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회화 <초상화의 시대>

 

Tretyakov Gallery Room 02. 

 

 Celebration of the wedding contract, <결혼 계약의 축하> 1777년. by Mikhail Shibanov.
Oil on canvas. 200 x 144cm, Tretyakov Gallery Room 02. 

미하일 쉬바노프 (Mikhail Shibanov ?~1789)는 러시아의 화가이며,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부친도 알려지지 않았다. 
사망 시점 역시 정확하지 않으며 1789년 이후로 추정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대략 5-6점 정도가 있고, 그 중 2점은 18세기 후반에 그려진 것으로 
러시아에서 평범한 일상의 삶이 그려진 장르화 작품 분야에서는 초기 작품으로 매우 잘 알려져 있다. 
미하일 쉬바노프는 주로 농노의 평범한 일상을 그렸고, 후반에는 초상화도 몇 점 추가했다.  

미하일 쉬바노프의 1777년 작품 <결혼 축하>는 당대 농노들의 일상을 
주로 그린 것으로 알려진 그의 작품들 중에 꽤 잘 알려진 그림이다. 
그림 속의 사람들의 옷차림으로 보아 농노라고 하기에는 조금 잘 차려 입은 듯 하니, 
조금 형편이 나은 농노이거나, 일반 농민일 수도 있다. 

이 작품이 수즈달의 농민을 그린 것이라는 사실은 
이 그림 뒤에 화가 본인이 직접 써 놓은 글로 알 수 있다.  
비교적 옷차림이 농노만큼 남루하지는 않으면서도, 전형적으로 소박한 모습이다. 
헌데, 신부의 얼굴은 결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을만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남성이 아니라 다른 곳인 아래쪽 어느 한 곳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 의문을 자아낸다.  
혹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데 대한 심정이 얼굴에 나타난 것인지, 가난하기 때문에 
결혼을 하여서도 가난한 삶을 계속해야 한다는 그런 걱정들로 가득차서인지 보는 사람의 생각에 맡길 뿐이다. 

반면, 신부의 손을 잡고 있는 남성은 신부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랑인 듯 하다. 
신부의 손을 잡고 있는 남성의 옷차림과 신부의 옷차림은 결혼한다고 
특별히 옷을 새로 해 입은 듯, 딱 보기에도 매우 큰 차이가 난다. 
당대 러시아 농민들도 가난하지만 결혼을 하는 때 만큼은 생애에 한번 
가장 아름답게 치장했던 것은 지금과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사진 상으로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신부가 입고 있는 옷의 부드러운 느낌과 
세밀한 표현은 매우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그림의 이름은 결혼축하를 나타내고 있지만, 썩 좋지 않은 주위 사람들의 옷차림새, 
식탁위의 빵들로 보아 당시 농민들의 삶이 가난했음을 알 수 있다.
위 그림은 현재 러시아 국립 트레찌야코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8세기 중반 농민에게도 숭고하고 엄숙한 의식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1777년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 러시아는 농노제가 뿌리 깊이 자리잡고 있었을 때여서, 
농민의 삶은 가난하고 피폐했을 것이다. 
하지만 흑빵 한 덩이와 술 한 병이 전부인 의식일지라도 농민들 삶의 고귀함을 그림을 통해 보여준다.

시바노프의 그림을 보자. 어둑한 시골농가의 방안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 있다. 
농촌의 청춘남녀 한 쌍의 결혼을 사람들이 기뻐하며 축하해 주는 장면이다. 
그림의 초점은 단연 주인공인 여성에 맞춰져 있다. 
특별한 날을 맞아 그녀는 꽃무늬로 가득한 옷과 귀한 장신구들로 한껏 치장을 한 모습이다.

농민들의 삶이야 늘 팍팍하였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러시아 농민의 삶은 특별히 남루한 것이었다. 
18세기 중엽 러시아 인구 6,700만 명 가운데 5,000만 명이 농민이었는데, 
그 가운데 4,000만 명은 농노로서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뼈가 부서지도록 밭을 갈아 얻은 수확의 대부분을 지주에게 빼앗기고도 
주 3일 이상은 지주의 직영지에서 부역으로 노동을 해야 했다. 
국가는 그들로부터 인두세를 걷고 병역의 의무를 부과했지만 그 대가로 돌아오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은 지주의 재산이었다. 지주는 농노를 매매하거나 아무런 제한 없이 형벌을 가할 수 있었다. 
농노가 아닌 자영농민들의 경우에는 그보다 형편이 좀 나았겠지만 먹고살기가 고단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들은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자신과 똑같은 운명을 이어가야할 아이들을 낳았다. 
지옥에서도 작은 기쁨이 있다면 그것을 부여잡고 삶을 이어가는 것이 인간이 아닐까. 
그것을 어리석다고 보아야 할지 숭고하다고 보아야 할지의 판단은 각자의 몫이리라. 
최고급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도  매일 이어지면 심드렁한 습관이 되어버리듯이, 
뼈를 깎는 고난도 일상이 되면 덤덤하게 받아들여 질 수 있을지 모른다.

짐승 같은 삶을 이어간 그들에게도 행복한 순간이 있고 때로는 기념할만한 날이 있다는 걸 
18세기 러시아의 귀족들이 어떻게 알 것이며, 관심이나 있었으랴. 
러시아의 지배층이 농민을 잠시 대견하게 바라본 것은 17세기 초 소위 ‘동란시대(1606~12)’의 일이었다. 
류릭 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한 폭군 이반 뇌제 (재위 1533~84)가 죽은 후 후계를 둘러싼 투쟁으로 
정국은 내란에 휩싸였고 여기에 대기근까지 덮쳐 러시아 땅은 사람이 인육을 먹는 생지옥으로 변했다. 
러시아가 약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어김없이 쳐들어와 괴롭히던 당시의 강국 폴란드는 
때를 놓치지 않고 모스크바를 점령하였다. 
이를 물리친 것은 호의호식하던 귀족들이 아니라 
니즈니 노브고로드의 푸줏간 주인 쿠즈마 미닌이 이끄는 국민군 즉 의병들이었다.

역사책에는 외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러시아인들의 국가의식과 국민의식이 고취되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귀하신 분들이 황망 중에 농민들과 잠시 어깨동무를 하였을지 모르나, 
사태가 수습된 후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의미 있는 변화는 그로부터 200년 후에야 찾아온다. 
1812년 러시아는 유럽을 다 집어삼킨 강력한 나폴레옹 군대의 침략을 맞게 된다. 

대문호 톨스토이는 이 전란을 배경으로 쓴 걸작 <전쟁과 평화>에서 
농민 출신 병사들을 조국을 구한 주역으로 묘사하고 있다. 
러시아 인들이 '조국전쟁'이라고 부르는 이 대사건은 러시아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이 된다. 
점령군 장교로 파리에 진주하여 자유로운 근대의 대기를 접한 러시아 청년귀족들은, 
민중이 새로운 시대의 주역임을 깨닫고 입헌군주제를 외치며 최초의 혁명을 기도하는 것이다. 
그것이 1825년 12월의 ‘데카브리스트 혁명’이다.

이무렵 귀족들이 농민 또는 민중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음은,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한 동상에서도 엿볼 수 있다. 
모스크바 강 쪽에서 광장 입구로 들어서면 

이 도시의 가장 잘 알려진 랜드마크인 성 바실리 성당을 만나게 된다. 
양파모양의 화려한 큐폴라들에게 한동안 시선을 빼앗겼다가 걸음을 옮기는 관람객들은 
자칫 청동으로 만든 두 남자를 놓치고 지나가 버릴 수 있다. 
동란시대의 영웅 미닌과 포자르스키의 동상이다. 

누란의 위기에서 상인 미닌은 군자금을 모으고 수즈달의 공후 포자르스키는 
직접 국민군을 지휘하여 폴란드 군을 격퇴하였다. 
그런데 동상에 표현된 두 사람의 모습을 꼼꼼히 뜯어보면 좀 의아한 생각이 든다. 
무장인 포자르스키는 방패를 의지하고 주저앉아 좌절한 모습이고, 푸줏간 주인인 미닌이 

오히려 우뚝 서서 결의에 찬 눈으로 나무라듯 공후를 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닌은 한 손으로 포자르스키의 칼을 잡고 다른 손을 하늘로 뻗어, 
어서 힘을 내어 함께 나아가자고 독려하는 듯한 모습이다. 
귀족이 아니라 하층계급의 사람들을 국난 극복의 주역으로 동상이 묘사하고 있는 것은, 
1818년 나폴레옹 전쟁 직후였던 동상 제작 당시 러시아 사회가 
민중이란 존재에 대해 비로소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

시각이 이처럼 변할 때까지 농노나 농민들도 생활 속에서 
작은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인간이란 사실을 알아줄 사람은 그들 자신뿐이었다. 
농노출신의 화가 시바노프의 대표작 <결혼계약의 축하>에는 
신랑신부를 둘러싸고 행복한 얼굴을 한 농민들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약간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우선 신부와 주변의 여자들 몇 사람의 행색이 그렇다. 
그들은 곤궁했던 것으로 잘 알려진 러시아 농민의 신분과는 어울리지 않게 

꽤 화려한 치장을 하고 있다. 
하기는 화가가 농노출신이라고 해서 반드시 농노를 그려야하는 법은 없으므로, 
그가 그린 것은 형편이 좀 나았던 자영농민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농노들에게도 나름의 소중한 삶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화가가 사실을 좀 왜곡한 것일 수도 있다.

더 의아한 것은 밀랍인형처럼 무표정한 신부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감정을 얼굴에 담고 있으나, 
유독 그녀만은 아무런 느낌이 없는 굳은 표정을 하고 있다. 왜 그럴까. 
오늘처럼 의미 깊은 날에 그녀는 기뻐하는 것이 정상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문득 그림의 제목에 눈이 간다. 
어떤 도록에는 이 그림에 <결혼 합의(agreement)의 축하>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남자의 청혼을 여자가 승낙하는 장면인 것으로 생각했다. 

신부 곁의 치장한 여자들은 아마 매파쯤 될 것이고. 
러시아어 원문을 보다 정확히 번역한 것은 <결혼 '계약(contract)'의 축하>이다. 
상업적 의미가 먼저 떠오르는 이 단어는 

냉랭한 신부의 얼굴과 어울려 복잡한 추정을 하게 만든다. 
그녀는 혹시 팔려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신랑이 금전적 대가를 미끼로 결혼을 제안하였고 신부가 마지 못해 

그 계약에 동의하게 된 것이라면, 그렇다면 모든 것을 포기한 그녀가 

이 순간 저렇게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처럼 상상이 다소 지나치게 나래를 펴는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훨씬 후대의 작품이지만 바실리 푸키레프의 

<부당한 결혼(unequal marriage)(1862)>이란 그림이 겹쳐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 그림이 무슨 장면을 그린 것인지는 누가 보아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금전적 거래에 의한 결혼의 피해자인 어린 신부. 

그녀를 감싸고 있는 슬픔과 이를 둘러싼 사악한 표정들.

하지만 이런 과도한 상상은 러시아의 미술사가 A. I. 조토프의 글을 읽는 순간

좀 멋쩍게 주저앉고 만다. 
그는 저서 <러시아 미술사>에서 이 장면을, 신랑의 집에 도착한 신부가 
진지함과 높은 품격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당시의 혼인 풍습을 잘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는 러시아 사람이며 

미술의 권위자인 조토프의 해석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정신이 마치 딴 세상에 가있는 것처럼 

화면 속에서 혼자 겉도는 듯한 저 표정을 과연 그리 보아야 할까. 

그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스런 점이 있지만, 신부는 집을 떠나 
새로운 삶의 첫발을 딛는 상황에서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일 뿐일 수도 있다. 
그림을 감상하는 건 보는 이의 몫이고, 그림 하나를 두고 이처럼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는 동안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예술작품의 힘이 아닌가.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1750. by Ivan Argunov. Oil on canvas. 56.7 x 42.5 cm, Tretyakov Gallery Room 02.

이반 페트로비치 아르그노프 (Ivan Petrovich Argunov, 1729~1802) 작품.
이 여인은 누구일까? 제목을 보면 클레오파트라라고 되어 있다. 
한치의 코만 낮아도 세계의 역사가 바뀌었을 거라는 클레오파트라를 

러시아 화가 아르그노프는 이렇게 표현한다. 


뱀이 가슴을 물려고  하는 걸 보면 그녀가 분명하긴 한데, 
왠지 우매해 보이고 약간은 멍청해 보이기까지 한 클레오파트라다. 
과거의 역사를 판단하는 건 후손의 몫으로 
클레오파트라의 새로운 이미지에 대해 찬성할지는 각자에게 달려 있다. 
그림을 통해 읽을 수 있는 세기의 미녀 이미지가 무척이나 흥미롭다.

 

<러시아 전통 의상을 입은 여인> 1784. by Ivan Argu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02.

이반 페트로비치 아르그노프(Ivan Petrovich Argunov, 1729~1802) 작품. 
사람을 그리는 초상화는 모델의 내면과 풍기는 이미지를 
어떻게 진솔하게 표현하느냐가 그림의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 기준이다. 
그림 속 여인의 맑고 깨끗한 이미지와 순하고 단아한 느낌이 너무도 세련되게 표현되어 있다. 
또 러시아 전통 의상을 입고 있어 18세기 러시아 전통 복식 또한 
읽을 수 있으니 참으로 귀한 그림이라 할 수 있겠다.

 

Self-immolation of Hercules at the stake in the presence of his friend Philoctetes, 1782. 

by Akimov I. A. oil on canvas. 232 x 160 cm. Tretyakov Gallery Room 02.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02

 

 

Tretyakov Gallery Room 03 전시실

 

Tretyakov Gallery Room 03 전시실

 

2019. 08. 18. 인증샷

 

<표트르 3세의 초상>, 1762. by Alexei Antropov. oil on canvas. 250 x 179cm, Tretyakov Gallery Room 03.

그림 속 남자는 황홀, 대관식복, 왕관 등 화려한 소재에 둘러 싸여 
황제의 근엄을 드러내려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부족해 보인다. 
황제의 위엄은 찾아볼 수 없고 심지어 바보스럽기까지 하다. 
바로 아내인 예카테리나 2세에게 독살당하는 무능력한 황제, 표트르 3세의 초상화다. 
이 그림을 들여다 보면 구중궁궐의 피비린내 나는 암투 속에서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었겠다는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된다. 
그러면서 어떠한 과장도 없이 이렇게 황제를 솔직하게 표현한 안드로포프는 
궁정화가로서 별일 없었을까 하는 걱정마저 들게 하는 그림이다.

알렉세이 안트로포프(Alexei Petrovich Antropov 1716-1795)는 18세기를 대표하는 러시아의 화가이다. 
그는 주로 초상화를 그렸지만 이콘이나 금속공예 분야에서도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흔히 표트르 시대 화가들과 18세기 후반 화가들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가교와 같은 역할을 하였으며 
1730-40년대 러시아 회화의 침체기를 종식하고 러시아 회화의 새로운 장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1739년 페테르부르크에서 군대 목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인 가족에서 태어나서였는지 그는 일찍부터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가 15세 되었을 때 그는 미술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당대의 유명한 러시아 및 유럽 화가들에게서 사사하게 된다. 
1739년에는 이반 비쉬냐코프의 도제가 된 그는 작품 활동 초기 성화의 파르수나 장르의 
영향을 받게 되지만 비교적 빠른 기간에 이를 극복하고 서구적인 초상화 양식을 습득하게 된다.

그는 이어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등지의 성당 내부 장식에도 참여하여 
이코노스타스의 이콘을 그리기도 하였다. 
성당 복원작업을 위해 키예프에 머무는 동안 그는 18세기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드미트리 레비츠키의 멘토가 되기도 하였다. 
이후 모스크바로 건너가 골로빈 궁의 미술작업을 담당하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세속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된다. 
이후 다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그는 몇 점의 훌륭한 초상화 작품을 남기게 된다. 
1761년 경 그는 이미 초상화가로서의 명성을 굳건히 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모스크바에 초청되어 신성종무원의 수석 화가가 된다. 
1789년 개인 미술 학교를 세우면서 그는 자신의 집을 기증하기도 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초상>, <쉐레메체바 부인의 초상>, 
<루먄체바 부인의 초상>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 매우 섬세하고 장식적이었으며 옷이나 배경 등의 디테일에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또한 그는 17-18세기 유럽의 바로크 초상화의 영향을 수용하면서 
리얼리즘 기법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그의 초상화는 매우 자연스럽고 인위적이지 않은 포즈와 표정으로 편안한 느낌을 주었고 
심리주의적인 색채 또한 과도하게 부여하려 하지 않았다. 

 

Tretyakov Gallery Room 03 전시실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03

 

 

<분홍 드레스를 입은 미지의 여인>, 1770. by Fedor Rokotovoil. on canvas. 58.8 x 46.7cm, 

Tretyakov Gallery Room 04.

 

표도르 로코토프(Fedor Stepanovich Rokotov 1735~1808)
표도르 로코토프는 러시아 렘브란트라 칭송받는 러시아 계몽주의 시대 최고의 초상화가다. 
로코토프에 의해 초상화 기법이 크게 발전하였고 이콘화 형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모델의 심성을 표현하는 인간 중심적인 초상화가 자리잡아 간다. 
분홍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이마에 은은한 빛을 주고 배경이나 
윤곽을 흐릿하게 표현해 모델의 사랑스럽고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돋보이게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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