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 / 22. 의리의 사나이 장영달



장영달(국회의원)은 오로지 나 때문에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고
석방되고 나서 그가 긴급조치 9호로 두 번째 구속되었을 때도
그 비슷한 경우이다.

 

그리고는 오히려 나보다 더 오랜 세월
무려 7년 여 동안을 감옥살이 한 친구다. 

 

내가 기독학생회총연맹 서울연합회장일 적에
그는 기획실장을 맡고 있었는데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내가 그의 이름을 불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구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앞에서 고백했듯이
여학생과 스승의 관계를 진술하지 않는 대신으로
연배도 같고 기독교 배경으로 보호될 수 있는 그를 지목하여
구속당하게 했던 것이다. 

 

그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7년을 선고 받고
이듬해 함께 출소했다.

 

그 후 김지하 양심선언 사건이 발생하자
나는 장영달에게 양심선언문을 전달하고
대학가에 배포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가 전해 준 유인물을 후배들에게 전달하여
대학교에 뿌리다가 꼬리가 잡힌 장영달은
내 이름을 진술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견디고 버텼다.

 

나는 딱히 고의는 아니더라도
숨길 수 있었던 그의 이름을 말해서
그를 징역까지 살게 했는데
그는 나를 끝까지 지켜주었던 것이다.
 
서대문 구치소에서 먼저 구속된 장영달을 만났을 때
그는 이미 만기출소할 때가 다가 와 있었다.

 

그 때 중앙정보부에서는 장영달에게
앞으로 민주화 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각서 쓰면
석방시켜 주겠고 만약 각서를 쓰지 않으면
김지하처럼 민청학련 사건으로 형집행정지 중인 7년 형을
취소시킬 수밖에 없다면서 각서쓰기를 강요했다.

 

장영달은 "난 절대로 각서를 못 쓰겠다"며 거절했다.
중앙정보부 고위 간부가 서대문 구치소로 직접 찾아 와
장영달을 만나는 등 여러 차례 회유가 있었지만
그는 끝까지 각서쓰기를 거부했다.

 

그로 인해서 장영달은 만기가 지났는데도 석방되지 못하고
다시 형집행정지 취소 처분으로
7년 형을 거의 다 살고 나서야 석방되었다.

 

장영달의 만기 출소가 취소되던 날
혜숙은 장영달의 가족과 함께 새벽 4시부터
그의 석방을 기다리고 있었다.

 

끝내 장영달이 석방되지 않고 7년 형을 더 살게 되자
가족은 물론이려니와 혜숙은 너무 상심하고 허탈해 했다.

 

장영달이 석방되지 못한다면
같은 조건에 처한 나 역시 석방되지 못하고
장기 징역형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혜숙은 그 날 아침 일찍 나와 면회를 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영달이 형이 못 나왔어...
형집행정지가 취소되었대...
영달이 형이 7년이면 당신은 12년인데..."

혜숙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계속 훌쩍거렸다.

 

"이제 나한테는 내 인생이 없어졌어... 
나 이제부터 자기가 석방되어 나올 때까지
당신 옥바라지하면서 돈만 벌어야겠어...
당신이 집안 걱정 안 할만큼 12년 동안 돈만 벌겠어... 
그래서 당신이 석방된 뒤에는
남은 인생 마음껏 여행 다녀도 될 만큼 벌겠어...
지금부터 난 주변에 모든 관계를 끊고
오로지 당신 옥바라지하면서 돈만 벌어야겠어... 흑흑흑..."

 

혜숙은 눈물을 닦아내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추가 징역 12년이 거의 확정되는 순간에
당신이란 말 또한 처음으로 들어 보는 호칭이었지만
어색하기보다는 내 가슴 속에
진하디 진한 피흐름으로 흘러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 와중에서도 혜숙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괜한 소리 하지 마!...
이제 만나기 거북하니까 내일부터 면회 오지 말았으면 좋겠어.
오더라도 접견을 거부할 꺼야...
나 때문에 자기 인생을 바꿀 필요도 없고..."

 

나는 이 말만 던져버리고는
짧은 면회 시간도 남겨둔 채 돌아서서 나와 버렸다.

 

사방으로 돌아오는 동안 내 발걸음은 무거웠고
목젖이 움직이면서 내면 깊숙이 울먹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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