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 / 27. 계훈제 선생님 영전에 부쳐



계훈제 선생님!
선생님은 1921년 평북 선천에서 출생하시고
경성제대에 다니시면서 일제의 학병을 거부하는 등
항일운동에 참여하셨다. 

 


해방 직후 민족 사회의 혼란기에
서울대학교 학생회장으로 반탁운동을 주도하시고
이후부터서는 학생운동과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또한 사회운동과 민족통일운동으로
평생을 한치의 틈도 없이
투쟁의 역사, 저항의 역사 현장 한 복판에서
올곧게 평생을 보내오셨다.

 

전국에 지명 수배되어 도피 생활도 하시고
몇 차례씩 구속되어 감옥살이도 하셨다.

 

하지만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어언 30년 여를
올곧지 못하게 허둥거려 온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투쟁의 한 복판에 서 계신 모습
오른 손을 치켜들고 주의 주장을 외치시는 모습보다는
자꾸만 선생님의 인간적인 면모가 선하게 떠올라
눈에 어리고 눈시울을 가린다.

 

연세가 드실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더 심해지는 듯한 겸손하신 모습

겸연쩍어 어찌 할 바를 몰라 하며
허둥대는듯한 천진난만하신 표정

 

사시사철 변하지 않는 국민복장에 흰 고무신,
일찍이 폐를 잃어 비스듬히 기울어지신 어깨,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손을 비비거나
손을 내밀어 불을 쬐이거나
손을 입가에 대고 녹이거나 하는 법 없으시고,

 

아무리 덥다고 국민복 단추 두어 개쯤 풀어 제치고
부채질하는 법 없으신 모범생도 같은 품성,

 

사람의 심성이 제아무리 맑을 수 있고,
감성이 제아무리 고울 수 있다고 한들
어찌 그러실 수 있을까? 

 
반듯하고 올곧기는 또 어떠시고......

 

1978년 늦여름인가...
그 날 함 선생님의 표정은 여늬 때와 뭔가 좀 다르셨다.

 

약간 상기되어 흥분하신 것 같기도 하고
앉았다 일어섰다 하시기도 하고
"허......참!" 하며 헛 말을 하시기도 하고
'생각'이 많으신건지 갈피를 잡지 못하시는지 그랬다.

 

좋은 일인 것 같기도 하고
심경을 상하신 일 같기도 하고
곁에서 느끼기에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작은 소리로 조심스럽게
"무슨 일이 있으세요?" 하고 여쭈었다.

 

함 선생님은 들으셨는지 마셨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을 계속하신다.

 

"허...참! ......이거 원 ...... 허...참!"

나 또한 곁에서 계속 어안이벙벙할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무슨 곡절이나
속 깊은 '생각'이 있으신 것이리라 여겨지고
혹시 내가 곁에 있어서 거추장스러운게 아니신가 해서
조심스럽게 자리를 물러서려 했다.

 

"저기 나가 있겠습니......"

 

하고 외채로 떨어져 있는 <씨알의 소리> 사무실을 향해서
몸짓을 돌리려 하자 선생님은 때 맞추듯

 
"허......참!" 하시고는
"이거...... 어떻허지?" 하면서
밑도끝도 없이 나의 의견을 묻는 말씀이시다.

 

"무슨 일인데요?......"


한동안 나는 도대체가 영문을 알 길 없어 하는데

 

"허...참! ...... 아 글쎄......"
하면서 계속 뜸을 들이신다.

 

허...... 저 ... 계 선생 얘기 들어 본 적 있어?"

 

순간 나는 
'계훈제 선생님 신병에 무슨 일이 또 닥쳤나?...' 하고는
불안한 생각이 스쳐 자나갔다.

 

이처럼 함 선생님께서 심각하고 중차대하게 여기시는 소식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뭐하고 다니느냐는 핀잔은 아니실까?
하는 자책감이 뒤엉켰다.

 

"네? 계 선생님이 또 붙잡혀 가셨어요?"

 

무슨 일로 그러시는가 나는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함 선생님께 여쭈었다.

 

'허!...... 그게 아니고 ......
계 선생이...... 혼례를 올리신대"

 

느닷없고 뜬굼없는 말씀에 순간 내 머리 속은
청천벽력으로 뒤죽박죽이고 어안이벙벙하면서
혼란스러워진다.

 

"어? ...... 아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천하의 중앙정보부를 따돌리고,
물샐틈없는 감시망을 뚫고
그 연세에 소리소문 없이 혼례를 올리시기까지 이르른다는게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일제 치하에서 김 구, 박헌영 등 많은 분들이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벌이면서도
가정을 꾸리고 안식처를 구했다.

 

하지만 그 일은 감시 지역을 벗어나 있거나
감시망을 피해서 철저하게 잠적한 상태에서나
가능했던 일이었다.

 

도대체 복장이나 외모가 남다르신 데다가
백주에 드러내서 활동할 일 다 하시고
야밤에 비밀하게 결사할 일 다 하시면서
어쩌면 쥐도 새로 모르게 이럴 수가 있는가?
 
뜸뜸이 이어지는 함 선생님의 말씀인즉슨
방금 계 선생님께서 다녀 가셨단다.

 

동거하신 지도 10 여 년이 되었단다.
초등학교 4 학년 되는 아들도 있으시단다.

 

사모님은 화가이신데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집안이란다.

 

그러저러해서 그동안 사업하는
사모님 집안을 위해서도 그렇고
드러낼 수가 없는 형편이셨단다.

 

그런데 아들이 커 가면서
사리분별할 나이에 접어드는데
언제까지 세상 모르게 숨고 묻어 두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지 않겠느고 하시더란다.

 

그래서 우선 함 선생님께 먼저 이실직고해서 아뢰고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등
가까운 몇 분만 모셔서 조촐하게
세상에 드러내는 시늉이나 갖추고 싶으시다는 거다.

 

뜸뜸이 말씀을 이어가시는 함 선생님의 표정과 분위기는
참으로 묘했다.

 

'세상에... 그런 일을 나에게까지 이제껏 감쪽같이 속이다니...'
하며 못내 서운한 듯도 하시고

 

'그 오랜 세월 무서운 감시망을 피해서
내외분 모두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겠나...
참으로 무서운 분들이구먼...'


하며 안쓰럽고 경외하는 표정이기도 하시다.

그러다가도

 
'평생을 혼자 될 줄로 알았는데...
장성하는 아들까지 있다니...'
하며 대견하고 감격해 하시는 듯도 하다.

 

"...... 사모님이 더 대단하시네요..."

 

나 역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얼떨떨한 샹태인채로
두서도 없는 말이 툭 튀어 나온다.

 

함 선생님은
"... 그렇지?...... 그렇게 고마울 데가 없구먼......."

하신다.

'소식'이 입에서 입으로 '소리' 소문으로 번졌다. 

 
아예 집안 일을 가지고 떳떳하게 자랑삼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던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야말로 겸손하기 이를데 없어 몸둘 바를 몰라하고
하염없이 부끄러움을 타면서 차라리 그냥 묻어 두었으면...
하고 바라시던 계 선생님의 심정은 이미 아랑곳없다.

 

'몇 분만 모셔서 조촐하게'가 뭐냐고 난리들이다. 
혼례식 자체가 집안과 개인사를 넘어선
시대적 사건이요 역사적 사건이라 했다. 

 

한판 크게 벌려야 한다는 거다. 
아무리 박정희 유신 정권이
말기 증상에 단말적 기승을 부리기로서니
관혼상제의 풍속까지야 못하게 막겠느냐는 거다.

 

시공을 넘어 요즈음 같은 분위기에서라면
모든 언론과 잡지에서마다 일생일대의 사건으로
순애보로 불꽃튀는 취재 경쟁을 벌이고 난리를 치면서
텔레비전 뉴스로도 특종감이겠지만,

얼어붙을대로 얼어붙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는
두 분의 혼례를 알리는 청첩장을 띄울 엄두조차
감히 내지 못할 분위기였다.

 

그 해 초겨울
이미 해가 떨어져 컴컴한 야밤에
비밀히 마련한 도심 한복판 중국음식점 아서원으로
발소리를 죽이고 기척을 살피며
하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든다.

 

종교계 학계 법조계 문화예술인 언론인
노동 운동가 청년 운동가 등등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을 열망하며
계 선생님과 뜻을 같이 하는 분들로
장내는 삽시에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다.

 

고 은 시인의 비장한 감동과 감격어린 시 낭송이 이어지고,
청년 문화패의 사물놀이로 한바탕 소란이 일면서
분위기는 한껏 절정에 달한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게 된 정보 기관에서는
이리뛰고 저리뛰며 일대에 병력을 배치해서
첩첩이 에워싸고 안절부절 야단이다. 

 

지금은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장선우와 청년 풍물문화패는
역사적인 혼례식의 제물이 되기를 기꺼이 각오하고 자처하듯
한꺼번에 엮어져 경찰서로 연행되어 갔다.

 

돌이켜 보면 장례식으로는 일제 치하
3 . 1 독립 운동을 촉발하게 된 고종 황제의 국장에서부터
민족 사회에 큰 관심과 영향을 불러일으킨 일이
연이어 있어 오다시피 했지만

축복받아야 마땅할 혼례식으로 감시망을 뚫고
세상 떠들석하게 야단을 불러일으킨 적은 없지 싶고
그때까지 보고 들은적 없다.

 

뿐만 아니라 이 혼례식은
한 가정과 한 때의 정치 사회적 분위기에서 치루어진
'기억될 추억'에 머무르지 않고
곧 이어서 다가 올 앞날의 역사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로부터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사건이 발생했다.

 

이제 유신 통치 시대를 마감하고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 시대를 열어 가야 한다는 열망은
재야 민주화 운동권 뿐만 아니라 전국민적 합의에 달했다. 

 

하지만 시국은 어수선했고
국가의 운명이 어디로 튈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황이다.

 

비상계엄령이 발동되고
정국은 숨막히는 공포로 주눅든다.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거대한 어둠의 세력이
박 정권 이래로 구축해 놓은 제단을 싹 쓸어버리고
누군가를 살육해서 희생 제물로 삼을 것만 같은 분위기다.

 

일부에서는 차라리 어둠의 세력이 쳐 놓은 장막으로
당당하게 몸을 던져 뛰어 들 양심적 결단이 필요하다고 했다.

 

몸서리치는 공포와 탄압에 굴하지 않고
저항할 수 있는 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판 승부를 겨루어야 한다고 했다.

 

여러 계층과 분야에서 민주화를 위해
관심을 갖고 행동해 온 많은 분들이
고민하고 의논하고 힘을 모으고 승부수를 짜내는 동안
10여 개월 전에 치루었던 계훈제 선생님의
성공적(?) 혼례 행사는 소중한 귀감이 되고
방법이 되고 전술 전략이 되었다.

충분한 훈련이고 실전 경험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 혼례 행사는
소위 '명동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으로
다시 살아나고 이어진다. 

 

어두컴컴한 밤중에 치루던 것을 백주 대낮으로 옮기고
비밀하게 음식점을 빌려 치루던 것을
명동 한복판 YWCA 대강당으로 옮겼다.

 

계훈제 선생님 역으로는 당시 민주청년협의회 홍성엽이 맡고
김진주 사모님 역으로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서
김진주라는 가상의 인물을 설정했다가
혹시라도 당시 상황 하에서 이런저런 문제가
복잡하게 꼬일 수도 있고 한편으로
계 선생님 내외분께 누를 끼칠 염려도 있겠다 싶어
이름을 윤정민이라고 바꾸었다.

 

등장하는 하객들도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을 열망하는 분들이
기척을 살피고 발소리를 죽이며
삼삼오오 삽시에 입추의 여지없이 모여든 장면도 같고,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게 된 기관에서
이리뛰고 저리뛰며 일대에 병력을 배치해서
첩첩이 에워싸고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장면도 같다.

 

하지만 상대역으로 등장하는
인물과 배경과 역할은 전혀 달랐다. 

 

인물로는 정보기관원이 아니라 비상계엄군이 맡고
배경으로는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소위 신군부 세력이 맡았다. 

 

역할은 그야말로 닥치는대로 연행하고
무지막지하게 다루는 것이었다.

 

식순을 진행하자마자 단상 쪽에서부터
의자 내던지는 소리와 비명 소리로 소란이 일더니
대회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었다.

 

무장한 계엄군들이 쏟아져 들이닥치면서
참석자들을 마구 끌어내고 장내를 휩쓸었다.

 

이윽고 짙은 안개에 쌓인 어둠의 세력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비상계엄군은 함 선생님을 비롯해서
목사님과 교수와 문화예술인 청년학생들을
닥치는대로 끌어갔다.

 

끌려간 이들은 누구랄 것 없이 군화발과 5파운드 몽둥이로
갖은 고문과 능욕으로 처참하게 수모를 당했다.

 

함 선생님 역시 80 노구에도 불구하고
박 정권 치하에서도 들어본 적 없던 수모를 적잖이 당하셨다.

 

그리고는 소위 '명동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이라 이름하여
140여 명이 구속 구금되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다시금 돌이켜 보면
계훈제 선생님과 김진주 사모님의 혼례식은
약력과 활동 경력 등 모든 기록에서 드러나지 않고
겸손하게 숨어 있어 흔적없이 빠져 있지만


이르르게 되기까지 저간의 사정도 그러려니와
행사 자체가 이 땅의 민주화와 민족 사회 운동에
'역사적 사건'으로 남아 길이 기억되어서 마땅할 일이다.

 

(이상 계훈제 선생님 영전에 부치는 추모의 글 / 씨알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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