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m 8 - 15] 19세기 전반기 회화 <초기 풍속화의 시대>

 

Tretyakov Gallery Room 10-12. 알렉산더 이바노프 전시실

 

알렉산더 이바노프 (Aleksander Andreyevich Ivanov 1806~1858)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미술아카데미 교수였던 아버지 안드레이 이바노프에게 어릴 때부터 그림을 배웠다.
1830년 이탈리아에 유학한 뒤 생애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종교화 특히 성서를 주제로 하여 예수의 인간성을 표현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데카브리스트 반란이 있은 후 이바노프는 사회의 모순에 더욱 회의를 느꼈고, 
제정 하의 권력자들과 타협하려 하지 않으려 했기에 그가 평생에 가진 삶의 무게는 힘겹기만 하였다.
그의 그림 중 20년에 걸쳐 완성한 작품이 바로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림의 주제는 성경 요한복음 1장을 나타내고 있다. 

이바노프가 이탈리아에서 20년 동안(1837-1857) 정성을 들여 그린 작품이다. 
그 당시 이바노프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인류가 고뇌와 부정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인가? 
예수의 모습과 허망함과 슬픔 또 종교적 감정이 이바노프를 강하게 흔들었다. 
그리하여 '구원'이라는 모든 사람들의 꿈을 큰 그림으로 나타내고자 그는 작업을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일생의 대표작이 된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러시아에서 19세기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한 그림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이 
알렉산드르 이바노프의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작품은 러시아 회화사에서 수도 없이 거론되는 최고의 갈작 가운데 하나일 뿐 아니라, 
19세기 러시아 회화 특유의 '인자로서의 예수상'의 선구적인 모범이 되는 작품이다. 
이 대작 앞에 서면 누구든 예수와 역사의 현장에서 만나는 듯한 생생한 경험을 하게 된다.

1858년 이바노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얻지 못한다. 
6주 후 결국 52세의 나이로 이바노프는 죽음을 맞이한다. 
당시 장례식에 많은 예술인과 문화인이 참석했는데, 그 중 이동파 화가 크람스코이도 있었다 한다. 
이바노프의 대작은 페테르부르크에서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모스크바에서 일반 경매로 붙여진다. 
그 당시 트레티야코프는 러시아 미술의 훌륭한 작품을 모아서 미술관을 설립하려는 꿈이 있었다. 
그리하여 트레티야코프가 이바노프의 대작을 구입한다. 

 

Appearance of Christ to the People,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1837~1857, 

by Aleksander Ivanov. oil on canvas. 540 x 750 cm. Tretyakov Gallery Room 10

넓은 요르단 강변, 세례 요한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구세주가 있다.
지금 사람들에게는 아직 보이지 않으나, 멀리서 다가오는 쪽을 가리키고 있다. 
모든 사람들의 눈은 요한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 있다. 
터번을 두른 남자는 증오에 가득 찬 눈매로 요한의 말을 듣고 있다. 
이 남자는 바로 요한의 비난을 증오하여 그의 투옥과 처형을 요구했던 바리새인이다. 

이 작품에서 이바노프는 학대받는 민중의 꿈, 그리고 땅의 자유와 정의를 구하는 마음, 
수세기에 걸쳐 길러진 민중의 가부장적인 환상, 여러 가지 소박한 소망과 신앙을 이야기한다. 
미래의 자유를 믿으나 현재의 억압과 악의 세계를 타도하지 못하고
전설의 구세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민중의 비극이 그려져 있다.

1825년 12월 러시아에는 최초의 근대적 혁명 운동인 데카브리스트 난이 일어난다. 
그 일로 주동자 다섯 명이 처형당하고 1,000여 명이 넘는 젊은 지식인들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은 많은 지식인들을 분노하게 하고 혁명과 개혁의 불씨를 심는 계기가 되었다. 
작가 이바노프는 또한 그런 염원을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에 빗대어 표현한다. 
그림의 장면은 요르단 강변이며 십자가를 들고 있는 세례 요한의 
손 끝에 서 있는 푸른 색 가운은 예수 그리스도다. 
현실을 반영하듯 예수의 도래를 기뻐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구분되어 표현되어 있다.

러시아 화가 이바노프의 대표작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을 가리키며 성령으로 세례해 주실 분임을 알리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
가난한 이들과 녹색 얼굴의 노예는 반색하며 돌아보고 있고
오른쪽의 흰 터번을 두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탐탁하지 않은 표정으로 수군거리고 있다. 
사람들에게 다가오고 계시는 예수님을 감싼 주위의 공기는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 
수많은 습작을 남기며 20년 만에 완성된 그림이다​.

위대한 예술 작품은 흔히 한 사회의 역사와 개인사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탄생되곤 한다. 
이탈리아 유학은 이바노프 본인의 희망에 따른 것이었지만, 
그곳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오랫동안 머물러야 했던 것은 세상 탓이었다. 
그로 인한 화가의 기나긴 고뇌가 대작 <민중에게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탈리아가 어떤 곳인가.
축복 받은 자연 속에서 시끌벅적하면서도 다감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 
이바노프는 춥고 야박한 조국 같은 건 잊고 그냥 그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행복할 수 없었을까. 
화가 이바노프는 그럴 수가 없었나 보다.

그는 격동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러시아 사람들을 마음에서 털어내 버리지 못하였다. 
근심은 날로 깊어 갔다.
혁명에 몸을 던진 당시 유럽과 러시아의 인텔리겐차들과는 달리, 이바노프는 머지않아
사람의 손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갖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스무 해에 걸쳐 그처럼 구세주의 출현에 집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긴 세월에 걸친 이바노프의 고뇌를 알기 전에는 
그림 속 멀리서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그리스도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림에서처럼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희망으로 이바노프가 정성을 다해 화폭에 담은 구세주의 고고한 모습이 어쩐지
시큰둥해 보이면서, 오히려 그를 바라보는 군중들의 각양각색 표정에 더 눈이 간다.

신심이 얕은 자에게 이바노프의 그리스도는 무표정하고,
정말 우리의 짐을 다 내려주실까 싶을 정도로 담담한 모습이다. 
세상사에 짓눌리며 그를 고대하는 우리에게 그건 좀 서운하다. 
그런 점에서 더 울림이 있는 것은 이지적 화가 니콜라이 게 (1831~94)의 그리스도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그리스도가 재림하더라도 이미 2천 년 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문제 덩어리가 되어버린 이 세상을 구하실 수 있을까. 
정말 이 뜨거워진 지구를 식히고, 저 독한 신자유주의 바이러스를 박멸하실 수가 있을까. 

<민중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초점은 아무래도 그리스도보다 그를 영접하는 인간 군상들에게 있다. 
이바노프는 “나는 이 그림에서 타락한 지배자들이 민중을 억압하는 모습,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로마에 아부하는 천박한 유대 왕들의 행태,
그리고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슬픔을 그려 보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화가는 화면에 배치된 인물 하나하나에 저마다의 역할을 부여하기 위해 

수많은 에튀드(습작)들을 거쳤다. 
습작의 수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다. 
심지어 전시실에 비치된 한 장짜리 해설문만 해도 

영어판에는 800개, 노어판에는 300개로 나와 있다. 

그림의 주인공은 세례 요한이다. 
듣던 대로 낙타털옷을 입은 그는,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예언한 사람답게
가장 먼저 그를 발견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친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이 유명한 장면은 신약성서의 4복음서 모두에 언급되어 있으나, 화면과 가장 어울리는 상황으로 

현장감 있게 묘사하고 있는 것은 요한복음이다. (요한 1:29~34) 
그것은 아마도 복음서를 기술한 자들 가운데 현장에서
이를 직접 목격한 사람은 사도 요한뿐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림에서 빨간 머리의 수려한 청년 사도 요한은
연두색 옷을 걸치고 세례 요한의 등 뒤에 바싹 붙어 있다. 
그리고 그 왼쪽으로는 사도 베드로와 안드레이 형제, 그리고 나다나엘이 차례로 서 있다.
화가가 이들의 모습을 그린 에튀드(습작)는 여러 편 남아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세례 요한과 나다나엘에 대한 그림들이 눈길을 끈다.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이바노프의 에튀드에는
주로 하나의 캔버스에 둘 또는 그 이상의 얼굴이 담겨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그가 열심히 거리를 돌아다니며 찾아낸 사람의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이 화폭에 담을 모습으로 변환한 것이다. 
가끔은 라파엘로의 그림이나 고대 로마의 입상 등
이탈리아에서 만난 고전 작품들에서 인물의 원형을 찾기도 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의 경우는 좀 다르다. 
그를 위한 에튀드에는 여자 또는 소년의 모습이 요한의 얼굴과 함께 그려져 있다. 
이는 어쩌면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독사의 자식들아”라며
일갈하는 터프가이 요한의 내면에 그런 모습이 있다는 말일까. 
언뜻 짐작이 되지 않는 그에 대한 설명은 숙제로 남겨 두자. 

그림은 전경의 무리와 원경의 그리스도로 크게 대별된다. 
전경의 무리 가운데 중앙에서 약간 왼편으로 있는 십자가 지팡이를 든 인물이 세례 요한이다. 
요한을 중심으로 군중 속에는 세례 받는 이,  바리새인,
노예, 로마 병정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보인다. 
이 사람들을 향해 멀리 언덕에서 한 사내가 조용히 걸어온다.

눈앞의 그는 하나의 육신에 불과하지만 민중에게 해방과 구원을 약속하는 권능자다. 
성경은 이 장면에서 요한이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화가는 이 그림을 그리며 요한의 그 외침이
당대 러시아 민중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바노프와 그의 아버지는 데카브리스트 그룹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러시아 최초의 근대적 혁명을 꾀한 데카브리스트들은 1825년 12월 반란으로 
다섯 명이 교수형을 당하고 100여 명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이들의 비극적인 말로에 이바노프는 가슴 아파했다. 
더 이상 믿을 것이 없는 세상, 억압과 타락과 부패로 가득한 세상,
인자가 오셔야 할 곳은 다름 아닌 바로 이런 세상이다. 
그 모순의 땅으로 이바노프는 예수 그리스도를 초대한 것이다.

성경에서 세례 요한은 유대의 분봉왕 헤롯의 잘못에 대해 담대하게 비판했다. 
그는 진리의 전파자요, 양심의 목소리였다. 
그림 속 요한은 성경의 묘사 못지않게 올곧고 강직한 위인으로 그려져 있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헤롯왕은 두려워 했다.
요한 자신이 선과 양심인 이상, 욕망의 화신인 압제자는 그와 원수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바노프의 그림에서 그 갈등은 화면 오른쪽,
터번을 두른 두 남자의 못마땅해 하는 표정으로 나타난다. 
부조리와 모순이 가져다주는 이득에 눈이 먼 기득권자들이다. 
그 대립을 통해 이바노프는 당시 러시아에 내재한 모순과 갈등을 들춘다.
이렇듯 성경 속 상황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현실의 상황으로 이해의 지평을 넓혔기에 
이 그림은 예술과 역사의 영역을 모두 아우르는 기념비적인 걸작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림 중앙의 오른쪽에 그려진 푸른 옷의 노예가 요한이 전하는 
구원과 해방의 메시지를 듣고 감격해 하는 모습은 곧 
러시아 민중의 기대와 소망을 절절히 반영하는 이미지라 하겠다.
쪼그려 앉은 그는 이제 막 일어날 태세고,
눈물과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얼굴은 마침내 밝게 펴지려 한다. 

세례를 받으려고 옷을 벗은 채 감격과 기대가 뒤섞인 복잡한 표정을 짓는 오른쪽의 인물도 
예수가 가져다주는 희망의 밝기를 생생히 증거하고 있다. 
압제 하의 러시아는 이처럼 진정한 구세주를 세상 그 누구보다 간절히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이 작품은 주제에 담긴 사회의식이나 역사의식 측면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지만, 
미술사적인 측면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가치가 있다. 
이바노프는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무려 600점이 넘는 드로잉과 유화 스케치를 제작했다.
모델들을 동원해 등장 인물의 포즈와 표정에 대해 다각도로 연구하는 한편, 
라파엘로의 <그리스도의 변용>과 고대 조각인 <벨베데레의 아폴로>와
<자살하는 갈리아인과 그의 아내> 등 고전 걸작들을 탐구해 구도와 연출을 위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또 배경 표현을 위해 이탈리아의 풍경을 꼼꼼히 관찰하고 묘사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때까지 러시아 미술사에서 시간과 에너지 투자 면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운 엄청난 역작이요 대작인 것이다.
이 모든 결과물 가운데 일부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과 러시아 미술관에 나뉘어 전시되고 있는데, 
<벌거벗은 아이> 등 소년 누드 시리즈와 <가지> 등 풍경화 시리즈가 그 대표적인 스케치들이다.

이들 그림에서 우리는 햇빛과 미묘한 대기의 흐름 등, 아직 프랑스 인상파가 대두되기 전인데도 
야외 공간에 대한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관찰과 표현을 볼 수 있다. 
이바노프가 감각적으로도 시대를 앞서가는 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우측 뒤편, 불신자들의 군상 (detail)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뒤편 우측 (detail)

 

화면 오른쪽 위는 반대자들의 영역이다. 
값비싼 옷에 신수가 좋은 바리새인들이나 말을 타고 지나가던 

로마 병정들은 모두 그리 탐탁찮은 표정이다.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요한의 말에 그들은 시큰둥해 하거나 찡그리거나 노여워하고 있다. 
그 사람들도 고민이 없으랴만, 그럭저럭 살만하면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싫은 법이다. 
찌질한 것들이 모여 자신들을 욕하고 세상을 바꾸겠다고 설친다니 구경삼아 요르단 강가로 

나와 보았는데, 예언자들이 말한 그리스도가 나타났다니 갈수록 태산인 것이다. 

1850년대 말이 되자 러시아의 정세는 상당히 유화적 국면으로 바뀌게 된다. 
'유럽의 헌병'이란 별명으로 불리며 러시아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의 자유주의 운동에 

간섭하고 군대를 보내어 진압했던 폭압적 통치자 니콜라이 1세 (재위 1825~55). 
그의 권좌를 물려받은 알렉산드르 2세(재위 1855~81)는 부왕과 달리 

기본적으로 선량하고 심약한 사람이었다. 
시대의 흐름을 읽은 그는 검열을 완화하고 시베리아에 유배 중이던 데카브리스트들을 

사면하였으며, 러시아의 고질적 숙제이던 농노 해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차르를 비롯한 주류 지배층에 미운 털이 박혀 삽십 년 가까이
이탈리아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던 이바노프는 마침내 귀국을 결심한다. 
그는 그간 떠나 있던 조국의 현실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함께, 

민주화의 기운 속에서 러시아 화단에 자신이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1858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이바노프는 스무해 동안 매달린 필생의 대작을 소중하게 보듬고 돌아왔지만,
러시아는 그의 그림을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진보적 지식인들은 그를 환대하였지만, 기대했던 차르는 그의 그림을 

선뜻 구입하려 하지 않았으며 악의적인 비평도 그를 괴롭혔던 것이다. 
이바노프는 결국 귀국한 지 두 달이 채 못 되어 화병으로 급서한다.

그의 걸작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그 후 행방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설이 있다. 
미술사가 A.I. 조토프에 의하면, 이를 구입하려는 사람이 없어 그림 경매가 아닌 일반 경매에 붙여졌고, 
그것을 당시 아직 청년이던 사업가 파벨 미하일로비치 트레차코프가 사들여 소장함으로써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트레차코프 갤러리에서 직접 발간한 가이드북에 의하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그림은 차르 알렉산드르 2세에 의해 구입되었고, 설립된 지 얼마 안 되는 
Moscow Public and Rumyantsev Museum에서 1862년부터 전시되었다.
그리고 1925년 그 박물관이 문을 닫자 이바노프의 작품 모두가 트레차코프 갤러리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양쪽 다 나름대로 권위를 가진 기술들이므로 어느 쪽이 맞는지 섣불리 예단하기 어렵지만, 
미술사를 전공할 생각이 아니라면 그리 집착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세례 요한과 사도들. (detail)

세례 요한의 뒤로는 사도 요한, 베드로와 안드레이 형제, 그리고 회의주의자 나다나엘이다. 
나다나엘의 우울한 표정에 시선이 간다.

 

The Appearance of Christ to the People (detail)
이 에튀드에서는 맨 왼쪽 노인의 옷과 그림자의 색깔이 붉은 색으로 일치한다. 
그렇다면 완성작에서의 불일치는 실수가 아닐까?

 

<민중에게 나타난 그리스도>를 위한 습작(에튀드)들. 그 수가 800점에 이른다.

화가 이바노프(1806~58)가 만약 19세기 러시아의 격동 속에서도 
편안한 주류의 삶을 살고자 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이미 뛰어난 회화적 재능을 드러내어 주목을 받았으며, 
그의 아버지는 미술아카데미의 교수로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처세에 신경을 썼다면 러시아 화단에서 성골 행세를 하며 
한세상 호사를 누리다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더라면 러시아 회화사에서 기념비적 작품으로 꼽히는 
저 <민중에게 나타난 그리스도>는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트레차코프 갤러리의 브률로프 방 다음 쯤에 걸려 있을 
그의 그저 그런 그림들을 범상하게 훑고 지나쳐 가버릴 것이다.

이바노프의 잘못은 혁명을 꿈꾸던 불온한 데카브리스트들과 교류하였다는 것이다. 
차르와 그의 수하들에게 당연히 미운 털이 박힌 이바노프는 어려운 지경에 빠졌다가 
스물네살이 되던 1830년 가까스로 이탈리아 유학길에 오른다. 
러시아에 남아 있던 이바노프의 아버지는 핍박을 받다가 아카데미 교수직에서 쫓겨난다. 
혁명으로 달려가며 정세가 악화되던 러시아에서 떠나있을 수 있었던 건 그에게 행운이었을까. 


그러나 이바노프는 그후 30년 가까이 조국의 땅을 밟지 못하다가, 
1858년 귀국 후 불과 6주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런 점에서 그는 불운아였다. 
모든 것이 불안한 시대에 불온한 생각을 품은 탓이었다. 
하지만 이런 그의 이탈리아 ‘유배’ 생활이 없었다면 필생의 대작 
<민중에게 나타난 그리스도>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이 그림 하나를 그리는 데 20년이 걸렸다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바노프가 <민중...> 그리기에 착수한 것이 31세 되던 1837년이었고, 
이를 완성한 것은 귀국해서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857년이었다. 
그러므로 이바노프란 사람은 이 그림 하나를 그리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간 것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그가 필생의 화두로 붙잡고 그려낸 이 그림은 
러시아 미술사에서 늘 상당한 비중으로 다루어진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도록에서 보았을 때 처음부터 눈길을 끈 그림은 아니었다. 
레핀처럼 주제가 강렬하지도 않고 색채와 붓의 터치가 그리 섬세하지도 않는 이 그림이 
왜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어지는지 좀 의아하다. 


그러나 조국을 떠나 있으며 그가 이십년 동안 매달린 이 그림 속에서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그리스도가 얼마나 절박한 의미를 갖는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을 때, 
그림은 가슴 속으로 성큼 들어오는 듯하다. 
그리고 마침내 트레차코프 갤러리의 현장에서, 사람을 압도하는 규모의 실물과 
그 양쪽으로 마치 호위하듯 늘어선 수많은 에튀드들을 대하자 모든 의문이 풀려버린다.
 <민중...>은 과연 그런 대접을 받을만한 걸작이다.

 

알렉산더 이바노프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모본과 습작들

현재 보고 있는 사진들은 러시아 박물관에 있는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모본과 습작들이다.
이바노프가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습작 작품만 해도 600여 점이나 된다고 한다.
한 작품을 20년 동안 그린 러시아의 화가 이바노프. 그의 미술 재료는 자기 자신의 고뇌였다. 
어떻게 이러한 열정으로 20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그린 걸까?

 

알렉산더 이바노프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모본과 습작들 

 

알렉산더 이바노프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모본과 습작들 

 

Kopf eines Sklaven in zwei Varianten, 눈물이 그렁그렁한 노예의 에튀드. 

그리스도의 출현을 가장 크게 기뻐하는 사람들은 화면의 중앙 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벗은 몸으로 등을 보이고 있는 몸짱 사나이의 왼팔에 얼굴이 반쯤 가려 있는 노인이 그 중 하나이다. 
쇠약한 몸을 아들에게 의지해 요르단 강가에 나왔던 노인은 기력을 놓고 있다가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소식에 황급히 일어서려 한다.

가장 큰 기쁨은 그 앞에 쭈그리고 앉은 노예의 푸른 얼굴에서 찾을 수 있다. 
짐승처럼 목덜미가 줄에 묶여 있는 그는 아마도 주인님의 옷을 챙기려던 참인가 보다.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말에 손을 멈추고 돌아보는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다. 
세상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목줄 밖에 없을 노예가 구세주의 출현에 감격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바노프는 잃을 것이라고는 역시 쇠사슬밖에 없는 조국 러시아의 민중들을
노예의 모습에 투영한 것이 아닐까. 
미술사가 A.I. 조토프에 의하면, 러시아 회화에서 학대받는 이의 모습을
이처럼 감동적이고 박진감 있게 묘사한 것은 이 그림이 처음이다.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노인과 소년. 습작

세례를 받다가 요르단 강에서 황급히 걸어나오는 노인과 소년.
노인의 흰옷은 강물에 붉은 색으로 비춰져 있다. 
왜 일까? 에튀드들 가운데에는 노인의 옷이 붉은 색으로 그려져 있는 경우가 있다.
하도 많은 습작들을 그리다보니 화가가 잠시 착각한, '옥의 티'는 아닐까?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우측 벌거숭이 사내의 에튀드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일어서려는 노인의 에튀드

가끔은 이처럼 고대 로마의 조각상을 인물의 원형으로 삼고 있다. 
조각상의 모습은 완성작에서 노인보다도 아래쪽 노예의 얼굴과 더 닮은 것 같다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초점은 아무래도 그리스도보다 그를 영접하는 인간 군상들에게 있다. 


이바노프는 “나는 이 그림에서 타락한 지배자들이 민중을 억압하는 모습,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로마에 아부하는 천박한 유대 왕들의 행태, 
그리고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슬픔을 그려보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화가는 화면에 배치된 인물 하나하나에 저마다의 역할을 부여하기 위해 수많은 에튀드(습작)들을 거쳤다.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사도 베드로의 습작

그리스도의 등장에 대해 군중 속의 사람들은 대개 놀라며 기뻐하거나 불신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본다. 
하지만 사도들 가운데 제일 왼편에 하늘색 옷을 입고 서 있는 나다나엘의 모습은 좀 특이하다. 
그는 유독 이도저도 아닌 우울한 얼굴로 눈을 내리 깔고 있다. 
이바노프는 그의 얼굴로, 친구이자 19세기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인 고골리의 모습을 빌려 온다.

 

<민중 앞에 나타난 에수 그리스도>에서 고골리의 모습으로 나다나엘을 그린 습작.

나다나엘은 흔히 '회의주의자(doubter)'로 불리는 사람이다. 
성서에 의하면 그는 친구 빌립이 율법에 기록된 메시아 나사렛 예수를 만났다고 말하자, 
당시 천한 곳으로 멸시 받던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날 수 없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고 그가 자신을 알아보자 비로소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며 제자가 된다.
 
그렇다면 이바노프는 왜 나다나엘의 얼굴을 고골리의 모습으로 그렸을까. 
니콜라이 고골리(1809~52)는 추악한 현실 세계에 대한 증오와 삶의 패배자들에 대한 동정으로 
<검찰관(1836)>, <외투(1842)> 등의 걸작을 남긴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선구자이다.
관료 사회의 악을 다룬 <검찰관>을 발표한 후 어려움을 겪다가 서유럽으로 건너온 그는 
10여 년 간 로마 등지에 머물렀으며, 이때 이바노프와 교류하였다. 
그러나 고골리는 악을 파헤치는 데만 집착해 온 자신의 작업에 대해 회의를 품으며 
종교적 신비주의에 빠져 들었고, 끝내 정신착란으로 사망한다.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일 리 없다고 의심했던 나다나엘과 인간의 구원을 믿지 못해 
세상의 악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데 몰두하며 고뇌에 빠져 있던 고골리. 
그들은 그림에서 다가오는 그리스도를 보면서도 기뻐하지 못하고 우울한 얼굴로 혼란에 빠져 있다.
요한으로부터 갓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이와 대조적으로 파안하며 기뻐하고 있다. 
화면 좌측 끝 요르단 강에서 막 올라오고 있는 벌거숭이 노인과 소년, 
그리고 우측 끝 세례를 마치고 막 옷을 입으려던 아버지와 아들은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말을 듣고 차오르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 
행색으로 보아 그들은 유대사회에서 큰소리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가진 것이 없어 그만큼 삶이 고단한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구원자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세주가 오셨다는 세례 요한의 한 마디에 의심하지 않고 환호한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현세에서의 기적과 세속적 행복이었다. 
화면 오른쪽 뒤에 자리 잡은 바리새인 식자들과 달리 그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가 그리스도임을 믿는다.

예수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당장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오늘 기뻐하던 저 얼굴들은 그를 골고다 언덕에 못 박아 세우고 돌을 던진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몽매함에 대해 자신 있게 손가락질할 수 있는가. 
누가 내 살림살이를 나아지게 해 주리라는 기대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를 미혹시키는 힘이 있다. 
내 호주머니를 불려주기만 한다면 그가 과연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믿을만한 위인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너져버리는 것은 오늘의 현실에서도 다를 바 없겠다. 
삶이 고단하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일까.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습작. '세례 후'

이바노프는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이탈리아의 자연을 배경으로 많은 습작을 남겼다. 
이탈리아와 또 그밖의 화가들이 수백년에 걸쳐 그려 왔던 이탈리아의 풍경을 매우 놀라운 신선함으로 그렸다. 
<아리치 공원에서>, <기지 공원의 수목>, <나뭇가지>, <거리의 지붕>, <물속의 돌> 많은 자연의 습작이 있다. 
이바노프는 풍경화가로서 강변의 생활, 따스한 태양, 돌과 풀, 등 자연을 그리는 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여기에서는 노인의 옷이 붉은색으로, 물에 비친 그림자도 붉은색으로 되어 있다.

 

Head of John the Baptist, 세례 요한 습작. 1840s,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Head of John the Baptist, 세레 요한의 습작.

 

Head of John the Baptist, 세레 요한의 습작. 1840s,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Head of John the Baptist​. 1845. 세례 요한 습작.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Head of John the Evangelist. 사도 요한 습작.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A Head of a Young Man. 습작. 1845.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Head of a man. Study of the figure of paralytic for the painting

 

Sketch of a Man​. 1845.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e Appearance of Christ to Mary Magdalene​. 1835. by Aleksander Iv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부활 후 막달아 마리아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이 작품은 이바노프가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제작하기 전에 그린 것으로,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미술을 열심히 연구하던 시절, 

르네상스 미술에 대한 화가의 짙은 애정이 잘 나타난 그림이다. 
이 작품의 예수는 비애미를 지닌 인간이라기보다 로맨틱한 감상을 느끼게 하는 인간에 더 가깝다.

 

Head of Mary Magdalene (study), 1834. by Alexander Iv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막달라 마리아 주제는 중세 때부터 애호되었지만, 

서양미술사에서 집중 조명된 시기는 종교개혁이 일어날 무렵이다.  
프로테스탄트의 영항으로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전통 전반이 

크게 위협받자 고해성사를 비롯한 전통을 지키기 위해 
고해자의 전형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형상화한 그림이 많이 제작된 것이다.

이때 마리아 이미지는 머리를 길게 풀어헤치고 깊은 수심에 잠긴 모습이 대부분이다. 
풀어헤친 머리에서 보듯 이바노프의 막달라 마리아도 그런 가톨릭 전통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좀더 깔끔하고 산뜻한 용모 때문에 세속적인 미인의 인상을 더 짙게 던진다. 
그 옆의 예수 그리스도도 군더더기 없는 '몸짱'에 상당히 수려한 인상이다.

얼핏 보면 이런 세속적인 아름다움이 두 사람을 마치 한 쌍의 연인처럼 느끼게 한다. 
한 사람은 사랑을 고백하고 다른 한 사람은 짐짓 이를 뿌리치는 듯한. 
주제로 보자면 이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예수가 그녀를 진정시키려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예수는 마리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를 붙들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주제가 지닌 이와 같은 성스러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이바노프의 그림은 보면 볼수록 감상적인 낭만주의의 향기를 발산한다.

어두운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연극의 클라이맥스 같은 장면, 선남선녀의 지극히 감상적인 몸짓...
마리아의 풀어헤친 머리는 전통적인 참회와 자기부정의 표시라기 보다는, 

다른 이들 앞에서는 머리를 단정히 가다듬고 있어도 
남편 앞에서는 머리를 풀어헤치는 여염집 여인의 사적인 친밀감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미묘한 뉘앙스가 이 그림을 향한 시선의 집중도를 높이고 

주제를 살뜰한 감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막달라 마리아의 해후 뿐 아니라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의 해후에 대한 연상을 불러온다. 
사실 그리스도가 신랑이요 교회가 신부라는 성경의 비유도 

이런 종류의 낭만주의적 감상에 적잖이 기대고 있다.

춘향에게 이몽룡이 그런 것처럼, 구세주는 단순히 불의를 벌하는 

어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스런 내 낭군이기도 한 것이다. 
이바노프의 붓질은 그 인간적인 기대를 그리스도와 

막달라 마리아의 인상적인 이미지 안에 섬세하게 녹여 놓았다.
종교적인 주제가 지닌 신성함과 세속적인 이미지가 주는 

감상주의 미학이 아름답게 결합된 작품이라고나 할까. 
왠지 "아름다음이 세상을 구원하리라."고 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언급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The Appearance of Christ to the People, 1857. by Aleksander Iv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세례를 받다가 요르단 강에서 황급히 걸어나오는 노인과 소년. 습작
노인의 흰옷은 강물에 붉은 색으로 비춰져 있다. 
왜 일까? 에튀드들 가운데에는 노인의 옷이 붉은 색으로 그려져 있는 경우가 있다. 
하도 많은 습작들을 그리다보니 화가가 잠시 착각한, '옥의 티'는 아닐까? 

이바노프는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이탈리아의 자연을 배경으로 많은 습작을 남겼다. 
이탈리아와 또 그밖의 화가들이 수 백년에 걸쳐 그려 왔던 

이탈리아의 풍경을 매우 놀라운 신선함으로 그렸다. 
<아리치 공원에서>, <기지 공원의 수목>, <나뭇가지>, 

<거리의 지붕>, <물속의 돌> 많은 자연의 습작이 있다. 
이바노프는 풍경화가로서 강변의 생활, 따스한 태양, 

돌과 풀, 등 자연을 그리는 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Seven Boys in Colourful Clothes. 1845. by Aleksander Ivanov.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Room 10

 

On the Shore of the Bay of Naples 1850. by Aleksander Ivanov. 
Oil on canvas. 41.4x60.6 cm. Tretyakov Gallery Room 10

 

Priam asking Achilles for Hector's body, 1824, by Aleksander Iv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Apollo, Hyacinthus and Cyparis singing and playing. 1834. ​by Aleksander Iv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Portrait of Vittoria Marini, oil on canvas. 1850. by Aleksander Iv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A girl from Albano standing in the doorway, by Aleksander Iv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Traveller. by Aleksander Iv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Water and stones under Palaccuolo, by Aleksander Ivanov.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Room 10

 

Olive trees, 1825, by Aleksander Iv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Olive trees by the cemetery in Albano. New Moon. 1824, 
by Aleksander Iv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A Tree Branch, 1850. by Aleksander Ivanov.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Room 10

 

 Landscape in Albano, by Aleksander Ivanov.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Room 10

 

 Via Appia at Sunset, 1845. by Aleksander Ivanov.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Room 10

 

The Bay of Naples Near Castellmare, 1848. by Aleksander Ivanov.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Room 10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10-12 알렉산더 이바노프 작품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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