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티야코프 미술관

 

크레믈린의 남쪽 모스크바강 건너편에 있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의 기원은 
러시아의 상인이자 기업가인 파벨 트레티야코프(1832∼1898)가 
1854년 미술품을 처음 구입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860년대 후반 그는 문학과 예술 등 문화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낸 인물들의 초상화를 조직적으로 수집하였다. 
1870년 미술관을 설립하고, 화가들로 하여금 러시아 사람들의 일상생활, 
러시아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그린 사실주의 풍의 그림을 전시토록 하고 그 그림들을 구입하였다.

1874년경 그는 이미 동시대 러시아 미술의 수집가로 권위를 인정받게 된다. 
1881년부터 그의 미술관은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1885년까지 대략 3만 명의 관객이 미술관을 방문하기에 이른다. 
1890년대에 그는 이콘의 수집을 시작했고, 조각품의 수집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그림들은 모두 인민에게 속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1892년 8월 
동생인 세르게이가 수집한 서유럽의 미술품과 함께 자신의 미술관을 모스크바 시에 기증한다.

1893년 8월 15일 ‘파벨과 세르게이 트레티야코프 시립미술관’이 문을 열었고, 
매년 15만 명이 찾는 모스크바의 명소가 되었다. 
현재의 공식 명칭은 ‘국립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이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의 소장품은 고대 러시아 성화에서부터 현대 미술까지 다양하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러시아 미술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러시아 미술품의 보고다. 
이바노프, 수리코프, 레핀, 세로프 등 18세기에서 20세기초의 화가들, 
칸딘스키, 샤갈 등 현대 작가들, 옛날 러시아 미술을 대표하는 
안드레이 류블로프 등 이콘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이들 작품은 두 건물에 분산 전시되고 있는데, 제1관(라브루쉰스키 거리 10번지)은 
11세기부터 20세기초까지의 러시아 미술품으로, 제2관(크림스키 발 10번지)은 
20세기 초 아방가르드로부터 1990년대 포스트 모던에 이르기까지 현대 미술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관에 있는 작품들 중에는 루블료프의 ‘삼위일체’, 레핀의 ‘이반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 
이바노프의 ‘그리스도의 출현’, 수리코프의 ‘보야리니아 모로초바’ 등이 특히 유명하다. 
그리고 제2관에 있는 작품 중에는 구상성을 지켜나간 샤갈의 ‘도시 위’와 
추상성을 추구한 칸딘스키의 ‘즉흥적으로 생각해 낸 차가운 형태들’, 
입체파를 모방한 올가 로자노바의 ‘메트로놈’ 등이 유명하다.

 

우선 2층으로 올라가 1번 방으로부터 34번 방까지 관람한 다음 
1층으로 내려가 35번 방부터 62번 방까지 보면 된다. 
그리고 각 방의 번호들도 시대 순으로 나누어졌기 때문에 방 번호를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18세기부터 20세기초까지의 러시아 미술 즉, 그림과 조각들을 개관하게 된다.

하지만 마지막 56번부터 62번까지의 방은 고대 러시아 미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는 러시아가 몽골의 지배를 받기 전 11세기부터 18세기까지의 종교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종교화라면 이콘화를 말한다.

1번에서 7번까지 방에서 우리는 슈빈(1740∼1805)을 비롯한 18세기 러시아 미술가들을 만난다. 
슈빈은 특히 조각으로 유명한데 ‘알렉산드르 골리스틴 왕자’(1773)가 대표작이다. 
알렉세예프(1753∼1824)의 ‘피터폴 요새에서 바라본 제방 위의 궁전’(1794)은 
에르미타쥐 궁전의 200년 전 모습을 보여준다. 
보로비콥스키(1757∼1825)의 ‘마리아 로푸키나의 초상’(1797)은 당시의 대표적인 초상화로 
얼굴과 머리 그리고, 의상에서 전형적인 러시아 여인의 모습이다.

8에서 15번까지 방에는 19세기 전반의 러시아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 전시된 작품들 중에는 9번 방의 이바노프(1806∼58)와 
13번 방의 트로피닌(1776∼1857) 것이 가장 인상적이다. 
이바노프의 ‘민중들에게 나타나는 그리스도(일명 메시아의 출현 1837∼57)’는 
그의 평생의 역작으로 크기가 무려 540×750㎝이다. 
그림이 아주 사실적이며, 민중들의 표정이 하나하나 아주 세밀하고 정확하게 그려져 있다. 
트로피닌의 그림 ‘레이스 만드는 여자’(1823)에 나오는 인물의 표정이 아주 밝고 건강하다.

16에서 31번까지 방에는 19세기 후반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 시기에 러시아 미술이 가장 번성했으며 대표 작가로는 수리코프와 레핀이 있다. 
이들 외에도 ‘도스토예프스키 초상화’(1872)를 그린 페로프(1834∼82), 
‘황금빛 가을’(1895)를 그린 레비탄(1860∼1900) 등이 유명하다.

바실리 수리코프(1848∼1916)는 이 시대의 대가답게 
역사적인 순간들을 극적으로 표현하여 높은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베로네제, 티치아노, 틴토레토 등의 그림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그들의 색체 기법을 받아들였다.
1887년에 그린 ‘보야리니아 모로초바’가 대표작인데 크기가 304×587.5㎝에 이른다. 
보야리니아는 오랫동안 믿어 왔던 자신의 신앙을 고집했다는 이유로 
황제군에 의해 체포되어 호송된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 일부는 이를 아쉬워하고 다른 일부는 이를 즐거워한다. 
역시 사실적인 표현이 아주 두드러진다.

일리야 레핀(1844∼1930) 역시 러시아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이다. 
이곳 트레차코프 미술관에 있는 그의 작품만 해도 150점이 넘는다. 
그의 대표작은 ‘쿠르스크 지역의 종교 행렬’(1881∼83)과 
앞에 언급한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 1581년 11월16일’(1885)이다. 
이들 중 전자는 종교적이고 후자는 아주 극적이다. 
그리고 그가 그린 ‘온화한 무소르그스키의 초상’(1881)도 좋다.

 

[Room 01-07] 18세기 회화 <초상화의 시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관람은 18세기 아카데미 화풍의 초상화부터 시작된다.
이 시기 이전의 러시아 미술은 이콘화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표트르 대제의 개혁 정책이 미술계에도 밀려들며 이콘화가 주를 이루던 
러시아 화단에도 큰 변화가 일고, 황실 주도의 러시아 미술 아카데미는 
서유럽의 화풍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재능 있는 화가들의 유학을 장려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러시아 그림은 이콘화 (그리스 정교 종교화)와 세속화, 
두 형태로 나뉘어 발달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 러시아 회화의 대부분은 왕족이나 귀족의 초상화다.

 

Portrait of Empress Anna Ioannovna. 1730. <황녀 안나 이바노브나의 초상> 
by Louis Caravaque.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Room 01 

화가 루이 카라바크 (Louis Caravaque 1684~1754)는 프랑스 마르세이유의 예술가 가족에서 태어났다.  
카라바크는 원래 초상화, 전투 그림, 역사적 장면 및 풍경을 그리기 위해 3년 동안 러시아에 오기로 계약했다.   
새로운 도시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유럽풍을 적용하려고 한 피터 대제의 계획에 따라 
루이 카라바크는 러시아에서 일한 가장 성공적인 외국 예술가 중 한 명이 되었다. 

1716년에 카라바크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살면서 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있었다. 
카라바크는 1716년 피터 대왕의 초상화를 그렸다.  
1723년에 차르를 다시 그렸고 나중에 앤과 엘리자베스 황후의 초상화를 그렸다.  
  
카라바크는 그가 그린 캐서린(Catherine), 안나 이바노브나 및 엘리자베스(Elizabeth)를 통해  
러시아 초상화 그림 세계에서 계속 지배적인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다양한 황실 가족과 그들의 삶을 여러 상황에서 다룬다.  
초상화뿐만 아니라 여러 인테리어를 디자인하고  
북부 전쟁에서 피터의 군사 승리와 관련된 다양한 전투 장면을 그렸다.  
그는 또한 여러 아이콘을 그리는 의뢰를 받았으며 그렇게 한 최초의 외국 예술가 중 하나가 되었다.  
카라바크는 1754년 6월 9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으며 St. Sampson 대성당의 묘지에 묻혔다. 

Portrait of Empress Anna Ioannovna. 1730. <황녀 안나 이바노브나의 초상> 
by Louis Caravaque.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Room 01

 

황녀 안나 이바노브나 (Anna Ioannovna)는 1693년 1월 28일 모스크바에서 표트르 대제의 형제인  
이반 5세와 프라스코비아 살트이코바 사이에 네 번째로 태어난 딸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아버지의 이복동생 표트르 1세의 궁전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710년에 쿨란스키 공작과 결혼하고 공작이 죽은 후에는 주로 민타프에서 살았다.  
1727년부터 에른스트 비론이 안나의 총신이 되었다. 

표트르 2세가 서거한 후 추밀원의 의원들은 자신들이 그의 권력을 제한한다는 조건으로  
안나를 러시아의 제위에 옹립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에 동의한 지 얼마 후 안나는 귀족 근위병의 의뢰에 따라  
그 계약조건을 파기하고 추밀원을 해산시켰다.  
1730년 4월에 모스크바에서 즉위했다.  
원로원을 복구시켰으며 외국인들의 도움과 지지를 받고 나라를 통치했다. 

1731년에 내각을 창설하고, 잔혹한 고문을 행하는 비밀경찰의 활동을 승인해  
정권에 대항하려는 반대 세력들의 어떠한 시도도 엄중하게 진압했다.  
그에 따라 돌고루코브이 가, 골리츠인 가, 볼르인스키 가 출신의  
많은 사람들이 유폐되거나 사형에 처해졌다.  
또한 안나는 정권을 획득하는 데 도움을 준 귀족들의 특권을 넓혀 주었다.  
장자 상속에 대한 법을 개정하였다.  
폴란드 소귀족 계급을 위한 육군유년학교를 설립했고  
학교 이사장의 아들 중 한명이 이 영지를 관리하도록 했다.  
귀족의 국가 봉사를 35년으로 제한했다. 

안나는 산림을 보호하고 보존할 목적으로 국가적인 벌채금지법을 만들도록 지시했으며,  
러시아 정교회의 순수성을 보호하고자 이단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다.  
이를 위해, 특히 그의 명령에 따라 러시아의 16개 도시에서 신학교가 개교되었다.  
1735년에는 신성모독을 하면 사형에 처하도록 지시했다. 

안나는 미니흐가 주장한 군사개혁도 추진했는데,  
1737년에는 비론을 쿠를란스크와 세미갈리스크의 공작에 임명했다.  
표트르 1세 때에 합병되었던 카스피 해 연안의 영토를 페르시아로부터  
안전하게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영토를 페르시아에게 넘겨주었다.


1735년부터 1739년까지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소극적인 외교정책으로 인해 러시아에 불리한 조건으로 벨그라드와 체결한  
국제 조약을 성공적으로 이행하지 못했다.  
이반 5세의 후손을 따르는 세력을 확보하고자 노력했으며 이를 위해 그는 죽기 전에  
이질녀 메클렌부르크의 안나의 아들 이반 안토노비치 (이반 6세)를 후계자로 지명했고  
이반이 장성할 때까지 그의 섭정자로서 비론을 임명했다. 

<황녀 이바노브나의 초상>은 소재의 사실적 묘사가 뛰어난 작품으로 황제의 대관식 복장을 착용하고 있다.  
하지만 통통한 얼굴에 비해 왕녀의 허리가 지나치게 가늘고 양쪽 팔의 두께가 확연히 다른 그림을 보며  
잘못 그린 것이 아닐까를 의심하게 되는데, 이는 당시 황실 초상화의 대표적 특징이다.  
2차원 화폭에 원근법 등을 고려하지 않고 소재를 평면적으로 채워 넣는 이콘화 방식과  
사실주의적 초상화 기법이 혼재되어 그려진 그림이다.  
이를 파르수나 기법이라 하고 전통적인 이콘화와 사실주의적 초상화의 중간 단계를 말한다.  
또 화려한 황실 소품을 이용해 황녀의 위엄을 자랑하는 초상화임에도 모델의 얼굴을 들여다 보면  
어딘지 모르게 우매해 보이고 둔해 보이는 느낌을 읽어 낼 수 있다.  
바로 인간의 심성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을 최고 가치로 생각한 러시아 초산화의 특징을  
너무도 잘 나타나 있는 그림이다. 

 

Portrait of Grand Duchess Natalya Alexeevna of Russia, by Ivan Nikitin, 1716. 
러시아의 그랜드 공작 부인 Natalia Alexeievna의 초상화.

 

Portrait of Empress Elizabeth Petrovna. 1743. 254 x 179.8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Room 01. 

이반 비쉬냐코 작. 황녀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초상화  
이반 비쉬냐코 (Ivan Yakovlevich Vishnyakov 1699-1761)는 로코코 스타일의 러시아 초상화 화가다. 
그는 루이 카라바크 (Louis Caravaque)와 Andrey Matveyev 밑에서 공부했다.  
그는 1739년에 화가로 자격을 받았고 Matveyev의 조기 사망 이후 Chancellory의 수장이되었다.


여름 궁전, 겨울 궁전을 포함하여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그 교외의 많은 궁전과 교회에 벽화를 그렸다.  
그는 또한 초상화와 아이콘을 만들고 그림을 복원하고 외국 예술가의 작품을 평가했다.  
그의 초상화는 황실에서 선호하는 평평하고 정적인 스타일에서 출발한 최초의 인물 중 하나이다.

 

Portrait of Empress Elizabeth Petrovna. 1743. 254 x 179.8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Room 01.

 

황녀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로마노바 (Elizaveta Petrovna Romanova)는

1741년부터 1761년까지 러시아 제국을 다스린 여제다.  
로마노프 왕조의 6번째 군주로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1세의 딸이다. 

그녀는 모스크바 근처의 콜로멘스코예에서 태어났다.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는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출생년도인 1709년보다 나중인  
1712년에야 공식으로 혼인했기 때문에, 그녀의 제위 권리는 정적들로부터 도전받을 소지가 있었다.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지적이며 발랄함과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그녀는  
황실 친위대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높았으나 3대 황제 표트르 2세와  
4대 황제 안나의 통치 기간 동안은 그녀의 정치적 역할은 미미했다.  
1740년 안나가 서거하자 안나의 언니의 딸 레오폴도브나가 자신의 아들 이반 6세의 섭정을 맡고  
옐리자베타를 수녀원으로 추방하겠다고 위협하자, 옐리자베타는 러시아에 대한 프로이센 왕국의  
내정 간섭 배제와 러시아의 친오스트리아 제국 · 반프랑스 왕국 외교 정책 폐지를 희망하는  
귀족들과 뜻을 같이하기로 마음먹었다. 

옐리자베타는 1741년 11월 25일 밤 자신의 동지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어린 황제와  
그 어머니 레오폴도브나 및 측근들을 체포하고, 26일 아침 8시에 상트페트르부르크 내 관료들과  
주요 고위 성직자들을 소집한 후 자신을 러시아의 황제로 선포하게 했다.  
이때 32세였다. 이 등극과 함께 로마노프 왕조의 남자 계보는 끊어졌다. 

그녀는 이전 황제들이 채택했던 내각회의를 폐지하고  
아버지 표트르 1세가 만들었던 원로원을 정식으로 재구성했다.  
그 밖에도 이와 유사한 조치들을 취했기 때문에 그녀의 재위 기간은  
표트르 1세의 통치 원칙과 전통으로의 복귀가 두드러진다.  
그러나 원로원의 부활은 명목적이었을 뿐, 실제로는 총신들이 다스렸으며,  
아버지 표트르 1세의 주요 개혁의 일부는 철폐됐다. 

게다가 아버지처럼 정치에 주력하기보다는 무도회나 연극 등 화려한 궁정 생활과  
교회 활동, 서유럽의 멋진 옷 등을 사들이는 데 열중했다.  
교육과 예술의 발전을 장려해 러시아 최초의 대학교인 모스크바 대학교와  
예술 아카테미를 세웠으며 엄청난 비용으로 겨울 궁전을 지었다.  
대부분의 나랏일을 고문과 총신에게 떠맡겨 궁정 내 음모가 끊이지 않아  
효율적인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재정 상태는 악화되었고  
지주들은 농민들의 희생을 대가로 폭넓은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대외 적극책을 추진하여,  
유럽의 강대국으로서 러시아의 위신을 드높이기도 했다.  
그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고 있던 알렉세이 베스투제프 류민의 지도로 러시아는

친오스트리아 · 반프로이센 외교 정책을 강력히 고수했고,  
1741년에 러시아의 제위 계승과 관련된 내분을 틈타 스웨덴이 침공했지만  
20만 명의 대군을 파견해 맞서싸워 핀란드 남부를 병합했으며,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관계를 개선했다. 


말년인 1762년에는 7년 전쟁에서 프로이센에 대항해 베를린을 침공하여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를 패배 직전으로까지 몰아붙여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동맹국인 프랑스 및 오스트리아와 함께 프로이센을 붕괴시키기 전에  
갑작스레 서거하여 제위는 그의 조카인 표트르 3세에게 돌아갔다.  
후계자 표트르 3세의 친프로이센으로의 정책 전환으로  
프로이센은 겨우 위기를 모면해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옐리자베타는 살아 생전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대신 수많은 남성 애인들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하지만,  
첫사랑의 죽음을 애도하여 평생동안 상복만 입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이질이었던 홀슈타인고트로프의 카를 울리히 (표트르 3세) 공을  
러시아로 불러서 황위계승자로 책봉했으나 사이가 나빴다.  
하지만 카를의 아내인 예카테리나 2세는 매우 예뻐하여 한번은 폐병에 걸려 치료를 받고 있던 

예카테리나를 전염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찾아가서 꼭 안아주기도 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두 사람은 자주 러시아어로 편지를 주고 받았다고 한다.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통치에 대한 평가는 이전에는 궁정을 중심으로 사치에 빠지고,  
국제 전쟁에 휘말려 농노제가 강해진 시대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확실히 문화적 발전과 국제적 지위 향상,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으며,  
러시아가 강국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국정에 관심이 없었던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문화 사업에 그 열정과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한 러시아 궁정의 서구화를 열심히 진행했고, 패션에도 관심을 가졌다.  
또한 학예 보호에도 적극적이어서 서구의 학식을 수용하기 위해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를 지원하였다.  
과학자 미하일 로모노소프의 제의를 수용하여 1755년에는 모스크바 대학을 설립했다.  
예술가의 육성에도 노력을 기울였지만, 가장 중요한 사업 분야는 건축이었다.  
궁정의 수석 건축가 라스트렐리에게 명하여 수많은 궁전을 건축하거나  
또는 크게 개축하여 웅장한 러시아 바로크 양식으로 변모시켰다.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유혹하고 있는 여러 궁전의 대부분은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통치기에 세워진 것이다.

 

2019. 08. 18. 인증샷.

 

Portrait of Elizabeth Petrovna on Horseback Accompanied by A Negro Servant. 1743. 
by Georg Christoph Grooth. Oil on canvas. 82.4 x 64.9 cm. Tretyakov Gallery Room 01. 
게오르그 크리스토프 그루트(Georg Christoph Grooth) 작 
흑인 하인이 끄는 말을 타고 가는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초상화

 

Portrait of FN Golitsyn in his childhood by Ivan Vishnyakov 
이반 비쉬냐코(Ivan Vishnyakov) 작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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