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 / 24. 마지막 축제



그때만 하더라도 여학생이 학생운동에
직접 행동으로 참여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혜숙은 이화여대 학생운동을 대표해서
수배와 체포를 여러 차례 반복했고
그때마다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가족들도 피해가 컸다.
혜숙이 연행되었을 때
한번은 아버지까지 연행하여 바로 옆방에 가두고
아버지 귀에 들리도록 혜숙에게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강압적으로 취조한 일도 있었다.

 

그러면서 공포감을 갖게 하고
고함과 비명 소리가 아버지 귀에 들리도록 했다.

 

이는 당시 수사 기관에서 특별히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주 사용했던 수법이기도 했다.

 

심한 경우 혜숙이 직접 당한 일은 아니지만
아버지 앞에서 남자 수사 기관들이 여학생의 옷을 발가벗기고
고문을 가하는 일도 있었단다.

 

혜숙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취조받을 때
중앙정보부 직원이 이화여대 부속병원 인턴으로 근무하던
언니에게 찾아가 동생을 잘 봐주고 면회도 시켜주겠다며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농락하려다가
언니가 눈치를 채고 도망친 일도 있다.

 

이런 일을 당한 언니는
이처럼 야만적인 권력이 판을 치는 나라에서
도저히 살 수 없다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뒤
돌아오지 않고 머물러 살고 있다.

 

또 한번은 수사 기관에서 혜숙을 잡으러 오자
혜숙은 급한 나머지 장롱 속에 몸을 숨기며

 "나 또다시 거기 들어가기 싫어!"라고 울부짖더라는 것이다.

 

이 소리를 들은 오빠와 어머니는
두고두고 기억하며 가슴 아파했다.

 

민청학련 사건 때 이화여대 김옥길 총장에게는
제자인 박혜숙과 친동생인 김동길 교수가
함께 구속되는 일이 벌어졌다.

 

통이 크고 정치력이 뛰어난 당대의 여걸 김옥길 총장은
서슬퍼렇고 살기등등하던 그 시절
혜숙이 수사받고 있던 남산 중앙정보부 정문 앞에
매일 아침 출근하기 전에 30 분 동안을 버티고 서서
"내 제자 내 놔라" 하듯 시위를 벌였다.

 

김옥길 총장과 김동길 교수는 모두 독신으로
평생을 한집에서 함께 살아온 남매여서
남달리 정이 돈독하고 의 좋은 사이였다.

 

따라서 오누이 김옥길 총장은
동생 김동길 교수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 누구보다 남달랐겠지만
혈육붙이 동생보다도 오로지 제자를 먼저 챙겼다.

 

서슬퍼런 중앙정보부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못말리던 시위 덕분에 혜숙은 100 여 일 만에 석방되었다.

 

당시 김옥길 총장이 보였던
제자에 대한 애정과 책임, 용기있고 배짱좋은 행동은
대학 사회에 감동적인 일화로 회자되면서
다른 대학들에게 귀감이 되기도 했다.


▲ 안양교도소에서 석방되는 김동길 교수를 누이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이 맞이하고 있다.


1년 후에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학생들 모두가
제적되어 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지만
혜숙은 김옥길 총장의 막무가내한 배짱과
각별한 배려로 복학하여 이제 졸업반이 되었다.

 

1977년 5월 30일 나는 두 번째 감옥에서
만기 징역을 살고 석방되었다.

 

석방되던 날,
혜숙은 내게 부탁할 말이 있다면서 주저주저하더니
6년 만에 졸업하게 되는 대학 생활에서
마지막으로 맞이하게 되는 이화여대 5 월 축제에
함께 가 줄 수 없겠느냐는 거다.

 

학생운동의 입장에서는 그 엄혹한 시절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서 고민하고 행동해야 할 대학생들이
한가롭게 들떠서 화려한 축제를 벌이는 일이라든지
여학생을 상품으로 내세우는 5월의 여왕(메이퀸) 선발대회 따위의 행사를 벌이는 일 등을
일정하게 비판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학생의 몸으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순탄치 않은 대학 생활을 보내게 된 혜숙이
학창 생활에서 마지막 추억으로 남게 될 축제에
나와 함께 동참하면서 마무리짓고 싶어하는 심경을 나무라거나 외면할 수 없었다.

 

마침 출소 다음 날이 축제의 절정을 이루는 마지막 행사가 있는 날이어서
나는 감옥 여독도 풀 새 없어 퉁퉁 부은 몸통에 째질듯 들어맞지 않는 양복을 억지로 걸치고
혜숙을 위해서 보답이라도 하듯 엉거주춤 따라 나섰다.

 

혜숙의 안내로 김옥길 총장께 인사드리러 갔다.
김옥길 총장은 나에게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면서
건강 상태를 묻는 등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주시더니 혜숙을 향해서


 ▲ 김옥길 총장


"혜숙아! 너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이렇게 '극소수 불순분자'로 낙인찍힌 사람하고 계속 어울려 다니는 거니?"

 

하시며 한눈팔지 말고 졸업이나 잘 하라면서
배짱좋은 웃음으로 뼈 있는 농을 주신다.

 

그날, 이화여대 교수님들을 만나서 방금 석방되었다며 나를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후배들과 어울리면서 티없이 즐거워했던 혜숙의 모습을 나는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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