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 2월 12일 총선거에서 정치군부는 국민의 민주화열망에 의해 일대 타격을 받았고,
이후 이른바 유화국면이 전면화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정치군부의 대응은 바로 이중적 대처였습니다.
얼굴마담의 위치에는 상대적으로 온건하고 합리적인 인물을 배치하여 대화와 화합을 외치면서
노동자, 청년학생등 민중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강력하고 지속적인 탄압을 강화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른바 '학원안정법' 제정기도로 나타났습니다.
'학원안정법' 제정기도는 단지 학생운동만이 아니라 모든 민주화운동 세력을 겨냥한 정치군부의 민중운동탄압음모였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신민당 등 제도정치권은 물론 재야 등 모든 민주화운동 단체들이 단결하여
민중민주화운동 탄압 저지를 위해 공동대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정치군부는 '학원안정법' 제정기도에 대한 범국민적 저항에 부딪혀 그것을 철회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군부의 탄압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탄압이 시작된 것입니다.
민주운동단체의 핵심적 간부들을 구속하여 모든 민주화운동 단체들의 연계를 막아내고자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치군부는 민청련과 본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본인이 구류를 받고 있을 때라고 기억되는 7월 초,
민청련 상임위원회 김병곤씨와 기독교청년협의회(E.Y.C) 총무부장 황인하씨가 구속되었습니다.
이들은 남영동에서 조사를 받고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가족과 면회를 하게 되자마자 이구동성으로 "근태형 괜찮으냐"고 물었으며
본인을 걱정했다는 말을 가족으로부터 들었습니다.
특히 황인하씨는 기독교 민중운동인사들에게 민청련과 본인을 지원할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누구나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인의 구속, 민청련에 대한 탄압, 그것도 아마 대대적일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되었습니다.
본인과 민청련에 대한 조치는 이미 정치적으로 결정된 것이었으며 다만 그 계기, 아니 어떤 꼬투리를 모으고 있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사실 이때 한편 두렵기도 했지만 어떻게 회피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고,
또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약간의 마음준비를 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좀 비켜서 나갈 수는 없을 것인가' 그렇게 되면 참 좋겠는데....'
하는 마음의 움직임이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본인은 남영동을 하수인으로 하는 추측수사. 예견수사의 명백한 대상으로서, 목표로서 몰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본인의 구속은 시간문제였던 것입니다.
공개 지명수배
이로써 본인에 대한 구속집행이 카운트다운된 것은 공지의 사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사실 어떻게 할까 망설였습니다.
여하튼 85년 8월 10일 제5차 민청련 총회를 당시 삼엄한 조건 아래에서 무사히 치르고
대표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였으며,
무엇보다 당시 전 국민을 긴장상태로 몰아넣었던 이른바 '학원안정법' 제정 기도의 유보 내지 철회,
즉 새로운 유신시대로 복귀기도 중지를 천만다행으로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학원안정법 제정강행을 밀고나가는 정치군부 앞에 본인은 자신의 안전문제에 관심을 둘 수가 없었으며, 그
래서는 안 된다고 채찍질조차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류조치는 모든 국민에게 일종의 선물, 은혜처럼 다가왔습니다.
사실 이른바 학원안정법은 국민모두에 대한 노골적인 협박이었으며, 국민과 대결을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벌써 숨막히는 갑갑함과 긴장, 불안이 몰아쳐 오고 있었는데, 그것을 중지한다니 이건 정말 다행한 일이고 고마운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정치군부는 대단히 유리한 정치적 입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런 유리한 분위기를 구속 선풍을 일으켜 깨뜨리고 오리혀 자신들에게 부담이 되는 짓을 하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본인은 비교적 느긋할 수 있었고, 더구나 신문에 공공연히 수배를 해 놓고도 사실상 수사기관이 없었기에
'이제 괜찮은 것이다'는 결론조차 내렸던 것입니다.
피신하지 않은 이유
외적 분위기가 위에서 얘기한 바와 같고 민주화운동 선상에서 공인으로서의 역할이 이제 어느 정도 축소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속되거나 노골적인 탄압대상으로부터 이제 멀어져 가기 시작할 것이라고 본인은 생각했고,
주변에 있는 동료들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이하게 생각한다'는 충고를 여러 사람한테 들었고,
특히 여러 통로를 통해 '다치게 될 것'이라는 경고도 끊이지 않게 들려 왔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피신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우선 민주운동단체의 대표였던 사람의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뭔가 당당하지 못한 태도는 취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당시는 피신으로 인한 긴장과 불안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으며 정말 내키지도 않았습니다.
어려움은 오지 않을 것이며, 설사 온다 하더라도 김병곤씨나 황인하씨 경우처럼 된다면 최악의 경우
감옥에서 휴식을 취하고 오히려 마음을 깊게 하는 시기로 삼자는 은밀하면서도 야무진 계획조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본인이 당할 끔찍한 일이 앞에 있는 줄 알았다면, 선택은 너무나 분명했을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물론, 우리 모두를 위해서 아니 정치군부 자신을 위해서도 피신했어야 했습니다.
저들은 본인을 핀으로 과녁에 고정시켜놓고 복수심을 불태우며 소리없이 칼날을 갈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를 기다리며 언제나 무엇이든지 감행할 채비를 갖추고 노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약간의 냄새가 나는 것으로 단정하고 평상시 키워왔던,
반드시 불온, 불손하고 거대한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열망을 확인하는 작업에 돌입한 것입니다.
이 확인 작업을 위해서는 그 무엇을 해도 좋고 어떤 방법도 가리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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