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 / 28. 10.26과 비상계엄령



나는 그 당시 유신 독재 권력을 무너트리려면
지금까지보다도 더욱 굳은 각오로
더욱 치열하게 싸워 나가야 하고 그러니만큼
더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불어서 독재 권력과의 싸움을
장기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갈
훈련과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으로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내가 후배들에게 강조한 길은 두 가지였다.

 

독재 권력과 치열하게 싸워 구속되는 길이 우선이요
또 하나는 청년 학생이나 지식인들의 힘만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으니만큼 노동 현장으로 들어가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장기적으로
투쟁 역량을 키워 내는 길이다.

 

이를테면 한편으로는 대중들의 공감과 동의를 이끌어 내는
공개 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비공개 조직을 확대하고 심화시키면서
장기적으로 투쟁 역량을 쌓아 가는 일을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후배들에게 유신 체제를 무너트리기 위해서는
지금의 상황에서 치열하게 싸우다 감옥에 가든지 아니면
노동 현장으로 들어 가는 길이 최선이라고 강조해마지 않았다.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을 때 나는 묘하게도
군대에서 제대하고 연세대에 복학하자마자
살벌한 '10월 유신'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정국이 숨막히는 공포로 주눅들던 7년 전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까지 견디어 온 세월보다
훨씬 더 혹독한 탄압과 시련이
아직 신혼 살림의 꿈에 젖어 사는 우리 가정에
곧바로 불어닥칠 것같은 예감이 들었다.
 
정국은 어수선했고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거대한 어둠의 세력이
박 정권 이래로 구축해 놓은 제단을 싹 쓸어버리고
우리 아니면 누군가를 살육해서 희생 제물로 삼을 것만 같았다.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고
누군가가 받아 마실 수 밖에 없을 운명일 것 같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어두움의 세력이 쳐놓은 장막으로
당당하게 뛰어들 수 있는 양심적 세력이 필요할 것 같았다.

 

몸서리치는 공포와 탄압에 굴하지 않고
능히 저항할 수 있는 결단을 모으고 힘을 합하여 일어서는 일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때까지 10여 년 동안 나는 이 땅의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합리적 이성으로 비판하고 당당한 양심으로 저항하는 일을 업으로 삼다시피 해 왔다.

 

그렇게 젊음을 단련해 오고 그런 이들과 교류하고 행동해 왔다.
그런 일로만 관계를 삼고 생활해 왔다.

 

나는 빠져 나갈 구멍도 없으려니와
빠져 나갈 수도 없고 빠져 나가서도 안 된다고 다짐했다.

 

거대한 어둠의 세력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한발한발 서서히 다가 오고 있는 듯했다.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만큼 시시각각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그 때 나는 앞으로 세상이 뒤바뀌게 되는 과정에서
엄청난 혼란과 탄압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겠구나 여겨졌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감옥을 가게 되겠구나 하는 느낌이 순간적으로 다가 왔고
요시찰로 분류되어 항상 감시를 받고 있던 나로서는
피할려고 해도 피할 수 없을 거라고 여겨졌다.

 

당시 공개 투쟁을 담당했던 민주청년협의회(민청협)에서는
박 대통령의 국장을 반대해야 하고 치루지 못하도록 싸워야 한다고 적극 주장했다.

 

또한 당장에 유신헌법 철폐 운동을 전개해 나가면서
후임 대통령의 선출도 유신헌법에 따른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헌법을 개정하고 개정된 민주헌법에 따라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서 집회를 개최하고 모든 역량을 결집해서
적극적으로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는 민청협의 주장이 원칙적으로 옳은 말이겠지만
지금은 싸워야 할 때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 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혼돈의 상황에서
박정희보다도 더 악독한 세력이 등장할는지도 모르는 판국에
섣부른 행동은 어둠의 세력에게 탄압의 빌미가 될 수 있으니만큼
적이 구체적으로 드러날 때까지 좀 기다려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청협을 이끌던 조성우는 하루빨리 유신헌법을 철폐시키고

민주정권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윤보선 전 대통령도 같은 입장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결혼식을 가장한 대중 집회를 계획하고 있었다.
나는 이 계획에 대해서 방법적으로 정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전술적으로 무모한 모험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민청협 측에서는 내게 아무래도 함 선생이 주례자 역할을 맡아주셔야 하겠는데
어떻게해서든지 허락을 받아서 국민대회가 열리는 날에 꼭 모시고 나와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반대하지만
함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동의하시면 모시고 나오겠다고 약속했다.

 

10.26 사건이 났을 때 함 선생님은
스위스와 독일을 거쳐 카나다와 미국을 순방 중이셨다.

 

나라 안팎을 뒤흔드는 10. 26 사건 소식을 접하자
함 선생님은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했다.
나는 함 선생님을 찾아 뵙고 저간의 일들을 말씀드렸다.

 

"그렇지 않아도 안병무 박사가 해위(윤보선) 선생 댁에 들렀다가
여기에 왔다 갔는데 다들 해야 한다고 그러더라는군...
어떻게 해야 좋겠는지..."

 

"글쎄요... 도무지 앞날을 예측할 수 없으니...
제 생각에는 무슨 조짐이 먼저 보일 때까지
관망해 보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그래도 지금 시점에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들 그러는데..."

 

"그럼 국민대회 대회장인 주례 역할을 허락하시지요.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다들 그래야 한다고들 하니......"

 

나는 민청협에 함석헌 선생이 대회장인 주례를 허락하셨으니
그리 알고 계획대로 진행하라고 알렸다.

 

거사일인 11월 24일 내가 함 선생님을 모시러 갔을 때
선생님은 노기를 잔뜩 띈 표정이셨다

.

"아니... 주변에서 들려오는 얘기로 오늘 행사가
결혼식이 사실로 있는 게 아니고 가장해서 하는 거라면서?"

 

"예......"

 

"그러면 안 돼!... 그렇게 속임수를 쓰면 안 돼!...
나라를 위해서 한다는 사람들이 어찌 그리 할 수 있어!...
지금이라도 당장 중지하라고 그래!...
어찌 행사를 거짓으로 가장해서 치루는 일로
백성들을 따라오라 할 수 있겠어?... 그러면 못 써!...
씨알들이 지켜 보고 있는데 그렇게 하면 안 돼!...
바른 방법을 찾아야지!... 얼른 그만두라고 그래!..."

 

함 선생님은 거의 노발대발이셨다.

 

"지금으로는 어쩔 수 없습니다...
국민대회 대회장이 선생님 명의로 인쇄된 선언문도 이미 다 나왔을테고요...
사람들도 각계각층에서 꽤 많이 모이도록 되어 있나본데...
모든 준비도 다 끝났고 이제 진행만 남아 있는 상황에서 시간도 점점 다가 오고요...
이제 와서 그만둔다는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나는 차마 함 선생님을 바라뵙지 못하고
방바닥만 내려다 보면서 더듬거리며 말했다.

 

"허...참...... 이거 원......
이를 어쩐다...... 내 원 참......"

 

함 선생님은 도무지 난감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셨다.

 

"여기까지 온 마당에서야
선생님께서 싸 안고 가셔야 하지 않을까요?"

 

함 선생님은 한참을 그러시더니
기왕에 갈 꺼면 빨리 일어나자 하신다.
나는 함 선생님을 모시고 명동 YWCA 회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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