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7장] 집권당 원내대표, 당의장 맡아

2012/10/30 08:00 김삼웅

 

 

범여권내 예비대선주자인 손학규ㆍ김혁규ㆍ이해찬ㆍ한명숙ㆍ정동영ㆍ천정배 후보 6인은 지난 7월 4일 오전 국회 귀빈식당에서 김근태 전 의장 주선으로 열린 대선예비주자 6인 연석회의에서 만나 대선체제 정비와 국민경선을 통한 후보선출문제를 논의했다.

 

제17대 대선을 앞두고 민주세력의 통합을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했다. 당내에서도 통합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김근태는 진보개혁세력의 통합과 연대를 줄기차게 주장해왔던 터라, 이번에도 우리당과의 재통합에 앞장섰다.

국민의 여론에 밀린 민주신당은 2007년 8월 20일 우리당을 흡수합당하여 다시 143석의 원내 1당의 위치를 회복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국의 주도권을 되찾지는 못하였다. 4대 개혁입법이 좌절된 것을 비롯하여 대북송금특검, 분당, 이라크파병, 한미 FTA 협상 추진, 천정부지 치솟는 아파트 값의 폭등 등으로 참여정부에 대한 지식인들의 이반현상이 심해지고, 민심도 여당에 등을 돌렸다. 민주신당이 인기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민주신당에서는 정동영ㆍ손학규ㆍ이해찬ㆍ유시민ㆍ한명숙 등 10여 명이 자천 타천으로 대선 후보에 나섰다. 김근태는 여러 날 고심을 거듭한 끝에 입후보를 접기로 결정하였다.

김근태가 대선불출마를 결정한 데는 건강과 함께 대중성의 모자람을 스스로 인식한 것도 큰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젊은 시절에 당한 고문의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강준만 교수는 김근태의 ‘약점’을 대중성 부족이라 들었다.

김근태는 비단 정치권 인맥뿐만 아니라 민주화투쟁 경력, 능력, 인품 등 무엇하나 빠질게 없는 유력한 대통령 후보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에겐 큰 약점이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대중성이다. 다른 면에선 탁월한데도 그만 그 대중성에 발목이 잡혀 대권 주자로서 그간 큰 손해를 봐왔던 것이다.
(주석 8)

김근태의 불출마 배경은 당내 사정도 변수가 되었다. 이라크파병과 한미 FTA 협상 반대 ‘투쟁’으로 노무현 정부의 핵심세력으로부터 사이가 벌어졌다. ‘친노그룹’의 진영에서는 김근태를 한솥밥 먹는 동지로 보려하지 않았다. 마치 동교동 주류에서 배척받았던 처지와 유사한 모습이었다.

그는 정치 입문 이래 늘 비주류였다. 장관, 원내대표, 당의장 등을 지냈으면서도 주류가 되지 못하였다. ‘바른 말’과 ‘강한 소신’, 여기에 성격상 대중성의 부족이 만든 현상이다.

김근태가 불출마를 결정할 무렵 한 중견 언론인은 <김근태의 소망>이란 칼럼을 썼다.

“김근태가 대선출마를 포기한 데는 건강탓도 있을 것 같다고 누군가 귀뜸을 했다. 며칠 전 의원회관으로 찾아가 그를 만났다.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중요한 원인은 아니지만 관련이 좀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왈칵 슬픔이 밀려들었다. 가해자들은 멀쩡한데 피해자가 과거의 상처 때문에 또다시 손해보는 그런 세상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이 칼럼의 핵심은 “포기선언 뒤 김근태는 ‘대통합’과 후보연대회의를 위해 뛰고 있다. 발바닥에 불이 날 지경이다”는 대목이다. 성정이 고운 그는 자신의 처지는 뒤로하고 통합과 연대를 위해 헌신하는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대선주자를 포기할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뭘까? 그는 민주세력이 다시 한 번 집권하는 것이라고 했다.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국민들의 분열이 심각하다. 양극화 때문이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철학과 비전을 민주세력이 갖고 있다.

둘째, 추가 경제성장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사회적 대타협을 해야 했다. ‘승자독식’ 철학을 가지고 있는 한나라당은 할 수 없다.

셋째,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임기 안에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도 민주세력이 집권해야 한다.

논리정연했다. 그 과정에서 김근태 개인에게 돌아오는 정치적 이익은 무엇일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민주주의 발전과 정책을 위해 평생을 싸웠다. 87년 6월 항쟁은 절반의 승리였다. 민주주의가 온전하게 발전해 열매를 보고 싶다. 그러면 내 가슴에도 큰 자부심으로 남을 것 같다.”
(주석 9)

 


28일 오후 서울 수유리 통일교육원에서 열린 제17대 대통령선가 대통합민주신당 중앙선대위 발대식 '가족행복시대 여는 날'에서 정동영 대선후보(가운데)와 공동선대위원장인 이해찬 전 총리, 손학규 전 지사, 오충일 당 대표,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민주당은 10월 14일 대통령후보 서울의 최종 경선 끝에 정동영 후보가 누적 득표 21만 6,984표(43.75%)를 얻어 16만 8,799표(34.03%)를 얻은 손학규를 누르고 민주신당의 대선후보로 확정되었다. 이해찬은 11만 128표(22.20%)를 얻었다.

12월 19일 실시된 대선은 민주신당 정동영, 한나라당 이명박, 무소속 이회창, 창조한국당 문국현, 민주노동당 권영길, 민주당 이인제 후보의 경쟁구도였다.

투표 결과는 민주신당에 참담한 민심의 이반을 보여주었다.
선거 과정은 물론 그 개인에게 온갖 비리와 네거티브가 드러난 한나라당 이명박이 48.67%의 득표율로 민주신당 정동영을 500여만 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명박이 총유권자 3,765만 3,518명 중 2,368만 2,063명이 투표에 참여, 투표율은 62.9%로, 직접선거로 치러진 11번의 대선 중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진보진영은 10년 만에 보수세력에 다시 정권을 넘겨줘야 했다.

개표하는 날, 김근태는 뜬 눈으로 이를 지켜보면서 참담한 심경을 가누기 어려웠다.
그리고 당의 대표를 지낸 책임자의 한 사람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노무현 정부 초기 민주당과의 분당 이후 민주개혁 세력의 분열과 이합집산이 대선의 참패로 나타났다고 진단하고, 민주개혁세력의 단결을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김근태는 수구보수세력에게 다시 정권을 넘겨주게 된 원인을 분석하고, 앞날을 설계하는데 여러 날을 보냈다. 패배의 아픔을 달래기도 전에 당선자 이명박을 중심으로 한나라당은 마치 제 세상을 만난듯이 설치기 시작했다. 임기가 남은 기관장을 쫓아내고, 민주정부에서 추진해온 과거사청산 기관에 대한 해체 발언이 공공연하게 쏟아졌다.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이 확실시되는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와 부인 김윤옥씨가 19일 저녁 여의도 당사 개표상황실에서 선대위 관계자들과 함께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의 공세였다.
한나라당과 수구세력은 노무현 정부 중반기 무렵부터 이 말을 확대재생산하면서 정부여당을 공격했다. 원래 일본 극우세력이 경기침체로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기까지의 10년을 잃어버린 10년 이라 자평한 것을, 한국의 수구세력이 김대중ㆍ노무현 정권 10년에 갖다 부친 것이다.

김근태는 2006년 8월 24일 당의장 재임시에 사회적 대타협을 위한 뉴딜 행보의 일환으로 시민사회단체를 찾은 자리에서 “지난 10년 동안 정권을 창출하고 민주개혁세력이 민주주의 진전을 이뤄냈을 지 모르겠으나 국민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는 무능했다고 생각한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IMF 경제식민지 체제를 불러온 한나라당이, 이를 극복하고 어렵사리 국가경제를 살려낸 민주정부 10년을 ‘잃어버린 10년’ 운운하는 데는 분노가 치밀었다. 그는 한나라당식 ‘잃어버린 10년’의 발상이 아니라, 부동산 가격 폭등 등 경제적 측면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하였다.

김근태는 2006년 11월 21일 열린정책연구원의 전문가초청 부동산정책간담회에서 “저희가 걱정하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또 다시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는 상황이 왔을 때, 그것을 어떻게 미리 예방하고, 방지할 수 있는 것인지, 이럴 때 정책 수단은 어떻게 동원되어야 하는 것인지 하는 말씀을 듣고자 하고, 만약에 그런 불행한 상황이 온다면 일본이 경험했던 ‘복합 불황’이나, ‘잃어버린 10년’ 같은 중대한 상황이 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대비를 해야 하는지 하는 문제의식을 갖고 의견을 듣고자 한다”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구했다.


주석
8> 강준만, <김근태 : ‘대중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인물과 사상>, 2005년 6월호, 108쪽.
9> 성한용, <김근태의 소망>, <한겨레>, 2007년 7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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