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 / 25. 월간 <씨알의 소리>



1977년 6월 석방되자마자 나는 함석헌 선생의 부름을 받고
월간 <씨알의 소리> 편집일을 맡아 하게 되었다.

 

4.19혁명 10돌이 되는 날을 기념해서 창간된 <씨알의 소리>는
50년대와 60년대 우리나라의 지성사를 대표하던 종합 월간지
<사상계>가 강제 폐간된 이후로
무지막지한 군사 정권을 합리적 이성으로 비판하고
당당한 양심으로 저항하는 시동이요 보루였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중차대한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혼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씨알의 소리>를 펴내려면 원고를 청탁하고 받아 모아서 조판소에 넘기고
초교 재교 교정을 본 뒤 문화공보부 출판과에 사전 검열을 거쳐야 했다.

 

그러다보면 논문이건 수필이건 시건 가리지 않고
문맥이 맞건 맞지 않건 아랑곳없이
검열자 마음대로 중간중간 자르고 토막나 버리곤 했다.

 

때로는 작품 한 편을 몽땅 잘라버리기도 해서
전체 분량의 절반 이상이 불허되는 일도 허다했다.

 

함 선생님은 당국의 이런 조치를
참으로 못 견디게 괴로워 하셨다.

 

인간의 정신으로 빗어 낸 창작물이 풍성하게 자라고 꽃피울 수 있도록
당국에서 권장하고 지원해야 마땅한 일이거늘
어찌 이처럼 무지막지하게 자르고 꺽고 말라죽여버릴 수 있느냐는 생각이시다.

 

나는 당국의 이런 야만적 관행과
매달마다 살벌한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저들은 내가 스스로 길들여지기를 바랐겠지만
나는 저들의 검열을 피하고 돌파해 내는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해 갔다.

 

1977년 늦여름에 나는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문익환 목사의 옥중시

'꿈을 비는 마음' 원고를 사모이신 박용길 장로님께로부터 받았다.

 

예사롭지 않은 이 시를 <씨알의 소리>에 실을 수 없을까 이리저리 골몰하던 차에
나는 작가 이름을 '늦봄'이라 쓰고 당국의 검열로 잘려서 모자라는 분량을

추가로 촉박하게 채워 넣는 글에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

 

그 당시 '늦봄'이 누구인지 알 턱이 없을 당국의 헛점을 파고 든 것이다.

 검열을 무사히 피하고 인쇄 과정에서 나는 작자를 '늦봄 문익환'이라고 큼직하게 써 넣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늦봄 문익환의 '꿈을 비는 마음'은
원본 그대로 <씨알의 소리> 1977년 10월호에 온전히 실리게 되었다.

 

연세대에서 강제 해직 중에 있던 성내운 교수님은
이 책을 받아들자마자 그 날로 단숨에 외우셨단다.

 

그리고는 모임이나 집회가 있을 때마다
한동안 단골로 이 시를 낭송하시곤 했다.



 늦봄 문익환 / 꿈을 비는 마음

 

꿈을 비는 마음

개똥같은 내일이야
꿈 아닌들 안 오리요마는


조개 속 보드라운 살 바늘에 찔린듯한 상처에서
남도 몰래 저도 몰래 자라는 진주같은
꿈으로 잉태된 내일이야
꿈 아니곤 아는 법이 없다네

 

그러니 벗들이여
보름달이 뜨거든 정화수 한대접 떠 놓고
진주같은 꿈 한자리 점지해 줍시사고
천지신명님께 빌지 않으려나!

 

벗들이여
이런 꿈은 어떻겠소?

 

155마일 휴전선을
해 뜨는 동해바다 쪽으로
거슬러 오르다가 오르다가


동해바다가 굽어 보이는 산정에 다달아
국군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던 북녁 땅 한 삽
공산군의 살이 썩은 남녁 땅 한 삽씩 떠서
합장을 지내는 꿈

 

그 무덤은 우리 5천만 겨레의 순례지가 되겠지


그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다보면
사팔뜨기가 된 우리의 눈들이 제대로 돌아
산이 산으로 내가 내로 하늘이 하늘로
나무가 나무로 새가 새로 짐승이 짐승으로
사람이 사람으로 제대로 보이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그도 아니면
이런 꿈은 어떻겠소?

 

철 들고 셈 들었다는 것들은 다 죽고
동남동녀들만 남았다가
쌍쌍이 그 앞에 가서
화촉을 올리고


... 그렇지 거기는 박달나무가 서 있어야죠 ...

 

그 박달나무 아래서 뜨겁게들 사랑하는 꿈
그리고는 동해바다에서 치솟는 용이
품에 와서 안기는 태몽을 얻어 딸을 낳고


아침햇살을 타고 날아오르는
황금빛 수리에 덮치는 꿈을 꾸고 아들을 낳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그도 아니면
이런 꿈은 어떻겠소?

 

그 무덤 앞에서 샘이 솟아
서해바다로 서해바다로 흐르면서
휴전선의 원시림이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만주로 펼쳐지고
한려수도를 건너 뛰어 제주도까지 뻗는 꿈


그리고 우리 모두
산과 들을 뛰노는 짐승이 되고
신나게 하늘을 나는 새들이 되고


펄떡펄떡 뛰며 날쎄게 헤엄치며
강물과 바다를 누비는 물고기가 되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님 비나이다
밝고 싱싱한 꿈 한자리
멋지고 아름다운 꿈 한자리
평화롭고 자유로운 꿈 한자리
부디부디 점지해 주사이다"

 

(늦봄 문익환 "꿈을 비는 마음" 전문)

 


이 글을 쓰면서 문익환 목사님은 물론이거니와
이 시를 전국 방방곡곡에서 미국에서 유럽에서
열정적으로 낭송하고 다니시던 성내운 교수님 생전의 모습이
함께 겹쳐져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고 아른거린다.

 

나는 한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열심히 일했다.

 원고를 청탁하고 재촉하면서 편집과 교정 보는 일로 밤을 지새웠다.

 

좌담회를 기획, 구성하고 녹음된 원고를 푸는 일로
혜숙이와 후배들의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기독교 단체와 사회 단체에서 집회가 있으면 서울이든 부산이든 광주든
반품되어 창고에 쌓인 지난호를 메고 나가 팔면서 정기 구독을 권면했다.

 

월간지를 펴내면서

원고를 청탁하고 채근하고 마감해서
인쇄소에 넘기는 과정은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일'이다. 

 

글을 쓰는 '일' 자체가 거의 모든 분들에게 
신경을 긴장시키고 영혼을 몰입시키는 상태에서라야
생겨나는 창조물일 터인데

 
그런 과정을 시간에 쫓기고 다투어서
부탁하고 채근하고 재촉하는 '일' 이야말로
어찌 피를 말리지 않고 해낼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원고료도 변변치 않거나
아예 맨입으로인 처지에......

 

<씨알의 소리> 편집일을 맡아 하는 동안 나는
피말리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나름대로 '노하우'를 터득하게 되었고
이 '노하우'는 그후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에게 소중한 기반이 되고 무형의 자산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해서 유별나게 기발하거나
희세지재(稀世之才)한 것도 아니다.

 

굳이 비장해서 혼자만 감추어 두어야 할 일도 아니고
세상에 드러내서 자랑삼을 꺼리도 아니다. 
결국 아무것도 아닐 '노하우'를 털어 놓자면 이렇다.

 

'상대방의 피를 말려라!  필자의 피를 말려라!'
'필자의 신경을 긴장시키고, 영혼을 몰입시켜라!'
'자신은 절대로 피마르지 말고 염체불구해서
필자의 신경과 영혼을 잔인하게 조정하고 통제하라!'

 

원고를 받아 들고서부터는 긴장이 풀어지고
다음으로 계속 이어지게 될 초긴장을 가다듬기 위해서
차라리 안식하는 과정이다.

 

교정 교열을 마치고 모든 원고가 인쇄소로 넘어가면
마치 만삭이 되어 입원한 아내를 산모실 문밖에서 기다리는
남편의 심정과 다를 바 없다.

 

이 때에 이르르면 '괜찮으냐?'는 염려와 걱정에서부터
'나오게 되느냐?'... '언제 나오느냐?'... 는
기다림과 초조가 <씨알의 소리> 주변을 맴돈다.

 

그러다가 지친 분들이 제본소로 달려 나와
막 태어나는 <씨알의 소리>를
담고 싸고 묶고 운반하고 발송하는 일을
감격에 겨워 함께 해 낸다.

 

쉴새없이 매일매일을 긴장 가운데 생활하던 나는
이 일로 해서 우리나라 문단과
학계 법조계 언론계 종교계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전문적이고 양식 있는 지성인들과
두루 교류하고 친분을 나누게 되었다.

 

그때까지 이미 40여 년을 하루 1식으로 마감하며 지내온
함석헌 선생의 몸에 익은 습관 일상의 생활과 삶의 모습, 셈의 기준 등등
모든 것과 만날 수가 있었다.

 

함석헌 선생님을 모시고 함께 생활하면서 나는 그 맑은 정신과 인간성,
체질과 버릇까지 닮으려고 애썼다. 

 

"오늘이 내가 난 지 2만 8천 번째 되는 날이야...
사람이 세상에 나서 천 날이 되는게...
1년을 생일로 셈하면 예순 번도 되고 여든 번도 되지만 ......
만 날은 평생에 두 번이나 세 번밖에 안 오는 거고,
천 날이라야 이 삼십 번 정도 오는 거니까
일 년을 생일로 셈하는 것보다 의미가 있다면 있는 거지......"

 

함 선생님은 하루를 기준으로 삶을 셈한다.
함 선생님의 책상머리에 놓여 있는 탁상일기에는
날짜와 요일을 인쇄해 놓은 헤드라인 빈 공간에 매일매일
... 27,998   27,999   28,000   28,001... 이렇게 적혀 있다.

 

이 탁상일기는 함 선생님의 소중한 유물로 남아 있다.

 하루하루의 삶을 그 날의 몫으로 온전히 치루려는 마음의 자세일 것이다.

 

선생님은 경험도 없고 미숙하기 짝이없어 온통 잘못투성이 뿐인 나의 일하는 꼬락서니에
이렇게 하라거나 저렇게 해야 된다거나 하던 적이 없었다.

 두고두고 보면서 오죽 답답해 견디다 못 했던지 

    

"내가 일본에서 돌아와 아는 이들과 <성서조선>을 만들 때였어...
송 아무개란 사람이 어떻게나 꼼꼼하던지......
종이 비우는 게 아까우니까.....
원고지에 글자를 하나하나 다 세어가지고...
제목에서부터 끝나는 "...다." 자까지를 다 헤아려가지고는
빈 데가 없도록 꼭 채워서 편집을 했드랬지...
그 사람 참 꼼꼼한 사람이었어...
종이가 귀할 때였으니까 그랬을 테고......"

 

하시며 넉넉하게 접어 주던 것이 고작이었다.


반품되어 창고 속에 쌓여 있던 월간 <씨알의 소리> 지난 호(號)를 집회나 모임이 있을 때
정기 구독자를 모집하면서 팔거나 나누어 준 것이 긴급조치 9호 위반이라고 하여
나와 여직원이 1 주일 여 동안 수사 기관에 불법 연행되어 조사받았던 적이 있다.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방침'이라 하여 정해지기로
독자에게 주거나 파는 것뿐만 아니라 창고에 쌓아 두는 것도
긴급조치 9호에 어긋나는 일이라면서 지난호를 모두 가져다가
수사 기관에서 잘 보관해 주겠다는 거다.

 

"왜들 이러는 게야!......
손 팔 다 잘라 놓고 깍을대로 다 깍아 병신 만들어 놓고...
그것도 모자라 어떻하겠다는 게야!...
안 돼! 안 돼! 날 죽이고 가져가라!...
이 늙은 거를 죽이고 가져가!...
내 눈에 흙이 들기 전에는 못 가져 간다!...
차라리 내가 다 불태워 없애 버리지...
내 손으로 차라리 내가......"

 

함 선생님은 성냥을 꺼내 들고
<씨알의 소리>가 처박힌 채 소리없이 쌓여 있는 창고로 달려 들었다.

 

나는 선생님의 눈을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붉게 젖어 물든 눈시울은
어렸을 적 보았던 새끼 잃은 어미소의 것이었고
서린 핏발은 어렸을 적 듣던
호랑이 이야기 속에 담겨진 모습이었다.

 

온 몸을 치떨던 분노의 눈길은
듣던 적대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진하디 진한 광경을
나는 영원히 새겨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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