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8장] ‘2012년을 점령하라’ 유언 남기고 영면

2012/11/02 08:00 김삼웅

 

 

2011년 3월 8일 민주당 내 재야·친노·486 그룹을 망라한 '진보개혁모임' 창립대회에서 김근태 공동대표와 임채정 전 국회의장, 정세균 최고위원 등이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총선에서 낙선한 김근태는 보좌진을 해체하고 자동차도 팔았다. 수입이 없어서 비서에게 줄 월급의 마련도, 승용차의 기름값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품성대로 서민의 생활로 돌아갔다. 여느 정치인들처럼 입으로는 ‘서민 대변자’를 자처하면서 실제로는 귀족 생활을 하는 것과는 격이 달랐다.

저녁 늦은 시간까지 회의나 집회에 참석했다가 귀가할 때면 버스나 전철을 타는 곳으로 투벅투벅 걸어갔다. 주위에서 지인들이 중고차라도 한 대 사주고자 했으나 그는 한사코 반대했다.

“자가용에선 혼자서 나라를 생각했지만 이젠 내 옆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부딪힐 수 있어 좋다”고 말하곤 하였다.

 


6월항쟁 24돌이던 지난 2011년 6월 10일 청계광장에서 열린 반값등록금 이행 촉구 촛불문화제에 참석해 시민들과 함께 앉아 있는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의 모습

 

김근태는 사망할 때까지 도봉구 창1동에서 살았다.
2004년에 처음으로 매입한 집이었다. 70년대에는 부천시 신곡동과 신내동에서 살다가 1980년 5월 인천남구 구월동, 1983년 5월 부천시 역곡동으로 이사하였다. 서울시민이 된 것은 1986년 3월 강북구 수유2동으로 전입하면서였다.

이어서 수유2동과 수유3동의 전세로 전전하고, 1995년 10월 말 형의 집 근처인 도봉구 창1동으로 이사하여 2000년까지 7년을 살았다. 김근태의 가족이 전세를 면한 것은 2000년 4월 재선 뒤 창1동의 삼익빌라를 매입하면서였다. 김근태는 이 집에서 6년여를 살다가 운명하였다.

앞에서도 잠깐 소개한 적이 있지만, 김근태는 3선 의원과 장관, 집권당 대표를 지낸 정계의 중진인데도 그의 집은 평범한 서민생활 그대로였다. 부부가 함께 물욕이나 사치ㆍ호사와는 거리가 멀었고, 젊은 시절부터 노동자ㆍ서민과 더불어 살겠노라 다짐해온 의지의 소산이었다.

김근태는 정치권에서 신분과 위상의 변화에도 도덕적 결백성을 지키는 신념은 변하지 않았다.
그가 모진 박해와 정치적 격랑에도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도덕적 결백성’ 때문이다. 그는 지식인의 엄격성과 정직성을 신조로 하면서 스노브(속물)들이 판치는 정치판에서 “때 묻지 않은 영혼”을 지켜냈다.

김근태는 매년 9월경이 되면 몸살ㆍ열병을 앓았다.
1985년 9월에 고문을 당한 이후부터다. 멀쩡하다가도 9월이 되면 거짓말 같이 열병이 도져서 열흘 쯤 앓는다. 이때가 되면 각별히 조심을 하고, 정치활동의 일정도 느슨하게 잡았다. 병마가 서서히 다가왔다는 신호였다. 2006년에는 파키슨씨 병 증후군이 나타났다. 약을 계속 먹어서인지 병세가 크게 진전되지는 않았다.

병세가 악화된 것은 2011년 가을이다.
뇌정맥혈전증이란 진단이 나왔다. 몸 상태가 안 좋아 MRA를 찍으니 뇌졸증과 비슷한 것으로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가 있는 사람들에게 흔히 있는 병이라 했다. 혈압도 높지 않고 하여 의심조차 안 했던 병이다.

뇌정맥혈전증은 신경계 교란으로 생긴 것인데, 보통 전기고문을 받으면 신경계 교란이 생긴다. 외국 의료잡지에도 논문이 실렸다고 한다. 10월 중순까지도 언론 인터뷰를 하는 등 그렇게 위험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건강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늘상 손수건을 들고 다닐 정도로 만성비염을 앓고 있었다. 남영동에서 고문을 당할 때 고춧가루 탄 물을 코로 너무 마셔서 만성비염이 생긴 것이다.

김근태는 12월 초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딸의 결혼식을 서둘렀다. 남달리 사랑했던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지만, 병세의 악화로 끝내 딸의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못하였다.

 



 

10년 만에 정권 탈환에 성공한 이명박 정권은 거칠 것이 없었다.
검찰ㆍ족벌언론과 3각편대를 이루면서 퇴임 뒤 향리로 내려간 전임 대통령 노무현(과 일가)에 대한 융탄폭격으로, 끝내 그를 투신자살의 길로 내몰았다. 이어서 노무현 국민장의 뙤약볕 아래 3시간을 버티었던 김대중 전대통령도 얼마 뒤에 서거하였다.

여기에 두 전임 대통령과 함께 반독재 민주세력의 정족(鼎足)을 이루었던 김근태마저 병석에 눕게 되었다. 진보민주 진영은 3년여 사이에 민주화의 3대 축을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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