 신부의 미래를 옭아매려 허겁지겁 매달리고 있다.
늙은이와 소녀를 엮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노파는 이 결혼이 허사가 되진 않을까 노심초사 노려본다. 
그리고 이 둘의 인연에 더 얻어낼 것은 없는지 주름지고 싸늘한 눈을 희번덕인다.

 

The Unequal Marriage 어울리지 않는 결혼식. Detail (부분)

그림 속 인물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노라면, 뭔가 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에게서 시선이 멈춘다. 
맨 오른쪽 윗부분에서, 고매한 분위기의 남자 하나가 팔짱을 낀 채 군상들을 노려보고 있다. 
그의 눈은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작가 푸키레프가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눈길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러시아에서 1860년대는 대변혁과 전환의 시기였다. 
한때 유럽의 헌병 행세를 하며 각국의 자유화 운동을 간섭하고 탄압하던 러시아는 
크리미아 전쟁(1853~6)에서 참패하여 안팎으로 큰 타격을 입는다. 
그리고 오랜 숙제이던 농노해방(1861)이 산업혁명의 진전에 따라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면서 마침내 단행된다.

이러한 일대 격변 속에서 러시아 사회 구석구석마다 변화의 싹들이 무성하게 돋아나기 시작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라즈노치네치(разночинец)’의 등장이다. 
농노해방령이 내려지던 무렵 러시아에서 사무원이나 의사, 교사, 변호사, 회계사, 작가 등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은 그 출신성분이 매우 다양하였으며, 그 지위는 특권계층인 귀족과 사제, 
그리고 하층계급인 농노와 농민의 중간에 위치하였다. 
‘잡계급 인텔리겐차’라고 번역되는 그들은 대부분 사회 개혁에 대해 급진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보통사람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으며 그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품고 있던 그들은, 
사회 각 분야에 포진하여 러시아 사회 변화의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예술분야에 있어서 그들이 창조한 새로운 미학은, 현실이 아무리 추할지라도 이를 아름답게 
가장할 것이 아니라 비판적 시각에서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푸키레프의 저 매서운 시선처럼 문제투성이의 세상을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그럼으로써 예술이 세상을 바꾸는 데 기여해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

 

The Unequal Marriage 어울리지 않는 결혼식. Detail (부분)

신랑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늙은 하객 4인방은 늘그막에 횡재한 친구가 심히 못마땅하다. 
배가 아파 견딜 수가 없다. 늙은이들의 심통이 화면을 가득 메운다. 
그들의 뒤틀린 시선이 그림 전체를 건조하게 만들고 얼굴에 진 주름만큼이나 겹겹이 한숨짓게 한다.

그런 그들을 그림 한쪽에서 팔짱 낀 채 우울하게 바라보는 이가 있다. 
은방울 꽃의 어린 신부와 나란히 서면 딱 어울릴 법한 턱시도의 젊은 남자는 푸키레프 자신이란다.
빚을 갚지 못하는 농노의 어린 딸을 선뜻 자신의 노리개로 취하고 
말도 안 되는 불합리를 재력으로 포장하는 현실을 작가 자신은 비통한 얼굴로 바로 본다.
그림 한 켠에 야멸차게 자리 잡아 19세기 중엽 러시아의 참담한 현실을 고발한다. 
조용히 호통치는 것이다.

 

The Unequal Marriage 어울리지 않는 결혼식. Detail (부분)

푸키레프의 <어울리지 않는 결혼식>은 나이 든 고관에게 시집가는 가난한 처녀를 소재로 한 그림이다. 
촛불을 든 손을 힘없이 늘어뜨린 채 반지를 받기 위해 손가락을 내미는 신부의 얼굴은 슬픔으로 가득하다. 
그런 신부를 곁눈으로 바라보는 늙은 신랑은 산전수전 다 겪은 낯빛에 
이제는 오로지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부부가 된다는 것은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거늘 신랑은 신부의 행복에 전혀 관심이 없다. 
하객들의 표정에서도 신부에 대한 진정한 동정심을 발견할 수 없다. 
그래서 신부는 더욱 외로워 보인다.

푸키레프는 러시아 대표 풍속화가이며 모스크바 회화 조각 건축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사실주의 화법인 대물묘법의 대가이다.
소작세를 갚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팔려가는 어린 신부의 아픔과 슬픔이 잘 배어 나는 작품으로, 
각자의 욕심에만 빠져 있는 모델들의 표정이 너무도 흥미로운 그림이다.

 

In the Artist's Studio. 1865. by Vasily Pukirev. Oil on canvas. 
59 x 73 cm. Tretyakov Gallery Room 16.
 
<바실리 푸키레프의 스튜디오>는 부유한 상인 구매자가 방문했을 때의 장면으로
그림에 묘사된 이미지는 풍자적 특성이 없지만 매우 재미있다. 
P. M.의 회고록에 따르면 Tretyakov의 가장 가까운 동료인 N. A. Mudrogel은 
갤러리의 가장 오래된 키퍼인데 작가의 이미지에 자신을 담았다. 
상황에 대한 푸키레프의 표현이 좀 아이러니하다. 

 

Reception of a Dowry in a Merchant Family. 지참금 목록. 1873. by Vasily Pukirev.
oil on canvas. 73 x 66 cm. Tretyakov Gallery Room 16.

신부의 어머니로 보이는 중년 여인이 드레스를 내보이고 있고,
신랑 측에서 보낸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이 지참금 목록을 들고 있다.
하녀는 트렁크에 여러 혼수품을 챙기고 있으며 문 앞에는 신랑측 사람이 거드름을 피우며 서 있다.

바실리 푸키레프의 또 다른 그림은 결혼과 그 역겨운 물질적인 면을 주제로 한다. 
그림은 결혼식 며칠 전 신랑의 집에 보내는 지참금을 모으기 전 평상시의 시간을 보여준다. 
이 절차가 신부 가족에게는 얼마나 불쾌할지... 신랑의 자랑스런 포즈는 문 앞에 있는 장면에 보인다. 

신부와 여동생 또는 여자 친구는 공포스럽게 이 장면을 본다. 
한편, 신부의 어머니는 막내딸과 함께 가슴에 린넨더미를 놓는다. 
그녀의 얼굴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추상화하려는 시도를 분명하게 표현한다.

이 작품은 1873년에 그려졌는데, 이전 회화에서처럼 
가난한 상인의 집의 생활과 가구는 매우 소박한 분위기다. 
겸손한 설정, 여러 그림과 카나리아 케이지가 천정에 매달려 있다.

 

Princess Tarakanova, 1864. 타라카노바 황녀. 1864. 
by Konstantin Dmitrievich Flavitsky. oil on canvas. 245 x 187.5 cm. Tretyakov Gallery Room 16.

화가 콘스탄틴 플라비츠키(Konstantin Dmitrievich Flavitsky,1830~1866)는 1830년 9월 모스크바에서 
관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곧 고아가 되었고 7년간을 꼬박 보육원에서 지냈다. 
그림에 대한 재능은 일찍부터 있었으나, 알려지지 않았다가 미술 단체의 후원으로 
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하였고, 회화에 두각을 나타냈다. 
1855년 황금메달을 받으면서 졸업을 했고, 그 덕택으로 이탈리아에 6년 간 유학했다.

현재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타라카노바 황녀>가 1864년 공개되면서, 
미술계 내에서 뿐 아니라 외적으로도 세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모두들 앞으로 콘스탄틴 플라비츠키의 미술 활동에 큰 관심을 나타내었고, 
그가 훌륭한 그림을 많이 그려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타라카노바 황녀>를 그리고 있을 당시부터 플라비츠키는 이미 폐결핵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에 있을 당시 병을 얻어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후 더욱 심해졌다. 
플라비츠키는 병을 고치기 위해 유럽으로 갈 생각이었으나, 
안타깝게도 36세의 나이로 1866년 9월 짧은 생을 마감했다.

가장 잘 알려진 그의 그림 <타라카노바 황녀>는 러시아어로는 
<타라카노바 황녀의 죽음 (Death of Princess Tarakanova)>이다. 
이그림은 러시아 역사를 소재로 하면서, 신화로 내려져오는 사건을 그렸다. 

먼저 역사적 사실은 이렇다. 
타라카노바 황녀는 표트르 1세의 딸인 엘리자베타 여제가 
공식적으로 결혼한 사실이 없는 상태에서 몰래 낳은 자식, 즉 사생아였다. 
일찍이 해외에서 조용히 자라나던 타라카노바 황녀는 예카테리나 2세가 권좌에 있던 시대에 
다시 나타나서 본인만이 러시아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진정한 왕위 계승자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예카테리나 2세는 타라카노바 황녀의 어머니인 엘리자베타 여제가 물러난 후 
왕위를 계승했던 표트르 3세, 즉 본인의 남편을 죽음으로 밀어내고 황권을 잡고 있었다. 
그녀는 독일 출신으로 사실 권좌를 이어 받을 혈연적 정통성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고, 
황위 계승자의 정통성으로 따지자면 예카테리나 2세가 타라카노바 황녀에게 밀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당시 혈연관계가 있는 진정한 황위 계승자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실제로 권좌에 오르기 위해서 
대단한 욕심을 보였던 예카테리나 2세는 언제고 그런 사람이 나타날까 노심초사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당연히 정통 계승자라 말하는 타라카노바 황녀가 거슬리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시대적으로 정통성을 확인할 길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황권 유지에 거슬릴 것을 우려해 조용히 사람을 보내 
러시아로 불러들여 수도원에 가둬놓고 결국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타라카노바 황녀의 태생부터 사망까지 역사는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의문점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기록에 수도원에서 칩거하던 사람들 중에 실제로 타라카노바 성을 지닌 수녀가 있었고, 
그 수녀가 1775년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이 있다고 한다.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과 달리 그림에서처럼 요새 감옥에서 
수장을 당했다는 것은 좀 더 비극적이고 불운했던 황녀를 원했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신화일 것이다.  

즉, 콘스탄틴 플라비츠키는 타라카노바 황녀의 마지막 순간을 실제 사실이 아닌 
신화에 기반하여 그림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역사 속 타라카노바 황녀가 황실의 미움을 받아,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신화가 더욱 자극적이기 때문이었을까.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림 속 여자의 비운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황실의 권위에 짓눌려 정통성을 가진 황위 계승자가 
처참하게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홍수로 인해 감옥 내부의 침대까지 물이 차오르고 물을 피해보기 위해 
이리저리 바쁜 쥐들 사이로, 죽음이 임박했음을 스스로 깨닫고 체념하듯 무심하고, 
절망적인 눈빛으로 천정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은 정말 보기 힘들 정도로 불쌍하다. 
감옥 내부의 생활은 엄청 열악하면서도, 붉은 색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그녀가 황녀임을 말해준다.  
역사 속 당시에 실제로 1777년 9월에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 
기록적인 대홍수가 일어나 매우 큰 수해를 입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림 속의 여인은 참으로 아름답다. 
죽음을 직전에 둔 여인이라고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우아하다. 
트레차코프 미술관에 소장된 그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여인의 그림을 꼽으라면 많은 이들이 이 그림을 꼽는다. 
아름다운 것이 선하다는 토스토옙스키의 말처럼 타라카노바 공주의 자태는 
우리의 눈길을 사로 잡기에 충분하다. 

 

Automobile Race. 1930. 자동차 경주. by Petr Vilyams Wiliams
Oil on canvas. 151 x 213 cm. Tretyakov Gallery Room 16.

화가 표트르 윌리엄스 (Petr Vilyams Wiliams 1902-1947)는 1902년 4월 17일
모스크바에서 1896년 러시아에서 귀화한 미국 과학자이자 기술자인 
윌리암스(VR Williams)의 가족 사이에서 태어났다. 
1909년부터 그는 Meshkov의 스튜디오에 참여했다. 
1918년에 잠시 모스크바주립 의과대학 학생이었다. 
1922년에 그는 실험적인 풍경 미술관의 창설에 참여하고
모스크바 응용 장식 미술연구소 교수로 일했다. 
1929년부터 연극 예술가로 일했습니다.
1937-1941년에 Vakhtangov에서 여러 연극을 위한 무대 제작을 만들었다.
표트르 윌리엄스는 1947년 7월 1일 사망했습니다.

이 그림은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초 러시아의 현실과 

사회적 낙관주의에 대해 낭만적인 비전을 반영한다. 
윌리엄스의 이 예술 작품은 시간의 문화가 미래와 현재 사이의 

균형을 인식하는 방식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우리는 그 시절의 “가상 현실”이 사진처럼 보이는 것을 감상할 수 있다. 


그것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농부의 말"에서 "자가용 말"에 이르기까지, 

농업 국가에서 산업 강국에 이르기까지, 
어두운 과거에서 "밝은 미래"에 이르기까지 

긴 삶의 종족을 포착하고 있다. 
움직임에 의해 변형된 직사각형 차체, 도로의 대각선 – 

이 모든 것이 구성을 역동적으로 만들고 속도감을 만든다. 

 

Clash with Finnish smugglers 핀란드 밀수꾼들과의 전투 by Vasily Khudyakov. 
Oil on canvas. 80 х 120 cm. Tretyakov Gallery Room 16.

바실리 후댜코프 (Vasily Grigorievich Khudyakov 1825-1871)는 러시아의 역사화, 초상화 및 장르화가이다.
후댜코프는 모스크바 회화, 조각 및 건축학교(MSPSA) 에서 거의 2 년을 보내고 
1848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1856년에 그는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파리, 로마, 나폴리에서 
약 4년 동안 머물면서 러시아 귀족들을 위한 위원회 활동을 했다. 
그의 대표작이 바로 ‘핀란드 밀수꾼들과의 전투 (Clash with Finnish smugglers)’인데
이 작품을 바탕으로 그는 1860년에 아카데미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 작품은 또한 트레티야코프 컬렉션의 탄생을 알린 풍속화로도 유명하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의 역사는 러시아 상인이자 수집가였던 파벨 트레티야코프가 
바실리 후댜코프의 그림 ‘핀란드 밀수꾼들과의 전투’를 사들인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파벨 트레티야코프는 1856년에 페테르부르크에 있던 화가의 작업실에서 
450루블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7,700달러)을 주고 이 그림을 샀다. 
이후 러시아 예술의 최대 보고로 성장하게 될 트레티야코프 컬렉션이 바로 
이 ‘핀란드 밀수꾼들과의 전투’를 구입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이 그림은 현재 동 미술관 제16 전시실에 걸려있다.
그는 1871년 콜레라로 사망했다 .

 

Prisoner's rest, 1861. 죄수의 안식. by Valery Ivanovich Jacobi. 
oil on canvas. 99.7 х 144.4 cm. Tretyakov Gallery Room 16.

화가 발레리 자코비 (Valery Ivanovich Jacobi 1834-1902)의 작품이다. 
그의 동생은 러시아의 유명한 혁명가이자 민족 학자인 파벨 자코비(Pavel Jacobi 1842-1913)다.
자코비는 부유한 부동산 소유주 가정에서 태어나 카잔대학에서 교육을 시작했지만 
크림전쟁 중 러시아 육군 시베리아 자원 봉사단에 입대하기 위해 공부를 중단했다. 
육군에서 제대한 후 1856년에 그는 대학 공부를 포기하고 대신 예술 경력을 추구하기로 결정했다.

1856-1861년에 발레리 자코비는 Imperial Academy of Arts 에서 공부하여 
그의 그림 "고요한 거지의 휴일"(1860)로 금메달을 받았다. 
1861년에 그는 그의 가장 유명한 그림인 <죄수의 안식(The Prisoner 's Rest)>을 그렸다. 
1861-1869년 자코비는 아카데미 보조금을 받고 유럽으로 여행하여 

독일,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1868년 이후 자코비는 Imperial Academy of Arts의 회원이었으며 
1871년에 교수가 되었고 1878-1889년에 Academy에서 가르쳤다. 
그의 작품은 순전히 장식적이고 실체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1891년 아카데미를 대대적으로 개편한 후 그는 해고되었고 

그 후 알제리, 프랑스 등지에서 시간을 보냈다. 
자코비는 1902년 니스에서 사망했다.

 

Round dance in the Kursk province, 쿠르스크 지방의 라운드 댄스. 1860. by Konstantin Trutovsky. 
Oil on canvas. 80 х 120 cm. Tretyakov Gallery Room 16.

콘스탄틴 트루토프스키(Konstantin Trutovsky 1826-1893)는 러시아 장르 화가이자 일러스트 레이터이다.
그는 지주였던 은퇴한 기병대장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839년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옮겨져 
니콜라예프스키 엔지니어링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그림에 대한 그의 재능이 비로소 드러났다. 

그는 1845년에 졸업하고 역사화가가 되기 위해 Fyodor Bruni 와 함께 
Imperial Academy of Arts 에서 수업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초상화를 그렸다.  
1849년에 그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가족 재산을 상속받았다.  
그는 전시회를 주선하기 위해 상트 페테르부르크나 모스크바를 방문하면서 지역 마을 곳곳에 그림을 그렸다.

1856년 "Free Artist"라는 칭호를 받았다. 
1850년대 후반에 그는 독일을 여행했고 "왕립 벨기에 수채화가 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는 여행 중 병에 걸린 두 번째 부인이 사망한 후 1858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정착했다. 

1871년부터 1881년까지 모스크바 회화, 조각 및 건축학교의 검사관으로 일한 후 
다시 한번 자신의 영지로 돌아와 수많은 오일, 수채화 및 그림을 남겼다. 
그는 런던, 파리 및 앤트워프 등에서 해외 전시를 계속했다. 
1893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주요 사후 회고전이 열렸다.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16. 바실리 푸키레프 작품 전시실. 

 

 

 

 

19세기 전반기 회화 <초기 풍속화의 시대>

 

Tretyakov Gallery Room 15 파벨 페도토프 작품 전시실

 

Self Portrait 자화상. by Pavel Fedotov. 1848. watercolor. Tretyakov Gallery Room 15. 

작품을 감상할 때면 화가 자신이 그린 자화상을 자주 보게 된다. 
우선 어떤 얼굴인지 궁금하다.  
파벨 페도토프 (Pavel Andreyevich Fedotov 1815-1852)는 약간 벗어진 머리와 형형한 눈빛 
그리고 멋진 콧수염 등이 그가 쉽지 않은 성격의 소유자임을 보여 주고 있다.  
쉽게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의지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차가운 냉소도 묻어 있다. 
자화상을 그린다면 무엇을 그리게 될까? 내가 보여 주고 싶은 것을 그릴까? 
보아 주었으면 하는 것을 그릴까? 

화가이자 시인인 파벨 페도토프는 2급 공무원 집안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제1군사학교에서 공부했다.   
1954년부터 10년 간 미술아카데미에서 드로잉 수업을 청강했고, 자우에르베이드에게 전쟁화를 배웠다.  
1840년 미술에 몰두하기 위해 군대를 떠나 미술아카데미에 등록하여 그림 공부를 계속했다. 

당시 소설가 도스토에프스키도 회원이었던 사상가 Mikhail Petra-shevsky가 만든 
철학과 문학 토론클럽  'Petrashevsky Circle'의 진보적인 문필가, 평론가들과도 
친하게 지냈고, 민중화가가 되어 후대 모스크바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The Major's Proposal. 1851. 소령의 구혼. by Pavel Fedotov. 

Oil on canvas. 58.3cm x 75.4 cm. Tretyakov Gallery Room 15. 

돈 밖에 없는 상인의 집은 권력을 얻기 위해 딸을 늙은 소령에게 시집 보내려 한다. 
하지만, 늙은 남자를 본 소녀는 온 몸으로 이 현실을 거부한다. 
콩트같은 현실의 한 장면을 '찰칵' 스냅사진 찍은 듯 보여주는 그림이다.

페도도프의 대표작인 <소령의 구혼(1848)>은 <새 수훈자>와 함께 그가 미술 아카데미展에 출품한 작품이다. 
지위를 가졌지만 가난한 남자, 그리고 신분이 낮으나 돈은 많은 집안. 
양측이 이러한 서로의 취약점을 보완하는 현명한 결합을 일삼던 시대를 풍자한 그림이다. 

‘장르화’란 당대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묘사한 그림으로서, 우리나라의 풍속화쯤으로 보면 된다. 
서양화단에서는 17세기 무렵부터 회화를 주제별로 구분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우선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역사화’와 그 외의 모든 그림을 칭하는 ‘장르화’로 양분되었다. 
그리고 그 장르화에서 다시 인물화와 정물화, 풍경화 등이 쪼개져 나갔으며, 
이도저도 아닌 것들만 여전히 ‘장르화’란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여기에 속하는 것은 주로 당대 사람들의 일상과 풍속을 담은 회화들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근래에 가장 사랑받는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인 
<진주귀걸이 소녀>의 얀 베르메르를 떠올려보면 되겠다. 
그가 자주 그린 17세기 네덜란드의 부엌 풍경들. 
그로부터 우리는 당시 네덜란드인들이 살아가던  모습의 진솔한 단면을 들여다볼 기회를 얻는다.

장르화의 가치는 미학적 영역에 그치지 않는다. 
그림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아름다움’만이 아니다. 
‘정신’이나 ‘가치’가 담기지 않은 아름다움이란 백치미에 불과하지 않을까. 
아름다움이 없는 가치란 자칫 구호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처럼. 
우리가 단원과 혜원의 풍속도를 사랑하는 것은 우선 그 그림들이 미학적으로도 볼만하지만, 
그 속에서 조선 후기 민초들의 생활을 짐작할 수 있고, 
생활에 발을 딛지 않은 고고한 문인화에서 벗어나 낮은 데로 임한 화가의 정신을 높이 사기 때문이 아닐까.

러시아 장르화의 뿌리를 찾자면 앞서 소개한 농노화가 미하일 시바노프의 <결혼계약의 축하(1777)>, 
그리고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의 농촌그림들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일상생활의 단순한 묘사를 넘어 장르화의 묘미인 ‘풍자’와 ‘해학’이 가미됨으로써 
비로소 맛깔스런 그림들이 탄생한 것은 파벨 페도토프(1815~52)에 이르러서이다. 
민초들의 삶이란 대개 고통스런 것이고, 풍자와 해학은 이를 웃음으로 버무려 이겨내고자 하는 묘약이다. 
우리의 풍속도 군데군데에 풍자와 해학들이 숨어있듯이, 
페도토프를 거쳐 바실리 페로프(1834~82)로 이어지는 러시아의 장르화들도 
하나하나 뜯어볼수록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다.

장르화(Genre Painting)는 성격상 곧잘 풍자와 해학을 띤다. 
19세기 초반에 활동한 파벨 페도토프는 자기 시대의 모순들을 유머러스한 붓길로 재치 있게 묘사했다. 
사리사욕과 기만, 배신 등이 그가 즐겨 다룬 주제인데, 관료주의에 물든 관료들 뿐 아니라 
사랑을 약속한 연인 사이에서도 이런 부정적인 태도는 자주 나타난다. 

페도토프의 이 작품은 인륜지대사인 결혼이 철저한 계산과 이기심에 따라 
일종의 거래로 타락한 모습을 고발한 작품이다. 
오른쪽 문간에 기댄 남자는 이 집 딸에게 구혼하러 온 소령이고, 
하얀 드레스를 입고 왼쪽 문으로 부리나게 달려가는 처녀는 그의 구애 대상인 아가씨다.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는 소령의 모습이 볼수록 역겨운데, 
그래도 그는 소령이라는 자랑할 만한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사람이다. 

그 신분을 밑천으로 열악한 경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이렇게 부유한 상인의 집에 찾아와 적극적으로 구애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콧수염을 만지는 그의 모습은 일이 잘 풀려 
곧 자기 주머니에 돈이 들어차리라는 기대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사람의 느낌과 관계없이 스스로는 지금 기분이 매우 고조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문안의 풍경을 보자. 문을 들어서는 노파는 중매쟁이다. 
그녀가 나타난 것을 보고 이 집 주인인 상인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노파에게 다가가고 있다. 
딸은 신랑감 도착 소식에 깜짝 놀라 옆방으로 숨으려 한다. 
손님을 맞기 위해 한껏 차려 입었지만,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진행되는 이 중매에 매우 혼란스러운 표정이다.  
그러자 어머니가 딸의 드레스를 잡아당기며 대사를 그르치지 않도록 경고한다. 
식탁에서 음식을 차리는 요리사와 집사 등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 하며 서로 관심을 주고 받는다.

파벨 페도토프는 좀 더 발전된 소재를 가지고 풍속화를 그렸다. 
그의 작품들은 연극이나 판토마임 무대예술과 많은 관련을 보이고 있다. 
그림을 보는 것 만으로도 그가 풍자하고자 하는 것을 아주 잘 볼 수 있다. 
이 작품 <소령의 구혼>은 국내에도 꽤 알려져 있는 그림이다. 

그림 속에는 엄마의 강요로 예쁘게 머리도 말아올리고, 흰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 하나가 
현관 입구에서 등을 돌린 채 나가기를 거부하고 있다. 
현관 밖에는 그녀에게 청혼을 한 것으로 보이는 소령이 멋쩍게 벽에 기대어 있고, 
왠지 여인이 결국은 자신에게 시집을 올 거라고 당연히 생각하고 있는 듯 불안감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 앞의 여자는 여인의 아버지로 보이는 수염이 길게 자란 남자에게 
밖에 사윗감이 왔노라고 설명을 하는 것 같고, 
여인의 엄마는 여인의 드레스 자락을 꽈악 움켜쥐고, 여인을 강하게 통제하고 있다. 
여인은 하얀 레이스 손수건도 바닥에 떨어뜨린채 현관을 넘어서 소령에게 시집을 가게 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아는 듯 결혼을 거부하는 몸짓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파벨 페도토프는 사실주의 화가였던 만큼 
19세기 중반의 러시아 가정의 집안 인테리어도 아주 잘 나타나 있다. 
바닥, 벽지, 천장, 벽면에 걸려있는 그림들, 소품들까지도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각 인물이 입고 있는 옷감의 느낌도 충분히 살려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림 오른쪽 앞의 고양이도 빼 놓을 수 없다. 
주인이 시집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양 고개를 돌리고 바닥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재미있다.  

아마도 빈털터리일 가능성이 높은 소령이, 그를 경제적 곤궁으로부터 구해줄 가문을 찾아 왔다. 
청혼의 자리이긴 하지만 거래의 실질적 합의는 이미 끝난 상태일 것이다. 
매파가 바깥주인에게 소령을 소개하는 동안, 처녀는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며 다른 방으로 달아나고 있다.

그녀는 이미 통보를 받아 잘 차려입은 채 소령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정작 도착한 신랑 후보의 나이 들고 통속적인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것이리라. 
이 광경을 지켜보며 수군거리는 하녀들. 
여러 등장인물에 대한 묘사가 워낙 정교해서 실물을 보기 전에는 
사이즈가 상당히 큰 대작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그림의 크기는 58.3cm X 75.4cm에 불과하다. 
어떤 이는 이 그림을 두고 ‘결혼이 거래이던 시절의 풍경’이라 말하지만,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닐까...

페도토프는 당시 주류 화가들의 교육기관인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아카데미 출신이었지만, 
귀족이나 성직자, 관리 등 ‘지도층 인사’들 뿐 아니라 밑바닥 인생들이 살아가는 막장까지 
구석구석 돌아보며 그림의 대상을 찾았다. 
그렇게 그가 발굴한 이야기들은, 트레차코프 갤러리 Room 15에서 만나게 되는 
가로 세로 50cm 내외의 크지도 않은 화폭들에 치밀하게 담겨 있다. 

 

The Major's Proposal 소령의 구혼. (부분)

무슨 일일까? 옅은 분홍빛 드레스 여인은 아름답다.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였을 거다.
제일 예쁜 옷을 골라 입고 정성스레 머리를 빗고 
'내 님은 누구일까, 어찌 생겼을까? 처음 보는 내게 어떤 눈빛을 아니 어떤 첫마디를 건넬까?' 
두 볼을 붉게 물들이며 그분을 기다렸을 거다. 
낭만 소설에서 읽어 얻은 아이디어로 미래의 그분 앞에 
살짝 떨어뜨릴 손수건을 준비하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떨어뜨린 손수건을 집어 들며 첫마디를 건네 올 그분과의 낭만을 기대하며 가슴 떨려 했을 그녀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지는 건가! 심쿵을 기대했던 그 분과의 만남에서 
그녀는 '이건 아니야' 를 외치며 몸을 돌린다. 낭만의 징표인 손수건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이럴 수는 없어요. 등을 돌리고 방으로 들어가는 여인의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애처롭게 들리는 듯하다. 
청혼을 거절당한 소령은 멋적게 턱을 괴고 있지만 별로 부끄러운 기색은 아니다. 

어머니는 딸의 치마를 끌어 당기고 있지만 그렇다고 딸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가만히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 모든 광경은 사전에 딸이나 남편에게 
아무런 상의 없이 저지른 어머니의 욕심 때문이 아닐까? 
어머니의 마음에는 딸의 사랑보다 든든한 배경을 가진 사위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방 구석 그늘에 있는 아버지는 있는 듯 마는 듯 하다.

하인들은 서로에게 귓속말로 이 상황을 따져 보고 있다.
아가씨가 어떻게 될 것 같아? 아직도 모르겠어? 
결국은 주인 마님 의견대로 아마 저 늙은 소령하고 결혼하게 될 거야.
어휴, 안타까워라. 도시 부르주아에 대한 풍자를 숨기지 않았던 
페도토프의 성숙된 테크닉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군대에서 종군 화가라는 직책도 매력적이었지만 그 자신에게는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페도토프는 진정한 창의력 있는 화가는 미술에 모든 것을 받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10년간 복무하던 부대에 전역을 신청한다.
그 때 그의 나이 28세 되던 1843년 11월이었다. 
제대를 하기 위해 황제로부터 미술에 전념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페도토프는 
우선 공부를 위해 미술 아카데미에 정규 출석한다. 
처음 그는 전쟁화를 그리는 반에 들어 갔으나 곧 풍속화반으로 자리를 옮긴다. 

 

The Major's Proposal 소령의 구혼. (부분)

이 그림은 아마도 러시아 귀족계급일 고위 장교와 상인계급의 처녀와의 결혼을 암시한다.  
당시는 자본주의가 퍼져 혈통보다는 돈이 더 중시되던 때여서, 
가난한 귀족의 자제가 경제적 이득을 위해 부유한 상인의 딸과 결혼하는게 드물지 않았다.  
이 때, 귀족뿐 아니라 결혼의 상대인 상인 가정도 정략결혼의 덕으로 상류사회에 접하게 되는 것을 반겼다.  
아버지일 노인은 표정은 매우 흡족하다. 특히 신부감은 엘리트 러시아 살롱에 속하게 되어 매우 행복하다.  
모두가 서두르는 분위기. 아랫쪽의 고양이만 이 집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심한 유일한 존재이다. 
이는 전체 장면을 풍자로 만들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은 매우 강한 정치적 메세지를 담고 있다. 
러시아 최고의 계층에서의 도덕적 해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날카로운 비판적 주제는 러시아 황실의 검열을 벗어나기 힘들었을 터이지만 
페도토프는 자신의 친구나 후원자를 위한 사적인 그림을 그렸기에 무사할 수 있었다.  
게다가, 훗날 알렉산더 2세가 즉위 후 여러가지 민주적인 개혁을 벌이는 시대가 되자 
페도토프의 뛰어난 풍자의 기술은 더욱 인기를 얻었다.  

브륄로프와 대조적으로, 페도토프는 러시아 화화사에서 최초로 사실주의를 보인 화가중의 하나이다.  
그는 과장이나 미화없이 객관적으로, 그러나 약간의 유머를 담아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런 배경에는 페도토프가 황립미술학교에서 교육을 받지 않아 
신고전주의적 화풍에 훈련되지 않은 것이 이유일 것이다.  
독학의 화가로 군대와 지방에서 경험을 쌓아 그는 과거의 일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현재였고, 현재를 가능한 한 자신의 능력대로 잘 그려내는데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녀의 그분이 될 남자는 딱 봐도 풋풋한 아가씨와는 어울리는 나이가 아닌 듯하다. 
세상 물정 알만큼 다 알고 설렘, 순수 이런 것들은 아주 예전에 묻어 버린 나이 먹을 대로 먹어버린, 
고작 소령이라는 사회적 지위 하나만 부여잡고 상인의 집에 
지참금 두둑이 뜯어내 앞으로의 일신을 편안히 돌보려는 속물이다. 
문 앞에서 '혹시 나 홀대하는 거요? 감히 내게?'라는 표정으로 
거들먹거리는 소령의 모습이 참으로 느끼하다.

 

The Major's Proposal 소령의 구혼. (부분)

번들거리는 비단옷에 거대한 몸을 맡긴 드레스 여인의 엄마는 휙 

돌아서는 딸의 철딱서니가 못마땅하다. 
결혼은 남녀에게 서로 부족한 것을 채우는 일. 
이 불변의 절대적 진리를 두고 철없이 구는 딸아이를 세게 잡아당긴다. 


'우리가 가진 돈만 있으면 세상 편히 살 줄 아니? 
돈을 뿌리면 반짝거리게 해 줄 권력이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일렀거늘. 쯧쯧…...' 
이런 잔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듯하다. 
결국은 가장 힘 세 보이는 엄마는 의지대로 소령에게서 권력을 사 딸에게 안겨 줄 거다.

 

The Major's Proposal 소령의 구혼. (부분)

이 거래로 중매 비용을 두둑이 챙겨야 하는 중매쟁이는 아가씨의 돌발행동에 몹시도 불편하다. 
혹시라도 이 결혼이 깨질까 노심초사한다. 
거래의 성사에 전혀 힘이 없어 보이는 그녀의 아버지라도 다그쳐 본다. 
검은 옷의 사내는 중매쟁이를 묵묵히 받아낼 뿐이다.

“난 이 집에서 힘이 없다우. 우리가 이만큼 사는 것도 아내가 가져온 지참금 때문이라오.
난 무능력한 상인. 아내는 그게 철전지 한이 된 사람이라오”라고 소심하게 중얼대는 듯하다.
수십 년 알코올에 절어 붉어진 아빠의 콧잔등이 현실에 흥분하는 항변으로 착각되는 씁쓸한 현실이다.

 

The Major's Proposal 소령의 구혼. (부분)

안타까운 눈빛으로, 인간다운 눈빛으로 딱 한 사람만이 드레스 여인을 쳐다본다. 
손님 접대 상차림에 분주한 앞치마 두른 여인은 어릴 적부터 그녀를 키운 유모인가 보다. 
딸 같은 그녀가 사랑이 아니라 철저히 계산된 현실에 희생되는 지금이 못마땅하다. 
하지만 유모는 힘이 없다. 체념하고 지켜볼 뿐이다.
결혼이 거래이던 19세기 러시아. 찰나의 이 그림이 과연 과거 러시아에서만의 일일까?
세상사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현실 한 자락을 

따끔히 꼬집어내는 페도토프의 천재성이 참으로 대단하다.

 

The fresh cavalier - Newly Awarded. 
Morning of an Official Who Had Been Decorated with  His First Medal, 1848.
by Pavel Fedotov. oil on canvas. 48.5 x 42.5 cm. Tretyakov Gallery Room 15.

<새 수훈자 - 첫 훈장을 받고난 아침의 관리>
이 그림의 주인공은 아침부터 난감한 상황에 빠진 관리이다. 
방안은 깨진 그릇과 나뒹구는 빈 병에다가, 세간과 옷, 줄 끊어진 악기 등으로 난장판인데, 
그는 한 아낙네와 다투고 있다. 
구두를 비롯하여 여인의 손에 들려있는 돈 될만한 물건들과 

그녀의 표정을 보면 상황이 대강 짐작된다.

여인은 여러 달째 하숙비를 받지 못한 집주인쯤 되지 않을까. 
혹은 아침부터 작정을 하고 들이닥친 빚쟁이거나. 

채귀(債鬼)라고 했다. 아무리 고귀하신 분이라도 빚쟁이한테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관리는 어제 받은 소중한 훈장을 가리키며, 국가가 인정한 공훈의 권위를 
코웃음 치는 여인에게 눈을 부릅뜨고 일갈하고 있다.  
“나, 훈장 받은 남자야!”

그러나 자랑스런 훈장이 달려 있는 너덜너덜한 가운의 구멍들, 
세수도 안 한 것 같은 얼굴에 롤을 감아놓은 머리의 꼬락서니, 
탁자 밑에 숨어 있는 친구의 몰골, 이런 모든 상황이 이제 지겹다는 듯 기지개를 켜고 있는 고양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그림의 압권인 여인의 조롱 섞인 표정을 볼 때, 
그런 호통은 부질없는 허세임이 분명하다.

페도토프는 장교로서 주간 근무를 끝내고 밤에는 미술 아카데미의 야간 수업에 참석했다. 
학생으로서는 그다지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부대의 모습과 장교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그는 부대 내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미 일반적인 수채화와 초상화에 관계된 테크닉은 모두 끝낸 그였다. 
이 때 페도토프의 작품은 수채화와 연필로 제작되었다. 
그가 유화로 방향을 바꾼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페도토프는 초상화에 이어 캐리커처로 범위를 넓혔다. 
이 때까지는 신랄한 풍자를 담은 작품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30년에 걸친 시대착오적 반동정치를 통해 러시아를 유럽의 후진국으로 퇴화시켜버린 
차르 니콜라이 1세 (1825~55).  그를 받치고 있는 기둥 가운데 하나인 러시아의 관리들이 
얼마나 타락하고 허세에 찬 존재인가를 풍자하는 그의 붓놀림은 좀 아슬아슬해 보이기까지 한다.
국가를 거대한 병영으로 만들고 비밀경찰까지 창설하어 국민을 억압했던 당시에, 
이런 비판적 그림이 무사할 수 있었을까.

돈 없는 몰락한 귀족은 사교계에 진출해 부자 여인을 꼬시는 것이 삶의 전부다. 
집세를 내지 않았는지 하숙집 주인의 신발과 커피분쇄기를 압수하려 한다. 
하지만 그림 속 살림을 보면 집세만 없는 거 같다. 
새장 속 새에, 포도부에, 기타에, 커피 분쇄기까지. 
주인의 압수에 '조금만 기다려 주면 한 번에 다 갚아 버릴텐데,' 하며 
남자는 입을 삐죽이 내밀며 귀족 징표인 훈장을 가르키고 있다. 
페도토프는당시 풍자적 풍속화를 이끈 대표 작가로 
폼생폼사로 사는 귀족의 허영심을 재미있게 꼬집고 있다.

 

Aristocrat's breakfast. 1850. 불청객, 아침을 먹고 있는 귀족. by Pavel Fedotov. 
oil on canvas. 51cm x 42cm. Tretyakov Gallery Room 15.
 
<불청객, 아침을 먹고 있는 귀족 (1848)> 19세기 중반 몰락해 가던 러시아 귀족의 어느 아침. 
<새 수훈자 - 첫 훈장을 받고난 아침의 관리>의 경우와는 달리 이번에는 제법 격조가 있는 집의 방안이다. 
아직 가운차림인 귀족은 아침 요기를 하고 있다가 뜻하지 않은 불청객을 맞아 당황하는 모습이다. 
애견은 커튼을 젖히며 들어서는 낯선 손을 경계하고 있고, 주인공은 엉거주춤하게 일어나며 돌아본다. 
이 그림에서 화가가 표현하려던 것은 무엇일까. 
남자가 황급히 책으로 덮고 있는 것은 러시아 서민들의 전통음식인 흑빵이다.

농노제에 기초한 러시아 농업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위기에 처하게 된다. 
기술의 발전 없이 오로지 농노의 고혈을 짜는 데만 의존한 생산방식의 비능률 때문이었다. 
토지에 부를 의존하고 있던 러시아 귀족계급은 이로 인해 급격히 몰락한다.
그들은 땅과 농노를 저당 잡힌 돈으로 근근이 살아가야 했다. 
그림 속 귀족의 입성이나 가구며 방안의 풍경은 아직 품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곤궁한 처지는 달랑 흑빵 한 조각뿐인 아침식사가 잘 시사해주고 있다.

하필 이런 때에 누가 집을 방문하다니, 그는 황급히 흑빵을 책으로 덮고 있다. 
하지만 그의 자존심은 그걸로 덮어질 수 없을 듯하다. 
의자에 놓인 팸플릿의 제목은 ‘устрицы(굴, oyster)'이다. 
아침의 허기를 고작 흑빵 한 조각으로 때우는 그는, 지난 밤 저 팸플릿을 읽으며 
오래 전 풍족하던 시절 맛보았던 굴의 향을 추억하였는지도 모른다.              

<소령의 구혼>과 <새 수훈자 - 첫 훈장을 받고난 아침의 관리>는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지만, 
원화는 판매될 수 없었고 석판화도 검열에 걸려 발매가 중단되었다. 
게다가 그는 미술아카데미전에 출품이 금지되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 리얼리즘에 대해 호의적이던 모스크바의 화단에 그의 작품은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그의 계승자라 할 수 있는 바실리 페로프, 바실리 푸키레프, 
일라리온 프랴니시니코프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러시아 미술사에서 처음으로 파벨 페도토프가 비판적 사실주의를 실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그림은 귀족의 실상을 폭로하듯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을 보면 언뜻 생각하기에 제목과는 달리 귀족의 아침식사라고는 보기 힘들다. 
오른쪽 구석에 커튼을 젖히며 누군가 들어오려고 하자 황급히 책상위의 빵을 책으로 덮으려 하는 모습이다. 
귀족이라면 엄청 큰 식탁에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음식을 조금씩 입에 물고 오물오물 
우아하게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이 그림 안의 귀족은 아주 편안한 차림에 쟁반도 없이 
종이 위에 올려 놓은 음식을 양 볼이 터져라 집어 넣고 먹고 있다. 
겉으로는 우아한 척 다하면서 품위있고 격조 높은 모습을 하고 일반 평민을 업신여기는 귀족도 
실제로는 일반 사람과 똑같이 입안에 음식을 가득 물고 우걱우걱 먹는 다는 설정인가 보다. 
들어오는 사람을 경계하는 듯 낯선 사람을 향하고 있는 강아지는 귀족이 키우는 강아지 답게 
결이 아주 부드러워 보이고, 미용에도 심혈을 기울인 것 같다.

막 아침 식사를 하는 중인데 예기치 않은 손님이 방문했다. 
손님도 어지간히 급한 성격인지 한 손으로는 벌써 커튼을 열고 있다. 
손님을 보고 짖는 개도 놀랐겠지만 더 놀란 사람은 귀족이다. 
근사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할 귀족의 아침 식사 모습은 보잘것 없다. 
급한 마음에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책을 들었지만 책상에 놓인 음식은 어떻게 하나? 
더 큰 문제는 입이 불룩 튀어 나오도록 먹은 음식이다.

보여주는 모습과 보여지는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세상 사람 대부분은 알고 있다. 
그 간극이 차이가 그 사람의 당당함을 결정하는 것이다. 
군에서는 정직하고 매우 열심히 일하는 장교로 인정을 받았던 페도토프도 
아마추어리즘의 영향으로 다른 많은 동료들처럼 다양한 분야의 예술에 관심을 보였다. 
플룻을 연주하는가 하면 아마추어 연극 무대에 서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드로잉과 그림을 그리는데도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 
군인 신분인 것을 감안하면 참 대단한 열정이다. 

 

Young Widow 아기가 태어나기 전 젊은 미망인, 1851-1852. by Pavel Fedotov. 
oil on canvas. 63.4 x 48.3 cm. Tretyakov Gallery Room 15.

촛불을 켜 놓고 기도를 올리다가 벌떡 일어나 세상을 떠나 
지금은 옆에 없는 남편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그림 속 남편과 눈을 맞추다가 결국 아내는 등을 돌리고 말았다. 
조금 더 그렇게 순간이 흐르면 그냥 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인의 손이 배 위에 머물렀다. 
남편이 남겨 준 생명은 엄마의 격한 마음을 알고 있겠는지...

아직도 여린 소녀처럼 보이는 여인이 상복을 입고 뱃속의 아이를 감싸며 슬퍼하고 있다. 
절망하는 그녀 뒤로 남편의 영정 사진이 보인다. 
앞으로 태어 알 아이는 아빠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다. 
탁자에 기대서 한숨짓는 어린 미망인의 눈물이 너무도 깊어 보인다.
바로 다음 그림과 함게 비교해서 보면 좋다. 

 

Young Widow. 아기가 태어난 후 젊은 미망인. 1851~1852년, by Pavel Fedotov.

Oil on canvas, 44.8 x 57.8 cm.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5.

그렇게 시간이 흘러 미망인은 상중에 아이를 낳았나 보다. 
남편을 잃은 슬픔을 견뎌내고 아이를 낳았을 여인은 어떻게든 살아보려 하겠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은 거 같다. 
이 그림의 톤이 한층 어두워진 걸 보면, 미망인이 짊어질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느껴진다. 
방안을 가득 메웠던 세간살이가 사라진 걸 보니 금 촛대며 
집안의 물건들을 팔아 하루하루를 연명한 것 같기도 하다. 
여인의 얼굴에 수심이 한 층 더 깊어지고 눈물도 메말라 지쳐 보인다.

 

Police Commissary's Reception Room the Night Beforea Holiday 1837. <명절 전 관리의 방 대기실> 
by Pavel Fedotov. Watercolor, pen and Indian ink on paper mountedon paper, 24 x 18 cm.  
Tretyakov Gallery Room 15.

손바닥만한 종이에 수채화로 별 것이 다 그려져 있다.
페도도프는 이미 오래 전에 어쩌면 더 위험한 그림을 그린 바 있다.  
<명절 전 관리의 방 대기실(1837)>이 그것이다.  
그곳에는 명절을 맞아 관리에게 무엇인가를 바치고 눈도장을 찍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서있다.  
가로 세로 20cm 내외인 이 손바닥만 한 수채화 속에서 
흰옷을 입은 농부는 아예 돼지 한 마리를 업고 들어선다.

페도토프의 대표작인 <소령의 구혼(1848)>은 <새 수훈자>와 함께 
그가 미술 아카데미展에 출품한 작품이다. 
지위를 가졌지만 가난한 남자, 그리고 신분이 낮으나 돈은 많은 집안. 
양측이 이러한 서로의 취약점을 보완하는 현명한 결합을 일삼던 시대를 풍자한 그림이다.    

 

Difficult Bride. 다루기 힘든 신부. 1847. by Pavel Fedotov. oil on canvas. 
45 X 37 cm. Tretyakov Gallery Room 15. 

‘공주과’ 신부인 모양이다. 무릎을 꿇고 꽃을 건넨 남자는 여인의 손을 잡았지만 
여인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한 표정이다. 
커튼 밖에서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가관이다. 
여자의 치켜든 손가락에서, 미간을 잡고 ‘아이구 머리야’ 하는 사내의 몸 짓에서 
신부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다. 
아마 돈 많은 집의 외동딸쯤 되는 것 같다. 당연히 유서 깊은 집안은 아니겠고... 
여인의 손을 잡고 있는 사내의 표정은 아주 간단하다.

‘너하고 결혼 할 수 만 있다면 이런 수고쯤이야’
여인보다는 돈을 보고 있는 음흉한 사내의 속마음이 들려 온다.
내용은 우습지만 장면을 바라보는 페도토프의 눈은 차갑다.
19세기 전반부에 시작된 러시아의 아마추어리즘은 독특한 매력이 있다. 
전문가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 예술가의 흉내를 내는 것인데 (따라 한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도 같다) 
사회 전체로 본다면 광범위한 예술적 토대가 쌓이는 효과가 있었다. 
아마추어리즘의 영향으로 구축된 역량은 젊은 예술가들이 끝없이 탄생하는데도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 
지금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물질 숭배를 생각하면 가슴 한켠이 답답하다.

 

Portrait of Princess Maria V. Vorontsova, 1851. 황녀 보론초바의 초상, by Sergey Zaryanko. 
oil on canvas. 146.4 x 120.5 cm. Tretyakov Gallery Room 15.

S.K. 자란코 작, 황녀 보론초바의 초상 (1851)
세게이 자란코 (Sergey Konstantinovich Zaryanko 1818~1870)는 벨라루스 혈통의 
러시아 초상화 화가이자 미술 교사였다.
1834년 Alexey Venetsianov 의 추천 덕분에 그는 Imperial Academy of Arts 에 입학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초상화보다는 인테리어를 그렸고 Maxim Vorobiev 와 함께 풍경화를 공부했다 . 

1836년 그는 은메달을 받았고 2년 후 "예술가"라는 칭호를 받은 후 1841년에 또 다른 은메달을 수상했다.
1843년에 그는 "학자"로 지명되어 모스크바로 가서 알렉산드로프 군사 연구소의 
교사가 되었고 아이콘 화가로 일했다. 
1846년부터 그는 모스크바 궁전 건축학교에서 수업을 했지만 

곧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초상화 작업을 시작했다. 

1856년 Feodor Pryanishnikov의 추천으로 그는 모스크바 회화, 조각 및 건축 학교에서 
회화 선임 교수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그곳에는 바실리 페로프, Illarion Pryanishnikov 와 
바실리 푸키레브 등 주목할만한 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그는 1860년대에 거의 그림을 그리지 않고 대신 가르치는 데 집중했다. 
수년 동안 눈의 피로를 앓아 온 그는 한쪽 눈의 시력을 잃고 갑자기 죽었다.

자란코의 예술 작업을 보면 그림을 바라보는 느낌이 사라진다. 
우리는 눈에 반짝이거나 약간의 슬픔이 있는 실제 인물을 보게 된다. 
독특한 특징과 미묘한 감정의 음영이 있다. 
이같은 기술로 자란코는 1851년 황녀 보론초바의 초상화를 그렸다.


한 젊은 여성이 오토만에 앉아 있다. 모델의 몸에는 장식이 없다. 
하지만 솜씨 좋은 헤어 스타일과 절묘한 화이트 드레스가 이 부족함을 메워 준다. 
보론초바의 얼굴은 아름답고, 건강한 홍조가 있고 사려깊다. 갈색 눈동자는 어딘가 멀리 보고 있다. 
자연스러운 광택은 전체 이미지를 끌어 당기고 되살린다.

 

Collapse (Street Market), 야외 시장. by Sorokin Evgraf Semenovich.

소로킨 세묘노비치 (Sorokin Evgraf Semenovich 1821 - 1892)는 러시아 예술가이자 교사였다. 
역사, 종교 및 장르 그림으로 유명다.
세묘노비치는 야로슬라블의 아이콘 화가로 견습 기간을 보냈다. 
그의 작품을 좋아했던 한 현지 신부는 차르 니콜라스 1세가 방문할 것을 대비해 
그에게 피터 대제의 작품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이 그림을 선물로 받은 니콜라스 1세는 소로킨의 작품에 감명을 받아 
그를 임페리얼 미술아카데미에서 공부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

1841년 세묘노비치는 Alexey Tarasovich Markov의 감독 하에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 
이듬해 그는 이미 아카데미 위원회로부터 인정받고 칭찬을 받게 되었다. 
그는 몇 개의 은메달을 획득했으며 1847년 금메달을 받았다. 
그는 1851년부터 1854년까지 스페인에, 1855년부터 1859년까지 이탈리아에 머물렀다. 
그 사이에 그는 서유럽을 여행했다. 이집트와 시리아도 방문했다. 
그가 스페인에서 만든 작품 중 일부는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1859년에 그는 모스크바로 돌아와 회화, 조각 및 건축 학교의 교사로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
1861년에 그는 "학술가"로 지명되었고 파리의 새로운 알렉산더 네프스키 대성당의 상징성을 창조했다. 
나중에 그는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에서 일하면서 상징성을 창조하고
 Fyodor Bruni가 미완성으로 남겨둔 일부 이미지를 완성했다. 
그 작업을 위해 그는 1878 년에 "교수"로 승진했다. 

그의 정확한 사망 날짜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Spanish beggar girl. 1852. 스페인 거지 소녀. by Sorokin Evgraf Semenovich.

 

Sophia Vasilievna Sukhovo-Kobylina - Self-portrait, 1847. 화가 수코보-코빌리나 자화상.
Oil on carboard. 37.9 x 27.9 cm. Tretyakov Gallery Room 15.

화가 수코보-코빌리나 (Sukhovo-Kobylina Sophia Vasilievna 1825~1867) 자화상.
소피아 코빌리나는  Imperial Academy of Arts 에서 우등으로 졸업한 최초의 여성이었다. 
그녀의 여동생 Evgenia Tur와 형제 Alexander Sukhovo-Kobylin 은 모두 유명한 작가다.

코빌리나는 부유한 지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인 Vasily (1782-1873)는 귀족 원수였다. 
코빌리나와 그녀의 형제 자매들은 모스크바 대학의 교수들로부터 집에서 교육을 받았다. 
예술가로 진로를 결정한 후 코빌리나는 풍경화가 Yegor Meyer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코빌리나가 재능이 있다고 확신한 Yegor Meyer는 그녀의 임페리얼 아카데미 입학을 위해 로비했다. 
1849년 코빌리나의 작품 중 하나는 아카데미 전시회에서 높은 평가와 함께 은메달을 받았다

1850년부터 1851년까지 코빌리나는 Meyer와 그외 다른 학생들과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1852년부터 1853년까지 그녀는 Meyer와 함께 크림 반도로 또다른 여행을 떠났다. 
코빌리나가 그곳에서 보낸 그림은 금메달을 받았다. 
그녀는 1854년 또 다른 금메달로 졸업했고, 이 학문적 경로가 앞으로 여성에게도 
화가로서의 길이 열려 있다는 메시지가 되어 메달을 받은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1857년에 코빌리나는 로마에서 살기 시작했고 그녀의 집은 
이탈리아를 방문하는 러시아 예술가들의 모임 장소가 되었다. 
코빌리나는 또한 로마를 방문했거나 로마에 살았던 유명한 러시아인들에 대한 에세이를 
러시아 잡지에 썼는데, 이 글의 대부분은 오늘날에도 ​​역사가들에게 가치가 있다.

코빌리나의 삶의 마지막에 대한 정보는 정확하지 않다. 
1868년 임페리얼 아카데미에서 주요 회고전이 열렸고 그녀의 작품 150점 이상이 판매되었다. 
대부분은 이탈리아의 풍경과 유명한 이탈리아인의 초상화이다. 
코빌리나의 그림의 대부분은 개인 소장품으로 남아 있다.

 

Religious procession at the Cathedral of the Annunciation in the Moscow Kremlin, 1860. 
by Karl-Friedrich Petrovich Baudry. oil on canvas. 61 x 85 cm. Tretyakov Gallery Room 15.

화가 칼 프리드리히 보드리 (Karl-Friedrich Petrovich Baudry 1812~1894) 작품,

크레믈 궁 블라고베쉔스키 사원과 소보르나야 광장이다.
크레믈 궁 안에는 사원이 많다. 
특히 일반인에게 개방되는 대표 사원 세 개가 있는데, 
우스펜스키 사원, 아르항겔스키 사원, 블라고베쉔스키 사원이라 불린다. 


이 세 개의 사원으로 둘러 싸인 곳을 소보르나야 광장(Соборная плошадь)이라 부르고 
이 곳에서는 국가적 차원의 행사가 다양하게 열린다. 
그림 속 사람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바로 그곳이다. 
이 그림 또한 마치 사진으로 찍은 듯 사실적이며 환한 빛에 노출된 사원 광장의 
화사한 느낌이 너무도 잘 표현된 작품이다.

 

In the Room, 1854. 방에서. by Ivan Fomich Khrutsk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5.

화가 이반 크루츠키 (Ivan Fomich Khrutsky 1810-1885)
그는 후손 벨라루스어 가정에서 태어났다. 
1827년 크루츠키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왔고 1830년에는 Imperial Academy of Arts에 들어갔다 .
크루츠키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로도 일했으며 부유한 주택 소유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1836년에 그는 정물화로 아카데미의 메이저 은메달을 수상했다. 
크루츠키는 또한 멋진 장르 사진과 초상화를 그렸다. 
1840년 그의 아버지가 사망 한 후 크루츠키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영원히 떠나 
폴로츠크 지역의 자카르니치 (Zakharenichi, Zacharniczy) 가족 소유지에 정착했다. 
그는 1885년 자카르니치의 영지에서 사망했다.

 

Tretyakov Gallery Room 15. 작품 전시실

 

 

[Room 8 - 15] 19세기 전반기 회화 <초기 풍속화의 시대>

 

Self-Portrait with Brushes and a Palette Against a Window Facing the Kremlin. 1844.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by Vasily Tropinin. Tretyakov Gallery Room 13.

 

크렘린이 내려다 보이는 창에 브러시와 팔레트가 있는 바실리 트로피닌 자화상. 
바실리 트로피닌(Vasily Andreevich Tropinin 1776~1867)은  러시아 노브고로드 현 

칼포보 촌에서 출생하여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농노 출신 화가다. 
트로피닌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서 수학하고 초상화가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푸시킨 상> (1827, 레닌그라드, 푸시킨기념관),  
<레이스를 짜는 여자>(1823, 모스크바, 트레차코프 미술관)가 유명하다. 

19세기 러시아 회화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 거리 가운데 하나가  
농노출신 화가들의 엇갈린 운명이다.  
농노는 지주의 재산이므로 그의 삶은 전적으로 주인의 호의에 달려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여기서 한번 상상을 해보자.  
때는 농노가 집에서 기르는 소나 말과 다름없었던 그 시대,

우리는 넓은 토지를 보유한 귀족 지주들이라 하자.  
그렇다면 당신과 나는 고매한 신분의 사람들이지만 
휴머니즘에 대해서는 어떤 교육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리고 아마 우리의 일상은 좀 따분할 것이다.  
물려받은 넓은 땅이 있으니 그저 농노와 가축들을

엄히 다스리기만 하면 먹고사는 문제는 다 해결된다.  
게다가 농경사회의 일상은 거의 변화가 없다. 
어제 같은 오늘, 그리고 오늘 같은 내일이 있을 뿐이다. 

하루를 가득 채우고 있는 지독한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벤트가 필요하다.  
심심찮게 열리는 무도회는 그래서 우리의 중요한 소일거리가 된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허세를 부리고 서로 교양을 뽐낸다. 
하지만 사실 주된 관심은 이성에 관한 것이다. 
능력이 되고 운이 좋은 사람은 불륜을 즐기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질시에 가득차서  
그에 대한 가십을 씹으며 카타르시스를 맛본다.  
그렇게 오늘도 무료한 하루가 그럭저럭 흘러가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서 부리고 있는 농노들 가운데 바실리란 녀석이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 요놈 봐라. 역시 소나 말보다는 사람이 더 기특한 존재이다.  
특이한 재능이 발견된 바실리는 그때부터 경작용 가축에서 
나리의 무료함을 달래줄 애완동물로 보직이 바뀌게 된다. 

나리는 우선 이것저것 그림을 그려 보게 할 것이다.  
그리고 주위의 다른 귀족들을 불러 자랑하기 시작할 것이다.  
부러움을 안고 집으로 돌아간 귀족들은 자신의 농노들 가운데에는

저런 녀석이 없는지 찾아볼 것이다. 

이제 이 애완동물은 주인에게 큰 기쁨을 주는 존재가 되었다.  
어느 날 주인은 이 녀석의 가치를 좀 더 키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좀 더 재미있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바실리는 미술학교에 입학해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게 된다. 

바실리는 처음에 무척 행복했을 것이다.  
힘겨운 노역에서 벗어나 좋아하는 그림만 실컷 그리면 되었으므로.  
그는 주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유명화가들의 그림을 모사하고,  
주변의 풍경과 농민들의 생활을 그려 나간다. 

주인님의 배려로 미술학교에 다니게 되었을 때는 꿈이 아닐까 싶었다.  
주님과 주인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밤새 올렸다.  
학교에서 만난 동료학생들은 신분이 다른 사람들이었으므로,  
그들이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해 줄 것이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은 그의 재능을 부러워하며 친구처럼 대해주기도 하였다. 

바실리는 행복했다.  
아무 대중없이 그려대던 그림은 하루하루 수업을 받는 동안 틀이 잡혀가고,  
이제 예술이 무엇인지를 좀 알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이 전부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림이 무르익을수록 기쁨도 커갔지만 마음 깊은 곳에 언제부턴가  
까칠한 모래 한 알이 박혀 아픔을 주고 있다.  
그림에 대한 주위의 찬탄이 커질수록 아픔도 점점 커짐을 느낀다.  
문제는 그의 신분이 미천한 농노라는 것이다. 

미술학교의 동료들은 저마다 삶의 주체로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으나 그는 그럴 수 없다.  
바실리에게 그림 그리기는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일인가.  
그것은 자신의 생각과 가치를 창의적으로 표현하고 행복을 느끼는 행위가 아니라  
주인을 기쁘게 하는 노동일 뿐인 것이다. 

그의 그림이 아무리 빛을 더해도, 어느 날 붓을 놓고 다시 밭으로 나가라는  
주인의 한 마디가 떨어지면 모든 것이 일장춘몽으로 돌아가는 신세인 것이다.  
농노의 신분이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지금까지 그는 그것을  
숙명으로 생각했을 뿐이므로 이처럼 뼈저리게 절망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고통은 점점 깊어간다. 밤이면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르는 가축으로 지내던 시절이 더 나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때는 비록 몸은 고되었으나 단잠을 잘 수 있었다. 

어느 날 바실리의 재능을 아끼던 스승이 그의 딱한 처지를 보다 못해 나선다.  
그는 바실리를 농노신분에서 풀어주도록 주인에게 간청한다. 
주인은 당연히 펄쩍 뛸 것이다. 
스승은 그를 열심히 설득한다.  
바실리의 재능을 한낱 농노의 흥미로운 재주쯤으로 썩혀버리는 건 너무 아깝다.  
그가 당당한 예술가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당신께 얼마나 감사하겠는가.  
아마도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평생토록 보답할 것이다.        

우리가 만약 바실리의 주인나리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여기서 유의할 것은 우리 휴머니즘의 눈높이를  
당시 러시아 귀족의 평균적 수준으로 한참 내려 맞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농노를 매매하거나 재판도 없이 형벌을 가하는 일에 가책을 느끼지 못하던 사람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그랬으므로,  
그런 일에 왜 가책을 느껴야 되는지를 알지 못하던 사람들의 수준으로 말이다. 

러시아 미술사에는 실제로 이와 유사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결과는 두 가지 상반된 경우로 나와 있다. 
먼저 고난 끝에 행복을 찾은 사나이, 바실리 트로피닌(1776~1857)의 이야기이다.   
시집가는 주인댁 따님의 혼수로서 모르코프 백작 가문에 들어가 살게 된 그는  
그림에 대한 재능이 눈에 띄어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아카데미에 보내졌다.  
당시 아카데미에 농노가 입학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교장의 재량에 속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때그때 달라졌다. 

꿈을 꾸는 것이 아닐까.  
물을 만난 고기처럼 그림에 빠져든 트로피닌.  
그의 뛰어난 능력은 학생들 가운데에서 금방 드러나게 된다.  
이를 아깝게 생각한 교장은 그의 주인에게  
농노의 신분에서 풀어줄 것을 간청하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백작은 트로피닌을 학교에서 빼내어 우크라이나 시골로 데려가 버린다.  
그곳에서 그는 다시 농노의 삶을 이어가게 된다.  
트로피닌의 하루는 온갖 허드렛일과 그 틈틈이  
주인이 주문하는 그림을 베끼는 노동으로 저물었다. 

자신도 창의성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을 이미 인식해버린,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그의 절망이 얼마 컸을까. 
하지만 그렇게 그의 인생이 끝나버렸다면 해피엔딩이라 할 수 없다.  
오랜 고통의 시간이 지난 후 그에게 마침내 기쁜 날이 찾아온다.  
트로피닌이 47세가 된 1823년, 주변의 설득으로 백작이 마침내 마음을 바꾼 것이다. 

왜 그랬을까. 평판을 의식해서였을 수도 있고,  
마음 한구석에 숨어있던 인간적인 연민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혹은 당시 몰락해가던 귀족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돈이 궁해서일 수도 있다.  
기록에 의하면 트로피닌은 그의 신분과 가족을 백작으로부터 돈을 주고 산 것으로 나와 있다. 
평판에 대한 의식과 연민이 비록 얼마간 작용했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이 일은 공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모르코프 백작을 치사한 인간으로 비난하는 것은 그리 적절한 처사가 아닌 것 같다.  
우리가 그라면 다른 처신을 하였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트로피닌은 해방된 이듬해에 아카데미의 회원 자격을 얻게 되었고,  
그후 삼십 여 년간 인정받는 화가로서 행복한 삶을 살다 갔다.

 

자화상. Self-Portrait. 1830.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3.

바실리는 백작의 농노로 태어났다.  
주인의 딸이 시집갈 때 지참금으로 함께 보내진 노예. 
손재주가 많아서 빵기술을 배워오라고 상트 페테르부그로 보내졌는데 거기서 미술아카데미에 들어갔다. 
원래 노예는 입학이 안 되는데 마침 그때 교장이 트로피닌의 재주를 알아보았나 보다.​  
교장이 바뀌어 트로피닌은 아카데미에서 쫒겨난다. 
재주를 알아본 교장이 백작에게 자유를 주라고 간청했지만 들어줄 리가 없다. 

그림을 잘 그리는 노예, 남에게 자랑하기 딱 좋은 노예를 풀어줄 리가 또한 없다. 
영지로 돌아온 트로피닌. 빵 만들고, 백작이 시키는대로 거장의 그림을 모사하고, 초상화를 그린다. 
그때 트로피닌에게 그림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그 시기에 바실리는 아들의 초상화를 그린다. 왼쪽 상단에서 비춰지는 빛속에 환히 드러난 아들.
아들만은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간절함. 아들은 과연 자유를 얻었을까? 
트로피닌은 47세에 백작의 지인들이 설득해서 자유인이 된다. 
트로피닌이 돈을 모아 자유를 샀다는 설도 있다. 
그때부터 트로피닌은 부자들의 초상화를 그리지만 자기가 그리고 싶은 그림도 그린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재능 있는 화가였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제과 예술을 공부하기 위해 젊은 예술가는 여가 시간에  
제국 예술 아카데미의 수업에 비밀리에 참석했다.  
트로피닌 주인의 사촌이 그의 작품을 보고 재능 있는 젊은이의 교육비를 지불하도록 요청했다.  
이 결정은 젊은 예술가가 자신의 기술을 업그레이드 하고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아내인 안나 (Anna)를 만날 수 있게 했다. 

Vasily와 달리 Anna는 자유 농민이다.  
당시의 법에 따르면 결혼 생활은 자발적으로 종업원이 되어야 했지만 사랑에 찬성하여 결정을 내렸다.  
아카데미를 졸업 한 직후, 트로피닌은 쿠카브키 (Kukavki) 마을의 교회를 페인트칠하라는  
첫 번째 명령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그는 일을 마치고 연인과 결혼했다. 
1823년, 트로피닌에게 대망의 사건이 일어났다.  
부활절을 위한 선물로, 그는 주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5년 후, 그의 아내와 아들에게도 관리 권한이 부여되었다.  
그들의 행복한 가정 생활은 거의 50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Anna가 사망한 1855년에 끝났다. 

 

The Lace Maker, 1823.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74.7 x 59.3cm. Tretyakov Gallery Room 13.

레이스 뜨는 일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근면함과 미덕을 드러내는 고귀한 일로 여겨져 왔다.  
레이스가 화면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그녀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레이스가 얼마나  섬세하고 아름다울지를 말이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서 미인 대회를 하면 반드시 5위 안에 들어갈 이 미인은  
바실리 트로피닌(1776~1857)이 그린 <레이스 뜨는 여인>이다. 

<레이스 뜨는 여인>의 군살 하나 없는 팔은 조각처럼 매끈하고 단단해 보인다.  
화면에 떨어지는 빛은 섬세하고 부드러운 명암을 만들어낸다.  
텅 빈 배경은 관람자로 하여금 그녀에게만 집중하도록 한다. 

​여러 가지 작업 도구들이 눈에 띄긴 하지만 이것은 풍속화적인 관점이 아니라  
인물을 신분이나 업적을 통해 묘사하는 고전주의적 관념에 따른 그림이다.  
17세기 얀 베르메르의 그림 속 여인은 레이스 뜨기에 여념이 없다. 

섬세한 노동을 위해서는 대낮의 밝은 빛이 필수적이다.  
환한 빛에 노출된 여인의 이마와 손에 나타난 드라마틱한 음영은  
집중력을 요하는 일에 몰두한 작업자의 내적 긴장감을 표현하고 있다.  

​20세기 초현실주의 작가 살바도르 달리는 베르메르의 작품 <레이스 뜨는 여인> 을 보고 

베르메르는 바늘을 그리지도 않았는데 자신은 바늘에 찔린 것 같은 통증을 느낀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사실 그럴 만도 한 게, 작업하는 여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고 바늘도 보이지 않지만  
베르메르의 작품은 압축적인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베르메르 작품의 인물은 초상화적이라기보다 풍속화적으로 해석되어 있다. 

즉 베르메르가 '노동'을 강조했다면 트로피닌은 '인물'을 강조했다.  
트로피닌의 그림 속 여인은 관람자를 위해 기꺼이 일을 멈추고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고 있다.  
트로피닌은 고전주의적인 명료한 필체와 섬세한 감정을 결합시킴으로써  
평범한 여인을 위엄 있는 존재로 만들었다.  
그녀는 마치 민중의 옷을 입고 등장한 여신과도 같은 존재다.  

​트로피닌은 상류층 귀족 부인을 그리는 방식대로 이 평범한 농민 여인을 그렸다.  
물론 그림 속 여인은 그림 속의 귀족들처럼 이상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이상화가 역겹거나 거짓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농노 출신 화가 트로피닌이 
귀족 부인이나 위인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농민 아낙네에게서도 
인간적인 존엄성을 발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친숙하고도 자기 완결적인 미소는 그녀를 그림 속 어느 귀부인 못지 않은  
당당한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로 만들고 있다. 

그런데 정말 그녀의 현실은 어땠을까?  
레이스 뜨기는 여성 민중들에게 부가된 과외 노동이었다.  
십중팔구는 낮에는 밭에서 일하고 가사 노동을 하고 
아이들을 돌본 다음 밤에 주로 과외 노동을 하였다. 
​간혹 재주가 뛰어나 레이스 뜨기만 전문으로 하는 여성의 경우에도 
가사 노동과 육아를 면제받을 수는 없었다.  
가전제품이 전무하던 19세기 여성들의 노동 강도는 오늘날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다.  
이 그림을 그린 트로피닌도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러시아 귀족들은 확실히 더 부유하고 행복하고 세련되어졌다.  
그러나 귀족들이 '황금 시대'를 누리고 있을 때, 
시골 영지의 민중들은 여전히 암흑 속에서 살았다.  
러시아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19세기까지 봉건 농노제가 유지된 나라다. 

예카테리나 2세 재위 기간에 카자크의 농민 푸가초프가 
반란을 일으켜 여제를 위기에 몰아넣기도 했다.  
그러나 반란은 곧 진압되었고 1785년 발표된 '귀족 헌장'은 
오히려 귀족의 특권을 더욱 강력하게 보호했다. 
당시에 농노 소유주는 농노를 체벌로 다스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질 정도로 농노의 처지는 비참했다.  
자유로운 신분의 농민의 삶도 참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바실리 트로피닌은 이런 비극적인 현실을 배경으로 태어났다.  

농노로 태어난 그의 주인인 백작의 딸이 
모르코프 백작 집안으로 시집을 가면서 결혼 지참금으로 함께 보내진다.  
비록 농노 신분이었지만 트로피닌은 빼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  
손으로 하는 일이라면 못하는 것이 없었던 그를 
주인은 재빵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낸다. 

화려한 도시는 그의 내부에 숨겨져 있던 그림에 대한 열망을 부추켰다.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림을 그릴 줄 아는 농노 또한 자랑할 만한 것이어서 
주인은 그의 아카데미 입학을 도와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의 입학 자격은 교장의 입장에 따라 그떄그떄 달라졌는데,  
트로피닌이 입학할 당시에는 다행히 농노의 입학이 허용되었다. 
그러다 1817년에 올레닌이 미술 아카데미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농노 출신 학생의 입학이 금지되었고 재학생들까지 쫓겨났다.  

트로피닌은 아카데미에서도 발군의 재능을 보여 주었다.  
1804년 미술 아카데미 연례 전시회에 출품된 그의 작품은 예카테리나 2세의 주목을 받는다.  
당시 미술 아카데미 교장이었던 스트로가노프는 트로피닌이 농노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중재를 하지만 정작 주인인 모르코프 백작은 재능있는 농노를 잃기 싫어 
졸업 직전에 그를 우크라이나의 영지로 다시 불러들인다. 

근대적인 미술 교육을 받은 재능있는 젊은 화가는 
신분이라는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꿈이 꺾이고 만다.  
영지에 돌아와서 그는 제빵사로, 하인으로 일한다. 
그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유럽과 러시아 거장들을 그림의 모사하기도 하고  
주인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우크라이나의 고립된 시골 영지 생활을 회상하며 트로피닌은 그때 
자신은 노예에 불과했다고 술회했다.

 

Zolotoshveyka​, Gold-Embroideress, 1826,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81.3 x 63.9 cm. Tretyakov Gallery Room 13.

농노들에 대한 트로피닌의 깊은 이해와 따뜻한 배려가 그림에 배어 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도, 어떤 대우도 받지 못하는 농노들이지만, 
애정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관찰해 가장 최상의 순간을 그림으로 탄생시킨다. 
그림 속 소녀 또한 자수를 놓던 손길을 멈추고 가장 깨끗하고 선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그런 소녀의 청순함과 아름다움이 이 그림에서 넘쳐난다.

눈이 예쁜 소녀들이 우릴 바라보며 말을 건넨다.  
일하던 손을 멈추고 얼굴을 돌려 부드럽고 다정다감한 눈빛을 보낸다.  
그리고 자기에게서 시선을 떼지 마라 속삭인다. 
잘 익은 복숭아 같은 볼에 분홍빛 생기를 넣고, 예쁘게 부풀어 오른 입술에 살짝 붉은빛을 물들이며, 
미소 짓는 도톰한 입매에 새침함을 덧칠하고, 적당히 솟은 콧날로 얼굴 전체에 귀품을 입힌다. 
매끈한 소녀의 피부는 환한 빛을 받아 더욱 건강하게 빛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가는 빛을 뿌리고 생명을 넣어 소녀들의 맑은 눈동자를 그렸으리라. 
선하고 순수한 눈매를 그리기 위해 세밀한 붓 터치를 반복했을 거다.

그렇게 탄생한 트로피닌의 소녀들은 아주 매끈하고 싱그럽다. 
작가의 손에 순차적으로 살아났을 소녀들의 생명력을 상상하며 그림을 본다. 
바로 눈앞에서 숨 쉬는 듯 생생함이 느껴진다. 
손으로 만지면 체온이 느껴질 듯 그림이 따뜻하고,  
소녀들이 품어내는 풋풋함이 화폭 전체를 생명력 있게 메운다.

 

Spinner.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3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3

부드럽고 은은한 아름다움.  
예술 작품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작가들의 본성이나 내면을 읽어낼 수 있다.  
트로피닌은 분명 선한 본성을 가졌을 거다.  
작품에서 그의 내면이 우러나온다.  
'아름다운 것이 가장 선한 것이다'라고 말한 도스토옙스키의 가르침처럼  
예술을 향유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아름다움에 대한 감흥을 받아 스스로 선해지는 데 있다.  
트로피닌의 소녀가 충분히 나를 선하게 만든다.

인간 개개인의 심성 표현을 중시한 러시아 화가들은 초상화를 그릴 때 
모델의 표정과 내면 정서를 부각하는 데 중점을 둔다. 
트로피닌은 귀족들의 전유물인 초상화에 과감히 평민 소녀를 모델로 등장시키고 
일하는 모습 속에서 발현되는 일상의 아름다움을 진실되게 표현한다.

소녀들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포착해 내는 트로피닌의 관찰력과 표현력이 정말 대단하다. 
서양 미술사 전체를 통틀어 트로피닌의 소녀들만큼 순수하고 깨끗하고 
어여쁜 초상화가 또 있을까? 감히 최고라 말하고 싶다.
그러나 트로피닌의 화가로서의 삶은 그리 평탄치 않았다. 
19세기까지 봉건 농노제가 유지되었던 러시아는 
귀족과 농노 이 두 계급으로 분리된 사회구조였다. 


당시 귀족의 소유물이었던 농노는 자유로이 공부할 수도 여행을 다닐 수도 없었으며, 
지주들은 농노를 체벌로 다스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불합리한 신분제도를 가진 러시아였다. 트로피닌 또한 농노 출신이다. 
다행히 트로피닌은 지주의 허가로 뻬쩨르 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 
정규 미술 교육을 받는다.

이때 트로피닌의 천재적 재능이 빛을 발해
미술 아카데미 전시회에서 예카테리나 2세의 극찬을 받는다. 
당시는 황제의 말 한마디가 요즘의 그 어떤 상보다 가치가 있었을 거다.
하지만 트로피닌의 급성장을 두려워한 주인은 졸업도 하지 않은 그를 
고향으로 불러 들이고 미술교육을 중단시킨다. 
천재적 재능을 가졌으나 트로피닌은 그렇게 화가의 꿈을 접고 
지주의 뜻에 맞춰 살아가게 된다. 

꿈을 펼치지 못하는 천재화가 트로피닌의 시골에서 삶이 얼마나 무미건조 했을까.
그러던 트로피닌은 주위 지인들의 끊임없는 부탁으로 44세가 되어 
신분 해방이 이뤄지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화가는 인고의 세월을 보냈겠으나 농민으로 보낸 시간들이 그림에 깊이 배어 있다. 
농노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따뜻한 배려가 예술로 승화되어 있다. 
노동하는 민중, 농노에게도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인간으로서 삶이 있음을 여러 
그림들을 통해 세밀하게 표현한다.

 

Portrait of Arseny Tropinin, Son of the Artist, 1818, 트로피닌 아들의 초상.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3

이 그림은 트로피닌이 미술 아카데미에서 쫓겨난 후
우크라이나의 모르코프 백작의 영지에서 농노로 일할 때 그린 아들의 초상화다.  
사려깊어 보이는 소년은 모델 서는 일이 어색한지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  
꿈을 접어야 했던 아버지는 아들을 그리고 있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속내를 알고 있는 것일까?  
아들만은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인지 
아버지는 아들에게 빛의 축복을 내리고 있다.  
빛은 흰색 셔츠 깃에 반사되어 소년의 눈썹과 코를 타고 흘러내려 목과 쇄골에 이른다.  
설렘같은 조용하면서도 가쁜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다. 

​빛이 강한 만큼 얼굴의 반대편은 어둠 속에 잠겨 있다.  
화가는 어린 소년이 세상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을 이해하는 듯이 어두움을 드리운다.  
이 어두움에서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자유는 아주 늦게 찾아 왔다.  
1821년 모르코프 백작은 식솔을 거느리고 모스크바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때 농노인 트로피닌도 함께 모스크바에 오게 된다.  
그의 재능을 알고 있는 지인들이 모르코프 백작을 여러모로 설득해 
마침내 그는 농노 신분에서 해방된다. 

​그의 나이 마흔네 살 때였다.  
선천적으로 선량한 사람이었던 트로피닌의 그림 속에는 어떤 악의도 없다.  
그는 귀족이건 농민이건 똑같은 태도로 인물을 대했다.  
트로피닌은 자유로운 신분이 되었지만 농노로 살았던 자신의 삶을 잊지 않았다. 

그는 노동하는 민중의 삶을 아름답게 그려 내며 그들의 덕성을 칭송한다.  
<레이스 뜨는 여인>도 이런 맥락에서 그려진 것이다.  
이 드림이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고 지적해도 어쩔 수 없다.  
실제로 목가적이고 조화로운 그의 인물들은 소비에트 시절에는 
'너무나 수동적이고 명상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저항 의식의 결여를 지적한 것인데, 트로피닌이 농노의 거친 삶을 

견뎌 낼 수 있었던 건 오히려 이런 고전주의적인 회화 감각 덕분이었다.  
감정적 중용을 중시하는 고전주의적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로 
트로피닌은 삶의 어두움을 지워버렸다. 

그는 오래 살았다. 농노에서 해방된 말년은 비교적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해방된 농노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많은 농노들이 1863년 농노 해방령이 내려질 때까지 지옥 같은 삶을 살았다. 

 

An Old Man. ​지팡이를 만드는 장인.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oil on canvas. 
76 x 56 cm. Tretyakov Gallery Room 13.

이 그림은 트로피닌의 여러 초상화들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그림이다. 
아쉬운 점은 실제로 봐야 느낄 수 있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지만 이렇게 포스팅해 본다. 
오랜 세월 저 자리에 묵묵히 앉아 평생을 일했을 장인의 모습이다. 
그의 눈빛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세월을 참아낸 그의 시간들이 그림 전체에 배어 있다. 
굳은 살 밴 그의 손에서, 숱이 얼마 남지 않은 흘러내린 그의 머리 카락에서, 
꽉 다문 입술에서, 평생을 관조했을 그의 삶을 읽어낼 수 있다. 
초상화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감동을 품은 그림이다.

 

Portrait of A. I. Baryshnikov, 1829.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3.

 

Portrait of E. A. Sisalinoy, 1846.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3.

 

Portrait of Ivan Vitali, 1839.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3.

 

Portrait of Vladimir Davydov.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3.

 

Portrait of V. M. Yakovlev, 1830.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3.

 

A Spinner. 1820.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3. 

 

Portrait of A. I. Tropinina, the Artist`s Wife, 1809.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3.

 

Portrait of the Writer and Historian Nikolay Karamzin, 1818.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3.

 

Guitarist, 1823.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3.

 

Portrait of Morkov.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3.

 

Woman at the window, 1841.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3.

 

Bulakhov Peter, 1823.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Portrait of Konstantin Ravich. 1823.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Portrait of Countess N. A. Zubova. 1834.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Portrait of Karl Brulloff, 1836.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Portrait of Yu. F. Samarin in the Hunting Dress. 1846.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Boy with zhaleyka.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An Old Man.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이 그림은 트로피닌의 여러 초상화들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그림이다. 
그의 눈빛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세월을 참아낸 그의 시간들이 그림 전체에 배어 있다. 
굳은 살 밴 그의 손에서, 숱이 얼마 남지 않은 흘러내린 그의 머리 카락에서, 
꽉 다문 입술에서, 평생을 관조했을 그의 삶을 읽어낼 수 있다. 
오랜 세월 저 자리에 묵묵히 앉아 평생을 일했을 장인의 모습이야말로
초상화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감동을 품은 그림이다.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13. 바실리 트로피닌 작품 전시실

 

Self Portrait, 1811, 자화상.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4.

화가이자 판화가인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 (Alexei Venetsianov 1780-1847)는 
러시아 농민을 주제로 한 장르화의 선구자로 손꼽힌다.  
러시아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사립기숙학교에서 공부한 뒤 디자이너로 일했다. 

1802년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 측량기사로 일하며 독학으로 회화를 공부했다.  
1820년대 초 공무원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 생활 속의 장르화를 그렸다.  
미술아카데미 등에서 전시회를 열었으며, 그의 많은 제자들은 '베네치아노프 파'를 형성,  
러시아 미술사의 주요한 풍속화가 그룹으로 성장했다.   
베네치아노프는 사고로 길에서 비명횡사했다. 

19세기 들어 농노 출신 화가가 늘어나자 마침내 화단에서도 
신분에 대한 차별이 노골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선봉에 선 사람은 미술아카데미 원장 올레닌이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아카데미에서 농노 출신 학생들을 추방하는 일에 적극 나섰다.  
아카데미 과정을 수료하고 외국 유학을 앞둔 학생들의 발목을 잡고 앞길을 막는가 하면,  
과정 중인 학생들은 지주에게 돌려보내 그들의 '신분에 걸맞은' 하인이나 요리사 등으로 일하게 했다. 

이런 억압에 분노한 자유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였다.  
그는 하층 계급 출신들을 위한 작은 미술학교를 여는 것으로 나름의 대안을 모색했다.  
특히 1818년 아버지의 유산으로 트베리 현 사폰코보 마을의 땅을 사게 되자  
그곳에 학생들을 불러 모아 안정적인 교육을 행할 수 있었다. 

시골 마을에 자리 잡은 것이 화가로서 베네치아노프에게는 큰 축복이었는데,  
바로 여기서 러시아 농민의 일상과 노동을 주제로 한 수많은 걸작들을 탄생시켰다.  
러시아 미술사는 베네치아노프를 러시아 미술사상 최초로 
농촌 세계를 본격적으로 형상화한 화가로 평가한다.  

데카브리스트의 영향으로 민중에게 봉사하는 예술가가 되고자 했던 베네치아노프는  
러시아 회화사에서 처음으로 농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화가이다.  
그의 그림은 흡사 밀레의 농촌 풍경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그 속에서 사회적 모순에 대한 치열한 번민과 문제제기를 찾아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사후인 1860년대에 “미술을 인민에게”라는 구호아래 러시아 화단을 뒤집어 놓았던  
<이동파>의 정신이 그에게 닿아 있으며, 바실리 페로프(1834~1882) 등이 꽃피운  
러시아 풍속화의 원류도 베네치아노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베네치아노프가 농노들을 위한 미술학교를 설립한 것은, 1817년 A. 올레닌이란 냉혈한이  
미술아카데미의 새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농노출신 학생들을 깡그리 추방한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아카데미에는 농노 신분의 학생들이 상당수 재학하고 있었다.  
그때 러시아 인구의 60% 이상이 농노였던 점을 생각하면 이는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농노 화가들이  잠시 신분을 잊고 자유와 예술을 만끽하던 행복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올레닌에 의해 추방된 농노들은 다시 장원으로 돌아가서 숙명처럼 고된 노동에 종사해야 했다.  
베네치아노프는 그들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그림을 가르치던 아카데미와는 달리  
주변의 꽃과 가구, 실내장식을 스케치하며 실제의 생활에서 부딪치는 대상들에 주목하도록 지도하였다.  

19세기 후반을 장식한 크람스코이와 레핀, 수리코프, 세로프, 브루벨에 이르면  
러시아의 그림들은 미학적 기준으로도 서구의 걸작에 뒤지지 않을 만큼 수려하다. 
그러나 그 이전의 작품들은 주류로부터 때로

‘키치 (Kitsch, 대중적 싸구려 문화)’로 폄하될 만큼 세련되지 못한 점들이 있다.  
하지만 프랑스나 네덜란드의 회화와 러시아의 회화는 즐기는 방법이 달라야 하지 않을까. 

19세기 전반까지의 러시아 그림은 비록 고급스럽지 못할지 모르지만  
그 배경과 내용에서 독보적인 역사성을 갖고 있다.  
모네나 고흐의 그림에서 거친 터치와 빛나는 색채를 몰역사적으로 즐기듯이, 
19세기 러시아의 그림들로부터는 세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그 사회에서  
어떻게 무르익어 갔는지를 되새겨 보는 것이 제 맛을 느끼는 방법이 아닐까. 

미술아카데미에서 쫓겨난 농노 화가들을 위해 트베르 지방의 시골에 학교를 세워  
그림을 가르쳤던 베네치아노프의 독특한 이력은, 당시 대부분의 동료화가들과는 달리  
그가 아카데미 출신이 아니라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그는 러시아 사회의 비주류로서 귀족들을 조롱하는 풍자화를 남기기도 한 사람이다.  
그러나 평화롭기만 한 그림 속 풍경이 시사하는 바처럼, 베네치아노프는 사회적 모순을  
깊이 인식하고 이를 시정하려는 투철한 의식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는 말자.  
그는 무엇보다 불행한 농노 화가들에게 어버이와 같은 사람이었으며, 러시아 회화사에서 최초로  
농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사람이고, 파벨 페도도프(1815~52)를 거쳐 바실리 페로프(1834~82)에서 
만개한 장르화(풍속화)를 균형 있고 완전한 예술적 체계로 처음 정립한 사람이다.  
그것만 해도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는 우리가 주목할만한 화가인 것이다.

In the Fields. Spring, 1820,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51,2 х 65,5 cm. Tretyakov Gallery Room 14.

눈이 녹고 푸릇푸릇한 풀들이 돋아나는 땅에 여인은 첫 받갈이를 하고 있다.  
두 마리 말을 이끄는 그녀의 발걸음은 가볍고 경쾌해 보인다.  
그녀는 땅과 하늘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의 미덕을 강조한 탓인지 여인을 말보다도 더 크게 그렸다.  
여인은 작업복이 아니라 축제용 의상을 차려 입고 있다.  
의도적으로 농민의 삶을 이상화시키려는 시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 그림의 매력은 여인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놀고 있는 젖먹이 어린아이에게 고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들판에 앉아 노는 아이는 이 모든 봄 풍경의 가장 핵심 주제라하겠다.  
아기는 모르지만 그의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이 밭에서 풍요를 기원하는 것 보다 더 큰 풍요를 어린아이에게서 기대할 것이다.  
비록 자기땅은 아니지만 여인의 시선은 농민들이 갖고 있는 토지에 대한 모성애를 그대로 보여준다.

 

In the Fields. Spring, 1820,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51,2 х 65,5 cm. Tretyakov Gallery Room 14.

눈이 녹고 푸릇푸릇한 풀들이 돋아나는 땅에 여인은 첫 받갈이를 하고 있다.  
두 마리 말을 이끄는 그녀의 발걸음은 가볍고 경쾌해 보인다.  
그녀는 땅과 하늘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의 미덕을 강조한 탓인지 여인을 말보다도 더 크게 그렸다.  
여인은 작업복이 아니라 축제용 의상을 차려 입고 있다.  
의도적으로 농민의 삶을 이상화시키려는 시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 그림의 매력은 여인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놀고 있는 젖먹이 어린아이에게 고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들판에 앉아 노는 아이는 이 모든 봄 풍경의 가장 핵심 주제라하겠다.  
아기는 모르지만 그의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이 밭에서 풍요를 기원하는 것 보다 더 큰 풍요를 어린아이에게서 기대할 것이다.  
비록 자기땅은 아니지만 여인의 시선은 농민들이 갖고 있는 토지에 대한 모성애를 그대로 보여준다.

 

A Peasant Girl with a Calf, 1820, 소녀와 송아지.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65.5 x 53 cm. Tretyakov Gallery Room 14. 

베네치아노프는 귀족 화가이면서 자신의 집에 농노를 위한 미술학교를 만들고 
제도권 안에서 교육받지 못하는 농민들이 그림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이것이 대중 미술학교의 전신이다. 
또 그는 농민의 일상을 그림으로그린 최초의 작가이기도 해서 
러시아 미술사에서 풍속화의 처음을 연 작가로 베네치아노프를 꼽는다. 

그의 대표작 <소녀와 송아지>에는 소녀의 순박한 이미지와 어린 송아지의 맑은 눈, 
순수한 이미지가 서로 잘 어우러져 표현되어 있다.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순박함이란 단어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게 해준다.
그는 농민의 일상을 그림으로 그린 최초의 작가이기도 해서 
러시아 미술사에서 풍속화의 처음을 연 작가로 베네치아노프를 꼽는다. 

 

That is, Those Fathers Dinner!, 1824. 여기, 아빠의 저녁이 있다.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25.8 X 20.8 cm. Tretyakov Gallery Room 14.

1820년대에는 농부 주제가 베네치아노프의 예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림 “아버지의 저녁이 있다” 는 Imperial Academy of Arts (1824)의 첫 번째 보도 전시회에서 
발표되었으며 우유로 주전자를 떨어 뜨리고 그것을 흘리는 것에 대해 소년이 슬픈 표정을 짖고 있다. 
1820년부터 아카데미 홀은 사람들, 즉 모든 계급의 사람들을 아무 제한없이 들여 보낼 수있었다. 
베네치아노프의 예술은 그들과 공감하고 있었다. 


Imperial Academy of Arts V. I.의 비평가 및 미래 컨퍼런스 비서 Grigorovich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우유가 담긴 주전자를 떨어 뜨리고 흘려서 슬퍼하는 소년은 가능한 한 최선을 다했다. 
그의 충성스러운 친구인 개는 작은 주인의 불행을 같이 느끼고 있다. 
이 그림은 그 구성, 조명의 힘, 그리고 다소 큰 것 같은 왼발을 제외하고 
전체 인물을 아주 잘 묘사 한 점에서 돋보인다.” 

진정으로 감동적으로 묘사된이 장면은 감상적인 작가의 작품과 조화를 이루어 
약간 목가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그것은 “사람들의 정신”에 대한 낭만적인 탐색, 관습과 방법에 대한 연구와 일치한다.

 

Summer, Reaping, 1827. 여름 수확.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4.

 

Head of an Old Peasant, 1825.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4.

 

Zakhar, 1825.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rdboard. Tretyakov Gallery Room 14.

 

Portrait of the Artist's Daughter Alexandra, 1825~1826.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4.

 

Nurse with a Baby, 1830.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4.

 

Portrait of Merchant Obraztsov, Date unknown.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4.

 

Gril with the Cornflowers, 1820.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4.

 

Portrait of the Merchant's Wife Obraztsova, 1830.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4.

 

Bather with a Cup, 1832.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4.

 

Portrait of V.S. Putyatina, 1815~1816.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4.

 

The Spinner, 1838.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4.

 

Peasant Girl Embroidering, 1843.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4.

 

Haymaking, Date unknown.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4.

 

Portrait of Nikolai Gogol, 1840. 니콜라이 고골의 초상화. by Otto Friedrich Theodor von Mölle. 
oil on canvas. 59 X 47 cm. Tretyakov Gallery Room 14.

화가 오토 프리드리히 테오도르 폰 묄러 (Otto Friedrich Theodor von Möller 1812–1874)
오토 묄러는 Sõmerpalus에서 장관이자 제독인 Otto von Möller의 아들로 태어났다 . 
그의 아버지는 군사 항구 건설의 감독자였다. 
그는 장교직으로 갈 수 있었지만 군 경력을 원하지 않아 사임했다. 
1840년 묄러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묄러는 작가 니콜라이 고골을 만났는데, 
고골의 부탁으로 그에게 있어서 평생의 대표작이 되는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다.
이 고골의 초상화는 소련 우표로 두 차례에 걸쳐 사용되었고 
그 외에도 여러 러시아 그래픽 아티스트로 재현되었다.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 (Nikolai Vasilievich Gogol 1809~1852)은 

우크라이나 작가이며 극작가이다.
1809년 우크라이나에서 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1818년 풀타바 군립학교를 거쳐 1829년 네진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젊었을 때 배우를 지망했으나 성공하지 못해 문학으로 전환한 고골은 
철학, 문학, 역사에 관심을 두었고 이후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작품을 쓰게 된다. 

1827년에 페테르스부르크로 이주하여 우크라이나 인민의 생활을 취재한 
소설 <디카니카 근교 농촌 야화>를 출판하여 크게 명성을 얻었으며, 
이때부터 푸시킨을 사귀고 이후 그가 남긴 대작의 소재는 
거의 대부분 푸시킨으로부터 암시를 받았다. 
1834년 페테르스부르크 대학의 조교로서 세계사를 강의했으나 실패하여 곧 퇴직하였다. 
1836년 희극 <감찰관>을 알렉산더 극장과 모스크바에서 상연하였다. 
이것은 진보 세력의 절찬을 받았으나, 지배 세력으로부터는 공격을 받게 되어 그는 로마로 갔다. 

그 후 계속하여 스위스 · 파리 · 로마 등지에 거주하였다. 
1847년에 또 하나의 대표작 <결혼>을 쓰고, 같은 시기에 로마에서 
명작 <죽은 혼>의 제1부를 완성했고 제2부의 집필을 시작하며 
1848년에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건강을 해친 뒤였다. 
결국 <죽은 혼>을 모스크바에서 완성했으나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정신적 고뇌와 사상적 동요로 인해 
정신 착란에 빠져 원고를 불 속에 던지고 10일 간의 단식으로 자살하였다.

고골의 작품들은 대체로 부조리를 풍자하는 작품이 많은데, 
이는 그가 1년 동안 하급공무원으로 일하면서 겪었던 부조리들에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부조리와 부정을 풍자한 희곡 '감찰관'으로 큰 인기를 누렸지만, 
당시 차르였던 알렉산드르 2세가 불쾌하게 여겨 안전을 위해 로마로 피신하기도 했다. 

고골은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혀질만큼 그가 러시아에서 가진 위상은 높다. 
노보데비치 묘지는 흐루시초프, 유리 가가린 등 높은 위상을 가진 위인들이 잠든 묘지이다. 
그는 생전에도 단편 모음집 '고르드문드'가 성공을 거뒀고,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푸쉬킨이 그를 칭찬하면서 러시아에서 상당히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가 '가난한 사람들'로 데뷔했을 때 
그에게 제 2의 고골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러시아에서 고골의 위상은 높다.

그의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부조리에 대한 풍자가 강하게 깔려 있다. 
여기에 고골 특유의 초현실적인 묘사 등이 어우러져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압도적인 분량의 장편 소설이 많았는데, 
고골은 단편을 많이 집필했기 때문에 조금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다. 
이런 특성으로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인 인지도는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는 전공생들에겐 인기가 많다.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14.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 작품 전시실

 

 

[Room 8 - 15] 19세기 전반기 회화 <초기 풍속화의 시대>

 

Tretyakov Gallery Room 10-12. 알렉산더 이바노프 전시실

 

알렉산더 이바노프 (Aleksander Andreyevich Ivanov 1806~1858)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미술아카데미 교수였던 아버지 안드레이 이바노프에게 어릴 때부터 그림을 배웠다.
1830년 이탈리아에 유학한 뒤 생애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종교화 특히 성서를 주제로 하여 예수의 인간성을 표현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데카브리스트 반란이 있은 후 이바노프는 사회의 모순에 더욱 회의를 느꼈고, 
제정 하의 권력자들과 타협하려 하지 않으려 했기에 그가 평생에 가진 삶의 무게는 힘겹기만 하였다.
그의 그림 중 20년에 걸쳐 완성한 작품이 바로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림의 주제는 성경 요한복음 1장을 나타내고 있다. 

이바노프가 이탈리아에서 20년 동안(1837-1857) 정성을 들여 그린 작품이다. 
그 당시 이바노프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인류가 고뇌와 부정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인가? 
예수의 모습과 허망함과 슬픔 또 종교적 감정이 이바노프를 강하게 흔들었다. 
그리하여 '구원'이라는 모든 사람들의 꿈을 큰 그림으로 나타내고자 그는 작업을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일생의 대표작이 된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러시아에서 19세기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한 그림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이 
알렉산드르 이바노프의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작품은 러시아 회화사에서 수도 없이 거론되는 최고의 갈작 가운데 하나일 뿐 아니라, 
19세기 러시아 회화 특유의 '인자로서의 예수상'의 선구적인 모범이 되는 작품이다. 
이 대작 앞에 서면 누구든 예수와 역사의 현장에서 만나는 듯한 생생한 경험을 하게 된다.

1858년 이바노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얻지 못한다. 
6주 후 결국 52세의 나이로 이바노프는 죽음을 맞이한다. 
당시 장례식에 많은 예술인과 문화인이 참석했는데, 그 중 이동파 화가 크람스코이도 있었다 한다. 
이바노프의 대작은 페테르부르크에서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모스크바에서 일반 경매로 붙여진다. 
그 당시 트레티야코프는 러시아 미술의 훌륭한 작품을 모아서 미술관을 설립하려는 꿈이 있었다. 
그리하여 트레티야코프가 이바노프의 대작을 구입한다. 

 

Appearance of Christ to the People,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1837~1857, 

by Aleksander Ivanov. oil on canvas. 540 x 750 cm. Tretyakov Gallery Room 10

넓은 요르단 강변, 세례 요한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구세주가 있다.
지금 사람들에게는 아직 보이지 않으나, 멀리서 다가오는 쪽을 가리키고 있다. 
모든 사람들의 눈은 요한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 있다. 
터번을 두른 남자는 증오에 가득 찬 눈매로 요한의 말을 듣고 있다. 
이 남자는 바로 요한의 비난을 증오하여 그의 투옥과 처형을 요구했던 바리새인이다. 

이 작품에서 이바노프는 학대받는 민중의 꿈, 그리고 땅의 자유와 정의를 구하는 마음, 
수세기에 걸쳐 길러진 민중의 가부장적인 환상, 여러 가지 소박한 소망과 신앙을 이야기한다. 
미래의 자유를 믿으나 현재의 억압과 악의 세계를 타도하지 못하고
전설의 구세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민중의 비극이 그려져 있다.

1825년 12월 러시아에는 최초의 근대적 혁명 운동인 데카브리스트 난이 일어난다. 
그 일로 주동자 다섯 명이 처형당하고 1,000여 명이 넘는 젊은 지식인들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은 많은 지식인들을 분노하게 하고 혁명과 개혁의 불씨를 심는 계기가 되었다. 
작가 이바노프는 또한 그런 염원을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에 빗대어 표현한다. 
그림의 장면은 요르단 강변이며 십자가를 들고 있는 세례 요한의 
손 끝에 서 있는 푸른 색 가운은 예수 그리스도다. 
현실을 반영하듯 예수의 도래를 기뻐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구분되어 표현되어 있다.

러시아 화가 이바노프의 대표작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을 가리키며 성령으로 세례해 주실 분임을 알리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
가난한 이들과 녹색 얼굴의 노예는 반색하며 돌아보고 있고
오른쪽의 흰 터번을 두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탐탁하지 않은 표정으로 수군거리고 있다. 
사람들에게 다가오고 계시는 예수님을 감싼 주위의 공기는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 
수많은 습작을 남기며 20년 만에 완성된 그림이다​.

위대한 예술 작품은 흔히 한 사회의 역사와 개인사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탄생되곤 한다. 
이탈리아 유학은 이바노프 본인의 희망에 따른 것이었지만, 
그곳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오랫동안 머물러야 했던 것은 세상 탓이었다. 
그로 인한 화가의 기나긴 고뇌가 대작 <민중에게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탈리아가 어떤 곳인가.
축복 받은 자연 속에서 시끌벅적하면서도 다감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 
이바노프는 춥고 야박한 조국 같은 건 잊고 그냥 그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행복할 수 없었을까. 
화가 이바노프는 그럴 수가 없었나 보다.

그는 격동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러시아 사람들을 마음에서 털어내 버리지 못하였다. 
근심은 날로 깊어 갔다.
혁명에 몸을 던진 당시 유럽과 러시아의 인텔리겐차들과는 달리, 이바노프는 머지않아
사람의 손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갖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스무 해에 걸쳐 그처럼 구세주의 출현에 집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긴 세월에 걸친 이바노프의 고뇌를 알기 전에는 
그림 속 멀리서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그리스도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림에서처럼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희망으로 이바노프가 정성을 다해 화폭에 담은 구세주의 고고한 모습이 어쩐지
시큰둥해 보이면서, 오히려 그를 바라보는 군중들의 각양각색 표정에 더 눈이 간다.

신심이 얕은 자에게 이바노프의 그리스도는 무표정하고,
정말 우리의 짐을 다 내려주실까 싶을 정도로 담담한 모습이다. 
세상사에 짓눌리며 그를 고대하는 우리에게 그건 좀 서운하다. 
그런 점에서 더 울림이 있는 것은 이지적 화가 니콜라이 게 (1831~94)의 그리스도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그리스도가 재림하더라도 이미 2천 년 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문제 덩어리가 되어버린 이 세상을 구하실 수 있을까. 
정말 이 뜨거워진 지구를 식히고, 저 독한 신자유주의 바이러스를 박멸하실 수가 있을까. 

<민중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초점은 아무래도 그리스도보다 그를 영접하는 인간 군상들에게 있다. 
이바노프는 “나는 이 그림에서 타락한 지배자들이 민중을 억압하는 모습,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로마에 아부하는 천박한 유대 왕들의 행태,
그리고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슬픔을 그려 보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화가는 화면에 배치된 인물 하나하나에 저마다의 역할을 부여하기 위해 

수많은 에튀드(습작)들을 거쳤다. 
습작의 수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다. 
심지어 전시실에 비치된 한 장짜리 해설문만 해도 

영어판에는 800개, 노어판에는 300개로 나와 있다. 

그림의 주인공은 세례 요한이다. 
듣던 대로 낙타털옷을 입은 그는,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예언한 사람답게
가장 먼저 그를 발견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친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이 유명한 장면은 신약성서의 4복음서 모두에 언급되어 있으나, 화면과 가장 어울리는 상황으로 

현장감 있게 묘사하고 있는 것은 요한복음이다. (요한 1:29~34) 
그것은 아마도 복음서를 기술한 자들 가운데 현장에서
이를 직접 목격한 사람은 사도 요한뿐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림에서 빨간 머리의 수려한 청년 사도 요한은
연두색 옷을 걸치고 세례 요한의 등 뒤에 바싹 붙어 있다. 
그리고 그 왼쪽으로는 사도 베드로와 안드레이 형제, 그리고 나다나엘이 차례로 서 있다.
화가가 이들의 모습을 그린 에튀드(습작)는 여러 편 남아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세례 요한과 나다나엘에 대한 그림들이 눈길을 끈다.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이바노프의 에튀드에는
주로 하나의 캔버스에 둘 또는 그 이상의 얼굴이 담겨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그가 열심히 거리를 돌아다니며 찾아낸 사람의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이 화폭에 담을 모습으로 변환한 것이다. 
가끔은 라파엘로의 그림이나 고대 로마의 입상 등
이탈리아에서 만난 고전 작품들에서 인물의 원형을 찾기도 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의 경우는 좀 다르다. 
그를 위한 에튀드에는 여자 또는 소년의 모습이 요한의 얼굴과 함께 그려져 있다. 
이는 어쩌면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독사의 자식들아”라며
일갈하는 터프가이 요한의 내면에 그런 모습이 있다는 말일까. 
언뜻 짐작이 되지 않는 그에 대한 설명은 숙제로 남겨 두자. 

그림은 전경의 무리와 원경의 그리스도로 크게 대별된다. 
전경의 무리 가운데 중앙에서 약간 왼편으로 있는 십자가 지팡이를 든 인물이 세례 요한이다. 
요한을 중심으로 군중 속에는 세례 받는 이,  바리새인,
노예, 로마 병정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보인다. 
이 사람들을 향해 멀리 언덕에서 한 사내가 조용히 걸어온다.

눈앞의 그는 하나의 육신에 불과하지만 민중에게 해방과 구원을 약속하는 권능자다. 
성경은 이 장면에서 요한이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화가는 이 그림을 그리며 요한의 그 외침이
당대 러시아 민중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바노프와 그의 아버지는 데카브리스트 그룹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러시아 최초의 근대적 혁명을 꾀한 데카브리스트들은 1825년 12월 반란으로 
다섯 명이 교수형을 당하고 100여 명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이들의 비극적인 말로에 이바노프는 가슴 아파했다. 
더 이상 믿을 것이 없는 세상, 억압과 타락과 부패로 가득한 세상,
인자가 오셔야 할 곳은 다름 아닌 바로 이런 세상이다. 
그 모순의 땅으로 이바노프는 예수 그리스도를 초대한 것이다.

성경에서 세례 요한은 유대의 분봉왕 헤롯의 잘못에 대해 담대하게 비판했다. 
그는 진리의 전파자요, 양심의 목소리였다. 
그림 속 요한은 성경의 묘사 못지않게 올곧고 강직한 위인으로 그려져 있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헤롯왕은 두려워 했다.
요한 자신이 선과 양심인 이상, 욕망의 화신인 압제자는 그와 원수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바노프의 그림에서 그 갈등은 화면 오른쪽,
터번을 두른 두 남자의 못마땅해 하는 표정으로 나타난다. 
부조리와 모순이 가져다주는 이득에 눈이 먼 기득권자들이다. 
그 대립을 통해 이바노프는 당시 러시아에 내재한 모순과 갈등을 들춘다.
이렇듯 성경 속 상황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현실의 상황으로 이해의 지평을 넓혔기에 
이 그림은 예술과 역사의 영역을 모두 아우르는 기념비적인 걸작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림 중앙의 오른쪽에 그려진 푸른 옷의 노예가 요한이 전하는 
구원과 해방의 메시지를 듣고 감격해 하는 모습은 곧 
러시아 민중의 기대와 소망을 절절히 반영하는 이미지라 하겠다.
쪼그려 앉은 그는 이제 막 일어날 태세고,
눈물과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얼굴은 마침내 밝게 펴지려 한다. 

세례를 받으려고 옷을 벗은 채 감격과 기대가 뒤섞인 복잡한 표정을 짓는 오른쪽의 인물도 
예수가 가져다주는 희망의 밝기를 생생히 증거하고 있다. 
압제 하의 러시아는 이처럼 진정한 구세주를 세상 그 누구보다 간절히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이 작품은 주제에 담긴 사회의식이나 역사의식 측면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지만, 
미술사적인 측면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가치가 있다. 
이바노프는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무려 600점이 넘는 드로잉과 유화 스케치를 제작했다.
모델들을 동원해 등장 인물의 포즈와 표정에 대해 다각도로 연구하는 한편, 
라파엘로의 <그리스도의 변용>과 고대 조각인 <벨베데레의 아폴로>와
<자살하는 갈리아인과 그의 아내> 등 고전 걸작들을 탐구해 구도와 연출을 위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또 배경 표현을 위해 이탈리아의 풍경을 꼼꼼히 관찰하고 묘사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때까지 러시아 미술사에서 시간과 에너지 투자 면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운 엄청난 역작이요 대작인 것이다.
이 모든 결과물 가운데 일부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과 러시아 미술관에 나뉘어 전시되고 있는데, 
<벌거벗은 아이> 등 소년 누드 시리즈와 <가지> 등 풍경화 시리즈가 그 대표적인 스케치들이다.

이들 그림에서 우리는 햇빛과 미묘한 대기의 흐름 등, 아직 프랑스 인상파가 대두되기 전인데도 
야외 공간에 대한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관찰과 표현을 볼 수 있다. 
이바노프가 감각적으로도 시대를 앞서가는 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우측 뒤편, 불신자들의 군상 (detail)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뒤편 우측 (detail)

 

화면 오른쪽 위는 반대자들의 영역이다. 
값비싼 옷에 신수가 좋은 바리새인들이나 말을 타고 지나가던 

로마 병정들은 모두 그리 탐탁찮은 표정이다.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요한의 말에 그들은 시큰둥해 하거나 찡그리거나 노여워하고 있다. 
그 사람들도 고민이 없으랴만, 그럭저럭 살만하면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싫은 법이다. 
찌질한 것들이 모여 자신들을 욕하고 세상을 바꾸겠다고 설친다니 구경삼아 요르단 강가로 

나와 보았는데, 예언자들이 말한 그리스도가 나타났다니 갈수록 태산인 것이다. 

1850년대 말이 되자 러시아의 정세는 상당히 유화적 국면으로 바뀌게 된다. 
'유럽의 헌병'이란 별명으로 불리며 러시아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의 자유주의 운동에 

간섭하고 군대를 보내어 진압했던 폭압적 통치자 니콜라이 1세 (재위 1825~55). 
그의 권좌를 물려받은 알렉산드르 2세(재위 1855~81)는 부왕과 달리 

기본적으로 선량하고 심약한 사람이었다. 
시대의 흐름을 읽은 그는 검열을 완화하고 시베리아에 유배 중이던 데카브리스트들을 

사면하였으며, 러시아의 고질적 숙제이던 농노 해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차르를 비롯한 주류 지배층에 미운 털이 박혀 삽십 년 가까이
이탈리아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던 이바노프는 마침내 귀국을 결심한다. 
그는 그간 떠나 있던 조국의 현실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함께, 

민주화의 기운 속에서 러시아 화단에 자신이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1858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이바노프는 스무해 동안 매달린 필생의 대작을 소중하게 보듬고 돌아왔지만,
러시아는 그의 그림을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진보적 지식인들은 그를 환대하였지만, 기대했던 차르는 그의 그림을 

선뜻 구입하려 하지 않았으며 악의적인 비평도 그를 괴롭혔던 것이다. 
이바노프는 결국 귀국한 지 두 달이 채 못 되어 화병으로 급서한다.

그의 걸작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그 후 행방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설이 있다. 
미술사가 A.I. 조토프에 의하면, 이를 구입하려는 사람이 없어 그림 경매가 아닌 일반 경매에 붙여졌고, 
그것을 당시 아직 청년이던 사업가 파벨 미하일로비치 트레차코프가 사들여 소장함으로써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트레차코프 갤러리에서 직접 발간한 가이드북에 의하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그림은 차르 알렉산드르 2세에 의해 구입되었고, 설립된 지 얼마 안 되는 
Moscow Public and Rumyantsev Museum에서 1862년부터 전시되었다.
그리고 1925년 그 박물관이 문을 닫자 이바노프의 작품 모두가 트레차코프 갤러리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양쪽 다 나름대로 권위를 가진 기술들이므로 어느 쪽이 맞는지 섣불리 예단하기 어렵지만, 
미술사를 전공할 생각이 아니라면 그리 집착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세례 요한과 사도들. (detail)

세례 요한의 뒤로는 사도 요한, 베드로와 안드레이 형제, 그리고 회의주의자 나다나엘이다. 
나다나엘의 우울한 표정에 시선이 간다.

 

The Appearance of Christ to the People (detail)
이 에튀드에서는 맨 왼쪽 노인의 옷과 그림자의 색깔이 붉은 색으로 일치한다. 
그렇다면 완성작에서의 불일치는 실수가 아닐까?

 

<민중에게 나타난 그리스도>를 위한 습작(에튀드)들. 그 수가 800점에 이른다.

화가 이바노프(1806~58)가 만약 19세기 러시아의 격동 속에서도 
편안한 주류의 삶을 살고자 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이미 뛰어난 회화적 재능을 드러내어 주목을 받았으며, 
그의 아버지는 미술아카데미의 교수로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처세에 신경을 썼다면 러시아 화단에서 성골 행세를 하며 
한세상 호사를 누리다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더라면 러시아 회화사에서 기념비적 작품으로 꼽히는 
저 <민중에게 나타난 그리스도>는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트레차코프 갤러리의 브률로프 방 다음 쯤에 걸려 있을 
그의 그저 그런 그림들을 범상하게 훑고 지나쳐 가버릴 것이다.

이바노프의 잘못은 혁명을 꿈꾸던 불온한 데카브리스트들과 교류하였다는 것이다. 
차르와 그의 수하들에게 당연히 미운 털이 박힌 이바노프는 어려운 지경에 빠졌다가 
스물네살이 되던 1830년 가까스로 이탈리아 유학길에 오른다. 
러시아에 남아 있던 이바노프의 아버지는 핍박을 받다가 아카데미 교수직에서 쫓겨난다. 
혁명으로 달려가며 정세가 악화되던 러시아에서 떠나있을 수 있었던 건 그에게 행운이었을까. 


그러나 이바노프는 그후 30년 가까이 조국의 땅을 밟지 못하다가, 
1858년 귀국 후 불과 6주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런 점에서 그는 불운아였다. 
모든 것이 불안한 시대에 불온한 생각을 품은 탓이었다. 
하지만 이런 그의 이탈리아 ‘유배’ 생활이 없었다면 필생의 대작 
<민중에게 나타난 그리스도>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이 그림 하나를 그리는 데 20년이 걸렸다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바노프가 <민중...> 그리기에 착수한 것이 31세 되던 1837년이었고, 
이를 완성한 것은 귀국해서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857년이었다. 
그러므로 이바노프란 사람은 이 그림 하나를 그리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간 것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그가 필생의 화두로 붙잡고 그려낸 이 그림은 
러시아 미술사에서 늘 상당한 비중으로 다루어진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도록에서 보았을 때 처음부터 눈길을 끈 그림은 아니었다. 
레핀처럼 주제가 강렬하지도 않고 색채와 붓의 터치가 그리 섬세하지도 않는 이 그림이 
왜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어지는지 좀 의아하다. 


그러나 조국을 떠나 있으며 그가 이십년 동안 매달린 이 그림 속에서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그리스도가 얼마나 절박한 의미를 갖는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을 때, 
그림은 가슴 속으로 성큼 들어오는 듯하다. 
그리고 마침내 트레차코프 갤러리의 현장에서, 사람을 압도하는 규모의 실물과 
그 양쪽으로 마치 호위하듯 늘어선 수많은 에튀드들을 대하자 모든 의문이 풀려버린다.
 <민중...>은 과연 그런 대접을 받을만한 걸작이다.

 

알렉산더 이바노프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모본과 습작들

현재 보고 있는 사진들은 러시아 박물관에 있는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모본과 습작들이다.
이바노프가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습작 작품만 해도 600여 점이나 된다고 한다.
한 작품을 20년 동안 그린 러시아의 화가 이바노프. 그의 미술 재료는 자기 자신의 고뇌였다. 
어떻게 이러한 열정으로 20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그린 걸까?

 

알렉산더 이바노프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모본과 습작들 

 

알렉산더 이바노프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모본과 습작들 

 

Kopf eines Sklaven in zwei Varianten, 눈물이 그렁그렁한 노예의 에튀드. 

그리스도의 출현을 가장 크게 기뻐하는 사람들은 화면의 중앙 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벗은 몸으로 등을 보이고 있는 몸짱 사나이의 왼팔에 얼굴이 반쯤 가려 있는 노인이 그 중 하나이다. 
쇠약한 몸을 아들에게 의지해 요르단 강가에 나왔던 노인은 기력을 놓고 있다가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소식에 황급히 일어서려 한다.

가장 큰 기쁨은 그 앞에 쭈그리고 앉은 노예의 푸른 얼굴에서 찾을 수 있다. 
짐승처럼 목덜미가 줄에 묶여 있는 그는 아마도 주인님의 옷을 챙기려던 참인가 보다.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말에 손을 멈추고 돌아보는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다. 
세상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목줄 밖에 없을 노예가 구세주의 출현에 감격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바노프는 잃을 것이라고는 역시 쇠사슬밖에 없는 조국 러시아의 민중들을
노예의 모습에 투영한 것이 아닐까. 
미술사가 A.I. 조토프에 의하면, 러시아 회화에서 학대받는 이의 모습을
이처럼 감동적이고 박진감 있게 묘사한 것은 이 그림이 처음이다.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노인과 소년. 습작

세례를 받다가 요르단 강에서 황급히 걸어나오는 노인과 소년.
노인의 흰옷은 강물에 붉은 색으로 비춰져 있다. 
왜 일까? 에튀드들 가운데에는 노인의 옷이 붉은 색으로 그려져 있는 경우가 있다.
하도 많은 습작들을 그리다보니 화가가 잠시 착각한, '옥의 티'는 아닐까?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우측 벌거숭이 사내의 에튀드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일어서려는 노인의 에튀드

가끔은 이처럼 고대 로마의 조각상을 인물의 원형으로 삼고 있다. 
조각상의 모습은 완성작에서 노인보다도 아래쪽 노예의 얼굴과 더 닮은 것 같다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초점은 아무래도 그리스도보다 그를 영접하는 인간 군상들에게 있다. 


이바노프는 “나는 이 그림에서 타락한 지배자들이 민중을 억압하는 모습,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로마에 아부하는 천박한 유대 왕들의 행태, 
그리고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슬픔을 그려보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화가는 화면에 배치된 인물 하나하나에 저마다의 역할을 부여하기 위해 수많은 에튀드(습작)들을 거쳤다.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사도 베드로의 습작

그리스도의 등장에 대해 군중 속의 사람들은 대개 놀라며 기뻐하거나 불신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본다. 
하지만 사도들 가운데 제일 왼편에 하늘색 옷을 입고 서 있는 나다나엘의 모습은 좀 특이하다. 
그는 유독 이도저도 아닌 우울한 얼굴로 눈을 내리 깔고 있다. 
이바노프는 그의 얼굴로, 친구이자 19세기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인 고골리의 모습을 빌려 온다.

 

<민중 앞에 나타난 에수 그리스도>에서 고골리의 모습으로 나다나엘을 그린 습작.

나다나엘은 흔히 '회의주의자(doubter)'로 불리는 사람이다. 
성서에 의하면 그는 친구 빌립이 율법에 기록된 메시아 나사렛 예수를 만났다고 말하자, 
당시 천한 곳으로 멸시 받던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날 수 없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고 그가 자신을 알아보자 비로소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며 제자가 된다.
 
그렇다면 이바노프는 왜 나다나엘의 얼굴을 고골리의 모습으로 그렸을까. 
니콜라이 고골리(1809~52)는 추악한 현실 세계에 대한 증오와 삶의 패배자들에 대한 동정으로 
<검찰관(1836)>, <외투(1842)> 등의 걸작을 남긴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선구자이다.
관료 사회의 악을 다룬 <검찰관>을 발표한 후 어려움을 겪다가 서유럽으로 건너온 그는 
10여 년 간 로마 등지에 머물렀으며, 이때 이바노프와 교류하였다. 
그러나 고골리는 악을 파헤치는 데만 집착해 온 자신의 작업에 대해 회의를 품으며 
종교적 신비주의에 빠져 들었고, 끝내 정신착란으로 사망한다.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일 리 없다고 의심했던 나다나엘과 인간의 구원을 믿지 못해 
세상의 악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데 몰두하며 고뇌에 빠져 있던 고골리. 
그들은 그림에서 다가오는 그리스도를 보면서도 기뻐하지 못하고 우울한 얼굴로 혼란에 빠져 있다.
요한으로부터 갓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이와 대조적으로 파안하며 기뻐하고 있다. 
화면 좌측 끝 요르단 강에서 막 올라오고 있는 벌거숭이 노인과 소년, 
그리고 우측 끝 세례를 마치고 막 옷을 입으려던 아버지와 아들은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말을 듣고 차오르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 
행색으로 보아 그들은 유대사회에서 큰소리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가진 것이 없어 그만큼 삶이 고단한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구원자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세주가 오셨다는 세례 요한의 한 마디에 의심하지 않고 환호한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현세에서의 기적과 세속적 행복이었다. 
화면 오른쪽 뒤에 자리 잡은 바리새인 식자들과 달리 그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가 그리스도임을 믿는다.

예수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당장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오늘 기뻐하던 저 얼굴들은 그를 골고다 언덕에 못 박아 세우고 돌을 던진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몽매함에 대해 자신 있게 손가락질할 수 있는가. 
누가 내 살림살이를 나아지게 해 주리라는 기대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를 미혹시키는 힘이 있다. 
내 호주머니를 불려주기만 한다면 그가 과연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믿을만한 위인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너져버리는 것은 오늘의 현실에서도 다를 바 없겠다. 
삶이 고단하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일까.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습작. '세례 후'

이바노프는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이탈리아의 자연을 배경으로 많은 습작을 남겼다. 
이탈리아와 또 그밖의 화가들이 수백년에 걸쳐 그려 왔던 이탈리아의 풍경을 매우 놀라운 신선함으로 그렸다. 
<아리치 공원에서>, <기지 공원의 수목>, <나뭇가지>, <거리의 지붕>, <물속의 돌> 많은 자연의 습작이 있다. 
이바노프는 풍경화가로서 강변의 생활, 따스한 태양, 돌과 풀, 등 자연을 그리는 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여기에서는 노인의 옷이 붉은색으로, 물에 비친 그림자도 붉은색으로 되어 있다.

 

Head of John the Baptist, 세례 요한 습작. 1840s,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Head of John the Baptist, 세레 요한의 습작.

 

Head of John the Baptist, 세레 요한의 습작. 1840s,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Head of John the Baptist​. 1845. 세례 요한 습작.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Head of John the Evangelist. 사도 요한 습작.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A Head of a Young Man. 습작. 1845.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Head of a man. Study of the figure of paralytic for the painting

 

Sketch of a Man​. 1845.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e Appearance of Christ to Mary Magdalene​. 1835. by Aleksander Iv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부활 후 막달아 마리아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이 작품은 이바노프가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제작하기 전에 그린 것으로,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미술을 열심히 연구하던 시절, 

르네상스 미술에 대한 화가의 짙은 애정이 잘 나타난 그림이다. 
이 작품의 예수는 비애미를 지닌 인간이라기보다 로맨틱한 감상을 느끼게 하는 인간에 더 가깝다.

 

Head of Mary Magdalene (study), 1834. by Alexander Iv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막달라 마리아 주제는 중세 때부터 애호되었지만, 

서양미술사에서 집중 조명된 시기는 종교개혁이 일어날 무렵이다.  
프로테스탄트의 영항으로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전통 전반이 

크게 위협받자 고해성사를 비롯한 전통을 지키기 위해 
고해자의 전형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형상화한 그림이 많이 제작된 것이다.

이때 마리아 이미지는 머리를 길게 풀어헤치고 깊은 수심에 잠긴 모습이 대부분이다. 
풀어헤친 머리에서 보듯 이바노프의 막달라 마리아도 그런 가톨릭 전통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좀더 깔끔하고 산뜻한 용모 때문에 세속적인 미인의 인상을 더 짙게 던진다. 
그 옆의 예수 그리스도도 군더더기 없는 '몸짱'에 상당히 수려한 인상이다.

얼핏 보면 이런 세속적인 아름다움이 두 사람을 마치 한 쌍의 연인처럼 느끼게 한다. 
한 사람은 사랑을 고백하고 다른 한 사람은 짐짓 이를 뿌리치는 듯한. 
주제로 보자면 이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예수가 그녀를 진정시키려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예수는 마리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를 붙들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주제가 지닌 이와 같은 성스러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이바노프의 그림은 보면 볼수록 감상적인 낭만주의의 향기를 발산한다.

어두운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연극의 클라이맥스 같은 장면, 선남선녀의 지극히 감상적인 몸짓...
마리아의 풀어헤친 머리는 전통적인 참회와 자기부정의 표시라기 보다는, 

다른 이들 앞에서는 머리를 단정히 가다듬고 있어도 
남편 앞에서는 머리를 풀어헤치는 여염집 여인의 사적인 친밀감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미묘한 뉘앙스가 이 그림을 향한 시선의 집중도를 높이고 

주제를 살뜰한 감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막달라 마리아의 해후 뿐 아니라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의 해후에 대한 연상을 불러온다. 
사실 그리스도가 신랑이요 교회가 신부라는 성경의 비유도 

이런 종류의 낭만주의적 감상에 적잖이 기대고 있다.

춘향에게 이몽룡이 그런 것처럼, 구세주는 단순히 불의를 벌하는 

어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스런 내 낭군이기도 한 것이다. 
이바노프의 붓질은 그 인간적인 기대를 그리스도와 

막달라 마리아의 인상적인 이미지 안에 섬세하게 녹여 놓았다.
종교적인 주제가 지닌 신성함과 세속적인 이미지가 주는 

감상주의 미학이 아름답게 결합된 작품이라고나 할까. 
왠지 "아름다음이 세상을 구원하리라."고 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언급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The Appearance of Christ to the People, 1857. by Aleksander Iv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세례를 받다가 요르단 강에서 황급히 걸어나오는 노인과 소년. 습작
노인의 흰옷은 강물에 붉은 색으로 비춰져 있다. 
왜 일까? 에튀드들 가운데에는 노인의 옷이 붉은 색으로 그려져 있는 경우가 있다. 
하도 많은 습작들을 그리다보니 화가가 잠시 착각한, '옥의 티'는 아닐까? 

이바노프는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이탈리아의 자연을 배경으로 많은 습작을 남겼다. 
이탈리아와 또 그밖의 화가들이 수 백년에 걸쳐 그려 왔던 

이탈리아의 풍경을 매우 놀라운 신선함으로 그렸다. 
<아리치 공원에서>, <기지 공원의 수목>, <나뭇가지>, 

<거리의 지붕>, <물속의 돌> 많은 자연의 습작이 있다. 
이바노프는 풍경화가로서 강변의 생활, 따스한 태양, 

돌과 풀, 등 자연을 그리는 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Seven Boys in Colourful Clothes. 1845. by Aleksander Ivanov.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Room 10

 

On the Shore of the Bay of Naples 1850. by Aleksander Ivanov. 
Oil on canvas. 41.4x60.6 cm. Tretyakov Gallery Room 10

 

Priam asking Achilles for Hector's body, 1824, by Aleksander Iv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Apollo, Hyacinthus and Cyparis singing and playing. 1834. ​by Aleksander Iv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Portrait of Vittoria Marini, oil on canvas. 1850. by Aleksander Iv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A girl from Albano standing in the doorway, by Aleksander Iv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Traveller. by Aleksander Iv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Water and stones under Palaccuolo, by Aleksander Ivanov.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Room 10

 

Olive trees, 1825, by Aleksander Iv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Olive trees by the cemetery in Albano. New Moon. 1824, 
by Aleksander Iv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A Tree Branch, 1850. by Aleksander Ivanov.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Room 10

 

 Landscape in Albano, by Aleksander Ivanov.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Room 10

 

 Via Appia at Sunset, 1845. by Aleksander Ivanov.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Room 10

 

The Bay of Naples Near Castellmare, 1848. by Aleksander Ivanov.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Room 10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10-12 알렉산더 이바노프 작품 전시실

 

 

 

 

 

[Room 8 - 15] 19세기 전반기 회화 <초기 풍속화의 시대>

 

Tretyakov Gallery Room 08. Orest Kiprensky 작품 전시실

 

Self-portrait, 자화상. 1828. oil on canvas. 48.5 x 42.3 cm. Tretyakov Gallery Room 08

화가 오레스트 키프렌스키(Orest Kiprensky)는 1782년 3 월 24 일 상트 페테르부르크 주 
Nezhnovo 마을에서 농노인 안나 카브릴로바와 토지 소유자인 Alexey Dyakonov 사이에 
서자로 태어나고 양아버지 (Adam Shvabler)의 집에서 자랐다. 
친부는 후에 키프렌스키가 1788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황실 예술학교에서
기숙 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키프렌스키는 농노에서 벗어난 뒤 1788년 미술아카데미에 등록하여 
1803년까지 기숙학교와 아카데미에서 역사화를 공부했다. 
졸업하기 1년 전인 1804년, 그의 양아버지인 Adam Shvalber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초상화는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이 후 그는 러시아의 뛰어난 초상화가로 발돋음한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등지에서 일했으며, 
초상화학회 회원, 미술아카데미 고문을 역임했다. 

쿨리코보 전투 (Battle of Kulikovo, 1805) 이후 드미트리 돈스코이 (Dmitri Donskoi) 

왕자 작품을 수상한 이 젊은 작가는 유럽에서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해외로 갈 수 있었다.
이탈리아와 파리에 머물며 전시회를 열었고, 
자신의 초상화를 우피치 미술관(Uffizi Gallery in Florence)에 기증하기도 했다.

 

자화상. Self-portrait With Brushes Behind The Ear. 1808. oil on canvas. 36.5 X 46 cm.
Tretyakov Gallery Room 08

이탈리아에서 키프렌스키는 현지 소녀 마리우치 (Mariucci, Anna Maria Falcucci)를 만났다. 
키프렌스키는 그녀를 황량한 가정에서 데려와 고용하고 이탈리아를 떠날 때,

그녀를 로마 카톨릭 수녀원으로 보냈다.
1828년, 키프렌스키는 친구인 새뮤얼 할버그 (Samuel Halberg)로부터 
마리우치 (Mariucci)를 잃어버렸다고 하는 편지를 받고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 후 키프렌스키는 다른 수녀원으로 이송된 마리우치 (Mariucci)를 발견하고 
1836년에 그는 결국 그녀와 결혼했다. 
그는 이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러시아 정교회에서 로마 카톨릭교로 개종해야 했다. 

결혼한 그해 말 1836년 10 월 17일 키프렌스키는 로마에서 폐렴으로 사망하고 
Sant Andrea delle Fratte 교회에 묻혔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담겨 있다. 
"러시아 예술가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오레스트 키프렌스키 (Orest Kiprensky)와 
로마 제국의 아카데미 예술원 교수와 고문, 로마에 살고 있는 러시아 예술가, 건축가, 
조각가들을 추억하고 추모하며  그의 백성의 때를 맞추지 않는 진화된 토치와 그 덕성있는 영혼 ... "

 

Portrait of Alexander Pushkin. 1827. <푸시킨의 초상>. by Orest Kiprensky. 

Oil on canvas. 63 x 54 cm. Tretyakov Gallery Room 08

오레스트 키프렌스키는 농노제 하의 러시아 현실을 
생생히 묘사하고 자유의 가치를 드높인 푸쉬킨의 초상을 그렸다. 
오른쪽 배경에 학문과 예술의 신 뮤즈가 그려진 것이  보인다.  
자신의 초상화를 본 푸쉬킨은 곧바로 화가에게 시 한 편을 보냈다.  
"마치 거울 속의 나를 보는 듯 이 거울이 나는 마음에 드네" ​라는 문구가 있었다.

러시아 대문호 푸시킨을 그린 여러 초상화 중에 최고로 꼽히는 작품이다. 
푸시킨이 활동하던 19세기 초반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프랑스 책을 읽고 프랑스 풍습을 따랐다, 
이때 푸시킨은 러시아어로 소설을 쓰고 시를 짓고 희곡을 쓰고, 세상에서 러시아어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작품을 통해 보여주며 러시아어의 소중함을 국민들에게 환기시킨다. 
단연코 푸시킨은 러시아 국민 모두가 사랑하는 최고의 작가다.

외가 쪽으로 아프리카 피를 타고 난 푸시킨은 단신에 곱슬머리의 약간은 추남에 가까운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키프렌스키에 의해 탄생한 푸시킨은 러시아 대문호로서 우아하고 순수하며 영리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천재로서의 푸시킨 면모가 잘 표현된 이 그림은 푸시킨의 책 작가 사진란의 명함 그림으로 이용하고 있다.

 

Portrait of Athanasius Shishmarev. 1826. by Orest Kiprensky. 135 x 101 cm. 

Tretyakov Gallery Room 08.

 

Portrait of Count S. S. Uvarov 1815 - 1816. by Orest Kiprensky. 

Oil on canvas. 117.3 x 90.8 cm. Tretyakov Gallery Room 08

 

Portrait of A. I. Molchanova with Daughter. 1814. by Orest Kiprensk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08

 

Portrait of V. S. Khvostov. 1814. by Orest Kiprensk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08

 

Portrait of Ye. A. Teleshova. 1828. by Orest Kiprensky. 

Oil on canvas. 64.2 x 55.5 cm. Tretyakov Gallery Room 08

 

Portrait of A. Schwalbe, 1808. by Orest Kiprensky. 
Oil on canvas. 76 x 62 cm. Tretyakov Gallery Room 08

 

Portrait of N. S. Mosolov. 1811. by Orest Kiprensk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08

 

Portrait of Count S. S. Uvarov 1815 - 1816. by Orest Kiprensky. 
Oil on canvas. 117.3 x 90.8 cm. Tretyakov Gallery Room 08

 

Portrait of the Prince A. M. Golitzin 1819. by Orest Kiprensk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08

 

Portrait of the Prince N. P. Trubetzkoy. 1826. by Orest Kiprensky. 
Oil on canvas. 93.5 x 76.5 cm. Tretyakov Gallery Room 08

 

Portrait of Countess C. P. Rostopchina. 1809. by Orest Kiprensk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08

 

Portrait of A. A. Chelischev. 1809. by Orest Kiprensky. 
Oil on wood. 48 x 38 cm. Tretyakov Gallery Room 08

 

Portrait of Count F. B. Rostopchin. 1809. by Orest Kiprensk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08

 

Portrait of the Poet V. A. Zhukovsky. 1815. by Orest Kiprensk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08

 

Girl Wearing the Poppy Wreath. 1819. by Orest Kiprensky. 
Oil on canvas. 42.5 x 40.9 cm. Tretyakov Gallery Room 08

 

A Gipsy with a Branch of Myrtle. 1819. by Orest Kiprensky. 
Oil on wood. Tretyakov Gallery Room 08

 

Portrait of M.M.Cherkasov, 1827. by Orest Kiprensky. 
oil on canvas. 63 x 48.5 cm. Tretyakov Gallery Room 08

 

Readers of the Newspaper in Naples. 1831. by Orest Kiprensky. 
Oil on canvas. 64 x 78 cm. Tretyakov Gallery Room 08

 

A Veranda Overgrown With Grape Vines, <포도덩쿨로 자란 베란다> 1828, by Silvestr Shchedrin. 
Oil on canvas. 42.5 x 60.8cm, Tretyakov Gallery Room 08.

실베스터 쉐드린 (Silvestr Shchedrin 1791~1830)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출생하고 
1830년 10월 27일 (11 월 8 일) 소렌토에서 사망했다. 
러시아의 풍경화가이자 러시아 조경 학교의 창립자 중 한 명이다. 
조각가 FF Shchedrin의 아들고 풍경화가 SF Shchedrin의 조카이다.

쉐드린은 이탈리아에서 유학하고 그 곳 풍경을 그림으로 많이 남긴다. 
이미 19세기 초반에 빛의 표현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으며 
그림 속 포도 넝쿨 사이로 비치는 빛 표현 또한 아주 뛰어나다. 
드디어 초상화가 주를 이루는 러시아 회화에서 
풍경화 등 다양한 쟝르의 그림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Rome, view of the Tiber river and the Castel Sant'Angelo, 1823. 
by Sylvester Feodosievich Shchedrin. Tretyakov Gallery Room 08

 

Marina Grande, Capri. 1827 - 1828. by Sylvester Feodosievich Shchedrin. 
Oil on canvas. 60,8 x 86,5 cm. Tretyakov Gallery Room 08

 

Small harbor in Sorrento overlooking the islands of Ischia and Procida, Sylvester Shchedrin, 
Oil on canvas. 1826. 45 x 60.7 cm. Tretyakov Gallery Room 08
Ischia 섬과 Procida 섬이 내려다 보이는 소렌토의 작은 항구.

 

 Matromanio Grotto on the Island of Capri. 1827. Sylvester Shchedrin, 
Oil on canvas. 35.5 x 46.2 cm. Tretyakov Gallery Room 08.

 

 View in Sorrento, 1826, by Sylvester Feodosievich Shchedrin.

Oil on canvas. 63,5 x 88 cm. Tretyakov Gallery Room 08.

 

Self-portrait with Palette and Brushes in Hand. 1805–1806. 
by Alexander Varnek. Oil on canvas. 56 x 47.1 cm. Tretyakov Gallery Room 08.

로마에서 그린 바네크 (Alexander Varnek) 자화상은 초기 러시아 낭만주의의 선구자로 간주될 수 있다. 
바네크는 의도적으로 대규모 형식을 사용하여 이미지를 최대한 웅장하게 만든다. 
똑바로 향한 그의 확고한 시선, 얼굴에 드리워진 춤추는 그림자, 예술적으로 접힌 망토, 
붓이 있는 팔레트, 창 밖의 경치, 이 모든 것이 묘사된 사람이 예술가라는 것을 말해준다. 
독특하고 최고의 존재, 운명의 사람, 모든 사소하고 순간적인 것을 경멸한다. 
그의 넥타이의 밝은 붉은색과 팔레트의 페인트 패치는 초상화의 다소 절제된 색상에 표현력을 더한다. 
바네크는 창문에 대칭하여 자신을 묘사한다. 
창문은 현실 세계와 달성할 수 없는 이상 사이의 경계선으로 인식되었으며, 
이는 그림에서 푸른산의 파노라마로 상징화되었다.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08 전시실

 

Tretyakov Gallery Room 09 전시실

 

트레차코프 갤러리 Room 9는 브률로프(Karl Pavlovich Briullov1799~1852)의 작품 전시실이다.
이 세상을 살다간 화가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겠지만, 
오늘 우리가 미술의 역사를 일람할 때 언급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생전에 영광을 누리지 못하고 곤궁한 삶을 살아야 했다. 
반면 살아있을 때 이름을 드날렸으나 죽은 뒤에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화가들도 많다. 
하지만 역사에 남았다고 해서 반드시 더 뛰어난 예술가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비록 새로운 유파를 만들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당대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사랑하였다면 
그의 예술은 나름대로 훌륭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은 예술의 본질과 역할에 대해 근본적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브률로프는 살아있을 때 큰 영광을 누렸으나 그 명성의 대부분이 주검과 함께 땅에 묻힌 화가이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아카데미로 상징되는 19세기 전반 러시아 제도권 회화의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그의 대작 <폼페이 최후의 날(1830~33)>은 페테르부르크의 국립러시아미술관에 가야 볼 수 있지만, 
트레차코프 갤러리의 Room 9에서도 <Horse woman(1832)>, <자화상(1848)> 등 꽤 알려진 그림들을 만날 수 있다. 

 

Tretyakov Gallery Room 09 전시실

 

러시아 교육 과정에서 미술관 견학은 필수 이수 과목이다. 
보통 분기별로 미술관을 방문하여 전문 큐레이터에게 그림 설명을 듣는다. 
어릴 적부터 박물관 관람을 생활화한다.

 

Self Portrait. Karl Bryullov 자화상. 1848. oil on cardboard. 64.1 x 54 cm
Tretyakov Gallery Room 09.

칼 파블로비치 브률로프 (Karl Pavlovich Briullov 1799~1852)는 러시아 낭만주의의 중요한 화가이다. 
그의 부모는 프랑스인이었지만 그는 러시아에서 태어났고, 평생을 러시아인으로 살았다. 
브룔로프는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기법을 낭만주의의 자유분방함과 결합하여 
당대의 가장 활기찬 러시아 미술을 창조한 화가였다.

조각가였던 그의 아버지는 1780년대 초 러시아로 이주했으며, 
1821년에는 귀화하여 러시아식으로 성을 고쳤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서 졸업작품이 금메달을 받아 1823년, 이탈리아로 
유학의 기회를 얻은 브률로프는 그곳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들의 작품을 섭렵하게 된다.
그 중 특히 라파엘로의 대작 <보르고의 화재>로부터 화상(畵想)을 자극 받아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폼페이 최후의 날 Last Day of Pompeii>을 그리게 되었다.

18세기 중엽에 세워진 미술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러시아에는 
'아카데미즘'이라는 화풍이 한 세기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아카데미즘은 형식면에는 인체를 가장 완전하고 아름답게 그리도록, 
내용이나 소재면에서는 그리스, 로마의 신화나 역사 혹은 성서의 내용으로 한정하였다. 
칼 파블로비치 브률로프는 이 화풍을 대표하는 러시아 화가다.

그는 친구들로 부터 '위대한 카를(The Great Karl)'이라고 불리었다.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러시아 최초의 화가로, 러시아의 신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에 걸친 과도기의 주요 인물로 되어 있다.

 

Rider. Portrait of Giovanina and Amacilia Pacini, the Foster Children of Countess Yu. P. Samoilova. 
1832. by Karl Bryullov. oil on canvas , 291.5 x 206 cm. Tretyakov Gallery Room 09

칼 브룔로프는 현실과 거리가 먼 이상 세계를 꿈꾸기를 즐기던 화가였다. 
그는 부조리하고 답답한 현실에 대한 비판을 담기 보다는 
감수성 짙고 이국적 경향을 지닌 소극적 낭만주의의 화가였다. 
사회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귀족적인 아카데미즘의 안실 속에 잠겨 있지 않았다. 
서구 낭만주의의 새로운 동향에 예민하게 반응, 대상에 대해 정열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아카데미의 전통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특히 인물묘사에 있어서는 아카데미의 화풍이 강하게 엿보인다.

칼 브률로프의 <말을 탄 여인>에는 정적인 것과 동적인 움직임의 조화로운 표현이 돋보이는 그림이다. 
말이 히이힝~하며 움지이는 동적 표현이 아주 절묘한데 
말 위의 여인은 두 다리를 모으고 예쁘게 포즈를 잡고 있다. 
정반대의 이미지를 2차원의 화폭에 동시에 그려 넣었지만 안정적이며 정돈되어 있다.

 

Bathsheba <밧세바>, 1831. by Karl Bryullov. 0io on canvas. 173 cm X 125 cm. Tretyakov Gallery Room 09.

칼 브률로프는 19세기 전반기에 러시아 아카데미화파 수장이었다. 
이탈리아 유학 당시 <폼페이 최후의 날, 상트 페테르 부르크 러시아 박물관 소장>을 그려 
렘브란트에 버금가는 화가로 칭송받는다. 
브률로프의 그림에는 정돈되고 세련된 아마데미 화풍이 잘 나타난다. 

<밧세바 Bathsheba>는 성경을 바탕으로 한 그림이다. 
다윗왕이 밧세바가 목욕하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한 후 
이 여인을 갖고 싶은 마음에 남편을 전쟁터에 보내 죽게 한다. 
밧세바가 다윗의 가슴에 사랑의 불꽃을 지핀 바로 그 목욕하는 장면이다. 


젊고 아름다운 밧세바의 싱그러운 육체가 
흑인 노예 소녀의 검은 피부와 대비되어 더욱 환하게 빛난다. 
밧세바는 오랫동안 여러 화가들에게 관능적 아름다움의 표본이 되어 세계적으로 
여러 작품들이 있지만 청순한 매력의 아름다움은 브률로프의 밧세바가 단연 최고다.

 

Portrait of the Archeologist Michelangelo Lanci. 고고학자 미켈란젤로 란시의 초상. 1851.
by Karl Pavlovich Brulloff, oil on canvas. 61.8 x 49.5 cm. Tretyakov Gallery Room 09.

 

Siege of Pskov, Karl Pavlovich Brulloff, 1839~1843. by Karl Pavlovich Brulloff, 
oil on canvas. 482 cm X 675 cm. Tretyakov Gallery Room 09.

 

Portrait of Grand Duchess Elena Pavlovna, 1829. by Karl Pavlovich Brulloff, 
oil on canvas. 73 cm X 59 cm. Tretyakov Gallery Room 09.

 

Portrait of M. I. Alexeyeva. 1840. by Karl Pavlovich Brulloff,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09.

 

Portrait of Count V. A. Perovsky, 1837. by Karl Pavlovich Brulloff, 
oil on canvas. 247 X 152 cm. Tretyakov Gallery Room 09.

 

Portrait of Vasily Perovsky. 1837. by Karl Pavlovich Brulloff,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09.

 

Portrait of A.N. Golitsyn. 1840. by Karl Pavlovich Brulloff, 
oil on canva. 194.5 x 142 cm. Tretyakov Gallery Room 09.

 

Portrait of Sculptor I. P. Vitaly, 1836 ~ 1837. by Karl Pavlovich Brulloff, 
oil on canvas. 94 x 76.5 cm. Tretyakov Gallery Room 09.

 

Portrait of P. V. Kukolnic, 1837-1839. by Karl Pavlovich Brulloff, 
pencil. 114 cm X 83 cm. Tretyakov Gallery Room 09.

 

Portrait of M. A. Beck and Her Daughter M.I. Beck, 1840. by Karl Pavlovich Brulloff, 
oil on canvas. 246.5 x 193.5 cm. Tretyakov Gallery Room 09.

 

Portrait of the Actor A. N. Ramazanov. 1821. by Karl Pavlovich Brulloff,  
oil on canvas. 64.5 x 52.5 cm. Tretyakov Gallery Room 09.

 

Portrait of M. A. Kikina. 1821. by Karl Pavlovich Brulloff,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09.

 

Portrait of the Secretary of State Piotr Kikin. 1821~1822. by Karl Pavlovich Brulloff,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09.

 

Erminia and the Shepherds. (Unfinished), 1824. by Karl Pavlovich Brulloff, 
oil on canvas. 98 cm X 137 cm. Tretyakov Gallery Room 09.

 

Portrait of A. N. Lvov. by Karl Pavlovich Brulloff,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09.

 

Pifferary in front of Madonna. 1825. by Karl Pavlovich Brulloff,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09.

 

Pilgrims at the Entrance of the Lateran Basilica. 1825. by Karl Pavlovich Brulloff,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09.

 

Vespers. 1825. oil on canvas. by Karl Pavlovich Brulloff, Tretyakov Gallery Room 09.

 

Portrait of Francesco Ascani, 1834. by Karl Pavlovich Brulloff, 
Oil on panel. Tretyakov Gallery Room 09.

 

By the Bogoroditsky Oak, Karl Pavlovich Brulloff, 1835. 
oil on canvas. 61cm X 74cm. Tretyakov Gallery Room 09.

 

Portrait of the Poet and Playwright Nestor Kukolnic. 1836. Karl Pavlovich Brulloff, 
oil on canvas. 117 x 81.7 cm. Tretyakov Gallery Room 09.

 

Portrait of Grand Duchess Maria Nikolaevna, 1837. Karl Pavlovich Brulloff, 
oil on canvas. 60.2 x 48 cm. Tretyakov Gallery Room 09.

 

A Turkish Girl, 1837 ~1838. Karl Pavlovich Brulloff, 
oil on canvas. 66 X 80 cm. Tretyakov Gallery Room 09.

 

Portrait of a Man. 1838. Karl Pavlovich Brulloff,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09.

 

Portrait of I. A. Krylov, 1839. Karl Pavlovich Brulloff, 
oil on canvas. 102 cm X 86 cm. Tretyakov Gallery Room 09.

 

Portrait of an Architect I. A. Monighetti, 1840. Karl Pavlovich Brulloff,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09.

 

32. Portrait of the Poet and Translator A. N. Strugovshchikov, 1840. Karl Pavlovich Brulloff, 
oil on canvas. 80 x 66.4 cm. Tretyakov Gallery Room 09.

 

Portrait of Ye. I. Ton, 1837 ~ 1840. Karl Pavlovich Brulloff,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09.

 

Portrait of the Professor of the Moscow Medical Academy K. A. Janish, 1841.
Karl Pavlovich Brulloff, oil on canvas , 67 x 57.7 cm, Tretyakov Gallery Room 09.

 

Portrait of Volkonskis Children with Blackamoor, 1843. Karl Pavlovich Brulloff,
oil on canvas. 146 X 124 cm. Tretyakov Gallery Room 09.

 

Portrait of Zavyalov Fedor, 1844. Karl Pavlovich Brulloff,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09.

 

Portrait of M. A. Obolensky, 1840 ~1846. Karl Pavlovich Brulloff, 
oil on canvas. 123.7 x 106.7 cm. Tretyakov Gallery Room 09.

 

Bacchus, 1858. <바쿠스>, by Fyodor Bruni. oil on canvas. 91.2 x 71.5cm, Tretyakov Gallery Room 09.

표도르 브루니 (Fyodor Bruni 1799-1875) 이탈리아계 러시아 화가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하였다. 
이탈리아 유학 후 예술 아카데미 교수로 지냈고,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로마에서 그린 <구릿빛 괴룡>이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이삭성당에 벽화를 남겼다. 
주요 작품으로 <호레이스의 여동생 카멜라의 죽음>(1824년), 
<어린 큐피트에게 술을 주는 바커스의 사제>(1828년) 등이 있다.

바쿠스(Bacchus)는 술의 신이다.
한 손에는 잘 익은 포도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이미 숙성된 포도주를 줄줄 흘리며 
우리에게 애틋한 눈 빛으로 '함께 한 잔 할까' 라고 말하는 듯 쳐다본다. 
그림 속 바쿠스와 눈 빛을 교환해 보라. 
접시에서 흘러 내리는 포도주를 두 손 모아 받치고 그와 함께 한 잔 하고 싶은 충동이 느껴질 것이다.

브루니가 그린 <바쿠스>는 술 잘 마시는 러시아 사람들의 열성을 잘 표현하는 그림이다. 
수 세기를 거쳐 수많은 애주가 팬을 확보한 술의 신 바쿠스! 
브루니의 바쿠스는 반쯤 풀린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입꼬리를 살짝 올려 끈적한 눈빛을 보낸다.

"포도주 한잔할래?"
이미 무르익은 듯한 바쿠스의 취기와 왼손에서 흘러내리는 포도주가 너무도 사실적이다.
모스크바 트레차코프 국립 미술관 한 벽면을 장식하며 
많은 애주가의 술 샘을 자극하는 브루니의 아주 짜릿한 그림이다. 
정말로 바쿠스의 끈적한 눈빛에 화답하며 흘러넘치는 포도주 한 잔에 '치어스'를 살며시 외치고 싶다. 
하지만 진정한 러시아 주당들은 그림 속 바쿠스를 쳐다보며 안타까이 중얼거린다.

"술의 신 바쿠스! 왜 그리 일찍 태어나셨소. 
세계 최고의 술다운 술, 보드카도 맛보지 못하시고 참으로 안타깝소"라며 
보드카에 살고 보드카에 죽는 러시아인들은 주신이 살았던 그리스 로마보다 
더 다양하고 화려한 러시아 술 문화에 뿌듯해 한다. 
바쿠스의 끈적하게 유혹하는 눈빛에 미소 짓고, 러시아인들의 농담에 크게 웃는 그림이다.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09 전시실

 

 

 

 

 

 

18세기 회화 <초상화의 시대>

 

Portrait of Prokofiy . A. Demidov. 1773. by Dmitrij Levitskij. oil on canvas, 222.6 x 166 cm. 
Tretyakov Gallery Room 05.

​작가 드미트리 레브츠키 (Dmitrij Grigorievich Levitskij 1735~1822)는 화가인 부친에게 
기초를 배웠으며 키에프의 안트로포프(A.D. Antropov, 1716~1795)에게 사사받은 후 
페테르부르그 미술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1771~1788년 동 아카데미 초상화 교실의 지도를 담당하기도 했다.  
18세기 러시아 초상화가의 대표자이며 <예카테리나 2세> 등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림 속 데미도프(A. Demidov)는 철강업자로 러시아 최고 갑부, 단순한 부의 과시나 권위가 아니라 
문화와 교육에 힘쓰는 교양있는 사람으로서 부를 바탕으로 자선사업을 하는 고상한 인물임을 나타내고 있다​.
사진 속의 남자는 귀족일까 아닐까? 설명을 보기 전에 추측해 보자. 
비단 옷을 입고 여유로운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첫 인상에 귀족 같아 보이진 않는다. 
데미도프는 18세기 러시아 부유한 상공인으로 학교 및 보육원 등 
어린이를 위한 많은 건물을 지어 기부한 대표적인 사회사업가다. 
그림 속 데미도프가 서 있는 자리 왼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데미도프가 지어 국가에 헌납한 보육원, 학교 등이다.

 그림 속에서 데미도프는 오른손으로 화분을 가리키고 물조리개에 기대어 서 있다. 
데미도프는 꽃이나 나무를 키우기 위해 매일 물을 주고 양분을 주어 가꾸듯 
어린 아이들도 식물처럼 세심히 돌보고 키워야만 된다고 주장했으며, 
올바른 교육만이 사회를 바로 세우는 힘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실천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의 선행을 고맙게 생각한 레비츠키는 초상화를 그려 선물했다. 
그러면서도 어떤 가식이나 형식을 생략하고 
데미도프의 내면과 이미지가 사실적으로 드러나도록 그린다. 
인간의 심성에 초점을 맞추는 러시아 초상화 화풍이 잘 드러나는 데미도프의 초상화다.

 

Portrait of A. D. Levitzkaya, Artist s Daughter. 1785. by Dmitrij Levitskij. 레비츠키의 딸 아가샤 레비츠키의 초상화. 
oil on canvas. 118 x 90 cm. Tretyakov Gallery Room 05.

어여쁜 소녀가 우리를 쳐다본다. 
러시아 전통의상을 입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포즈를 잡고 있다. 
결혼식을 앞둔 화가의 딸을 그린 초상화다. 
세계에서 미녀가 가장 많기로 소문난 러시아이기에 과연 러시아 미녀는 어떤 모습일지 많이 궁금해한다. 
그림 속의 여인을 보면 된다. 
커다란 눈에 하얀 얼굴, 홍조 띤 뺨, 크지 않은 체구에 날씬한 몸매, 
전형적인 러시아 미녀가 궁금하다면 레비츠키의 초상화를 눈에 담으면 된다.

 

Portrait of Alexander Golytsyn, 1772. Tretyakov Gallery Room 05.

 

Portrait of Count Sivers​, 1779.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05.

 

Portrait of an Unknown Man, 1775,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05.

 

Alexander Khrapovitsky, 1781. Tretyakov Gallery Room 05.

 

Portrait of M.A. Lvova​,1781.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05.

 

Portrait of Countess Ursula Mniszech, 1782. oil on canvas. 72 x 57 cm.  
Tretyakov Gallery Room 05.

 

Portrait of P. V. Bakunin, 1782. Tretyakov Gallery Room 05.

 

Philanthropic giver (Portrait of N. A. Sezemov), 1770.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05.

 

Portrait of Maria Dyakova, 1778. Tretyakov Gallery Room 05.

 

Yekaterina Romanovna Vorontsova-Dashkova, 1784. Tretyakov Gallery Room 05.

 

Portrait of I. V. Lopukhin, 1803.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05.

 

Portrait of Greate russian empress Catherine II, Tretyakov Gallery Room 05.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05

 

 

 

<Paul 1세의 초상화>, by Stepan Schukin. oil on canvas. 154 x 116cm. Tretyakov Gallery Room 06.

화가 스테판 슈킨 (Stepan Semenovich Schukin 1762~1828), 
스테판 슈킨은 18세기 말 - 19세기 초반 러시아에서 가장 위대한 초상화 화가 중 한 사람이다.
폴 1세의 초상화는 이전에 제국주의자를 어느 누구도 이렇게 묘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만하다. 
그의 머리에 큰 검은 수염 모자가 있다. 
스테판 슈킨은 무수한 우화와 속성으로 연극 영화 제작을 거부하면서 
황제의 내면의 외로움을 전달하는 유일한 방법을 선택했다. 
"힘의 선구자"의 가면 아래에 숨어 있었다.
폴의 통치는 단명했고 1801년 3월 12일 그가 미하일 로프스키 성에서 살해되었을 때 끝났다.

Paul 1세는 예카테리나 2세의 아들이다. 
엄마가 아빠를 살해하는 그런 부모를 가진 슬픈 운명의 소유자인 폴 1세는 
엄마 예카테리나 2세가 죽은 후 왕위에 오르지만 6년 정도 폭정을 펼치고 
이름 모를 강가에서 쓸쓸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그림 속의 폴 1세는 쓸쓸하면서도 나약해 보인다. 
3번 방에서 보았던 아빠 표트르3세와 너무도 닮은 폴 1세는 
우아하지만 약간은 모자란 듯한 이미지로 우리를 내려다 본다. 
권력의 또 다른 이면이 느껴져 관객으로서 조금은 쓸쓸해질지도 모른다. 
'모든 권력을 손에 쥐었다 한들..'하며 폴 1세를 바라볼 뿐이다.

 

Red Square, 1801.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 by Fyodor Alekseyev. 

81.3 x 110.5 cm. Tretyakov Gallery Room 06.

화가 표도르 알렉세예브 (Fyodor Yakovlevich Alekseyev 1795-1866)
알렉세예브는 도시 경관을 전문으로 그리는 작가다. 
이 작품은 18세기 러시아 모스크바의 심장, 붉은 광장과 크레믈린을 그린 그림이다. 
18세기 당시 크레믈린은 현재의 붉은 벽돌 담장이 아니라 흰색의 석조 건물이었다. 
세계 최고의 건축물인 바실리 성당은 당시에도 위용을 자랑하며 그 자리에 서 있다.

 

커너터블 (Konnetable) 광장 근처 갓치나(Gatchina) 돌다리. by Shchedrin Semen.

Tretyakov Gallery Room 06

세멘 쉐드린 (Shchedrin Semen Fedorovich 1745 – 1804)은 풍경화의 대가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예술아카데미 졸업 후 쉐드린은 파리로 갔다가 로마로 갔다. 
파리에서 쉐드린은 플래너 작업을 많이했고 로마에서는 고전주의의 아이디어를 취했으며 
이는 그의 창의적인 방법에 반영되었다. 
1776년 쉐드린은 고향으로 돌아와 산수화 교수가 되었다. 
또한 그는 캐서린 2세 (Catherine II)의 궁전과 공원의 이미지를 만들도록 지시받았다.

쉐드린은 Gatchina, Peterhof, Pavlovsk의 전망을 묘사했다. 
그는 자연을 존경하는 시인으로서 자신을 작품에서 드러낸다. 
쉐드린의 작품에 따르면 일종의 산책을 할 수 있다. 
쉐드린의 그림에서 구성은 공원 자체의 구성과 유사하다. 
보기가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로 이동하고, 
보는 사람은 공원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며 걷는 느낌을 만든다.
쉐드린의 작품은 장식성과 구체적인 모습을 전달하려는 열망을 조화롭게 결합한다.
여러 면에서 풍경화가가 러시아의 자연에 주목한 것은 세멘 쉐드린 덕분이라고 믿어진다.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06

 

 

 

Portrait of M.I.Lopukhina, 1797. <마리아 이바노프 로푸치나의 초상화> 1797. by Vladimir Lukich Borovikovsky. 
oil on canvas. 72 x 53.5cm. Tretyakov Gallery Room 07.

블라디미르 보로비콥스키 (Vladimir Lukich Borovikovsky 1757~1826) 는 

러시아 초상화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연 작가다. 
그림 속 여인은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자연을 배경으로 서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세상사 모든 일을 뒤로 한 채 태초의 순수함 만을 간직한 듯 선한 표정이다. 
보로비콥스키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 프랑스 혁명이 발발, 루이 16세가 처형된다. 
프랑스 책을 읽고 프랑스어로 말하고 계몽주의를 받아들이던 러시아 귀족들은 
이 역사적 현실 앞에 놀라게 되고 프랑스 혁명의 기본 사상, 

계몽주의가 러시아에 퍼지는 것을 금지한다. 
그로인해 모든 예술이나 사상등이 감상주의라는 옷 속에 몸을 감추게 된다. 
그런 시대를 반영하듯 모델은 현실을 외면하듯 고대의 드레스를 입고 자연을 배경으로 서 있다. 
시대적 상황이 어찌 되었든 모델 속 로프하나는 너무도 아름답고  매력적인 모습이다.

1797년 블라디미르 보로비콥스키란 화가가 젊은 공작부인 마리야 로푸히나의 초상화를 그렸다. 
신비한 눈빛의 아름답고 건강한 젊은 여인의 초상화였다. 
하지만 그림이 완성되고 얼마 후 그녀의 건강이 나빠졌고 
의사들은 폐결핵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진단을 내린다. 
18세기에 결핵은 불치병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부인은 짧고도 불운한 생애를 마쳤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공작부인의 부친은 신비주의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심지어 프리메이슨 로지(lodge)의 회원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가 죽은 딸의 혼을 초상화에 “이식”했다고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혼인을 앞둔 처녀가 있는 집에 이 초상화를 놔두면 
그녀들도 마리야와 같은 불행을 맞게 된다고 말했다. 
1880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이 이 그림을 입수해 관람객들에게 공개했다. 
<미지의 여인>의 경우에서처럼 그후로 초상화가 저주받았다는 소문은 뚝 끊겼다.

 

Portrait of Catherine II  Walking in the Park. Empress of Russia, 공원을 산책하는 예카테리나 2세. 1794. 
by Vladimir Borovikovsky. oil on canvas.  94.5 x 66cm. Tretyakov Gallery Room 07.

블라디미르 보로비코프스키의 러시아 대군주 예카테리나 2세 초상화이다. 
남편을 살해하고 왕권을 쟁취한 여자, 그녀만큼 자신의 초상화를  많이 남긴 황제도 드물다. 
독일 출신이라 러시아 군주로서의 정통성이 항상 불안했던 그녀는 
자신의 위업을 그림을 통해 알리려 애쓴다. 


대부분의 초상화들은 화려한 대관식복이나 황제복을 입고 있는 것이지만 
이 그림만 평상복을 입고 공원을 산책하는 모습의 그림이다. 
이 당시에도 이런 그림을 그려 사람들과의 소통을 염두에 둔 것일까? 
그림 속의 의상은 아직도 그대로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Portrait of D. A. Derzhavina, 1813. 284 x 204 cm. by Vladimir Borovikovsk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07.

 

Portrait of Count Alexander Kurakin, 1801~1802. 알렉산더 쿠라킨 대공. by Vladimir Borovikovsky.

oil on canvas. 259 x 175 cm. Tretyakov Gallery Room 07. 

 

Portrait of the Sisters Princess Anna Gavriilovna Gagarina and Princess Varvara Gavriilovna Gagarina, 1802. 
by Vladimir Borovikovsky. oil on canvas, 69.2 x 75 cm. Tretyakov Gallery Room 07.

안나와 바르바라 가가린 공주 두 자매 초상화.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07 블라디미르 보로비코프스키 작품 전시실

 

 

 

 

 

18세기 회화 <초상화의 시대>

 

Tretyakov Gallery Room 02. 

 

 Celebration of the wedding contract, <결혼 계약의 축하> 1777년. by Mikhail Shibanov.
Oil on canvas. 200 x 144cm, Tretyakov Gallery Room 02. 

미하일 쉬바노프 (Mikhail Shibanov ?~1789)는 러시아의 화가이며,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부친도 알려지지 않았다. 
사망 시점 역시 정확하지 않으며 1789년 이후로 추정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대략 5-6점 정도가 있고, 그 중 2점은 18세기 후반에 그려진 것으로 
러시아에서 평범한 일상의 삶이 그려진 장르화 작품 분야에서는 초기 작품으로 매우 잘 알려져 있다. 
미하일 쉬바노프는 주로 농노의 평범한 일상을 그렸고, 후반에는 초상화도 몇 점 추가했다.  

미하일 쉬바노프의 1777년 작품 <결혼 축하>는 당대 농노들의 일상을 
주로 그린 것으로 알려진 그의 작품들 중에 꽤 잘 알려진 그림이다. 
그림 속의 사람들의 옷차림으로 보아 농노라고 하기에는 조금 잘 차려 입은 듯 하니, 
조금 형편이 나은 농노이거나, 일반 농민일 수도 있다. 

이 작품이 수즈달의 농민을 그린 것이라는 사실은 
이 그림 뒤에 화가 본인이 직접 써 놓은 글로 알 수 있다.  
비교적 옷차림이 농노만큼 남루하지는 않으면서도, 전형적으로 소박한 모습이다. 
헌데, 신부의 얼굴은 결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을만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남성이 아니라 다른 곳인 아래쪽 어느 한 곳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 의문을 자아낸다.  
혹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데 대한 심정이 얼굴에 나타난 것인지, 가난하기 때문에 
결혼을 하여서도 가난한 삶을 계속해야 한다는 그런 걱정들로 가득차서인지 보는 사람의 생각에 맡길 뿐이다. 

반면, 신부의 손을 잡고 있는 남성은 신부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랑인 듯 하다. 
신부의 손을 잡고 있는 남성의 옷차림과 신부의 옷차림은 결혼한다고 
특별히 옷을 새로 해 입은 듯, 딱 보기에도 매우 큰 차이가 난다. 
당대 러시아 농민들도 가난하지만 결혼을 하는 때 만큼은 생애에 한번 
가장 아름답게 치장했던 것은 지금과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사진 상으로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신부가 입고 있는 옷의 부드러운 느낌과 
세밀한 표현은 매우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그림의 이름은 결혼축하를 나타내고 있지만, 썩 좋지 않은 주위 사람들의 옷차림새, 
식탁위의 빵들로 보아 당시 농민들의 삶이 가난했음을 알 수 있다.
위 그림은 현재 러시아 국립 트레찌야코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8세기 중반 농민에게도 숭고하고 엄숙한 의식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1777년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 러시아는 농노제가 뿌리 깊이 자리잡고 있었을 때여서, 
농민의 삶은 가난하고 피폐했을 것이다. 
하지만 흑빵 한 덩이와 술 한 병이 전부인 의식일지라도 농민들 삶의 고귀함을 그림을 통해 보여준다.

시바노프의 그림을 보자. 어둑한 시골농가의 방안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 있다. 
농촌의 청춘남녀 한 쌍의 결혼을 사람들이 기뻐하며 축하해 주는 장면이다. 
그림의 초점은 단연 주인공인 여성에 맞춰져 있다. 
특별한 날을 맞아 그녀는 꽃무늬로 가득한 옷과 귀한 장신구들로 한껏 치장을 한 모습이다.

농민들의 삶이야 늘 팍팍하였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러시아 농민의 삶은 특별히 남루한 것이었다. 
18세기 중엽 러시아 인구 6,700만 명 가운데 5,000만 명이 농민이었는데, 
그 가운데 4,000만 명은 농노로서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뼈가 부서지도록 밭을 갈아 얻은 수확의 대부분을 지주에게 빼앗기고도 
주 3일 이상은 지주의 직영지에서 부역으로 노동을 해야 했다. 
국가는 그들로부터 인두세를 걷고 병역의 의무를 부과했지만 그 대가로 돌아오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은 지주의 재산이었다. 지주는 농노를 매매하거나 아무런 제한 없이 형벌을 가할 수 있었다. 
농노가 아닌 자영농민들의 경우에는 그보다 형편이 좀 나았겠지만 먹고살기가 고단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들은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자신과 똑같은 운명을 이어가야할 아이들을 낳았다. 
지옥에서도 작은 기쁨이 있다면 그것을 부여잡고 삶을 이어가는 것이 인간이 아닐까. 
그것을 어리석다고 보아야 할지 숭고하다고 보아야 할지의 판단은 각자의 몫이리라. 
최고급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도  매일 이어지면 심드렁한 습관이 되어버리듯이, 
뼈를 깎는 고난도 일상이 되면 덤덤하게 받아들여 질 수 있을지 모른다.

짐승 같은 삶을 이어간 그들에게도 행복한 순간이 있고 때로는 기념할만한 날이 있다는 걸 
18세기 러시아의 귀족들이 어떻게 알 것이며, 관심이나 있었으랴. 
러시아의 지배층이 농민을 잠시 대견하게 바라본 것은 17세기 초 소위 ‘동란시대(1606~12)’의 일이었다. 
류릭 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한 폭군 이반 뇌제 (재위 1533~84)가 죽은 후 후계를 둘러싼 투쟁으로 
정국은 내란에 휩싸였고 여기에 대기근까지 덮쳐 러시아 땅은 사람이 인육을 먹는 생지옥으로 변했다. 
러시아가 약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어김없이 쳐들어와 괴롭히던 당시의 강국 폴란드는 
때를 놓치지 않고 모스크바를 점령하였다. 
이를 물리친 것은 호의호식하던 귀족들이 아니라 
니즈니 노브고로드의 푸줏간 주인 쿠즈마 미닌이 이끄는 국민군 즉 의병들이었다.

역사책에는 외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러시아인들의 국가의식과 국민의식이 고취되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귀하신 분들이 황망 중에 농민들과 잠시 어깨동무를 하였을지 모르나, 
사태가 수습된 후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의미 있는 변화는 그로부터 200년 후에야 찾아온다. 
1812년 러시아는 유럽을 다 집어삼킨 강력한 나폴레옹 군대의 침략을 맞게 된다. 

대문호 톨스토이는 이 전란을 배경으로 쓴 걸작 <전쟁과 평화>에서 
농민 출신 병사들을 조국을 구한 주역으로 묘사하고 있다. 
러시아 인들이 '조국전쟁'이라고 부르는 이 대사건은 러시아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이 된다. 
점령군 장교로 파리에 진주하여 자유로운 근대의 대기를 접한 러시아 청년귀족들은, 
민중이 새로운 시대의 주역임을 깨닫고 입헌군주제를 외치며 최초의 혁명을 기도하는 것이다. 
그것이 1825년 12월의 ‘데카브리스트 혁명’이다.

이무렵 귀족들이 농민 또는 민중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음은,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한 동상에서도 엿볼 수 있다. 
모스크바 강 쪽에서 광장 입구로 들어서면 

이 도시의 가장 잘 알려진 랜드마크인 성 바실리 성당을 만나게 된다. 
양파모양의 화려한 큐폴라들에게 한동안 시선을 빼앗겼다가 걸음을 옮기는 관람객들은 
자칫 청동으로 만든 두 남자를 놓치고 지나가 버릴 수 있다. 
동란시대의 영웅 미닌과 포자르스키의 동상이다. 

누란의 위기에서 상인 미닌은 군자금을 모으고 수즈달의 공후 포자르스키는 
직접 국민군을 지휘하여 폴란드 군을 격퇴하였다. 
그런데 동상에 표현된 두 사람의 모습을 꼼꼼히 뜯어보면 좀 의아한 생각이 든다. 
무장인 포자르스키는 방패를 의지하고 주저앉아 좌절한 모습이고, 푸줏간 주인인 미닌이 

오히려 우뚝 서서 결의에 찬 눈으로 나무라듯 공후를 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닌은 한 손으로 포자르스키의 칼을 잡고 다른 손을 하늘로 뻗어, 
어서 힘을 내어 함께 나아가자고 독려하는 듯한 모습이다. 
귀족이 아니라 하층계급의 사람들을 국난 극복의 주역으로 동상이 묘사하고 있는 것은, 
1818년 나폴레옹 전쟁 직후였던 동상 제작 당시 러시아 사회가 
민중이란 존재에 대해 비로소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

시각이 이처럼 변할 때까지 농노나 농민들도 생활 속에서 
작은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인간이란 사실을 알아줄 사람은 그들 자신뿐이었다. 
농노출신의 화가 시바노프의 대표작 <결혼계약의 축하>에는 
신랑신부를 둘러싸고 행복한 얼굴을 한 농민들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약간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우선 신부와 주변의 여자들 몇 사람의 행색이 그렇다. 
그들은 곤궁했던 것으로 잘 알려진 러시아 농민의 신분과는 어울리지 않게 

꽤 화려한 치장을 하고 있다. 
하기는 화가가 농노출신이라고 해서 반드시 농노를 그려야하는 법은 없으므로, 
그가 그린 것은 형편이 좀 나았던 자영농민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농노들에게도 나름의 소중한 삶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화가가 사실을 좀 왜곡한 것일 수도 있다.

더 의아한 것은 밀랍인형처럼 무표정한 신부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감정을 얼굴에 담고 있으나, 
유독 그녀만은 아무런 느낌이 없는 굳은 표정을 하고 있다. 왜 그럴까. 
오늘처럼 의미 깊은 날에 그녀는 기뻐하는 것이 정상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문득 그림의 제목에 눈이 간다. 
어떤 도록에는 이 그림에 <결혼 합의(agreement)의 축하>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남자의 청혼을 여자가 승낙하는 장면인 것으로 생각했다. 

신부 곁의 치장한 여자들은 아마 매파쯤 될 것이고. 
러시아어 원문을 보다 정확히 번역한 것은 <결혼 '계약(contract)'의 축하>이다. 
상업적 의미가 먼저 떠오르는 이 단어는 

냉랭한 신부의 얼굴과 어울려 복잡한 추정을 하게 만든다. 
그녀는 혹시 팔려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신랑이 금전적 대가를 미끼로 결혼을 제안하였고 신부가 마지 못해 

그 계약에 동의하게 된 것이라면, 그렇다면 모든 것을 포기한 그녀가 

이 순간 저렇게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처럼 상상이 다소 지나치게 나래를 펴는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훨씬 후대의 작품이지만 바실리 푸키레프의 

<부당한 결혼(unequal marriage)(1862)>이란 그림이 겹쳐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 그림이 무슨 장면을 그린 것인지는 누가 보아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금전적 거래에 의한 결혼의 피해자인 어린 신부. 

그녀를 감싸고 있는 슬픔과 이를 둘러싼 사악한 표정들.

하지만 이런 과도한 상상은 러시아의 미술사가 A. I. 조토프의 글을 읽는 순간

좀 멋쩍게 주저앉고 만다. 
그는 저서 <러시아 미술사>에서 이 장면을, 신랑의 집에 도착한 신부가 
진지함과 높은 품격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당시의 혼인 풍습을 잘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는 러시아 사람이며 

미술의 권위자인 조토프의 해석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정신이 마치 딴 세상에 가있는 것처럼 

화면 속에서 혼자 겉도는 듯한 저 표정을 과연 그리 보아야 할까. 

그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스런 점이 있지만, 신부는 집을 떠나 
새로운 삶의 첫발을 딛는 상황에서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일 뿐일 수도 있다. 
그림을 감상하는 건 보는 이의 몫이고, 그림 하나를 두고 이처럼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는 동안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예술작품의 힘이 아닌가.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1750. by Ivan Argunov. Oil on canvas. 56.7 x 42.5 cm, Tretyakov Gallery Room 02.

이반 페트로비치 아르그노프 (Ivan Petrovich Argunov, 1729~1802) 작품.
이 여인은 누구일까? 제목을 보면 클레오파트라라고 되어 있다. 
한치의 코만 낮아도 세계의 역사가 바뀌었을 거라는 클레오파트라를 

러시아 화가 아르그노프는 이렇게 표현한다. 


뱀이 가슴을 물려고  하는 걸 보면 그녀가 분명하긴 한데, 
왠지 우매해 보이고 약간은 멍청해 보이기까지 한 클레오파트라다. 
과거의 역사를 판단하는 건 후손의 몫으로 
클레오파트라의 새로운 이미지에 대해 찬성할지는 각자에게 달려 있다. 
그림을 통해 읽을 수 있는 세기의 미녀 이미지가 무척이나 흥미롭다.

 

<러시아 전통 의상을 입은 여인> 1784. by Ivan Argu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02.

이반 페트로비치 아르그노프(Ivan Petrovich Argunov, 1729~1802) 작품. 
사람을 그리는 초상화는 모델의 내면과 풍기는 이미지를 
어떻게 진솔하게 표현하느냐가 그림의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 기준이다. 
그림 속 여인의 맑고 깨끗한 이미지와 순하고 단아한 느낌이 너무도 세련되게 표현되어 있다. 
또 러시아 전통 의상을 입고 있어 18세기 러시아 전통 복식 또한 
읽을 수 있으니 참으로 귀한 그림이라 할 수 있겠다.

 

Self-immolation of Hercules at the stake in the presence of his friend Philoctetes, 1782. 

by Akimov I. A. oil on canvas. 232 x 160 cm. Tretyakov Gallery Room 02.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02

 

 

Tretyakov Gallery Room 03 전시실

 

Tretyakov Gallery Room 03 전시실

 

2019. 08. 18. 인증샷

 

<표트르 3세의 초상>, 1762. by Alexei Antropov. oil on canvas. 250 x 179cm, Tretyakov Gallery Room 03.

그림 속 남자는 황홀, 대관식복, 왕관 등 화려한 소재에 둘러 싸여 
황제의 근엄을 드러내려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부족해 보인다. 
황제의 위엄은 찾아볼 수 없고 심지어 바보스럽기까지 하다. 
바로 아내인 예카테리나 2세에게 독살당하는 무능력한 황제, 표트르 3세의 초상화다. 
이 그림을 들여다 보면 구중궁궐의 피비린내 나는 암투 속에서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었겠다는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된다. 
그러면서 어떠한 과장도 없이 이렇게 황제를 솔직하게 표현한 안드로포프는 
궁정화가로서 별일 없었을까 하는 걱정마저 들게 하는 그림이다.

알렉세이 안트로포프(Alexei Petrovich Antropov 1716-1795)는 18세기를 대표하는 러시아의 화가이다. 
그는 주로 초상화를 그렸지만 이콘이나 금속공예 분야에서도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흔히 표트르 시대 화가들과 18세기 후반 화가들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가교와 같은 역할을 하였으며 
1730-40년대 러시아 회화의 침체기를 종식하고 러시아 회화의 새로운 장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1739년 페테르부르크에서 군대 목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인 가족에서 태어나서였는지 그는 일찍부터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가 15세 되었을 때 그는 미술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당대의 유명한 러시아 및 유럽 화가들에게서 사사하게 된다. 
1739년에는 이반 비쉬냐코프의 도제가 된 그는 작품 활동 초기 성화의 파르수나 장르의 
영향을 받게 되지만 비교적 빠른 기간에 이를 극복하고 서구적인 초상화 양식을 습득하게 된다.

그는 이어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등지의 성당 내부 장식에도 참여하여 
이코노스타스의 이콘을 그리기도 하였다. 
성당 복원작업을 위해 키예프에 머무는 동안 그는 18세기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드미트리 레비츠키의 멘토가 되기도 하였다. 
이후 모스크바로 건너가 골로빈 궁의 미술작업을 담당하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세속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된다. 
이후 다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그는 몇 점의 훌륭한 초상화 작품을 남기게 된다. 
1761년 경 그는 이미 초상화가로서의 명성을 굳건히 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모스크바에 초청되어 신성종무원의 수석 화가가 된다. 
1789년 개인 미술 학교를 세우면서 그는 자신의 집을 기증하기도 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초상>, <쉐레메체바 부인의 초상>, 
<루먄체바 부인의 초상>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 매우 섬세하고 장식적이었으며 옷이나 배경 등의 디테일에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또한 그는 17-18세기 유럽의 바로크 초상화의 영향을 수용하면서 
리얼리즘 기법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그의 초상화는 매우 자연스럽고 인위적이지 않은 포즈와 표정으로 편안한 느낌을 주었고 
심리주의적인 색채 또한 과도하게 부여하려 하지 않았다. 

 

Tretyakov Gallery Room 03 전시실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03

 

 

<분홍 드레스를 입은 미지의 여인>, 1770. by Fedor Rokotovoil. on canvas. 58.8 x 46.7cm, 

Tretyakov Gallery Room 04.

 

표도르 로코토프(Fedor Stepanovich Rokotov 1735~1808)
표도르 로코토프는 러시아 렘브란트라 칭송받는 러시아 계몽주의 시대 최고의 초상화가다. 
로코토프에 의해 초상화 기법이 크게 발전하였고 이콘화 형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모델의 심성을 표현하는 인간 중심적인 초상화가 자리잡아 간다. 
분홍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이마에 은은한 빛을 주고 배경이나 
윤곽을 흐릿하게 표현해 모델의 사랑스럽고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돋보이게 그려졌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크레믈린의 남쪽 모스크바강 건너편에 있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의 기원은 
러시아의 상인이자 기업가인 파벨 트레티야코프(1832∼1898)가 
1854년 미술품을 처음 구입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860년대 후반 그는 문학과 예술 등 문화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낸 인물들의 초상화를 조직적으로 수집하였다. 
1870년 미술관을 설립하고, 화가들로 하여금 러시아 사람들의 일상생활, 
러시아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그린 사실주의 풍의 그림을 전시토록 하고 그 그림들을 구입하였다.

1874년경 그는 이미 동시대 러시아 미술의 수집가로 권위를 인정받게 된다. 
1881년부터 그의 미술관은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1885년까지 대략 3만 명의 관객이 미술관을 방문하기에 이른다. 
1890년대에 그는 이콘의 수집을 시작했고, 조각품의 수집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그림들은 모두 인민에게 속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1892년 8월 
동생인 세르게이가 수집한 서유럽의 미술품과 함께 자신의 미술관을 모스크바 시에 기증한다.

1893년 8월 15일 ‘파벨과 세르게이 트레티야코프 시립미술관’이 문을 열었고, 
매년 15만 명이 찾는 모스크바의 명소가 되었다. 
현재의 공식 명칭은 ‘국립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이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의 소장품은 고대 러시아 성화에서부터 현대 미술까지 다양하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러시아 미술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러시아 미술품의 보고다. 
이바노프, 수리코프, 레핀, 세로프 등 18세기에서 20세기초의 화가들, 
칸딘스키, 샤갈 등 현대 작가들, 옛날 러시아 미술을 대표하는 
안드레이 류블로프 등 이콘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이들 작품은 두 건물에 분산 전시되고 있는데, 제1관(라브루쉰스키 거리 10번지)은 
11세기부터 20세기초까지의 러시아 미술품으로, 제2관(크림스키 발 10번지)은 
20세기 초 아방가르드로부터 1990년대 포스트 모던에 이르기까지 현대 미술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관에 있는 작품들 중에는 루블료프의 ‘삼위일체’, 레핀의 ‘이반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 
이바노프의 ‘그리스도의 출현’, 수리코프의 ‘보야리니아 모로초바’ 등이 특히 유명하다. 
그리고 제2관에 있는 작품 중에는 구상성을 지켜나간 샤갈의 ‘도시 위’와 
추상성을 추구한 칸딘스키의 ‘즉흥적으로 생각해 낸 차가운 형태들’, 
입체파를 모방한 올가 로자노바의 ‘메트로놈’ 등이 유명하다.

 

우선 2층으로 올라가 1번 방으로부터 34번 방까지 관람한 다음 
1층으로 내려가 35번 방부터 62번 방까지 보면 된다. 
그리고 각 방의 번호들도 시대 순으로 나누어졌기 때문에 방 번호를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18세기부터 20세기초까지의 러시아 미술 즉, 그림과 조각들을 개관하게 된다.

하지만 마지막 56번부터 62번까지의 방은 고대 러시아 미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는 러시아가 몽골의 지배를 받기 전 11세기부터 18세기까지의 종교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종교화라면 이콘화를 말한다.

1번에서 7번까지 방에서 우리는 슈빈(1740∼1805)을 비롯한 18세기 러시아 미술가들을 만난다. 
슈빈은 특히 조각으로 유명한데 ‘알렉산드르 골리스틴 왕자’(1773)가 대표작이다. 
알렉세예프(1753∼1824)의 ‘피터폴 요새에서 바라본 제방 위의 궁전’(1794)은 
에르미타쥐 궁전의 200년 전 모습을 보여준다. 
보로비콥스키(1757∼1825)의 ‘마리아 로푸키나의 초상’(1797)은 당시의 대표적인 초상화로 
얼굴과 머리 그리고, 의상에서 전형적인 러시아 여인의 모습이다.

8에서 15번까지 방에는 19세기 전반의 러시아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 전시된 작품들 중에는 9번 방의 이바노프(1806∼58)와 
13번 방의 트로피닌(1776∼1857) 것이 가장 인상적이다. 
이바노프의 ‘민중들에게 나타나는 그리스도(일명 메시아의 출현 1837∼57)’는 
그의 평생의 역작으로 크기가 무려 540×750㎝이다. 
그림이 아주 사실적이며, 민중들의 표정이 하나하나 아주 세밀하고 정확하게 그려져 있다. 
트로피닌의 그림 ‘레이스 만드는 여자’(1823)에 나오는 인물의 표정이 아주 밝고 건강하다.

16에서 31번까지 방에는 19세기 후반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 시기에 러시아 미술이 가장 번성했으며 대표 작가로는 수리코프와 레핀이 있다. 
이들 외에도 ‘도스토예프스키 초상화’(1872)를 그린 페로프(1834∼82), 
‘황금빛 가을’(1895)를 그린 레비탄(1860∼1900) 등이 유명하다.

바실리 수리코프(1848∼1916)는 이 시대의 대가답게 
역사적인 순간들을 극적으로 표현하여 높은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베로네제, 티치아노, 틴토레토 등의 그림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그들의 색체 기법을 받아들였다.
1887년에 그린 ‘보야리니아 모로초바’가 대표작인데 크기가 304×587.5㎝에 이른다. 
보야리니아는 오랫동안 믿어 왔던 자신의 신앙을 고집했다는 이유로 
황제군에 의해 체포되어 호송된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 일부는 이를 아쉬워하고 다른 일부는 이를 즐거워한다. 
역시 사실적인 표현이 아주 두드러진다.

일리야 레핀(1844∼1930) 역시 러시아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이다. 
이곳 트레차코프 미술관에 있는 그의 작품만 해도 150점이 넘는다. 
그의 대표작은 ‘쿠르스크 지역의 종교 행렬’(1881∼83)과 
앞에 언급한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 1581년 11월16일’(1885)이다. 
이들 중 전자는 종교적이고 후자는 아주 극적이다. 
그리고 그가 그린 ‘온화한 무소르그스키의 초상’(1881)도 좋다.

 

[Room 01-07] 18세기 회화 <초상화의 시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관람은 18세기 아카데미 화풍의 초상화부터 시작된다.
이 시기 이전의 러시아 미술은 이콘화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표트르 대제의 개혁 정책이 미술계에도 밀려들며 이콘화가 주를 이루던 
러시아 화단에도 큰 변화가 일고, 황실 주도의 러시아 미술 아카데미는 
서유럽의 화풍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재능 있는 화가들의 유학을 장려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러시아 그림은 이콘화 (그리스 정교 종교화)와 세속화, 
두 형태로 나뉘어 발달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 러시아 회화의 대부분은 왕족이나 귀족의 초상화다.

 

Portrait of Empress Anna Ioannovna. 1730. <황녀 안나 이바노브나의 초상> 
by Louis Caravaque.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Room 01 

화가 루이 카라바크 (Louis Caravaque 1684~1754)는 프랑스 마르세이유의 예술가 가족에서 태어났다.  
카라바크는 원래 초상화, 전투 그림, 역사적 장면 및 풍경을 그리기 위해 3년 동안 러시아에 오기로 계약했다.   
새로운 도시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유럽풍을 적용하려고 한 피터 대제의 계획에 따라 
루이 카라바크는 러시아에서 일한 가장 성공적인 외국 예술가 중 한 명이 되었다. 

1716년에 카라바크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살면서 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있었다. 
카라바크는 1716년 피터 대왕의 초상화를 그렸다.  
1723년에 차르를 다시 그렸고 나중에 앤과 엘리자베스 황후의 초상화를 그렸다.  
  
카라바크는 그가 그린 캐서린(Catherine), 안나 이바노브나 및 엘리자베스(Elizabeth)를 통해  
러시아 초상화 그림 세계에서 계속 지배적인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다양한 황실 가족과 그들의 삶을 여러 상황에서 다룬다.  
초상화뿐만 아니라 여러 인테리어를 디자인하고  
북부 전쟁에서 피터의 군사 승리와 관련된 다양한 전투 장면을 그렸다.  
그는 또한 여러 아이콘을 그리는 의뢰를 받았으며 그렇게 한 최초의 외국 예술가 중 하나가 되었다.  
카라바크는 1754년 6월 9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으며 St. Sampson 대성당의 묘지에 묻혔다. 

Portrait of Empress Anna Ioannovna. 1730. <황녀 안나 이바노브나의 초상> 
by Louis Caravaque.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Room 01

 

황녀 안나 이바노브나 (Anna Ioannovna)는 1693년 1월 28일 모스크바에서 표트르 대제의 형제인  
이반 5세와 프라스코비아 살트이코바 사이에 네 번째로 태어난 딸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아버지의 이복동생 표트르 1세의 궁전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710년에 쿨란스키 공작과 결혼하고 공작이 죽은 후에는 주로 민타프에서 살았다.  
1727년부터 에른스트 비론이 안나의 총신이 되었다. 

표트르 2세가 서거한 후 추밀원의 의원들은 자신들이 그의 권력을 제한한다는 조건으로  
안나를 러시아의 제위에 옹립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에 동의한 지 얼마 후 안나는 귀족 근위병의 의뢰에 따라  
그 계약조건을 파기하고 추밀원을 해산시켰다.  
1730년 4월에 모스크바에서 즉위했다.  
원로원을 복구시켰으며 외국인들의 도움과 지지를 받고 나라를 통치했다. 

1731년에 내각을 창설하고, 잔혹한 고문을 행하는 비밀경찰의 활동을 승인해  
정권에 대항하려는 반대 세력들의 어떠한 시도도 엄중하게 진압했다.  
그에 따라 돌고루코브이 가, 골리츠인 가, 볼르인스키 가 출신의  
많은 사람들이 유폐되거나 사형에 처해졌다.  
또한 안나는 정권을 획득하는 데 도움을 준 귀족들의 특권을 넓혀 주었다.  
장자 상속에 대한 법을 개정하였다.  
폴란드 소귀족 계급을 위한 육군유년학교를 설립했고  
학교 이사장의 아들 중 한명이 이 영지를 관리하도록 했다.  
귀족의 국가 봉사를 35년으로 제한했다. 

안나는 산림을 보호하고 보존할 목적으로 국가적인 벌채금지법을 만들도록 지시했으며,  
러시아 정교회의 순수성을 보호하고자 이단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다.  
이를 위해, 특히 그의 명령에 따라 러시아의 16개 도시에서 신학교가 개교되었다.  
1735년에는 신성모독을 하면 사형에 처하도록 지시했다. 

안나는 미니흐가 주장한 군사개혁도 추진했는데,  
1737년에는 비론을 쿠를란스크와 세미갈리스크의 공작에 임명했다.  
표트르 1세 때에 합병되었던 카스피 해 연안의 영토를 페르시아로부터  
안전하게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영토를 페르시아에게 넘겨주었다.


1735년부터 1739년까지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소극적인 외교정책으로 인해 러시아에 불리한 조건으로 벨그라드와 체결한  
국제 조약을 성공적으로 이행하지 못했다.  
이반 5세의 후손을 따르는 세력을 확보하고자 노력했으며 이를 위해 그는 죽기 전에  
이질녀 메클렌부르크의 안나의 아들 이반 안토노비치 (이반 6세)를 후계자로 지명했고  
이반이 장성할 때까지 그의 섭정자로서 비론을 임명했다. 

<황녀 이바노브나의 초상>은 소재의 사실적 묘사가 뛰어난 작품으로 황제의 대관식 복장을 착용하고 있다.  
하지만 통통한 얼굴에 비해 왕녀의 허리가 지나치게 가늘고 양쪽 팔의 두께가 확연히 다른 그림을 보며  
잘못 그린 것이 아닐까를 의심하게 되는데, 이는 당시 황실 초상화의 대표적 특징이다.  
2차원 화폭에 원근법 등을 고려하지 않고 소재를 평면적으로 채워 넣는 이콘화 방식과  
사실주의적 초상화 기법이 혼재되어 그려진 그림이다.  
이를 파르수나 기법이라 하고 전통적인 이콘화와 사실주의적 초상화의 중간 단계를 말한다.  
또 화려한 황실 소품을 이용해 황녀의 위엄을 자랑하는 초상화임에도 모델의 얼굴을 들여다 보면  
어딘지 모르게 우매해 보이고 둔해 보이는 느낌을 읽어 낼 수 있다.  
바로 인간의 심성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을 최고 가치로 생각한 러시아 초산화의 특징을  
너무도 잘 나타나 있는 그림이다. 

 

Portrait of Grand Duchess Natalya Alexeevna of Russia, by Ivan Nikitin, 1716. 
러시아의 그랜드 공작 부인 Natalia Alexeievna의 초상화.

 

Portrait of Empress Elizabeth Petrovna. 1743. 254 x 179.8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Room 01. 

이반 비쉬냐코 작. 황녀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초상화  
이반 비쉬냐코 (Ivan Yakovlevich Vishnyakov 1699-1761)는 로코코 스타일의 러시아 초상화 화가다. 
그는 루이 카라바크 (Louis Caravaque)와 Andrey Matveyev 밑에서 공부했다.  
그는 1739년에 화가로 자격을 받았고 Matveyev의 조기 사망 이후 Chancellory의 수장이되었다.


여름 궁전, 겨울 궁전을 포함하여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그 교외의 많은 궁전과 교회에 벽화를 그렸다.  
그는 또한 초상화와 아이콘을 만들고 그림을 복원하고 외국 예술가의 작품을 평가했다.  
그의 초상화는 황실에서 선호하는 평평하고 정적인 스타일에서 출발한 최초의 인물 중 하나이다.

 

Portrait of Empress Elizabeth Petrovna. 1743. 254 x 179.8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Room 01.

 

황녀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로마노바 (Elizaveta Petrovna Romanova)는

1741년부터 1761년까지 러시아 제국을 다스린 여제다.  
로마노프 왕조의 6번째 군주로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1세의 딸이다. 

그녀는 모스크바 근처의 콜로멘스코예에서 태어났다.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는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출생년도인 1709년보다 나중인  
1712년에야 공식으로 혼인했기 때문에, 그녀의 제위 권리는 정적들로부터 도전받을 소지가 있었다.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지적이며 발랄함과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그녀는  
황실 친위대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높았으나 3대 황제 표트르 2세와  
4대 황제 안나의 통치 기간 동안은 그녀의 정치적 역할은 미미했다.  
1740년 안나가 서거하자 안나의 언니의 딸 레오폴도브나가 자신의 아들 이반 6세의 섭정을 맡고  
옐리자베타를 수녀원으로 추방하겠다고 위협하자, 옐리자베타는 러시아에 대한 프로이센 왕국의  
내정 간섭 배제와 러시아의 친오스트리아 제국 · 반프랑스 왕국 외교 정책 폐지를 희망하는  
귀족들과 뜻을 같이하기로 마음먹었다. 

옐리자베타는 1741년 11월 25일 밤 자신의 동지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어린 황제와  
그 어머니 레오폴도브나 및 측근들을 체포하고, 26일 아침 8시에 상트페트르부르크 내 관료들과  
주요 고위 성직자들을 소집한 후 자신을 러시아의 황제로 선포하게 했다.  
이때 32세였다. 이 등극과 함께 로마노프 왕조의 남자 계보는 끊어졌다. 

그녀는 이전 황제들이 채택했던 내각회의를 폐지하고  
아버지 표트르 1세가 만들었던 원로원을 정식으로 재구성했다.  
그 밖에도 이와 유사한 조치들을 취했기 때문에 그녀의 재위 기간은  
표트르 1세의 통치 원칙과 전통으로의 복귀가 두드러진다.  
그러나 원로원의 부활은 명목적이었을 뿐, 실제로는 총신들이 다스렸으며,  
아버지 표트르 1세의 주요 개혁의 일부는 철폐됐다. 

게다가 아버지처럼 정치에 주력하기보다는 무도회나 연극 등 화려한 궁정 생활과  
교회 활동, 서유럽의 멋진 옷 등을 사들이는 데 열중했다.  
교육과 예술의 발전을 장려해 러시아 최초의 대학교인 모스크바 대학교와  
예술 아카테미를 세웠으며 엄청난 비용으로 겨울 궁전을 지었다.  
대부분의 나랏일을 고문과 총신에게 떠맡겨 궁정 내 음모가 끊이지 않아  
효율적인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재정 상태는 악화되었고  
지주들은 농민들의 희생을 대가로 폭넓은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대외 적극책을 추진하여,  
유럽의 강대국으로서 러시아의 위신을 드높이기도 했다.  
그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고 있던 알렉세이 베스투제프 류민의 지도로 러시아는

친오스트리아 · 반프로이센 외교 정책을 강력히 고수했고,  
1741년에 러시아의 제위 계승과 관련된 내분을 틈타 스웨덴이 침공했지만  
20만 명의 대군을 파견해 맞서싸워 핀란드 남부를 병합했으며,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관계를 개선했다. 


말년인 1762년에는 7년 전쟁에서 프로이센에 대항해 베를린을 침공하여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를 패배 직전으로까지 몰아붙여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동맹국인 프랑스 및 오스트리아와 함께 프로이센을 붕괴시키기 전에  
갑작스레 서거하여 제위는 그의 조카인 표트르 3세에게 돌아갔다.  
후계자 표트르 3세의 친프로이센으로의 정책 전환으로  
프로이센은 겨우 위기를 모면해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옐리자베타는 살아 생전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대신 수많은 남성 애인들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하지만,  
첫사랑의 죽음을 애도하여 평생동안 상복만 입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이질이었던 홀슈타인고트로프의 카를 울리히 (표트르 3세) 공을  
러시아로 불러서 황위계승자로 책봉했으나 사이가 나빴다.  
하지만 카를의 아내인 예카테리나 2세는 매우 예뻐하여 한번은 폐병에 걸려 치료를 받고 있던 

예카테리나를 전염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찾아가서 꼭 안아주기도 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두 사람은 자주 러시아어로 편지를 주고 받았다고 한다.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통치에 대한 평가는 이전에는 궁정을 중심으로 사치에 빠지고,  
국제 전쟁에 휘말려 농노제가 강해진 시대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확실히 문화적 발전과 국제적 지위 향상,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으며,  
러시아가 강국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국정에 관심이 없었던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문화 사업에 그 열정과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한 러시아 궁정의 서구화를 열심히 진행했고, 패션에도 관심을 가졌다.  
또한 학예 보호에도 적극적이어서 서구의 학식을 수용하기 위해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를 지원하였다.  
과학자 미하일 로모노소프의 제의를 수용하여 1755년에는 모스크바 대학을 설립했다.  
예술가의 육성에도 노력을 기울였지만, 가장 중요한 사업 분야는 건축이었다.  
궁정의 수석 건축가 라스트렐리에게 명하여 수많은 궁전을 건축하거나  
또는 크게 개축하여 웅장한 러시아 바로크 양식으로 변모시켰다.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유혹하고 있는 여러 궁전의 대부분은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통치기에 세워진 것이다.

 

2019. 08. 18. 인증샷.

 

Portrait of Elizabeth Petrovna on Horseback Accompanied by A Negro Servant. 1743. 
by Georg Christoph Grooth. Oil on canvas. 82.4 x 64.9 cm. Tretyakov Gallery Room 01. 
게오르그 크리스토프 그루트(Georg Christoph Grooth) 작 
흑인 하인이 끄는 말을 타고 가는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초상화

 

Portrait of FN Golitsyn in his childhood by Ivan Vishnyakov 
이반 비쉬냐코(Ivan Vishnyakov) 작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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