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 / 26. 세민약국



내가 긴급조치 9 호로 구속되었다가
만기 징역형을 살고 출소한 뒤 혜숙과 함께
이화여대 5 월 축제에 참석하던 날 저녁

 

우리는 모처럼 레스토랑에 마주 앉아
오붓한 분위기에서 식사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혜숙이 느닷없는 말을 꺼내 왔다.

 

"이제 형이 나왔으니까
우리들 이야기를 정리해 봤으면 좋겠어..."

 

나는 무슨 뜻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형이 석방되기 전부터 고민하면서 생각해 온 건데...
이제 우리 사이를 서로가 아무런 부담없이
선후배 관계로 다시 정리해 보는게 어떨까 해서..."

 

이건 바로 헤어지자는 뜻 아닌가?...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이제 그만 헤어지자는 말이야?"

 

"자기도 이제 나왔으니까...
우리 관계를 좀 분명하게 정리해 봤으면 해서..."

 

나는 무지하게 화가 났다.

 

"이누무 기지배가... 사람을..."

 

그때 나는 혜숙에게 따귀를 걷어붙일 태세였다.

 

"여기까지 와가지고!...
기껏 결혼하려고 각서를 쓰고 나왔는데...
내가 언제 결혼 못해서 환장했었냐!...
자존심 상하게 각서까지 쓰고 나왔는데... 
지금 그 얘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나는 너무 화가 나서 혜숙의 멱살을 잡을 태세였다.
하지만 혜숙은 전혀 겁먹은 표정이 아니었다.

 

나중에 들으니 혜숙은
그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했다.
내 사랑을 확인해 보고 싶어서였다는 것이다.

 

혹시 내가 감옥을 사는 동안
나를 면회하고 옥바라지를 한 일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아닌지...

 

그럴 바에야 이제 자유로운 입장에서
부담없이 얘기를 나누면서 정리하는 편이 낳지 않겠나...
하는 뜻이었단다.

 

혜숙의 집안은 강원도 삼척 출신으로
위로 언니와 오빠, 밑으로 남동생과 여동생을 두고 있다.

 

아버님은 명문 춘천고보를 졸업한 뒤
회사 간부 사원으로 재직하셨고
어머니는 교사 출신이시다.

 

혜숙은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을 따라
서울로 올라 오게 되었다.

 

우리는 결혼하기로 약속했지만
예상한 바대로 혜숙의 집에서 반대가 극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혜숙의 언니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전문의 과정을 공부하고 있었고
오빠도 아직 대학을 졸업하기 전이어서
셋째인 혜숙이 먼저 결혼하겠다고 나설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더욱이 감옥을 드나들며
대학교도 졸업 못하고 제적된 사람이
이제 마악 약대 졸업을 앞둔 딸과 결혼하겠다고 나서는데
장래성이 있어 보일턱도 없어
거절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신랑감이라는 게 도대체가 어느모로 보나
자식 사랑이 지극하신 장모님 눈에
들어찰 처지가 못 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인사를 드리러 간 날,
혜숙의 어머님은 우리가 온 줄 뻔히 알면서도
내다 보지 않고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돌아 누우셨다.

 

묵묵히 계시던 아버님이 밖으로 나가자고 하셨다.
집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음식점에서
아버님은 나를 거절하지 못하시고
"내가 천천히 잘 설득해 보겠네"라고 희망을 주셨다.

 

오빠도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님이 마지막까지 극심하게 반대를 하시자
혜숙은 자기 혼자 예식장을 구하러 돌아다니며
예약까지 해놓았다.

 

"서두를 게 뭐 있어?... 
정식으로 허락도 못 받았는데 천천히 하지..."

 

혜숙은 막무가내였다.
말이 나왔을 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혜숙이 당장 결혼하겠다고 완강하게 고집을 부리니까
어머님도 좀 수그러드셨는지 그러면 내년쯤 하라셨다.

 

하지만 혜숙은 빨리 결혼을 하겠다고 계속 고집을 피웠다.
혜숙은 종로에 위치한 태화관에 가서
빈 시간이 있는 토요일로 예약을 했다.

 

청첩장까지 찍어 돌리고 나서야
부모님을 다시 찾아가 겨우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1978년 6월 10일 우리는 선후배 동료와
재야 어르신들의 각별한 축복을 받으며
나의 연세대 은사이자 민청학련 사건으로 함께 구속되었던
김찬국 교수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민청학련 사건에 관련된 이들 중에서
유일한 부부가 된 것이다.

 

이즈음 나는 근 30 년에 이르도록 성장하는 동안
온갖 추억이 담긴 삶의 터전이었던 오산을 떠나 서울로 이사를 했다.

 

언제 다시 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험란한 세상을 물 설고 낯선 객지에서 과연 제대로 헤쳐 나갈 수 있을지...
 
앞날에 대해 아무것도 기약할 수 없는 형편에서
조금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정든 고향을 떠나게 된 것이다.
 
마포구 염리동 언덕 한강과 여의도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솟을대문이 큼직하게 잘 지어진 한옥집을 마련하고
혜숙의 전공과 면허를 살려 동네 길목에 약국을 개업했다.



지금은 거의 재개발이 되어 많이 변했지만
그때만 해도 판잣집이 많았던 동네다.
그나마도 세들어 사는 이들이 많이 살던 달동네 어귀였다.

 

약국 이름을 '씨알'이라 할까 하다가
너무 공개적으로 '티'를 내는 것같은 생각에
세민(細民)약국이라 했다.

 

세민(細民)...

문헌으로는 세종 때 기아에 허덕여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면서 동가식 서가숙하는 백성을 일컷는 말이다.


영세민(零細民)에서 '영(零)' 자를 뺀 이름이다.

어쩌면 함석헌 선생님의 아름다운 우리말 '씨알'을 한자로 다시 푼 말일 수도 있겠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우리 가정에
각별히 부탁할 일이 있단다.

 

재일 교포로 일본에서는 제일 큰 교회의 저명한 목사 따님이 
한국의 문화와 풍습을 익히고 언어도 익히면서
한편으로는 신랑감을 구할 생각으로 1년 정도 한국에 머물러 온단다.

 

그런데 꼭 학생운동 출신으로
많은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가정에서 머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여러분들이 의논한 결과
우리 가정이 그 중 좋은 환경과 조건을 가지고 있는데
혹시 1년 정도 같이 생활할 수 있겠느냐는 거다.

 
우리는 가족회의를 통해서 기꺼이 동의했다.

오오사카에서 유아원 교사로 근무하는 김혜영이
신혼 살림 중인 우리집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 오오사카에서 온 김혜영과 갓 태어난 첫딸을 안고 있는 아내


그녀는 내 동료들과 허물없이 어울렸다.
동료 선후배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남자를 골라보라 했더니
서울대 출신인 양관수를 꼽았다

.

그 당시 양관수는 혜숙의 후배 여학생을
짝사랑하고 있던 중이었다.

 

짝사랑일 수밖에 없는게 그 여학생은
우리와 민청학련 사건 동료 중 한 사람을 하염없이 좋아하고 있었던 터였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우리 부부는
양관수를 달래고 설득해서 마음을 돌려 놓았다.

 

▲ 오오사카경제법과대학 양관수 교수


김혜영은 한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양관수와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면서 더욱 의미있게 보낼 수 있었다.

 

김혜영이 일본으로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양관수는 명동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함께 구속되었다.

 

일본에서 이 소식을 접한 김혜영은 이 사건의 진상을
일본 사회와 국제 사회에 알리는데 열성을 기울였다.

 

김혜영은 양관수가 석방되자 서둘러 결혼하고
신랑과 함께 일본에서 살고 있다.

 

그 후 양관수는 국내에 돌아올 수 없게 되다가 16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서라야 
고려대 교환 교수로 돌아 오게 되었다.

   

우리집과 약국은 60~70년대 학생운동을 이끌던 동료들이
오며가며 들르고 모이는 마실방이 되었다.

 

연락을 주고 받으며 소식을 나누는 장소가 되었다.
연인이 생기면 용돈이 없어 궁색한 이들이
편안하게 신세지고 가는 데이트 코스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쪽저쪽 복잡한 심사를 들어 주고,
나서서 조정하고 화해하는 상담소이기도 했다.

 

때로 우리 부부는 구구절절 간곡한 부탁으로
중신아비 역을 감당하기도 했고,
요모조모 살펴서 서로 얼키고설키지 않게
교통정리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경제적 형편으로 곤란을 겪는 동료들에게
당시 몰래바이트를 주선하는 직업소개소이기도 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은 내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하숙방이기도 했다.

 

혜숙은 이런 일들을 귀찮아하기는커녕
살맛난다는 듯이 정성들여 감당했다.

 동료들은 우리집을 '세민살롱'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듬해 2월 세민약국 골방에서
혜숙은 나와 김혜영이 지켜보는 앞에서 
조산원이신 어머니의 도움으로 첫 딸을 낳았다.

 

시인 고 은 선생님은 우리 딸의 이름을
사옥(師玉)이라 지어 주셔서 호적에 등록했다.

 

이름을 짓는 동안 혜숙은 딸에게
고웁다는 뜻으로 "고운아... 고운아..." 하고 불렀는데
이 이름도 아명이 되어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다.


이름에 대해서 갑자기 생각나는 일화 하나가 있다.

당시 소설가 이문구(李文求) 선생은 화곡동 고 은 선생 댁에 자주 드나들던 분인데

고 은 선생 댁 예쁜 강아지를 각별히 귀여워했단다.


내가 딸 아이 이름을 받으러 고은 선생 댁을 방문했을 때 마침 이문구 선생이 계셨다.

사옥(師玉)이라 지어주시기 전에 아내 혜숙이 딸 이름을 그냥 "고운아~ 고운아~" 하고 불렀다니까

고 은 선생이나 이문구 선생 귀에는 그냥 "고은아~ 고은아~" 하는 반말로 들리셨나보다.


그러더니 고 은 선생이 갑자기 "문구야~ 문구야~" 하신다.

고 은 선생은 그 강아지 이름을 문(文)자에 개 구(狗) 자를 붙여서 문구야~ 문구야~ 하고 불렀단다.

이문구 선생은 그저 허허 하며 멋적은 표정이시다.


▲ 명천 이문구(李文求) 선생


고 은 선생과 이처럼 허물없으셨던 이문구 선생님.

<관촌수필>하며 우리동네 김씨 이씨 박씨... 연작

그의 문체에 매료되어 한동안 나름 흉내를 내려고 애썼던 나는

2003년 향년 61세로 돌아가신 명천 이문구 선생이 새삼 그립다.



 

2 부 / 27. 계훈제 선생님 영전에 부쳐



계훈제 선생님!
선생님은 1921년 평북 선천에서 출생하시고
경성제대에 다니시면서 일제의 학병을 거부하는 등
항일운동에 참여하셨다. 

 


해방 직후 민족 사회의 혼란기에
서울대학교 학생회장으로 반탁운동을 주도하시고
이후부터서는 학생운동과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또한 사회운동과 민족통일운동으로
평생을 한치의 틈도 없이
투쟁의 역사, 저항의 역사 현장 한 복판에서
올곧게 평생을 보내오셨다.

 

전국에 지명 수배되어 도피 생활도 하시고
몇 차례씩 구속되어 감옥살이도 하셨다.

 

하지만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어언 30년 여를
올곧지 못하게 허둥거려 온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투쟁의 한 복판에 서 계신 모습
오른 손을 치켜들고 주의 주장을 외치시는 모습보다는
자꾸만 선생님의 인간적인 면모가 선하게 떠올라
눈에 어리고 눈시울을 가린다.

 

연세가 드실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더 심해지는 듯한 겸손하신 모습

겸연쩍어 어찌 할 바를 몰라 하며
허둥대는듯한 천진난만하신 표정

 

사시사철 변하지 않는 국민복장에 흰 고무신,
일찍이 폐를 잃어 비스듬히 기울어지신 어깨,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손을 비비거나
손을 내밀어 불을 쬐이거나
손을 입가에 대고 녹이거나 하는 법 없으시고,

 

아무리 덥다고 국민복 단추 두어 개쯤 풀어 제치고
부채질하는 법 없으신 모범생도 같은 품성,

 

사람의 심성이 제아무리 맑을 수 있고,
감성이 제아무리 고울 수 있다고 한들
어찌 그러실 수 있을까? 

 
반듯하고 올곧기는 또 어떠시고......

 

1978년 늦여름인가...
그 날 함 선생님의 표정은 여늬 때와 뭔가 좀 다르셨다.

 

약간 상기되어 흥분하신 것 같기도 하고
앉았다 일어섰다 하시기도 하고
"허......참!" 하며 헛 말을 하시기도 하고
'생각'이 많으신건지 갈피를 잡지 못하시는지 그랬다.

 

좋은 일인 것 같기도 하고
심경을 상하신 일 같기도 하고
곁에서 느끼기에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작은 소리로 조심스럽게
"무슨 일이 있으세요?" 하고 여쭈었다.

 

함 선생님은 들으셨는지 마셨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을 계속하신다.

 

"허...참! ......이거 원 ...... 허...참!"

나 또한 곁에서 계속 어안이벙벙할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무슨 곡절이나
속 깊은 '생각'이 있으신 것이리라 여겨지고
혹시 내가 곁에 있어서 거추장스러운게 아니신가 해서
조심스럽게 자리를 물러서려 했다.

 

"저기 나가 있겠습니......"

 

하고 외채로 떨어져 있는 <씨알의 소리> 사무실을 향해서
몸짓을 돌리려 하자 선생님은 때 맞추듯

 
"허......참!" 하시고는
"이거...... 어떻허지?" 하면서
밑도끝도 없이 나의 의견을 묻는 말씀이시다.

 

"무슨 일인데요?......"


한동안 나는 도대체가 영문을 알 길 없어 하는데

 

"허...참! ...... 아 글쎄......"
하면서 계속 뜸을 들이신다.

 

허...... 저 ... 계 선생 얘기 들어 본 적 있어?"

 

순간 나는 
'계훈제 선생님 신병에 무슨 일이 또 닥쳤나?...' 하고는
불안한 생각이 스쳐 자나갔다.

 

이처럼 함 선생님께서 심각하고 중차대하게 여기시는 소식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뭐하고 다니느냐는 핀잔은 아니실까?
하는 자책감이 뒤엉켰다.

 

"네? 계 선생님이 또 붙잡혀 가셨어요?"

 

무슨 일로 그러시는가 나는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함 선생님께 여쭈었다.

 

'허!...... 그게 아니고 ......
계 선생이...... 혼례를 올리신대"

 

느닷없고 뜬굼없는 말씀에 순간 내 머리 속은
청천벽력으로 뒤죽박죽이고 어안이벙벙하면서
혼란스러워진다.

 

"어? ...... 아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천하의 중앙정보부를 따돌리고,
물샐틈없는 감시망을 뚫고
그 연세에 소리소문 없이 혼례를 올리시기까지 이르른다는게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일제 치하에서 김 구, 박헌영 등 많은 분들이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벌이면서도
가정을 꾸리고 안식처를 구했다.

 

하지만 그 일은 감시 지역을 벗어나 있거나
감시망을 피해서 철저하게 잠적한 상태에서나
가능했던 일이었다.

 

도대체 복장이나 외모가 남다르신 데다가
백주에 드러내서 활동할 일 다 하시고
야밤에 비밀하게 결사할 일 다 하시면서
어쩌면 쥐도 새로 모르게 이럴 수가 있는가?
 
뜸뜸이 이어지는 함 선생님의 말씀인즉슨
방금 계 선생님께서 다녀 가셨단다.

 

동거하신 지도 10 여 년이 되었단다.
초등학교 4 학년 되는 아들도 있으시단다.

 

사모님은 화가이신데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집안이란다.

 

그러저러해서 그동안 사업하는
사모님 집안을 위해서도 그렇고
드러낼 수가 없는 형편이셨단다.

 

그런데 아들이 커 가면서
사리분별할 나이에 접어드는데
언제까지 세상 모르게 숨고 묻어 두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지 않겠느고 하시더란다.

 

그래서 우선 함 선생님께 먼저 이실직고해서 아뢰고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등
가까운 몇 분만 모셔서 조촐하게
세상에 드러내는 시늉이나 갖추고 싶으시다는 거다.

 

뜸뜸이 말씀을 이어가시는 함 선생님의 표정과 분위기는
참으로 묘했다.

 

'세상에... 그런 일을 나에게까지 이제껏 감쪽같이 속이다니...'
하며 못내 서운한 듯도 하시고

 

'그 오랜 세월 무서운 감시망을 피해서
내외분 모두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겠나...
참으로 무서운 분들이구먼...'


하며 안쓰럽고 경외하는 표정이기도 하시다.

그러다가도

 
'평생을 혼자 될 줄로 알았는데...
장성하는 아들까지 있다니...'
하며 대견하고 감격해 하시는 듯도 하다.

 

"...... 사모님이 더 대단하시네요..."

 

나 역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얼떨떨한 샹태인채로
두서도 없는 말이 툭 튀어 나온다.

 

함 선생님은
"... 그렇지?...... 그렇게 고마울 데가 없구먼......."

하신다.

'소식'이 입에서 입으로 '소리' 소문으로 번졌다. 

 
아예 집안 일을 가지고 떳떳하게 자랑삼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던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야말로 겸손하기 이를데 없어 몸둘 바를 몰라하고
하염없이 부끄러움을 타면서 차라리 그냥 묻어 두었으면...
하고 바라시던 계 선생님의 심정은 이미 아랑곳없다.

 

'몇 분만 모셔서 조촐하게'가 뭐냐고 난리들이다. 
혼례식 자체가 집안과 개인사를 넘어선
시대적 사건이요 역사적 사건이라 했다. 

 

한판 크게 벌려야 한다는 거다. 
아무리 박정희 유신 정권이
말기 증상에 단말적 기승을 부리기로서니
관혼상제의 풍속까지야 못하게 막겠느냐는 거다.

 

시공을 넘어 요즈음 같은 분위기에서라면
모든 언론과 잡지에서마다 일생일대의 사건으로
순애보로 불꽃튀는 취재 경쟁을 벌이고 난리를 치면서
텔레비전 뉴스로도 특종감이겠지만,

얼어붙을대로 얼어붙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는
두 분의 혼례를 알리는 청첩장을 띄울 엄두조차
감히 내지 못할 분위기였다.

 

그 해 초겨울
이미 해가 떨어져 컴컴한 야밤에
비밀히 마련한 도심 한복판 중국음식점 아서원으로
발소리를 죽이고 기척을 살피며
하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든다.

 

종교계 학계 법조계 문화예술인 언론인
노동 운동가 청년 운동가 등등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을 열망하며
계 선생님과 뜻을 같이 하는 분들로
장내는 삽시에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다.

 

고 은 시인의 비장한 감동과 감격어린 시 낭송이 이어지고,
청년 문화패의 사물놀이로 한바탕 소란이 일면서
분위기는 한껏 절정에 달한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게 된 정보 기관에서는
이리뛰고 저리뛰며 일대에 병력을 배치해서
첩첩이 에워싸고 안절부절 야단이다. 

 

지금은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장선우와 청년 풍물문화패는
역사적인 혼례식의 제물이 되기를 기꺼이 각오하고 자처하듯
한꺼번에 엮어져 경찰서로 연행되어 갔다.

 

돌이켜 보면 장례식으로는 일제 치하
3 . 1 독립 운동을 촉발하게 된 고종 황제의 국장에서부터
민족 사회에 큰 관심과 영향을 불러일으킨 일이
연이어 있어 오다시피 했지만

축복받아야 마땅할 혼례식으로 감시망을 뚫고
세상 떠들석하게 야단을 불러일으킨 적은 없지 싶고
그때까지 보고 들은적 없다.

 

뿐만 아니라 이 혼례식은
한 가정과 한 때의 정치 사회적 분위기에서 치루어진
'기억될 추억'에 머무르지 않고
곧 이어서 다가 올 앞날의 역사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로부터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사건이 발생했다.

 

이제 유신 통치 시대를 마감하고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 시대를 열어 가야 한다는 열망은
재야 민주화 운동권 뿐만 아니라 전국민적 합의에 달했다. 

 

하지만 시국은 어수선했고
국가의 운명이 어디로 튈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황이다.

 

비상계엄령이 발동되고
정국은 숨막히는 공포로 주눅든다.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거대한 어둠의 세력이
박 정권 이래로 구축해 놓은 제단을 싹 쓸어버리고
누군가를 살육해서 희생 제물로 삼을 것만 같은 분위기다.

 

일부에서는 차라리 어둠의 세력이 쳐 놓은 장막으로
당당하게 몸을 던져 뛰어 들 양심적 결단이 필요하다고 했다.

 

몸서리치는 공포와 탄압에 굴하지 않고
저항할 수 있는 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판 승부를 겨루어야 한다고 했다.

 

여러 계층과 분야에서 민주화를 위해
관심을 갖고 행동해 온 많은 분들이
고민하고 의논하고 힘을 모으고 승부수를 짜내는 동안
10여 개월 전에 치루었던 계훈제 선생님의
성공적(?) 혼례 행사는 소중한 귀감이 되고
방법이 되고 전술 전략이 되었다.

충분한 훈련이고 실전 경험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 혼례 행사는
소위 '명동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으로
다시 살아나고 이어진다. 

 

어두컴컴한 밤중에 치루던 것을 백주 대낮으로 옮기고
비밀하게 음식점을 빌려 치루던 것을
명동 한복판 YWCA 대강당으로 옮겼다.

 

계훈제 선생님 역으로는 당시 민주청년협의회 홍성엽이 맡고
김진주 사모님 역으로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서
김진주라는 가상의 인물을 설정했다가
혹시라도 당시 상황 하에서 이런저런 문제가
복잡하게 꼬일 수도 있고 한편으로
계 선생님 내외분께 누를 끼칠 염려도 있겠다 싶어
이름을 윤정민이라고 바꾸었다.

 

등장하는 하객들도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을 열망하는 분들이
기척을 살피고 발소리를 죽이며
삼삼오오 삽시에 입추의 여지없이 모여든 장면도 같고,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게 된 기관에서
이리뛰고 저리뛰며 일대에 병력을 배치해서
첩첩이 에워싸고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장면도 같다.

 

하지만 상대역으로 등장하는
인물과 배경과 역할은 전혀 달랐다. 

 

인물로는 정보기관원이 아니라 비상계엄군이 맡고
배경으로는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소위 신군부 세력이 맡았다. 

 

역할은 그야말로 닥치는대로 연행하고
무지막지하게 다루는 것이었다.

 

식순을 진행하자마자 단상 쪽에서부터
의자 내던지는 소리와 비명 소리로 소란이 일더니
대회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었다.

 

무장한 계엄군들이 쏟아져 들이닥치면서
참석자들을 마구 끌어내고 장내를 휩쓸었다.

 

이윽고 짙은 안개에 쌓인 어둠의 세력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비상계엄군은 함 선생님을 비롯해서
목사님과 교수와 문화예술인 청년학생들을
닥치는대로 끌어갔다.

 

끌려간 이들은 누구랄 것 없이 군화발과 5파운드 몽둥이로
갖은 고문과 능욕으로 처참하게 수모를 당했다.

 

함 선생님 역시 80 노구에도 불구하고
박 정권 치하에서도 들어본 적 없던 수모를 적잖이 당하셨다.

 

그리고는 소위 '명동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이라 이름하여
140여 명이 구속 구금되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다시금 돌이켜 보면
계훈제 선생님과 김진주 사모님의 혼례식은
약력과 활동 경력 등 모든 기록에서 드러나지 않고
겸손하게 숨어 있어 흔적없이 빠져 있지만


이르르게 되기까지 저간의 사정도 그러려니와
행사 자체가 이 땅의 민주화와 민족 사회 운동에
'역사적 사건'으로 남아 길이 기억되어서 마땅할 일이다.

 

(이상 계훈제 선생님 영전에 부치는 추모의 글 / 씨알의 소리)


 

2 부 / 28. 10.26과 비상계엄령



나는 그 당시 유신 독재 권력을 무너트리려면
지금까지보다도 더욱 굳은 각오로
더욱 치열하게 싸워 나가야 하고 그러니만큼
더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불어서 독재 권력과의 싸움을
장기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갈
훈련과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으로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내가 후배들에게 강조한 길은 두 가지였다.

 

독재 권력과 치열하게 싸워 구속되는 길이 우선이요
또 하나는 청년 학생이나 지식인들의 힘만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으니만큼 노동 현장으로 들어가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장기적으로
투쟁 역량을 키워 내는 길이다.

 

이를테면 한편으로는 대중들의 공감과 동의를 이끌어 내는
공개 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비공개 조직을 확대하고 심화시키면서
장기적으로 투쟁 역량을 쌓아 가는 일을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후배들에게 유신 체제를 무너트리기 위해서는
지금의 상황에서 치열하게 싸우다 감옥에 가든지 아니면
노동 현장으로 들어 가는 길이 최선이라고 강조해마지 않았다.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을 때 나는 묘하게도
군대에서 제대하고 연세대에 복학하자마자
살벌한 '10월 유신'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정국이 숨막히는 공포로 주눅들던 7년 전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까지 견디어 온 세월보다
훨씬 더 혹독한 탄압과 시련이
아직 신혼 살림의 꿈에 젖어 사는 우리 가정에
곧바로 불어닥칠 것같은 예감이 들었다.
 
정국은 어수선했고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거대한 어둠의 세력이
박 정권 이래로 구축해 놓은 제단을 싹 쓸어버리고
우리 아니면 누군가를 살육해서 희생 제물로 삼을 것만 같았다.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고
누군가가 받아 마실 수 밖에 없을 운명일 것 같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어두움의 세력이 쳐놓은 장막으로
당당하게 뛰어들 수 있는 양심적 세력이 필요할 것 같았다.

 

몸서리치는 공포와 탄압에 굴하지 않고
능히 저항할 수 있는 결단을 모으고 힘을 합하여 일어서는 일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때까지 10여 년 동안 나는 이 땅의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합리적 이성으로 비판하고 당당한 양심으로 저항하는 일을 업으로 삼다시피 해 왔다.

 

그렇게 젊음을 단련해 오고 그런 이들과 교류하고 행동해 왔다.
그런 일로만 관계를 삼고 생활해 왔다.

 

나는 빠져 나갈 구멍도 없으려니와
빠져 나갈 수도 없고 빠져 나가서도 안 된다고 다짐했다.

 

거대한 어둠의 세력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한발한발 서서히 다가 오고 있는 듯했다.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만큼 시시각각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그 때 나는 앞으로 세상이 뒤바뀌게 되는 과정에서
엄청난 혼란과 탄압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겠구나 여겨졌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감옥을 가게 되겠구나 하는 느낌이 순간적으로 다가 왔고
요시찰로 분류되어 항상 감시를 받고 있던 나로서는
피할려고 해도 피할 수 없을 거라고 여겨졌다.

 

당시 공개 투쟁을 담당했던 민주청년협의회(민청협)에서는
박 대통령의 국장을 반대해야 하고 치루지 못하도록 싸워야 한다고 적극 주장했다.

 

또한 당장에 유신헌법 철폐 운동을 전개해 나가면서
후임 대통령의 선출도 유신헌법에 따른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헌법을 개정하고 개정된 민주헌법에 따라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서 집회를 개최하고 모든 역량을 결집해서
적극적으로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는 민청협의 주장이 원칙적으로 옳은 말이겠지만
지금은 싸워야 할 때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 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혼돈의 상황에서
박정희보다도 더 악독한 세력이 등장할는지도 모르는 판국에
섣부른 행동은 어둠의 세력에게 탄압의 빌미가 될 수 있으니만큼
적이 구체적으로 드러날 때까지 좀 기다려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청협을 이끌던 조성우는 하루빨리 유신헌법을 철폐시키고

민주정권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윤보선 전 대통령도 같은 입장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결혼식을 가장한 대중 집회를 계획하고 있었다.
나는 이 계획에 대해서 방법적으로 정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전술적으로 무모한 모험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민청협 측에서는 내게 아무래도 함 선생이 주례자 역할을 맡아주셔야 하겠는데
어떻게해서든지 허락을 받아서 국민대회가 열리는 날에 꼭 모시고 나와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반대하지만
함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동의하시면 모시고 나오겠다고 약속했다.

 

10.26 사건이 났을 때 함 선생님은
스위스와 독일을 거쳐 카나다와 미국을 순방 중이셨다.

 

나라 안팎을 뒤흔드는 10. 26 사건 소식을 접하자
함 선생님은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했다.
나는 함 선생님을 찾아 뵙고 저간의 일들을 말씀드렸다.

 

"그렇지 않아도 안병무 박사가 해위(윤보선) 선생 댁에 들렀다가
여기에 왔다 갔는데 다들 해야 한다고 그러더라는군...
어떻게 해야 좋겠는지..."

 

"글쎄요... 도무지 앞날을 예측할 수 없으니...
제 생각에는 무슨 조짐이 먼저 보일 때까지
관망해 보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그래도 지금 시점에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들 그러는데..."

 

"그럼 국민대회 대회장인 주례 역할을 허락하시지요.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다들 그래야 한다고들 하니......"

 

나는 민청협에 함석헌 선생이 대회장인 주례를 허락하셨으니
그리 알고 계획대로 진행하라고 알렸다.

 

거사일인 11월 24일 내가 함 선생님을 모시러 갔을 때
선생님은 노기를 잔뜩 띈 표정이셨다

.

"아니... 주변에서 들려오는 얘기로 오늘 행사가
결혼식이 사실로 있는 게 아니고 가장해서 하는 거라면서?"

 

"예......"

 

"그러면 안 돼!... 그렇게 속임수를 쓰면 안 돼!...
나라를 위해서 한다는 사람들이 어찌 그리 할 수 있어!...
지금이라도 당장 중지하라고 그래!...
어찌 행사를 거짓으로 가장해서 치루는 일로
백성들을 따라오라 할 수 있겠어?... 그러면 못 써!...
씨알들이 지켜 보고 있는데 그렇게 하면 안 돼!...
바른 방법을 찾아야지!... 얼른 그만두라고 그래!..."

 

함 선생님은 거의 노발대발이셨다.

 

"지금으로는 어쩔 수 없습니다...
국민대회 대회장이 선생님 명의로 인쇄된 선언문도 이미 다 나왔을테고요...
사람들도 각계각층에서 꽤 많이 모이도록 되어 있나본데...
모든 준비도 다 끝났고 이제 진행만 남아 있는 상황에서 시간도 점점 다가 오고요...
이제 와서 그만둔다는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나는 차마 함 선생님을 바라뵙지 못하고
방바닥만 내려다 보면서 더듬거리며 말했다.

 

"허...참...... 이거 원......
이를 어쩐다...... 내 원 참......"

 

함 선생님은 도무지 난감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셨다.

 

"여기까지 온 마당에서야
선생님께서 싸 안고 가셔야 하지 않을까요?"

 

함 선생님은 한참을 그러시더니
기왕에 갈 꺼면 빨리 일어나자 하신다.
나는 함 선생님을 모시고 명동 YWCA 회관으로 향했다. 

  

 


 

2 부 / 29. 명동 YWCA 위장 결혼식 사건

 

10. 26사건 이후 정국은 급작스러운 변화로 큰 혼란에 빠졌다.

유신독재 정권의 몰락과 더불어 민주 정부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군부를 등에 업고 거대한 어둠의 세력이 등장할 꺼라는 비관론도 있었다.


 비관론과 기대론이 뒤섞이면서 전망이 불투명해졌지만

11월 10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보궐선거 실시방침이 발표되고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이 후보로 나설 것이 분명해지면서

군부독재에 협력했던 최규하의 대통령 임명에 따른 비관론이 자연스럽게 힘을 얻기 시작했다.


당시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권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통해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

이런 생각에 비관적 입장이었던 민청협과 윤보선, 백기완 등 재야 인사들은

서울 명동 YWCA강당에 모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잠정 대통령 선출저지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대통령 직선제, 유신철폐와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결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당시는 삼엄한 계엄령 치하였다.

이런 삼엄한 상황에서 직접적으로 시위를 열게 되면

군부를 자극하여 돌이킬 수 없는 충돌과 희생이 따를 것이라는  판단이 재야 내에서 있었다.

그래서 결혼식으로 위장한 집회를 계획하게 된다.


"홍성엽 군과 윤정민 양이 여러 어른과 친지를 모시고

혼례를 올리게 됨을 알려 드립니다.

즐거운 자리에 함께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민청협 운영위원 홍성엽이 신랑 역할을 맡았다.

신부는 민정(民政)이란 말을 뒤집어 가상의 신부 윤정민을 만들었다.

홍성엽의 어머니도 아들의 가짜결혼식을 이해하고 참석을 약속했다.


▲ 신랑 역할을 했던 홍성엽


홍성엽은 1974년 연세대학교 재학 중 나와 함께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0년을 언도받고 복역 중 1975년 2월 15일 석방된 후

민청협 창립과 함께 총무국장 등 운영위원을 맡아 누구보다도 조직에 헌신해 왔다.


명함 크기의 작은 청첩장이 계엄당국의 눈을 피해

재야 민주 인사와 학생들에게 은밀히 배포됐다.


10.26 시해 사건이 난 지 한 달도 채 못 되는 11월 24일
명동에 위치한 YWCA 대강당으로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삽시에 6백 여 명의 각계 각층 인사들이 모였다.
대강당은 입추의 여지가 없이 사람들로 꽉 메워졌다.

 

박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체육관에 모여서
후임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을 저지하고 하루빨리 거국 민주 내각을 구성해서
민주헌법을 먼저 세운 다음에 새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민주적으로 선출하자는
국민대회 행사에 참석한 분들이다.
 
주례라고 광고로 나간 대회장은 함석헌 선생이 맡으셨다.

 나는 일찌감치 함 선생님을 모시고 앞자리에 앉았다.


▲ 1979년 11월 24일 서울YWCA 위장결혼식 현장 사진. 함석헌 선생님 한 사람 건너에 필자 모습.


순서가 진행되고 사회자인 기독청년협의회(EYC) 회장 김정택이 결혼식 시작을 알리자
신랑 홍성엽이 입장했고 예상대로 신부의 입장은 없었다.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유인물이 뿌려지기 시작했다.
참석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우리는... 신군부세력의 계엄체제 때문에 위장결혼식을 하게 됐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보궐선거를 반대한다.”


준비위원장 박종태(전 공화당 국회의원)가
유신 체제의 꼭두각시인 통대에 의한 대통령 선출을 반대한다는 취지문을 낭독했다

구호를 선창하고 복창할 때 분위기는 사뭇 터질듯 부풀어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대회장 단상 쪽에서 비명소리와 의자를 내던지는 소리로 소란이 일더니
대회장은 삽시에 아비규환이 되고 말았다.

 

미리 장막을 쳐놓고 호시탐탐 노리던 계엄군들이
쏟아져 들이닥치면서 참석자들을 끌어내고 장내를 휩쓸었다.

 
이윽고 어둠의 세력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계엄군은 함석헌 선생님을 비롯해서
개신교 목사님과 신부님, 교수와 문인, 청년 학생 등 140여 명을 연행해 갔다.


▲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보안사 서빙고 대공분실게서 수사를 받은 함석헌 선생


▲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수경사에서 재판을 받은 윤보선 전 대통령

 

YWCA 현장에서  98명이 연행되었고

밖으로 빠져 나온 참석자들이 코스모스백화점 앞에 모여 “유신 철폐”,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 선거 반대” 등을 외치며

조흥은행 본점까지 거리시위를 벌이다 다시 44명이 체포됐다.


 거리시위 중 청진동 도로변에서 검거된  나는

종로경찰서를 거쳐 삼각지에 소재한 육군본부범죄수사대(CID) 지하실로 연행되어 곤욕을 치른 후
서빙고 보안사 대공분실로 다시 이첩되었다.

.도착하자마자 우선 몽둥이로 흠씬 두둘겨 맞았다. 







고문하던 계엄군은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을 모셨던 경호병들이라 했다.

 그들 말로 자기들은 신장 180센티미터 이상에다 

운동으로 몸이 단련된 태권도와 유도 유단자들이라 했다

.

학력은 고졸 이하로 머리 굴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충성을 할 수 있는 자들 가운데
엄격한 신원 조사를 거쳐 선발되었다고 했다.

전군을 통틀어 가장 강하고 충직스런 군대라 했다.

 
박 대통령을 시해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20여 일 동안 피똥을 싸고 엉금엉금 기어다니다가
명줄만 붙어서 남한산성으로 간 지 이틀밖에 안 됐다고 했다.

 

김재규 일당을 보내 놓고 오랜만에 좀 쉴려던 참이었는데
피곤한 몸 쉬지도 못하게 웬 지랄들이냐고 했다.

 위대한 영도자이신 각하께서 서거하신 지 한 달도 안 되었는데 웬 난리냐는 거다.

 

가뜩이나 각하 경호를 못해드려서 죽을 맛이던 참에 유신을 반대하고 각하를 모독하는 놈들이나
다 때려 죽이고 자폭하고 싶은 심정이라 했다.

 

10.26 사태가 나자마자 영문도 모른 채 극비리에 여기로 이동되어 왔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네들이 알면 무슨 난동을 벌일지 두려웠던지
갑자기 이동되어 분하고 억울해서 잠도 안 온다고 했다.

자기네들은 어떤 작전도 감행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분기탱천하는 지경에서 연행된 이들 모두가 생사를 알 길 없는 궁지로 빠져들고 있었다.

함께 연행된 백기완 선생은 몇 번을 혼절했다 깨어났다 하더니 정신착란증과 협심증에 빠졌다.




김병걸 교수님은 온몸뿐 아니라 손과 발, 얼굴까지
새카맣게 피멍이 들고 고막이 터져나갔다.

 

▲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보안사 서빙고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하고 구속된 김병걸 교수


민주청년협의회(민청협) 회장이던 이우회는 온몸이 피투성이인채로 기절을 거듭하면서
정신이 오락가락 했다.

 


끝내 한밤중에 계엄군들의 군화 발자국 소리가
저벅저벅 소리를 내며 요란스럽게 몰려 왔다.

 

이우회의 숨소리가 깔닥깔닥하면서
심상치 않다고 저희들끼리 술렁거렸다.

 

치료하거나 응급 처치할 생각은 도무지 없는 듯
잘 지켜보고 있다가 숨이 멎으면 빨리 보고하라면서
담당 근무자에게 지시하고 저벅저벅 사라졌다.


지금 환경운동연합을 이끌고 있는 최열은 참으로 맷집이 좋았다.
그토록 고문 당하고 두들겨 맞고서도 기절을 안했으니...

고문하는 자들도 그렇게 매를 두드려 맞고도 오뚜기처럼 오똑오똑 일어나더란다.



홍성엽은 평소 하얗고 깨끗한 피부에 부드러운 미남형으로

자세 또한 늘 흐트러짐 없이 올곧았다.


나는 그 맑고 티없는 피부가 상반신 하반신 모두  

진한 자주빛 가지색으로 변질된 모습을 보고 가슴이 미어졌다.


▲ 홍성엽,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2005년 53세의 나이에 지병인 백혈병으로 운명했다.


양순직, 박종태 전 국회의원과 임채정 전 국회의장 등도 모두 같은 지경이었다.

고문자들은 내게 조사실 벽에 시뻘건 피가 짓뭉개진 것을 가리키며

박종태 전 의원이 고문당한 흔적이라고 으쓰대듯 말했다.





목사님들과 신부님들, 교수님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연행된 이들은 누구랄 것 없이 군홧발과 몽둥이

온갖 고문과 욕설로 참혹하게 능욕당했다.


보안사 서빙고 대공분실에 나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1달 여를 조사받고

1975년 10월 서울의대 간첩단 사건 때 서너 차례 연행되고

긴급조치 9호 위반 유언비어 유포죄로 아버님과 함께 20일간 조사받은 적이 있다.


그러니만큼 조사관들을 대개 알고 있는 사이였다.

그 중에는 박형규 목사님 사촌동생도 있었다.


그런데 박형규 목사님 자제분인 박종렬 목사가

나와 함께 연행되어 조사받고 있었다.



5촌 당숙이 되는 그 조사관은 내가 조사받는 방을 자주 들락거렸다.

조카 박종열 목사가 와 있는데 자기는 그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한다는 거다.


그래서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는데 조카나 형님이 그걸 이해할 수 있겠느냐면서 한걱정이다.

덕분에 당숙에게 박종렬 목사가 받아야 할 보호를 오히려 내가 덕을 본 셈이 되었다.


10.26 사태로 계엄령선포 이후 한 달이 채 안 되어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이 일어났고

대회장 등 조직 역시 공개적으로 발표되었기 때문에

수사할 내용은 그리 복잡하지도 많지도 않았다.


일주일 남짓 지나자 수사는 모두 마무리되었다.

다만 저들이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데 시간이 더 필요했던가 보다.


조사할 내용도 없이 조사실에서 조사관과 얼굴을 맞대고

하루이틀 지내다 보니 조사받는 나는 물론이거니와 조사관 또한 지루하기 이를데 없다.


안면이 있는 조사관들이 내가 있는 조사실로 모여들었다.

거기에서 나는 김재규 수사와 관련하여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들은 단편적인 이야기 조각들을 열거해 본다.


. . . . . .


- 김재규가 서소문 소재 범진사에서 서빙고로 연행되자마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삼일을 죽도록 얻어 맞았다는 이야기


- 김재규 사건과 관련하여 심수봉과 신재순 뿐만 아니라

채홍사 박선호가 주선하여 박 대통령을 모신 이들도 샅샅이 불러다 조사했다는 이야기


- 조사를 받던 중 박정희 장례식을 알리는 묵념 소리가 나자

바로 무릎을 꿇고 청와대 방향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갖추더라는 이야기


- 요정 선운각 마담 몸뻬아줌마(장정이)와 김재규의 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몸뻬아줌마는 본래 박정희와 친했는데 정치적 감각이 아주 탁월해서 박정희가

솔직담백하고 약간은 무뚝뚝한 김재규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 후 김재규와 몸뻬아줌마 장정이는 애인 사이가 되고 둘 사이에 아들도 낳았다.

박정희 역시 본부인에게 딸 하나 있고 아들이 없던 김재규와

몸뻬아줌마 사이에 낳은 아들을 대견해 하고 귀여워했다.

아들의 생일에는 한동안 잊지 않고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박정희가 개각을 단행하면서 청와대 비서실장에 김계원, 경호실장에 차지철,

그리고 중앙정보부장에 김재규를 임명하자 몸뻬아줌마는 김재규에게


"각하께서 인사를 잘 못하셨다.

차지철 성질에 김재규 당신과 사사건건 부딪칠게 뻔한데 그러다가 큰 사고라도 날까 우려된다.

차라리 당신이 비서실장으로 가고 김계원을 중앙정보부에 앉혀야 좀 마음이 놓이겠다.

당신이 건의하기 어려우면 내가 직접 각하께 건의드려 보겠다" 고 했다.


이 뿐만이 아니고 몸뻬아줌마가 연행되어 와서

그동안 정부 인사에 대해 박정희에게 건의한 내용들을 들어보니

정치적 감각이 제갈공명 못지 않게 탁월하더라.


몸뻬아줌마는 김재규의 거사에 대해서는 전혀 낌새를 채지 못했다고 하더라.

다만 거사 이틀 전에 찾아와서 아들을 한동안 꼬옥 안아주더란다.

. . . . . .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훗날 나는 몸뻬아줌마 장정이가 잠적해 지내고

아들을 키우면서 절을 짓고 시주하며

김재규와 박정희의 명복을 빌어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치떨리고 몸서리치는 지경에서

나는 천만뜻밖인지 다행인지 고향 후배를 만나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나와 한동네에 살았다고 했다.
나의 어머니께 예방 주사를 맞고 자랐다고 했다.

 

내가 대학에 다니면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구속되어
신문에 가끔씩 큼직큼직하게 보도되는 것을 보고 들으면서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다닌 후배라고 했다.

 

태권도와 축구 주특기로 청와대 경호실에 차출되었는데
이제 제대 말년으로 고참이라 했다.

 
덕분에 나는 극한 상황을 다소나마 모면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막막한 지경에 처했을 때 나에게는 이처럼 뜻밖의 인연이 자주 있어 왔던 것 같다.



 

2 부 / 30. 고향에 대하여



처음으로 가족의 품을 떠나 군에 입대해서
신병 훈련을 마치고 운전병 교육을 받을 때
나는 같은 동료 교육생들에게 돈을 갈취해서
상병인 구대장이나 교육을 가르치는 고참 사병에게 바쳐야 하는
학생장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한두 번 정도는 시도해 보았지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자
나는 여기저기 끌려 다니며 무서운 매질과 기합을 당해야 했다.
참으로 막막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그 때 뜻밖에도 부대장을 만날 기회가 주어졌고
만나 보니 연세대 동문 선배였다.

 

그리고는 바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저승사자 먹이가 된 것 같던 학생장의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남산 중앙정보부에 처음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할 때도 그랬다.
당시 학생운동을 감시 감독하는 책임자로 있던 엄화섭 과장이
내 고향 출신이었고 그 누님이 오산에서 나와 이웃에 살고 있었다.

 

서빙고 보안사 대공분실에 처음으로 끌려 갔을 때에는
담당 수사관이 평소 내가 가까이 모시고 존경해 마지않는
박형규 목사님의 사촌동생이었다.

 

서소문에 위치한 보안사 분실 범진사에
처음으로 연행되었을 때도 그랬다.

 

들어서자마자 사방 벽과 복도에서
고문당하고 비명지르는 소리로 잔뜩 소름이 끼쳐 오르는데
담당 수사관이 나를 벌거벗기고 군복으로 갈아 입히면서
우선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으라고 잔뜩 협박을 주고 나갔다.

 

무지막지한 고문에 또 시달리겠구나 마음 졸이고 있는데
수사 책임자가 들어오더니 오랜만에 고향 사람 만난다면서
화성 출신으로 수원고등학교를 졸업했단다.

 

이밖에도 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던 때나 막막한 상황에서
나는 뜻밖에도 고향에 인연이 있는 분들을 만나곤 했다.

 

고향을 그저 막연하게 서울에 두고 있는 사람으로는
느낄 수 없는 묘한 기분이다.

 

귀소 본능이라 할까?......
태어 나서 자라고 배운 곳을 그리워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 식물 등 모든 생명체가 지닌 본능적 속성일께다.

 

강에서 부화한 치어는 바다로 내려가 처음에는 연안에서 지낸다.

 성장함에 따라 연어가 되어 점점 더 멀고 깊은 대양으로 이동하며
세상을 누비고 다니다가 완전히 성숙해 지면 산란을 위해서 태어난 강으로 다시 돌아 온다.

 

이를 일컬어 모천회귀(母川回歸)라 하지 않던가...

생명의 자리, 삶의 터전을 바꾼다는 것은
그저 장소의 이동이나 환경의 변화뿐만 아닐 것이다.

 

거기에는 생명체로 존재하기 위한 적응이 필요할 것이고
그러러면 끈질기고도 팽팽한 긴장이 필연적으로 뒤따를 것이다.

 

생명의 모체요 보금자리인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바로 역경과 고난을 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릴 적 고향을 하염없이 그리워하는 것이 아닐까?

'고향'하면 나는 머리 속에 정지용의 시가 떠오른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운 고향은 아니더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 끝에 홀로 오르니


한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이상 정지용 '고 향' 전문)

 

이 시에서 고향은 이미 어릴 적 고향이 아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고향은 점점 황폐해 가고
삶에 찌들릴대로 찌들린 모습으로 메말라 있는 모습이다.

 

사정은 요즘도 마찬가지리라.
개발이다 산업화다 해서 누구에게나 다시 가 보는 고향은
이미 옛 고향인채로일 수 없겠다.

 

이는 고향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릴 적 고향은 어머니의 품안처럼 편안하고 따사로운 삶의 보금자리로
우리의 마음 한가운데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우리 땅 우리 민족의 토속적 정서를 가장 아름답고 섬세하게 다듬고 빗어내던 정지용은
해방 후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 과정에서 좌익계 조선문학가동맹에 편을 들어 활동한 탓으로
분단 이후 남한 정부에서는 아름다운 서정시를 포함해서
그의 작품 모두 보고 읽고 듣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근 반세기가 지난 1990년대에 들어서야
그의 탁월한 작품들이 소위 문화적 해금 조치로 풀려나게 되었다.

 

하지만 앞서 소개한 그의 시 '고향'에
채동선(蔡東鮮)이 곡을 붙여 널리 애창되던 오리지널 가곡은
분단 이후 어용 작가 이은상(李殷相)의 시 '그리워'가
번안되어 대신 불려지면서 아직도 왜곡된 채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한편 다행스러운 일은 해금 조치 이후 그의 서정시 가운데 '향수'가
박인수 이동원의 듀엣으로 만들어져 널리 애창되고 있는 점이다.

 

나는 출퇴근할 때나 목욕탕 사우나실, 화장실 등에서
노래가 된 그의 시 '고향'과 '향수'를 익히기 위해 입속으로 자주 부르곤 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으으으 음)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내 마음 ~ )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빛 ~ 그리워 ~ )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꿈엔들 꿈엔들) 잊힐리야





 

2 부 / 31. 함석헌 선생님의 눈물



내가 육본 CID를 거쳐 서빙고에 도착했을 때
함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없이 묵비권으로 일관하고 계셨다.

 

하기사 함 선생님께서 윤보선 전 대통령이나
안병무 박사 이름을 말할 분이 아니시니 그저 온갖 수모만 당하고 계신 것이다.

 

사병들을 통해서 들리는 소문으로 함 선생님께서 수염을 뽑혔다는 말을 듣고
나는 그만 선생님께 끼칠 누를 상상하면서 감당할 수 없는 회한에 빠져 있었다.

 

여러 모양으로 이리저리 생각하던 끝에 나는 함 선생님이 계속 함구 중에 있을 것이고
내가 자칫 불필요한 말을 하게 되면 선생님께 더 큰 누를 끼칠 염려가 다분한 터여서
수사관의 비위에 맞추어 요구될 성부른 내용만을 중심으로 거짓 진술을 하기로 작정했다.
 
'이 지경에서 선생님을 편하게 해드리려면 모든 걸 내가 싸 안고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나름대로 각본을 만들기로 했다.

 

민청학련 사건 때 고문과 취조를 호되게 당한 이후 내가 터득한 요령 가운데 하나는 

진실이든 거짓이든 상대방보다 내가 먼저 말해 버리면 수사 방향을 바꾸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수사관들은 피의자가 자기의 범죄 사실을 실토하지 않고 계속 숨기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피의자가 숨길려고 하는 바로 그 범죄 사실을
잘 파헤쳐 내는 수사관이야말로 명수사관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대목에 수사관의 결정적인 헛점이 있다.

그것은 피의자가 범죄 사실을 숨길려고 할 경우에나 해당되는 일이다.

 

만약에 피의자가 다른 사람의 범죄 사실까지 뒤집어 쓰겠다고 작정한다면

수사관은 사실을 제대로 밝혀 내지 못하고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나는 붙잡혀 갈 때마다 고문도 지긋지긋하게 받았지만
나중엔 담당 수사관들과 친근해 지는 경우가 많았다.


미행하고 감시하는 형사들과도 마찬가지다.

진실이건 거짓이건 그들이 원하는 범죄 사실을 남에게 떠넘기지 않고 되도록이면 내가 싸 안으면서
나름대로 아귀가 맞게 진술을 해 주니까 그들은 일단 보고서를 쉽게 쓸 수 있는 것이다.

 

보안사 대공분실, 소위 서빙고 호텔을 일곱 차례 쯤 연행되어 갔는데

그럴 때마다 그들이 파악한 사실들을 다른 사람에게 미룬다거나
내가 하지 않았다고 발뺌을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이 한 것까지도 굳이 내가 한 것이라고
우겨가면서까지 시원시원하게 진술을 하니까 수사관들에겐 내가 아주 편한 상대인 것이다.

 

나는 일단 잡혀 가게 되면 나름대로 육하원칙에 맞게 시나리오를 만들어서
수사관들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는데 일가견을 가지게 되었다.

 

"함 선생님은 젊은 사람들이 결혼식을 위장으로 해서 행사를 벌이는 것에 대해 끝까지 반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거짓 역사를 만든다고요.
그런데 내가 그 날 꼭 참석하셔야 한다고 간곡히 말씀드려서 억지로 모시고 갔습니다.
행사 대회장을 맡으신 것도 내가 함 선생님 댁을 방문해서
그냥 일반적인 결혼식 주례를 맡는 것처럼 말씀드려서  허락하시게 된 겁니다."
 
나의 거짓 진술로 함 선생님이 어떻게 국민대회 대회장이 되었고
어떤 경로로 참석하게 되었는지 일단 전말이 밝혀지자
수사관들은 다행이다 싶던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수사관들이 내 진술 내용을 함 선생님께 들이밀고 추궁을 계속하자

함 선생님은 "이건 사실이 아니다"라며 강력하게 부인하셨다.

 오히려 수사관들이 나를 잡아 넣기 위해 꾸며 낸 사실로 생각하시고 더욱 세차게 부인하셨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수사관들은 내 앞에서
함 선생님에 대해 별스런 욕지거리를 퍼부어 대면서 음해했다.

듣다못한 나는 수사관에게

 

"내 진술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이 어떻게 이걸 인정하시겠습니까?
인정하시게 되면 제자가 곤욕을 치르고 감옥에 가게 생겼을텐데...
제자를 어떻게 곤경에 빠트리고 감옥으로 가게 합니까.
당연히 인정을 안하실 테지요.
그러니 가서 선생님께 간곡하게 부탁해 주시오.
제 진술 내용을 그대로 베껴 써달라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 선생님은 전혀 인정을 안 하셨다.
그래서 나는 내가 직접 진술한 것이라는 게 확실히 전달되도록 간곡한 편지를 써서
수사관 편으로 함 선생님께 전달했다.

 

선생님은 내 마음을 짐작하고 느끼셨을 것이다.
그래서 들어맞지도 않는 내 진술서를 사실로 부인하다가

거짓으로 시인해야 하는 지경에 처하셨을 것이다.

 

선생님의 모습은 한동안 굳어졌을 것이고
그러다가 고개를 내리고 한참을 '생각'에 잠기시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는 나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 얼굴을 붉히시고
어쩔 수 없이 시인하면서 옮겨 적었을 것이다.

 

쪽지를 전달하고 온 수사관은 "이제 됐다!"며
내게 더 이상 추궁을 하지 않고 편하게 대해 주었다.

 

이 일은 신문과 방송에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 한 사실이 동참자들의 진술에서
명백히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당국에 의해 검거되자 태도를 돌변하여
...... 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극구 부인하다가 급기야
최민화의 진술 내용을 열람한 연후에야 얼굴이 붉어지면서 고개를 떨군 채
사실을 시인하는 비굴성을 보였다......"


"...... 소위 양심 세력을 자처하는 원로 배후 조종자들이
당국자 앞에서 자구적 책임 전가에만 급급하는 추태를 연출하는 사실로서......"


민청학련 사건 동료 가운데 지금은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이종원이
바로 이 즈음에 전두환과 노태우 장군 등등 몇몇 분들의 자제들에게 몰래바이트로
가정교사를 하고 있었단다.

 

당시 이종원이 학부모인 이순자 여사를 자주 만났었는데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후에  이순자 여사가 함 선생님에 대해서
상당히 격분해 마지않더라는 것이다.

 

민주 인사니 양심 세력이니 하는 분들이 도대체 그럴 수가 있느냐는 거다.

남편(전두환)한테 들어 보니까 청년학생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태도가 비굴하기 짝이없더라는 것이다.

 

이처럼 진실이 왜곡된 채로 이 사건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신문과 방송에 선동적으로 보도되면서
방방곡곡을 들쑤시고 누벼댔다.

 

결국 함 선생님의 고초를 조금이나마 덜어 드려야겠다는 내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진술을 번복하는 비굴한 사람이라는 소문만 온 세상에 떠돌게 했으니
나는 선생님께 씻을 수 없는 누를 끼친 결과가 되어버렸다.

 

이 진술로 말미암아 함 선생님을 대신해서 이 사건의 상층 지휘부로 분류된 나는
1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연행된 지 22일 만에 8순이 다 되신 함 선생님은 풀려 나고
나는 구속되어 비상계엄군법회의로 송치었다.

 

댁으로 돌아오신 함 선생님은 그날 많은 분들 앞에서
내 얘기를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더욱 죄송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5. 월간 <씨알의 소리>


그후 나는 함석헌 선생의 부름을 받고
월간 <씨알의 소리> 편집일을 맡아 하게 되었다.

 

4.19혁명 10돌이 되는 날을 기념해서 창간된 <씨알의 소리>는
50년대와 60년대 우리나라의 지성사를 대표하던 종합 월간지
<사상계>가 강제 폐간된 이후로
무지막지한 군사 정권을 합리적 이성으로 비판하고
당당한 양심으로 저항하는 시동이요 보루였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이 일을 감당하기를
게을리할 수 없었다.

 

그 당시 <씨알의 소리>를 펴내려면
원고를 모아서 조판소에 넘기고
초교 재교 교정을 본 뒤 문화공보부 출판과에서
사전 검열을 거쳐야 했다.

 

그러다보면 논문이건 수필이건 시건 가리지 않고
문맥이 맞건 맞지 않건 아랑곳없이
검열자 마음대로 중간중간 자르고 날려 버리곤 했다.

 

때로는 작품 한 편을 몽땅 잘라버리기도 해서
전체 분량의 절반 이상이 불허되는 일도 허다했다.

 

함 선생님은 당국의 이런 조치를
참으로 못 견디게 괴로워 하셨다.

 

인간의 정신으로 빗어 낸 창작물이
풍성하게 자라고 꽃피울 수 있도록
당국에서 권장하고 지원해야 마땅한 일이거늘
어찌 이처럼 무지막지하게 자르고 꺽고
말라죽여버릴 수 있느냐는 생각이시다.

 

나는 당국의 이런 야만적 관행과
매달마다 살벌한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저들은 내가 스스로 길들여지기를 바랐겠지만
나는 저들의 검열을 피하고 돌파해 내는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해 갔다.

 

1977년 늦여름에 나는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문익환 목사의 옥중시 '꿈을 비는 마음' 원고를
사모이신 박용길 장로님께로부터 받았다.

 

예사롭지 않은 이 시를
<씨알의 소리>에 실을 수 없을까 이리저리 골몰하던 차에
나는 작가 이름을 '늦봄'이라 쓰고
당국의 검열에 걸려서 모자라는 분량을 추가로
촉박하게 채워 넣는 글에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

 

그 당시 '늦봄'이 누구인지 알 턱이 없을
당국의 헛점을 파고 든 것이다.

 

검열을 무사히 피하고 인쇄 과정에서 나는 작자를
'늦봄 문익환'이라고 큼직하게 써 넣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늦봄 문익환의 '꿈을 비는 마음'은
원본 그대로 <씨알의 소리> 1977년 10월호에
온전히 실리게 되었다.

 

연세대에서 강제 해직 중에 있던 성내운 교수님은
이 책을 받아들자마자 그 날로 단숨에 외우셨단다.

 

그리고는 모임이나 집회가 있을 때마다
한동안 단골로 이 시를 낭송하시곤 했다.


꿈을 비는 마음

개똥같은 내일이야
꿈 아닌들 안 오리요마는
조개 속 보드라운 살 바늘에 찔린듯한 상처에서
남도 몰래 저도 몰래 자라는 진주같은
꿈으로 잉태된 내일이야
꿈 아니곤 아는 법이 없다네

그러니 벗들이여
보름달이 뜨거든 정화수 한대접 떠 놓고
진주같은 꿈 한자리 점지해 줍시사고
천지신명님께 빌지 않으려나!

벗들이여
이런 꿈은 어떻겠소?

155마일 휴전선을
해 뜨는 동해바다 쪽으로
거슬러 오르다가 오르다가
동해바다가 굽어 보이는 산정에 다달아
국군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던 북녁 땅 한 삽
공산군의 살이 썩은 남녁 땅 한 삽씩 떠서
합장을 지내는 꿈

그 무덤은 우리 5천만 겨레의 순례지가 되겠지
그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다보면
사팔뜨기가 된 우리의 눈들이 제대로 돌아
산이 산으로 내가 내로 하늘이 하늘로
나무가 나무로 새가 새로 짐승이 짐승으로
사람이 사람으로 제대로 보이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그도 아니면
이런 꿈은 어떻겠소?

철 들고 셈 들었다는 것들은 다 죽고
동남동녀들만 남았다가
쌍쌍이 그 앞에 가서
화촉을 올리고
... 그렇지 거기는 박달나무가 서 있어야죠 ...

그 박달나무 아래서 뜨겁게들 사랑하는 꿈
그리고는 동해바다에서 치솟는 용이
품에 와서 안기는 태몽을 얻어 딸을 낳고
아침햇살을 타고 날아오르는
황금빛 수리에 덮치는 꿈을 꾸고 아들을 낳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그도 아니면
이런 꿈은 어떻겠소?

그 무덤 앞에서 샘이 솟아
서해바다로 서해바다로 흐르면서
휴전선의 원시림이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만주로 펼쳐지고
한려수도를 건너 뛰어 제주도까지 뻗는 꿈
그리고 우리 모두
산과 들을 뛰노는 짐승이 되고
신나게 하늘을 나는 새들이 되고
펄떡펄떡 뛰며 날쎄게 헤엄치며
강물과 바다를 누비는 물고기가 되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님 비나이다
밝고 싱싱한 꿈 한자리
멋지고 아름다운 꿈 한자리
평화롭고 자유로운 꿈 한자리
부디부디 점지해 주사이다"

 

(늦봄 문익환 "꿈을 비는 마음" 전문)


이 글을 쓰면서 문익환 목사님은 물론이거니와
이 시를 전국 방방곡곡에서 미국에서 유럽에서
열정적으로 낭송하고 다니시던 성내운 교수님 생전의 모습이
함께 겹쳐져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고 아른거린다.

 

나는 한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열심히 일했다.

 

원고를 청탁하고 재촉하면서
편집과 교정 보는 일로 밤을 지새웠다.

 

좌담회를 기획, 구성하고
녹음된 원고를 푸는 일로
혜숙이와 후배들의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기독교 단체와 사회 단체에서 집회가 있으면
서울이든 부산이든 광주든
반품되어 창고에 쌓인 지난호를 메고 나가 팔면서
정기 구독을 권면했다.

 

월간지를 펴내면서
원고를 청탁하고 채근하고 마감해서
인쇄소에 넘기는 과정은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일'이다. 

 

글을 쓰는 '일' 자체가 거의 모든 분들에게 
신경을 긴장시키고 영혼을 몰입시키는 상태에서라야
생겨나는 창조물일 터인데

 
그런 과정을 시간에 쫓기고 다투어서
부탁하고 채근하고 재촉하는 '일' 이야말로
어찌 피를 말리지 않고 해낼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원고료도 변변치 않거나
아예 맨입으로인 처지에......

 

<씨알의 소리> 편집일을 맡아 하는 동안 나는
피말리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나름대로 '노하우'를 터득하게 되었고


이 '노하우'는 그후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에게 소중한 기반이 되고 무형의 자산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해서 유별나게 기발하거나
희세지재(稀世之才)한 것도 아니다. 

 

굳이 비장해서 혼자만 감추어 두어야 할 일도 아니고
세상에 드러내서 자랑삼을 꺼리도 아니다.

 
결국 아무것도 아닐 '노하우'를

털어 놓자면 이렇다.

 

'상대방의 피를 말려라!  필자의 피를 말려라!'

'필자의 신경을 긴장시키고, 영혼을 몰입시켜라'


'자신은 절대로 피마르지 말고 염체불구해서
필자의 신경과 영혼을 잔인하게 조정하고 통제하라'

 

원고를 받아 들고서부터는 긴장이 풀어지고
다음으로 계속 이어지게 될 초긴장을 가다듬기 위해서
차라리 안식하는 과정이다. 

 

교정 교열을 마치고 모든 원고가 인쇄소로 넘어가면
마치 만삭이 되어 입원한 아내를 산모실 문밖에서 기다리는
남편의 심정과 다를 바 없다. 

 

이 때에 이르르면 '괜찮으냐?'는 염려와 걱정에서부터
'나오게 되느냐?'... '언제 나오느냐?'... 는
기다림과 초조가 <씨알의 소리> 주변을 맴돈다. 

 

그러다가 지친 분들이 제본소로 달려 나와
막 태어나는 <씨알의 소리>를
담고 싸고 묶고 운반하고 발송하는 일을
감격에 겨워 함께 해 낸다.

 

쉴새없이 매일매일을 긴장 가운데 생활하던 나는
이 일로 해서 우리나라 문단과
학계 법조계 언론계 종교계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전문적이고 양식 있는 지성인들과
두루 교류하고 친분을 나누게 되었다.

 

그때까지 이미 40여 년을
하루 1식으로 마감하며 지내온
함석헌 선생의 몸에 익은 습관
일상의 생활과 삶의 모습, 셈의 기준 등등
모든 것과 만날 수가 있었다.

 

함석헌 선생님을 모시고 함께 생활하면서
나는 그 맑은 정신과 인간성,
체질과 버릇까지 닮으려고 애썼다. 

 

"오늘이 내가 난 지 2만 8천 번째 되는 날이야...
사람이 세상에 나서 천 날이 되는게...
1년을 생일로 셈하면 예순 번도 되고 여든 번도 되지만 ......
만 날은 평생에 두 번이나 세 번밖에 안 오는 거고,
천 날이라야 이 삼십 번 정도 오는 거니까
일 년을 생일로 셈하는 것보다 의미가 있다면 있는 거지......"

 

함 선생님은 하루를 기준으로 삶을 셈한다.
함 선생님의 책상머리에 놓여 있는 탁상일기에는
날짜와 요일을 인쇄해 놓은 헤드라인 빈 공간에 매일매일
... 27,998 27,999 28,000 28,001... 이렇게 적혀 있다.

 

그리고 이 탁상일기는
함 선생님의 소중한 유물로 남아 있다.

 

하루하루의 삶을
그 날의 몫으로 온전히 치루려는 마음의 자세일 것이다.

 

선생님은 경험도 없고 미숙하기 짝이없어
온통 잘못투성이 뿐인 나의 일하는 꼬락서니에
이렇게 하라거나 저렇게 해야 된다거나 하던 적이 없었다.

두고두고 보면서 오죽 답답해 견디다 못 했던지 

    

"내가 일본에서 돌아와 아는 이들과 <성서조선>을 만들 때였어...
송 아무개란 사람이 어떻게나 꼼꼼하던지......
종이 비우는 게 아까우니까.....
원고지에 글자를 하나하나 다 세어가지고...
제목에서부터 끝나는 "...다." 자까지를 다 헤아려가지고는
빈 데가 없도록 꼭 채워서 편집을 했드랬지...
그 사람 참 꼼꼼한 사람이었어...
종이가 귀할 때였으니까 그랬을 테고......"

 

하시며 넉넉하게 접어 주던 것이 고작이었다.
반품되어 창고 속에 쌓여 있던
월간 <씨알의 소리> 지난 호(號)를 집회나 모임이 있을 때
정기 구독자를 모집하면서 팔거나 나누어 준 것이
긴급조치 9호 위반이라고 하여
나와 여직원이 1 주일 여 동안
수사 기관에 불법 연행되어 조사받았던 적이 있다.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방침'이라 하여 정해지기로
독자에게 주거나 파는 것뿐만 아니라
창고에 쌓아 두는 것도
긴급조치 9호에 어긋나는 일이라면서
지난호를 모두 가져다가
수사 기관에서 잘 보관해 주겠다는 거다.

 

"왜들 이러는 게야!......
손 팔 다 잘라 놓고 깍을대로 다 깍아 병신 만들어 놓고...
그것도 모자라 어떻하겠다는 게야!...
안 돼! 안 돼! 날 죽이고 가져가라!...
이 늙은 거를 죽이고 가져가!...
내 눈에 흙이 들기 전에는 못 가져 간다!...
차라리 내가 다 불태워 없애 버리지...
내 손으로 차라리 내가......"

 

함 선생님은 성냥을 꺼내 들고
<씨알의 소리>가 처박힌 채 소리없이 쌓여 있는
창고로 달려 들었다.

 

나는 선생님의 눈을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붉게 젖어 물든 눈시울은
어렸을 적 보았던 새끼 잃은 어미소의 것이었고
서린 핏발은 어렸을 적 듣던
호랑이 이야기 속에 담겨진 모습이었다.

 

온 몸을 치떨던 분노의 눈길은
듣던 적대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진하디 진한 광경을
나는 영원히 새겨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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