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 / 26. 세민약국



내가 긴급조치 9 호로 구속되었다가
만기 징역형을 살고 출소한 뒤 혜숙과 함께
이화여대 5 월 축제에 참석하던 날 저녁

 

우리는 모처럼 레스토랑에 마주 앉아
오붓한 분위기에서 식사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혜숙이 느닷없는 말을 꺼내 왔다.

 

"이제 형이 나왔으니까
우리들 이야기를 정리해 봤으면 좋겠어..."

 

나는 무슨 뜻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형이 석방되기 전부터 고민하면서 생각해 온 건데...
이제 우리 사이를 서로가 아무런 부담없이
선후배 관계로 다시 정리해 보는게 어떨까 해서..."

 

이건 바로 헤어지자는 뜻 아닌가?...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이제 그만 헤어지자는 말이야?"

 

"자기도 이제 나왔으니까...
우리 관계를 좀 분명하게 정리해 봤으면 해서..."

 

나는 무지하게 화가 났다.

 

"이누무 기지배가... 사람을..."

 

그때 나는 혜숙에게 따귀를 걷어붙일 태세였다.

 

"여기까지 와가지고!...
기껏 결혼하려고 각서를 쓰고 나왔는데...
내가 언제 결혼 못해서 환장했었냐!...
자존심 상하게 각서까지 쓰고 나왔는데... 
지금 그 얘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나는 너무 화가 나서 혜숙의 멱살을 잡을 태세였다.
하지만 혜숙은 전혀 겁먹은 표정이 아니었다.

 

나중에 들으니 혜숙은
그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했다.
내 사랑을 확인해 보고 싶어서였다는 것이다.

 

혹시 내가 감옥을 사는 동안
나를 면회하고 옥바라지를 한 일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아닌지...

 

그럴 바에야 이제 자유로운 입장에서
부담없이 얘기를 나누면서 정리하는 편이 낳지 않겠나...
하는 뜻이었단다.

 

혜숙의 집안은 강원도 삼척 출신으로
위로 언니와 오빠, 밑으로 남동생과 여동생을 두고 있다.

 

아버님은 명문 춘천고보를 졸업한 뒤
회사 간부 사원으로 재직하셨고
어머니는 교사 출신이시다.

 

혜숙은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을 따라
서울로 올라 오게 되었다.

 

우리는 결혼하기로 약속했지만
예상한 바대로 혜숙의 집에서 반대가 극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혜숙의 언니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전문의 과정을 공부하고 있었고
오빠도 아직 대학을 졸업하기 전이어서
셋째인 혜숙이 먼저 결혼하겠다고 나설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더욱이 감옥을 드나들며
대학교도 졸업 못하고 제적된 사람이
이제 마악 약대 졸업을 앞둔 딸과 결혼하겠다고 나서는데
장래성이 있어 보일턱도 없어
거절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신랑감이라는 게 도대체가 어느모로 보나
자식 사랑이 지극하신 장모님 눈에
들어찰 처지가 못 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인사를 드리러 간 날,
혜숙의 어머님은 우리가 온 줄 뻔히 알면서도
내다 보지 않고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돌아 누우셨다.

 

묵묵히 계시던 아버님이 밖으로 나가자고 하셨다.
집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음식점에서
아버님은 나를 거절하지 못하시고
"내가 천천히 잘 설득해 보겠네"라고 희망을 주셨다.

 

오빠도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님이 마지막까지 극심하게 반대를 하시자
혜숙은 자기 혼자 예식장을 구하러 돌아다니며
예약까지 해놓았다.

 

"서두를 게 뭐 있어?... 
정식으로 허락도 못 받았는데 천천히 하지..."

 

혜숙은 막무가내였다.
말이 나왔을 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혜숙이 당장 결혼하겠다고 완강하게 고집을 부리니까
어머님도 좀 수그러드셨는지 그러면 내년쯤 하라셨다.

 

하지만 혜숙은 빨리 결혼을 하겠다고 계속 고집을 피웠다.
혜숙은 종로에 위치한 태화관에 가서
빈 시간이 있는 토요일로 예약을 했다.

 

청첩장까지 찍어 돌리고 나서야
부모님을 다시 찾아가 겨우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1978년 6월 10일 우리는 선후배 동료와
재야 어르신들의 각별한 축복을 받으며
나의 연세대 은사이자 민청학련 사건으로 함께 구속되었던
김찬국 교수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민청학련 사건에 관련된 이들 중에서
유일한 부부가 된 것이다.

 

이즈음 나는 근 30 년에 이르도록 성장하는 동안
온갖 추억이 담긴 삶의 터전이었던 오산을 떠나 서울로 이사를 했다.

 

언제 다시 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험란한 세상을 물 설고 낯선 객지에서 과연 제대로 헤쳐 나갈 수 있을지...
 
앞날에 대해 아무것도 기약할 수 없는 형편에서
조금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정든 고향을 떠나게 된 것이다.
 
마포구 염리동 언덕 한강과 여의도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솟을대문이 큼직하게 잘 지어진 한옥집을 마련하고
혜숙의 전공과 면허를 살려 동네 길목에 약국을 개업했다.



지금은 거의 재개발이 되어 많이 변했지만
그때만 해도 판잣집이 많았던 동네다.
그나마도 세들어 사는 이들이 많이 살던 달동네 어귀였다.

 

약국 이름을 '씨알'이라 할까 하다가
너무 공개적으로 '티'를 내는 것같은 생각에
세민(細民)약국이라 했다.

 

세민(細民)...

문헌으로는 세종 때 기아에 허덕여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면서 동가식 서가숙하는 백성을 일컷는 말이다.


영세민(零細民)에서 '영(零)' 자를 뺀 이름이다.

어쩌면 함석헌 선생님의 아름다운 우리말 '씨알'을 한자로 다시 푼 말일 수도 있겠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우리 가정에
각별히 부탁할 일이 있단다.

 

재일 교포로 일본에서는 제일 큰 교회의 저명한 목사 따님이 
한국의 문화와 풍습을 익히고 언어도 익히면서
한편으로는 신랑감을 구할 생각으로 1년 정도 한국에 머물러 온단다.

 

그런데 꼭 학생운동 출신으로
많은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가정에서 머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여러분들이 의논한 결과
우리 가정이 그 중 좋은 환경과 조건을 가지고 있는데
혹시 1년 정도 같이 생활할 수 있겠느냐는 거다.

 
우리는 가족회의를 통해서 기꺼이 동의했다.

오오사카에서 유아원 교사로 근무하는 김혜영이
신혼 살림 중인 우리집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 오오사카에서 온 김혜영과 갓 태어난 첫딸을 안고 있는 아내


그녀는 내 동료들과 허물없이 어울렸다.
동료 선후배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남자를 골라보라 했더니
서울대 출신인 양관수를 꼽았다

.

그 당시 양관수는 혜숙의 후배 여학생을
짝사랑하고 있던 중이었다.

 

짝사랑일 수밖에 없는게 그 여학생은
우리와 민청학련 사건 동료 중 한 사람을 하염없이 좋아하고 있었던 터였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우리 부부는
양관수를 달래고 설득해서 마음을 돌려 놓았다.

 

▲ 오오사카경제법과대학 양관수 교수


김혜영은 한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양관수와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면서 더욱 의미있게 보낼 수 있었다.

 

김혜영이 일본으로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양관수는 명동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함께 구속되었다.

 

일본에서 이 소식을 접한 김혜영은 이 사건의 진상을
일본 사회와 국제 사회에 알리는데 열성을 기울였다.

 

김혜영은 양관수가 석방되자 서둘러 결혼하고
신랑과 함께 일본에서 살고 있다.

 

그 후 양관수는 국내에 돌아올 수 없게 되다가 16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서라야 
고려대 교환 교수로 돌아 오게 되었다.

   

우리집과 약국은 60~70년대 학생운동을 이끌던 동료들이
오며가며 들르고 모이는 마실방이 되었다.

 

연락을 주고 받으며 소식을 나누는 장소가 되었다.
연인이 생기면 용돈이 없어 궁색한 이들이
편안하게 신세지고 가는 데이트 코스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쪽저쪽 복잡한 심사를 들어 주고,
나서서 조정하고 화해하는 상담소이기도 했다.

 

때로 우리 부부는 구구절절 간곡한 부탁으로
중신아비 역을 감당하기도 했고,
요모조모 살펴서 서로 얼키고설키지 않게
교통정리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경제적 형편으로 곤란을 겪는 동료들에게
당시 몰래바이트를 주선하는 직업소개소이기도 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은 내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하숙방이기도 했다.

 

혜숙은 이런 일들을 귀찮아하기는커녕
살맛난다는 듯이 정성들여 감당했다.

 동료들은 우리집을 '세민살롱'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듬해 2월 세민약국 골방에서
혜숙은 나와 김혜영이 지켜보는 앞에서 
조산원이신 어머니의 도움으로 첫 딸을 낳았다.

 

시인 고 은 선생님은 우리 딸의 이름을
사옥(師玉)이라 지어 주셔서 호적에 등록했다.

 

이름을 짓는 동안 혜숙은 딸에게
고웁다는 뜻으로 "고운아... 고운아..." 하고 불렀는데
이 이름도 아명이 되어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다.


이름에 대해서 갑자기 생각나는 일화 하나가 있다.

당시 소설가 이문구(李文求) 선생은 화곡동 고 은 선생 댁에 자주 드나들던 분인데

고 은 선생 댁 예쁜 강아지를 각별히 귀여워했단다.


내가 딸 아이 이름을 받으러 고은 선생 댁을 방문했을 때 마침 이문구 선생이 계셨다.

사옥(師玉)이라 지어주시기 전에 아내 혜숙이 딸 이름을 그냥 "고운아~ 고운아~" 하고 불렀다니까

고 은 선생이나 이문구 선생 귀에는 그냥 "고은아~ 고은아~" 하는 반말로 들리셨나보다.


그러더니 고 은 선생이 갑자기 "문구야~ 문구야~" 하신다.

고 은 선생은 그 강아지 이름을 문(文)자에 개 구(狗) 자를 붙여서 문구야~ 문구야~ 하고 불렀단다.

이문구 선생은 그저 허허 하며 멋적은 표정이시다.


▲ 명천 이문구(李文求) 선생


고 은 선생과 이처럼 허물없으셨던 이문구 선생님.

<관촌수필>하며 우리동네 김씨 이씨 박씨... 연작

그의 문체에 매료되어 한동안 나름 흉내를 내려고 애썼던 나는

2003년 향년 61세로 돌아가신 명천 이문구 선생이 새삼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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