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티, 그래도 그것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약간 위안이 되더군요.
다 빼았기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 남은 것이 있지 않은가 하는 심정이 되더군요.
완전히 벗겨져 버렸을 유태인들에 비하면 기가 꺾인 바가 없지 않지만, 나 비겁자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칠성대 위에 걸터앉자 바로 눕혀 버리더군요.
여기서 저항은 앙탈로 전락하거나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될 뿐임을 나는 이미 눈치 챘습니다.
이때는 칠성대를 볼 수 없었지만 나중에 직접 이 두 눈으로 사진 찍었습니다.
평생 잊지 않도록 깊숙이. 짙은 윤곽선으로 새겨 두었습니다.
그 칠성대, 이렇게 생겼습니다.
세면대보다 약간 높고 남자 팔뚝 굵기의 각목 4개가(어쩌면 5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 키보다 약간 크게 길이로 펼쳐지고요,
앞부분은 경사져서 세면대에 착 밀착시킬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위에 담요가 깔려 있구요.
사람이 눕혀지면 담요료 싼 다음에 그 바깥을 줄로 꽁꽁 묶어 버리는 것입니다.
담요로 몸을 감싸는 것은 몸에 상처가 날까봐 그러는 것입니다.
상처가 남겨진다면 그것은 곤란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으니까요.
고문당하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님은 두말 할 나위 없습니다.
담요 바깥을 묶는 줄은 군대 허리띠 같은 것으로, 그것도 상처 자국이 남지 않도록 선택된 것이 분명합니다.
발목. 무릎 위. 허벅지. 배. 가슴 등 5군데를 묶습니다.
완전히 묶여서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머리는 움직일 수 있습니다.
머리를 웁직이지 못하면 곧 상처가 날 터이니까요.
고문의 증거로 남을 터 이구요.
하지만 머리의 반만 내지 2/3정도는 받쳐지지 않도록 해서 뒤로 젖혀지도록 고안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물고문할 때 효과적으로 고통을 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를 쓰고 움직이면 발목 아래 부분과 팔꿈치를 약간씩 비틀 수는 있었습니다. 물론 눈은 가린 채 이구요.
칠성대 위에 올려 눕혀진 나는 순식간에 완전히 결박되었습니다.
머리가 핑 하면서도 '자, 그래 견뎌보자, 견디는 것이다. 결국 언젠가는 닥쳐올 것이라고 각오했던 바가 아니냐.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이 그랬고, 저 70년대 긴급조치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당했던 그것이 오고 있는 것이다'
라고 속으로 되뇌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별 설득력이 없더군요. 목이 쉰 것만 같구요.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렇게 해. 결국 큰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고 말 것. 이건 너희들도 알고 있을 거야.
클라이막스에서 중지하게 될 거야. 틀림없이. 잎에 침이 마르도록 대화니, 화해니 말해온 것을 싹 지울 수는 없지.
오리발을 내밀어도 유분수지'하고 떠올리며, 여기에 매달리고,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썩은 동아줄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줄은 여지없이 뚝 끊어졌습니다. 협박자들은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물고문으로 들어갔습니다.
백남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따라 얼굴에, 눈이 가려져 있는 내 얼굴에 수건이,
노란 세수수건이 덮어 씌어지고 세상은 희뿌옇게, 누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머리 양쪽으로 정현규와 최상남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힘을 주어 고정시키고
그 위에 수도꼭지를 틀어 샤워기 아가리에 물이 쏟아지도록 했습니다.
육척 거구인 김영두가 그 샤워 꼭지를 잡고 사정없이 얼굴에 물을 들이댔습니다.
그러는 한편 주전자에도 물을 담아 동시에 붓고 또 쏟아부었습니다.
처음에는 칼을 갈면서 견디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은 견딜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숨을 어떻게 몰아쉬고 또 안 쉬고 또 몰아쉬고요.
하지만 애당초 그것은 가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숨이 탁탁 막히고 꺼져가는 생명의 마지막 안간힘일지도 모르는 그 순간이 덮쳐오는 것이었습니다.
신 냄새나는 짙은 껌껌함으로 뒤바뀌고 속은 메스꺼워지다가 완전히 뒤집히고 콧속에서는 노린내가 치솟고
물이 쏟아지는 그 속에서 불길이 솟고 콧속으로 불길이 솟고요.
온몸을 버둥거리고 혼신의 힘으로 뒤척거리니 칠성대도 기우뚱하였지요.
몸은 완전히 땀으로 젖어버리고 담요도 땀으로 물컹해졌습니다.
샤워기와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물의 감촉, 물소리 그것은 공포가 되어 온 몸에 덮쳐오고 천근만근 무게로 짓눌러 왔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견디었는지, 아니 단 1분이라도 견디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게 죽음인가. 죽음의 형제인가. 아, 나는 결국 여기서 굴복하고 마는 것인가.
이렇게 해서 죽음의 길로 내몰리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아. 그럴 수는 없어. 견디는 거야'
몇 번 다짐할 만한 순간은 있었지만 그것은 오직 수초동안만 지속될 뿐이었습니다.
'그래 무슨 길이 있을거야. 진술 거부는 포기하자. 그리고 부딪쳐 보는 거야.'
생각이 바뀌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 그런데 이 고문자들은 아주 낮게 뭐라고 소곤거리면서 음산하게 웃음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고통과 공포 속에서도 그 웃음이 들려오고, 나는 그 웃음을 정말 죽이고 싶었습니다.
나는 진술거부 포기의사를 밝히고자 했지만 이것을 표현할 수도, 전달할 수도 없었습니다.
온몸은 뒤채어도 별 표시가 나지 않고, 발가락과 발목을 비틀어도 뒤꿈치에 상처가 날 뿐이었습니다.
마침내 발견한 것이 고개를 약간 아래 위로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표현이 가능한 유일의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차디찬 거절이었습니다.
카랑카랑한 금속성의 거절뿐이었습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반응만은 아주 또렷하게 피부로 오싹하게 전달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더 갔는지, 아니 시간 따위과는 관계없이 이제 발버둥질조차 기진하여 할 수 없게 되는구나 싶어지면서
모두 비현실적으로 느꼈습니다.
오직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소리 '쏴' 하고 내리꽂히는 것만이 살아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샤워기와 주전자를 치우고, 얼굴에 덮어 씌웠던 수건을 치우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밑이 없는 천길 낭떠러지에서 계속 떨어져 내리다가 '아, 이것이 맨 밑바닥이었구나' 하는 안도의 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아니 이것은 구원이었습니다.
말을 하겠다고 진술거부하지 않겠다고 정말 서둘러서 외쳤습니다.
이에 대해 백남은은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물었으며, 본인은 "묻는 말에 뭐든지 대답하겠습니다"라고 기를 써서 대답했습니다.
"뭐, 묻는 말에 대답하겠다고? 필요없어, 아직 멀었구만.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항복이야, 다시 시작해."
대충 이런 내용의 지시를 백남은이 내렸습니다.
그 순간 바로 말을 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미 수건은 덮어 씌어지고 샤워기는 다시 맹렬하게 물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숨 막히는 답답함. 질식해 버릴 것 같은 공포, 그리고 아득하고 아득한 절망감... 그것 뿐이었습니다.
턱을 약간씩 아래 위로 움직이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하게 되고 낭떠러지로 다시 곤두박질치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은 정지하고 사라져 버리고, 허공에 날리는 재가 되어 날아가 버리고, 오직 고문자들의 조소,
샤워기의 물소리, 온몸을 칭칭 묶인 상태에서 도무지 헛일인 비두발광, 그 셋뿐이었습니다.
물리적 시간, 감각적 시간, 그것을 넘어서는 영원한 고통의 철저한 관철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렴풋이 "항복하지, 그래도 진술 거부할 거야? 안 하지?" 하며 뭔가 촉구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물론 나는 머리를 끄떡였습니다. 수건을 치우더군요. 아직은 살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속은 뒤집혀지고 수없이 올각질을 하게 되구요. 온몸은, 담요는 땀으로 물바다를 이루었습니다.
칠성대 위에서 다시 항복과 진술거부포기를 확인한 다음에 고문자들은 묶은 줄을 풀어주었습니다.
휘청거리며 의자에 앉았습니다.
멍청해져서 시키는 대로 옷을 주어 입었습니다.
그런데 참 기묘하게 느껴지는 것은 벌써 시간은 오후가 된 것이었습니다.
대락 7시 반경부터 이 물고문이 시작되었는데 12시 반이 이미 지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기계적 시간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마는 짧은 순간 같기도 하고,
그런 모든 것을 넘어섰던 고통의 영원같기도 했던 이 첫 번째 물고문은 여하튼 5시간이 걸렸던 것입니다.
당시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이 시간을 그래도 나는 기억에 남겨두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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