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는 2000년대를 맞아 한 개인의 부하(負荷)로만 환원되기 어려운 역사의 책무를 감내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새 천년이 열리고 최초로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열전과 냉전으로 반세기 이상 대치ㆍ대결해온 남북이 정상회담을 통해 6ㆍ15선언을 채택하는 등 화해협력의 물꼬가 트였다.
하지만 국내 정치는 여전히 원초적인 대결과 갈등이 끊이지 않고, 수구정치세력과 정치권력화된 수구신문은 진보개혁진영을 적대시하였다. 그런가하면 IMF극복과정에서 더욱 강화된 신자유주의 구조는 빈부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키고, 노동자들은 실업과 극심한 생활고에 내몰렸다. 개혁세력이라는 집권 민주당은 여전히 20세기적 파당과 패권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김근태의 대선경선 준비는 오래 전부터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변형윤ㆍ고은 등 재야 인사와 당내에서는 이재정ㆍ장영달ㆍ임종석ㆍ이창복ㆍ김태홍ㆍ신기남 의원 등 쇄신파 의원 10여 명이 도왔다.
그는 우선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현장에서 살피기 위해 1999년 4월 14일부터 10일간 일정으로 미국을 방문하였다. 과거 여느 대권 주자들처럼 미국 조야에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세계 각국 정부지도자회의’ 한국대표로 초청된 것이다.
당시 김근태는 국민회의 전자정부구현정책기획단 위원장을 맡고 있어서, 방미 중 시애틀에서 ‘컴퓨터 황제’ 빌 게이츠와 점심을 함께하면서 전자정부구현을 통한 국가경쟁력 강화방안 등에 의견을 나누었다. 뉴욕의 ‘코리아 소사이어티’에서 “동북아 정세와 남북관계”를 주제로 강연하고, 워싱턴에서는 한반도 핵대사를 지낸 로버트 갈루치 조지 워싱턴대 교수와 만나 ‘21세기 한반도문제’를 논의하였다.
김근태의 체미 기간 활동은 과거 어느 정치인보다 활발했다. 그의 위상에 따른 결과였다. <뉴욕타임스>와 인터뷰하고, 특히 국민회의와 소원한 편인 미국 공화당쪽 인사들과도 폭넓게 만났다.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엘 고어 부통령의 핵심 측근인 앤드루 쿠오모 주택개발부장관 등과도 만나 양국의 현안을 심도 있게 나누었다. LA에서는 UCLA와 USC에서 강의하고 코리아 엑스포 개막식에 참가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김근태는 2001년 1월에 다시 미국을 방문했다. 이번에는 아들 부시 대통령 취임식에 정부 대표자격으로 참석하기 위해 1월 17일부터 10박 11일간 방미하게 되었다. 다른 대선 주자들이 자신의 후원회 참석 등에 비중을 둔데 비해 그는 워싱턴 에틀란틱 카운슬과 존스 홉킨스 대학, 뉴욕대학 등에서 남북관계와 동북아의 안보문제에 대해 강연하고, 제임스 릴리 전 주한미국대사, 공화당 행정부 출신 데이비드 드눈 교수, 컬럼비아 대학 레온 시걸박사 등을 차례로 만나 한국의 대북 정책방향 등을 설명했다.
또 데이비드 웅거 <뉴욕타임즈> 논설위원, 칼럼니스트인 플레리트 교수와 만나 미국 언론이 대북포용 정책을 지지하도록 촉구했다. 미주에서는 1997년에 변호사ㆍ종교인ㆍ미디어 전문가ㆍ컴퓨터 프로그래머 등 전문직 종사자들이 중심이 되어 김근태후원회가 구성되었다. 미국 방문길에서 김근태는 모든 일정을 영사관의 도움을 받지 않고 후원회의 지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후원회 간부들은 민주ㆍ공화 양당의 뉴저지주 지사 후보가 앞다투어 김근태를 면담하고자 하는 모습에서 뿌듯한 감동을 받게 되었다. 이후 미주지부 후원회는 한반도재단의 미주지부로 확대 개편되었다.
아래에 실린 사진들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강남 압구정에 위치한 갤러리 '눈(NOON)'에서 개최한 전시회의 사진들로써 정해창 선생님의 1930년대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경사진 입니다. 당시 유리원판에 담긴 영상들을 구본창 선생님의 프린트 재현으로 볼 수 있었는데.... 몇 점 안되는 작품이었지만 우리나라 사진史에 아주 희귀한 회고전으로 기록 되고 있습니다.. 사라진 우리의 잔잔한 모습이어서 더욱 그러하고...
이 사진들의 시대적 배경은 1800년대 후반으로 짐작되는데 한국적인 토속미가 철철 흐릅니다. 그리고 일제시대 때보다 한층 여유로운 조선시대 생활상을 엿볼수 있습니다. 원작자가 별다른 설명을 해두지 않아 각각의 사진이 어느 지역 어떤 모습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시대 생활상을 사진을 통해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유재 정해창은 우리나라 최초의 풍경사진전(총 4회)을 개최한 분 입니다. 이화여대 동양미술사 교수역임과 사진예술 강의도 했다는데... 이러한 사진전을 통해 옛 시절로의 회귀하는것 또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1929년 3월 28일자 조선일보는 최초의 사진 전람회인 정해창 예술사진전람회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다년간 사진술을 연구하여 영리를 떠나서 예술사진을 제작하는 정해창씨는 그동안 박힌 자신닜는 사진 오십여점을 가지고 리제창씨외 여러 우인들의 후원으로 작품 전람회를 오는 29 일부터 시내 광화문 빌딩에서 개최한다는데 조선사람으로 예술사진 전람회를 열기는 이번이 처음이요, 작품중에는 훌륭한 풍경화가 많다더라는 기사가 실려있다.'
한국사단의 지보(至寶)
정해창은 학처럼 단아하고 기품있게 생을 살다간 인물이다. 세상의 엄청난 지각변동속에서도 한없이 자아를 성찰하고, 내면세계를 다지면서 초연한 삶을 살았었다. 우리나라가 온통 외래문화의 홍수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그는 사진을 통해서 진정 우리의 체질에 맞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실험하고 표현하려고 노력했었다. 그가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겨놓은 얼마간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머리를 통해 단순한 감각으로 터져나오는 웃음이 아닌 가슴 깊숙한곳에서 우러나오는 잔잔한 미소가 입가에 머금어진다. 그리고 어느새 가슴벅찬 감동이 밀려와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그의 사진은 인위적임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자연스럽고 친숙하게 느껴진다. 아무리 위대한 사진가로 평가받는 경우라도 외국작가들의 사진에서는 어딘지 낯설고 어색함이 느껴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아마도 우리의 감수성이나 미적감각이 그네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정해창의 사진은 현대사진에서 보여지는 형식과 색채의 현란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해려 더 강한 미적충격을 전해준다. 그가 사진의 대상으로 삼았던 인물, 풍경, 오브제 등이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었던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대상을 사진으로 전환시키는데 있어 그가 사용한 모든 방법들과 시작(보는 방법)이 매우 독특한것이었고 또 한장 한장의 사진에 웅축되어 나타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평범한 이웃집 아낙네 오브제의 배치를 통한 상상력의 구현이라는 동떨어진 세계를 오가면서 그가 만든 사진들은 한국적인 미의 표현이 단순한 소재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진가의 미에 대한 의식과 이를 현실화시키는 능력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예술사진 또는 예술로서의 사진이 다른 사회적 기능들과 더불어 사진의 한 분야로 존재했고 그것이 긍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정해창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그 가능성을 실현한 사진가로 손꼽힐 수 있다. 그 까닭은 예술에 대한 판단기준이나 사회적 요구가 시대상황에 따라서 변화한다 할 지라도 보다 근본적인 미적 충동과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 갖는 가치의 영속성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만큼 그의 사진은 사라져버린 전통 미의식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깊은 호소력을 발휘한다. 이런 이유로 정해창은 확실히 한국사진계의 보물로 여겨질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1966년에 나온 한 잡지의 글을 빌면 '사진가이며 사진이론가인 유재 정해창씨는 한국사단의 지보(至寶)'였다.
특이한 지적배경을 가진 사진가
정해창은 한국의 사진가로서는 보기드문 지적 배경과 수준을 가진 사람이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합방되기 직전인 1907년 3월 서울 종로4가에서 출생한 정해창은 자를 하연(何涎), 호를 유재(悠哉)라 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다른 사람보다 비교적 양질의 교육을 받을 기회가 많았다. 1922년 서울에서 보성중학을 수료하고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외국어대학에서 독일어를 전공하고 졸업했다. 일본유학시절 어학을 공부하면서도 미술과 사진 등 시작예술에 많은 관심을 표명했던 그는 동경의 전단화회(川端畵會)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기도 했으며 동경예술사진학교 연구실에서 사진학을 연구하면서 사진을 시작했다. 사진의 추기시대, 기술적인 문제의 해결이 사진의 질을 결정하기도 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인화지 제조기술이나 특수인화법 등 화학에 관련된 사진의 문제를 연구했다는 자체만으로도 정해창이 사진가로서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일본에서 공부를 마친 후 정해창은 동양철학과 고고학을 연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후일 그가 대학에서 동양미술사 교수로 재직했고, 동양 미술과 고고학의 권위자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지적 배경 때문에 가능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독일어와 동양학을 연구하는 사이에 사진술을 습득한 것은 순전히 독학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가 남긴 사진을 살펴보면 그가 공부했던 동양미술의 영향을 깊히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다시 돌아온 정해창은 종로의 본가에 근거를 두고 사진창작에 몰두하게 된다. 그가 본격적인 사진작업을 시작할 무렵 우리나라에서는 상업성에 목적을 둔초기의 영업사진시대가 지나고 순수한 표현방법으로서의 예술사진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정해창이 자신의 전공과 별 관계가 없어보디는 사진작업에 매달린 것은 당시의 이러한 부누이기도 크게 작용했으리라도 믿어진다. 1929년 3월 정해창은 광화문에 있는 광화문빌딩2층에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개인사진전람회를 개최했다. 당시 기록을 보면 관객들의 호응도가 상당히 높았고 언론들의 반응 또한 꽤 컸던 것같다. 그 이후로 정해창은 대구, 광주, 진주 등을 도는 지방순회전시를 비롯해서 1939년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열린 전람회에 이르기가지 4회의 개인 전람회를 열었으며, 초창기 우리나라 사진예술을 주도해 나갔다. 특히 그는 당시에 크게 유행했고, 사진가라면 누구나 참가했던 공모전 또는 콘테스트 등에 한번도 사진을 출품한일이 없었을 만큼 자신의 사진에 자신 감을 가지고 독자적인 길을 걸었으나 4번째 전람회를 끝으로 사진작업을 그 만두었다. 그는 말하기를"사진은 회화일 수 없었고 기계나 재료를 시험 검토해야하며 게다가 매일 촬영을 다녀야 함이 너무 바쁘고 벅차서 충분한 예술적 구상을 가질 시간이 없음을 느꼈기 때문에" 중지했다고 한다. 사진작업에 전 시간을 바칠수 없는 개인적인 상황이 그늘 짓눌렀을 것이다. 정해창의 사진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생각해 보면 그런 상황에서 가식적으 로 사진을 계속하고 허명을 남기는 것을 자신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 으로 보인다. 여기에 더해 정해창의 네번째 전람회가 끝난 직후인 1940년 대부터는 일본의 대동아 전쟁이 시작되어 사진재료가 거의 고갈 되었다는 사실도 그가 사진작업을 중지한 이유의 하나로 유추해 볼 수 있다. 해방이 되면서 그는 대학에서 동양미술학을 강의하게 되었다. 처음에 이화여자대학에서 미술사를 강의 했고(이때 그 학교에서 사진예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교양으로 사진예술을 강의했다고 한다.)6.25전쟁 후 덕성여대로 자리를 옮겨 동양미술사를 담당했었다. 1960년 우연히 다리를 다쳐 집안에 칩거하게 된 그는 이때부터 한국의 전통문화재(불상, 불화, 석등, 석탑, 사찰 등)에 관한 연구에 전념했다. 이때 그가 집필한 대표적인 책으로는 '한국 석비의 양식'이 있다. 이처럼 정해창은 사진작업을 통해서나 학문을 통해서나 꾸준히 한국적인 미를 탐구했다. 그는 사진외에도 서예나 조각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어서 1941년과 51년 두차례에 걸쳐 서예 개인전람회를 열었으며,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사인(私印)도 조각했다고 한다. 이처럼 학자적 기질과 다재다능한 예술가로서의 능력을 가졌던 정해창은 한국사진의 큰 흔적을 남기고 1968년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만든 대부분의 사진은 전쟁과 화재를 거치면서 사라졌지만 현재 약 200여장의 유리원판이 남아서 우리에게 그의 사진계를 전해주고 있다.
잊혀진 미의식의 원형
정해창의 사진은 한마디로 '소박하고 평온한 한국미의 형상화'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는 사진을 통해 자신의 미적감수성을 시각화했으며, 그 미적 감수성은 어느 외래 문화에도 때묻지 않은 순수한 우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문화에서 거의 사라져버린 순수한 한국미의 원형이 그의 사진계를 이루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세계각국의 예술작품을 보면 문화적 전통과 가치가 풍부한 나라일수록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가 배어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의 경우도 그것이 만들어지기는 똑같지만 대상과 세계를 바라보고 소화하는 사진가들의 의식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많은 차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앗제의 사진은 파리를 주로 찍어서가 아니라 그가 파리를 보고 표현하는 방식이 지극히 프랑스 사람다운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생명 력을 유지하고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일본의 현대사진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된 이유도 그들의 사진이 독특한 일본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사진기 뒤에는 항상 사진가가 서 있으며, 사진가의 의식은 자신의 환경과 역사적 경과를 통해 규정되고, 그 의식이 바로 사진으로 귀결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명제이다. 우리가 정해창의 사진을 평가할 때 간과해서 안될 점도 바로 이러한 사실이다. 그래서 기능에 접근하고 있는가의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기록에 따르면 정해창은 고무인화법이나 브롬오일법 등의 특수한 이미지를 인화지에 옮기려는 인상주의 사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직접 인화 제작한 당시의 사진이 소실되어 실제 그러한 사진을 제작했는가의 여부는 판별할 수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대상의 선택과 접근방식에서 그의 미의식이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지 그가 사용했던 기술적방법은 아니다. 그가 남긴 유리원판들은 현재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5"X7" 사진보다 약간 작은 가로 163mm, 세로 120mm의 크기이며, 일부는 5"X7"의 약 1/3 정도 크기밖엔 안된다. 그리고 그가 인화해서 전람회장에 걸었던 사진들은 대부분 전지나 4절 크기였고, 때로는 전지를 6장 또는 12장씩 연결해서 병풍처럼 만들기도 했다. 또 정해장이 주로 취급한 소재는 인물, 풍경, 인형등이 오브제들로 첫번째 개인전람회 때 전시한 사진들은 정물이나 인물을 찍은 것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풍경사진들이었다. 두번째 전람회는 당시 조선일보의 후원으로 진행된 지방순회전이었는데 첫회 때의 작품 10점과 인물 등을 찍은 사진 40점이 걸렸다고 한다. 또 세번째 전람회때는 정해창의 인간존재에 대한 의식세계를 엿볼 수 있는 오브제를 통한 연출사진 50점이 전시되었다. 마지막 사진전람회였던 4회전에는 주로 풍경사진과 한국여인의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한 여성인물사진들이 선보였다. 오늘날의 필름도 아닌 무겁고 감광도가 극히 낮았던 유리 원판을 갖고 작업했었고 카메라의 크기와 무게가 상당했으리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가 얼마나 열성적으로 사진에 몰두했는가를 알 수 있다. 정해창의 사진들 중 우리의 시선을 가장 강하게 붙잡아 매는 것은 평범한 여성들의 인물사진이다. 대부분 한복을 차려입고 다소곳한 모습으로 포즈를 취한 여인들의 모습은 그네, 부채, 소나무 등과 어울려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 하얀 한복에 하얀 수건을 머리에 두른 여인의 모습(사진1)은 막연하게나마 우리들의 어머니가 젊었을 때 간직했을 고귀하고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좋은 사진에서 볼수 있는 풍부한 톤을 없지만, 오히려 톤의 단조로움이 여인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며, 김소월이나 조지훈의 시에서 느낄 수 있는 한국의 서정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조지훈이 '승무'에서 그렸던 하얀고깔의 여인을 바로 이러한 모습이 아닐까 한다. 한국여성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아름다움의 원형이 살아숨쉬는 느낌은 필자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또 정해창의 사진에서 느낄 수 있는 공통점은 여인들의 시선이 카메라를 직접 응시하지 않고 사진밖의 어떤 곳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즈넉한 여인의 시선을 따라 우리의 마음은 평온한 세계로 옮겨지면서 진한 여운이 남는다. 당당하지는 않지만 움츠려들지 않고,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여인들의 모습에서는 생명력 있는 한국여인의 슬기가 발견된다. 단풍나무 아래서 안채를 바라보고 있는 여인의 뒷모습(사진3)에서 자식을 객지에 내보내고 눈물짓는 어머니의 애뜻한 정이 느껴지는 것은 비약일까. 이러한 모습들이 바로 정해창이 생각한 한국여성의 아름다움이요, 여성을 보는 방식(ways of seeing)이었다. 그가 여성을 보는 방식은 다른 사진가들과 비교 해서 볼 때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우리가 사진에서 흔히보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카메라의 렌즈에 시선을 고정한다. 서구에서 만들어진 사진은 말할것도 없고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영업사진이나 현대의 패션사진등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모델이 되는 여성들의 시선이 결국 사진을 소유한 사람(대부분 남성)의 시선을 향하는 이러한 방식은 서구의 전통에 입각한 전형적인 보는 방법이다. 그것은 물론 서양사회에서 남성에 종속된 여성의 위치와 가치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영국의 문화비평가 존 버거(john berger)가 유명한 그의 저서'보는 방법(ways of seeing)'에서 주제로 다뤘고 증명해 낸 사실이 바로 이 문제였다. 사진이 우리나라에 전래되는 과정에서 서구의 전통적인 보는 방법이 아무런 비판과 검토도 없이 영업사진의 형태로 그대로 도입되었고, 우리는 이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정해창의 사진에서 느껴지는 여성의 아름다움은 소재문제가 아니라 그의 보는 방법에서 기인한다는 것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정해창의 강한 서정성과 미의식은 일련의 풍경사진에서 잘 나타나다. 그의 풍경사진에서 사물을 관조하면서 유유자적하는 동양화가의 시선이 그대로 배어있다.
2006년 7월 10일 오전 영등포 열린우리당 당사에서 열린 상임고문단 회의에서 정대철 상임고문등이 김한길 원내대표의 발언을 듣고 있다.
김근태는 일관성이 있는 인물이다. 신념과 소신이 정해지면 외압이나 상황에 따라 표변하거나 말을 바꾼 적이 거의 없었다. 민주화운동을 할 때나 정치활동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당내 민주화와 국정 개혁을 위해서는 동교동계의 해체가 무엇보다 긴요하다고 믿었다. 다음은 <월간중앙>과의 인터뷰다. 인터뷰어 윤석진 차장은 발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낮은 목소리로 ‘은인자중’하던 민주당 김근태 최고위원이 마침내 투사의 본색을 드러냈다. 이번 당ㆍ정ㆍ청 인사를 계기로 김 최고위원은 당을 무력화시키는 동교동계의 전횡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고 말한다. 김 최고위원의 이번 투쟁 목표는 동교동계 해체, 지금까지 동교동을 향한 공격중 가장 강력한 것이다. 자칫 정치생명을 잃을지도 모를 모험적 투쟁에 김 최고위원이 먼저 깃발을 들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들어본다.(주석 23)
김근태는 “현실적으로 동교동계 해체가 가능하리라고 보느냐”는 질문에 거침없이 답변한다.
가능합니다. 내가 다소 과격하게 발언했는데, 동교동은 현재 민주당의 하나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동교동계가 민주당의 하나회라는 취지보다 동교동의 문제는 대통령께서 상황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도록 보좌해야 하는데, 그 언로를, 눈과 귀를 막고 있다는 것입니다.자기들끼리 비공식 모임과 테이블에서 의논한 것을 사후에 당ㆍ정ㆍ청에서 그런 방식으로 밀고가도록 한다는 것은 당ㆍ정ㆍ청의 책임있는 사람들 전부를 아주 깊은 소외감에 빠뜨리는 일입니다. 이번 인사도 그렇구요. 그래서 내가 그들만의 잔치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번에 중요한 위치에 배치된 사람들이 전부 동교동 사람들이라는 것이 아니라, 동교동 사람들에게 선택되지 않고는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기가 막힌 현실이죠. 그러니 동교동이 만나는 테이블과 그렇게 해서 의사가 결정되는 체계가 중단돼야죠. 사람들이 그게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구나 하는 느낌이 올 수 있어야죠. 그렇게 되지 않으면 참으로 위험한 상황으로 갈 수 있다고 봅니다. (주석 24)
김근태는 그러나 김 대통령이나 동교동계를 비판만 한 것이 아니었다. 김대중 정부가 곤경에 처했을 때는 가장 앞서 방어에 나섰다. 언론사 세무조사와 관련 족벌보수신문과 한나라당이 일체가 되어 대통령과 정부를 공격하였다. 대부분의 여당의원들이 침묵할 때 김근태는 노무현 의원과 함께 거대 언론의 횡포에 맞섰다.
국세청은 2001년 6월 29일 오전 기자회견을 통해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 6개 언론사에 대해 탈세혐의로 검찰 고발 방침을 발표했다. 이주성 조사 2국장이 동아일보사 세무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는 2001년 2월 8일부터 중앙 언론사 23곳을 골라 세무조사를 실시했다. 김영삼 정부가 거대 신문사들의 탈세 혐의 등을 잡고도 조사 결과를 공개하지 않고 덮어두었다. 이로 인해 언론계 안팎에서는 오래 전부터 권ㆍ언 유착설이 나돌았다. 국세청 조사결과, 탈루 소득액 1조 3,594억 원과 법인세 등 5,056억 원이 드러났다. 이중 절반 이상이 조ㆍ중ㆍ동에서 나왔다. 증여세와 법인세 탈세, 공금횡령 등의 혐의로 언론사 사주들이 검찰에 고발 당하고 구속되었다. 2006년 6월 대법원은 세금포탈 혐의 등으로 이들에게 징역형(집행유예)과 거액의 벌금 추징을 선고했다.
보수수구 신문들은 유신ㆍ5공을 거치면서 거대 족벌기업으로 성장하고 독재권력과 유착했다. 그리고 민주인사, 민주정권 특히 김대중 정부에는 사사건건 비난하고 헐뜯었다. 세무조사 이후에는 ‘언론탄압’을 내세우며 시시비비 아닌 비비(非非)만을 일삼았다. 여당 소속 의원들은 거대 신문들에 찍힐까봐 몸을 사리고 침묵했다. 김근태는 달랐다. 그는 검찰의 공정한 수사를 촉구하며 정치권의 간섭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2000년 12월 8일, 종로 YMCA에서 국세청 앞으로 행진하는 <언론사 세무조사 촉구대회> 참가자들.
김근태 최고위원은 3일 기자 간담회에서 엄정하고 공정한 검찰수사를 위해 정치권 발언자제를 주장했다. 김 최고위원은 검찰수사에 대해 “국세청 조사보다 갈등을 유발할 수 있고 민감한 사안이다. 엄정하고 공정성을 유지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영향력 있는 사람의 발언이 절제돼야한다”고 말했다.
김 최고위원은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 세무조사를 잘했다는 의견이 70%를 넘지만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의견도 50%가 넘는 점을 지적하며 “현재 국민들의 심리상태를 볼 때 우리사회는 국론분열의 위험성이 있다”며 검찰조사가 엄정하고 공정해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이를 통해 공정하고 신뢰할 수 있는 결과를 얻어야 “검찰도 발전하고 오늘의 상황이 국민들의 공감 위에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날 정대철 최고위원의 ‘사주 구속 신중론ㆍ국정조사 수용’ 발언에 대해 “검찰수사가 종료된 후 국정조사를 검토할 수 있지만 그전까지 정치인의 발언은 사법행정과정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쳐 공정성과 신뢰성을 해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 최고위원은 “검찰 수사 후 사주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가 최대의 고비”라며 “정치권에서 코멘트해선 안 된다. 검찰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정치권의 영향력 행사를 거듭 반대했다.
한나라당의 색깔론 공세에 대해 김 최고위원은 “한나라당 주장에 좌절감을 느낀다”며 “어떻게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과 세무조사가 논리적으로 연결되는지 의심스럽고, 설혹 연결된다고 하더라도 사실적 근거 없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김 최고위원은 “색깔론은 군사독재적 수법”이라며 “색깔론을 통해 지역 분열주의를 자극하고 그에 동조하는 국민들을 결집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퇴행적이며(야당측 주장인) ‘3김 극복’ 과도 논리적으로 모순된다”고 비판했다. (주석 25)
주석 23> <월간중앙>, 2001년 10월호, 146쪽. 24> 앞의 책, 148~149쪽. 25> <내일신문>, 2001년 7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