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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회] 노무현 당선위해 열정 쏟아: 김근태 평전/[16장] 노무현정부의 국무위원으로 국정 참여 2012/10/19 08:00 김삼웅 '당선자 확실' 보도 이후 지지자들의 환호 .. http://t.co/6nO1M82K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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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6장] 노무현정부의 국무위원으로 국정 참여

2012/10/19 08:00 김삼웅

 

 

'당선자 확실' 보도 이후 지지자들의 환호 속에 민주당사에 들어서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와 부인 권양숙씨.

 

당내 대선 후보 경선에서 사퇴한 김근태는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노무현과는 심정적으로, 정치적으로 의기투합하는 관계로 그를 적극 도왔다. 하지만 노 후보나 민주당의 사정은 여간 좋지가 않았다.

2002년 6월 13일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한 것이다.
광역 단체장 16명, 기초단체장 232명, 광역의원 682명(비례대표 73명), 기초의원 3,485명을 뽑는 선거에서 호남과 제주를 제외한 전지역에서 패배했다. 한나라당은 충남(자민련)을 제외한 11곳을 휩쓸었다. 기초 단체장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이 서울을 비롯, 수도권과 강원도에서 69개 지역을 석권한 반면 민주당은 11개 지역의 당선에 그쳤다. 광역의원선거 결과는 더욱 참담했다. 수도권과 강원에서 235석을 차지한 한나라당이 압도적인 과반의석으로 이들 4개 광역의회를 장악한 반면 민주당은 겨우 34석에 그쳐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민주당의 참패에는 정치적 배경이 있었다.
2001년부터 터지기 시작한 ‘진승현게이트’와 ‘이용호게이트’에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들이 연루되었다는 설이 보도되고, 이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되었다. 김대중은 대국민 사과 성명에 이어 5월 6일에는 민주당을 탈당하기에 이르렀다. 노태우ㆍ김영삼에 이어 세 번째로 대통령의 집권당 탈당이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에 야권은 크게 분열되었다.

선거 결과 민주당은 초상집을 방불케 했다.
지도부 인책론이 제기되고, 후보교체론이 터져 나왔다. 후보로 결정된 노무현이 6ㆍ13선거에서 영남권에서 단체장을 1명이라도 당선시키지 못하면 후보 재신임을 묻겠다고 말한 적이 있어서, 사태는 더욱 꼬여들었다. 반대 진영에서 후보 교체론을 제기하고 ‘국민통합 21’의 정몽준 쪽을 기웃거리는 의원도 적지 않았다.

노무현 후보에 대한 당내 입지가 흔들리면서 그는 당의 전폭적인 지원도 받지 못한 채 고군분투하고 있는 가운데 대선정국은 노무현ㆍ이회창ㆍ정몽준의 3자 대결구도로 압축되고 있었다. 수구족벌신문과 한나라당은 노무현 장인의 과거 행적을 두고 붉은색 칠하기의 선거전은 초반부터 흑색선전으로 전개되고, LG 등 재벌기업이 수 백억 원의 현금을 ‘차떼기트럭’으로 한나라당에 넘겨주는 등 타락상이 극에 이르렀다.

이에 반해 일반 시민들이 노무현 돕기 운동에 나서 ‘희망돼지 저금통’이 밀려들어왔다.
6월에는 경기도 동두천에서 여중생 효순ㆍ미선 양이 미군장갑차에 깔려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어린 학생들의 억울한 죽음도 문제였지만, 미군 당국의 사건 은폐와 범인들의 무죄 평결이 국민의 분노를 일으켰다. 이 무렵 노무현 후보가 한 번도 미국을 방문하지 않은 것을 두고 이회창 진영과 족벌신문들이 그를 ‘반미주의자’로 몰아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벌어졌다.

민주당 후단협 소속 의원 중 일부가 정몽준 진영으로 넘어가는 등 우여곡절 끝에 노무현과 정몽준의 후보 단일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투표 하루 전날 정몽준이 기자회견을 통해 ‘단일화 철회’를 발표하면서 대선의 투표 결과는 예상하기 어려운 국면으로 빠져들었다.

 


당선이 확정된 직 후 민주당사에서 꽃다발을 받은 노무현 당선자와 권양숙 여사.

 

노무현은 대선에서 이겼다.
개표결과 노무현이 48.91퍼센트(1,201만표)로서 46.59퍼센트(1,144만표)를 얻은 이회창을 57만여 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노무현은 서울ㆍ인천ㆍ경기ㆍ충청ㆍ호남ㆍ제주 등 10개 지역에서 이회창을 고르게 앞섰다. 영남에서도 평균 20퍼센트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하고, 특히 호남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영호남 간 지역주의 장벽을 허무는 계기를 만들었다.

김근태는 노무현의 당선을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선거를 치루는 것처럼 활동하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김근태는 누구보다도 노무현과는 정책과 지향이 비슷함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보수특권층을 대변해온 이회창의 집권이 역사의 물굽이를 역류시킬 것으로 보았기에, 노무현의 당선에 모든 역량을 쏟게 되었다.

노무현은 2003년 2월 25일 국회에서 제16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노무현시대’를 열었다.
‘참여 정부’로 이름 붙여진 노무현 정부는 개혁을 기치로 내걸었다. 하지만 초장부터 보수세력의 거센 도전에 직면했다. 전국 검사들과의 대화에서는 젊은 검사의 도발적 발언이 나오는가 하며, 청와대에 기자실을 없애는 대신 브리핑룸을 만들어 정례 브리핑을 시행하겠다는 ‘기자실 운영방안’이 발표되면서 보수언론의 극심한 비판에 시달리게 되었다. 보수세력과 보수신문은 처음부터 노무현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듯한 태도로 대통령과 참여 정부를 몰아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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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회] ‘아름다운 꼴찌’ 후보 사퇴: 김근태 평전/[15장] 대선 경선출마와 좌절의 아픔 2012/10/18 08:00 김삼웅 2002년 3월 광주경선에서 연설 차례를 기다리는.. http://t.co/HTIzQt8p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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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5장] 대선 경선출마와 좌절의 아픔

2012/10/18 08:00 김삼웅

 

2002년 3월 광주경선에서 연설 차례를 기다리는 5명의 후보들. ⓒ 오마이뉴스 이종호

민주당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후보 국민참여 경선제를 도입하여 당원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이 참여하는 가운데 후보를 뽑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김근태ㆍ김중권ㆍ노무현ㆍ유종근ㆍ이인제ㆍ정동영ㆍ한화갑(가나다순)이 후보에 나섰다. 국민참여경선은 당원과 일반국민을 같은 비율로 섞어 선거인단을 구성했다. 인터넷을 통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200만 명 중에서 무작위로 2만 명을 추출해 선거인단을 구성한 것이다.
김근태가 출사표를 던진 것은 당원은 계보와 조직에 따라 움직이더라도 참여한 시민들은 다를 것이라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은 3월 9일 제주도를 시작으로 대장정에 올랐다. 경선 직전의 대세는 이인제 후보가 선두 주자였다. 당내 최대 계보인 동교동계 주류가 그를 밀었다. 15대 대선에서 이인제의 출마로 여권이 분열되고, 이회창이 열세에 놓이면서 김대중이 승리하게 되었다는 동정심의 발로였다.

그러나 제주에서부터 이변이 터졌다. 한화갑이 이인제를 2위로 밀어내고 1위를 차지했다. 노무현이 3위였다. 이어진 3월 10일 울산 경선에서 노무현이 1위를 치고 오르고 이인제는 3위에 머물렀다. 김근태는 세 곳의 경선 투표에서 하위권에 머물렀다.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민심을 헤아렸다.

3월 12일 “아름다운 꼴찌로 기억해 달라”는 성명서와 함께 후보를 사퇴하였다.
사퇴에 앞서 노무현을 만나고, 그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노무현이 당선되어 민주정권을 이어받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노무현이 대선 후보가 된 데는 김근태 지지세력의 지원이 큰 힘이 되었다.

후보를 사퇴했는데도 후폭풍이 거세게 나타났다. 정치자금 수수의 법적책임 문제가 따른 것이다. 김근태는 자신의 ‘고백’을 정치자금 투명화의 계기로 만들고자 했지만, 현실은 사법처리 쪽으로 흘러갔다. 검찰은 불법 정치자금 수수혐의로 김근태를 기소했다.

2003년 7월 24일 서울지법 형사 5단독 유승남 판사 심리로 열린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김 의원의 주장대로 법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사실은 인정되지만 불법으로 정치자금을 수수하고 신고를 누락하는 등 실정법을 위반한 사실이 인정돼 처벌이 불가피하다”며 징역 6월에 추징금 2,000만 원을 구형했다.

최후진술에 나선 김근태는 “정치자금을 투명화해야 한다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과제며 국민적 요구가 됐다”며 “모두가 다 아는 비밀인 불투명한 정치자금을 파헤친 양심고백이 이러한 흐름에 작지만 의미 있는 계기가 됐다고 자부한다”고 밝혔다.

 


2002년 민주당 울산 경선에서 후보 연설 도중 이인제 후보가 김근태 후보(좌)와 한화갑 후보(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김근태의 진술은 이어졌다.
“지난 3월 대선 경선 과정에서 중앙선관위는 3억 원을 지출 한도로 정했는데 기탁금만 2억 5천만 원이 들었다”며 “선거인단만 7만 명, 잠재적 선거인단 숫자로는 15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단지 5,000만 원을 갖고 전국 선거를 하라는 것은 정말 코메디였다”고 강조했다. 또 “책임 있는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정치인들이 먼저 자신의 정치자금에 대해 정직하게 밝히고 국민의 이해와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어서 “위선과 동거하면서 나라의 지도자가 될 수 없고 이중성과 동행하는 한 개혁도 미래도 없다.”고 역설했다.

8월 14일 열린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벌금 500만 원과 추징금 2,000만 원이 선고됐다.
재판부는 “정치자금법이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 있지만 입법기관인 국회에서 개정하지 않고 따르고 있는 점을 볼때 위헌결정이 내려지지 않는 이상 법원에서는 개별 사안에 대해 이 법을 적용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하고 “그러나 김 의원이 이 같은 사실을 양심고백을 통해 언론에 밝히고 청렴결백한 의원으로 인정돼 왔으며 권 전 의원으로부터 함께 정치자금을 받은 정동영 민주당 의원이 기소되지 않는 점 등을 감안, 벌금형이 적당하다.”고 덧붙였다.

김근태는 의원직을 유지할 수는 있었으나 거액의 벌금형과 추징금을 내게 되었다. 김근태는 참담한 심경을 가누기 어려웠다. 한국정치의 병폐로서 정ㆍ재계의 유착, 정치부패의 근원이기도 하는 불법 정치자금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고해성사가 ‘실정법 위반’이라는 부메랑 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소속 정당에서도 ‘해당 행위’라는 질타를 받고, 심지어 대선후보 경쟁자였던 노무현도 “우스갯거리가 됐다”고 언급했다.

후일 김근태는 “내가 정치자금 문제를 처음 고백할 때만 해도 왜 도움을 준 사람을 파느냐고들 했지만, 썩은 상태로 정권교체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선 정치자금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나 자신부터 고백하고 가야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한반도재단은 정치인이 운영하는 재단법인 중에서 가장 먼저 회계 내역을 공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석 9)

김근태는 정치인의 생활이 익숙하지 않았다. 점잖음과 겸손함 그리고 양심문제는 정치인에게 잘 어울리지 않는 품목이다. 속물 정치인일수록 국가현안에는 침묵하거나 뒷걸음치고, 이념 투쟁이나 포퓰리즘, 이권에는 앞장서는 경우가 적지않다. 특히 총재ㆍ대표의 주변이나 텔레비전 카메라가 비칠 때에는 인정사정 두지 않고 다투어 앞자리를 차지한다. 꼬마민주당 부총재 시절, 한 언론이 <‘견습’ 못뗀 김근태의 고민 : 제도권 진입 2개월, 민주당 부총재직 소화 아직 역부족>이란 기사에서 김근태의 “소극적 태도는 아마도 점잖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라고 썼다.

김근태의 이같은 ‘습성’은 재선의원이 되고, 여당의 최고위원이 되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후보 경선 과정에서도 인기 발언이나 데마고기식 정책제시에는 딱 질색이었다. 한 언론이 제기한 대로 “재목은 대통령감, 인지도는 시장감”의 정치현실에서, 당내 경선의 패배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 터였다.

김근태는 ‘인간적 존엄’을 지키면서 정치를 하고자 노력했다. 이 명제는 그의 모든 가치에서 우선되었다. 민주화운동을 할 때나, 정치에 입문하면서도 변하지 않았다. 그의 심중 깊숙이에는 낭만주의가 자리하고, ‘신사와 투사’가 공존하는 리얼리스트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치적’이지 못하고, ‘비정치적인 정치인’의 위치에 머물러야 했다.

누군가 나를 보고 굉장히 리얼리스트인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낭만주의자인 것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의 숨은 뜻은 이 어려운 국면에서 힘으로 사람들을 변화시켜내고 결집시켜내라는 주문이라 생각되는데, 좌우간 근본적으로 낭만주의자라는 이야기는 칭찬으로 받아들여지고, 나를 잘 보고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낭만주의자란 소위 격정이 있고 열정이 있다는 것인데, 실제로 저는 열정이 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러나 그 열정이 쉽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절제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집안 분위기 같고, 이전부터 열정과 격정이 그대로 드러나면 실패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석 10)
 

주석
9> <경향신문>, 2012년 1월 4일.
10> 김근태, <희망과 체념사이에서>, <희망의 근거>, 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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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9회] ‘돈받았다’ 양심선언, 거센 비난 따라: 김근태 평전/[15장] 대선 경선출마와 좌절의 아픔 2012/10/17 08:00 김삼웅 대선경선에 뛰어든 김근태는 3월 3일 .. http://t.co/0cOXasTeK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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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5장] 대선 경선출마와 좌절의 아픔 2

012/10/17 08:00 김삼웅

 

 

대선경선에 뛰어든 김근태는 3월 3일 다시 기자회견을 통해 “2000년 전당대회(당 최고위원 경선) 때 권노갑 전 최고위원으로부터 2,000만 원을 받았고, 모두 2억 4,000만원을 선관위 신고에서 누락했다”고 폭탄적인 양심선언을 했다. 대선후보 경선 과정의 초입에서 폭로된 양심선언은 당내는 물론 정국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김근태는 “현재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엄청난 정치자금이 소요되고 있다. 캄캄하고, 이는 즉시 중단되야 한다”는 소신도 아울러 밝혔다.

대선후보 경선이 시작되면서 김근태는 일부 후보 진영이 보이고 있는 인력동원과 자금살포설을 우려하여 이를 시정하고자 하는 충정에서 ‘양심선언’을 택한 것이다. 당내 최대 계파의 수장이고 김대중 정부의 실세인 권노갑이 2000년 전당대회 당시 최고위원 경선에 나선 김근태를 비롯 일부 후보들에게 거액을 지원한 것이 폭로된 것이다. 정치자금 수수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오랜 당내 관행이기도 하고, 특히 전당대회를 앞두고는 성행했다.

김근태의 양심선언은 본질과는 다른 방향으로 비화되었다. 수구보수신문은 1면 머릿기사로 김근태와 권노갑의 정치자금에 공세의 초점을 맞췄다. 한나라당은 호재를 만난 듯이 날선 공격을 퍼부었다.

김근태는 사면초가의 신세로 몰렸다. 정치자금의 투명성과 깨끗한 정치풍토를 위해 자기희생으로 던진 양심선언이 정략의 빌미가 된 것이다. 진행 중인 민주당 후보 지역 경선에서도 악재로 작용했다. 자기만 깨끗한 척 당의 이미지를 실추시켰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여론조사에서 최하위권의 지지율에 맴돌자 자신의 ‘클린 이미지’를 이용, 지지도를 끌어 올려 보려는 돌출 행동이라는 악평에는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김근태는 MBC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의 고백이 권 고문의 정치자금 문제로 비화되고 있는 대목을 개탄하여 “울고 싶은 심정” 이라고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자신의 발언은 순수한 양심선언이었지, 그 어떤 정치적 노림수도 없다고 밝혔다. 김근태는 “정치자금을 투명화하자는 내 양심선언을 정쟁화하지 말라”고 한나라당을 비판하며, “정치권 관행에 따라 선배로서 후배에게 격려금을 준 것이며 기본적으로 선의로 해석한다”면서 권노갑 전 최고위원을 엄호했다.

김근태는 주류측 경선 주자들과 조ㆍ중ㆍ동 그리고 한나라당의 협공을 받는 처지로 내몰렸다. 더욱이 야당으로부터 민주당 전체가 공격받고, 국민경선 자체가 ‘돈경선ㆍ조직경선’으로 폄하되고 있어, 그 정치적 책임이 고스란히 김근태가 떠안아야 했다. 민주당 지지층으로부터 “혼자 살려고 당을 다 죽인다”는 격한 비난이 따랐다.

김근태는 한 신문과 인터뷰에서 “나 스스로 정치자금 투명화의 ‘제물’로 삼겠다”며 “검은 정치자금의 굴레를 벗지 못하면 한국정치의 미래는 암울할 뿐”이라고, 거듭 소신을 피력했다. 자신의 ‘양심선언’이 정쟁화되는 데 대해 “나 한 사람을 공격하는 것은 참겠지만, 국민경선제는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했다. (주석 6)

다음은 한 신문의 사설, 제목은 <김 고문을 바보로 만들면 안돼>다. 사설의 중간 부분이다.

우리는 김 고문의 고백을 정치 철부지의 경망스런 행동으로 몰아가려는 이런 풍조를 경계한다. 정치에 엄청난 돈이 들어가며, 그 과정에 부정의 소지가 많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비단 한국만의 현상도 아니고 선진국에나 후진국에나 널리 존재하는 문제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돈과 정치의 얽힘에 사실상 해결방안이 없는 것으로 체념하고 있다. 자신의 발등을 찍는 심정으로 고해성사를 했다는 그의 말은 정치개혁을 이루기 위한 충정에서 나온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 (주석 7)

김근태는 2월 25일 제주도 신산공원에서 열린 ‘반부패사회 정책을 위한 대국민 청결서약식’에 참석하여 가장 먼저 서약하는 등 부패정치의 청산을 위해 앞장섰으나 ‘관행’이 되다시피한 정치부패의 탁류를 정화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김근태가 양심고백을 했던 당사자 권노갑은 김근태가 타계했을 때 심경을 밝혔다.

깨끗하고 소신 있고 자기 주장에 흔들림이 없던 사람이다. 나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당할 때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김 고문은 거기서 전기고문도 받았다. 학자풍이고 양심적 정치인으로 대성하기를 바랐는데 참으로 안타깝다. 2002년 대선후보 경선 때 김 고문이 2년 전 최고위원 선거에 나와 사무실 비용으로 2,000만 원을 나에게 받아썼다고 ‘고해성사’했는데 그 당시 나온 사람들에게 이래저래 다줬다. 두 사람(김근태ㆍ정동영)것만 나타난 거다. (주석 8)


주석
6> <경향신문>, 2002년 3월 6일.
7> <한겨레신문>, 2002년 3월 5일.
8> <경향신문>, 2012년 7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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